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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서 한인 하원 연방의원 4명 새역사 쓴다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가주의 예비 선거(3월 5일)가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은 투표율이 비교적 높아지는 선거인데다 각급 선출직에 도전하거나 재선을 노리는 한인 현역 의원들과 후보들의 본격적인 캠페인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우편과 부재자 투표 용지가 2월 초에 발송되며 본격적인 투표가 시작되기 때문에 경쟁은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결전을 앞두고 한인들의 관심 지역구와 한인 후보들, 예선 대진표를 점검해본다.   다이앤 파인스타인 의원의 유고로 빈 연방 상원 선거가 가주에서는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버뱅크 출신인 애덤 쉬프, 케이티 포터, 바버러 리 연방 하원의원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쉬프와 포터가 오차 범위 내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정가에서는 민주당 출신인 쉬프와 포터가 결선에 나란히 진출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재선에 무난히 성공한 미셸 스틸 박(45지구), 영 김(40지구) 연방 하원의원이 3선에 도전한다. 현역에다 의회 내에서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선이 굵은 활동을 보여온 두 의원은 큰 변수가 없으면 3선이 무난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의 탈환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 의원에 맞서 베트남계인 킴 버니스 누엔 가든그로브 시의원, 체엔 헌트 변호사, 애디타 패이 변호사가 출사표를 던진 상태다. 이들은 정치 초년생이자 20~30대의 청년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 40지구에서는 김 의원에 맞서 민주당 조 커 전 소방관, 터스틴통합교육구 이사 출신 앨리 다미콜라스가 도전장을 낸 상태다.   포터 의원이 물러나는 연방 하원 47지구에서는 데이브 민 주 상원의원이 캠페인 중이다. 포터의 민의원 지지 선언에도 불구하고 같은 당 출신인 조애나 웨이스의 지지세도 여전해 예선 결과가 본선 세몰이의 가늠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34지구에 세 번째 출마를 결심한 데이비드 김 후보가 현역 지미 고메즈의 아성을 넘어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지난해 2.4% 표차로 석패한 그는 ‘이번에는 반드시 뒤집는다’는 각오다.   가주 상원 선거에서는 최석호 전 주 하원의원의 재기 여부가 눈길을 끈다. 가주 의회에서 ‘한인 대변인’을 표방하며 데이브 민 의원의 연방 출마로 공석이 된 37지구에서 뛰고 있다. 민주당 유권자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소수계와 무당파 유권자들의 선택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인사회 원로인 최태호 후보가 민주당 간판으로 25지구에 출마했다. 세 번째 도전이 될 이번 선거에서 최 후보는 라크레센터, 패서디나 등 한인 표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같은 당 출신인 존 하라베디안 후보는 이 곳 출마를 발표했다가 주 하원으로 변경했으며 크레센타밸리 타운 주민의회 출신 엘리자베스 애러스와 알함브라 시의원 샤샤 르네 페레즈가 출마해 경쟁 중이다.   주 하원에는 신진으로 꼽히는 LA의 존 이(54지구), 버뱅크의 에드 한(44지구) 후보가 뛰고 있다. 민주당 출신이며 각각 비영리 단체와 검사 출신임을 강조하며 표심을 공략 중이다. 54지구는 한인사회에도 알려진 미겔 산티아고 의원이 LA 시의원(14지구)출마에 나서면서 무주공산이 됐다. 지난해 78% 득표로 당선된 산티아고는 아직까지 지지 후보를 밝히지 않고 있다. 44지구에는 아르메니안 출신이자 글렌데일 시의원인 엘렌 아사트리얀 후보가 출마한 상태다.   존 이 LA 시의원은 세 번째 선거에 나섰다. 민주당 출신으로 무소속인 이 의원에 도전하는 세레나 오버스타인 후보는 시 윤리위원회에서 사퇴하고 2년이 지나면서 출마자격을 얻게 됐다. 그외에도 3명의 후보가 경쟁 중이다.   한인타운이 포함된 10지구에는 그레이스 유 후보가 세 번째 도전에 나선다. 주하원 의원 등 총 7명의 후보가 난립하는 가운데 예선에 누가 진입할지 관심이 모인다. 유 후보는 한인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투표만 있으면 무난하게 시의회에 입성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예선 열전 한인후보들 예선 하원 47지구 민주당 유권자

