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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전국 5위, 휴스턴 23위

 ‘2024 미국 최고의 스포츠 도시’(2024 Best Sports Cities in U.S.) 순위 조사에서 달라스가 최상위권인 전국 5위에 이름을 올렸다. 휴스턴도 상위권인 23위를 기록했다. 개인 금융 정보 웹사이트 ‘월렛허브’(WalletHub)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좋아하는 스포츠 팀을 응원하는 비용이 점점 더 비싸지는 가운데, 팬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즐기면서 비용 대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2024년 최고의 스포츠 도시 순위를 선정, 발표했다. 월렛허브는 미국의 5대 프로 스포츠인 프로미식축구(NFL), 프로야구(MLB), 프로농구(NBA), 프로축구(MLS), 프로하키(NHL)와 관련된 50개 이상의 주요 지표를 비교해 미전역 400개 도시 가운데 최고의 스포츠 도시 순위를 정했다. 텍사스 주내 도시 중 달라스 카우보이스(NFL), 텍사스 레인저스(MLB), 달라스 매버릭스(NBA), FC 달라스(MLS), 달라스 스타스(NHL) 등 5대 프로 스포츠 구단을 모두 보유한 달라스는 미전국 400개 도시 가운데 종합 5위(총점 43.2점)를 차지했다. 달라스는 미식축구 부문에서는 전국 2위, 프로농구 부문에서는 15위, 프로하키 부문에서는 17위, 프로축구 부문에서는 22위를 기록했으며 프로야구 부문에서만 258위로 순위가 낮았다. 총점 31점으로 전국 23위에 랭크된 휴스턴은 프로축구 부문 14위, 프로야구 16위, 프로농구 23위, 프로미식축구 부문은 26위를 차지했다. 텍사스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인 휴스턴은 휴스턴 텍산스(NFL), 휴스턴 애스트로스(MLB), 휴스턴 로켓츠(NBA), 휴스턴 다이나모(MLS)를 보유하고 있으나 프로하키 구단은 없다. 프로농구구단 샌 안토니오 스퍼스를 보유한 샌 안토니오는 총점 18.95점으로 전국 40위에 랭크됐다. 샌 안토니오는 프로농구부문에서는 전국 10위, 프로축구 35위, 프로야구 47위, 프로미식축구 부문에서는 101위를 기록했다. 이밖에 텍사스 도시들의 순위는 헌츠빌 110위, 오스틴 120위, 프레리 뷰 129위, 나코그도치스 141위, 스테픈빌 152위, 엘 파소 185위, 샌 마코스 194위, 루복 196위, 포트 워스 197위, 칼리지 스테이션 219위, 덴튼 222위, 뷰몬트 227위, 커머스 245위, 알링턴 254위, 코러스 크리스티 282위, 에딘버그 291위, 슈가 랜드 330위, 아마릴로 333위, 미드랜드 359위, 라운드 락 364위, 프리스코 375위 등이다. 미국 최고의 스포츠 도시 전국 1위는 총점 52.16점을 획득한 로스앤젤레스였다. 로스앤젤레스는 프로농구와 프로축구 부문에서 전국 1위, 프로야구는 2위, 미식축구는 4위, 하키는 21위에 이름을 올렸다. 보스턴이 50.84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보스턴은 하키부문에서는 전국 1위를 기록했다. 3위는 49.96점을 얻은 피츠버그였는데 피츠버그는 미식축구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4위는 46.88점의 뉴욕이었다. 뉴욕은 야구 부문에서는 전국 1위를 차지했다. 5위 달라스에 이어 6~10위는 마이애미(43.2점), 필라델피아(40.45점), 샌프란시스코(39.16점), 워싱턴DC(37.27점), 신시내티(37.1점)의 순이었다. 이밖에 주요 도시들의 순위를 살펴보면, 시애틀 11위, 덴버 12위, 애틀란타 13위, 시카고 15위, 디트로이트 20위, 클리블랜드 25위, 라스베가스 26위, 탬파 27위, 샌호세 67위 등이다.     손혜성 기자미국 달라스 프로미식축구 부문 프로야구 부문 달라스 카우보이스

2024-11-20

[중앙시론] 교토국제고와 친일 논란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로 시작하는 한국어 교가가 일본 전역에 TV로 생중계되면서 난리가 났다. 일본 고교 야구 꿈의 무대로 불리는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교토국제고등학교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일본 공영 방송인 NHK는 ‘동해’를 ‘동쪽 바다’, ‘한국의 학원’을 ‘한일의 학원’으로 표기해 그 의미를 축소했다고 한다.     교토국제고는 왜 ‘동해 바다’가 포함된 교가를 부르는가?  동해 바다 건너 혼슈 땅은 백제인들이 건너와 세운 대화 왜 왕조가 있던 곳이다. 즉, 옛 백제인 조상들이 건네온 땅이라는 의미다. 교토국제고는 1947년 재일 한인들이 교토조선중학교로 설립했다고 한다. 1951년 동방학원으로 개명했다가 1958 교토한국중학으로 변경했고, 2004년 교토국제중고교가 되었다. 한국 정부는 1961년 교토한국중학교를 정식으로 인가했다.     교토국제고의 학교 소개 웹사이트에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등 삼중언어 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또 한국 지리와 한국사, 그리고 재일 한국인 역사도 가르친다고 한다.  학급당 최대 20명으로 맞춤식 교육을 한다고 자랑한다. 고교 3학년이 되면 학생마다 전담 진로지도 교원을 배정해 담임과 마지막까지 진로 상담을 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2004년 정식 일본학교  인가를 받으면서 한일 양국에서 학력을 인정하는 정규 학교로 성장했다. 교장 인사말에는 지금까지 배출된 2600여 명의 졸업생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한국 대학에 진학한 학생도 있고,  한국 프로야구 선수도 배출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의 10위권 대학과 일본 간사이 지역 명문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야구부는 교토부 내 각종 대회에서 상위권 입상을 거듭하면서 야구 명문교로 성장하고 있다. 이처럼 교토국제고는 오래전부터 재일동포 학생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거듭된 친일 논란으로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교토국제고 학생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김형석 신임 관장이 취임한 독립기념관은 올해 자체 광복절 기념식을 취소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김 관장은 국회에서 “1945년 광복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멘트 안 하겠다”며 답변을 거부하기도 했다. 광복을 인정하지 않는 독립기념관장이 탄생한 것이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일제 치하, 우리 부모님들 국적은 일본” 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한국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조선적’이거나 ‘무국적자’ 였다. 조선적은 일본인과는 차별을 두는 이등 시민을 의미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은 ‘무국적자’로 분류되어 대한인국민회의 신원보증을 받은 후에야 미국 입국이 허락된 것 등 역사적 사실들도 부정하고 있다.     인천교통공사는 지역 내 간석오거리역에 ‘독도 테마역’을 조성했는데, 얼마 전 독도 관련 시설물과 ‘독도 포토존’을 모두 철거했다고 한다.     재일 한인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징용 등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거나 가난 때문에  건너간 일제 강점기의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일본에서 엄청난 차별을 경험했고 2,3세들은 지금도 차별을 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토국제고 학생들이 재일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로 시작하는 한국어 교가를 당당히 부른 것이다.   재일동포의 용기를 북돋워 주기는커녕 오히려 역사적 사실조차 외면하려는 현 정부의 역행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교토국제고 친일 한국어 교가가 한국어 영어 한국 프로야구

2024-09-11

“한국으로 MLB 개막전 보러 가요”

