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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영어로 쪼그라든 자존심 '새벽 신문 배달'로 극복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3) 2센트짜리 빈병으로 5불 버는 법을 터득하다

“헬로 지아이(Hello G.I.)”
 
내가 처음 배운 영어다. 6살이 되던 해인 1945년 8월, 우리 가족이 살던 곳에 일본군이 물러가고 검은색 군화와 지프를 타는 미군들이 속속 도착했다.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타고 LA국제공항에 도착한 체스터 장 박사 가족이 트랩을 내리고 있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타고 LA국제공항에 도착한 체스터 장 박사 가족이 트랩을 내리고 있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어린 내 눈에 군복을 입은 미군은 너무 멋있었다. 심지어 옷에 흙이 묻어 있는 것조차 근사해 보였다. 미군들은 한결같이 지프 발 받침대에 한 발을 걸쳐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지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프 옆에 둘러서서 자신들의 말을 따라 하는 꼬마들에게 초콜릿이나 껌, 케이크 같은 걸 나눠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휴대용 전투식량이었던 것 같다. 나도 그 꼬마들 속에 있었고 미군들이 지나갈 때마다 “헬로 지아이”를 외치고 초콜릿, 사탕 같은 걸 받아먹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아버지를 따라 영어를 하는 미국에 간다는 게 좋았다. 영어도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매일 미군들과 말도 하지 않았던가.
 
영어로 쪼그라든 자존심  

 
아버지는 ‘교육’을 굉장히 강조했다. 늘 “배워라. 배우지 않으면 세상을 모른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LA에서 살 집이 마련되자마자 아버지는 내가 다닐 학교를 알아봤다. 난 집 근처에 있는 ‘32가 USC 매그닛 스쿨’에 초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USC 캠퍼스 안에 있는 학교였는데 나를 제외한 전교생이 백인이었다. 지금은 미국에 갓 도착한 이민자 자녀가 학교에 입학하면 먼저 영어를 가르치는 수업을 들으면서 적응하도록 돕지만 당시에는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무작정 학교에 가면 온몸으로 부딪혀야 했다.  
 
담임선생은 내가 영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기대했는지 수업시간 때면 이것저것 말을 시켰지만 나는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영어는 ‘헬로 지아이’ 단 한마디뿐이었던 것이다.  
 
백인 학교 유일한 유색인종
말 못하는 열등감에 힘들어
신문배달·병 수집해 돈벌고
주말 극장 영화가 유일한 낙
 
학교에서 유색인종이라고 차별을 당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거만했다. 나는 또래들에게 뒤처진다는 열등감과 보이지는 않지만 무시당한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다. 영어를 잘해야 친구를 사귀고 미국문화를 배울 수 있는데 그럴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다. 자연히 학교생활은 힘들었다.  
 
나중에 이 학교를 찾아가 내 학교 기록을 찾아보니 선생님들은 내가 혼자 지내는 조용한 학생이라고 썼다. 당시 내 심적 어려움을 표현하는 설명이었다.  
 
난 주말이 되면 동지회가 열리던 교회에 갔다. 그곳에는 내 또래들과 한국말로 놀 수 있었다. 당시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은 미국 올림픽 영웅이 된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도 있었지만 도산 안창호씨의 큰딸 수산 안 누나, 아들인 조지와 랠프도 있었고 훗날 한인사회의 어른으로 커뮤니티의 든든한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는 민병수(변호사) 형도 있다.
 
당시 한인 중에서 갑부로 알려진 리오 송씨의 자녀 게리, 유진, 브랜다도 있다. 송씨는 북가주에 과일 농장을 갖고 있었는데 ‘바이셀리아’라는 넥타를 만든 분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비즈니스를 운영했는데 이분은 동지회를 이끌었고 광복 후엔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애쓰던 이승만 박사에게 자금을 많이 지원했다.
 