2023-11-26

[시조가 있는 아침] 탄로가(嘆老歌)

  ━   탄로가(嘆老歌)     우탁 (1262-1342)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청구영언     ━   가장 오래된 시조     이 작품은 전해지는 시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가장 오래 패러디되어 불리고 있는 시조이기도 하다. 춘향전에 ‘탄로가’가 나오고, 잡가 ‘백발가’도 이 시조의 발상을 그대로 따와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 들고 좌수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 스스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되니’로 노래한다. 최고 최장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시조라고 하겠다.   우탁은 호 역동(易東)이 암시하듯이 뛰어난 역학자였다. 고려사 열전에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되었다. 당시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충선왕이 패륜을 저지르자 목숨을 내놓고 극간해 왕을 바로잡은 선비 정신의 표상이었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의 발의로 1570년(선조 3년) 예안에 역동서원이 창건되었다.   그는 탄로가 한 수를 더 남겼는데 그 시조도 널리 불렸다.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적은 듯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저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탄로가 시조 가운데 고려사 열전 선비 정신

2023-02-23

추억·눈물 나눌 수 있는 사람끼리 먹는…

친근하고 만만하다. 부담없고 편하다. 그러면서도 영양 듬뿍이다. 가격 대비 이만한 보양식이 없는 것 같다. 순댓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한국인의 진정한 '소울푸드' #. 순댓국은 여간 편한 사람, 가까운 사람끼리가 아니라면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아니다. 내용물과 모양부터 질펀하다. 돼지 창자, 내장, 귀, 간 등의 단어가 주는 어감도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순댓국을 파는 식당들도 하나같이 '허름한' '시장통' '서민적' 등의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땀 뻘뻘 흘려가며 게걸스럽게 먹어야 하는 순댓국이 격식을 차리거나 중요한 비즈니스 상대와는 짜장면 이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순댓국이 서민 음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고기가 귀했던 시절엔 순댓국 역시 다른 고깃국과 마찬가지로 '있는 사람'만 먹을 수 있는 고급 음식이었다는 기록이 여러곳에 남아있다. 순댓국이 서민 음식의 대표 주자가 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다. 국가적으로 양돈사업이 장려되면서 돼지가 흔해졌고 순대의 주 재료인 소창(작은창자)값이 크게 내려간 게 배경이다. 속에 들어가는 재료 역시 값싼 당면으로 채워지면서 더 대중화가 되었다. 순댓국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옛날을 되새김할 수 있는 소울푸드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많이 한다.