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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휴전협상 '막판조율'…가자 피비린내 멈추나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18일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작년 10월 7일 가자전쟁 발발 후 9번째 방문이다.   지난 15∼16일 카타르 도하에서 이스라엘, 미국, 이집트, 카타르가 가자지구 휴전과 인질 석방 협상을 끝낸 지 이틀 만이다. 중동 지역 확전을 막고 휴전 협상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한 외교 행보로 해석된다.   도하 협상은 이스라엘의 미온적 태도와 하마스의 불참 속에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됐다. 미국 등 중재국들은 이견을 좁히기 위한 중재안을 제시했다며, 이번 주 이집트 카이로에서 후속 협상을 이어간다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이날 이츠하크 헤르조그 이스라엘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현재 진행 중인 협상이 11개월째에 접어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합의에 이를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AFP 통신에 따르면 그는 “이건 결정적 순간”이라며 “인질들을 집으로 데려오고 휴전을 성사시키며 모두가 항구적 평화와 안보를 위한 더 나은 길로 나아가도록 할 최선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백악관 고위 관계자도 가자 휴전 협상이 ‘엔드게임(최종단계)’에 있다고 언급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 16일 브리핑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이집트, 카타르 지도자들이 통화했다고 전하고 “지난 몇 달간 진행됐던 절차들이 이제 최종단계에 이르렀다는 데 세 지도자 간에 공감대가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미국은 특히 지난달 말 헤즈볼라 최고위 지휘관 푸아드 슈크르와 하마스 정치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 피살 등으로 이란의 이스라엘 보복 공습 우려가 제기된 상황에서 가자 휴전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고 외교 공간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왔다.   자국에서 발생한 하니야 암살의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하고 피의 보복을 공언한 이란은 휴전 협상을 지켜본다는 입장을 피력했다는 언론 보도들이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미, 이란, 이스라엘 당국자들을 인용해 이란이 가자 휴전협상을 위한 시간을 주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공습을 미룰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난 16일 보도한 바 있다.   악시오스 등 매체들에 따르면 이란은 카타르, 이집트 등 이번 휴전협상에 참여하는 아랍권 중재국들과 접촉하며 협상에 개입하고 있다.   특히 이란은 가자지구 휴전을 통한 중동의 안정을 원한다는 입장을 미국에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자지구 종전은 대선후보직에서 사퇴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중동정세 안정을 위해 퇴임 전에 해결할 최우선 과제로 삼는 사안이기도 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블링컨 장관을 이스라엘에 보내는 이유에 대해 협상 타결을 위한 ‘집중 노력’ 외에도 “포괄적 휴전과 인질 석방 협상이 눈앞에 다가온 지금, 이 지역 누구도 이 과정을 훼손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이란이 주도하는 보복 행위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이란의 보복과 그에 따른 이스라엘의 재반격은 중동을 더 큰 전쟁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외교 전선에서 진전을 이루면 더 큰 혼란을 막아낼 수 있다고 기대감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미국 등 중재국을 제외하면 기대는 크지 않은 듯 보인다.   영국 가디언은 이번주 추가 협상이 예정돼 있지만 이는 ‘진정한 평화의 기회’라기 보다는 논의 과정을 살리려는 ‘필사의 시도’처럼 느껴진다고 평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지도자들이 지금 싸움을 계속하는 게 더 얻을 게 많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마스도 도하 협상에서 나온 중재안을 거부했다. 하마스는 “네타냐후 총리가 더 많은 조건을 추가해 (협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하마스의 새 정치지도자로 휴전 협상을 이끌게 된 신와르는 그동안 가자지구 지도자로 대이스라엘 무력 저항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상대적으로 실용주의자였던 하니예와 다르다.   가디언은 “신와르는 협상에서 하마스가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며 그가 가자 민간인 피해가 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을 키워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와르는 또 가자 많은 지역에 하마스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새 전투원도 모집할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고 가디언은 덧붙였다.   이어 협상의 핵심은 신와르와 네타냐후 총리가 모두 ‘승리’라고 주장할 만한 공식을 찾아내는 것이라며, 이는 매우 어렵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짚었다.   한편 네타냐후 총리가 19일(현지시간) 블링컨 국무장관을 만나 가자지구 휴전·인질석방 협상 논의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보도했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이날 3시간에 걸친 회담 뒤 낸 성명에서 “회동은 긍정적이었다. 좋은 분위기였다”며 “네타냐후 총리는 최근 미국의 인질 석방 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외견상 미국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뜻이지만 네타냐후 총리가 하마스 완전 소탕을 휴전의 조건으로 보는 만큼 미국과 공조하겠다는 외교적 수사일 가능성도 있다.       ━   이란도 가자 협상에 물밑 개입      이란 중재국과 잇단 통화 전면전 피할 ‘명분’ 모색   중동 지역 확전을 막기 위한 가자 전쟁 휴전 협상에 이란이 다각도로 개입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18일 보고서를 통해 이란이 이번 휴전 협상 기간 중재 당사국과 여러 차례 접촉해왔다고 밝혔다.   ISW에 따르면 알리 바게리 이란 외무장관 대행은 15일과 16일 이틀에 걸쳐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사니 카타르 총리 겸 외교부 장관과 전화 통화를 했다.   이란은 이번 휴전 협상에 직접적인 중재 당사국이 아니다. 카타르 도하에서 15∼16일 열린 회담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중재국들과 물밑 접촉을 통해 진행 상황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협상 타결 여부가 이란으로서도 중요한 문제기 때문이다.   가자지구 휴전은 하마스 정치지도자 하니예가 지난달 31일 테헤란에서 암살된 이후 이란이 공언해온 대이스라엘 보복을 억제하거나 그 수위를 완화할 열쇠로 여겨진다.   이란 고위 당국자들은 최근 가자지구 휴전 협상에서 합의가 도출될 경우에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직접적 보복이 자제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FOCUS 피비린내 막판조율 휴전 협상 가자지구 휴전과 하마스 정치지도자