미국프로야구리그(MLB)가 내년 정규 시즌 개막전을 사상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하는 가운데 이와 연계한 모국관광 패키지 상품이 출시돼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US아주투어(회장 박평식, 이하 아주투어)가 LA한인관광 업체로는 처음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다저스의 팬클럽과 손을 잡고 모객에 나섰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팬톤294(pantone294.com)는 LA다저스 팬클럽 중 가장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아주투어는 이 팬클럽과 협약을 맺고 공동으로 서울 개막 2연전 시리즈 투어 패키지 ‘Let’s Go Dodgers, Seoul, Korea Takeover’를 판매하는 등 타인종 마케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패키지는 2개 플랜 옵션으로 제공되며 플랜1은 이미 매진됐고 플랜2는 현재(1일 오후 4시 기준) 8자리만 남아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아주투어는 성공적인 타인종 마케팅을 토대로 한인 모객에도 나섰다. MLB 정규 시즌 개막전은 내년 3월 20일부터 21일까지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LA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MLB 2024년 시즌 2연전을 펼치는데 이는 미국, 캐나다를 제외한 지역서 열리는 9번째 오프닝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 호주에 이어 세번째다.   이 같은 역사적 스포츠 이벤트를 직접 참관하고 한국 투어도 하자는 취지에서 US아주투어는 ‘서울 개막전 가자’라는 슬로건으로 2연전 참관을 포함한 MLB 서울 개막전 모국관광 패키지를 출시했다.   아주투어 헬렌 박 이사는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이 참가하는 해외 개최 월드컵 경기 투어 패키지는 출시된 일이 있지만 한국에서 개최되는 스포츠 이벤트와 연계한 모국관광 패키지는 전무했었다. 이번 MLB 개막전과 연계한 투어 패키지는 한인 여행업계 최초”라고 밝혔다.   박 이사는 “특히 최근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한인 메이저리거 김하성 선수와 최지만 선수가 뛰는 파드리스와 LA한인 야구팬들의 홈팀인 다저스의 한국 개막 2연전을 관람하고 서울과 인근 지역 명소를 둘러보는 특별한 코스로 구성돼 잊지 못할 한국에서의 추억을 선사할 것”이라며 한인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패키지는 내년 3월 17일 LA서 출발해 24일 LA로 돌아오는 7박 8일 일정으로 한국 국적기를 이용하게 된다. 개막전 2게임 티켓은 별도로 구매해야 하지만 아주투어측에서 구매를 보장한다고 밝혔다.   경기 관람 이외에 서울시티투어를 통해 청와대, 청계천, 경복궁, 북촌마을, 인사동, 이태원, 용산 전쟁기념관, 남산 등 강북지역과 삼성동 코엑스, 롯데타워, 석촌호수 등 강남지역을 돌아본다.   또한 2회로 예정된 경기지역 관광명소 투어는 가이드가 동승한 전용 버스를 이용해 파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DMZ), 임진각, 제3땅굴 방문 등으로 진행된다. 용인 민속촌, 서울스카이타워, 한강 야경 유람선, 남산 스카이 전망대는 옵션이다. 귀국날에는 인천국제공항 인근 관광지도 둘러본다.   경비는 항공료를 포함해 1인당 2499달러며 예약은 전화(213-388-4000)로 할 수 있다. 박낙희 기자 [email protected] 개막전 서울 개막전 한국 투어 프로야구 아주투어 LA다저스 SD파드리스

2023-09-04

메이저리그 내달 7일 마침내 개막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사무국과 선수노조가 극적으로 새 단체협약에 잠정 합의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 1일 이래 99일간 진행된 직장폐쇄도 해제됐다.   ESPN, CBS 스포츠 등 미국 언론은 MLB 구단주와 선수노조가 새 단체협약에 잠정 합의해 오는 4월 7일 팀당 162경기 체제로 정규리그의 막을 올릴 예정이라고 10일 전했다.   스프링캠프는 당장 13일부터 시작된다. 자유계약선수(FA) 시장도 곧바로 열린다. MLB 노사는 새 단체협약을 개정하지 못하고 지난해 12월 1일 직장폐쇄를 결정했다. 구단은 FA 협상 등 주요 업무를 중단했고, 선수들은 구단 훈련 시설을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첨예한 대립 속에서도 협상은 지속됐지만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2022시즌 일정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결국 3월 31일로 예정됐던 올 시즌 개막일이 연기됐다.   간격이 커 보였던 MLB 노사의 대립은 MLB 사무국이 최대 쟁점이었던 부유세(균등경쟁세) 부과 기준에 대해 한발 물러서며 타결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MLB 사무국의 제안을 선수노조는 투표에 부쳤고, 26-12로 찬성이 우세했다. 1994~1995년에 이어 MLB 역대 두 번째로 긴 파업도 막을 내렸다.   구단주들의 공식 승인까지 거치면 새 단체협약은 앞으로 5년간 발효된다.   새 단체협약에 따르면 부유세 부과 기준은 올해 2억3000만달러로 시작해 2026년에는 2억4400만달러까지 오른다. 첫해 부과 기준을 당초 MLB 사무국이 제안한 2억2000만달러와 노조가 요구한 2억3800만달러의 중간 지점에서 합의를 본 것이다.   최저 연봉은 기존 57만500달러에 올해 70만달러로 책정하고 점차 늘려 78만달러까지 올리기로 했다. 3년 차 미만 연봉조정 비자격 선수들을 위한 보너스 풀 한도는 5000만달러로 정해졌다.   포스트시즌 출전팀은 12팀으로 확대됐고, 사상 처음으로 유니폼 패치와 헬멧에 상업 광고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 투구 시간제한(주자가 없을 때 14초, 주자가 있을 때 19초), 내셔널리그 지명타자 제도 도입, 탱킹(이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상위 순번을 얻고자 일부러 좋은 성적을 내지 않는 전략) 폐해를 막기 위한 신인 드래프트 추첨 지명 도입 등도 새 단체협약에 담겼다.   직장폐쇄가 끝남에 따라 얼어붙었던 FA 시장이 다시 열린다. 유격수 카를로스 코레아, 1루수 프레디 프리먼, 유격수 트레버 스토리, 투수 클레이턴 커쇼, 3루수 크리스 브라이언트 등의 대형 FA 선수들의 계약 소식이 속속 들려올 전망이다.   한국에서 훈련 중이던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도 곧 출국길에 오른다. 162경기가 모두 열림에 따라 류현진은 연봉 손실을 피할 수 있게 됐다.메이저리그 내달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시즌 개막일 신인 드래프트

2022-03-11

미 프로야구 최초 가상 체험공원 등장

애틀랜타 브레이브스(Atlanta Braves)가 지난 15일 '디지털 투루이스트 파크(Digital Truist Park)'라는 가상 체험 공원을 출시했다. 이로서 메타버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최초의 메이저리그 야구팀으로 이름을 올렸다.     홈구장 투루이스트 파크는 실제로 체험하는 것과 똑같은 메타버스(Metaverse) 경험을 제공하는 가상 플랫폼이다. 에픽게임스의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 기술로 만들어진 이 플랫폼은 야구 팬들에게 몰입형 멀티플레이어 환경에서 실제처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또 기존의 브레이브스 팬들이 회원으로 참여하며 콘텐츠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이 될 전망이다. 물리적 및 디지털 기술이 혼합된 환경에서 유비쿼터스(ubiquitous) 소비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지리적·수용인원 제약에 대해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 메타버스를 활용하던 브레이브스 팀은 앞으로 Web3, NFTs, 암호화폐, 블록체인 등의 미래 혁신 기술까지 활용할 전망이다.       이번에 출시한 이 메타버스 가상공원은 ▶아바타 만들고 꾸미기 ▶브레이브스 클럽하우스, 기념 정원 등을 포함한 트루이스트 파크와 배터리 애틀랜타 건물 둘러보기 ▶브레이브스 콘텐츠, 공연 등 즐기기 ▶전 세계의 브레이브스 팬들과 교류 ▶브레이브스 역사 탐험 ▶2021 월드시리스 우승 축하 ▶다양한 게임, ‘부활절 계란’ 찾기 등을 하며 상품을 타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CEO는 "트루이스트 파크의 디지털 버전은 팬들에게 메타버스 환경에서 독특한 경험과 참여할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며 "우리는 이런 몰입형 경험을 제공하는 최초의 팀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한편 MLB 및 서리얼(SURREAL)과 파트너십을 맺고있는 브레이브스는 오는 4월 행사에서 디지털 트루이스트 파크를 공식적으로 소개하고 발표할 예정이다. 4월 디지털 트루이스트 파크의 데뷔 행사에 참여를 희망하는 경우 www.Braves.com/DigitalTruistPark에서 신청 할 수 있다.   ▶문의=www.Braves.com/DigitalTruistPark 김태은 인턴기자프로야구 체험공원 메타버스 가상공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브레이브스 콘텐츠

