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 군인 6인 인터뷰] "자유 지킨다는 생각에 목숨 걸어"
"60년 만에 찾는 한국 모습 기대돼"
전쟁 상황을 회상할 때는 마치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도 옆에 동료가 “요즘 연애한다고 바쁘다”고 놀리는 소리에는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청년이었다.
이날 만난 참전 군인들은 프랭크 맥카비, 리차드 W 로빈슨(, 윌리엄 M. 마일스, 윌리엄 W. 우드, 댈러스 C 램, W.R. 키트 킷슨씨 등 6명이었다. 이들의 한국전쟁 참전 당시 나이와 계급은 ‘평균나이 20세 이등병’이었다.
이날 3시간 이상 진행됐던 인터뷰에서 기자는 두 가지에 놀랬다.
첫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한 각자의 보람과 자부심이 단순히 자국의 명령을 따른 것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깊은 ‘정’이었다. 이들에게 한국은 보은할 줄 아는 나라, 의리 있는 나라, 정이 많은 나라였다.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해 흐르는 남북간 긴장기류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가 방침대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을 믿는다”며 지지를 보냈다.
이달 21일부터 27일까지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6.25전쟁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이들은 한국의 변화상을 본다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육군, 해병, 공군, 군의관 등 근무 배경도 사연도 다양했던 이들이 겪은 각양각색의 6.25를 들어봤다.
"한국전 위해 2년 기다려"
프랭크 맥카비(Frank McCabe)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프랭크 맥카비씨.
일상이 지루하고 의미 없게 느껴졌던 17세 사춘기 소년에게 전쟁은 도전이었다.
한국전이 발생했던 1950년 그의 나이는 불과 15세. 군입대 허용 나이가 2년이나 모자랐지만 덜컥 군에 지원했다.
“어느 날 연방 수사국(FBI)에서 집으로 찾아왔어요. 어머니께 ‘아들이 군에 지원한 것을 아느냐’면서요. 그래서 결국 17살이 될 때까지 2년을 기다렸어요.”
육군 이등병 맥카비씨가 한국에 도착한 때는 1953년 5월, 휴전협정을 약 2개월 앞둔 때였다.
그의 임무는 춘천 캠프에서 군수 물품과 식량 등을 트럭으로 운반하는 운송병.
당시 상황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로 도로 자체가 없는 폐허였다. 이건 수풀이 우거진 덤불이건 간에 보안상 이동시간은 불빛 하나 없는 밤이었다.
“자칫 잘못 운전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곳을 수 없이 다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땐 어떻게 다녔을까 아찔합니다.”
트럭과 그 내용물을 노린 적군의 공격은 사방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위장한 적군이 트럭을 뺏으려고 곳곳에 함정을 놓기도 했어요. 총격전이 벌어진 적도 있었는데,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어요.”
그는 이듬해인 1954년 8월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영등포는 잘 있어요?”라고 대뜸 묻는 그는 “당시 한국에 대한 기억은 산과 들, 그리고 지독한 추위”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국전 참전 이후 베트남전에서는 전방 특별부대에서 3년 동안 전장을 누빈 ‘용사’로 성장했다.
1981년 26년 동안의 군생활을 마친 그는 단 한번도 한국전에 지원했던 것을 후회해 본적이 없다며 “이번에 꼭 영등포를 다시 가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맥카비씨는 “한국을 도운 것은 군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었다”며 “시간을 되돌려도 다시 (한국에)갈 것”이라고 말했다.
"타자칠 줄 안다고 했더니…"
리차드 W. 로빈슨(Richard W. Robinson)
21세 육군 병장 리차드 W 로빈슨씨는 1952년 부산을 거쳐 대구에 도착했다. 어느 날 아침 한 중위가 ”타자 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예스(Yes)’라고 답한 즉시 그는 서울로 옮겨와 ‘전쟁기자’가 됐다.
”당시 부대는 옛 서울대 캠퍼스에 있었죠. 매일 전방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수집된 첩보들을 정리해서 본부로 보냈어요. 저랑 교대로 근무하는 동료 1명이 있었는데,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18개월을 계속 그렇게 보냈어요.“
유일한 낙은 영화와 뒤늦게 들여 온 농구대였다.
그래도 전방에 비교하면 행복한 일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우리는 샤워도 할 수 있었고 요리도 해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로빈슨씨는 1967년 다시 부평에 있는 미군부대로 배치를 받으면서 한국을 다시 찾게 됐다. 계급도 주임원사로 진급했다.
”휴전 후 10여년이 지난 한국은 깜짝 놀랄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어요. 당시 한국 군인들과 친선 야구경기를 가졌던 기억이 엊그제 같아요.“
그는 1971년 23년 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뉴햄프셔에서 24년을 지내다가 1994년 워싱턴DC로 옮겨왔다.
퇴역군인아파트에 입주한 것은 아내를 5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이후다.
”이곳 생활도 재미있어요. 한국전, 세계2차대전, 베트남전 등 참전했던 경력은 다양하지만 군생활을 했던 동료들과 옛날 얘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몰라요.“
그는 한국 방문을 앞두고 뉴햄프셔에 있는 딸을 방문할 계획이다. 옆에 있던 한 동료 ”딸이 목적이 아니라 데이트가 있다“고 놀려대자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힌다.