2024-08-19

한·미·베 향군 모여 한국전 휴전 기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남서부지회(이하 남서부지회, 회장 박굉정) 주최, 실비치 평강교회(담임목사 김삼도) 후원으로 열린 제71주년 한국전 휴전 기념 행사와 음악회가 약 300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날인 지난달 27일 실비치 레저월드 1번 클럽하우스에서 열린 행사엔 주최 측이 초청한 미군 한국전 참전용사, 한인과 베트남계 베트남전 참전용사와 그 가족 등이 참석했다.   남서부지회는 최근 미 재향군인회와 베트남계 재향군인회와 활발히 교류하고 각 단체 행사에 서로를 초청하고 있다. 기념 행사 사회를 맡은 김현석 육군 부회장은 “베트남에서 한국군, 미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베트남계 재향군인들도 교류에 적극적이다”라고 전했다.   박굉정 남서부지회장은 젊은 나이에 청춘을 바쳐 나라를 지켜낸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행사를 위해 애쓴 실비치 분회(분회장 허홍렬) 측에도 사의를 표했다.   하사관 시절인 지난 1969년 베트남에서 1년여 동안 복무한 박 회장은 “죽은 전우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트럼펫을 불었기 때문에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모든 재향군인과 그 가정에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함께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이 자리에서 ▶미 재향군인회와 함께 협력하고 한국과 미국 재향군인회가 회원에게 제공하는 혜택을 상호 공유하고 ▶한·미 동맹을 위해 민간 외교에 최선을 다하고 ▶한국군에서 복무한 이후 미 시민이 된 한국전과 베트남전 참전용사를 포함한 재향군인 회원을 위한 보훈 혜택 제공을 위해 임원진과 함께 적극 노력하고 ▶남서부지회 회원들이 향군복을 입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정현 목사(실비치 사랑교회)는 ‘한국을 살린 영웅들’이라는 주제로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점심 식사 후엔 2부 순서로 기념 음악회가 이어졌다. 음악회에선 허인순, 폴 조, 조앤 임, 샘 김씨 등이 귀에 익은 한국과 여러 나라 가곡을 불렀다. 트럼펫, 오토하프, 바이올린 연주와 합창 공연, 시 낭송 등의 순서도 마련됐다. 임상환 기자한국전 향군 베트남계 재향군인회 한국전 휴전 한국전 참전용사들

2024-07-31

차세대에 평화·자유 중요성 일깨워

참전용사기념비위원회(이하 기념비위원회, 회장 박윤숙)가 제1회 한국전쟁 휴전 기념일 행사를 열어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고 차세대에게 평화와 자유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기념비위원회가 화랑청소년재단(총재 박윤숙), 리멤버 727(대표 해나 김)과 함께 마련한 행사는 한국전 정전협정 71주년을 맞은 지난 27일 풀러턴 힐크레스트 공원 내 OC 한국전 참전 미군용사 기념비 앞에서 진행됐다.   참전용사를 비롯한 참가자들은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을 상징하는 오후 6시25분에 미국 국가와 애국가를 제창하며 행사 개막을 알렸다.   데이브 민 가주상원의원, 조이스 안 부에나파크 부시장, 태미 김 어바인 시의원 등 연사들은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했다.   주최 측은 한국전 참전 영웅 로이스 윌리엄스(99) 예비역 해군 대령을 초청했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윌리엄스는 1952년 11월 소련 미그기 7대와 공중전을 벌여 홀로 4대를 격추하는 믿기 어려운 전과를 들려줘 박수갈채를 받았다.   기념비위원회는 2명의 미군 후손에게 각 2000달러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박 회장은 지난 25일 워싱턴 DC에서 케빈 스컬리(메이슨대 3학년)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27일 기념 행사에서 장학금을 받은 케빈 멀둔(변호사, 전 뉴포트비치 시장)은 2000달러를 즉석에서 기념비위원회에 기부하며 “더 어려운 참전용사 후손에게 전달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최근 3개월 동안 16개국에서 7·27 정전과 한국전쟁에 관한 에세이, 미술, 영상 콘테스트를 연 주최 측은 한국어, 영어 에세이 금상 수상자인 오현준, 박시현 학생의 작품 낭독을 통해 차세대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소개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미술 작품을 출품한 다이나나 볼코바, 자크린 바코시는 특별상과 함께 한국 방문의 기회를 얻었다.   행사 참석자들은 휴전 기념일을 상징하는 오후 7시27분 일제히 촛불을 켠 뒤 묵념을 하고 아리랑을 불렀다. 행사는 주최 측이 제공한 카네이션 200송이로 참석자 전원이 기념비에 헌화하며 막을 내렸다. 임상환 기자차세대 중요성 한국전쟁 휴전 차세대가 전쟁 이하 기념비위원회

