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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위한 용사들의 희생에 무한한 경의를"

    6.25참전유공자회 워싱턴지회(회장 손경준)가 25일 한인커뮤니티센터에서 제 32주년 기념 및 총회를 개최했다.   손경준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1991년 4명이 창립해 8년전 475명이었던 회원들이 현재는 161명이 남았다”면서 “생존해 있는 회원 조차 치매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매년 보은행사를 열어주는 벧엘교회와 워싱턴여성재단에 등에 감사를 전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는 워싱턴한인연합회 고은정 수석부회장의 사회로 김용돈 목사가 개회기도를, 조기중 총영사, 이성진  국방무관보를 비롯 스티브리 회장, 은영재 회장, 헬렌 원 회장, 김인철 회장 등이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조 총영사는 “6.25 발발 73주년,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해에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와 조국 평화 수호를 위해 목숨 바친 용사들의 희생에 무한한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며 “여러분의 숭고한 희생이 아니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73년전 전쟁 속에 피어난 전우들의 뜨거운 우정을 바탕으로 한미유대 강화를 위해 활동하는 모범단체로 오래도록 남아주길 바란다”며 용사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미동부지회 김인철 회장은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은 현재 긴장고조 상태에 있다”면서 “앞으로 한미동맹이 더욱 굳건해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6.25참전유공자회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는 열심히 노력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워싱턴한인연합회 스티브 리 회장은 “여러분의 목숨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메릴랜드 한인회 헬렌 원 회장은 “세계속 대한민국이 오늘날 위상과 입지를 다지기까지 미국과 여러나라의 도움과 참전용사들의 피의 희생이 있었다”면서 “참전 유공자들과 현재도 생존해 민족상잔의 참상을 치르고 증거하는 유공자들께 우리 모두는 빚진 자”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JUB문화센터의 난타 및 꼭두각시 축하무대가 열려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었다. 더불어 유공자회가 32주년을 맞기까지 헌신으로 수고한 김명호 부회장에게 표창장이 전달됐다.     한편 기념식 이후 신진균 수석부회장 진행으로 이어진 총회에서는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제 24대 회장으로 손경준 회장의 2년 유임을 확정했다. 손경준 회장은 답사에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유공자 회원들의 권익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조국 용사 수석부회장 진행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미동부지회 25참전유공자회 워싱턴지회

2023-11-30

월남전종식 50주년기념식 개최

뉴욕시 맨해튼에서 열린 월남전종식 50주년기념식에 한인 월남전 참전용사 단체 주요 인사들과 회원들이 대거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오는 29일 월남참전용사의 날(Vietnam Veterans Day)을 맞아 지난 25일 통합전쟁퇴역군인연합주최로 맨해튼 44스트리트에 있는 뉴욕시기술통상총연합회 도서관에서는 월남전이 막을 내린지 50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뉴욕베트남참전유공자전우회 백돈현 회장, 함동윤 이사장, 서병문 수석 부회장, 양상훈 부회장,  송태보 총무, 김석환 예비역 대령, 이명국 전 회장, 황노현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뉴저지지회 회장, 남성복 펜실베이니아 월남전참전전우회 회장, 프레드 가시오 미국베트남참전유공자회 VVA 126 회장, 마이클 보치니 뉴욕주재향군인서비스 부디렉터, 제임스 핸든 뉴욕시재향군인서비스 국장 등이 참석해 남방의 뜨거운 정글에서 함께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전우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전사자 이름 호명 ▶헌화 ▶시상식(올해의 영웅상 Bill Nelson, Steven Picket) ▶캐시 호컬 주지사의 선포문 증정(마이클 보치니 뉴욕주재향군인서비스 부디렉터 대행) 등이 진행됐다.   백돈현 회장은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최근 전우회의 현안인 보훈 법안에 대해 “한국 월남참전용사들의 보훈혜택 법안이 지난해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을 통과하지 못했다”며 “오늘 50여 명의 전우들과 함께 법안 통과를 위해 참석한 미국인 관계자들에게 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또 제임스 핸든 뉴욕시재향군인 서비스 국장은  축사에서 “다시는 이 같은 전쟁이 없어야 한다. 후세들에게  월남전 교육을 시켜 월남전 모자를 쓴 재향군인들을 보기만 해도 경의를 표하도록 하자. 고엽제 후유증으로 참전용사 및 가족들이 고생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종민 기자뉴욕베트남참전유공자전우회 월남전종식 50주년기념식 백돈현 회장 함동윤 이사장 월남전 참전 용사

2023-03-26

"참전 용사들의 헌신 잊지 않겠다"

  재향군인회 남부지회(회장 장경섭)는 25일 오후5시 60.25전쟁 제72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처음으로 애틀랜타 한인회관에서 개최된 가운데 약 300여명이 참석해 성황리에 개최됐다.   남부지회는 이번 행사에 한인 교민들은 물론 주류사회 지도자, 6.25참전용사, 포트베닝에서 연수 중인 한국군 등을 초청했다.    장경섭 회장은 인사말에서 "이 자리에 6.25참전 용사분들께서 참석해주셨다"라며 "이들이 없었다면 자유로운 대한민국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조지아에도 LG, 기아·현대자동차, SK 등 대기업이 진출하는 것도 가능해졌다"라며 "이분들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심만수 6.25 참전 유공자회회장은 기념사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장병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현재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노르만 보드 한국전쟁 참전용사회 회장은 "오늘의 행사는 기념이 아닌 추모 행사"라며 "나는 다행이도 이곳에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한국은 전혀 다른 곳이 됐다"라며 "이들의 도움과 또 많은이들의 도움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는 주요 귀빈들의 기념사 외에도 김복희 배우의 시낭송, 장진호 전투 스토리 설명, 시엘로 앙상블, 김미경 무용단 공연 시간도 있었다. 이후 참가자들이 6.25노래를 함께 제창하고 만찬 뒤 행사가 마무리됐다.   한편, 이번 행사는 애틀랜타 총영사관, 애틀랜타 한인회, 민주평통 애틀랜타 협의회, 동남부 한인회 연합회, 조지아 애틀랜타 한인 상공회의소, 월남참전 유공자회, 조지아 해병전우회, 문무회, 조지아 대한체육회, 식품협회 김백규 회장, 정용선 전 호남향우회장 등이 협찬했다. 박재우 기자참전 용사 참전용사회 회장 참전 유공자회회장 25참전 용사분들

