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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김영옥 대령 '애국자상' 추천…가장 보람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7화>
(15) 미국을 위해 봉사하다

'한국예술 전파' 민간 외교관 체스터 장 박사

 
한국서 아내와 결혼 약속
처가의 반대로 무산될 뻔
 
밤낮으로 공부하며 진급해
국방대 재단 이사 활동 보람
 
2009년 11월 워싱턴DC 소재 국방대학의 초청으로 방미한 백선엽 장군(왼쪽에서 3번째) 환영식 만찬에는 공군 장관 타이 맥코이 박사, 체스터 장 박사(가운데)를 비롯해 고위 장성들이 대거 참석했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2009년 11월 워싱턴DC 소재 국방대학의 초청으로 방미한 백선엽 장군(왼쪽에서 3번째) 환영식 만찬에는 공군 장관 타이 맥코이 박사, 체스터 장 박사(가운데)를 비롯해 고위 장성들이 대거 참석했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아내 완다(한국명 김원옥·67)를 만난 건 영화 같은 우연으로 출발했다. 1972년 대한항공과의 근무 계약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서울 도심에 있는 조선호텔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아는 분을 만났다. 내가 연방항공청(FAA) 면허 취득 과정을 가르친 학생 중 한 명인 대한항공 수석 기장이었다. 공군 조종사였다가 중령으로 제대하고 대한한공 기장으로 입사한 그는 딸의 이화여대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과 외식 중이었는데 바로 그 딸이 지금의 아내다.  
 
2009년부터 국방대학재단 이사로 활동 당시 체스터 장 박사가 만난 주요 인사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2009년부터 국방대학재단 이사로 활동 당시 체스터 장 박사가 만난 주요 인사들. [체스터 장 박사 제공]



생애 최대 선물 결혼과 가족  
 
장인(김양욱·작고)의 주선으로 나는 그녀를 만났는데 서로가 첫눈에 반했다고 할까. 그녀는 내가 한국을 떠난 후 FAA 알래스카 지부에서 3년 동안 일할 때 매달 2~3통의 편지를 보냈다. 더이상 로맨틱할 수 없는 연애편지였다.  
 
나중에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로 취직한 아내는 내가 근무하는 앵커리지 공항에 자주 기항했다. 나는 그녀가 오는 시간에 맞춰 페어뱅크스에서 그곳으로 날아가 만나곤 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지만,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가는 내가 나이가 너무 많고 한 번 결혼한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격렬히 반대했다. 고집부리는 아내를 아예 집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상황은 점점 난처해졌다. 만일 사촌 누나가 나서서 장모를 만나 설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공부 좋아한 둘째 아들 흐뭇
 
큰아들은 한국에서, 둘째 아들은 도쿄에서 태어났다. 큰아들의 이름을 ‘체스터 클레어런스’, 둘째 아들은 ‘캐머런 케이시’로 지었다. 내가 큰아들에게 내 이름을 물려준 건 내 아버지의 뜻과 정신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미국에 온 후 1년 뒤에 나와 형제들에게 영어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내게는 미국의 21대 대통령 이름을 붙였다. 아버지가 굳이 체스터 아더 대통령의 이름을 쓴 건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1883년 3월 한국 초대 주미대사의 신임장이 제정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셨다.  
 
큰아들은 나를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비행 조종을 좋아했다. 주말이면 새벽 5시에 일어나 큰아들과 함께 팜데일에 가서 글라이더를 탔는데 클레어런스는 공기의 흐름을 빨리 캐치했다. 그래서 글라이더 탑승장에 가면 사람들이 클레어런스 옆으로 몰려와 그가 공기의 흐름을 찾아 알려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탔다. 클레어런스가 13살 때부터는 함께 비행했다. 클레어런스는 14살 때부터 단독 비행을 시도하더니 16살이 되자 혼자 면허증을 취득했다. 내가 면허증을 취득한 시기보다도 2년 정도 빠른 것이다. 클레어런스는 면허를 따자 아내를 태우고 샌루이스오비스포, 샌타바버러 등을 다녔다.  
 
베이커스필드에서 내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둘째 캐머런은 머리가 좋았다. 또 자기주장이 뚜렷했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아다녔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나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해 내심 흐뭇하기도 했다. 캐머런은 대학을 졸업할 때 6년 과정의 의과대학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했다. 의대 진학 후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생한 시절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다는 생각뿐이다.  
 
나이 마흔에 다시 공부하다
 
아버지는 “배워라. 배우지 않으면 세상을 모른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FAA에서 일하다 보니 아버지의 가르침은 진리였다. 진급하려면 USC를 중퇴한 학력으로는 어려웠다. 나는 마흔이 넘어선 후에야 학위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1980년 초 괌에 있는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메릴랜드 대학에서 심리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 대학의 일부 강사들은 앤더슨 기지로 학생들을 찾아와 강의하거나 온라인 과정을 제공해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또 오클라호마 대학에서는 인류자원학을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뿐만 아니라 앤더슨 기지가 간부급을 대상으로 석사학위에 해당하는 교육 과정도 수료했다.  
 
1983년 나는 FAA 서부-태평양지역구 사무실에 발령받아 고향 같은 LA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아예 대학에서 살았다. USC에 복학해 풀타임 학생으로 등록하고 일하면서 수업을 들었는데, 주로 야간반이었지만 때로는 유급 휴무시간을 이용해 낮 강의도 들으며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곧장 LA 인근에 있는 라번 대학에 진학해 공공행정학 박사 과정을 밟아 2년 뒤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다행히 모든 학비는 미래 고위 행정관 후보양성을 위한 연방정부의 연장 교육 프로그램에서 지원했기에 경제적 부담은 거의 없었다.  
 
이 밖에도 워싱턴DC에 있는 국방대학교(NDU)에서 열리는 수많은 세미나에도 참석해 국가안보 관리 분야에 대한 각종 인증서를 받으며 승진에 필요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았다.
 
국방대 명예이사가 되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NDU를 위해 나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8년 동안 국방대학재단(NDUF) 이사회에서 이사로 봉사했다. 이사회의 역할은 NDU에서 공부하는 국방, 안보, 평화유지 전문가들의 교육 및 리더십 함양을 위해 전략적으로 투자하고 민관 협력관계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고 뒷받침한다.  
 
NDU 이사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애국자’를 선정해 시상하는 것이다. 이 상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국가의 전략적 관심사를 강화하고 미국의 이념 및 민주주의 원칙을 전 세계에 구현한 미국인을 매년 선정해 시상한다.  
 
내가 이사로 있는 동안 이 상을 받은 수상자는 헨리 키신저 박사, 콜린 파웰 장군,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존 매케인 연방상원의원, 로버트 게이츠 박사, 존 브레넌 국장, 힐러리 클린턴 연방상원의원이 있다. 한인으로는 김영옥 대령이 유일한 수상자다. 김영옥 대령이 애국자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추천자로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공직생활을 은퇴하면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8년간의 이사직을 내려놓자 이사회는 나에게 ‘NDUF 명예이사’의 호칭과 직책을 부여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동안 미국을 위해 남모르게 봉사한 나의 활동을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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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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