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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4자 타령

4월은 재미있는 달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그냥 한 해의 네 번째 달이지만 영어 이름 ‘April’은 라틴어의 낱말 ‘펼치다 (aperire)’에서 왔다. 이름처럼 4월엔 겨울에 움추렸던 동물들이 기지개를 켜고 초목들은 푸르게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모두 다 새로운  삶을 펼치는 것이다.  그래서 4월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달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4자의 발음이 한자의 ‘죽을 사’와 같다는 이유로 아파트나 병원, 호텔 엘리베이터 등에 잘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참 엉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로 소리 나는 좋은 글자가 흔한 데도 말이다. 이를테면 ‘스승 사’,  ‘향기 좋을 사’,  ‘생각할 사’, ‘부지런할 사’, ‘ 말씀 사’, ‘춤추는 모습 사’, ‘벼슬 사’ 등이다.  이처럼 좋은 글자의 소리는 제쳐 두고 하필이면 ‘죽을 사’자만 생각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인생의 종말을 뜻하는 운명적인 글자의 소리가   뇌리를 스쳤기 때문일 것이리라.   하지만 이 4 자는 아무 거리낌 없는 사통오달의 운명을 지닌 듯 우주, 자연, 인생, 철학, 종교, 운동 할 것 없이 온갖 분야에 활개를 치고 있다.     도교에서는 도(道), 천(天), 지(地), 및 왕(王)을 우주에 있는 가장 큰  것이란 뜻에서 ‘사대’(四大)라고 한다. 유교에서는 주역이 밝힌 네 가지 원리 곧, 원(元, 봄), 형(亨,여름), 이(利,가을), 및 정(貞,겨울)이 ‘사덕(四德)’이다. 세상이 생겨나서 다시 없어질 때 까지의 네 시기를 불교에서는 ‘사겁’(四劫)이라고 말한다.  번복하는 마음을 두지 말고, 물욕이 서로 가리게 하지 말고, 헛말로 세상을 어지럽히지 말며, 그리고 한울림을 속이지 말 것, 이 네 가지를 천도교에서는 ‘사계명’이라고 일컬으며,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듣지 말고, 말하지 말며 그리고 움직이지 말라’는 논어의 교훈을 ‘사물(四勿)’이라고 일컫는다.     어디 그뿐이랴. 삶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계획, 곧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한 해의 계획은 봄철에, 일생의 계획은 부지런함에 또한 한 집안의 계획은 화목함에 있다는 말을 ‘사계(四計)’라고 일컫고, 품성이 군자와 같이 고결하다는 뜻에서 매화, 난초, 국화 및 대나무, 이 넷을 ‘사군자(四君子)’라고 말하며, 누구에게나 좋은 얼굴로 대하며 무사태평하게 사는 사람을 ‘사시춘풍(四時春風)’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태극기의 4괘 생각이 떠올랐다. 본디는 사괘(師卦)를 건괘와 김괘로 나눈 것이었는데 태극기의 네 괘에 건(乾), 곤(坤), 감(坎), 이(離)를 그렸고 이를  4괘라고 부른다.     아무튼 4자는 이래저래 매력 있는 숫자임이 틀림없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4월30일 취임 연설에서 “자유의 신성한 보존과 공화당 정부의 운명은 미국 국민이 실천한 삶의 경험에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윤경중 / 목회학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광장 타령 우주 자연 초대 대통령 공화당 정부

2024-04-21

[기고] 나라를 세우고 지킨 사람 바로알기

미국의 대륙군(미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가장 존경한다. 그의 일생이 나라를 사랑하는 지도자로서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전쟁 영웅이자 독립운동가로 미국이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닦았다.     최근 화제를 불러온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록이다. 영화를 관람하며 가슴이 찡해 오는 감동을 받았고 주인공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진 면목도 새삼 알게 되었다. 영화는 그의 인생을 조명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시종일관 조국을 사랑했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를 존경하는 관람객은 상영 도중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영화 덕분에 건국 대통령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한층 더 반듯하게 이루어져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다. 그동안 잊혔던 이승만 대통령의 많은 업적이 국민 사이에서 집단기억의 형태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에 태어나 1965년 별세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유학 중에도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귀국해 분단된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최초로 시행한 총선거를 거쳐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임기 중이던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UN에 제소,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을 끌어냈다. UN군 참전 덕에 국군을 서울을 탈환했으며 북진을 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 대통령 직선제 개선을 통해 2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이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3선과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발발하자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라며 성난 시위군중을 피해 하와이로 망명했다   영화 건국전쟁은 개봉 27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고 “역사를 올바르게 알 기회”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시행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농지개혁 등이 대한민국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세력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부정적인 것들만 부각한다. 이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주장한다.     돌이켜보면 1949년 6월 발생한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막 출발한 제1공화국의 이승만 자유민주주의 철학에 제동이 걸렸다. ‘남로당 프락치 사건’은 제헌국회의 김약수 부의장을 비롯해 13명의 현역 의원이 김일성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다.     어느 책에서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상이 소개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해방 후 전력 부족으로 전기가 시간제로 공급될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가 촛불을 켜 놓고 남편의 낡은 양말을 손수 꿰맸다는 글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 장면을 그려보면서 그 시절 시골 가난한 농부의 생활과 다름이 없다고 느껴졌다.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을 1948년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세운 망명 임시정부 시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것은 국민, 국토 및 주권의 3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역사를 입맛에 따라 평가하고 양념을 치는 것은 배격해야 한다. 모름지기 찬란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에 왜곡과 혐오의 언어들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지 자문해 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나라 이승만 대통령 건국 대통령 초대 대통령