2022-06-27

한국전쟁 60주년 그후 <3>…전쟁 고아들 입양돼 미국으로

예수사랑나눔선교회의 이영배 선교사 부부는 매주 일요일 애틀랜타 다운타운 홈리스 쉘터에서 무료 급식 봉사를 한다. 주중에는 식당을 하고 주말에는 70~100인분의 음식을 만들어 노숙자들에게 대접한다. 1954년생인 이 선교사는 전쟁고아다. 그는 참전용사인 아버지가 전투중 부상으로 사망한 뒤 5남매의 손을 잡고 월미도 영종보육원을 찾아갔다. 이 선교사는 “고아로 자라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며 “월미도 주둔 미군 해병대 아저씨들이 준 옥수수와 우유를 먹고 자랐고, 명절 때마다 준 초콜릿과 막대사탕을 준 아껴먹었던 기억이 선하다”고 회고한다. 이 선교사는 “노숙자 중에는 주한미군 출신도 많다”며 “미군 원조를 먹던 고아가 커서 미국 노숙자에게 한국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마치 운명같다”고 말했다. ▷숨겨진 상처 ‘전쟁고아’= 한국전쟁은 전사자와 부상자 뿐만 아니라 고아들을 양산했다. 이들중 상당수는 미국에 입양됐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에 입양된 전쟁고아는 5348명에 달한다. ‘애틀랜타 한인이민사’는 한국전쟁중 부모가 사망하거나 가족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애틀랜타에 입양되기 시작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 주한미군으로 복무한 스탠 피셔(71) 씨는 남녀 고아 2명을 입양했다. 피셔 씨는 “한국 주둔 당시 부대 차원에서 위문간 고아들을 잊지 못했다”며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그들이 다시 생각 나 한국 고아를 입양했다”고 밝혔다. 피셔 씨의 두 자녀 역시 변호사와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했지만 한인사회와 교류는 적다. 한인들을 위한 시민권강사로 활약하는 피셔 씨는 “자녀들이 아쉽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은 없다”며 “자녀들의 판단을 존중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전쟁고아와 입양아들은 한국인의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미주 한인사회와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한인사회의 보수성과 순혈주의, 입양아라는 출신 때문에 성장해도 한인사회를 멀리하고 있다. 입양아 출신 작가 제인 정 트렌카 씨는 “미국내 한국출신 고아들의 숫자가 적지 않지만, 입양인들은 여전히 한인과 접촉하고 한인사회에 진출하길 꺼려한다“입양인들은 한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도록 요구받곤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잊혀진 이름 ‘전쟁 신부’= 전쟁 신부(war bride)들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소외된 또다른 그룹이다. ‘애틀랜타 한인 이민사’에 따르면 한국에 주둔한 20대 미군 청년들이 한국여성들과 교제하면서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온 여성들의 숫자가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여명으로 추산된다. 남동부에 산재한 미군기지 주변에는 아직도 전쟁신부들을 흔히 볼수 있다. 조지아주의 경우 포트베닝 육군기지가 위치한 콜럼버스, 도빈스 공군기지가 위치한 마리에타에서 전쟁신부들이 머물렀다. 콜럼버스 반석장로교회 박성만 목사는 “미군과 결혼한 전쟁신부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잊지 않고 남편과 함께 한국교회를 찾으며 한미관계를 잇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전쟁신부들은 이른바 ‘양공주’라는 편견을 피해 한인사회와의 접촉을 피하기도 한다. 40년전 미군과 결혼한 김 모 씨는 “‘양공주’라는 말이 듣기 싫어 한국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해가서 살기도 했다”며 “한인들이 드문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주에는 미군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후 고독한 노후를 보내는 전쟁신부들의 사연도 드물지 않게 들려온다”고 밝혔다. 이종원 기자

2010-06-24

한국전쟁 60주년 그후<2>… 전쟁 후 미국 이주 러시

김광현 전 애틀랜타 한인회장(88)은 60년 전을 잊을수 없다. 6.25 발발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당직 장교였던 그는 이날 새벽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듣고 “같은 동족을 이렇게 침략할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40여년 후 미국에 정착하고 북한관광을 간 그는 관광안내원이 “북침설”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날 그때를 겪은 사람이 엄연히 여기 살아있는데, 미국에 있어도 북한에 있어도 그때 일은 영원히 잊을수 없다”고 회상했다. △이민사회 주축된 참전용사=한국 전쟁 이후 한인들의 미국 이주가 러시를 이뤘다. 이주자중에는 한국전 참전자들도 적지 않았다. 재향군인회 미남부지회에 따르면 남동부 6개주에 거주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70여명이다. 이들은 미국 이민 후에도 군 경력을 살려 이후 남동부 이민사회 주축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중위였던 김광현 씨는 대령으로 제대한 후 83년 미국으로 이민온 후 19대 애틀랜타 한인회장, 초대 재향군인회 미남부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도라빌에 거주하는 김종구(82) 씨는 한국전 참전 후 대위로 제대한데 이어, 페이엣빌 한인회장, 동남부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 씨는 “군 출신들은 결속력이 좋고 집단 운영에 능하며 반공정신이 투철했다”고 회상했다. △초기이민 기틀잡은 유학생=참전자 뿐만 아니라 전쟁 중 미군과 인연을 맺은 당시의 청소년들도 미국에 건너 왔다. 이들은 민족의 비극이 다시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향학열을 불태웠다. 이들 중 상당수가 애틀랜타에 정착해 한인사회가 기틀을 잡는데 일조했다. 테네시 주립대 김근하 명예교수는 “서울대 공대 입학 직후 한국전쟁이 터져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UN군 심리작전과에 취직해 영어번역 업무를 맡았다”며 “당시 같이 일했던 심리전 장교 셰퍼드 중위와 보증을 서 줘, 듀크 대학 입학에 성공할수 있었고 이후 남동부에 정착했다”고 회상했다. 스와니에 거주하는 한국국제교육원 이유상 대외협력 고문은 “한국전쟁 당시 중학생이었던 우리들은 부산 후퇴 후에도 천막학교에서 공부해야 했다”며 “가난한 와중에도 영어를 배우고 싶어 미 문화원에 부탁했고, 그 인연으로 유학에 성공할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들의 이민 생활은 쉽지 않았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이민온 1950~1970년대 애틀랜타 등 미국 남부 지역에는 흑백 인종차별이 엄존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한인사회 터전을 일궈냈다. 전쟁을 겪으면서 다져진 굳센 의지가 힘이 됐던 것이다. 이종원 기자