2022-02-17

[시론] 미주총연, 그들만의 리그

세계 야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올해 미국프로야구 월드시리즈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우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6년간이나 기다렸던 축배를 든 것이다. 반면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결국 2017년 우승당시 ‘사인 훔치기’ 오명을 씻는데 실패했다.   미식축구의 슈퍼볼 열기만큼은 덜 하지만, 월드시리즈는 미국인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지구촌으로 무대를 넓히면 월드시리즈 시청자수가 슈퍼볼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야구와 미식축구는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이다. 이 두 스포츠의 룰을 모르고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야구가 미식축구보다 인기가 있을 경우, 미국사회는 더 스마트하다’는 야구 예찬론자의 칼럼도 예전에 읽은 적이 있다.   이 같은 프로야구도 한 때 존폐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바로 2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많은 선수들이 군에 입대했다. 이로 인해 선수들이 부족, 프로 야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결국 구단주들은 고육지책으로 여성들로 이루어진 야구팀을 결성했다. 1943년 설립된 전미 여자 프로 야구 리그(AAGPBL)는 1954년까지 존속했다. AAGPBL은 초반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여자가 무슨 야구냐"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다소 관심을 끌었지만, 그마저도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이 끝나 선수들이 돌아오자 다시 시들해졌다.  결국 폐지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다.   1992년 개봉한 페니 마셜 감독의 ‘그들만의 리그(A League of Their Own)’는 이 여성 야구리그를 다룬 작품이다. 지나 데이비스, 로리 페티가 주연을 맡았다. 톰 행크스는 한물간 야구 선수이자 주정뱅이 코치로 등장한다. 가수 마돈나도 출연한다. 그녀가 부른 OST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는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여담으로 톰 행크스가 했던 "There's no crying in baseball!”(야구에서 우는 게 어디 있어!)란 대사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제목의 뉘앙스 때문인지 ‘그들만의 리그’라는 표현은 지금도 여러 상황에 두루 쓰이고 있다. 좋은 뜻이 아닌 경우가 많다.   최근 화제가 된 ‘오징어게임’도 결국 ‘그들만의 리그’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했다.   피와 땀을 흘리면 성공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명제 속에서, 진정한 승자는 어쩌면 그 진흙탕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드라마는 전하고 있다. 참가자는 생사를 건 게임을 하고 있지만, 이를 관전하는 VIP들은 흙 한 톨 묻히지 않고 돈을 버는 ‘그들만의 리그’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미주한인사회에도 ‘그들만의 리그’라고 지탄받는 단체들이 있다. 그 중에 미주한인회총연합회(미주총연)가 있다. 말이 총연합회지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비난의 소리가 높다.     그로 그럴 것이 지난 2011년 제24대 회장 선거 이후 회장 선출을 둘러싼 갈등과 지루한 법정공방은 선거 때마다 재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회총연합회 창립총회에서 배제되는 수모까지 당했다.   왜 그럴까? 미주한인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권에 눈이 멀어 다투기 때문이라고 언론계에선 꼬집고 있다.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탓이다. 얼마전 한 지역한인회장은 그들의 일면을 꼬집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통합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2년전 미주 30개 지역 현직 한인회장들은 이 단체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어 8개 미주광역한인단체연합회도 관련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재외동포재단의 압력(?)때문인지 최근 또 다시 통합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미주총연은 통합을 위해 이달 20일 임시총회를 열고, 제29대 총회장 선거를 실시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심의 눈초리가 많다. 전제조건인 갈등 봉합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주한인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모습이다. 어차피 한인들의 실재 생활과는 관계없는 ‘그들만의 리그’이다. 권영일 객원논설위원시론 리그 객원논설위원 여성 야구리그 야구 리그 올해 프로야구

2021-11-04

애틀랜타, NLCS서 두 경기 연속 끝내기 안타로 다저스에 2연승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미국프로야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이틀 연속 끝내기 안타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꺾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NLCS·7전 4승제)에서 먼저 2승을 따냈다.   애틀랜타는 18일(한국시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트루이스트파크에서 열린 NLCS 2차전에서 9회말에 터진 에디 로사리오의 끝내기 적시타에 힘입어 5-4로 역전승했다.   전날에도 9회말에 터진 오스틴 라일리의 굿바이 안타에 힘입어 3-2로 승리한 애틀랜타는 남은 경기에서 2승을 추가하면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   애틀랜타는 1회 선취점을 내줬다. 선발 투수 이언 앤더슨이 난타를 당했다.   선두 타자 무키 베츠에게 좌전 안타를 허용한 뒤 후속 타자 코리 시거에게 투런포를 헌납했다.   초구 커브가 한가운데에 몰려 장타를 얻어맞았다.   앤더슨은 이후 윌 스미스, 크리스 테일러에게 볼넷을 허용해 2사 1, 2루 위기에 놓였지만, 코디 벨린저를 중견수 뜬 공으로 처리하면서 추가점을 내주지 않았다.   애틀랜타는 4회에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1차전의 영웅 라일리가 맥스 셔저에게 볼넷을 얻자 후속 타자 족 피더슨이 우월 투런 동점 홈런을 터뜨렸다.   지난 시즌까지 다저스에서 활약하다가 주전 경쟁에서 밀려 자유계약선수(FA)로 팀을 떠난 피더슨은 중요한 순간 친정에 비수를 꽂았다.   애틀랜타는 7회 다시 리드를 내줬다.   다섯 번째 투수 타일러 마첵은 상대 팀 선두 타자 베츠와 10구 승부 끝에 볼넷을 내줬고, 도루까지 허용해 2사 2루 위기에 놓였다.   마첵은 스미스에게 고의 4구를 내주며 1루를 채웠다. 애틀랜타는 구원 투수 루크 잭슨을 서둘러 올렸다.   그러나 잭슨은 몸이 덜 풀렸는지 사구를 던져 만루 위기에 놓였다.   이후 잭슨은 다저스 테일러에게 중전 적시 2타점 2루타까지 내줘 2-4로 밀렸다.   애틀랜타는 패색이 짙던 8회말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선두 타자 로사리오의 좌전안타로 만든 1사 2루에서 오지 올비스와 라일리가 연속 적시타를 날려 4-4가 됐다.   1루 주자 올비스는 라일리의 중견수 쪽 2루타 때 폭풍 질주로 홈으로 내달려 경기의 균형을 맞췄다.   승부는 9회말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에서 갈렸다.   애틀랜타는 트레비스 다노의 중전 안타와 기예르모 에레디아의 내야 땅볼로 2사 2루 기회를 만들었다.   다저스는 마무리 투수 켄리 얀선을 올렸고, 로사리오는 얀선의 가운데 몰린 초구 컷패스트볼을 공략해 경기를 끝냈다.   수비 시프트에 따라 2루수 쪽으로 이동한 유격수 코리 시거가 걷어낼 수 없을 정도로 총알처럼 빠른 타구였다.   로사리오는 5타수 4안타 1타점 1득점을 기록하며 이날 경기의 영웅이 됐다.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1-10-1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최고령 야구 감독 김응룡

