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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비행기 주유하고 동체 닦으며 항공 자격증 취득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8) 캘리포니아 상공을 날다

한국 예술 알리는 '민간 외교관'    

 
20살에 정식 조종사로 합격
부모 이혼 후 미군에 입대

스튜어트-데이비스 취업후
전세계 다니며 비행기 배달
 
 


스튜어드-데이비스 항공사의 허브 스튜어드(오른쪽) 회장과 체스터 장(왼쪽) 박사가 1967년 당시 제작하던 2차 세계 대전 영화 '토라토라' 관계자와 롱비치 공항에서 기념촬영한 모습. [체스터 장 박사 제공]

스튜어드-데이비스 항공사의 허브 스튜어드(오른쪽) 회장과 체스터 장(왼쪽) 박사가 1967년 당시 제작하던 2차 세계 대전 영화 '토라토라' 관계자와 롱비치 공항에서 기념촬영한 모습. [체스터 장 박사 제공]

 
꿈에 그리던 비행에 드디어 도전했다. 캘리포니아주 호손에 있는 항공학교에 등록했다. 비행학교 수업료는 농장에서 받은 임금으로 충당했다. 당시 농장은 개인의 하루 수학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했는데 아버지는 내 이름으로 나온 임금을 따로 모아두셨다. 난 나이가 어렸지만 농장 전체에서 수확량이 가장 많은 농부로 꼽혔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 
 모아둔 돈이 바닥난 후에는 수업료를 벌기 위해 비행학교내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비행기에 연료를 주입하는 일이었는데 일반 차량에 개스를 넣는 것과는 다르다. 제대로 주유하지 않으면 비행기가 기술적으로 '비행 불가능 상태'가 되거나 폭발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특별 훈련을 받아야 한다. 수업료를 버는 방법은 또 있었다. 비행기 동체를 씻는 일이었는데 이 역시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고 위험이 따랐지만 난 그것조차 즐거웠다.
 
18살에 조종간을 잡다


체스터 장 박사의 학생 파일럿 시절. [체스터 장 박사 제공]

체스터 장 박사의 학생 파일럿 시절. [체스터 장 박사 제공]

 
1959년 6월 17일 발듭된 학생 파일럿 라이선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1959년 6월 17일 발듭된 학생 파일럿 라이선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그렇게 비행을 배워나갔고 나는 7개월 동안 진행된 항공수업 과정을 마치고 교관을 옆에 태우고 단독 비행을 할 기회를 갖게 됐다. 고작 18살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비행을 마치고 정식 조종사가 됐다. 훈련 축적시간이 50시간을 초과하자 연방항공청(FAA)은 민간 조종사 자격증을 발급했다. 승객이나 화물을 수송하는 파일럿으로 취업해도 보수는 받을 수 없는 초급 비행자 자격증이었지만 나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무보수로 승객과 화물을 수송하며 비행 경험을 쌓아갔다. 
 게다가 ROTC의 파일럿 선발심사도 통과했다. 이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학생도, 심사를 통과하는 학생도 극소수였기에 더 기뻤다. 로스알라미다해군 항공기지에서 탄 비행기는 쌍발 엔진의 D18. 해군 SNB-5 비행기였다. 소령 교관은 늘 왼쪽 기장석에 앉아서 비행훈련을 시켰는데 내게 늘 조종간을 맡겼을 만큼 내 실력을 믿어줬다.
 
부모님의 이혼에 방황하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이혼을 통보했다. 날벼락이자 내 생애에 일어난 가장 망연자실한 사건이었다. 난 한 번도 두 분이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혼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낌새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 많은 역경을 함께 극복해왔는데 이제 와서 우리 가족이 깨진다는 사실을 동생들과 달리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공부도 팽개치고 하늘만 날았다.
 당시 ROTC의 군사과학 시간을 함께 수강한 잭 시모어라는 친구와 함께 주말이면 라번 인근 브래켓 공항 격납고에 있는 시모어의 아버지가 소유한 2인승 ER 쿠페이 경비행기를 조종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 ROTC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해 로스알라메다에서 샌프란시스코 트레저 아일랜드 군기지까지 왕복하는 비행 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성적은 떨어졌지만 내 비행 경력은 일취월장했다.    
 베트남 전쟁이 임박하면서 미국이 점점 깊이 개입하게 되자 국방부는 대학 캠퍼스를 돌면서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CIA) 같은 정부기관들이 미군 모병관들과 같이 캠퍼스에 나왔다. 자원하면 대학교와 대학원 학비까지 지원해준다는 조건이 끌렸다. 게다가 졸업 후 CIA에서 일할 기회를 준다는데 근사해 보였다. 1961년 난 육군 예비군에 지원했다. 시민권도 취득했다.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미국인이 된 것이다.
 
항공사에 취직하다
항공 조종사의 꿈을 키우기 위해 나는 노스웨스트 항공사에 취업 지원서를 냈다. 퇴짜였다. 내 키가 자격 기준인 5피트 9인치에 미달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제 내 키는 5피트 9인치였다. 오히려 나보다도 키가 작았던 잭은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1962년 건넬 항공(Gunnel Aviation)에 취직했다. 샌타모니카 비행장에 있는 이 항공사에서 맡은 일은 판매, 시범비행 및 매각된 비행기들을 서부지역 각주에 산재한 고객 항공사들에 수송하는 일을 돕는 것이었다. 건넬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지향하는 타입의 항공 경력은 백인들에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정비사로 일하는 유색인들은 종종 보였지만 조종사는 없었다. 
 그러다 롱비치에 있는 스튜어드-데이비스 항공사에 비행기를 인도하러 간 것이 내 삶을 전환했다. 우연히 만난 이 회사의 공동 소유주인 허브 스튜어드는 내가 한국에 살면서 터득한 문화 경험 등에 관심이 보이더니 일자리를 제안했다. 이 회사는 당시 탱크와 군부대를 한꺼번에 운송할 수 있는 초대형 수송기 C-82를 전 세계에 판매하고 있었다. '나르는 박스 자동차(Flying Boxcar)'로 불렸던 C-82 외에도 항공기 제작에 필요한 부품도 판매했는데 엔진도 직접 제조했다. 
 나는 항공지원 요원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됐다. 내가 맡은 업무는 건넬 항공에서의 일과 비슷했다. 스튜어드-데이비스의 해외 고객에게 주문 제작한 상업용 비행기를 배달하는 업무였는데 동료들과 한 팀을 이뤄 전 세계를 다닐 수 있었다.
 상업항공기 조종사 자격을 취득한 후에는 비행기를 전달하는 일뿐만 아니라 고객들에게 비행기술을 지도하는 책임도 지게 됐다. 상업항공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려면 FAA의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소정의 비행시간을 채워야 했다. 특히 FAA에서 지정하는 조종사 검사관(DPE)을 옆에 태우고 진행하는 구두 및 실기 비행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DPE가 "왼쪽 엔진이 꺼졌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긴급상황에 대해 질문을 하면 즉각 대답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 합격한 나는 아시아 국가에 있는 고객들에게 비행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린란드에 있는 손드레스트롬 공군기지를 비롯해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사이프러스, 이란, 파키스탄, 히말라야 산맥, 베트남, 대만, 한국, 일본 등지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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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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