2024-04-01

[문예 마당] 큰 바위산의 대통령들

  미국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의 성역이라는 ‘러시모어 산 메모리얼’에 다녀왔다. 얼굴 조각상 크기가 18미터(60피트)나 된다고 해서 실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남가주에서 사우스다코타 주까지 약 1200마일이나 되는 먼 길을  아내와 교대로 운전하며 갔다.     가는 길에 먼저 그랜드 테톤과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구경하고 가니 지루한 줄 모르고 도착했다. 주차하고  걸어 올라가니  미국 50개 주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많은 인파로 붐비는 것을 보니 연간 300만 명이 찾는 곳임을 실감했다. 멀리 보이는 큰 바위 돌산은 영화 ‘십계명’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호렙산처럼 웅장했다. 늘 태양 빛을 받도록 동남 방향으로 된 산을 선택했기에 환하게 보였고 조각상들이 예술적으로 보였다. 바위산을 깎아 조각하다니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이곳 블랙 힐즈 지역은 로키 산맥과 같이 입자가 고운 최상질의 화강암 지대라고 한다.     왼쪽으로  낯익은 조지 워싱턴의 모습이 보인다. 영국과 독립 전쟁에 돌입했을 때 워싱턴은 총사령관으로 급조된 민병대를 이끌고 정규군과 싸워야했다. 모든 여건이 불리했지만 간절한 독립의 열망으로 어렵게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2대 대통령까지 역임하며 국가의 초석을 쌓는 위대한 리더십을 보여준다.       워싱턴의 오른편으로 토머스 제퍼슨이 보인다. 그가 작성한 독립 선언문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특정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제시됐다. 3대와 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며 생긴 부채 상환을 위해 보유하고 있던 6500권의 책을 의회 도서관에 팔았다고 한다.     바위산 오른편 끝에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보인다. 그는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릴 수 없다며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그는 약 63만 명이 죽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실천한 16대 대통령이다. 너무도 유명한 그의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민주주의 정부의 원칙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대통령은 선정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업가로부터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고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했고 수많은 국립공원을 지정했다. 그는 미국의 성장에 공이 컸다. 러일전쟁의 종전에 기여한 공로로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바위산 조각이 끝나갈 때 제5의 인물을 추가하자는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 인권운동가 수전 앤서니 등이 거론됐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공사는 시작부터 난관이 많았다.  “신의 손에 의해 형성된 산을 감히 모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던 단체가 있었다. 또 공사비가 무려 99만 달러( 현재 금액으로 1800만 달러)에 달해  모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우스 다코다 주 산림청, 의회, 상원의원, 조각가 거츤 보글럼 등이 당시 켈빈 쿨러지 대통령 등에 도움을 요청해 겨우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공사 기간 중 미국의 대공황으로  8년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으며 을 해서 조각가 보글럼은 개인 파산까지 하게 된다.       조각 작업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래식 추와 대형 컴퍼스를 사용해 측량했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양을 조절하여 정확히 90%의 화강암을 절단했다. 정교한 엔지니어링 기술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무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깃발을 들어 폭파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잘려나간 돌이 무려 50만 톤으로 바위산 아래에 수북이 쌓였다.     절단 작업 후에 약  400명이나 되는 석공들이 교대로 밧줄에 매달려  2~3인치 간격으로 드릴과 징을 가지고 일일이 쪼았다. 그 외에도 예상 못 한 바위 상태로 인해  9번씩이나 설계변경을 했다.     조각가 보글럼은 덴마크 이민 후손으로 57세인 1927년 공사를 시작했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엔지니어링 지식, 자금 확보 능력이 없었다면  바위산의 대통령 조각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후손들이 러시모어 산의  위대한  대통령들을 보고 개척 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을 이어받기를 염원했다.     1934년 보글럼은 심장마비로 숨졌지만 그의 아들 링컨이 작업을 완료했다. 링컨 조각상 뒤 돌산에는 일반인은 입장이 불가능한  문서 보관 동굴이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 사본, 4명의 대통령 업적이 담긴 문서 등이 보관된 곳이다.     바위산 조각에 성형수술도 있었다. 제퍼슨 윗입술의 나쁜 돌을 깎아내고 다른 화강암 조각으로 교체할 때 강철 핀과 황을 사용했다고 한다.     매년 독립 기념일에는 많은 군 전역자들이 군복을 입고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올해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지만  러시모어의 대통령들도 관심이 많아 지켜보고 있다.  윤덕환 / 수필가문예 마당 바위산 대통령 바위산 조각 현직 대통령 초대 대통령

