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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1973년, 지도에도 없던 우크라이나를 가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 근무
전 세계 상대 항공기 엔진 판매

체스터 장 박사가 연방항공청(FAA) 근무 시절 조종하고 다니던 FAA 소속 보잉 727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상진 기자

체스터 장 박사가 연방항공청(FAA) 근무 시절 조종하고 다니던 FAA 소속 보잉 727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상진 기자

한국 예술 알리는 '민간 외교관' 

 
LA카운티미술관(LACMA), 워싱턴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USC 한국학연구소,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공통점이 있다. 체스터 클래런스 장(한국명 장정기·83) 박사가 기증한 미술품과 도자기 등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항공업계 원로이자 한인 올드타이머인 장 박사는 ‘최초’라는 타이틀이 유독 많다.  
 
한인 최초로 연방항공청(FAA) 항공고문관으로 활동한 그는 미국 항공계의 최고 영예인 ‘라이트 형제 마스터 파일럿 명예의 전당’ 항공 안전부문에 헌액되며 주류사회에도 이름을 알렸다.  
 
또한 국방부 산하 국방대학교 재단 이사에 한인으로 처음 선임됐으며, LACMA의 첫 한인 이사로 활동한 기록도 있다.  
 
그는 지난해 증조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고미술품과 예술품 1100점을 LACMA에 기증한다고 밝혀 한인사회는 물론 주류사회도 놀라게 했다. 그가 소장한 예술품 중에는 한국의 ‘국보급’들도 꽤 많다. 얼핏 따져봐도 수천 만 달러의 가치를 가진 대규모 귀중한 소장품을 선뜻 LACMA에 기증하기로 결심한 건 그의 마지막 꿈이자 비전 때문이다.  
 
미 주류사회에 한국 예술을 알리겠다는 일념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투자해 묵묵히 숨은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장 박사를 미주중앙일보는 특별 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일곱번 째 주인공으로 초대했다.  
 
무심한 세월의 힘으로 점점 흐려지는 기억과 평생 아끼고 사랑한 예술품 속에 담긴 한국의 역사 이야기,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장 박사는 “자신이 떠난 후에도 남가주의 한인 후손들은 물론, LA를 방문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LACMA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예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쁘다”고 말한다. “지금도 매일 아침 뛰는 가슴으로 하늘을 쳐다본다”는 장 박사가 들려주는 마지막 비전과 꿈의 종착역은 한인 커뮤니티였다.  
 
체스터 장 박사는 누구
 
1939년 2월 생. 9살 때 LA에 외교관 아들로 도착. 이후 한국으로 귀환해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니다 1958년 미국으로 이민. 메릴랜드대(심리학)를 거쳐, 오클라호마대 석사(인류자원학), USC 석사(교육학), 라번대 박사(공공행정학) 학위를 취득했다. 연방항공청(FAA) 비행조종사 자격을 취득한 후 거넬항공사, 스튜워드-데이비스항공사 등을 거쳐서부태평양지역국 특수사업국장을 지냈으며, FAA 항로과정학과 교수, 캘스테이트LA 항공학 교수, 엠브리-리들항공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부인 완다장씨와 샌타모니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의사 아들 부부(카메룬·니콜)가 있다.
 

1973년, 지도에도 없던 우크라이나를 가다 

 
옛 소련 시절 단 한대만 제작된 세계 최대 항공기 ‘안토노프-225 므리야(AN-225 Mriya)’가 러시아군의 공습에 파괴됐다.

 
“뭐라고?” TV에서 나오는 뉴스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엔진이 8개가 달려있는 유일한 대형 수송기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러시아 공습에 파괴됐다니. 나는 그 수송기를 정확히 1973년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만났다.  
 
옛 소련 시절 단 한대만 제작된 세계 최대 항공기 ‘안토노프-225 므리야(AN-225 Mriya)’가 러시아군의 공습에 파괴됐다.

옛 소련 시절 단 한대만 제작된 세계 최대 항공기 ‘안토노프-225 므리야(AN-225 Mriya)’가 러시아군의 공습에 파괴됐다.

50년 전에도 ‘자유’ 외쳐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건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에 갓 입사해 항공 엔진과 항공기 판매 관련 업무를 맡았을 때였다.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는 항공기 엔진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도 공군에 자체 제작한 엔진을 단 수송기 100여대를 판매했을 정도다.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가 제작한 엔진은 강해서 모두 관심 있었다. 그런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였던 건 우크라이나가 제작한 수송기 엔진이었고 그게 바로 이번 전쟁에 파괴된 우크라이나 안토노프 항공사의 엔진 8개짜리 AN-225므리야였다. 므리야는 우크라이나 언어로 ‘꿈’이다.  
 
