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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내가 겪은 6·25] “내 이름 ‘링크’처럼 은인들의 인연에 감사”

배고팠던 어린 시절, 김일성 만나러 홀로 평양행…8살 때 미군 청소부 되면서 60년간 가족과 생이별

링크 화이트씨는 ‘꼬마 서승원’ 때부터 비범한 아이였다. 배고픈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무작정 평양 길에 오르는가 하면 9살 때는 미군 클럽의 바텐더로 명성을 날렸다.

미군 참전용사이자 부동산 비즈니스맨, 작가로 활동 중인 그는 자신의 이름 ‘링크(Link)’처럼 은인과의 연결고리를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7살 꼬마, 주린 가족 위해 김일성 장군 찾아 홀로 평양행

그는 1942년 함북 나진에서 3남 1녀 막내로 태어났다. 2년 뒤 함흥으로 이주한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일제시대부터 나막신과 나무로 된 소총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한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독립 후 공산정권이 북한을 장악하고 모든 사유재산을 빼앗으면서 어려움은 시작됐다. 김일성 대학에만 가면 김일성 장군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평양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잘못 탔는데 역무원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김일성 대학에 다니는 형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요. 당시 그 대학의 특권과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역무원들이 평양까지 저를 데려다 줬지요.”

'가짜’ 동생인 체하면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던 그는 학교 담당자로부터 ‘그런 학생은 없다’며 쫓겨났다. 그리고 가출한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7살이었다.

6·25전쟁, 총 알 한방이 아까워 곡괭이로 공개 처형한 북한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날 마을 하늘에 생전 처음 보는 전투기가 날라 들더니 함흥의 길목인 다리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그 날부터 그와 온 동네 주민들은 미군이 퍼붓는 ‘포탄 세례’를 피하기 위해 매일 아침 점심을 싸 들고 동네 산에 숨어 있다가 저녁때가 되면 돌아왔다.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파편은 작은 조각이라도 맞으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미군의 공세에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떠나기 전 민주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있던 사람들을 공개 처형을 했어요. 전시에 총알 한 방이 아깝다면서 사람들을 줄에 매달고 곡괭이로 찍어서 죽였어요. 정말 악질하고 잔인했어요.”

8살 꼬마, 백골부대 청소부로 취직하다

1950년 가을 미군 백골부대가 마을을 점령했다. 한 가정당 1명씩 일꾼을 지원하라는 미군의 요청에 그의 형이 미군 부대의 청소부로 취직했다. 8살 꼬마에게 “거인처럼 보인 미군들”이 일자리를 줄 리 없었다.

"말없이 군인들이 버린 담배 꽁초나 커피 잔을 치우기 시작했어요. 빗자루가 제 키만 했었죠.”

그를 며칠 동안 지켜보던 스티븐스 상사는 그에게 정식 청소부 자리를 내줬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일본어를 배웠던 스티븐스 상사는 그에게 ‘치사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일본말로 ‘꼬마’였다.

그 해 추수감사절에는 스티븐스 상사가 2달러, 또 다른 상사가 4000원을 그에 손에 쥐어줬다. 그 돈이면 당시 작은 집도 살 수 있는 아주 큰 돈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열흘 뒤에 꼭 돌아올게요"

그 해 12월 초 중공군이 밀물처럼 내려왔다.

"미군이 급하게 철수하게 됐는데 스티븐스 상사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저를 데리고 가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열흘 후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드렸죠. 그 때가 부모님과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는 부대를 따라 부산을 거쳐 안동으로 이동했다. 온갖 잔심부름을 마다 않고 열심히 일했다. 군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씨름을 의무적으로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1951년 어느 날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한국군 상사의 부탁으로 담배를 대신 사주다가 암시장 일원으로 오해를 받았다.

"군에서 쫓겨나고 여기 저기 헤매다 육군 10군단 기지에 도착했어요.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한 형을 붙들고 무조건 재워달라고 사정했지요. 알고 보니 이 형도 평양에서 출신이었어요.”