한화 이글스 감독에 전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스에서 감독을 역임하면서 10번의 우승신화를 썼던 김응룡 감독이 선임됐다. 내부 승진이니 외부 영입이니 소문이 무성하더니 뜬금없이 8년 이상 현장에서 떠나있던 김응룡 씨를 감독으로 낙점했다.  김 감독의 감독 복귀를 두고 팬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엇갈린다. 그의 현장 복귀를 환영하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후배들에게 감독 자리를 열어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반대의 의견을 보이는 팬들로 나뉜다.  심하게는 70이 넘은 나이에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며 못 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는 실정이다. 어쨌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김응룡 감독이 어떻게 한화 이글스를 이끌어 나갈지를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김 감독은 고향이 평안남도로 6.25 사변 때 부산으로 피난을 온 실향민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 발발로 아버지 손에 끌려 1.4후퇴 때 월남하였고 1954년에 부산 개성중학교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부산상고 졸업 후 당대 최고 팀이었던 농협 팀에 덩치가 너무 커서 둔할 것이라는 이유로 입단이 좌절되자 대한통운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실업야구 최고의 홈런타자로 등극 장종훈, 김현수로 대표되는 연습생 신화의 원조가 된다.  김 감독의 별명이 ‘코끼리’인데 1루수로 활약하던 선수시절 야수들이 던지는 공을 받아내는 모습이 마치 코끼리가 비스킷을 받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리고 팬들이 잘 모르는 또 다른 별명이 백곰이었는데 타석에 들어서서 하는 행동이 백곰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김응룡 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바로 1963년 ‘제 5회 아시아 선수권 야구 대회’ 결승전이다. 본 대회 최다 우승팀인 일본을 3-0으로 격침시켜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일본에게 승리를 거둔 시합에서 1회 선취타점, 8회 투런 홈런 등 전타점을 혼자 때려내며 한국야구 역사상 국제대회 처녀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그 후 대한통운이 해체되어 크라운맥주로 바뀌고 다시 한일은행이 크라운 맥주 팀을 인수하는 동안에도 부동의 4번 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의 나이 32살에 선수 생활을 접고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한일은행 감독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화려하게 데뷔, 한일은행을 실업 최강 팀으로 이끌어 가며 성공가도를 걷게 된다.  그러나 82년 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그를 불러주는 팀은 아무데도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난다. 그때 만난 사람이 지금 메릴랜드 몽고메리대에서 투수 코치로 활약하고 있는 이덕준 씨다.  그러다 김동엽 감독의 후임으로 한국프로야구의 외인구단이라 불리던 해태 타이거즈를 맡게 된다.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83년 팀을 맡은 지 1년 만에 타이거즈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쾌거를 이루면서 한국 최고의 명장으로 11번의 한국시리즈 패권을 움켜쥐면서 우승제조 감독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선수들에게는 호랑이 감독으로 통하는 그지만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퇴장도 불사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받은 퇴장명령은 18번으로 이 기록 역시 국내 최고이다. 이제 한 평생 야구를 사랑하며 야구를 위해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을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해 온힘을 다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할 것을 기대하며 그의 귀환에 박수를 보낸다.

2012-10-11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감독 수난시대와 김시진 감독

요즘 프로야구 감독들이 연이어 경질되는 일이 벌어져 팬들에 큰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달 한화 이글스 한대화 감독에 이어 넥센 히어로즈의 김시진 감독이 성적부진을 이유로 잔여경기 15 게임을 남겨 놓고 갑자기 옷을 벗었다. 마치 천하를 통일한 유방이 일등공신인 한신을 쫓아내듯이 말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성적 부진이라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넥센은 전반기 들어 팀 순위가 3위까지 올라가면서 파란을 불러일으켰고 유망주들이 꾸준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든 팀이었다. 장기레이스 경험 부족과 얇은 선수층 때문에 리그 후반부터 팀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시즌 마감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감독을 경질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다 쓰러져가는 팀을 절치부심해서 오늘의 넥센을 만들어 놓았는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적만으로 감독의 자질을 평가하는 구단의 조치는 팬들의 비난을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한국야구 최고의 투수 조련사로 불리며 현대 유니콘스 왕조를 이끌어낸 공신으로 평가받은 김시진 감독은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던 현대의 어려운 사정에도 감독으로서 팀을 맡아 선수단을 잘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2009년 현대 유니콘스가 넥센 히어로즈로 팀이 바뀐 후 감독을 맡았고, 팀 성적은 최 하위권이었고 선수들의 연봉은 바닥까지 내려간 어려운 사정과 타 구단에서 좋은 조건으로 감독으로 오라는 부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같이 했던 선수들을 위해 넥센을 떠나지 않았던 의리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이런 김시진 감독의 갑작스런 경질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아오고 있다. 선수단 분위기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은 물론이고 팬들의 반발 또한 엄청나다.  우선 태평양 돌핀스 시절부터 사제지간으로 절친한 사이인 정민태 투수 코치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사임하겠다고 구단에 통보했다. 김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할 때 정민태가 부상에서 재활을 거쳐 최고 투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해 도와주었던 스승이다. 김성갑 수석코치 역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라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돌면서 남은 경기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를 고민했다”고 자신의 찹찹한 심경을 털어 놓았다.  감독대행이라는 호칭을 극구 사양하면서 시즌이 끝나면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상태이다. 선수들 역시 미안한 마음은 같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투수들은 더욱 그러했다. 전날 경기에서 사사구를 무려 13개를 내주며 상대 팀에게 승리를 헌납했기 때문이다.  김 감독과 정 코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사구인데 그것도 무려 13개라는 기록적인 수치로 경기를 내줬기 때문이다.  넥센은 김성갑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선임하며 남은 시즌을 마무리한다고 하지만 김성갑 코치가 흔들리는 선수단의 분위기를 얼마나 잘 수습하며 남은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구단의 임기응변적이고 근시안적인 운영이 한국프로야구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문제점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감독의 권위가 가벼워지면 소신 있게 팀을 이끌어 나가기가 어려워짐은 불을 보는 듯이 자명한 이치이고 나아가 한국야구의 저해요소만 될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정계에서 흔히 일어나던 ‘토사구팽’하는 일들이 야구계에 까지 자리매김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2012-09-2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한용덕 감독 대행 '겸양의 미덕'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팔도 인물에 대한 평을 해보라는 어명을 받고 전국 8도 사람들에 대한 인물평을 했는데 충청도 사람에 대한 평을 이렇게 했다. 청풍명월(淸風明月)이다. 다시 말해 맑은 바람과 큰 달처럼 부드럽고 고매하다고 충청도 사람을 평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충청도 사람을 양반이라고 불렀다. 물론 충청도 사람들 모두가 양반은 아니지만 그들의 성격이 모가 나지 않고 곧은 이유에서 그랬을 것이다.  얼마 전 한대화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직에서 물러나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한용덕 감독 대행의 선임 감독에 대해 파격적인 예우를 갖춘 훈훈한 이야기이다. 감독대행을 맡은 후 첫 경기를 치른 한 감독 대행은 경기 내내 서있었다. 이전까지 한대화 감독이 앉아 경기를 지휘하던 의자는 주인이 없이 비어 있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서 있는 한용덕 감독의 이런 모습은 팬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감독이 앉는 의자에 앉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유는 전 감독에 대한 전관예우의 의미다. 당연히 전 감독을 배려하는 그런 게 있어야 한다. 한 감독은 앞으로 남은 시즌 동안 그 의자에 앉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갑작스럽게 지휘봉을 넘겨받기는 했지만 전 감독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내린 결정이다. 감독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경기 전부터 선수들이 훈련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루의 삼분의 일을 서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자리다툼을 위해 정도전의 말과 같이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 밭에서 개같이 맹렬히 싸움)가 만연한 사회에서 밝은 달빛 아래 맑은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내년 시즌에 그가 정식으로 한화의 수장이 된다면 김인식 감독의 뒤를 잇는 덕장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한용덕은 충남 대전 출신으로 한대화 감독과 같은 고향 선후배 사이다. 충남중을 거쳐 천안 북일고를 거쳐 동아대에서 1학년 때까지 투수로 활약하다 한국야구의 오랜 병폐인 선배들의 지독한 체벌에 시달리다 야구를 포기하고 트럭운전 기사, 리어커를 끌기도하고 전화기 판매도 해봤다.  그러나 어느 날 프로야구 중계를 보면서 야구에 대한 열정을 다시 찾게 되었고 북일고 은사인 김영덕 감독을 찾아가 야구를 다시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연습생으로 배팅 볼을 던지며 동료들의 칭찬이 계기가 되어 정식으로 프로야구에 입문하게 된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용덕이 던질 줄 아는 공은 직구 밖에 없었다. 슬라이더를 아무리 던지려 해도 되지 않았는데 하루는 포수 유승안이 슬라이더를 던지라는 사인을 보냈다. 대선배가 내는 사인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눈 딱 감고 던진 것이 제대로 포수 미트에 꽂혔고 다음 투구도 슬라이더 사인을 내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시도한 것이 정확히 미트에 들어가면서 슬라이더를 깨우치면서 은퇴할 때까지 써먹게 되는 구질이 되었다.  서서히 한용덕의 시대가 열리는가 싶었는데 가족 모두가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교통사고로 인해 다시 한 번 고비를 겪는다. 본인도 왼쪽 팔을 다쳐 거의 사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은퇴할 때까지 장애를 감추고 슬렁슬렁 던진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투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닥까지 가봤기 때문에 선수들의 어려움을 품을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성격과 인생 경험이 그가 프로야구 레전드로 꼽히는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2012-09-13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쓸쓸한 '야왕(野王)'