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았을 때 고기가 먹고 싶으면 대신 찾던 음식이었다거나, 어렵게 힘들게 일하면서 뜨끈한 순댓국에 소주 한 잔 걸치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거나 하는 추억의 음식이라는 말이다. 나도 그랬다. 순대라고는 구경도 못했던 시골(?) 촌놈이 서울 유학와 사실상 처음 순대와 대면한 것은 신림사거리 시장통 '순대타운'이었다. 쑥쑥 썬 순대에 귀, 내장, 간 같은 돼지고기 부산물을 넣고 파, 깻잎 등 채소까지 듬뿍 넣어 불그레한 양념에 버무리며 커다란 불판위에 쓱쓱 볶아주던 '신림시장 순대'의 특별한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나 역시 지금 순대나 순댓국을 먹으며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 그 순대맛이 아니라 그때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LA서 발견한 순댓국의 진가 #. 서울서도 순댓국을 안 먹었던 것은 아니지만 순댓국의 진가를 발견하게 된 것은 뜻밖에도 미국, 그것도 LA에 와서였다. 2006년, 뉴욕에서 LA로 옮겨오고 난 뒤 우연히 '웨스턴순대'를 들렀다. 한인타운 웨스턴과 6가에 있던 유명한 집이었다. 2016년 그곳 사장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첫 대면 때의 맛과 분위기는 지금도 기억한다. 진한 국물과 국수 사리와 푸짐한 건더기, 그리고 부추, 들깨, 새우젓 등으로 내 입맛대로 다시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했다. 윤기 자르르르 흐르는 흰쌀밥은 더 좋았다. 누구는 몸에 안 좋다고 흰쌀밥을 멀리 한다지만 그 식당에서만큼은 '보약' 먹는 기분으로 꼭 흰쌀밥을 한 그릇 뚝딱 해야 했다. 그 후 올림픽과 노턴에 있던 '유향순대' 순댓국도 자주 맛보러 갔다. 2010년 말부터 탈북자 부부가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자극적인 양념을 덜 쓰는 담백한 맛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유명세와는 달리 몇 년을 못 버티고 문을 닫고 말았다. 한인타운에서 식당 꾸려나가기가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어서 오래도록 마음이 아팠다. 자주 가던 집이 없어진 후엔 단골로 찾아가는 순댓국집은 더 이상 없다. 그래도 마치 인이 박힌 것처럼 순댓국도 때가 되면 한 번씩 먹어줘야 하는 음식이 되었기에 입맛 당기면 그때그때 발 가는 대로 찾아가는 곳들은 있다. LA 한인타운에선 올림픽길의 '무봉리토종순대', 8가와 후버의 '8가순대', 웨스턴과 8가 인근 '한국순대' 등이 그런 집이다. 오렌지카운티에 근무했을 때는 부에나파크 스탠턴길의 '아바이 왕순대'를 꽤 자주 찾았다. 사람 입맛이 제각각이듯 순댓국도 누구는 이 집이 좋다, 누구는 저 집이 잘한다 하며 의견이 갈린다. 나로서는 다들 LA에서 순대 전문 간판 내걸고 오래도록 영업해 온 집들이어서 그런지 먹어서 실패한 경우는 별로 없다. 모두 웬만은 하다는 뜻이지만 그래도 독보적으로 '최고'라고 할 집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굳이 한 집만 꼽아 본다면 어디일까? 미국서 두번 째로 맛있는 집 #. 지난해 방송했던 tvN의 인기프로 '알쓸신잡2' 출연진들이 목포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저마다 좋아하는 식당을 찾아가 밥을 먹는데 박학다식의 대명사인 유시민 작가가 일부러 찾아간 곳은 뜻밖에도 순댓국집이었다. 유시민은 그 식당을 일부러 찾아가는데 "지구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순댓국집"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순댓국집을 모두 다 가 본 건 아니니까 제일 맛있다고는 말 못하지만, 어딘가 이것보다 더 맛있는 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지구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순댓국집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 집은 그의 인생 최고 순댓국집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걸 보면서 나름 순댓국 좋아하는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순댓국 집이 있다면 어디일까 생각해 보았다. 