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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인기가수 '코코 장'과 영어 음반 내고 한국 홍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12)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들다

부곤문화재단을 통해 제작된 앨범 표지와 음반. 당시 인기를 끌던 가수 코코 장(사진 위 왼쪽)이 영어로 노래해 인기를 끌었다. 영어로 가사를 썼던 체스터 장(오른쪽) 박사도 두번 째 앨범 표지모델로 등장했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부곤문화재단을 통해 제작된 앨범 표지와 음반. 당시 인기를 끌던 가수 코코 장(사진 위 왼쪽)이 영어로 노래해 인기를 끌었다. 영어로 가사를 썼던 체스터 장(오른쪽) 박사도 두번 째 앨범 표지모델로 등장했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조용한 아침의 나라' 슬로건
영상 제작해 전세계에 알려

길옥윤 작곡가가 만든 노래
K팝 원조…외국서 인기 폭발
 
 
“당신은 중국인입니까? 아니면 일본인인가요?”
 
전 세계 하늘을 누비고 최고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누구도 내게 “한국인이냐”고 먼저 묻는 이가 없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지도에서나 겨우 찾을 수 있는 나라였을 것이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데 집중했던 정부나, 당장 먹고살기에 바빴던 한국인들은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못한 나라로 여기는 외국인들의 생각과 시선이 싫었고 속상했다. 아직 어리고 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릴 방법을 궁리했다.  
 
부곤문화재단을 세우다
 
기회가 왔다. 대한항공과의 계약으로 한국에서 3년 동안 머물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비서 나은실 씨를 통해 내게 만남을 청한 것이다. 육영수 여사는 내게 한국을 알리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시각(영상과 예술)·청각(음악)·후각과 미각(음식)·촉각(사계절)의 5가지 감각을 통해 홍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건 내가 세계를 다니면서 경험한 것이기도 하다. 음식의 맛과 향이 그 나라의 문화를 각인시켰고 음악과 미술 등 예술은 그 나라의 역사를 알려줬다. 계절과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느낀 촉감은 그 나라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사실 육 여사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66년도였던 것 같다. 육 여사는 비서와 함께 LA카운티미술관(LACMA)을 방문해 고려자기 23점을 기증했다. LACMA에 한국 미술품 전시가 시작된건 그 이후부터다. 그다음 해인 1967년에는 당시 대학생으로 기억하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하와이의 한 행사를 참석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또 갖고 있던 16mm 카메라로 행사 현장을 촬영했었다. 그걸 안 누군가가 내게 그 사진을 청와대에 보내달라고 부탁해 나는 사진을 액자에 담아 전달한 적이 있었다.  
 
육 여사와의 대화 이후 나는 회사에 2년간 휴직을 신청하고 부곤문화재단을 설립했다. 한국을 외국에 홍보하려면 정식 기관을 설립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 비영리재단으로는 ‘어린이재단’ 밖에 없었는데, 1972년 처음으로 6~7개의 문화재단이 설립을 신청해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그중의 하나가 부곤이었고 그 외에 현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재단, 천우사 등이었다.  
 
설립허가를 받은 후 한국을 홍보하는 첫 영상을 제작했다. 아리랑 음악을 배경으로 사계절이 있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며 반만년 역사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한국, 조용한 아침의 나라(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 곳곳에 시작한 홍보 슬로건이다. 대만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이 영상을 처음으로 상영했는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그 후 이 영상 필름은 홍콩, 스위스 등 각 나라의 한국 대사관에서 행사할 때마다 사용했다.  
 
나는 스튜어트-데이비스 항공사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영상을 본 허버트 스튜어트 사장은 전 세계 지사 사무실에서 상영하겠다며 힘을 보탰다. 나는 또 각 지사와 관계있는 회사에도 이 영상 필름을 700달러에 팔았다. 전세계에서 방영되는 미국 TV 방송과 라디오방송에도 영상 필름을 보냈다.  
 
영어 음반도 제작해 성공
 
영상 중간에 보면 내가 비행기에서 촬영한 한국 시골의  파란색 지붕들이 등장한다. 하늘에서 본 지붕 색깔이 너무 예뻤기에 나는 힘들어도 여러 번 왕복 비행하며 촬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지붕은 새마을 운동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 여사가 더 좋아했을지 모른다.  
 
부곤문화재단 사무실은 안양에 있었는데 대부분의 영화제작사가 안양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사용한 카메라는 미국에서 가져간 35mm 카메라였는데 안양에서 영화를 제작하던 신상옥 감독(2006년 작고)이 부러워해서 빌려준 적도 있다. 나는 오히려 65㎜ 카메라를 갖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 사는 걸 포기했다.
 
부곤문화재단의 대표는 ‘후라이보이’로 불리던 곽규석이었다. 당시엔 한국에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적었다. 나는 음반을 만들기 위해 네트워크를 동원했다.
 
미국의 대형 음반사인 RCA 레코드(RCA Records)에서 외국인들에게 들려줄 영어 곡과 한국의 히트곡을 담아 총 4장의 앨범을 제작하기로 했다. 한국법에 따라 한국 곡을 영어로 바꿔 부르려면 원곡을 사야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음반에 수록할 곡 6개를 다 사야 했다.  
 
첫 앨범에는 영어로 부른 ‘보리밭’,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 ‘타임앤타임’ 등 6곡을 수록했는데, ‘타임앤타임’은 내가 틈틈이 영어로 쓴 글에 작곡가 길옥윤 씨가 곡을 붙여줘 만든 것이다. 비둘기집을 작곡한 김기웅 씨도 편곡에 참여했다. 노래는 당대 유명한 가수 코코 장이 불렀다. 앨범 이름은 ‘한국의 베스트 골드 5(Korea’s Best Golden Five)'였다.  
 
한국문화 전파 길을 찾다  
 
앨범 역시 대성공이었다. 매력이 넘치는 코코 장의 목소리는 외국인들이 찾는 클럽이나 레스토랑에서 어김없이 들렸다. 미군 부대 공연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지금으로 친다면 'K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승승장구할 것 같던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육 여사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육 여사는 이 사업의 후원자이기도 했지만 앞으로 한국이 나아갈 문화 미래의 설계자였다. 앨범 제작은 중단됐고 부곤문화재단도 문을 닫아야 했다.  
 
육영수 여사의 사망은 내 삶의 방향을 다시 바꿔놓았다. 내 몸속에 흐르는 한국 예술품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미국에 돌아와 연방항공청(FAA)에 근무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한국 문화를 알리는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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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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