한화 한대화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잔여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이글스를 떠났다. 한밭 대전에서 나고 자란 그는 현역시절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고향 팀의 사령탑을 맡으면서 오랜 소원을 이루는가 싶었는데 결국 한화와 작별을 고했다.  한대화 감독이 삼성 수석코치 자리를 뒤로한 채 하위권에 머물던 한화로 자리를 옮길 때 주변 사람들의 많은 염려가 있었다. 과연 어느 정도로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 올릴 수 있을지를 말이다.  3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주어졌다. 구단에서도 전폭적인 지원 사격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어려움이 겹치기 시작했다. 김태균과 이범호 등 간판타자 두 명을 일본으로 빼앗기면서 타격의 축이 흔들리게 되었다.  한화는 한 감독이 부임한 2010년 8위, 지난해에는 공동 6위를 했다. 올 시즌에는 박찬호, 김태균을 일본에서 불러왔지만 시즌 초반부터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을 한 감독 혼자 짊어지고 떠났다. 수장의 자리라는 것이 이렇듯 어려운 자리인 것이다. 잘하면 그 영광이 선수에게 돌아가지만 못하면 모든 책임이 감독 탓으로 돌아가고 만다. 온갖 스트레스는 혼자 받으면서 말이다. 맨 처음에는 관중들에게 다음에는 매스컴에게 두들겨 맞는다. 세상에 어느 감독이 게임에 지고 싶겠는가?  야구공이 둥글 듯이 시합이라는 것은 뚜껑을 열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는 우를 범한다. 물론 선수들이 수준이하의 경기를 펼쳤을 경우에는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이 잘된 선수나 감독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게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팬들이나 구단 관계자들도 헤아려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점에 있어서 선수들 각자가 자책을 하면서 갑작스런 감독 경질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스포츠맨십이며 이러한 태도가 오늘의 자신들이 있게 한 선배나 자기들을 지도하는 지도자들에게 나타내는 예우가 아닐까 싶다.  한대화 감독은 그들에겐 영웅이자 우상이었던 인물이다.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했던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숙적 일본을 상대로 우승을 결정지은 3점 홈런, 그 3점 홈런의 주인공이자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3루수로 선정된 선수가 바로 그였다.  그런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간염이라는 고질적 원흉이었다. 연고지 OB 베어스에 입단을 하게 됐는데 혹독한 훈련으로 악명이 높은 김성근 코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피로감을 달고 살아야하는 그가 훈련에 불성실한 것으로 비춰져서 결국 해태로 트레이드를 당하게 된다. 해태로 이적한 그에게 김응룡 감독은 적당한 훈련을 하도록 배려를 나타내 준다.  이러한 감독의 배려에 보은을 하듯이 승승장구하면서 팀이 한국시리즈 7연패를 달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며 88년 올스타전 MVP의 영예도 함께하는 명실상부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3루수로 프로야구사에 한 획을 긋는 전설이 되었다.  비록 감독으로서 화려한 경력은 못 올렸지만 많은 일화를 남기며 그라운드를 누볐던 선수로 기억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라운드에 설날을 기다리며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2012-08-30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프로야구와 '꿈나무'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 성화도 꺼지고 모든 스포츠 경기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한국은 종합 5위로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하는 쾌거를 올렸다. 80년대 초 올림픽 ‘꿈나무’를 키우자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 꿈나무들이 훌륭하게 성장해서 세계정상에 오르며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한국야구도 같은 시기에 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야구 꿈나무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지금 활동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80년대 활약하던 스타플레이어들을 롤 모델(Role Model)로 삼아 자신들의 원대한 꿈을 키워왔을 것이다.  투수라면 불사조 박철순, 무쇠팔 최동원, 김시진,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 선수를 타자라면 헐크 이만수, 김우열, 안타제조기 장효조 그리고 유격수라면 김재박을 자신의 이상형이나 우상으로 삼으며 야구선수의 길을 걸어왔다.  역할 모델(Role model)은 어떤 한 사람을 정해, 그 사람을 표본으로 정하여 성숙할 때까지 모델로 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린 선수들에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린선수들은 감수성이 예민해서 유명선수들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라하려고 한다. 그가 사용하는 상표의 글러브나 배트는 기본이고 그가 경기 중에 하는 이상한 버릇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같이 가지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같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점은 칭찬할 일이지만 본인의 체격조건이나 기량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의 포지션만 고집할 경우 성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투수가 되고 싶은데 자질이 부족하다면 빨리 타자로 전향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선수라고 무조건 따라 해서는 안 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선수와 자신은 체격 조건이 그리고 그 선수도 약점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자칫 나에게도 약점으로 작용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자라나는 꿈나무나 꿈나무를 지원하는 부모들이 감안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매년 칼 립켄 월드시리즈를 취재하며 일본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점인데 기본기가 한국 팀을 앞선다는 점이다. 이점은 일본팀이 실책이 별로 없다는 점으로 증명이 되고 타격에서도 정확하게 공을 쳐 낼 줄 알고 찬스에 강할 뿐 아니라 웬만해서 찬스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본받을만하다. 그리고 위기대처 능력이 우리를 앞서간다. 물론 두터운 선수층과 후원 또한 한국을 앞서가는 점은 사실이다.  1만5000개 팀에서 선발된 일본대표와 24개 팀에서 그것도 미국여행을 자비로 할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이 되는 선수들이 참가하고 실력은 있지만 선수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좋은 선수들이 선발되지 못한다는 점이 한국이 우승을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도 올해는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예선과 결승에서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체 내년을 기약해야만 했다. 큰 규모의 국제대회는 아니지만 코리아라고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미래에 한국야구를 이끌며 한국프로야구뿐만 아니라 세계무대에서 활약을 펼칠 어린 꿈나무들에 대한 지원이 너무 소홀한 듯한 기분이 들어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2012-08-23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프로야구' 와 재벌 그룹의 홍보효과

