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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돌 직구' 사나이 황규봉 투수

임신근, 남우식, 이선희와 함께 경북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규봉. 이들 네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올드 야구팬들은 가슴이 뛴다. 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야구의 보배같은 존재들이다.

 야구계의 제갈량으로 불리었던 대구 야구의 대부 서영무 감독의 제자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 모두가 혹사로 인한 부상으로 기량을 제대로 발휘를 못하고 마운드를 떠났다는 점이다. 이것이 70년대 한국 야구의 병폐였고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당시 투수들은 전국대회에서 북 치고 장구치는 원맨쇼를 하다시피 하면서 우승기와 트로피를 따냈다.

 짝배기(왼손 투수를 일컫는 속어) 이선희와 번갈아 가며 마운드를 지키면서 72년 대통령배, 화랑대기, 우수고교초청경기에서 경북고를 우승시킨 투수가 바로 ‘돌 직구’ 황규봉이다. 동기인 이선희는 이때만 해도 황규봉의 뒤를 받쳐주던 릴리프 투수였다. 경북고 시절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황규봉이었다.

 고교 최고투수였던 그는 고려대로 진학했고 대학 1학년 시절부터 국가대표 에이스로 선발될 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투수였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약관 20세에 태극마크를 달고 참가했던 73년 필리핀 아시아선수권대회였다.



 대표팀이 묵고 있던 마닐라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일찍 대피했지만 황규봉은 미처 피하지를 못했다. 3층에서 뛰어내린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허리 부상을 입는 불상사를 겪었다.

 이때 겪은 고소공포증에 협심증, 극도의 정신불안으로 1년 반 투병생활을 했다. 황규봉은 2년 뒤에 다시 공을 잡았고 4학년 무렵에는 고대 에이스와 국가대표로 복귀하며 재기했다. 대학 졸업후 김재박, 정순명과 함께 신생 팀 한국화장품 창단 멤버가 됐다. 시즌 중반에 20승을 올리며 최고의 투수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때 황규봉의 구위에 눌린 타자들이 그의 투구에 ‘돌 직구’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하지만 그에게 불행의 먹구름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고소공포증이 재발해 그는 한 동안 선수생활을 접고 휴양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과 불굴의 정신은 그를 마운드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 세번째 국가대표 유니폼도 함께 입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가리켜 ‘원조 불사조’라고 부른다.

 프로야구 첫해 15승11패 방어율 2.47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린 그는 다승공동 2위와 12세이브로 구원투수 1위에 차지하며 프로 최초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받았다. ‘돌 직구’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시즌 첫해 200회 이상을 던지는 무리한 등판으로 이듬해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오뚝이 같이 다시 일어나 84년 젊은 투수들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10승2패(승률 1위), 85년 14승7패의 성적을 올리면서 삼성 라이온스가 첫 우승을 하는 데 트로이카였던 김시진, 김일륭과 함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선수 수명으로 치면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가 불굴의 4전5기(四顚五起) 정신으로 역경을 이겨내면서 마운드를 굳게 지켜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됐다.

 5년이라는 짧은 선수생활이었지만 황규봉이라는 훌륭한 선배 투수가 보여준 불굴의 투지와 정신은 조카나 자식 같은 후배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희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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