2024-03-28

미주 뷰티업계 새 연합단체 '미래 뷰티 총연합회' 출범

미 동남부 뷰티 서플라이 업계인들 주도로 만들어진 신설 단체 '미주 미래 뷰티 총연합회'가 10일 초대 회장 취임식을 갖고 공식적인 시작을 알렸다.   이날 애틀랜타 인터내셔널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조지아 애틀랜타 뷰티협회(회장 이강하)의 뷰티 트레이드쇼 직후 초대 회장 및 이사장 취임식이 개최됐다. 초대 회장직에는 뷰티협회 회장을 맡았던 손영표 씨가, 이사장직에 사우스캐롤라이나 뷰티 그룹 회장을 맡았던 이시형 씨가 취임했다.   이시형 이사장은 이날 "책임을 막중하게 느낀다. 모든 회원 및 임원분들과 함께 협력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취임사를 전했다.   손영표 초대 회장은 조지아 애틀랜타 뷰티협회에서 봉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가 닥치면 우리 소수 민족이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됐다"며 코로나19팬데믹 기간 아시안 커뮤니티에 대한 차별 등을 예로 들었다.    그는 이어서 이러한 위기 때 “총연합회가 하나 되어 목소리를 내고 널리 퍼지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취임식 후 가진 인터뷰에서 손 회장은 미주뷰티서플라이총연합회(NFBS·회장 조원형)를 언급하며 "전국적으로 뷰티 업계에 타민족 등 새로운 경쟁자들이 밀려오는 등 위기 상태이지만, 총연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오히려 싸움을 부추겼다"며 지방 협회가 모여 새로운 총연합회를 설립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미주 미래 뷰티 총연합회는 지난해 8월 조지아주 비영리단체 법인 등록을 마쳤다.   손 회장은 이어서 조지아, 멤피스, 내슈빌, 미주리 등지의 뷰티협회 및 개인 사업자 120여명부터 시작해 현재 300여개 업체가 총연합회에 포함돼 있으며, 여러 지역의 협회를 만드는 것을 돕고 있다고 덧붙였다.   1대 임원진은 박형권 상임고문, 박재종 감사, 한은섭, 박남권, 안병관 고문, 김종대, 최시영, 이강하 이사, 최재봉, 김재철, 현영실, 이정선, 김동욱, 전승주, 이현정, 그레이스 리 부회장으로 구성됐다. 윤지아 기자손영표 미주 초대 회장직 뷰티협회 회장 미래 뷰티

2024-03-11

[신 영웅전] 호찌민의 유산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내렸을 때 나의 심정은 죄스러움이었다. 전쟁의 참화는 슬프다. 3만 명의 ‘라이따이한’은 아빠가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들의 엄마는 “내가 당신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60을 넘긴 라이따이한들은 ‘전쟁의 혼혈’이라며 냉대받아왔다. 우리가 거두어줘야 할 ‘상흔’인데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아무런 적개심을 보이지 않고 웃음으로 맞아주는 그들이 더 무서웠다.   호찌민(胡志明·1890~1969)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고아였다. 21세에 프랑스로 밀항해 30년 동안 파리·런던·뉴욕에서 고생했다. 내가 보기에 현대사에서 칭송받을 만한 정치인은 세 명이다. 입던 옷과 물레, 안경 두 쪽만을 남기고 떠난 마하트마 간디(1869~1948), 우리와의 은원을 떠나 살아서는 자식도 없었고 죽어서는 한 점 재도 없는(生而無後 死不留灰)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그리고 호찌민이다.   호찌민은 1945년 베트남 초대 주석에 취임했다. 독신으로 살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 총독 관저 전기기술자의 숙소에서 평생 살았다. 죽으면서 “장례를 간소히 하고 어떤 기념물도 세우지 말고, 시신은 화장해 남북 베트남 산하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유산은 성철(性徹) 스님의 것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은 하노이 중심가에서 의회를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기념관을 짓고 그 안에 시신을 영구 보존했다. 후대 정치인들이 호찌민의 유지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베트남은 이제 더는 ‘슬픈 열대’가 아니고 묵념해야 할 땅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를 덮는다(首陽山陰江東八十里)는 말처럼 베트남 어디를 가도 호찌민의 유훈이 흐른다. 이런 지도자를 둔 나라가 부럽다. 저 선량한 눈망울로 어찌 그리 혹독한 삶을 이겨냈을까. 퇴임하면 예외 없이 ‘아방궁’ 지을 생각하는 나라 지도자와는 많이 다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호찌민 유산 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초대 베트남 국민

2024-02-11

[신 영웅전] 계급 낮춘 ‘국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형 로런스에게 틈틈이 글을 배운 것이 전부였다. 17세 때 토지측량사로 일하다가 아버지와 형이 세상을 떠나자 막대한 농장을 상속받아 경영했다. 워싱턴은 22세에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농장주보다 군인으로 더욱 유명해졌고, 육군 대령으로 버지니아군 사령관이 됐다. 27세에 한마을에 사는 두 아이의 어머니인 마사 커티스 여사와 결혼했다.   1775년 미국의 독립전쟁이 터지자 워싱턴은 독립군사령관이 됐다. 1783년 전쟁이 끝나자 헌법에 따라 1789년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됐으며 1793년에 재선됐다. 그때 여건이나 명성으로 보면 왕정을 채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세 번째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고 고향 버지니아로 돌아가 농부가 됐다.   워싱턴이 물러나고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애덤스는 워싱턴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듬해인 1798년에 프랑스와 전쟁이 시작됐다. 애덤스 대통령은 전쟁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가를 찾았으나 전직 대통령인 워싱턴만 한 적임자가 없자 그를 찾아가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워싱턴은 지난날 자기가 거느리던 애덤스 밑에 들어가 전쟁을 지휘하기로 승낙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육군참모총장은 현역 군인이어야 했다. 이를 놓고 애덤스가 고민하자 워싱턴은 서슴없이 육군 중장으로 복귀해 프랑스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당시로써는 중장이 최고위 계급이었다.   당시 66세에 이른 워싱턴은 건국 초기의 온갖 전화(戰禍) 속에서 이미 병이 깊은 상태였다. 결국 1799년 군복을 입은 채 세상을 떠나 고향집 마운트 버넌에 묻혔다. 물러난 대통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면 워싱턴을 보면 된다. 왜 우리는 대통령 복이 그리 없는지. 퇴임하기 전부터 집터만 보러 다니니….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워싱턴 계급 애덤스 대통령 초대 대통령 대통령 출마