2024-07-30

[독자 마당] 대한민국의 미래

“전쟁을 잊은 군대는 그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평화는 강력한 힘에 의해 지켜집니다.”   지난 2020년 군 여론조작 은폐·축소 지시 혐의로 기소됐던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2심 재판 중 최후 진술에서 한 말이다. 비록 그가 재판정에서 한 발언이었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1953년 7월27일 휴전 협정까지 1129일(3년 1개월 2일)간 지속했다. 수도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여러 국가가 대한민국에 도움을 줬다. 미국을 포함 16개국이 군을 파견해 직접 참전했다. 6개국은 의료지원팀을 보냈고, 40개국이 물자 수송 지원에 나섰다. 전후 복구사업을 지원한 나라도 6개국이나 된다. 당시 대한민국은 존재감이 크지 않는 나라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국가가 지원에 나선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현재는 어떠한가?  남북이 휴전 협정을 맺은 지도 71년이 됐지만 북한은 여전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발 행위를 일삼고 있다. 반면 6·25 전쟁의 참상을 모르는 한국의 세대는 풍요로운 시대에 안주하는 모습이다.     얼마 전 신문 지상에서 너무나 반가운 뉴스 하나를 봤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4800 달러를 기록, 일본을 추월했다는 것이다. 6·25 전쟁 직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76달러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다. 단기간에 이룬 놀라운 성과였다.   대한민국의 급성장은 전쟁의 폐허를 극복한 기적이며 금자탑이다. 그러나 아직 서민들은 이런 성장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좀 더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자. 그리고 세계 속에 우뚝 선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해 보자.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대한민국 미래 당시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 휴전 협정

2024-07-09

가자 휴전 난항에 인도주의 위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이 4일 150일을 맞은 가운데 협상은 답보 상태다. 하마스 대표단이 회담 장소에 도착했지만, 이스라엘은 생존 인질 명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표단 파견을 보류했다.   4일 CNN·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하마스 가자지구 2인자로 꼽히는 칼릴 알 하이야가 이끄는 협상단이 전날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했다.     중재를 맡은 미국·카타르 대표단도 도착한 상태다.     하마스는 이슬란 금식월 라마단인 오는 11일부터 한 달 뒤 명절인 '이드 알 피트르'(내달 9~10일)까지 휴전을 원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 측은 "하마스가 생존 인질 명단, 교환 대상 보안 사범 수 등 요청사항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다.   휴전안 골자는 인질 교환과 약 4주간의 휴전이다.   이스라엘 감옥에 억류된 하마스 구류자 400명이 풀려나는 대신 억류중인 이스라엘 인질 100명중 약 40명을 석방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앞서 지난달 23일 이스라엘과 중재국이 프랑스 파리에서 4자 회의를 통해 하마스에 이 같은 협상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지난 2일 이스라엘 정부가 이 같은 조건을 "어느 정도 내부적으로 받아들였다"고만 알렸다.     이날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은 하마스측 특사와 중재국 중재국 간 논의에 "상당한 진전이 있다"고 보도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 소통보좌관은 이날 온라인 브리핑을 통해 "이스라엘은 전향적인 협상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며 "그것을 받아들일 책임은 하마스에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 대표단이 파견되지 않은 것에는 "협상안에 동의했으며 하마스가 이를 받아들여 진전을 이루길 바란다"며 "대화가 진행중"이라고만 했다.   가자 지구의 인도적 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최근 카말 아드완 병원에서 어린이 최소 15명이 영양실조와 탈수 증세를 보이다 숨졌다.   지난달 가자지구에 진입한 구호품 트럭 수는 2300여대로, 직전달 대비 50% 가까이 줄었다.   가자지구 인구 220만명중 117만명은 '비상' 수준의 식량 불안 상태다. 강민혜 기자 kang.minhye@koreadailyny.com인도주의 휴전 이스라엘 대표단 하마스 대표단 이스라엘 인질