2012년 올림픽 남자 체조 양학선 선수가 도마경기에서 난이도 7.4인 경이적인 동작으로 전 세계를 흥분시키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자신의 영광은 물론 나라의 명예를 전 세계인들에게 깊이 새기는 엄청난 공을 세웠다.  이튿날 아침 미국인 직장동료들에게 내가 축하를 받으며 양학선 선수의 경기 모습에 “어메이징(Amazing)”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경의를 표한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솔직히 미국인들은 십중팔구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잘 모른다. 심지어 어디에 위치한 나라인지도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박세리나 김연아의 이름이나 박찬호, 추신수 등 유명한 운동선수의 이름을 언급하면 이들이 코리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정도이다.  이토록 스포츠 선수나 유명 연예인들이 국위를 선양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래서 세계 각 나라는 스포츠를 통한 외교에 힘쓰는 것이다. 그 중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종목이 야구이다.  전 세계 프로야구 선수들을 기량을 겨루기 위해 2006년 창설된 국제대회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비롯해서 세계아마추어야구선수권대회, 대륙간 컵, 아시안 컵 등. 국가 상호간 경쟁을 펼치는 굵직한 대회들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신의 기업이나 그룹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프로야구팀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이 그 좋은 예이다.  82년 한국프로야구가 탄생할 당시 MBC 문화방송이 모체인 MBC 청룡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팀들은 자사그룹이나 기업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단했다.  그중에 자사 그룹을 홍보를 목적으로 한 팀은 삼성 라이온스와 삼미 슈퍼 스타스 그리고 자사 제품 홍보를 위한 팀으로는 롯데 자이언츠, 해태 타이거스, 그리고 OB 맥주를 생산하는 OB 베어스가 창단 되었던 것이다.  사실 숫자상으로 계산해보면 전문경영인이 아니더라도 구단 모두 적자운영이라는 점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프로야구 팀을 운영해 왔는가? 이해가 잘 안 갈수도 있다.  구단주가 야구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재벌그룹사간의 자존심 경쟁도 한 몫을 한다. 현대 유니콘스는 정주영 회장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가 프로야구 출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정주영 회장이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되자 “평생소원을 풀었다”고 만세를 부른 일은 그가 얼마나 프로야구팀을 갖고 싶어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재정적자는 그룹홍보차원에서 볼 때 TV 광고보다 훨씬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팀이 웬만한 적자가 나더라도 그것을 감수하면서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자국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재계순위 다툼, 맥주회사들의 판매경쟁, 과자회사들의 프로야구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 TV 방송 중계료 등이 프로야구를 계속 이끌어 나가는 각 구단의 존재 가치의 이유인 것이다. 야구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과 더불어 말이다.

2012-08-09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꿈의 제전' 프로야구 올스타전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지난 21일 대전 한밭구장에서 열렸다.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선수들이 팬들의 인기투표로 뽑혀 전기리그를 마친 후에 자신들을 성원해준 팬들에게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치르며 즐거움을 선사하는 야구 대잔치다.  홈런레이스를 비롯해서 올스타 선수 중 가장 정교한 번트 실력을 겨루는 ‘남자라면 번트 왕’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와 즉석사진 찍기 등, 말 그대로 자기가 투표한 선수들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팬들의, 팬들을 위한, 팬들에 의한 축제다.  그리고 이 날 행사를 통해 접수되는 기부금은 어려운 계층의 다문화가정을 위해 전달하는 따뜻한 정이 담긴 행사이기도 했다. 지금 런던에서 치러지고 있는 ‘세계인의 축제’라는 올림픽과는 많은 대조를 이룬다.  선수는 물론 심판들까지 잘못된 애국심과 상업주의로 얼룩져 자국의 승리를 위해 공정한 판정과 대회운영을 무시하는 태도가 스포츠맨십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올림픽에서 오심과 부정행위가 속출하는 잔치로 전락시킨 것과는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그것도 신사의 나라라고 자처하는 영국에서 말이다. 영국이 야구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재미있다. 인간이 심판을 보기 때문에 판정에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루가 비신사적이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신사도를 중시하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올림픽에서 비신사적인 오심 판정의 난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프로야구 선수들은 스포츠맨다운 행동을 보여줬다.  얼마 전 10구단 창단이 무산되자 선수협회에서는 올스타전과 WBC(세계야구월드컵) 보이콧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내세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열광적인 성원을 보낸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올스타전에 임했다.  선수나 팬들을 고려하지 않고 구단의 손익만 생각하는 기존구단을 상대로 벌였던 실력 행사도 팬들의 열렬한 성원을 등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수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했다면 올스타전과 WBC 불참을 고집했겠지만 그들은 팬들을 먼저 고려했고 훌륭한 경기를 펼쳐 그동안 팬들이 자신들에게 보내준 아낌없는 사랑과 성원에 보답했다. 물론 롯데를 사랑하는 극성팬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로 인해 롯데 선수들이 투수를 제외한 동군 라인업 포지션 모두를 차지한 것이 조금은 애석한 부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감안해서 투수들도 투구회수를 정해 던지도록 할 뿐 아니라 감독도 선수들에게 사인을 내지 않고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본인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해서 재미있는 경기를 팬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80년대 올스타전에서는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마련으로 올스타 출전선수들과 연예인들이 함께 방송에 출연해 장기자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마련하는 전야제가 있었고 개막식에도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해 축하공연을 펼쳐 올스타전의 열기를 북돋았다.  어느덧 30년 세월이 흘러 올스타전 출전 선수나 출연했던 연예인들도 이제 모두 중년이 되었다. 올스타전 소식을 접할 때 마다 그 때를 돌아보며 현장에서 그들과 같이했던 추억에 젖어본다.

