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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어머니 희롱하는 멕시칸 인부 목격해 대들기도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5) 지우고 싶은 시간들 2

군사정보서비스 언어학교(MISLS)는 1946년 미네소타에서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프레시디오로 이전하면서 국방어 학원(DLI)로 호칭이 변경됐다. 처음에는 일본어 교육에 주안점을 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어 등 여러 언어를 추가했다. [DLI 웹사이트]

군사정보서비스 언어학교(MISLS)는 1946년 미네소타에서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프레시디오로 이전하면서 국방어 학원(DLI)로 호칭이 변경됐다. 처음에는 일본어 교육에 주안점을 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어 등 여러 언어를 추가했다. [DLI 웹사이트]

한국 예술 알리는 '민간 외교관'  

 

라즈베리 하루종일 따도
용기 1개 품삯 고작 2센트



화물선 태워 타주 농장 배치
영어 대신 스패니시 욕 배워

우리 가족이 지낸 농장수용소의 이민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불법 이민자가 아니다. 그들은 미국이 멕시코 정부와 1942년 맺은 브라세로 조약(Bracero Agreement)에 따라 합법적으로 미국에 입국한 멕시칸 노동자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의 농업은 멕시칸 노동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치솟자 연방 정부는 미국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다는 이유로 멕시칸 노동자들을 대거 돌려보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미국은 전시물자 공급을 위해 당장 농업 생산량을 대폭 늘려야 했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멕시코 정부와 단기 농장 노동자 채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내용의 브라세로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1964년 폐지됐는데 그때까지 최소 450만 명이 넘는 멕시칸 노동자들이 미국을 왕래하며 일을 했다.
 
이민법 제정이 밀입국 시초
 
사실 미국 이민 역사를 보면 ‘불법 이민자(illegal immigrants)’라는 용어는 애초에 없었다. 1965년 제정된 이민법에 따라 미국은 처음으로 매년 국가별로 받아들이는 이민자 쿼터를 설정했는데 그때부터 지정된 쿼터 외에 미국에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불법 이민자’라고 불렀다. 그동안 미국 국경을 자유롭게 출입하며 일자리를 구했던 멕시칸 이민자들은 하루아침에 이민 쿼터가 적용되고 미국 국경이 막히자 당황했을 것이다.  
 
이들은 미국에 오기 위해 밀입국을 시도했는데 당시 국경이 지금처럼 총으로 무장한 국경수비대가 지키고 있던 것도 아니어서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해서 미국에 불법 이민자 수는 늘어갔다. 이후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캘리포니아주 티후아나, 텍사스, 애리조나 국경 지역은 밀입국자들 단속 때문에 골치를 썩여야 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민 시스템을 정착하기 위해 세운 이민법이 밀입국자들을 만든 셈이다.
 
학교 다니며 농장일 도와
 
농장 노동자들의 일터와 거주 환경은 열악했다. 브라세로 조약으로 오는 노동자들은 모두 남성들이었다. 이들은 싼 임금을 받고 농장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하는 게 일상이었다. 가족이 함께 지내는 건 우리뿐이었다. 임금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가로 2인치, 세로 2인치의 작은 플라스틱 용기 1개에 가득 라즈베리를 따면 2센트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는 내가 일한 만큼 기록해두셨다가 임금을 받으면 내 몫을 따로 떼어놓곤 했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농장에 나가야 해서 아침 밥상을 차리는 건 내 담당이었다. 오전 5시가 되면 노동자를 픽업하는 차량이 도착하기 때문에 새벽 4시면 일어나야 했다. 농장에서 구할 수 있는 쌀로 밥을 짓고 인근에서 자라는 배추, 파, 고추 등을 따서 김치도 만들었다. 김치 맛은 중국식당에서 내주는 것과 비슷했지만, 가족들은 모두 맛있게 먹었다. 가끔 스팸과 달걀부침 등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기도 했다. 저녁 식사 준비는 어머니가 직접 하셨다. 배춧국과 직접 만든 한식 반찬은 내가 만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얼마 후 아버지는 이민국에 진정해 나와 두 동생이 농장 인근에 있는 쇼트 애비뉴 초등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 식사 당번을 끝내면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2~3시간씩 농장 일을 거들었다. 가끔 주말에는 이민국 요원들에게 사전 허락을 받고 가족과 함께 동네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보러 갔다. 물론 제한된 시간 안에서만 가능했다.  
 
추방 유예기간동안 함께 지낸 리사 고모(맨 왼쪽)와 가족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추방 유예기간동안 함께 지낸 리사 고모(맨 왼쪽)와 가족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뜻밖의 자유시간 저금으로 버텨  
 
농장 생활을 한 지 1년쯤 됐을까. 이민국은 우리 가족에게 3개월간 농장 밖에서 살 수 있도록 유예기간을 허용했다. 아마도 농장 일이 없는 시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는 LA다운타운에 아파트를 얻었고 나는 인근의 존애덤스중학교에 편입했다. 그때가 1952년 무렵이었는데 내 영어 실력은 조금 늘었지만 여전히 글은 읽지 못했다. 우리가 이 기간을 재정적으로 견딜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예전에 적립해 둔 저금 덕분이었다. 액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다. 또 농장에서 받은 임금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따금 중국식당에서 외식도 했고 새 옷도 샀다. 거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속은 이민국이 정한 시간을 세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리사 고모와 함께 지냈다. 아버지 막냇동생인 리사 고모는 당시 북가주 몬터레이에 있는 국방어학원(DLI)에서 처음으로 한국어를 가르친 초대 한국어 교사다. 고모도 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왔지만 취업비자를 받고 일하는 신분이었기에 추방 대상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막냇동생을 두고 또 농장 노동수용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힘들어했다. 특히 미국으로 떠나올 때 할아버지에게 동생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기에 더 마음 아파하셨다.    
 
화물선 타고 포틀랜드로  
 
이민국 요원은 정확히 날짜가 되자 우리 아파트 문 앞에 데리러 왔다. 우리는 또다시 롱비치 이민국 구치소에 들어갔다가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농장에 배치됐다. 동생과 내가 학교에 다니고있었지만 이민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주 명령을 내렸다. 화물선을 타고 도착한 농장은 콜로라도 강 옆에 있었다.  
 
포틀랜드 농장 근처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대신 나는 풀타임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 배추와 상추, 딸기, 라즈베리 등이 재배됐는데 나는 단시간에 가장 많이 수확하는 노동자였다. 영어는 제대로 못 배웠지만, 스패니시로 말하는 욕은 모조리 배웠다. 키도 빠르게 성장했다. 언젠가 어머니가 남자 인부들에게 희롱당하는 걸 목격하고 달려가 대든 적이 있다. 몸싸움까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떤 일이 생겨도 힘으로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포틀랜드 농장에서 1년쯤 지나 다시 화물선을 타고 시애틀에 있는 농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나자 한국 전쟁이 휴전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힘들었던 3년간의 농장 수용 생활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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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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