2023-12-10

시니어센터 후원금 160만불로 늘었다…10년 10만불 약정자 3명 추가

시니어센터 후원금이 160만 달러로 늘었다.     LA한인타운시니어커뮤니티 센터(이사장 신영신·이하 시니어센터)는 12월 기금모금 행사 때마다 1만 달러씩 향후 10년간 약정하는 기부에 올해 3명이 추가로 동참해 기부자가 총 16명으로 늘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해 한인사회 기업인 13명이 향후 10년간 총 130만 달러 기부를 약정하면서 시니어센터는 작년 12월에 첫 기금 모금 및 기금 약정식을 진행했다.       올해 동참한 새로운 기부자는 박기홍 허브천하 대표·박태호 한미메디칼그룹 전 회장·지나 김 어드미션 마스터스 대표 등 3명이다.     시니어센터는 오는 5일(화) 오전 11시 30분 회관 2층 강당에서 기부자 및 타운 내 주요 인사 100여명이 참석하는 가운데, 제2회 기금모금 및 160만 달러 기금 약정식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시니어센터의 중장기 발전을 위해 기금을 약정한 기부자 16명은 이날 1만 달러씩 기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올해 새로 추가된 기부자를 포함해 기금 약정에 참여한 기업인은 시니어센터 초대 이사장인 하기환 한남체인 회장 ▶강드림재단 설립자 강창근 여성의류업체 엣지마인 회장 ▶글로리아 김 GLS컬렉티브 회장 ▶김영석 3플러스 로지스틱스 그룹 회장 ▶돈 이 의류업체 액티브 USA 회장 ▶브라이언 김 터보에어 회장 ▶ 시니어센터 현 이사장 신영신 비시시&코티 회장 ▶이상영 태평양은행 이사장 ▶이영근 프로팩 코퍼레이션 회장 ▶이현옥 로스록웨이브스 회장 ▶조병태 소넷 그룹 회장 ▶뱅크오브호프 ▶한미재단 등 16명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시니어센터 재능기부 자원봉사자 52명에게 이화고전방(대표 박이화)이 손수 제작한 털모자 등 시니어센터 이사회에서 특별 선물을 전달할 예정이다.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시니어센터 후원금 시니어센터 후원금 시니어센터 초대 이하 시니어센터

2023-11-30

[리얼 시니어 스토리] "오를 산이 있어서 항상 행복했네"

50년이 넘는 한인타운 역사에는 다양한 업종과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있다. 비단 경제계나 정치계  인사들만 그런 게 아니다. 특히 취미나 여가 선용 분야에서 김평식(1940년생) 에버그린 클럽 초대 회장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아마도 전무후무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팬데믹 이전만 해도 남가주 한인사회에는 거의 20여개의 등산 클럽이 있었다. 한국에서 산마다 등산하는 인구가 넘쳤 듯이 남가주에도 등산 인구는 많았다. 다만 한국의 산과 달라서 어디를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누구를 믿고 가야 할 지 알 수 없었기에 한인들이 주축이 된 등산 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 등산클럽의 고조선 같은 역할을 에버그린 클럽이 맡았다. '클럽주' 김 회장이 산을 좋아했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했기에 가능했다. 결국 한인들의 등산 문화를 세운 셈이다. 토요클럽, 일요클럽, 화요클럽이 구성돼 50인승 버스가 1주에 3번씩 출발했다. 매주 150명이 산을 찾았는데 얼마 안되는 것 같지만 선발 인원만 그런 것이지 실제 등록 회원은 500명이 훨씬 넘었다. 그래서 15인승 밴이 항상 필요할 만큼 차고 넘쳤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소송이 '잘 되던 비영리단체 등산클럽'의 발목을 잡았다. 결과는 좋게 끝났지만 상처는 컸다. 더 이상 행복하기가 어려웠던 김 회장이 물러나고 구심점을 잃은 클럽은 자연스럽게 1년만에 소유하고 있던 버스와 밴을 팔았고 수 년간 은행에 모아뒀던 회비도 조용히 사라졌다. '에버그린 클럽' 이후 여러 등산 클럽이 세워졌지만 대개 수 십명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바이칼호부터 한반도까지 펼쳐졌던 고조선이 무너지고 한반도의 삼한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김 회장은 현재 에버그린 클럽 때와는 다른 등산과 트레킹을 즐기고 있다. 회원들이 모두 움직일 수 있는 목적지일 필요가 없으므로 소규모로 '반갑다 친구야'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한번 출발은 13명 정도로, 매주 3번 출발도 아니고 부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김 회장'이 가고 싶은 곳을 간다. 에버그린클럽이 결국 사람을 믿지 못하게 했다면 자연은 특히 산은 항상 믿을 수 있기에 마음껏 찾는다. 최근엔 충청노인회 회원 60명과 가까운 샌타바버러를 인솔해 다녀오기도 했다.     등산 전문가로 '미국 50개 주 최고봉'을 방문하고 책까지 낸 바 있는 김 회장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였을까. 우선 대륙 횡단이다. LA에서 출발해 플로리다 키웨스트를 찾았다. 25일 코스로 미국 자연을 한껏 즐겼다. 종단도  LA를 출발해 시애틀을 15일만에 갔다 왔다. 보스턴으로 날아가 메인주 대서양에서 랍스터를 즐겼다. 조지아주로 가서 테네시 멤피스를 거쳐 블루리지 파크웨이를 돌아봤다. LA에서 회원들과 버스로 갈 수 없었던 곳이다. 멤피스에서는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다는 돼지갈비도 맛봤다.   그의 일상은 여느 팔순 시니어와 다르지 않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오전 7시쯤 운동을 한다. 에코파크 주위를 2바퀴 돈다. 유튜브에서 여행과 음악 동영상을 열심히 본다.     김 회장은 건설업, 제너럴 컨스트럭션(종합건설업)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에서 나오는 비소를 취급할 수 있는 라이선스까지 갖고 있었다. 20년간 많은 돈을 벌었고 부동산 투자도 많이 했다.     '여행의 달인' 김평식 회장도 여행에 관한 버켓 리스트가 있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를 방문하면서 나중에 꼭 다시 와야지 했던 곳을 혼자 가볼 생각이다. 60년 넘게 지하 탄광이 불타고 있는 펜실베이니아의 '센트레일리아'도 다시 가볼 계획이다.   최근 아들이 큰 금융회사의 사장에서 회장이 됐다. 딸도 변호사로 크게 성공했다. 자녀들에 대한 큰 바람은 없고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기억에 남는, 고마웠던 순간은 바로 에버그린 클럽 버스를 살 때다. 매번 대여를 하느니 버스를 사는게 낫다고 해서 30만달러에 달하는 새 버스 비용을 내부에서 모았다. 6명이 5만달러를 내면 2년 후 원금을 돌려주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정말 6명이 돈을 모아왔다. 김 회장을 믿고 여행에 진심이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막상 30만불을 받고 보니 덜컥 겁이 났다"며 "각 5000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고 중고버스를 샀다"고 말했다. 지나고 보니 자신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실감이 난다며 눈물을 흘렸다.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다. 바로 부동산 폭락 전, 1990년대 초반 가졌던 부동산이다.   "중앙일보 건물 옆 7가일대 땅이 모두 내 소유였죠. 그런데 내 재물이 아니라는 걸 내 손에서 떠나고 난 뒤에 알았고, 이제는 아깝거나 아쉽다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그동안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그냥 나를 지나간 것이지."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행복 에버그린클럽 비영리단체 등산클럽 에버그린클럽 초대 이들 등산클럽