2010-06-23

한국전쟁 60주년: 한국전과 미국 그리고 조지아(1)…“긴 시간 지났어도 한국 못잊어”

오는 25일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 날이다. 한국전쟁은 한국의 현대사는 물론, 미주한인 이민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 60주년을 맞아 참전용사의 증언과 학계의 진단을 통해 한국전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한인사회의 새로운 좌표와 미래지향적인 한-미 관계 정립을 모색해본다. 알파레타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가면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9피트 높이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바닥에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조지아 출신 미군 740명의 명단이 새겨진 벽돌이 깔려 있다. ▷한국군 감투정신에 감명= 한국의 재향군인회 격인 아메리칸 리전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전쟁 3년간 연인원 180만명의 미군을 한국전쟁에 파병했다. 이 가운데 5만6246명이 전사했다. 전사자중에는 조지아주 출신도 740명이나 된다. 보수적 성향의 남부 출신 답게, 대부분의 조지아 참전용사들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군의 감투정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조지아텍 출신으로 참전해 휴전협상에 임했던 해롤드 A 다이 퇴역 준장은 “수송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릴 때까지 한국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며 “그러나 내가 만난 모든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감투정신에 불탔다”고 밝혔다. J.R. 웨이지즈 퇴역 준위는 “한국의 험한 산지와 논과 밭, 그리고 인분으로 만든 거름을 뿌리는 한국의 농지를 보고 처음엔 소스라치게 놀랐다”면서도 “미군은 물론 모든 한국군이 ‘낙동강에서 밀리면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각오로 싸웠고, 나 역시 금강 전투에서 다리에 총을 맞고 2주간 후송됐다”고 회고했다. ▷지역사회 지원 활발= 조지아와 한국전과의 인연은 병사들만이 아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부상자를 돕기 위해 애틀랜타를 비롯한 조지아주의 기부와 봉사도 활발했다. 스톤마운틴에 있는 하이랜드 교회의 1953~1954년 고아들의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과 비타민 확보를 위해, 생선간유 모으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교회 측은 “오래전 일이라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한국 고아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기쁜 일”이라고 밝혔다. 또 애틀랜타 라이온스 클럽, 조지아 남성 클럽 등에서도 한국전 고아 돕기 기부 캠페인을 벌인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애틀랜타 아그네스 스캇 칼리지 출신 유학생 필리 최 씨가 서울에 ‘성부 고아원’(Holy King Orphanage)을 설립하고, 애틀랜타 지역사회의 기부로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참전용사의 오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잠재적 친한파로서 남부 지역사회에 한국을 알렸다. 한국전쟁 직후 2사단에서 휴전선에 중사로 복무한 듀란트 시그넷 씨는 “의무군복무로 선택의 여지없이 간 한국이었지만, 젊은 시절 접한 새로운 세계는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은 한국전 참전용사회를 결성하고 2개월마다 애틀랜타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참전용사회 회원인 해롤드 다이 씨는 “휴전협정을 맺을 때만 하더라도 이 상태가 60년이 갈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며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북한의 궁핍함을 볼 때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공화당의 유력한 주지사 후보인 존 옥센다인 보험 커미셔너의 아버지 제임스 옥센다인 역시 한국전에서 부상당한 참전용사다. 옥센다인 후보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몸속에 박힌 중공군의 탄환을 가리키며, 한국전 참전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하셨다”며 “이후 주정부 커미셔너로 근무하면서 한국을 방문하며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종원 기자

2010-06-22

[OC] [참전 용사에게 듣는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겨울 티셔츠만 입고 떨던 전쟁고아 생생"

세리토스에 사는 동갑내기 루벤, 밴다이크는 한국 새에덴교회 초청으로 방한하는 41명의 참전군인, 가족 방문단에 속해 있다. 19세의 나이에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지의 나라와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에게 60년 전 한국에서의 상황을 들어 봤다. 몬태나주 출신 해병 밴다이크는 한국행을 앞두고 일주일간 가주 북부 시에라 산맥 근처에서 추위 적응 훈련을 받았다. 그는 "출발을 앞두고 휴가를 받아 집에 갔는데 어머니가 슬픈 눈으로 배웅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꼭 살아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당시 상황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루벤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육군 의무병으로 중부전선에 배치됐다. 그는 생후 4일된 딸을 뒤로 하고 무거운 발길을 옮겨야 했다. "아내와 딸을 두고 떠나는 마음은 너무 아팠지만 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을 돕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는 루벤은 한국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산과 들에서 왜 전쟁이 일어나야 했는지 참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사이에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허다했고 꽃다운 젊은 청년들도 많이 죽었다"면서 "전쟁 고아들이 추운 겨울에 티셔츠 하나만 입고 떨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잠시 눈가를 훔쳤다. 밴다이크는 인천과 임진강을 오가며 전방에 물자를 수송했다. 그는 "어느 날 인천항에서 군수물자를 싣는데 어린아이들이 몰려와 먹을 것을 달라더라"며 "대신 물건을 주었는데 그 새 주머니가 털리는 봉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밴다이크는 "화가 났지만 얼마나 생활이 어려웠으면 아이들이 저랬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한국 사람들과 좋은 기억도 함께 나눴다. 밴다이크는 "후방에서 잠시 틈이 나면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면서 "산과 마을 지리에 익숙한 아이들과 함께 꿩을 잡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잔뜩 설레는 한국 방문에서 가보고 싶은 곳도 많다. 루벤은 철원과 왕정 등 참전했던 곳을 돌아보고 싶다고 한다. 밴다이크는 당시 직접 찍은 서울역 사진을 보여주며 서울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또 인천항 근처 논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루벤은 "당시 한국 돈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가서 지금 돈으로 바꿀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TV와 친구들의 소식을 통해 발전한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전쟁으로 자유를 찾은 한국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마음에 담고 싶다"고 소망을 전했다. 이들은 방한 기간 중 일주일 일정으로 판문점과 전쟁기념관 서울의 주요관광지를 둘러보며 변화된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게 된다. 또 한국전쟁 해외 참전용사 100여명과 한국인 참전용사 300여명 미8군 장병 및 가족들이 함께 참석하는 연합만찬 및 예배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백정환 기자