2012-08-02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돌 직구' 사나이 황규봉 투수

임신근, 남우식, 이선희와 함께 경북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규봉. 이들 네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올드 야구팬들은 가슴이 뛴다. 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야구의 보배같은 존재들이다.  야구계의 제갈량으로 불리었던 대구 야구의 대부 서영무 감독의 제자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 모두가 혹사로 인한 부상으로 기량을 제대로 발휘를 못하고 마운드를 떠났다는 점이다. 이것이 70년대 한국 야구의 병폐였고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당시 투수들은 전국대회에서 북 치고 장구치는 원맨쇼를 하다시피 하면서 우승기와 트로피를 따냈다.  짝배기(왼손 투수를 일컫는 속어) 이선희와 번갈아 가며 마운드를 지키면서 72년 대통령배, 화랑대기, 우수고교초청경기에서 경북고를 우승시킨 투수가 바로 ‘돌 직구’ 황규봉이다. 동기인 이선희는 이때만 해도 황규봉의 뒤를 받쳐주던 릴리프 투수였다. 경북고 시절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황규봉이었다.  고교 최고투수였던 그는 고려대로 진학했고 대학 1학년 시절부터 국가대표 에이스로 선발될 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투수였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약관 20세에 태극마크를 달고 참가했던 73년 필리핀 아시아선수권대회였다.  대표팀이 묵고 있던 마닐라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일찍 대피했지만 황규봉은 미처 피하지를 못했다. 3층에서 뛰어내린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허리 부상을 입는 불상사를 겪었다.  이때 겪은 고소공포증에 협심증, 극도의 정신불안으로 1년 반 투병생활을 했다. 황규봉은 2년 뒤에 다시 공을 잡았고 4학년 무렵에는 고대 에이스와 국가대표로 복귀하며 재기했다. 대학 졸업후 김재박, 정순명과 함께 신생 팀 한국화장품 창단 멤버가 됐다. 시즌 중반에 20승을 올리며 최고의 투수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때 황규봉의 구위에 눌린 타자들이 그의 투구에 ‘돌 직구’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하지만 그에게 불행의 먹구름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고소공포증이 재발해 그는 한 동안 선수생활을 접고 휴양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과 불굴의 정신은 그를 마운드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 세번째 국가대표 유니폼도 함께 입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가리켜 ‘원조 불사조’라고 부른다.  프로야구 첫해 15승11패 방어율 2.47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린 그는 다승공동 2위와 12세이브로 구원투수 1위에 차지하며 프로 최초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받았다. ‘돌 직구’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시즌 첫해 200회 이상을 던지는 무리한 등판으로 이듬해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오뚝이 같이 다시 일어나 84년 젊은 투수들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10승2패(승률 1위), 85년 14승7패의 성적을 올리면서 삼성 라이온스가 첫 우승을 하는 데 트로이카였던 김시진, 김일륭과 함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선수 수명으로 치면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가 불굴의 4전5기(四顚五起) 정신으로 역경을 이겨내면서 마운드를 굳게 지켜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됐다.  5년이라는 짧은 선수생활이었지만 황규봉이라는 훌륭한 선배 투수가 보여준 불굴의 투지와 정신은 조카나 자식 같은 후배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희망이 됐다.

2012-07-19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꽃미남' 투수 문희수의 짧았던 투수인생 ①

1980년대 해태 우승에 한몫을 한 선수 중에 ‘꽃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가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한창 피어나는 예쁜 처녀와 같은 외모를 지닌 문희수라는 투수가 그 주인공이다. 선동렬의 광주일고 3년 후배로 83년 대통령배 우승을 포함 광주일고를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며 최초로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진출한 선수다. 문희수는 1985년 12승을 올리는 등 1995년까지 통산 59승49패13세이브,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 바로 연고지인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그의 광주일고 선배인 이상윤과 선동렬의 뒤를 있는 3선발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하면서 144이닝을 던지면서 12승8패라는 성적으로 성공적으로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특히 김응룡 감독의 문희수에게 거는 기대는 보통 이상이었다. 문희수가 일찍이 부상으로 인해 마운드를 떠나게 되자 가장 안타까워하면서 “매우 아까운 선수”라고 항상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과 의리의 사나이’답게 문희수를 투수 코치로 자기 측근에 두고 끝까지 챙겨줬다. 이런 김 감독의 배려에 그는 훌륭한 피칭으로 보답했다. 특히 1988 한국 시리즈 6차전에 등판한 문희수는 게임을 승리로 이끌면서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고 자신은 한국시리즈 MVP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잘나가던 그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체중이 가벼워서 볼도 가벼웠기 때문에 김응룡 감독은 문희수에게 체중을 불리라는 엄명을 내린다. 이것이 그에게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요인이 될 줄을 누가 짐작인들 했겠는가? 그 때부터 문희수는 “매일 저녁식사때면 한 양푼씩 밥을 먹었다”고 했다. 이렇게 체중이 불리는데 성공을 했는데 체중이 불어나면서 그에게는 ‘꽃 돼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작고한 이종남 기자가 붙여준 별명이다.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런 운동을 하게 되자 무릎 관절에 무리가 왔던 것이다. 89년 동계훈련을 시작할 무렵 그는 무릎 통증을 호소하면서 주치의를 찾아가 상담을 하기에 이른다.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요즘 같이 스포츠 의학이 발달되지 못한 시기였던 때라 다른 치료 방법을 시도해 보기도 전에 무릎 수술을 단행했다. 이것이 문희수에게 커다란 악재로 다가왔다. 이유야 어찌됐든 문희수는 수술시기를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1989년 시즌을 시작으로 내리막길을 걷는다. 다른 어느 포지션보다 하체의 힘을 많이 받아야 하는 투수가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겼다면 투수에겐 선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좋은 자질을 갖춘 투수 한 명이 낙후했던 당시의 의료기술로 인해 선수생활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어느 정도로 낙후했었는가 하면 게임하다 타자가 투수의 공이나 자신의 파울 타구에 맞게 되면 트레이너는 뿌리는 물파스 하나만 달랑들고 그라운드로 향한 다음 골절유무만 확인하고 타박상이면 스프레이만 뿌려주고 들어올 정도였다. 더욱 한심했던 것은 구장 내에 응급처치 장비나 시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이 프로야구 초창기의 실태였던 것이다.

2012-07-05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에러(Error)왕' 유지훤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대부분 좋은 기록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두고두고 화제의 꽃이 되지만 나쁜 기록들은 당시에만 화제가 될뿐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게 마련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수비 실책(Error)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과연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실책왕은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OB 베어스에서 유격수로 활약했던 유지훤 현 한화코치이다. 올해 들어 제일 많은 수비 실책을 기록한 선수는 LG 트윈스의 오지환 선수이다. 현재까지 경기당 0.27개의 실책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상태로 남은 경기를 모두 뛴다면 약 35개의 에러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1986년 OB 베어스에서 유격수로 뛰었던 유지훤 한화코치가 83년에 기록해 27년 간 깨어지지 않은 31개를 능가하는 한 시즌 최다 실책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유지훤은 이름과는 다르게 훤칠한 키가 아닌 아주 작달막한 선수였다. 선배 김우열, 박상렬과 함께 오비의 구레나룻 삼인방으로도 잘 알려진 선수기도 하다. 2루수 김광수와 콤비를 이루며 작은 체구를 가지고 OB 내야진을 책임졌던 선수였다. 그는 소년시절 박철순, 김용희, 김용철, 하기룡과 함께 같이 야구를 시작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대광 고등학교 야구부가 생겨 서울로 짐을 싸 올라와 김재박의 직속 후배로 73년 황금사자기 8강까지 진출하면서 중앙무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상업은행을 거쳐 82년 OB 베어스가 창단될 때 프로에 입문하게 된다.  데뷔 첫해 우승 멤버가 되는데 한국시리즈 마지막 게임에서 박철순 투수가 던진 마지막 타구를 처리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뒷문 단속을 말끔하게 해서 어릴 적 친구를 위해 한국시리즈 우승투수가 되는 영광의 선물을 안겨준 의리의 사나이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실책으로 다잡았던 한국시리즈 진출을 해태에게 상납했던 아픈 과거도 함께 지닌 사나이기도 하다. 1987년 해태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9회말 투아웃에서 결정적인 에러를 범하면서 어이없는 동점을 허용한다. 결국 베어스는 해태 킬러 최일언의 끝내기 폭투로 타이거즈에게 5차전에서 패하면서 한국 시리즈 진출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때 순간을 김성한 선수의 말을 통해 들어보면 이렇다. “그날 앞선 4타석에서 안타를 뽑지 못했어요. 당시 최일언은 해태 킬러였는데 특히 인코스 볼이 위력적이었죠. 볼카운트 1-1에서 3구째도 몸쪽으로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빗맞았어요. 치는 순간 죽었구나, 졌구나! 하는 생각밖에 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이때, 유지훤이 타구 바운드를 맞추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면서 공을 잡으면서 1루에 던졌는데 그 때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던 내가 아슬아슬하게 1루를 먼저 밟았던 거예요. 살아야겠다고 뛴 게 아니라 시즌을 마치는 마지막 타석이라 열심히 뛴 것이 우연히 살았던 거죠.”  유지훤에게 1987년은 악몽의 한 해였다. 또 다른 최악의 대기록을 세우게 되는데 최다 연타석 무안타 기록을 세운 것이다. 무려 47 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한 것이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다. 열두 게임 동안 한 개의 안타도 때리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 기록 역시 깨어지지 않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록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의 타순은 8번 아니면 9번 등 매번 하위타순에 배정되는 게 일상사였다. 하지만 뛰어난 수비는 아니었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수비를 하는 성실한 자세로 OB 유격수 계보의 시금석이 된 인물이었다. 실제 OB 베어스의 유격수는 공격보다는 수비가 더 강한 것이 지금까지 전통으로 내려온다.  1989년 6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OB에 남아 후배들에게 뼈아픈 실수를 하는 선수가 되지 않고 훌륭한 내야수가 되는 노하우를 지도하는 코치로 새로운 야구인생을 시작한다. 비록 수치스러운 기록의 소유자지만 몸을 날려가면서 까지 투지를 보이며 그만이 가지고 있는 성실함이 유지훤을 장수하는 지도자로 살아 갈 수 있게 했다고 본다.