2023-10-29

[기고] 한미동맹 70년, 돌아본 한국의 두 기둥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두 기둥이 있다.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진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이 빈곤국에서 벗어날 수 있게 기반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으로 한반도가 해방되었지만 완전한 국가가 세워지지 못했다. 38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신탁통치로 혼돈의 정국이었다. 이런 와중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 대통령은 3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했다. 미·소가 합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거부하고, 반탁·반공 노선을 견지했다.     그 후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선출된 200명 국회의원이 국호와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의해 대한민국은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이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중요한 것이 농지개혁과 한미동맹 강화다. 1950년 3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법 공포로 남한에서도 농지개혁이 이루어졌다. 북한은 이보다 앞선 1946년에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농지개혁을 완성했다. 북한의 농지개혁은 소유권을 불허했지만, 경작권을 갖게 된 북한 농민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당시 남한의 많은 농민은 북한과 같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식 농지개혁은 자본주의 상징인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있었기에 수용할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으로 갑신정변으로도 폐지 못한 양반 계층이 사라졌고, 반봉건적 농지 소유제를 타파하고 농민의 농지 소유제를 확립했다.   또한 ‘한미동맹’이 있다. 북한의 1950년 6월 25일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까지 밀린 남한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며 전선에 세력균형이 형성되자 휴전회담 논의가 진행됐다. 남한의 동의 없이 진행된 회담이라 남한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유엔군과 중국 북한 대표가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조인됐다.     이 대통령이 반대한 정전협정으로 북한의 재남침이 우려되자 한·미 양국은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이것이 ‘한미동맹’의 시작이다.  ‘한미동맹’은 70년간 북한의 도발을 막고 한국의 평화와 번영, 자유의 토대가 됐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벌써 공산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북한·중국·러시아·일본에 둘러싸인 한국이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것은 천운이라고 본다.   다른 하나의 기둥은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 근대화를 통해 빈곤 퇴치에 힘썼고, 새마을운동으로 농촌 현대화를 이뤘다. 박 대통령은 철강 산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포항제철소를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와 서울 지하철 건설, 중화학 산업 육성, 군 현대화와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 등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을 자랑스러운 나라로 탈바꿈시켰다.   이 대통령과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공과 과가 따른다. 하지만 두 분은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 6대 군사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돌아보면 두 분의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과 통찰력, 탁월한 외교력과 안보관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이 가능했다고 본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한미동맹 한국 이승만 대통령 농지개혁법 공포 초대 대통령