2010-06-15

[내가 겪은 6·25] 영어 칼럼니스트 조화유씨, 큰형은 국군…작은형은 인민군 '가족간 총부리'

조씨는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6.25의 실상을 일깨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 60대 후반의 조씨를 6.25 세대로 치부하기에는 다소 젊은 감이 있지만 그 역시 초등학교 2학년 시절 가족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몸소 체험했다. 이같은 경험은 이번 창작집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공산당 폭정 몸서리 서울에서 살던 조씨는 8살이던 초등학교 2학년 6.25동란을 만났다.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던 시절 ‘전쟁이 터졌다’는 말이 소문으로 돌았다. 하지만 당장은 시큰둥했다. 일부 주민들은 짐을 꾸려 집을 떠나기도 했지만 조씨 가족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다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됐다. 어느새 다시 학교를 나오라는 통지문도 왔다. 어린 조씨는 학교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와 인민군 군가 등을 배워야했다. 또 작은 형은 인민군에, 누나는 여성동맹에 강제로 징집돼 부당한 군역과 노역을 감당해야 했다. ◇자유 찾아… 남으로, 남으로 배고픔은 더욱 참기 어려웠다. 동네 근처 남의 토마토 밭이나 참외 밭에 들어가 서리하기도 일쑤였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판단에 조씨 가족은 고향인 경남 거창으로 이주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차가 있기는 했지만 인민군이 군사용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걸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간 두 형과 난리통에 병사한 막내 동생을 제외한 남은 식구들이 모두 나섰다. 다행히 여름철이어서 노숙이 어렵지는 않았으나 역시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움겨 쥐어야 했다. 급기야 피난 보따리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식량과 바꿔 먹기도 했고 인심 좋은 농가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물론 중간중간 폭격의 위협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한달이 꼬박 걸려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가족간 총부리… 상잔의 아픔 큰형은 국군 공군조종사였다. 그런데 작은형이 인민군에 끌려가는 바람에 조씨 가족은 한지붕에서 남북이 갈려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처지가 됐다. 양 진영 군대로 간 형들의 소식을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큰형은 L19라는 경비행기를 타고 고향 상공을 통과하다가 집에 편지를 떨어뜨려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주곤 했다. 돌멩이가 든 편지는 멀리 떨어진 이웃집 장독대에 떨어지기도 했다. 이 ‘우표 없는 속달우편물 투하사건’은 한동안 동네에서 화제거리가 됐다. 이 에피소드는 이번 중편소설 ‘전쟁과 사랑’에도 등장한다. 다행히 인민군에 끌려갔던 작은형 역시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 및 국군의 대반격을 받고 후퇴할 때 부대를 이탈, 고향 마을을 찾아왔다. ◇전쟁의 참상 제대로 알려야 조씨는 이번 저서에 6.25 당시 시대 상황과 남북 분단의 긴장 관계, 한국의 좌우 이념 대립 등을 주제로 한 3편의 소설을 수록했다. 여기에 남녀간 사랑이야기를 가미시켜 재미를 더했다. 조씨는 “젊은 세대에게 한국과 남북의 대치상황, 6.25의 참상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영한대역 6.25전쟁 이야기’도 저서에 포함시켰다. 영어공부를 미끼로 해서라도 제발 6.25 전쟁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한글로 작성되고 곧바로 영문으로 번역된 문장을 통해 전쟁 표현 등도 익힐 수 있다. 젊은 층의 관심을 끌고자 만화 삽화까지 곁들였다. 이밖에 창작집에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 여기자 ‘마게리트 히긴스’의 6.25 관련 일화와 한국전 걸작 사진 10선 코너도 수록,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천일교 기자

2010-06-10

[한국전쟁 60주년···내가 겪은 6·25] "죽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싸웠는데…한국 정부 관심 절실"