소련 항공기 제작사 안토노프사가 1980년대에 제작한 AN-225는 우주왕복선 수송을 위해 개발한 세계 최대 수송기다. 몸체 길이만 84, 날개폭은 88.4에 달한다. 수송할 수 있는 화물 무게는 최대 250톤. 시속 850㎞로 4000㎞를 비행할 수 있는 그야말로 하늘의 점보 수송기다.  
 
비행기가 워낙 크다 보니 운용비용이 비싸 1988년 첫 비행을 한 후 드문드문 운행됐다고 들었다. 그러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항공운송 수요가 증가하면서 운항이 늘어났었다.
 
나는 그 비행기의 엔진을 살피고 앞으로 우크라이나와의 합작 업무를 위해 안토노프 항공사를 찾아 키이우로 출장을 간 것이다.  
 
지도에 없던 우크라이나 출장  
 
그 당시 우크라이나는 세계 지도에도 없는 나라였다. 참고로 19세기까지 대다수 우크라이나 영토는 러시아 제국에 통합됐고 일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한 끝에 1917년 민족국가를 건설했지만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 합병됐다.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건 1991년 소련이 해체된 후였다. 그래서 내가 방문한 시기는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간섭을 받던 시기였다.  
 
50년 전에도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유를 원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1920~1940년대가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키이우에 가면 곳곳에 전쟁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노래와 음식을 즐기는 걸 보며 삶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전쟁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모습을 보면 그때 내가 도심에서 본 자유에 대한 열망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 정신이 50년 후에도 이어지는 걸 보니 놀라울 뿐이다. 
 
우수한 실력에 항공기술 압도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강인함 외에도 정직함이 있다. 당시 나는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산 적이 있는데 계산하다가 그만 동전을 떨어뜨린 것 같다. 그때 한 아이가 주운 동전을 가져와 돌려줬다. 물자가 귀했기에 그 아이에게는 큰돈이었을 텐데 웃으면서 돌려주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꼿꼿하고 정직한 시민 정신을 존경하게 됐다.  
 
키이우 호텔에 머물 때 겪은 또 다른 아찔한 경험도 있다. 저녁을 먹고 방에 올라가려는데 길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된 그래서 들을 수 없는 로큰롤 음악이었다. 가까이 가서 듣다가 나도 모르게 갖고 있던 코닥 카메라로 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경찰이 나타나더니 나를 끌고 갔다. 당시엔 사진을 찍으려면 경찰이나 관계자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그걸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름은 빼앗기고 몸수색까지 당했다. 이들은 내가 어디서 지내는지 묻고 방까지 따라와 짐도 다 뒤졌다. 나는 항공업무 때문에 방문한 사람이라고 설명했지만 스파이로 생각했는지 계속 취조를 했다.  
 
그때 한 경찰이 내 짐에서 나를 초청한 우크라이나 항공회장의 편지를 봤다. 그들은 내게 회사 이름을 묻더니 나를 풀어줬다. 만약 소련에서 이런 일이 있었더라면 꼼짝없이 징역형을 살았을 것이다.
 
그때 만난 우크라이나 국민은 영어를 썩 잘했다. 다른 소비에트 국가들보다도 인재가 많았던 것 같다. 그 실력과 정신은 항공기 개발에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소련이 붕괴한 후 떨어져나온 15개 국가는 민간 항공기 개발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망가진 전투기에서 엔진을 뜯어내 이리저리 보며 연구할 정도였다. 그러니 우크라이나의 항공기술이 소비에트 국가들보다 뛰어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래서 러시아는 더욱 우크라이나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나라에 자유가 빨리 오길 빌 뿐이다.
1973년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 근무시절 항공 엔진 판매를 위해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했을 때 광장 앞에서 촬영한 사진. [체스터 장 박사 제공]

1973년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 근무시절 항공 엔진 판매를 위해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했을 때 광장 앞에서 촬영한 사진. [체스터 장 박사 제공]

 
한국 항공 엔진 지원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는 한국 정부와도 많은 일을 했다. 지금 한국은 항공 엔진도 직접 생산할 정도로 항공기술이 뛰어나지만 초장기엔 엔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와 합작하는 계약이 많았다. 스튜어트-데이비스는 기술을 유출하지 않기 위해 가능한 부품 조립을 자체적으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엔진을 구매하면 10%만 한국에서 조립하기로 하고 가져가 조금씩 부품을 구입해 한국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배워나갔다.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직업상 롱비치, 하와이, 도쿄, 서울, 홍콩, 타이베이 등 전 세계를 오가며 근무해야 했다. 나에게 집은 호텔이었다. 당시 전화도 제대로 걸기 힘들 때였다. 오히려 비행기에 메시지를 보내서 전달하면 더 빨랐다.

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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