그는 조지 김이라 불리던 이 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조지 형은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 같은 사람이에요. 형의 보살핌으로 갈 곳 없던 제게 희망이 보였거든요. 지금 한국에 살아있다면 꼭 은혜를 갚고 싶어요.”

11살 소년, 양아버지를 만나다

1951년 7월 상사 전용 클럽에서 웨이터와 바텐더로 발탁됐다.

"당시 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할리우드 스타들의 공연이 많았어요. 그 때 만난 당대 최고 여배우인 테리 무어씨는 지금도 엄마 같은 친구로 막역하게 지내고 있어요.”

1953년 휴전 후 그가 있던 10연대를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이 맡게 된다.

"백 장군을 그 때 처음 뵈었죠. 미국에 와서도 연락을 드렸고, 얼마 전에 워싱턴에 오셨을 때도 찾아 뵙고 인사도 드렸어요.”

1954년 4월. 그의 인생을 뒤바꾸게 된 그의 양아버지인 앨버트 트루먼 화이트 상사를 만났다.

“클럽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술을 마시고 있던 한 군인이 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리고 나서 ‘내 양아들이 되지 않겠냐’고 묻길래 농담인 줄 알고 ‘예스(yes)’했죠.”

40대 중반으로 아이가 없었던 화이트 상사는 다음날 그의 약속을 지켰다. 매일 밤 그에게 영어 쓰기와 읽기를 가르쳤다. 아시안에 대한 입양이 까다로웠던 탓에 미 대사관 직원과도 주먹 싸움을 불사했다.

이듬해인 1955년 7월 19일, 12세 소년 서승원, 아니 ‘체사이’는 링크 화이트로서 뉴저지 땅을 밟았다.

"링크(Link)란 이름은 한 잡지를 보고 제가 지었어요. 저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잖아요. 연결을 의미하는 링크, 그 끈끈한 제 은인들과의 연을 제 이름으로 남기고 기억하고 싶었어요.”

베트남전 장교 되다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양아버지 화이트씨가 1964년 5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듬해 군에 지원했다.

"꼭 장교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터프 하다는 조지아주 장교후보생대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장교가 됐죠.”

한국, 독일, 일본 등에서 군생활을 했던 그는 베트남전에 출전하게 됐다. 어릴 적 한국에서 씨름을 하고 놀았던 미군 상사들과의 극적인 재회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터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십 여 년 전 청소부 꼬마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보다 상사인 장교가 돼서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랬겠어요. 손은 제게 경례를 하는데 입은 떡 벌어져 있더라고요.”

베트남전은 정말 지독했다. 그는 이때 적의 공격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대신 미군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주는 훈장인 퍼플 하트 훈장과 용감한 군인에게 수여하는 동성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화이트씨는 베트남전 이후 군생활을 접었다.

"전쟁이라면 진저리가 났어요. 공무원 생활을 거쳐 1988년부터 상업용 부동산 에이전트로 비즈니스를 하기 시작했죠.”

또 군 재직 시절 군 신문사에서 기자로도 활동했던 그는 작가로서의 길도 걷게 된다. 1995년 그는 “자신의 은인들에게 바치는” 자서전 ‘치사이의 이야기(Chesi’s Story)‘를 출판했다.

현재 북버지니아서 부인 제니씨와 살고 있는 그는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아들 1명을 두고 있다.

"지금 제 아내는 북한의 제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생김새도 성품도요. 사실 어머니는 양어머니였어요. 단 한번도 그 사실을 제게 알린 적이 없었고요. 한 순간도 어머니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없어요.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만요.”

현재 그는 베트남전의 실화를 토대로 소설을 집필 중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항상 있다. 그러나 그는 강조했다.

"평화 통일이 된다면 고향에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공산주의가 남아있는 한 북한에 발을 들여 놓고 싶지는 않아요.”

이성은 기자 gracefu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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