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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꽃미남' 투수 문희수의 짧았던 투수인생 ①

1980년대 해태 우승에 한몫을 한 선수 중에 ‘꽃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가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한창 피어나는 예쁜 처녀와 같은 외모를 지닌 문희수라는 투수가 그 주인공이다. 선동렬의 광주일고 3년 후배로 83년 대통령배 우승을 포함 광주일고를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며 최초로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진출한 선수다. 문희수는 1985년 12승을 올리는 등 1995년까지 통산 59승49패13세이브,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 바로 연고지인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그의 광주일고 선배인 이상윤과 선동렬의 뒤를 있는 3선발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하면서 144이닝을 던지면서 12승8패라는 성적으로 성공적으로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특히 김응룡 감독의 문희수에게 거는 기대는 보통 이상이었다. 문희수가 일찍이 부상으로 인해 마운드를 떠나게 되자 가장 안타까워하면서 “매우 아까운 선수”라고 항상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과 의리의 사나이’답게 문희수를 투수 코치로 자기 측근에 두고 끝까지 챙겨줬다. 이런 김 감독의 배려에 그는 훌륭한 피칭으로 보답했다. 특히 1988 한국 시리즈 6차전에 등판한 문희수는 게임을 승리로 이끌면서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고 자신은 한국시리즈 MVP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잘나가던 그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체중이 가벼워서 볼도 가벼웠기 때문에 김응룡 감독은 문희수에게 체중을 불리라는 엄명을 내린다. 이것이 그에게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요인이 될 줄을 누가 짐작인들 했겠는가? 그 때부터 문희수는 “매일 저녁식사때면 한 양푼씩 밥을 먹었다”고 했다. 이렇게 체중이 불리는데 성공을 했는데 체중이 불어나면서 그에게는 ‘꽃 돼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작고한 이종남 기자가 붙여준 별명이다.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런 운동을 하게 되자 무릎 관절에 무리가 왔던 것이다. 89년 동계훈련을 시작할 무렵 그는 무릎 통증을 호소하면서 주치의를 찾아가 상담을 하기에 이른다.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요즘 같이 스포츠 의학이 발달되지 못한 시기였던 때라 다른 치료 방법을 시도해 보기도 전에 무릎 수술을 단행했다. 이것이 문희수에게 커다란 악재로 다가왔다. 이유야 어찌됐든 문희수는 수술시기를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1989년 시즌을 시작으로 내리막길을 걷는다. 다른 어느 포지션보다 하체의 힘을 많이 받아야 하는 투수가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겼다면 투수에겐 선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좋은 자질을 갖춘 투수 한 명이 낙후했던 당시의 의료기술로 인해 선수생활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어느 정도로 낙후했었는가 하면 게임하다 타자가 투수의 공이나 자신의 파울 타구에 맞게 되면 트레이너는 뿌리는 물파스 하나만 달랑들고 그라운드로 향한 다음 골절유무만 확인하고 타박상이면 스프레이만 뿌려주고 들어올 정도였다. 더욱 한심했던 것은 구장 내에 응급처치 장비나 시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이 프로야구 초창기의 실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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