전쟁 그리고 죽음.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가슴속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전우의 죽음을 수없이 목격해야 했던 22살의 젊은이는 그렇게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렸다. 60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젊은이는 어느덧 82세의 백발 노인이 됐다. 버지니아 애난데일의 한 노인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는 변희선씨.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을 정도로 노쇄해졌지만 6.25 전쟁 당시엔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장의 영웅’이었다.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8년. 고작 18살 때였다. 백골부대로 불리던 수도사단 3사단 18연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진급을 거듭했고 22연대 소속 특별공격대 대장으로 진두지휘를 맡았다. “총 들고 수류탄 던지고…. 매번 ‘죽는다’는 각오로 전투에 나섰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총알이 나를 피해가더군요.” 전투는 참혹했다. 곳곳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총쏘는 소리, 비명 소리에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동료가 쓰러져나가고 피가 튀는 전쟁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앞으로 나가고 또 나갔다. 변씨는 김일성 고지 전투 때 1개 분대를 이끌고 고지 탈환을 이끈 주역 중 한명이기도 하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알 속을 뚫고 달려나갔다. “지휘관이 약하면 모두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마음을 굳게 먹었 수 밖에 없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전투에 전투를 거듭하면서도 부상을 입지 않는 기적은 계속됐다. 전쟁이 끝난 후 준위로 임관, 72년 제대할 때까지 춘천 3보충대 제2 공수단에서 젊음을 바쳤다. 제대 후엔 워싱턴행 비행기에 올랐고 그 뒤엔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며 바쁜 이민 생활속에 빠져들었다. 아들 둘, 딸 둘을 다 키워놓고 나니 어느새 6.25 전쟁 60주년을 맞았다. 남다른 감회에 젖다가도 한국 정부를 떠올리면 아쉬운 점이 많다. “우리가 뭘 위해 싸웠습니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제 살아남은 사람도 얼마 안남았습니다. 해외에 있는 참전 유공자들이 조국에 대한 사랑을 더 느낄수 있도록 초청 사업 등을 더 확대해 줬으면 합니다.” 1928년생인 변희선씨는 워싱턴 지역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지냈으며,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상했다. 유승림 기자 ysl1120@koreadaily.com

2010-06-07

[한국전쟁 60주년…내가 겪은 6·25] “내 이름 ‘링크’처럼 은인들의 인연에 감사”

링크 화이트씨는 ‘꼬마 서승원’ 때부터 비범한 아이였다. 배고픈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무작정 평양 길에 오르는가 하면 9살 때는 미군 클럽의 바텐더로 명성을 날렸다. 미군 참전용사이자 부동산 비즈니스맨, 작가로 활동 중인 그는 자신의 이름 ‘링크(Link)’처럼 은인과의 연결고리를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7살 꼬마, 주린 가족 위해 김일성 장군 찾아 홀로 평양행 그는 1942년 함북 나진에서 3남 1녀 막내로 태어났다. 2년 뒤 함흥으로 이주한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일제시대부터 나막신과 나무로 된 소총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한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독립 후 공산정권이 북한을 장악하고 모든 사유재산을 빼앗으면서 어려움은 시작됐다. 김일성 대학에만 가면 김일성 장군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평양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잘못 탔는데 역무원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김일성 대학에 다니는 형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요. 당시 그 대학의 특권과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역무원들이 평양까지 저를 데려다 줬지요.” '가짜’ 동생인 체하면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던 그는 학교 담당자로부터 ‘그런 학생은 없다’며 쫓겨났다. 그리고 가출한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7살이었다. ▷6·25전쟁, 총 알 한방이 아까워 곡괭이로 공개 처형한 북한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날 마을 하늘에 생전 처음 보는 전투기가 날라 들더니 함흥의 길목인 다리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그 날부터 그와 온 동네 주민들은 미군이 퍼붓는 ‘포탄 세례’를 피하기 위해 매일 아침 점심을 싸 들고 동네 산에 숨어 있다가 저녁때가 되면 돌아왔다.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파편은 작은 조각이라도 맞으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미군의 공세에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떠나기 전 민주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있던 사람들을 공개 처형을 했어요. 전시에 총알 한 방이 아깝다면서 사람들을 줄에 매달고 곡괭이로 찍어서 죽였어요. 정말 악질하고 잔인했어요.” ▷8살 꼬마, 백골부대 청소부로 취직하다 1950년 가을 미군 백골부대가 마을을 점령했다. 한 가정당 1명씩 일꾼을 지원하라는 미군의 요청에 그의 형이 미군 부대의 청소부로 취직했다. 8살 꼬마에게 “거인처럼 보인 미군들”이 일자리를 줄 리 없었다. "말없이 군인들이 버린 담배 꽁초나 커피 잔을 치우기 시작했어요. 빗자루가 제 키만 했었죠.” 그를 며칠 동안 지켜보던 스티븐스 상사는 그에게 정식 청소부 자리를 내줬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일본어를 배웠던 스티븐스 상사는 그에게 ‘치사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일본말로 ‘꼬마’였다. 그 해 추수감사절에는 스티븐스 상사가 2달러, 또 다른 상사가 4000원을 그에 손에 쥐어줬다. 그 돈이면 당시 작은 집도 살 수 있는 아주 큰 돈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열흘 뒤에 꼭 돌아올게요" 그 해 12월 초 중공군이 밀물처럼 내려왔다. "미군이 급하게 철수하게 됐는데 스티븐스 상사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저를 데리고 가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열흘 후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드렸죠. 그 때가 부모님과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는 부대를 따라 부산을 거쳐 안동으로 이동했다. 온갖 잔심부름을 마다 않고 열심히 일했다. 군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씨름을 의무적으로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1951년 어느 날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한국군 상사의 부탁으로 담배를 대신 사주다가 암시장 일원으로 오해를 받았다. "군에서 쫓겨나고 여기 저기 헤매다 육군 10군단 기지에 도착했어요.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한 형을 붙들고 무조건 재워달라고 사정했지요. 알고 보니 이 형도 평양에서 출신이었어요.” 그는 조지 김이라 불리던 이 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조지 형은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 같은 사람이에요. 형의 보살핌으로 갈 곳 없던 제게 희망이 보였거든요. 지금 한국에 살아있다면 꼭 은혜를 갚고 싶어요.” ▷11살 소년, 양아버지를 만나다 1951년 7월 상사 전용 클럽에서 웨이터와 바텐더로 발탁됐다. "당시 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할리우드 스타들의 공연이 많았어요. 그 때 만난 당대 최고 여배우인 테리 무어씨는 지금도 엄마 같은 친구로 막역하게 지내고 있어요.” 1953년 휴전 후 그가 있던 10연대를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이 맡게 된다. "백 장군을 그 때 처음 뵈었죠. 미국에 와서도 연락을 드렸고, 얼마 전에 워싱턴에 오셨을 때도 찾아 뵙고 인사도 드렸어요.” 1954년 4월. 그의 인생을 뒤바꾸게 된 그의 양아버지인 앨버트 트루먼 화이트 상사를 만났다. “클럽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술을 마시고 있던 한 군인이 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리고 나서 ‘내 양아들이 되지 않겠냐’고 묻길래 농담인 줄 알고 ‘예스(yes)’했죠.” 40대 중반으로 아이가 없었던 화이트 상사는 다음날 그의 약속을 지켰다. 매일 밤 그에게 영어 쓰기와 읽기를 가르쳤다. 아시안에 대한 입양이 까다로웠던 탓에 미 대사관 직원과도 주먹 싸움을 불사했다. 이듬해인 1955년 7월 19일, 12세 소년 서승원, 아니 ‘체사이’는 링크 화이트로서 뉴저지 땅을 밟았다. "링크(Link)란 이름은 한 잡지를 보고 제가 지었어요. 저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잖아요. 연결을 의미하는 링크, 그 끈끈한 제 은인들과의 연을 제 이름으로 남기고 기억하고 싶었어요.” ▷베트남전 장교 되다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양아버지 화이트씨가 1964년 5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듬해 군에 지원했다. "꼭 장교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터프 하다는 조지아주 장교후보생대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장교가 됐죠.” 한국, 독일, 일본 등에서 군생활을 했던 그는 베트남전에 출전하게 됐다. 어릴 적 한국에서 씨름을 하고 놀았던 미군 상사들과의 극적인 재회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터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십 여 년 전 청소부 꼬마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보다 상사인 장교가 돼서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랬겠어요. 손은 제게 경례를 하는데 입은 떡 벌어져 있더라고요.” 베트남전은 정말 지독했다. 그는 이때 적의 공격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대신 미군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주는 훈장인 퍼플 하트 훈장과 용감한 군인에게 수여하는 동성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화이트씨는 베트남전 이후 군생활을 접었다. "전쟁이라면 진저리가 났어요. 공무원 생활을 거쳐 1988년부터 상업용 부동산 에이전트로 비즈니스를 하기 시작했죠.” 또 군 재직 시절 군 신문사에서 기자로도 활동했던 그는 작가로서의 길도 걷게 된다. 1995년 그는 “자신의 은인들에게 바치는” 자서전 ‘치사이의 이야기(Chesi’s Story)‘를 출판했다. 현재 북버지니아서 부인 제니씨와 살고 있는 그는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아들 1명을 두고 있다. "지금 제 아내는 북한의 제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생김새도 성품도요. 사실 어머니는 양어머니였어요. 단 한번도 그 사실을 제게 알린 적이 없었고요. 한 순간도 어머니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없어요.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만요.” 현재 그는 베트남전의 실화를 토대로 소설을 집필 중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항상 있다. 그러나 그는 강조했다. "평화 통일이 된다면 고향에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공산주의가 남아있는 한 북한에 발을 들여 놓고 싶지는 않아요.” 이성은 기자 graceful@koreadaily.com