”저도 혼자인데 데이트도 하고 그래야죠. 하하“
"한국은 고마워할 줄 아는 나라"
윌리엄 M. 마일스(William M. Miles)
”유럽의 어느 나라도 고맙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윌리엄 M 마일스씨는 1950년 부산 앞바다를 지키던 해군 이등병이었다. 당시 나이는 25세.
6개월씩 교대로 총 18개월을 한국에서 보낸 그의 부대는 아군의 지원 사격이 주된 임무였다.
배 안에서의 생활은 전방과 마찬가지로 긴장되는 24시간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전시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힘들었죠.“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는 지금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린다고 했다.
”배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겨울은 더 추웠어요. 수 십 명이 작은 모닥불에 다닥다닥 붙어서 몸을 녹이려고 했었죠.“
어느덧 83세 할아버지가 된 마일스씨는 지금도 웨이트 트레이닝과 골프를 즐기는 스포츠맨이다.
”아직 건강하잖아요. 혼자 병원에 가지 못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병원도 가고요.“
그는 ”6.25전쟁 이후 6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 때 젊은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전쟁 트라우마 치료사"
윌리엄 W. 우드(William W. Wood)
전쟁터에는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만 있는 게 아니다.
윌리엄 W우드씨는 6.25전쟁에서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를 겪는 군인들을 치료하는 군의관이었다.
그는 ”전쟁의 잔혹함이란 그 장면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육체적인 마비 증상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날 다른 예비역들과는 달리 징병으로 한국에 오게 됐다.
”의대를 졸업하자 마자 징병대상에 올랐어요.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4명이나 있었죠. 1952년 초 서울에 도착했는데, 옛 일본 감옥을 치료실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전쟁 쇼크로 고통 받는 동료들을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증세가 약할 경우 안정을 취하고 다시 부대로 돌려보내지만 충격이 심하게 왔을 때는 거동조차 힘들기도 해서 귀국 조치를 하기도 했어요.“
후방에 있다고 안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후방에는 ‘파이브 어클락 찰리(5 o’clock Charlie)‘라고 불리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매일 오후 5시쯤 적군 경비행기의 조종사가 직접 작은 폭탄을 던지고 다녔어요. 워낙 낮게 날아서 아군 레이더망에도 잡히지도 않았고요.“
그는 이 ’파이브 어클락 찰리‘가 군인들 사이에서는 코믹하지만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조종사의 테러 목적은 대통령 암살이었대요. 그게 군인들 사이에서는 우스꽝스러웠지요.“
"최전방서 동료 죽음 수도 없이 봐"
댈러스 C. 램(Dallas C. Lamb)
댈러스 C 램씨는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20세 육군 병장이었다.
주로 감시초소에서 4~5명의 동료들과 움직였던 그는 산꼭대기에서의 잠복은 생활이었다. 여기 저기 계속해서 지역을 옮겨 다녀야 했기에 금화 외에는 지명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에 장밋빛이란 없어요. 현실은 잔인하고 끔찍하죠.“
공군이었던 램씨의 형도 세계2차대전 당시 적군의 폭격에 전사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은 한 달에 한 번 겨우 미국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받는 편지와 동료 젝키씨의 어미니가 보내주는 통조림 음식 등이었다.
”신앙이 독실했던 어머니가 한 번은 제가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받아보시고는 뭐라고 하셨어요. 어머니께 그랬죠. 매일 긴장감이 엄습해오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요. 생각해보세요. 스무 살 청년이 전쟁터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전투를 치를 때마다 함께 했던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음이 괴로울 때는 전사한 동료들의 가족이나 여자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알릴 때였어요. 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형체도 없이 죽었다고, 몸이 두 동강이 났다고 사실 그대로를 얘기할 수는 없죠. 그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고,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말해줬어요.“
전장에서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벙커에 몸을 숨기고 적군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동료였던 젝키씨의 몸이 붕 떠올랐다 푹 떨어졌다.
”젝키의 얼굴을 사정 없이 때렸어요. 그러고 보니 피가 안 나더라고요.“
램씨는 ”총알이 동료의 철모 틈새로 들어가 곡선을 따라 반대편으로 튀어 나가는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며 ”그런 일이 다른 군인한테도 일어난 적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 주인공이 가장 친한 친구여서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인천상륙 소식에 흥분"
W.R. 키트 킷슨(W.R. "Kit" Kitson)
1952년 공군 이등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W.R. 키트 킷슨씨를 퇴역군인아파트에 있는 그의 방에서 만났다.
2~3평 남짓한 작은 방은 침대, 책상, 1인용 소파가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작은 옷장과 한 명만 딱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욕실이 전부였지만 그는 인터넷을 즐길 줄 아는 ’신세대‘ 예비역이었다.
그가 전쟁에 참전했을 나이는 18세.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찍은 사진이라며 빛 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전쟁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군에 지원했었어요. 징집당하는 것보다는 자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영등포에 배치됐던 그는 가장 흥분되는 뉴스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이었다“며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한국에서 맡았던 임무는 기밀 문서 등을 처리하는 일이었다며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다“고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그는 전쟁으로 잿더미였던 나라가 지금의 번영을 이룬 것에 놀랍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번 한국에서 열리는 6.25기념식에서 입을 거라며 방 한 쪽에 정성스럽게 걸려 있는 제복을 자랑해 보였다.
킷슨씨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지만 미군들은 자유를 지킨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었다“며 ”또 한국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퍼지는 촉매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 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고 강조했
다.
이성은 기자 graceful@koreadaily.com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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