2024-03-04

[열린 광장] 휴전 협정 직전 북한군의 기습 공격

별이 총총히 빛나는 인천의 밤하늘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며칠 전이었다.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와 서쪽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월미도 쪽에서 휴전 결사반대를 외치는 고함이 들려왔다.     그런데 난데없이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 인천 시내 상공을 한 바퀴 맴도는 소리가 돌리더니, 내가 일하던 미군 유류 저장소가 있는 송도 쪽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이 솟아올랐다. 드럼통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불꽃놀이를 방불케 했다. 북한군이 인천 유류 저장소를 공습한 것이었다. 야적(野積)되었던 중유 500만 갤런이 불타버렸다.     휴전이 임박하여 곧 전투가 끝날 것이라고 모두 긴장을 풀고 있었다. 북한군 비행기는 서해를 저공으로 날아와 유류 저장소에 소이탄을 투하했다. 비행기가 사라진 다음, 유류 저장소를 에워싸고 있던 수십 개의 대공포가 불을 뿜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다음 날 밤에도 대공포 소리에 인천 시민들은 잠을 설쳤다. 휴전 조인 바로 전 유엔군은 뜻밖의 한 방을 맞은 셈이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출근했다. 야적장이 난장판이었다. 터지고 찢어진 드럼통이 뒹굴고, 기름불에 탄 땅은 진흙밭이 되었다. 이 피습 사건 후로 송도와 문학산 기슭에 대형 유류 탱크 20여 개를 설치했다. 이 유류 탱크 청소 작업의 안전 관리가 나의 책임이었다. 주기적으로 청소하려면 탱크를 비우고 물로 몇 번 세척한 다음, 세척 팀은 핸들이 달린 공기 박스에 연결된 잠수복 같은 옷을 입고 들어가서 청소했다.     탱크가 설치된 야산의 풀을 제거하기 위해 산양을 방목했다. 하루는 청소할 탱크를 조사하기 위해 앞문으로 들여다보니 산양이 죽어있었다. 탱크를 물로 청소해도 가스가 남아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빈 기름통이 채운 기름통보다 더 위험하다(Empty fuel containers are more dangerous than full ones) ’라는 말이 있다.    유류 탱크 오작동으로 기름이 민가로 흘러내려 간 일도 있었다. 펑 하며 불이 났다. 소방차가 올라갈 수 없는 언덕이라 그 탱크의 유류가 모두 연소할 때까지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직전 북한군의 인천 유류저장소 폭격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우리는 북한군이 기습의 명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 광장 북한 휴전 인천 유류저장소 휴전 협정 휴전 결사반대

2023-09-26

[독자마당] 휴전

휴전 협정을 해 놓고 이럴 수가 있나?  휴전 협정 이후 지난 70년간 155마일 휴전선을 지키다 희생된 군인 등이 4360명에 달한다고 한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 일이다. 죄 없는 장병들이 이렇게나 많이 희생되었다니…. 아마 관련 보도가 없었다면 국민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은 비록 휴전 상황이긴 하지만 자식이 무사히 국민의 의무를 다 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소리 없는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6·25 전쟁 3년여 동안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남겼다. 그러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한반도의 허리는 두 동강이 난 채 휴전 협정은 마무리됐다. 그런데 그 휴전협정에 정작 당사자인 한국 측은 참여도 배석도 하지 못했다. 휴전은 타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6·25 당시 대한민국은 총알 하나, 수류탄 하나 만들지 못했을 정도로 가난하고 무능한 나라였다. 아무리 이대로는 휴전할 수 없다고 외치고 반대했어도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일 뿐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진입했고, 이젠 자동차도, 항공기도, 탱크도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이산가족은 여태 소식조차 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어 애통하기만 하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 가운데는 경계 근무를 위해  4000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병들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험지를 장병들은 ‘사천리’라고 부른단다.     그곳엔 지금도 매일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국군 장병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국민들은 안심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  나라를 지키는 육해공군 장병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노영자 / 풋힐랜치독자마당 휴전 휴전 협정 육해공군 장병들 국군 장병들

2023-08-29

[발언대] 통한(痛恨)의 휴전, 왜 7·27인가?