2010-06-03

[한국전쟁 60주년…내가 겪은 6·25] 미군 ‘하우스 보이’서 장교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추운 겨울 어느 날 함흥. 우여곡절 끝에 미 육군 부대에서 막사 청소부로 일하던 8살 꼬마 서승원은 중공군의 반격으로 급히 후퇴를 하게 된 미군을 따라 남한으로 내려가게 된다. ‘적에게는 포크 한 개도 줄 수 없다’는 지침에 따라 모든 음식과 집기 등을 모조리 불태우려던 미군에게 부탁해 집 앞에 통조림 음식들을 수북이 쌓아 놓았다. 그리고 미군 아저씨와 함께 부모님에게 약속했다. “열흘 뒤에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 뒤 이 꼬마 승원이는 고향 땅을 단 한번도 밟지 못하는 ‘함흥차사’의 주인공이 됐다. 2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에 있는 한 식당에서 한인 링크 화이트씨를 만났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는 삐쩍 마른 체구에 강단 있어 보이는 모습이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6·25전쟁 당시 미군 부대에서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는 ‘하우스 보이’를 거쳐 12살까지 미군 부대의 바텐더를 하다 양아버지이자 인생의 영원한 ‘영혼의 친구’가 된 앨버트 트루먼 화이트 상사를 만났다. 미국에서 양부모와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화이트씨. 베트남전에서 무공 훈장을 받은 한인 장교가 됐다. 제대 후에는 부동산 사업가, ‘치사이의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출판하는 등 작가로 활동 중이다. 그가 바로 60년 전 고향 함흥을 떠났던 꼬마 서승원이다. 한 편의 영화 같은 화이트씨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에는 3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도 모자랐다. 그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분위기를 띄웠다가도 뱃속 깊이 박혀있던 그의 아픈 응어리들을 끌어 낼 때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쑥스러워 했다. 이성은 기자 graceful@koreadaily.com

2010-06-03

[한국전 참전 군인 6인 인터뷰] "자유 지킨다는 생각에 목숨 걸어"