2012-06-28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용병 아닌 용병' 재일동포 투수들

요즈음 한국프로야구에서 뛰는 용병선수들의 활약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용병타자는 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몇 명 남아있는 투수들의 활약도 이 전만 못하다.  이제는 재일동포 출신 선수들보다 외국인 용병 선수들이 대세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많이 성장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마추어 수준과 같았던 한국프로야구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 제일동포 선수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 첫 단추를 낀 선수가 삼미의 투수는 장명부, 타자는 이영구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카프스에서 2년 연속 우승의 주역이었던 장명부의 활약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60경기에 등판하여 36번 완투를 하면서 30승을 올리며 아직도 깨지 않은 대기록을 세웠다. 그 당시 60경기 출장이라는 숫자는 투수에게는 거의 전 경기에 뛰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런 기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해태에는 주동식 투수와 김무종 포수가 등장하게 된다. 이 때 주동식의 나이가 35살이었다. 그 당시 김응룡 감독을 제외하고 팀 내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니혼햄)와 한신 타이거스에서 11년 동안 중간계투 투수로 뛰며 통산 16승 19패 평균자책점 3.97의 성적을 남겼다. 한국에서의 기록은 2년간 해태 유니폼을 입고 통산 13승12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94를 기록했다. 물론 장명부나 삼성의 김일륭에 비해 성적이 많이 떨어졌었다.  그러나 83년 후기 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과 가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2승을 건지며 우승트로피를 해태가 품게 한 일등공신이다.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동식이 고국 땅을 밟은 이유는 “너는 반드시 한국에 가서 야구를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소원 때문이었다. 이들 재일동포 선수들이 아버지의 나라를 찾아오게 된 대부분의 이유는 주동식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으로 삶의 터를 옮겼을 때 정작 어려웠던 건 언어문제보다 일본과 다른 야구문화와 또 다른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팬들은 물론 동료선수들도 반 쪽발이라고 멸시하는 태도가 이들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며 선수 생활을 하는 데 많은 장애물이 되었다.  마치 지금의 다문화 가정이 겪는 설움과 같았다. 주동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김응룡 감독으로 꼽는다. 김 감독과 말다툼한 기억이 많았다고 선수시절을 회상했다. “선수기용이라든가 야구스타일이 일본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투수교체 타이밍 때문에 실랑이를 자주 벌였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투수를 바꾸려고 마운드에 올라간 김응룡 감독에게 공을 주지 않고 화가 난 얼굴로 포수 쪽으로 집어던져 김 감독을 당황하게 만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김응룡 감독에게 이렇게 대항하던 선수는 아마 그가 유일무이 할 것이다.  한국야구가 오늘과 같이 세계적으로 성장하는데 이들 재일동포 선수들의 동족의 차별과 낯선 고국의 이질적인 야구문화를 감수해 내면서 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한 그들의 업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2012-06-21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스스로 호랑이가 된 사자' 서정환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 난 새끼를 라이거라고 부른다. 호랑이와 사자의 피가 반반씩 섞이긴 했어도 그 용맹성은 어디로 가겠는가?  이와 비슷한 상황이 83년 쓸만한 유격수가 절실히 필요했던 해태 타이거즈가 현금을 주고 삼성 라이온스 소속이었던 서정환을 트레이드하며 벌어졌다. 당시 삼성 라이온스에 유격수로 창단 멤버가 된 서정환은 천보성, 오대석, 장태수 같은 쟁쟁한 유격수가 즐비한 삼성에서는 주전으로 출전하기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경북고 은사이면서 당시 삼성 라이온스 감독이었던 서영무 감독을 찾아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를 해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물론 서정환도 국가대표 출신이지만 이들보다는 공격력이 떨어지는 게 문제였다. 제자의 장래를 생각한 서영무 감독은 그를 해태로 트레이드를 시켜줬다. 겨우 1600만원에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프로야구사상 첫 트레이드였다. 서정환은 자신을 해태로 보내준 고 서영무 감독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실제로 삼성과 경기할 때마다 서 감독을 찾아가 인사를 하며 예를 갖췄다. 사자가 호랑이 굴을 찾아가 스스로 호랑이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정환의 저주’가 시작됐다. 서정환을 싼값에 트레이드한 삼성 라이온즈는 이후 한국시리즈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고, 해태타이거즈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서정환은 유격수로서 빼어난 수비와 필요로 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알찬 공격력을 발휘해 다섯 차례나 해태 우승에 톡톡히 기여를 하면서 해태 맨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같이 서정환은 견실한 수비와 빠른 발을 이용한 플레이로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86년에는 43번이나 2루를 훔치면서 도루왕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선수 대부분이 군산상고-광주일고 동문으로 구단 분위기가 이루어져서 지역 색이 상당히 강했던 팀인 해태에서 대구출신으로 선수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봐서는 친화력이나 적응력이 매우 뛰어났던 선수였다. 양준혁, 손혁, 최원호 등은 해태에 트레이드되자 이를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갈 정도로 타지역 출신이 적응하기 어려운 팀으로 알려져 있는 팀이 바로 해태이기 때문이다.  서정환은 해태 유니폼으로 새롭게 갈아입고 ‘꽃미남’ 2루수로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차영화와 함께 멋진 키스톤 콤비를 이뤘고, 87년 백인호가 입단하자 유격수 자리에서 밀려나 주로 2루수 차영화의 백업 선수로 출전하게 된다.  그는 굉장히 마른 체형으로 김응룡 감독 이하 당대의 해태 선수 치고는 왜소한 체격으로 전 경기를 소화할만한 체력이 되지 못해 힘들게 선수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그가 1988년에 딱 한번 3할을 치게 되는데 이 때 홈런 개수가 하나도 없는 무홈런 3할 타자가 된다. 장타 보다는 단타 위주의 타격으로 이루어낸 성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핸디캡을 하나씩 풀어나간 몇 안 되는 선수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한 그의 성실함이 인정을 받아 고향 팀 삼성 라이온스 감독을 역임하고 얼마 후 제2의 고향 팀인 기아 타이거즈 감독의 자리에 올라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성적부진으로 인해 감독생활은 오래 하지 못했다. 지금은 야구해설자로 팬들과 같이하면서 한편으로 야구 꿈나무를 찾아 육성하기 위해 폐교 위기에 처한 경기도 여주에 있는 송삼초등학교 리틀야구단 총감독을 맡아 자신이 아는 야구기술과 함께 삶의 철학을 모두 전수할 예정이다.

201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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