2023-10-04

제인 김 KYC 초대 관장 “코리안 아메리칸 긍지 심는 이민 역사박물관 개관 기대”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관장 송정호)은 거의 50여년을 이어온 한인타운의 대표적인 비영리 봉사단체다. 한인 청소년 문제를 돕기 위해 시작했지만, 현재는 한인사회를 넘어 인근 지역 커뮤니티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단체로 성장했다.     오늘날 KYCC는 1975년 설립된 한인청소년회관(Korean Youth Center·KYC)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초 일본·중국 커뮤니티에서 2, 3세들의 마약 문제가 불거지자 약물중독방지를 위해 비영리기관인 ‘아시안 아메리칸 약물방지 프로그램(AADAP)’을 시작했다. 청소년 문제를 겪은 AADAP는 새 이민 커뮤니티인 한인 사회의 청소년의 문제를 미리 방지하고자 한인사회에 아웃리치 센터를 만들었다.     1975년 LA 한인타운 올림픽 블러버드와 크랜셔 블러버드에 AADAP의 한인 사회 아웃리치 센터로 한인청소년회관(KYC)이 문을 열었다. 이것이 한인타운 청소년회관(KYCC)의 시작이었다.     KYC 초창기에는 천방욱 목사가 이끌었다. 방과 후 프로그램을 열어 청소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대화를 나눴다. 김인환씨가 카운슬러로 들어오고 1977년 제인 김씨가 UCLA를 졸업하고 합류했다.   김씨는 1968년 14세에 목사님인 아버지를 따라 이민 온 1.5세였다. 이민 1세대 한국 부모님을 둔 틴에이저로서 학교에 가면 다른 세상을 봤다.     그는 “보수적인 한국교회 문화 속에서 자랐지만, 문화와 성장 배경,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 미국 친구들을 보며 방황했었다”고 말했다.     한인사회에서 이민 와 생계에 바쁜 1세대 부모와 청소년 자녀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을 목도하며 김 씨는 1.5세로서 겪은 경험을 살려 한인 청소년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사회학 전공에 한국어와 영어 이중언어 자산을 살려 KYC 카운슬러 포지션에 지원해 1977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크리스천이 가지고 있는 사명과 자산에 대해 고민했다”며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에 KYC에서 일하게 됐다”고 밝혔다.     AADAP가 뒤에서 지원하면서 KYC는 1983년 독립해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게 된다. KYC의 초대관장은 UCLA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김씨가 맡았다.   김씨는 “여성이 이끄는 한인 단체가 드물었던 당시 리더를 맡는 것은 부담이었다”며 “AADAP에서 한인 사회 여성 리더십이 필요하고 자라나는 여자 학생들에게 롤모델이 필요하다는 설득에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김씨가 초대 관장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마약, 갱 등 문제 있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 학교 카운슬러와 공조했다. 한국 학생들의 마약, 갱 문제 등으로 청소년 프로그램도 필요했지만, 가정폭력 문제도 심각했다. 이에 부모 세미나, 학생 카운셀링, 이중언어 상담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농구 프로그램, 튜터링, 부모 서포트 그룹 등 다른 방향의 아웃 리치 프로그램을 펼쳤다. 또 고용 및 취업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등 KYC를 커뮤니티 서비스 단체로 성장시켰다.   이 당시 청소년 회관 이사진으로 천방운 목사, 민병수 변호사, 김인환 관장, 헨리 황 박사 등의 활동으로 KYC 기초가 다져졌다.   1988년에 김 관장 후임으로 김봉환 씨를 새 관장으로 맞이했다. 제인 김 관장 시절 회관건립위원회가 구입한 윌셔와 윌튼 인근 주거지(986 Ingraham St.)를 청소년 회관 시설이 들어서는 복합건물로 개발하기 시작해 1994년 완공했다.   1998년 9월 김 관장의 뒤를 이어 송정호씨가 관장으로 취임하며 한인에서 모든 인종을 아우르는 단체로 거듭났다.     제인 김씨는 “청소년과 부모 관련 이슈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개발되기를 바란다”며 “차세대가 이민 역사를 배우고 코리언 아메리칸으로서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코리언 아메리칸 박물관 같은 장소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은영 기자역사박물관 아메리칸 한인 청소년들 한인타운 청소년회관 초대 관장

2023-09-21

[레저터치] 응씨배 비사 <秘史>, 이토록 ‘환장할’ 승리라니

이른바 ‘환장하다짤’로 유명한 사진이다. ‘오픈카’ 탄 아저씨가 꽃다발 흔들며 환히 웃는 데, 플래카드 글자 중에 ‘환’과 ‘장하다’ 네 글자만 카메라 앵글에 들어와 ‘환장하다’는 문장을 완성했다.   이 사진은 한국 바둑계가 길이길이 기리는 승리를 증명한다. 사실상의 세계 최초 국제 바둑대회이자 세계 최고 권위의 바둑대회 초대 챔피언이 조훈현 9단이라는 역사를 소환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한국은 세계 바둑의 변방이었다. 응씨배 주최 측이 세계 16강을 초청했는데, 한국은 조훈현 한 명만 불렀다. 프로 바둑기사가 없는 미국과 호주도 한 명씩 초청했으니 한국 바둑계에겐 이만한 수모도 없었다. 그 모욕의 현장에서 조훈현은 일본·대만·중국의 일인자를 차례로 무찌르고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제1회 응씨배 결승 5번기 최종국에서 중국 바둑 영웅 녜웨이핑 9단의 패배가 확정됐을 때, 응씨배 창시자 잉창치(應昌期) 선생이 대회장을 나가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중국인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거금을 들여 잔칫상을 차렸더니 변방의 한국인이 엎어버린 꼴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TV 드라마 ‘미생’의 원작을 보셨는지. 원작 만화책을 펼치면 기보부터 나온다. 그 기보의 출처가 바로 이 대국이다.   1988년 대회를 시작할 때 응씨배 상금은 40만 달러였다. 현재 환율로 약 5억3600만원. 당시 US오픈 골프대회 우승 상금의 두 배가 넘었다. 그러나 응씨배 상금은 더 오르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전해오는데, 가장 유력한 이유가 한국 선수의 ‘지나친 선전’이다. 특히 1회부터 4회까지 16년간 응씨배는 한국 천하였다.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을 거쳐 이창호가 왕관을 물려받았다. 대회를 치르는 족족 한국이 우승 상금을 쓸어가니 응씨배 주최 측은 ‘환장할’ 노릇이었을 테다.   한 달쯤 뒤 중국 항저우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바둑은 금메달 세 개가 걸려있다. 남녀 단체전과 남자 개인전.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선 남녀 단체전과 혼성 개인전이 열렸었다. 종목이 바뀐 배경엔 중국의 나름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 중국은 세계 여자바둑 최강자인 한국의 최정 9단이 두려워 혼성 개인전을 없앴다. 대신 2010년대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커제 9단을 믿고 남자 개인전을 신설했다. 그런데 작전이 꼬이고 말았다. 여자기사 일인자는 여전히 최정인데, 남자기사 일인자는 더이상 커제가 아니어서다.   신진서 9단이 제9회 응씨배에서 우승하며 ‘신진서 시대’를 열어젖혔다. 2020년대 들어 메이저 대회에서만 5번째 우승이다. 아시안게임을 앞둔 중국으로선 다시 ‘환장할’ 시간을 각오해야 할 듯하다. 손민호 / 한국 레저팀장레저터치 환장 승리 바둑대회 초대 한국 바둑계 세계 바둑

