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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하와이에 김홍도 '선유도'…LACMA에 고려청자 선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13) 어머니의 발자취를 좇다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명성황후 하사 '소삼적 노리개'
경기여고에 기증한 어머니 따라

전국 주요 미술관에 유물 기증
"한국 예술의 미 전파가 목적"
 
체스터 장 박사(뒷줄 왼쪽)가 지난 2009년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소니안협회 산하 한미예술재단에 기증한 고려말 대표적 성리학자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초상화를 공개하고 있다. 장 박사는 정몽주 초상화를 당초 삼성 리움미술관에 기증하려 했으나 스미소니안측의 간곡한 설득에 워싱턴 DC에 정착됐다.[중앙포토]

체스터 장 박사(뒷줄 왼쪽)가 지난 2009년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소니안협회 산하 한미예술재단에 기증한 고려말 대표적 성리학자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초상화를 공개하고 있다. 장 박사는 정몽주 초상화를 당초 삼성 리움미술관에 기증하려 했으나 스미소니안측의 간곡한 설득에 워싱턴 DC에 정착됐다.[중앙포토]

 
어릴 때 어머니(민병윤·2010년 작고)는 내게 예술가가 되라고 가르치셨다. 몇 번 음악 레슨을 받기도 했는데 나는 미술이 더 끌렸다. 학창시절엔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특히 민화를 좋아했었다. 비행기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어디선가 그림을 끄적거리는 미술가의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어머니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  
 
외증조부 명성황후 조카 민영휘
 
외증조부(민영휘·1852~1935)는 어머니를 가장 아꼈다. 외증조부는 1935년 마지막 날에 돌아가셨는데 명성황후의 15촌 조카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종종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어떤 분인지 상상이 간다.  
 
체스터 장 박사의 어머니 민병윤씨가 죽동궁에서 살던 어린 시절 모습. 민비가 외증조모에게 선물한 ‘소삼적 노리개’를 본따 작게 만든 노리개를 가슴에 장식했다.                  [체스터 장 박사]

체스터 장 박사의 어머니 민병윤씨가 죽동궁에서 살던 어린 시절 모습. 민비가 외증조모에게 선물한 ‘소삼적 노리개’를 본따 작게 만든 노리개를 가슴에 장식했다. [체스터 장 박사]

외가에서 자랐던 어머니는 외증조부가 대원군 시절 오른팔을 다쳐서 잘 쓰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고 아픈 팔을 주물러드렸다고 하셨다. 그런 손녀딸을 보고 외증조부와 ‘죽동마마’ 또는 ‘해주마마’로 불리던 외증조모가 민비에게 자랑하셨나 보다. 민비는 어느 날 갖고 있던 3개의 옥으로 만들어진 ‘소삼적 노리개’를 외중조부에게 선물로 하사하셨다고 했다. 노란빛이 띠는 은은한 금빛과 영롱한 푸른 빛이 나는 옥색, 붉은빛으로 된 소삼적 노리개는 한눈에 봐도 귀해 보였고 묵직해서 성인도 차고 다니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머니는 이 노리개를 할머니를 통해 물려받은 후 늘 차고 다녔다고 했다. 명절 등 특별한 날에도 항상 이 노리개로 장식했을 만큼 아꼈다.  
 