슬그머니 '아바이 왕순대'집이 떠올랐다. LA에 있는 여러 순댓국집들도 나름 다 괜찮지만 그래도 내 입맛에는 제일 맞았다는 말이었다. 사실 위치나 인테리어 등은 하나도 내세울 게 없다. 홀 종업원도 없이 무뚝뚝한 남자 사장님이 직접 서빙을 해 주는 지극히 '동포스러운' 식당이다. 하지만 순댓국(이집은 이름이 순대탕이다)을 마주해 보면 완전히 생각이 달라진다. 우선 식탁에 옮겨져서도 한참을 혼자 끓고 있는 뚝배기와 앞이 안보일 정도로 쉴 새 없이 올라오는 하얀 김부터 "괜찮겠는데"라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이어 들깨와 다대기, 새우젓 등으로 간을 맞추고 휘휘 저어 한 숟가락 국물을 떠 먹어보면 "오호, 이 맛은!"이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사실 모든 '탕'은 국물맛이 좌우하는데 이집 순대탕은 오랜 시간 달이고 삶은 티가 그대로 날 정도로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다. 간혹 유명하다는 집도 건더기와 따로 놀면서 인스턴트 라면 국물같은 얕은 맛을 내는 곳도 있는데 그런 집에 비하면 이곳은 뜨거운데 시원하고, 진한데도 깔끔해서 순댓국 국물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말해주는 것 같다. 숟가락 뜰 때마다 몇 점씩 꼭 따라 올라올 정도로 들어있는 고기도 푸짐하다. 흐물거릴 정도로 녹아있는 우거지는 돼지고기 특유의 느끼한 맛을 잡아준다. 함께 나오는 깍두기도 아싹한 식감이 입맛을 돋우고 무채에 버무린 가자미 식혜도 별미다. 이렇게 쓰다 보니 이젠 나도 '지구에서'는 아니어도 '미국에서' 두번째로 맛있는 순댓국집은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순대, 얼마나 아시나요 1. 순대국일까 순댓국일까 많은 식당들이 순대국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정답은 순댓국이다. 한국 국립국어원 규정에 따르면 '재료+국'일 때는 사이시옷을 넣는 게 맞다. 그래서 순댓국과 마찬가지로 김치국은 김칫국, 북어국은 북엇국으로 적어야 한다. 반면 '재료+국밥' 형식일 때는 사이시옷을 넣지 않는다. 순댓국밥이 아니라 순대국밥이고 마찬가지로 그냥 돼지국밥, 소머리국밥으로 적어야 한다. 한글 표기 참 어렵다. 2. 순대의 기원 순대는 북방 유목민족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6세기 중국서 편찬된 '제민요술'에 양고기를 이용한 순대가 나오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고기 내장, 부산물 고기 등을 이용해 순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한반도에는 13세기 무렵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본다. 북방 유목민족인 몽골사람들이 제주도에 머물며 돼지와 말을 기르고 그 부산물로 순대를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소시지도 몽골군이 유럽을 침공하면서 전해진 '유럽판 순대'다. 3. 순대의 어원 순대라는 말은 순우리말 같지만 따져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주영하의 '식탁 위의 한국사'(휴머니시트, 2013)에 보면 순대의 한자어는 창자 장, 자루 대인 '장대(腸袋)'다. 여기서 대는 부대자루 할 때의 대(袋)이며 순대의 '대'는 여기서 왔을 개연성이 크다. 일종의 자루같은 것에 담아낸 음식을 통칭해 순대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은 어디서 왔을까. 이런 저런 설이 많지만 명확하진 않다. 만주어 순타(sunta)에서 순대가 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4. 순대의 종류 순대의 외피 재료는 돼지나 소의 내장이다. 요즘은 셀룰로스같은 인공물도 많이 쓴다. 대창(막창)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이 나오는 소창을 주로 이용하는데 그 속에 곡물, 채소, 고기, 피 등을 넣고 찌면 순대가 된다. 명태나 오징어 몸체를 이용한 명태순대도 있다. 보통 순대 하면 돼지순대를 말하지만 내용물에 따라 찹쌀순대, 피순대, 아바이순대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또 함경도 순대, 개성 순대, 병천 순대 등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여지기도 한다. 5. 