전투는 그쳤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휴전은 같은 편에서도 저마다 입장이 달랐다. 북한과 중공, 소련의 입장이 달랐고, UN군 사이에서도 입장이 달랐다. 지면 관계상 긴 이야기는 쓸 수 없지만 결국 휴전은 미국 측의 주장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3년하고 한 달 동안 온 국토가 파괴되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된 채 한반도를 양분하는 휴전안은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온 국민이 휴전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북한은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박격포 등 보병 화기 정도는 자체 생산이 가능할 정도였으나 한국은 총알 하나, 수류탄 하나 만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혼자 전쟁 지속을 주장할 수 없었다.     중공의 참전으로 전선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만주 폭격 주장은 당연할 수도 있으나, 미국은 처음부터 3차 대전을 우려해 6·25를 ‘제한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미군 장성들과 일선 지휘관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이 아닌, 유럽 전선에서 싸운 지휘관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미국은 대통령 선거로 인한 정치적 측면을 고려했을 때, 매일 일개 중대 병력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전쟁 혐오 여론을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한반도 방어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캔자스(Kansas)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판문점 일대의 서부 전선을 고착화했다. 휴전 회담 장소라는 핑계 하에 서부 전선에서의 북진을 포기하고, 중동부와 동부 전선에서도 대대급 이상의 공격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한국전의 승리는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욱이 영국 입장에서는 6·25를 소련의 유럽 침공을 위한 양동 작전으로 보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6·25를 끝내고 유럽 방어에 진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UN군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휴전을 바랐으나, 오히려 칼자루를 쥔 공산군은 느긋하게 2년여를 더 버티다가 휴전에 서명했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정각, 효력이 발생하는 휴전 협정문서는 영문, 한글, 중국어 세 가지 문자로 작성됐다. 연합군사령관인 미 육군 대장 마크 W. 클라크,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팽덕회,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등 3인의 서명이 있고, 그 외에 연합군 수석 대표인 미 육군 중장 윌리엄 K. 해리슨과 북한군 대장 남일, 두 사람이 배석자 자격으로 도합 5명의 서명이 있다. 하지만 한국 측에서는 서명에 참여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배석자로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전(終戰) 운운할 자격 조차  없는 셈이다.   곡절 많은 이 휴전 회담을 왜 1953년 7월27일에 마치게 되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 국가의 보급 능력으로는 더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무기가 충분했다면 전쟁은 지속했을 것이다. 당시 공산군의 보급과 운송 능력은 지상 공세를 3일 이상 버텨낼 수가 없어서, 공산군은 일찌감치 한강 이남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은 UN군 측도 이미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북한은 휴전 후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기회만 있으면 도발을 하고 불리하면 민족애를 앞세운 평화공세로 펼치고 있다. 지금의 남북 대치 상황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종전 아닌, 휴전 상태다. 휴전 70년이 지났지만 이산 가족 간에 편지 한장도 오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아직도 우리는 한반도에서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영세 / 은퇴 목사·ROTC 1기발언대 휴전 휴전 회담 휴전 반대 유럽 전선

2023-07-26

[열린광장] 조용한 휴전

뒷마당의 고추밭이 난장판이 되었다. 여름 내내 나의 입맛을 북돋워 주는 아삭아삭한 아나 하임 고추 모종이다. 마치 삽으로 고추밭을 뒤집어엎어 놓은 것처럼 구덩이를 만들었다. 범인은 고양이다. 어느 집 고양인지 모른다. 땅속의 지렁이를 찾느라고 땅을 파헤쳤다. 매일 먹는 고양이 사료가 싫증 난 모양이다. 꿈틀거리는 지렁이는 고양이의 별식이다.   아니면 길 고양이가 고추밭을 습격했는지도 모른다. 현행범이라야 체포하든가 혼을 내주든가 할 수 있을 텐데…. 삽으로 다시 평지를 만들고 물을 주었다. 창고에 쓰다 남은 개와 고양이 퇴치용 분말도 뿌렸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나가 보니 이번엔 더 많이 파헤쳤다.     구글 선생에게 물어보니 고양이는 식초를 싫어한다고 한다. 식초 두 통을 사다가 뿌렸다. 웬걸, 또 파놓았다. 고양이는 식초가 묻은 지렁이를 맛있게 먹은 듯하다. 땅을 파헤치면서 고추나무까지 뽑아놓았다.   이번엔 마른 고추 두 봉지를 사다가 뿌렸다. 하지만 고양이는 다시 와서 파헤쳤다. 고양이의 지렁이 요리에 식초와 고춧가루를 뿌려준 셈이다.   고양이를 잡아 혼내주고 싶다. 물총이라도 쏴주고 싶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면 동물학대법에 저촉될 수 있다. 이놈을 혼내주려면 뒷마당에 전기를 켜놓고 밤샘을 해야 한다. 잠복해야 한다.     옛날 고향에서 고구마밭을 습격하는 산돼지와 숨바꼭질을 했었다. 돼지가 고구마를 먹는 것은 좋지만 고구마밭을 파헤쳐놓는 것이 질색이었다. 밤에 고구마밭에 거적때기를 깔고 잠을 자다가 두세 번 일어나서 세숫대야를 두들기며 소리 지르고 노래도 불렀다.   뒷마당에 놓여 있던 화분을 모두 고추밭으로 옮겼다. 고양이가 들어갈 틈도 없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화분 사이를 비비고 들어가서 땅을 파놓았다. 다시 세웠던 고추나무가 또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구글 선생에게 다시 물었다. 고양이는 냄새가 강한 소독약이나 세척제를 싫어한다고 한다. 몇 년째 사용하지 않아 뒹굴던 솔잎 냄새가 나는 세척제를 뿌렸다. 아침에 나가서 보니 고추밭이 그대로 있다. 두 군데 흙을 파헤친 자국만 있다. 고양이가 흙을 파다가 솔잎 냄새 때문에 포기한 듯했다.   고양이가 열흘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있다. 고양이의 습격과 식초, 그리고 세척제 세례를 받은 고추는 누렇게 초주검이 되었다. 올해 고추 농사는 틀렸다. 고추나무는 망가졌으나 고추밭은 조용하고 이상이 없다. 다행히 고양이도 다친 곳이 없었으며 싸움은 멈췄다. 조용한 휴전이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휴전 고양이 퇴치용 고양이 사료 모두 고추밭

