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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조용한 휴전

윤재현 전 연방공무원

윤재현 전 연방공무원

뒷마당의 고추밭이 난장판이 되었다. 여름 내내 나의 입맛을 북돋워 주는 아삭아삭한 아나 하임 고추 모종이다. 마치 삽으로 고추밭을 뒤집어엎어 놓은 것처럼 구덩이를 만들었다. 범인은 고양이다. 어느 집 고양인지 모른다. 땅속의 지렁이를 찾느라고 땅을 파헤쳤다. 매일 먹는 고양이 사료가 싫증 난 모양이다. 꿈틀거리는 지렁이는 고양이의 별식이다.
 
아니면 길 고양이가 고추밭을 습격했는지도 모른다. 현행범이라야 체포하든가 혼을 내주든가 할 수 있을 텐데…. 삽으로 다시 평지를 만들고 물을 주었다. 창고에 쓰다 남은 개와 고양이 퇴치용 분말도 뿌렸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나가 보니 이번엔 더 많이 파헤쳤다.  
 
구글 선생에게 물어보니 고양이는 식초를 싫어한다고 한다. 식초 두 통을 사다가 뿌렸다. 웬걸, 또 파놓았다. 고양이는 식초가 묻은 지렁이를 맛있게 먹은 듯하다. 땅을 파헤치면서 고추나무까지 뽑아놓았다.
 
이번엔 마른 고추 두 봉지를 사다가 뿌렸다. 하지만 고양이는 다시 와서 파헤쳤다. 고양이의 지렁이 요리에 식초와 고춧가루를 뿌려준 셈이다.
 


고양이를 잡아 혼내주고 싶다. 물총이라도 쏴주고 싶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면 동물학대법에 저촉될 수 있다. 이놈을 혼내주려면 뒷마당에 전기를 켜놓고 밤샘을 해야 한다. 잠복해야 한다.  
 
옛날 고향에서 고구마밭을 습격하는 산돼지와 숨바꼭질을 했었다. 돼지가 고구마를 먹는 것은 좋지만 고구마밭을 파헤쳐놓는 것이 질색이었다. 밤에 고구마밭에 거적때기를 깔고 잠을 자다가 두세 번 일어나서 세숫대야를 두들기며 소리 지르고 노래도 불렀다.
 
뒷마당에 놓여 있던 화분을 모두 고추밭으로 옮겼다. 고양이가 들어갈 틈도 없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화분 사이를 비비고 들어가서 땅을 파놓았다. 다시 세웠던 고추나무가 또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구글 선생에게 다시 물었다. 고양이는 냄새가 강한 소독약이나 세척제를 싫어한다고 한다. 몇 년째 사용하지 않아 뒹굴던 솔잎 냄새가 나는 세척제를 뿌렸다. 아침에 나가서 보니 고추밭이 그대로 있다. 두 군데 흙을 파헤친 자국만 있다. 고양이가 흙을 파다가 솔잎 냄새 때문에 포기한 듯했다.
 
고양이가 열흘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있다. 고양이의 습격과 식초, 그리고 세척제 세례를 받은 고추는 누렇게 초주검이 되었다. 올해 고추 농사는 틀렸다. 고추나무는 망가졌으나 고추밭은 조용하고 이상이 없다. 다행히 고양이도 다친 곳이 없었으며 싸움은 멈췄다. 조용한 휴전이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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