아바이순대 한반도의 순대는 크게 북방형과 남방형으로 나뉜다. 북방형은 함경도나 강원도 북부에서 만들어지는 아바이순대가 대표선수다. 보통 순대는 돼지 소창으로 만드는데 반해 아바이순대는 대창으로 만든다. 한 마리에 50cm~1m 정도밖에 안 나오는데 그 속에 찹쌀, 두부, 숙주, 양배추 등을 넣어 쪄낸다. 그만큼 귀하고 크기도 커서 '왕순대'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다. 6·25 당시 실향민들이 강원도 속초 일대로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방형은 전라도나 제주도의 피순대다. 돼지 창자 속에 채소나 곡물 대신 피를 위주로 넣어 선지맛이 강하다. 몽골군이 전한 순대도 이와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한다. 맛이 독특해 호불호가 갈린다. 이종호 / 논설실장

2019-03-09

새콤·달콤·매콤…오묘한 '맛과 향'에 반하다

멕시코 음식은 중식, 일식 등과 함께 미국에서도 가장 대중화된 음식이다. 패스트푸드 체인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도 멕시코 음식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 폭발인 치폴레를 비롯해 킹타코, 바하프레시, 아카풀코, 유카스 등 멕시코 음식을 취급하는 프랜차이즈 식당은 LA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덕분에 타코, 부리토, 엔칠라다, 케사디야, 나초, 살사 같은 말은 우리 귀에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말이 됐다. 하지만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만나는 멕시코 음식을 정통 멕시코 음식이라 하기는 어렵다. 미국 식문화에 길들여진 미국내 히스패닉 입맛을 겨냥한 음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소고기를 많이 이용한다거나 샤워크림이나 치즈를 넉넉히 쓰는 것이 그런 예다. 이를 정통 멕시코 요리와 구분해 '텍스-멕스(Tex-Mex)'라고 한다. 텍사스 스타일 멕시코 음식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 식으로 변형된 멕시코 음식은 '캘리-멕스(Cali-Mex)'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들도 모두 '멕시코 음식'으로 부르기로 한다. #. 멕시코 식당의 매력 솔직히 멕시코 식당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다. 국과 찌개 등에 길들여진 한국 사람으로서 국물 없이 팍팍하게 먹어야 하는 멕시코 요리가 그렇게 당기지 않아서이다. 또 하나는 멕시코 식당들이 다소 지저분하고(?) 분위기나 장식도 어수선해서이다. 그럼에도 뭔가 특별한 것이 먹고 싶어질 때는 멕시코 식당을 찾아간다. 신기한 것은 일단 들어가 자리에 앉고 음식이 나오면 금세 마음이 풀린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니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마음껏 먹고도 언제나 남을 만큼 양이 많다는 점이다. 대개의 멕시코 식당들은 주문도 하기 전에 일단 한 소쿠리의 토르티야 칩과 살사부터 갖다 준다. 이게 또한 별미여서 자꾸만 먹게 되는데 메인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배가 부르기 일쑤다. 둘째는 주문한 음식의 푸짐함에 또 한 번 놀란다. 어떤 메뉴든 하나만 시켜도 둘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그러다보니 멕시코 식당 가서 남은 음식 싸오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계산할 때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값에 다시 한 번 기분이 좋아진다. 한국이나 타주서 손님이 와도 한 번쯤은 멕시코 식당에 데려간다. 그러면 대부분은 '맛이 쎄다'고들 한다. 고기도 듬뿍 들어가고, 향도 강렬하고, 생각보다 훨씬 더 맵고 자극적이라는 것이다. LA가 그럴 정도인데 진짜 멕시코에 가면 어떨까. 7~8년 전 멕시코에서의 경험담이다. 그때만 해도 LA서 출발하는 1박2일 엔세나다 패키지 여행상품이 있어 따라 간 적이 있다. 10여명 일행과 함께 샌디에이고, 티후아나를 거쳐 저녁 어스름녘에 엔세나다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가이드가 "평생 잊지 못할 맛을 보여드리겠다"며 식당 대신 어느 한적한 길가로 우리를 데려갔다. 