인생의 나이테인 얼굴의 주름살이 삶의 황혼기를 말해주지만 마음만큼은 아직 이팔청춘이다. 전쟁 상황을 회상할 때는 마치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도 옆에 동료가 “요즘 연애한다고 바쁘다”고 놀리는 소리에는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청년이었다. 이날 만난 참전 군인들은 프랭크 맥카비, 리차드 W 로빈슨(, 윌리엄 M. 마일스, 윌리엄 W. 우드, 댈러스 C 램, W.R. 키트 킷슨씨 등 6명이었다. 이들의 한국전쟁 참전 당시 나이와 계급은 ‘평균나이 20세 이등병’이었다. 이날 3시간 이상 진행됐던 인터뷰에서 기자는 두 가지에 놀랬다. 첫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한 각자의 보람과 자부심이 단순히 자국의 명령을 따른 것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깊은 ‘정’이었다. 이들에게 한국은 보은할 줄 아는 나라, 의리 있는 나라, 정이 많은 나라였다.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해 흐르는 남북간 긴장기류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가 방침대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을 믿는다”며 지지를 보냈다. 이달 21일부터 27일까지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6.25전쟁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이들은 한국의 변화상을 본다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육군, 해병, 공군, 군의관 등 근무 배경도 사연도 다양했던 이들이 겪은 각양각색의 6.25를 들어봤다. "한국전 위해 2년 기다려" 프랭크 맥카비(Frank McCabe)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프랭크 맥카비씨. 일상이 지루하고 의미 없게 느껴졌던 17세 사춘기 소년에게 전쟁은 도전이었다. 한국전이 발생했던 1950년 그의 나이는 불과 15세. 군입대 허용 나이가 2년이나 모자랐지만 덜컥 군에 지원했다. “어느 날 연방 수사국(FBI)에서 집으로 찾아왔어요. 어머니께 ‘아들이 군에 지원한 것을 아느냐’면서요. 그래서 결국 17살이 될 때까지 2년을 기다렸어요.” 육군 이등병 맥카비씨가 한국에 도착한 때는 1953년 5월, 휴전협정을 약 2개월 앞둔 때였다. 그의 임무는 춘천 캠프에서 군수 물품과 식량 등을 트럭으로 운반하는 운송병. 당시 상황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로 도로 자체가 없는 폐허였다. 이건 수풀이 우거진 덤불이건 간에 보안상 이동시간은 불빛 하나 없는 밤이었다. “자칫 잘못 운전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곳을 수 없이 다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땐 어떻게 다녔을까 아찔합니다.” 트럭과 그 내용물을 노린 적군의 공격은 사방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위장한 적군이 트럭을 뺏으려고 곳곳에 함정을 놓기도 했어요. 총격전이 벌어진 적도 있었는데,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어요.” 그는 이듬해인 1954년 8월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영등포는 잘 있어요?”라고 대뜸 묻는 그는 “당시 한국에 대한 기억은 산과 들, 그리고 지독한 추위”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국전 참전 이후 베트남전에서는 전방 특별부대에서 3년 동안 전장을 누빈 ‘용사’로 성장했다. 1981년 26년 동안의 군생활을 마친 그는 단 한번도 한국전에 지원했던 것을 후회해 본적이 없다며 “이번에 꼭 영등포를 다시 가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맥카비씨는 “한국을 도운 것은 군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었다”며 “시간을 되돌려도 다시 (한국에)갈 것”이라고 말했다. "타자칠 줄 안다고 했더니…" 리차드 W. 로빈슨(Richard W. Robinson) 21세 육군 병장 리차드 W 로빈슨씨는 1952년 부산을 거쳐 대구에 도착했다. 어느 날 아침 한 중위가 ”타자 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예스(Yes)’라고 답한 즉시 그는 서울로 옮겨와 ‘전쟁기자’가 됐다. ”당시 부대는 옛 서울대 캠퍼스에 있었죠. 매일 전방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수집된 첩보들을 정리해서 본부로 보냈어요. 저랑 교대로 근무하는 동료 1명이 있었는데,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18개월을 계속 그렇게 보냈어요.“ 유일한 낙은 영화와 뒤늦게 들여 온 농구대였다. 그래도 전방에 비교하면 행복한 일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우리는 샤워도 할 수 있었고 요리도 해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로빈슨씨는 1967년 다시 부평에 있는 미군부대로 배치를 받으면서 한국을 다시 찾게 됐다. 계급도 주임원사로 진급했다. ”휴전 후 10여년이 지난 한국은 깜짝 놀랄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어요. 당시 한국 군인들과 친선 야구경기를 가졌던 기억이 엊그제 같아요.“ 그는 1971년 23년 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뉴햄프셔에서 24년을 지내다가 1994년 워싱턴DC로 옮겨왔다. 퇴역군인아파트에 입주한 것은 아내를 5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이후다. ”이곳 생활도 재미있어요. 한국전, 세계2차대전, 베트남전 등 참전했던 경력은 다양하지만 군생활을 했던 동료들과 옛날 얘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몰라요.“ 그는 한국 방문을 앞두고 뉴햄프셔에 있는 딸을 방문할 계획이다. 옆에 있던 한 동료 ”딸이 목적이 아니라 데이트가 있다“고 놀려대자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힌다. ”저도 혼자인데 데이트도 하고 그래야죠. 하하“ "한국은 고마워할 줄 아는 나라" 윌리엄 M. 마일스(William M. Miles) ”유럽의 어느 나라도 고맙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윌리엄 M 마일스씨는 1950년 부산 앞바다를 지키던 해군 이등병이었다. 당시 나이는 25세. 6개월씩 교대로 총 18개월을 한국에서 보낸 그의 부대는 아군의 지원 사격이 주된 임무였다. 배 안에서의 생활은 전방과 마찬가지로 긴장되는 24시간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전시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힘들었죠.“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는 지금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린다고 했다. ”배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겨울은 더 추웠어요. 수 십 명이 작은 모닥불에 다닥다닥 붙어서 몸을 녹이려고 했었죠.“ 어느덧 83세 할아버지가 된 마일스씨는 지금도 웨이트 트레이닝과 골프를 즐기는 스포츠맨이다. ”아직 건강하잖아요. 혼자 병원에 가지 못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병원도 가고요.“ 그는 ”6.25전쟁 이후 6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 때 젊은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전쟁 트라우마 치료사" 윌리엄 W. 우드(William W. Wood) 전쟁터에는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만 있는 게 아니다. 윌리엄 W우드씨는 6.25전쟁에서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를 겪는 군인들을 치료하는 군의관이었다. 그는 ”전쟁의 잔혹함이란 그 장면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육체적인 마비 증상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날 다른 예비역들과는 달리 징병으로 한국에 오게 됐다. ”의대를 졸업하자 마자 징병대상에 올랐어요.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4명이나 있었죠. 1952년 초 서울에 도착했는데, 옛 일본 감옥을 치료실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전쟁 쇼크로 고통 받는 동료들을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증세가 약할 경우 안정을 취하고 다시 부대로 돌려보내지만 충격이 심하게 왔을 때는 거동조차 힘들기도 해서 귀국 조치를 하기도 했어요.“ 후방에 있다고 안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후방에는 ‘파이브 어클락 찰리(5 o’clock Charlie)‘라고 불리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매일 오후 5시쯤 적군 경비행기의 조종사가 직접 작은 폭탄을 던지고 다녔어요. 워낙 낮게 날아서 아군 레이더망에도 잡히지도 않았고요.“ 그는 이 ’파이브 어클락 찰리‘가 군인들 사이에서는 코믹하지만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조종사의 테러 목적은 대통령 암살이었대요. 그게 군인들 사이에서는 우스꽝스러웠지요.“ "최전방서 동료 죽음 수도 없이 봐" 댈러스 C. 램(Dallas C. Lamb) 댈러스 C 램씨는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20세 육군 병장이었다. 주로 감시초소에서 4~5명의 동료들과 움직였던 그는 산꼭대기에서의 잠복은 생활이었다. 여기 저기 계속해서 지역을 옮겨 다녀야 했기에 금화 외에는 지명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에 장밋빛이란 없어요. 현실은 잔인하고 끔찍하죠.“ 공군이었던 램씨의 형도 세계2차대전 당시 적군의 폭격에 전사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은 한 달에 한 번 겨우 미국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받는 편지와 동료 젝키씨의 어미니가 보내주는 통조림 음식 등이었다. ”신앙이 독실했던 어머니가 한 번은 제가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받아보시고는 뭐라고 하셨어요. 어머니께 그랬죠. 매일 긴장감이 엄습해오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요. 생각해보세요. 스무 살 청년이 전쟁터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전투를 치를 때마다 함께 했던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음이 괴로울 때는 전사한 동료들의 가족이나 여자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알릴 때였어요. 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형체도 없이 죽었다고, 몸이 두 동강이 났다고 사실 그대로를 얘기할 수는 없죠. 그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고,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말해줬어요.“ 전장에서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벙커에 몸을 숨기고 적군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동료였던 젝키씨의 몸이 붕 떠올랐다 푹 떨어졌다. ”젝키의 얼굴을 사정 없이 때렸어요. 그러고 보니 피가 안 나더라고요.“ 램씨는 ”총알이 동료의 철모 틈새로 들어가 곡선을 따라 반대편으로 튀어 나가는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며 ”그런 일이 다른 군인한테도 일어난 적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 주인공이 가장 친한 친구여서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인천상륙 소식에 흥분" W.R. 키트 킷슨(W.R. "Kit" Kitson) 1952년 공군 이등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W.R. 키트 킷슨씨를 퇴역군인아파트에 있는 그의 방에서 만났다. 2~3평 남짓한 작은 방은 침대, 책상, 1인용 소파가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작은 옷장과 한 명만 딱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욕실이 전부였지만 그는 인터넷을 즐길 줄 아는 ’신세대‘ 예비역이었다. 그가 전쟁에 참전했을 나이는 18세.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찍은 사진이라며 빛 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전쟁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군에 지원했었어요. 징집당하는 것보다는 자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영등포에 배치됐던 그는 가장 흥분되는 뉴스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이었다“며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한국에서 맡았던 임무는 기밀 문서 등을 처리하는 일이었다며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다“고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그는 전쟁으로 잿더미였던 나라가 지금의 번영을 이룬 것에 놀랍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번 한국에서 열리는 6.25기념식에서 입을 거라며 방 한 쪽에 정성스럽게 걸려 있는 제복을 자랑해 보였다. 킷슨씨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지만 미군들은 자유를 지킨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었다“며 ”또 한국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퍼지는 촉매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 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고 강조했 다. 이성은 기자 graceful@koreadaily.com

