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단체-Then&Now (1)] LA한인상공회의소, 36명 의기투합…한인타운 상권 기틀 마련
경제 위기 속 한인 경제단체들의 초창기 설립 모습을 살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들을 진단해 본다. 1971년 3월3일 LA한인타운 한영식당에 김중정씨 등 7명의 한인이 모였다. 당시 한인경제의 주종목이었던 가발업을 하는 한인업주들끼리의 출혈경쟁을 지양하고 한인상공인의 친목과 상호협조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현 LA한인상공회의소의 전신인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의 시작이다. 1965년 케네디 이민법이 통과되면서 1970년대 초반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자 수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올림픽과 8가를 중심으로 한인 상권이 막 형성될 때다. 당시 한인 경제의 핵심은 가발업이었다. LA에서 가발업을 하던 김시면씨는 자비 5만달러를 들여 김포공항 입구에 약 70피트(21m) 높이의 '조국에 드리는 탑'을 세우기도 했다. 1971년 3월28일에는 김중정 김종식 김경진 김시면 김영권 남궁봉 박규현 배기생 소니아 석 이교숙 이용 정화섭 조지 최씨 등 36명의 실업인들이 LA다운타운 힐튼호텔 대원각 참석해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대원각은 1969년 김정선씨가 연 대규모 한 중식 고급식당이었다. 남가주 한인상의는 그해 6월7일 대원각에서 56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총회를 열고 회장에 부동산업을 하던 조지 최씨를 선출한다. 초대 남가주 한인상의 사무실은 현재 머큐리 콘도로 바뀐 유니언뱅크 빌딩(3801 Wilshire Blvd) 1101호였다. 정관은 이교숙씨가 한국에서 들고 온 대한 상공회의소 회칙을 바탕으로 전문 25조로 만들었다. 조지 최 초대회장이 남가주 한인회 회장에 선출돼 한인상의는1971년 11월20일 이사회를 열고 이용(작고)씨가 2대 회장에 취임한다. 1973년 6월3대 회장 선출을 놓고 한인상의 이사회는 내분에 쌓였다. 발기인 중심의 이사회에서 전 상공인이 참여하는 이사회 체재로 전환됐다. 그해 12월 정기총회를 통해 가발업을 하던 이학조씨가 3대 회장에 선출된다. 이씨는 래디슨 윌셔 호텔을 인수하며 부동산 재벌로 떠올랐던 리오 이씨의 아버지로 엘리베이터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LA한인상의에는 4대 회장이 없다. 이에 대해 LA한인상공회의소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운 한군석 전 회장은 "아마도 숫자 '4'가 재수없다는 뜻에서 3대 다음에 5대로 건너 뛴 것 같다"고 말했다. 5대 윤병욱 회장은 1975년 12월 선거로 당선됐다. 31명의 이사가 양쪽으로 갈리면서 16표를 얻은 윤씨가 1표차로 당선됐다. 한인상의의 초기 사업들을 살펴보면 지금 못지않게 상공회의소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SBA융자 무역 부동산 투자 신용조회 소자본 투자 세미나 등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고 친선골프대회 모국방문으로 우의를 다졌다. 한국학교 지원을 위한 모금 만찬회를 개최하고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커뮤니티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또 한인 2860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경제실태 조사 설문도 실시됐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출판활동도 진행됐다. 기자출신인 윤병욱씨와 한군석씨가 각각 발행인과 편집인이 돼 만든 남가주 상공회보가 나왔고 1977년에는 '미주생활정보'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상공회의소 정관이 틀을 잡고 개정된 시기도 이 때다. 당시 이사수는 31명. 이사 및 회장단의 임기는 2년 이었다. 지금은 이사 수가 88명이며 임기는 이사회비를 내지 않는 등 결격사유가 없는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이어 6대 이정수(1978~1979) 7대 장기열(1980~1981)씨가 상의를 이끌었다. 8대는 문창배 회장(1982~1983)이 회장선거에서 4표차 당선됐고 함께 경선을 벌인 양효길씨는 9대 회장(1984~1985)이 됐다. 그동안 2년씩 회장을 수행했으나 10대 이청광 회장(1986~1987) 때 부터는 1년씩하고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11대 회장인 한군석씨는 1974년 한인상의에 가입한 뒤 35년간 상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상공회의소 주도로 88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패서디나 로즈 퍼레이드의 꽃차를 등장시켰다. 예산이 26만달러로 당시 한인경제규모나 물가로 봤을 때 정말 큰 사업이었다. 이후 2003년 이민 100주년을 맞아 로즈 퍼레이드 꽃차가 다시 등장했다. 1989년 12대 이영송 회장 때는 미주 동포 실업인들 14명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13대 방미철, 14대 이용기, 15대 강득휘, 16대와 17대 하기환, 18대 정인철, 19대와 20대 김상호, 21대와 22대 강상윤, 23대와 24대 김성주, 25대 최명진, 26대 이용태, 27대 에리카 김, 28대 한문식, 29대 신구현, 30대 정주현, 31대 이창엽, 32대 스테판 하 현 회장등 LA한인경제 LA한인경제의 주역들이 상의를 이끌어 오고 있다. 스테판 하 현 회장은 "정관개정을 통해 회원과 이사 구조의 상의를 이끌어 가겠다"며 "1000명의 회원이 참석하는 '열린상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정 기자 kijungkim@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