빈 병 모아 판 돈으로 영화감상  
 
난 혼자였지만 굉장히 활동적이었다. 움직임도 빨랐다. 친구가 없던 나는 학교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제퍼슨 가에 있는 USC 트로전 극장이 내 단골 영화관이었다.  
 
주말 오전 상영되는 영화 티켓 가격은 25센트였고 팝콘을 먹으려면 25센트를 추가로 내야 했다. 동생(로저스)과 같이 가려면 75센트가 필요했다. 부모님께 매번 돈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콜라병을 떠올렸다.  
 
콜라병은 학교 근처의 길거리와 공원, 극장 옆 공터에 널려 있었다. 특히 극장 옆 공터는 노다지 밭이었다. 손님들은 영화를 보면서 마신 콜라병을 그곳에 버리고 갔다. 당장 자루를 들고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자루는 금세 병으로 가득 찼다. 상점에 갖다 주자 주인은 병당 2센트를 쳐서 돈을 줬다.  
 
생각보다 75센트는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주말이 되면 밖에 나가 병을 모으러 다녔다. 콜라를 좋아했던 새미에게도 꼭 나에게 병을 달라고 했다. 착한 새미는 내 부탁에 큰 자루에 병을 모았다가 가져다 줬다.  
 
내친김에 나는 버려진 신문도 모아서 팔았다. 주말마다 모은 돈은 5달러 정도가 됐다. 금세 부자가 됐다. 동생을 데리고 보러 다닌 영화는 말이 등장하는 카우보이 영화였다. 나는 말을 엄청 좋아했는데 영화 속 주인공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악당들에게 총을 쏘고 물리치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뻥 뚫렸다.  
 
성인이 된 후에는 가끔 승마를 즐겼는데 잠시 말도 소유했을 만큼 말을 아끼고 사랑했다.
1956년 체스터 장 박사가 한국에서 소유했던 자신의 말 '엔터'를 타고 있는 모습. 장 박사는 미국에 다시 돌아오는 1957년까지 이 말을 소유했다. [체스터 장 박사]

1956년 체스터 장 박사가 한국에서 소유했던 자신의 말 '엔터'를 타고 있는 모습. 장 박사는 미국에 다시 돌아오는 1957년까지 이 말을 소유했다. [체스터 장 박사]

 
LA타임스 배달이 첫 직업  
 
영어는 못했지만 10살 때 첫 직업을 가졌을 만큼 돈을 버는 데에는 탁월했다. 병을 모아서 팔면서 돈을 벌게 되자 나는 신문 배달도 시작했다. LA타임스의 평일판과 일요판을 모두 배달하는 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는 건 고역이었지만 매주 돈을 받으면 힘든 시간은 싹 잊혔다.  
 
LA타임스 일요판은 얼마나 무거웠는지 배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자전거 앞에 신문을 싣고 거리를 달려가다가 배달하는 집 문 앞을 지나갈 때 한 손으로 신문을 집어 던져야 했는데 일요판 신문은 두껍고 무거워서 한 손으로 집어 던지기가 쉽지 않았다. 또 제대로 문 앞까지 날아가지 않고 물을 먹은 잔디밭 위에 떨어져 신문이 젖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나는 여분의 신문을 갖고 다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자전거를 멈추고 새 신문으로 교체해줬다. 무거운 신문을 싣고 언덕을 올라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나이 또래는 하지 않는 파트타임 직업을 가졌다는 점과 매일 아침 뉴스를 전달하는 신문을 배달한다는 자부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 돌아보면 영어를 못해 생긴 열등감을 책임감으로 극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부터 더는 영어를 못해 생기는 주눅감도 사라졌다.
USC 제퍼슨 스트리트에 있는 트로전 극장. 사진은 1938년도 극장 모습. [LA시어터블로그스폿닷컴 캡처]

USC 제퍼슨 스트리트에 있는 트로전 극장. 사진은 1938년도 극장 모습. [LA시어터블로그스폿닷컴 캡처]


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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