2023-08-27

[사설] 동포청장이 들어야 할 목소리

이기철 초대 재외동포청장이 오늘부터 3박4일 일정으로 LA를 방문한다. 뉴욕과 워싱턴DC를 거쳐 LA를 찾는 이 청장은 방문 기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동포간담회 등을 통해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듣고 10월 오렌지카운티에서 열리는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준비 상황도 점검한다.     이 청장의 여러 일정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로즈데일 묘지 참배와 미주한국학교총연합회(KOSAA) 한국어 교사 학술대회에서의 기조 강연이다.     LA한인타운 인근에 있는 로즈데일 묘지는 애국지사를 비롯해 많은 이민 선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LA총영사들의 부임 첫 공식행사가 로즈데일 묘지 참배인 것도 이런 이유다. LA총영사를 역임한 이 청장도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LA총영사 부임 당시처럼  초대 동포청장으로서 새롭게 각오를 다지려는 목적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어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기조강연도 남다른 행보다. 동포청은 한국학교 운영 활성화를 통한 차세대 인재 양성, 이들과의 유대 강화가 역점 사업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기조강연은 청장이 직접 한국정부의 차세대 육성 방침을 설명하고 현장의 목소리도 듣는 기회가 될 것이다.         미주한인사회도 이 청장의 활약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다양한 해외공관 근무 경험으로 750만 해외 한인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전문성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출범한 동포청은 인력 확보 등 본격 가동에 필요한 골격을 조만간 갖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시기에 청장이 한인사회 여론 수렴에 나선 것은 의미가 있다. 다만 이 청장은 특정 인사들이 아닌 다양한 한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인들의 진정한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청장의 이번 방문이 재외동포정책의 기본 틀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사설 동포청장 목소리 초대 동포청장 해외 한인사회 한인사회 여론

2023-08-09

오로라 박물관, 신명관 식당 셰프 초대

   오로라 박물관은 홍보기획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달 29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12시30분까지,  ‘Chef of Aurora’라는 주제로 오로라 소재 한식당 신명관의 셰프를 초대해 한국음식 종류와 한국음식 역사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이 행사를 위해 신명관 식당은 해나 조 대표와 박성남, 김세일 세프가 참석해 K푸드의 대표주자인 김치와 양념갈비, 각종 해산물 요리에 대해 설명했다. 이날 행사에는 50여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양념소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에 대해 해나 조 대표는 “간장과 된장, 고추장, 고추가루는 예부터 고기를 재거나 찌개를 끓일 때 꼭 필요한 한국의 대표 양념”이라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음식과 문화 등을 알리기 위해 미흡하지만 열심히 행사에 참여했다. 참여하신 분들이 한국음식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주어서 놀랐다. 오로라 박물관에서 이렇게 한국음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귀한 자리에 저희 신명관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 면서 “20여년 전 콜로라도에 처음왔을 때 식당을 운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은행에서 일을 하다가 2017년에 갑작스럽게 신명관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팬데믹 동안 더욱 힘들었다. 그러나 맛있고 좋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힐링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의 자랑스러운 음식문화를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며 그간의 고충과 보람을 함께 털어놓았다.       조 대표와 두명의 셰프는 한국음식에 관한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강연한 후, 김밥을 직접 말아보는 체험장을 마련했다. 신명관측에서는 대나무 김말이 발과 밥, 김, 단무지, 맛살, 햄, 우엉, 오이, 계란, 오뎅 등을 준비했고, 참가자들은 김밥을 직접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조 대표는 “박물관이라는 장소가 국한되어 있어, 냄새가 나거나, 혹은 끓이거나 구울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피크닉 갈 때도 좋고, 한국의 대표 핑거푸드인 김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다같이 김밥을 만들고 시식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한편, 신명관측은 박물관으로부터 받은 강연료는 박물관에 후원했다.   김경진 기자박물관 신명관 박물관 신명관 신명관 식당 셰프 초대

2023-08-04

"도청 장치 있는지 지금도 찾아본다"

