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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대한항공 조종해 LAX 도착…미주 노선 시작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10> 히말라야를 넘어 한국으로

1971년 3월 대한항공의 첫 미국 취항을 앞두고 진행한 예비 비행에서 연방항공청(FAA)의 운송용(ATP) 자격증을 받은 대한항공 기장 4명과 함께 LA국제공항에 도착한 체스터 장 박사가 조종석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체스터 장 박사 제공]

1971년 3월 대한항공의 첫 미국 취항을 앞두고 진행한 예비 비행에서 연방항공청(FAA)의 운송용(ATP) 자격증을 받은 대한항공 기장 4명과 함께 LA국제공항에 도착한 체스터 장 박사가 조종석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체스터 장 박사 제공]

월남전 땐 날개끝 얼음 녹이려다  
히말라야 고봉에 부딛힐 뻔
 
FAA 알래스카 지사 시절
툭하면 이글루 천막서 지내
 
파키스탄의 카라치를 이륙해 네팔과 부탄의 남쪽 국경을 따라 ‘에어로 터보 커맨드 681’을 조종해 베트남 다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앞날개 끝에 얼음이 언 것을 봤다. 비행기에 장착된 관련 해빙 기능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고도 3만 피트에서는 기체 밖 기온이 영하 50도로 춥다. 고도를 낮추면 기온이 상대적으로 올라가 얼음이 녹게 된다. 비행고도를 낮춰야 했다.
 


히말라야는 고봉들이 들쭉날쭉하기로 악명 높다. 고도를 1만 피트 낮췄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얼음은 분리됐지만, 기체에서 얼음 덩어리를 완전히 떨쳐버리려면 기체가 좌우로 움직이도록 조종해야 했다.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히말라야 고봉과 충돌하지 않도록 고도를 맞추면서 날개를 흔들어야 했다. 게다가 바로 아래는 베트남 전쟁 한복판이었다. 미얀마 공항에서 가까운 데다 고도가 낮아 지상에 있는 적군이 눈치를 채고 전투기라도 출동한다면 격추당할 위험이 있다. 하늘길은 살얼음판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랐는지 호찌민(구 사이공)의 미군 공항 운영센터는 목적지를 호찌민으로 변경하라는 무선통신을 보냈다. 거기까지 가려면 350마일을 더 비행해야 한다. 연료가 충분한지조차 의문이었다.알고 보니 내가 착륙할 시점에 다낭 공항에 대대적인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돼 착륙 지점을 옮긴 것이다. 만일 그때 다낭에 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FAA 알래스카 지사 근무시절엔 종종 개썰매를 택시로 이용하곤 했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FAA 알래스카 지사 근무시절엔 종종 개썰매를 택시로 이용하곤 했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KAL 취항 지원팀 합류
 
스튜어드-데이비스 동남아 지사에서 일할 때였다. 한진그룹 창업주이자 한국 정부로부터 대한항공을 인수한 조중훈 사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아시아에 국한됐던 대한항공의 취항 노선을 전 세계로 확대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조 회장은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을 도입하려 했다. 당시 나는 연방항공청(FAA)이 공인한 운송용(ATP) 항공기 수송 조종사였고 영어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종사였다.
 
스튜어드 사장을 찾아가 1~2년간 회사를 떠나는 문제를 상의했다. 스튜어드 사장은 장차 스튜어드-데이비스 항공사가 한국에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듯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항공에서 기장 겸 비행기술 훈련관으로 일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나는 대한항공에서 근무하는 동안 수석 기장 15명이 FAA인증 ATP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도왔다. 덕분에 대한한공은 FAA가 인증하는 기장을 고용한 첫 해외 항공사가 됐다. FAA 인증 ATP 자격증을 가진 대한항공 조종사들은 미국의 N 숫자가 부착된 B-707 임대 항공기에 배정됐다.  
 