길거리 노점상이었다. 널찍한 철판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옆으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멀찍이는 온갖 채소와 양념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나도 일행을 따라 두 가지 타코를 시켰다. 요리사겸 주인인 아저씨는 국자 같은 것으로 고기를 푹 떠 불판 위에 올려놓고 몇 번 쓱쓱~ 착착~ 뒤집더니 곧 바로 쫀득한 두 겹 토르티야에 얹어 주었다. 종이접시를 받아드니 손바닥이 뜨끈해지고 화끈한 불맛과 고기맛이 뒤섞인 냄새에 저절로 군침이 고였다. 그 다음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양파, 빨간 무, 할라피뇨, 실란트로 등을 원하는 만큼 넣고 맛도 모르면서 살사도 이것저것 끼얹었다. "라임을 더 뿌리세요. 바로 드시지는 말고 30초쯤 있다가 먹으면 훨씬 맛있습니다. 양파의 매운 맛을 다스려 주고 고기 맛도 훨씬 부드럽게 하거든요." 멕시코에 직접 살면서 LA까지 수백번 왔다갔다 했다는 가이드의 조언이었다. 과연 그랬다. 앉지도 못하고 길거리에 서서 먹었는데도 '감동, 또 감동'이었다. '아, 이래서 멕시코 타코, 멕시코 타코 하는구나'를 그때 알았다. 그날 이후 LA에 돌아와서도 더 자주 멕시코 식당을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때 그 맛은 여태 못 만나고 있다. #. 히스패닉들의 '소울 푸드' 모든 문화는 지역과 시대의 산물이다. 어떤 문화가 특별히 더 우월하다거나 더 열등하다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린 은연 중에 등급을 매긴다. 소득이 높은 나라 문화는 우수하고 그 반대는 열등할 것이라는 선입견도 갖는다. 편견이다. 편견은 평균적인 이미지를 과도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생긴다. 흑인의 평균 범죄율이 높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마주친 흑인도 쉽게 범죄자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멕시코 음식도 한동안 나에겐 그런 편견의 대상이었다. 멕시코 식당들이 별로 깨끗하지 않다고 해서, 또 드나드는 멕시칸들 차림새가 허수룩하다고 해서 그들이 먹는 음식까지 그럴 것이라 낮춰 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성한다. 아니, 애찬하며 즐긴다. 이번에 여러 멕시코 식당들을 둘러 보면서 멕시칸들에게 타코나 부리토는 우리가 어디서나 쉽게 한그릇 뚝딱 해치우던 국밥 같은 것임을 새삼 알게됐다. 누군가가 우리의 국밥을 낮춰보고 무시하면 기분 나쁠 것이 뻔하듯 그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정겨운 음식을 우리가 함부로 이야기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입에 맞는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배불리 먹는 것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다. 우리가 뜨끈한 국밥 한 그릇으로 행복해 할 때 멕시칸들은 토르티야에 타코나 부리토를 먹으며 똑같이 행복에 젖을 것이다. 그들이 누리는 행복을 조금이나마 엿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멕시코 식당 방문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이것만 알아도… 멕시코 음식을 알려면 공부를 좀 해 두는 것이 좋다. 단어도 발음도 낯선 스패니시 단어가 많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되는 몇 가지만 기억해 두어도 멕시코 음식이 훨씬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토르티야(tortilla):원래발음은 '또-ㄹ띠야'에 가깝다.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 동그란 모양으로 얇게 부쳐낸 것으로 옛날부터 멕시코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요즘은 밀가루로 만든 토르티야도 많다. ▶타코(Taco):음식 이름이지만 동시에 채소나 고기, 해산물 등 각종 재료를 싸서 먹는 방법이기도 하다. 