어머니 본받아 예술품 기증
 
그랬던 어머니는 이 소삼적 노리개를 2006년 자신이 졸업한 경기여고에 기증했다. 학교 박물관 개관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뿐만 아니라 민비가 외증조모에게 선물한 궁중에서 사용하던 용머리 모양의 조각이 달린 용잠 비녀, 곰 털로 만든 조바위와 비단 목도리도 기증했다. 이들 기증품 모두 어머니가 물려받고 아끼던 물건들이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문화재 소장품들을 정리해 기증하기 시작했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테러도 내가 가진 걸 사회와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당시 나는 연방항공청(FAA)에서 캘리포니아·네바다·애리조나·하와이 및 태평양 지역 항공을 관리하는 서부-태평양지역국 특별사업국장이었다. 테러가 발생하자마자 우리 부서는 연방 사법기관의 요청으로 관리 지역 내 상공을 날고 있던 농업용 비행기를 모두 지상으로 내리고 이들을 지상에 묶어두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테러가 발생했을 때 살충제와 비료를 상공에서 뿌릴 수 있는 농업용 비행기들은 최우선 규제 대상이다. 이들 비행기가 탄저균 등 치명적인 생화학 독극물을 인구밀집 대도시 상공에 살포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대테러 대응 업무를 하는 동안 목격한 삶과 죽음의 순간은 ‘수집하고 나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내 삶의 철학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와이에 수차례 나눠줘  
 
그 당시 내가 가진 소장품 규모는 이미 1000여 점을 넘어섰다. 1958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40여 년에 걸쳐 세계 곳곳을 다니며 한국 미술품을 사들였으며, 그 외에도 베트남, 중국, 티벳 등 다양한 나라의 미술품과 도자기 등을 구매했다.    
 
2003년, 하와이를 통해 시작된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하와이대 한국학 센터에 한국 예술품 100점을 기증했다. 하와이는 내가 근무하던 곳이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주하셨던 곳이기에 기꺼이 기증을 결심했다. 하와이 대학 외에도 호놀룰루 미술관에도 소장품을 기증했는데 그중엔 단원 김홍도의 ‘선유도’가 있다.  
 
같은 해 LA카운티미술관(LACMA)의 이사로 추대된 나는 2006년까지 이사직을 수행하는 동안 LACMA내 한국 전시실과 전시물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 물론 내가 갖고 있던 한국과 베트남 안남의 일부 미술품들을 LACMA에 기증할 기회도 가졌다.
 
2007년에는 내 모교인 USC에 반만년의 역사가 스며있는 ‘100명의 학자’라는 제목의 그림을 기증했다. 2008년 한국 숭례문이 불타 무너지는 뉴스를 본 후에는 한국 정부 산하기관인 한국재단을 통해 조선왕조 시대에 사용하던 향로, 산수화 8쪽 병풍 등을 기증했다. 이 병풍은 상단 둘레에 시가 쓰여 있어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 나는 아름다운 미술품을 통해 슬픔에 빠진 한국인들을 위로하고 전 세계에 한국 문화재의 가치를 알리고 싶었다.
 
민비 살던 ‘죽동궁’ 그리워
 
내가 한국의 미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는 어릴 때 내가 살던 곳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서 추방됐을 때 부산에서 지내다 서울로 옮긴 곳은 바로 외할머니가 살고 계시던 죽동궁이었다. 관훈동 198번지. 이곳은 명성황후의 집이었는데 원래는 순조가 자신의 딸 명온공주를 위해 지은 곳이었다. 민비는 이곳을 재건축해서 자신의 식구들을 데리고 살았고, 나중에 외할아버지(민대식)와 외할머니가 물려받아 거주했다. 어머니도 이곳에서 태어났고 나 역시 이곳에서 미국으로 이주할 때까지 살았다.  
 
죽동궁은 말 그대로 ‘궁’이었는데 고풍이 흘렀다. 담장은 화신백화점 건물 뒤쪽부터 시작해 안국동, 인사동까지 연결돼 있었다. 죽동궁 담을 따라 쭉 걸어가면 운현궁이 나왔다. 죽동궁의 담장은 굉장히 낮았는데 그 때문인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밤에 담을 넘고 들어와 죽동궁 안에 있는 물건들을 훔쳐가 내다 파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집이 크고 넓은 만큼 워낙 값진 물건들이 곳곳에 많았기에 도둑들이 끊이지 않았다. 인사동에 골동품 판매 업소들이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역경을 만났을 때도 도망치지 않는다. 외증조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역사도 공부했다. 외증조부는 거부였고 민비의 총애를 받아 가장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끝까지 민비를 지켜준 분도 그분뿐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외증조부는 친일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역사가 외증조부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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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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