대한항공과 체결한 계약이 끝났을 때 대한항공의 첫 비행이 있었다. 1971년 서울을 떠나 도쿄와 앵커리지를 거쳐 LA에 도착한 후 돌아오는 코스였다. 나와 5명의 조종사가 이 비행을 맡았다. LA에 도착하니 한인들이 대대적인 환영식을 열었다. 드디어 한국 항공기를 타고 모국을 방문할 수 있는 시대를 연 것이다. 조 사장의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FAA에서 조종사 배출도

 
애당초 FAA는 나의 항공학 지식과 다양한 자격증은 물론 글라이더와 항공선 조종을 포함한 풍부한 경험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게 위촉심사관(DPE·Designated Pilot Examiner)이 되지 않겠느냐는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DPE는 후보를 엄밀하게 선정한 후 초청 형식으로만 임명한다. 당시 해외 DPE는 남미 담당관 2명, 유럽 2명, 북아프리카 지역 1명 등 단 5명뿐일 정도로 까다로운 자리다. 그런 자리에 내가 선정된 것이다. 나는 극동 아시아 담당 DPE로 한국을 포함해 일본, 대만, 홍콩 등 동남아시아 지역 전체를 관리했다.
 
도쿄에서 3개월간 실무훈련을 받은 후 나는 예비 조종사들이 다양한 등급의 자격증을 발급할 수 있도록 원서 접수부터 다양한 비행 테스트까지 모든 절차를 관리하고 집행했다. 이들은 에어 아메리카에 보낼 조종사 공급원이기도 했다.  
 
미군 항공 자문관으로 활동

 
1975년 9월 스튜어드-데이비스 항공사로 복귀해 극동운영 담당 부사장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나는 육군 홍보사령부에서 항공 비행교통 자문관(AATA)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면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1년 뒤 FAA의 일반 항공 조사관으로 정식 채용됐다.
 
FAA에서의 첫 3년은 수습 기간이었다.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쫓겨난다. FAA는 신규 직원을 채용하면 오클라호마시에 있는 FAA 아카데미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게 하는데 마치 사관학교 같다. 나와 함께 채용된 직원의 25%는 중도 탈락해 실습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아카데미에서 방출됐다. 훈련은 강의와 비행을 병행했다. 프로펠러기에서 거대한 제트 수송기까지 모든 종류의 항공기를 조종해야 했다. 제트 수송기를 조종할 때는 기장, 부조종사 및 항공 엔지니어 등 3인 1조로 훈련했기에 3개 분야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면 시험 통과는 어려웠다.
 
수습 2년 차는 각 지역에 있는 사무실에 파견돼 훈련을 받는다. 이곳에서도 20%가 방출돼 FAA의 다른 부서로 배치된다. 그만큼 과정이 쉽지 않다. 내가 처음 배치된 곳은 알래스카주 페어뱅크스 지사였다. 나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혹한의 북극 지역에서 훈련을 받으면 지구촌 비행 경험이 더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래스카에서 근무하는 동안 퀀셋 막사에 투숙하기 일쑤였다. 일종의 조립식 이글루 같은 것인데 페어뱅크스를 제외하곤 모텔이 없기에 선택권이 없었다.
 
알래스카 지사는 관할지역을 단속하기 위해 2주마다 약 2600마일에 달하는 지역을 비행해야 한다. 페어뱅크스에서 이륙해 루비와 갈레나를 거쳐 베델의 상공을 날았다. 저녁에는 놈(Nome)에 착륙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시스마레프(Shishmaref)와코체부(Kotzebue), 배로(Barrow)를 날았다. 북극 도시 배로에선 미 해군연구센터를 방문했다. 석유 시추를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해군 역시 FAA의 협조가 필요하다. 해군 조종사들에게 N자로 시작되는 미국 국적 항공기의 조종사 자격증을 발부해주기 때문이다.  
 
눈과 얼음이 덮인 곳에서 스키가 장착된 비행기를 띄우기도 했다. 3개월쯤 지나자 알래스카 지사장이 내가 단축 이착륙(STOL) 비행에 합격했다고 알려줬다. 물과 땅에서 모두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자격을 땄다는 의미다.
 
2년에 걸쳐 지사에서 훈련을 마치니 원하는 근무 지역을 지원할 수 있었다. 나는 수륙양용 비행기 조종술 경험을 쌓았던 시애틀을 지원했다. 이곳에서 1년간 일하고 일반 항공운영 조사관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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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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