2010-05-31

[한국전쟁 60주년…내가 겪은 6.25] "한국 도운 것 후회없다"

6.25전쟁이 일어난지 올해로 60주년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치러진 전쟁으로 인한 한국측 사상자는 약 200만명. 미국을 포함한 16개국 UN군 사상자 수도 약 50만 명 달하고, 북측의 사상자도 400만명이 넘는 등 6.25전쟁은 동족의 아픔을 넘어 세계적인 비극이었다. 더욱이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의 아픔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워싱턴 중앙일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재조명하기 위해 ‘내가 겪은 6.25’를 시리즈로 싣는다. <편집자주> 지난달 20일 따뜻한 봄기운이 만연했던 날 DC 소재 퇴역군인아파트(AFRH). AFRH에 있는 한 회의실에서 5명의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만났다. 인터뷰를 약속한 나머지 1명은 사정상 그의 방에서 별도로 만나기로 했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활짝 미소 지으며 “오느라 수고 많았다”고 반겨 주는 이들의 모습은 그저 인정 많은 할아버지들이었다. 하지만 60년이나 지난 6.25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혈기 왕성했던 그 때 그 청년으로 돌아간 듯 눈빛이 반짝거렸다. 당시 17세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자진해서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군에 지원했다는 프랭크 맥카비씨는 “영등포가 아직도 있느냐”며 지명까지 똑똑히 기억했다. 이들은 “생전 들은 적도, 가본 적도 없는 작은 나라였지만 자유를 위협받고 있다는 말에 주저 없이 전쟁터로 나갈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수 많은 동료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을 도운 것에는 결코 후회가 없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한국전에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달 21일부터 27일까지 한국 정부의 초청과 서울의 한 교회의 재정 지원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대부분이 전쟁 이후 첫 한국 방문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가 경제강국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게 돼 설렌다”며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해군이었던 윌리엄 M 마일스씨는 “한국이 유일하게 자신의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준 것에 고맙다고 말하는 나라”라고 했다. “만나는 한국인들이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보람과 뭉클함을 느낍니다.” 이성은 기자 graceful@koreadaily.com

201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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