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터 장] 경기고 진학했지만 LA 거리 핫도그 맛 못잊어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7) 그리운 LA로 돌아오다
한국 예술 알리는 '민간 외교관'
외교관 아버지는 통역사로
어머니는 조리사로 취직해
4년 만에 다시 미국행 선택
가주연설 대회서 우승도
부산에서 보낸 1년 6개월 정도의 기간은 내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간이 날때면 송도 해수욕장 인근의 미군 부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병사들은 나이가 보통 18~19세로 나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최근에 미국에서 왔다는 점은 그들과 대화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들과 동료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내가 미국에서 즐기던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이들과 어울리기 전에는 내가 영어로 미국인들과 교제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늘지 않던 영어실력은 쑥쑥 늘었다. 나는 내가 미국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에서 보낸 세월이 분명 역경의 연속이었는데도 말이다.
동화되지 않은 서울 생활
우리 가족은 내가 경기중학교를 졸업하자 기차를 타고 아버지 본가가 있는 서울로 떠났다. 기차 밖의 풍경은 참혹했다. 미처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빨치산 게릴라는 산속에 숨어있다 마을로 내려와 기관총으로 양민을 학살했는데 그 잔학상이 철도길 주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울도 지상과 공중 폭격으로 건물들이 거의 무너져 땅이 평평해 보일 지경이었다. 지금 뉴스에서 볼 수 있는 우크라이나의 폭격맞은 도시 모습과 같았다. 일제시대 때 유일하게 한국인이 운영했던 화신백화점 건물만 겨우 남아 있었다. 북한군은 퇴각하기 전 곳곳에 부비트랩(위장 폭탄)을 설치해 사람들은 도로를 걸을 때 늘 조심해야 했다. 군인들이 지뢰탐지기로 도로를 검사하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통역사로 취직하셨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나와 두 동생을 키우기 위해 집에 계셨다가 나중에 서울의 미군본부 식당에 보조 조리사로 취직했다. 어머니는 부대 식당의 부엌에서 일하면서 맛있는 냄새를 맡는다며 미국 음식과 미국인들을 접하는 기분이 천국 같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농장에서 희롱당하시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앞으로 어머니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제대로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을 지키려면 운동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나는 자신감이 늘어났다. 2년도 채 안 돼 검은 띠를 땄다.
승마로 고교 시절 보내
경기고등학교도 역시 천막 교실이었다. 사관학교를 본뜬 준 군사학교였는데 우리는 국가의 최후 방어선으로 양성됐다. 이곳에서도 나는 회화와 도자기 등 한국의 전통문화와 미술사를 열심히 공부했지만 계속 미국 생활이 떠올랐다. 영화관에 가고 핫도그를 먹고 심지어 빈 콜라병을 줍는 일까지 모든 게 그리웠다.
반면 학교 수업은 따라가기 어려웠다. 중학교 때는 영어 실력이라도 인정받아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는 진짜 나의 학업 실력이 드러나는 시기다. 대부분의 친구는 서울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고 대부분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내 실력은 그렇지 못했다. 연세대를 갈 수 있었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나는 다른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바로 내가 좋아하던 승마다. 한국은 당시 1960년 로마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승마팀을 출전시키기 위해 팀을 꾸리고 있었는데 나도 준비팀에 뽑혀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중요한 고등학교 시간을 말을 타며 흘려보내고 있을 때 LA에서 만났던 레오 송씨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부모님은 송씨를 만난 후 들뜬 것 같았다. 집안 분위기도 조금 달라졌다.
지금 돌아보면 송씨는 우리 가족과 헤어지면서 "곧 만나자"라고 인사했는데 그게 사인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부모님은 다시 미국으로 가는 걸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마침내 가족들에게 다시 LA로 돌아갈 것이라고 알렸다. 1957년 여름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공식 발급한 가족이민 비자를 받고 난 후였다. 또 LA로 출발하기 1주일 전이었다. 떠나는 날도 나는 당일에서야 알았다. 오죽하면 둘째 동생은 등교하려고 교복을 입었다가 그 위에 윗도리만 걸쳐 입고 공항으로 갔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이민 가방도 없이 단출하게 한국을 떠났다.
LA하이스쿨서 '인싸'로 인기
아버지는 LA에 비행기가 도착한 지 이틀 만에LA카운티 교통국(MTA)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아버지는 LA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밤에는 USC 야간 학부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었는데 그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80세에 은퇴할 때까지 MTA에서 그 일을 계속하셨다. 어머니는 LA에 다시 온 후 두 달 후쯤에 치즈 공장에 취직했다가 2년 뒤 공장이 문을 닫자 미용 공부를 하시고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어머니도 80세에 은퇴하셨는데 그때까지 미용 가위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나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기 중간에 LA로 돌아온 나는 LA고등학교(LAHS)의 서머스쿨에 등록해 보충학습을 받았다. 가을에 시작될 새 학기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12학년으로 편입한 1학기 첫 수업이 시작된 날, 나는 처음으로 머리를 들고 자신 있게 교실에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다. 영어를 가르치던 메리 스나이더 교사가 지도하는 웅변클럽(Speech Club)에 들어간 나는 그분의 격려로 난생처음 LA시청에서 열린 웅변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했다. 나는 UCLA에서 열린 카운티 웅변대회에서도 우승했고 사우스 다코다 수 폴스에서 열린 전국 웅변대회에 캘리포니아주 대표로 나갔다.
당시 내 연설의 주제는 '무엇이 미국의 올바른 점인가'였는데 한국에서 갓 온 이민자 학생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대한 내용은 지역 언론들의 눈길을 끌었다. 연일 내 기사가 나왔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금세 '인싸(인사이더의 약자·자신이 속한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됐다. 그렇게 마지막 학창시절을 보내고 USC에 진학했다.
장연화 기자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