2023-07-19

[기고] 휴전 70주년, 하지만 끝나지 않은 6·25전쟁

잊어선 안 될 전쟁 6·25, 그리고 1953년 7월27일 총소리가 멈춘지도 어느새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세기 세계사의 3대 전쟁으로 평가되는 한국전쟁은 오래 전 끝났지만 여전히 휴전, 혹은 정전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는 급속한 발전으로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과 세습독재 탓에 경제난에 허덕이는 북한이 휴전선을 맞대고 있다. 이런 불가사의한 상황에서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위협은 지속하고 있는 설정이다.     동족상잔의 아픈 상처를 기억하는 전쟁세대들은 이제 천수에 가까웠다. 많은 생생한 역시가 묻힐 처지에 있다는 의미다. 고 백선엽 장군이 지휘한 낙동강 다부동전투도 그중 하나다. 아군 병력 8000명으로 적군 3만 명과 대치한 그 치열한 전투로 강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거기서 만약 우리 군이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뒤돌아서면 나를 쏴라”는 백 장군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의 활약 덕에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토록 많은 고지전투와 압록강까지의 진격, 살인적인 추위에서 포위망을 뚫고 필살의 탈출을 감행한 장진호전투, 20만 명의 북한 피난민을 실어나른 흥남 철수작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각 전선에서 백병전도 불사했던 우리 국군의 용맹과 희생적 헌신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살신성인의  현장이었다.         침략자 북한 정권은 휴전 협정을 맺은 7월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 약칭 ‘전승절’이라며 기념하고 있다. 자기들이 전쟁에서 이겼다며 역사를 왜곡하며 ‘나홀로’ 찬양하고 있다.     한편 미국도 정전 70주년 행사를 ‘자유세계가 이긴 전쟁’으로 기린다. 10년 전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전은 이긴 전쟁입니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우리는 자유를 지켜냈고, 자유민들이 굴복하지 않았음을 기록하게 될 것이니 한국전은 승리였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입니다.”  정말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국가의 부름에 응한 미국의 젊은이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달려가 싸운 미국에 대한 감사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전 정전 7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막중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현재 상황은 녹록지 않다. 미중 패권전쟁이 가시화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에서 신냉전의 조짐마저 보인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에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올 수도 있다. 참전 유공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하며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가을 유엔총회에 참석해서 한 연설에서 유엔에 대한 감사는커녕 침략자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자유민주국가의  체제를 훼손하는 행위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재 남북은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 휴전 상태다.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전한 휴전 상태에서 벗어나 긴장과 대치 상태를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 시대로의 전환이 통일 뭇지않게  국민적 소원으로 남아 있다.     이제 전쟁 당사자인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하여 전후 70년의 위대한 성취를 폐허에서 경제부흥의  신화를 창조하고 유엔의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탈바꿈했다. 원컨데 전쟁의 실상과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북한의 도발을 방관하다 자칫 제2의 6·25를 불러선 안 될 것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휴전 전쟁 조국해방전쟁 승리 미중 패권전쟁 정전 휴전

2023-07-17

[발언대] 휴전 70주년…한미동맹 더 굳건해져야

한미 정상은 지난 4월26일 발표한 공동합의문과 워싱턴 선언을 통해 양국은 더욱 강화된 상호방위 관계를 발전시키며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연합방위 태세의 유지를 확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 확장억제가 항구적이며, 북한의 한국에 대한 핵 공격은 즉각적, 압도적, 결정적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을 재확인했다.     올해 7월27일은 한국전쟁 휴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8월 구소련은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전 평양에 먼저 들어와 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소련 군정은 10월 평양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김일성을 북조선 공산당 책임 비서로 임명했다. 이후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그리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쟁으로 확대됐고 상호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6·25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은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특히 미 공군은 세계 항공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104만여 회의 출격을 통해 북한군에 막대한 피해를 줬다. 한국 공군도 미군의 전투기 지원으로 1만4000여회 출격하며, 북한 전지역의  기간 시설물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으며 이는 전세 역전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     남북은 막대한 피해를 남긴 채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합의했다. 이후 한국은 미국에 북한의 재침략에 대비한 강력한 군사동맹을 요구하였고 양국은 마침내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방위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전쟁 억지, 평화와 안정 유지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약 3년간 지속한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은 70년 전 끝났지만 지금도 북한의 남침이 우려되는 불안정한 휴전 상태다. 북한은 그동안 1·21사태, 판문점 도끼만행, 아웅산과 KAL기 테러, 천안한 폭침 ,연평도 공격 등 수 많은 도발을 했으며 지금도 사이버 공격, 핵실험 등으로 위협하고 있다.     한미동맹재단 자료에 의하면 1953년 휴전 후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미군은 350만 명이 넘고, 1950년대에는 서부 전선을 한국군이 아닌 미군이 주로 지켰다고 한다. 한국 근무 중 순직한 미군은 92명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순직한 미군과 그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드린다.   국제관계는 종종 상식과 합리성이 벗어나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힘에 의한 평화의 구현이 요구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은 경제·군사 강국이 되었지만 주한미군과 함께 늘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야 하는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 휴전 후 70년간 한미안보동맹은 굳건히 유지됐다.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을 한층 강화해 한반도 평화는 물론 동북아 안보의 균형 유지, 자유민주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국가가 되길 소원한다.     심인태 / 대한민국 공군전우회 LA지회장발언대 한미동맹 휴전 한국전쟁 휴전 한국전쟁 초기 한국 공군도