북한에 최초로 설립된 미국 언론사인 AP통신 초대 평양 지국장인 진 이(Jean Lee.사진)씨는 북한에서 지낸 3년간의 기자 생활을 회고했다.   지난 2012년 1월 AP통신의 초대 평양 지국장으로 부임한 이씨는 언론에 대한 통제가 가장 심한 나라 중 한 곳인 북한에서 지국을 운영한 최초의 미국인이다.     26일 ‘보이스오브아메리카(VOA)’에 따르면 현재 워싱턴주에 머무는 이씨는 방에 들어갈 때면 첫 번째로 눈이 가는 곳은 천장 쪽 코너다. 북한에서 항상 도청 장치를 찾으며 생긴 습관이다.     이씨는 “북한을 떠난 후 편집증이 생겨 다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민간이 운영하는 독립 언론은 없다. 모든 언론 매체들은 당이나 정부기관이 직영하며 오로지 국가 선전을 위한 수단이다.     북한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씨는 전 세계에 북한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수록 감시와 신변위협의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했다. 이씨는 북한에 한번 갈 때마다 한 달씩 머물렀다.     그는 “북한은 접근이 어렵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며, 정보원을 구축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 다른 나라와 다르다”며 “북한을 잘 다루려면 엄청나게 수완이 풍부하고 영리하며 창의적이고 개방적이며 전략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거기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수록 감시의 정도를 더 잘 알게 되었고 더 무서웠다”고 회상했다.       또한 이씨는 자신의 생활 조건이 북한 엘리트와 비슷할 것 같지만, 극한 환경이었다고 말했다.     음식과 물은 때론 오염돼 있었고, 겨울이면 지독한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또 정전에 너무 익숙해져 손전등을 항상 들고 다녔다.     이씨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인터뷰 중 하나는 북한 주민들과 녹음을 하지 않는 일상적인 대화였다고 전했다.     그는 “평양에 있는 것은 외부에서 취재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며 “북한에서 보는 것의 많은 부분이 연극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 2017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가 마지막이라고 전하면서 그곳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도 전했다.     그는 “북한 동료들과 친밀한 우정을 쌓았다. 그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느꼈고 그들도 나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며 “이들의 안전을 위해 더는 접촉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국경이 폐쇄된 상황에서 외국 언론인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는 현재 북한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욱 알기 어렵게 만든다고 우려했다.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북한 도청 도청 장치 외국 언론인 초대 평양

2023-07-27

[신 영웅전] 당당했던 여운형

이념의 대립이 날카로운 지금 여운형(1886~1947)을 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그는 빼어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학식이 높고, 언어에 능통했고, 운동에 소질이 있어 초대 대한체육회장을 지냈다. 그 시대에 시국을 읽는 데 가장 뛰어났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다만 판(判)에 대해서는 다르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여운형은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어느 때는 일을 벌여 놓고 수습하지 못했다. 이럴 경우에는 참모를 잘 둬야 하는데, 그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믿고 의지하던 동생 여운홍(呂運弘)마저 형을 버렸을 때 그는 의지할 곳 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그의 박덕한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다.   미군의 정보에 따르면 일본은 패망하면서 여운형에게 거금을 주고 구명도생(苟命圖生)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하지(J R Hodge)는 여운형을 차기 집권자로 구상했다. 하지는 여운형이 ‘매우 유능한(immense capability)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는 여운형을 군정청 고문으로 내정하고 그를 초치했다. 그랬더니 여운형이 답변서를 보내 “내가 인민공화국을 세웠으니 (우리가 집권하고) 군정이 우리 고문이 돼야 하는데 이번 일은 주객이 뒤집힌 것”이라며 가지 않았다. 군정청을 기웃거리며 뭔가 한자리 얻으려고 기신거리던 세태를 고려하면 그는 이 점에서 다른 정치인과 달랐다.   요즘 주한 중국 대사가 야당 대표를 불러 훈계한 사건이 세간의 화제다. 불려가서 한 끼 식사 대접받고 사진 찍으면 자신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 판단은 틀렸다. 여운형처럼 “당신이 오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지금이 노론(老論)의 시대도 아닌데….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여운형 군정청 고문 차기 집권자 초대 대한체육회장

2023-06-25

이기철 초대 재외동포청장 임명…실무경험·전문성 겸비

이기철(사진) 전 LA총영사가 재외동포청 초대 청장(차관급)에 임명됐다.     2일(한국시간) 대통령실은 재외동포청 초대 청장에 이기철 전 외교부 재외동포 영사대사가 임명됐다고 발표했다.     이기철 신임 청장 공식 임기는 재외동포청이 출범하는 5일 시작한다. 이 신임 청장은 “재외동포들의 오랜 바람이자 대통령 공약사항으로 재외동포청이 설립된 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실무 경험과 전문성을 두루 갖춘 이 신임 청장을 필두로 750만 재외동포 여론수렴 및 정책개발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신임 청장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외무고시(19회)에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외교부 리비아 1등 서기관·유엔대표부 1등 서기관·이스라엘 참사관·조약국장·국제법률국장·재외동포영사 대사, 네덜란드 대사를 거쳐 LA총영사를 역임했다. 2018년 5월부터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해왔다.     이 신임 청장은 2007년 7월 샘물교회 피랍 사건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돼 탈레반과 직접 협상에 나선 외교관 중 한 명이다. 재외동포영사국 심의관으로 일하던 2009년 3월 한국인 관광객 4명이 숨진 예멘 테러 사건 수습을 위해 현지에 파견됐다 자살폭탄 테러 공격을 당할 뻔한 일화도 있다. 그는 일 처리가 꼼꼼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재외동포청은 재외동포 정책과 사업을 총괄한다. 기존 재외동포재단 업무도 이어간다. 이 신임 청장이 세계 최대 한인사회인 LA총영사를 지닌 이력은 재외동포 여론수렴 및 정책반영에 도움이 될 것이란 평가다. 그는 2016년 4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LA총영사로 활동하며 외교관 생활을 마무리했다.   한편 5일 출범하는 재외동포청 본청은 송도국제도시 부영송도타워, 151명 규모로 기획조정관·운영지원과·재외동포정책국·교류협력국으로 구성된다. 통합민원실인 재외동포서비스 지원센터(25명 배치, 24시 동포콜센터 82-2-6747-0404)는 서울 광화문 트윈트리타워 A동 15층(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6)에서 재외동포를 위한 원스톱 민원서비스를 제공한다.   김형재 기자재외동포청장 실무경험 재외동포청 초대 재외동포청 본청 이기철 신임

20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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