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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용병 아닌 용병' 재일동포 투수들

요즈음 한국프로야구에서 뛰는 용병선수들의 활약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용병타자는 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몇 명 남아있는 투수들의 활약도 이 전만 못하다.

 이제는 재일동포 출신 선수들보다 외국인 용병 선수들이 대세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많이 성장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마추어 수준과 같았던 한국프로야구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 제일동포 선수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 첫 단추를 낀 선수가 삼미의 투수는 장명부, 타자는 이영구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카프스에서 2년 연속 우승의 주역이었던 장명부의 활약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60경기에 등판하여 36번 완투를 하면서 30승을 올리며 아직도 깨지 않은 대기록을 세웠다. 그 당시 60경기 출장이라는 숫자는 투수에게는 거의 전 경기에 뛰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런 기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해태에는 주동식 투수와 김무종 포수가 등장하게 된다. 이 때 주동식의 나이가 35살이었다. 그 당시 김응룡 감독을 제외하고 팀 내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니혼햄)와 한신 타이거스에서 11년 동안 중간계투 투수로 뛰며 통산 16승 19패 평균자책점 3.97의 성적을 남겼다. 한국에서의 기록은 2년간 해태 유니폼을 입고 통산 13승12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94를 기록했다. 물론 장명부나 삼성의 김일륭에 비해 성적이 많이 떨어졌었다.

 그러나 83년 후기 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과 가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2승을 건지며 우승트로피를 해태가 품게 한 일등공신이다.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동식이 고국 땅을 밟은 이유는 “너는 반드시 한국에 가서 야구를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소원 때문이었다. 이들 재일동포 선수들이 아버지의 나라를 찾아오게 된 대부분의 이유는 주동식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으로 삶의 터를 옮겼을 때 정작 어려웠던 건 언어문제보다 일본과 다른 야구문화와 또 다른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팬들은 물론 동료선수들도 반 쪽발이라고 멸시하는 태도가 이들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며 선수 생활을 하는 데 많은 장애물이 되었다.

 마치 지금의 다문화 가정이 겪는 설움과 같았다. 주동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김응룡 감독으로 꼽는다. 김 감독과 말다툼한 기억이 많았다고 선수시절을 회상했다. “선수기용이라든가 야구스타일이 일본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투수교체 타이밍 때문에 실랑이를 자주 벌였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투수를 바꾸려고 마운드에 올라간 김응룡 감독에게 공을 주지 않고 화가 난 얼굴로 포수 쪽으로 집어던져 김 감독을 당황하게 만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김응룡 감독에게 이렇게 대항하던 선수는 아마 그가 유일무이 할 것이다.

 한국야구가 오늘과 같이 세계적으로 성장하는데 이들 재일동포 선수들의 동족의 차별과 낯선 고국의 이질적인 야구문화를 감수해 내면서 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한 그들의 업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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