2023-07-13

LI한인회, 6.25 참전용사 보은행사

“참전용사분들께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해주세요”   롱아일랜드한인회 관계자들이 12일 뉴욕중앙일보 본사를 방문해 6.25 참전용사 휴전 70주년 보은행사 개최 소식을 알리며 많은 동포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휴전 70주년을 맞아 참전용사들의 노고를 기리며 특별히 진행되는 이번 보은행사는, 16일 오후 6시 롱아일랜드 서폭카운티 6.25 참전 기념비 앞에서 진행된다.       하세종 전 회장은 “참전용사분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오늘날 대한민국이 모든 영광을 누리고 산다고 생각한다. 동포사회도 그분들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휴전 70주년을 기념해 그 희생에 대한 보은행사를 진행하려고 한다. 2년 후(2025년)면 전쟁 75주년을 맞이하는데, 그때가 되면 참전용사들의 얘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매주 그분들이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는다. 많은 동포들이 행사에 참여해 그분들께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해주시면 좋겠다”며 동포들의 행사 참여를 촉구했다.     문용철 회장은 “예전에 참전용사분들을 모시고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잇츠 뉴욕!’이라고 외치셨다. 그만큼 발전했다는 거다. 지금은 그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시고 없다”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희생한 그분들을 계속해서 추모하고, 한미동맹을 위해 앞장서서 노력하는 다음 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글·사진= 윤지혜 기자 yoon.jihye@koreadailyny.comli한인회 참전용사 참전용사 보은행사 참전용사 휴전 보은행사 개최

2023-06-13

[기고] 아, 잊으랴! 6월에 만난 슬픔을

누가 6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슬픈 옛날을 더듬으며 우거진 녹음 속에 숨을 죽이면서 피해 다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간다. 해마다 현충일엔 너댓명의 노병들이 죽은 전우의 이름 앞에 둘러앉아 그 치열했던 전장 속으로 빠져든다.  새파랗게 젊은 육군 소위들이 이름 모를 산야에서 적의 포탄 속을 헤매다 피투성이가 되어 고지에서 내려올 때 그래도 살아 있음을 감사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월의 증표인 백발마저 거의 다 빠진 나이 90이란 신분증에 이마의 주름살 계급장과 가슴에 단 낡은 훈장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죽은 전우 곁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음을 미안해하면서 통곡한다. 벌써 73년째, 6·25한국전쟁은 아직도 슬프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 눈시울을 젖게 한다.       나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의 한 중학교(당시 6년제) 재학생이었다. 갑자기 터진 전쟁에 북한 인민군을 피해 남으로 향했다가 가족과 헤어졌다. 어디 나 혼자 뿐이랴. 갈 곳 없는 서울의 중학생들이 떼 지어 군번도 계급도 없이 무작정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전세가 호전됐을 때 국방부장관 명에 의해 나도 학교로 복귀했다. 하지만 어차피 입영할 몸, 졸업 무렵 다시 육군간부후보생 (OCS)에 지원해  6개월 만에 소정의 과정을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모 소위’란 소리를 들으면서 전방부대에 배치돼 치열한 전투에 참전했다. 휴전 직전의 전투 상황은 전쟁 중 가장 많은 전·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휴전 후 1957년, 미국에서 얻은 엄청난 무상 군사원조 덕에 한국군은 항공기부터 해군함정, 그리고 지상군에 절대적 장비인 전차도 갖추게 되었다. 또 군사 교육 목적으로 초급장교들의 미국 유학도 많았다. 나도 그 중 한명으로 선발돼 영화나 뉴스로만 보고 듣던 미국 땅을 밟아보는 행운을 1년간 누렸다.     뉴저지에서 유학 중이던 6월 어느 주말 오전, 시내 관광에 나서려는데 숙소 앞에 젊은 부인이 어린 자녀 2명을 차에 태운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모닝” 하고 인사하며 지나가려는데 그 부인은 “웰컴어보드” 하며 차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그 차를 타고 말았다. 그 부인은 나를 본인이 다니는 교회로 데려갔다. 처음으로 미국교회에 출석해 예배드렸고 부인 집에 초대되어 점심 대접도 받았다. 그날 관광 계획은 당연히 포기했다.   부인은 쌀밥에 채소를 버무려 김치처럼 만든 샐러드와 푸짐한 프라이드치킨, 커피와 아이스크림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부인의 7세 아들, 5세 딸과 함께 식사했다. 그런데 식사 도중 미군 정복을 입고 육군 상사 계급장을 단 건장한 남성 사진을 발견했다. 부인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랑하는 남편이고 애들의 아빠”라고 소개했다. 지금 어디서 근무하고 있냐고 되물었더니 그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남편은 한국전쟁 휴전 한 달 전에 한국전에서 전사했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순간 나는 “오 마이 갓”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온몸이 굳어버리는 듯했다. 그 부인은 이어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지만 분명 남편이 그나라를  도와줬다는게  감사한 일이죠” 하면서 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선하신 하나님, 어쩌면 저렇게 마음씨 착하고 어린 자녀를 둔 행복한 가정에 슬픔을 주십니까?” 나는 신앙심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원망했다. 전쟁의 유물은 과부와 고아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리고 “하나님, 이 잔인한 6월에 저토록 큰 슬픔일랑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슬픔 한국전쟁 휴전 육군 소위들 주름살 계급장

2023-05-31

'우드스톡 페스티벌' 한국서 열린다…한국전 휴전 70주년 기념

미국의 전설적인 록 페스티벌이자 음악 축제의 시초라고 불리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올여름 한국에서 개최된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정식 판권 계약을 맺고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건 이번 한국이 처음이다.   공연기획사 ‘SGC엔터테인먼트’는 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전쟁 휴전 70주년을 맞아 올해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을 표어로 페스티벌 ‘우드스톡 뮤직 앤 아트페어 2023’을 연다”고 밝혔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1969년 뉴욕주 베델에서 처음 열렸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등 당대의 스타들이 참가해 1960년대 록 문화의 정점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그해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린 페스티벌에는 4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참가해 자유와 반전주의, 다양성의 추구를 외쳤다. 이후 1994년과 1999년과 2009년에 각각 개최 25주년과 30주년, 40주년을 기념해 후속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1960년대는 비틀스, 밥 딜런, 어리사 프랭클린이 활동한 대중음악의 전성기”라며 “아티스트 외에 그 당시를 상징하는 지적재산(IP)을 뽑으라면 우드스톡이 아닐까 싶다”고 페스티벌의 의의를 설명했다. 이어 “우드스톡은 페스티벌을 넘어 공연의 상징”이라며 “한국에서 우드스톡이 열리는 건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2010년 이 페스티벌을 열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페스티벌 이름 사용에 대한 판권과 출연자 섭외 등의 문제로 개최가 무산됐다.   김 은수 SGC엔터테인먼트 대표는 “공연 무산의 아픔을 겪고 우드스톡이 1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을 기뻐해 주셔도 될 거 같다”며 “스포츠는 올림픽, 축구는 월드컵, 페스티벌은 우드스톡”이라고 소개했다.   SGC엔터테인먼트는 30여개 팀과 공연 출연 계약을 진행하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페스티벌 라인업을 공개하진 않았다. 김지혜 기자미국 우드스톡 우드스톡 페스티벌 한국전쟁 휴전 한국전 휴전

2023-01-06

[독자 마당] 백두산호

7월27일은 3년1개월 간의 6·25 한국전쟁 휴전 일이다. 하지만 결코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휴전 상태다.   1950년 6월25일 소련제 탱크 등으로 무장한 북한군이 옹진반도, 춘천, 홍천 등을 통해 동시다발로 38선을 넘어 침범하던 그 날 밤 부산 앞바다에도 괴선박 한 척이 나타났다. 그 배엔 600명의 무장 괴한들이 타고 있었다. 해군은 바로 전날 입항한 백두산호를 급파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백두산호는 아무 표시도 없는 선박을 향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당시 백두산호에는 전투 경험이 없는 60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었고 전투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포탄을 낭비할 수 없어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가까이 가 포를 쏘았다. 그중 한 발이 명중했고 배는 침몰했다. 그 배는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내려온 북한 배였다. 그들이 작전대로 부산을 점령했더라면, 6·25 전쟁의 양상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백두산호를 지휘한 분은 손원일 해군 제독이었다. 그 배 한 척을 마련하기 위해 해군 장교들은 봉급의 10%를 저축했고, 사병들은 병 모으기, 부인들은 바자를 통해 돈을 모았다. 손 제독의 부인도 삯바느질로 돈을 보탰다. 그렇게 마련한 돈이 1만5000달러, 여기에 정부예산 4만여 달러를 더해 백두산호를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대포와 포탄을 사고 헌배를 수리하기 위해 장병들은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고생했다. 그 배가 진해에 입항한 날이 1950년 6월24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해냈다. 괴선을 침몰시겼다.     몇 일 전 한국 신문에 국산 초음속 전투깅 KF-21의 첫 비행 사진이 실렸다. 대한민국의 국력은 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한 세계에서 8번째 국가가 되었다.   7월27일은 휴전이 선포된 날이다. 국력이 약한 나라의 아픔을 잊지 말자.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백두산호 당시 백두산호 한국전쟁 휴전 초음속 전투기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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