소고기 타코, 새우타코, 치킨타코 등 속 재료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 요즘은 김치타코도 있다. ▶부리토(Burritos):콩(bean)이나 밥(rice)에 고기나 채소 등 다양한 재료를 넣고 버무린 것을 밀가루 토르티야로 돌돌 말아낸 것이다. 멕시코 북쪽 국경도시에서 시작되어 미국에 퍼진 것으로 '텍스-멕스'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케사디야(Quesadilla):둥근 토르티야에 치즈를 뿌려 반으로 접어 구운 것이다. 여기에 고기나 채소, 살사 등을 입맛따라 넣어 먹는다 ▶살사(Salsa):영어 소스(sauce)와 같은 뜻. 우리가 보통 살사로 알고 있는 것은 '피코 데 가요(Pico de Gallo)'라는 것으로 토마토와 양파, 피망 등을 덩어리감 있게 썰어 실란트로, 라임즙을 뿌리고 식초, 소금, 후춧가루 등을 적절히 섞어 만든다. 붉은색의 '살사 로하(salsa roja)'는 묽은 초고추장 비슷한 색깔로 토마토와 할라피뇨가 근간이다. 맵다. 또 '살사 베르데(salsa verde)'라 해서 초록색 살사도 있는데 그린 토마토라 불리는 토마티요(tomatillo)와 양파, 할라피뇨, 마늘 등으로 만든다. ▶과카몰레(Guacamole):아보카도에 토마토와 양파, 할라피뇨, 라임 등을 넣고 바질이나 실란트로 등의 허브를 첨가해 만드는 멕시코 전통 소스. 나초에 필수다. ▶나초(Nacho):토르티야를 세모꼴로 잘라 튀겨 칩으로 만든 것. 올리브와 치즈, 할라리뇨, 사워크림, 살사 등을 얹으면 나초 샐러드가 된다. 보통 아보카도를 으깨 만든 과카몰레나 토마토, 양파, 고추, 살사 소스를 섞은 만든 '피코 데 가요'와 함께 먹는다. ▶그밖에 카르네(Carne)는 소고기, 카르니타스(Carnitas)는 돼지고기, 뽀요(Pollo) 닭고기라는 것도 알아두면 메뉴판 읽는데 도움이 된다. ◆LA한인타운 주변 가볼 만한 멕시코 식당 엘토리노 (El Taurino) 한인타운 올림픽 불러바드 옆 11가와 후버 길 코너에 있다. 남가주 한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LA 최고의 타코집으로 소문이 났을 정도로 유명하다. 싸고 푸짐하며 타코, 부리토, 나초 등 다양한 켈리-멕스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붐빌 때는 한참 줄을서야 한다는 것이 단점. 킹타코 자매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주소: 2306 Western 11th St,. LA, CA 90006 엘 촐로 (El Cholo) 한인타운 웨스턴 길에 있다. 1921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하니 창업 100년이 목전 이다. '엘 촐로 없는 LA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가 모토일 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손님 앞에서 직접 만들어주는 과카몰레가 일품. 타코, 엔칠라다, 파히타 등 모든 메뉴가 감동적이다. 다운타운, 샌타모니카, 라하브라 등에 지점도 있다. ▶주소:1121 S. Western Ave. Los Angeles, CA 90006 엘 코요테 (El Coyote) 1931년에 오픈해 수많은 '스토리'를 가진 유서 깊은 식당이다. 알록달록 화려한 장식과 나이 지긋한 아저씨 종업원들의 넉넉한 서빙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타코와 부리토같은 음식도 훌륭하지만 마가리타 칵테일이 예술이라는 평이다. 할리우드 인근이어서인지 멕시코 식당치고는 분위기가 꽤 고급스럽다.  ▶주소: 7312 Beverly Blvd, Los Angeles, CA 90036 킹타코 (King Taco) 1974년 창업. 남가주 사람이라면 반드시 먹어봐야 할 멕시코 식당으로 꼽힌다. 다양한 종류의 타코 부리토도 훌륭하지만 옥수수 가루로 만든 도우에 고기와 채소 등을 넣어 옥수수 껍질에 싼 '타말레'도 유명하다. 한인타운 인근 (2020 Pico Blvd, LA) 외에도 22개 매장이 곳곳에 있다. 사진은 다운타운 샌페드로와 워싱턴 길 코너있는 매장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2019-02-23

추어탕…'밑 구린 녀석' 으로 끓인 원조 보양식

추어탕은 미꾸라지로 끓이는 탕(湯)이다. 각 지방마다 끓이는 방법은 조금씩은 다르다. 경상도는 미꾸라지를 먼저 삶아 통째로 으깬 다음 배추 우거지나 무청 씨레기 등을 함께 넣어 끓인다. 전라도 추어탕은 경상도에 비해 국물이 탁하고 걸쭉하다. 이것저것 부속물이 많이 들어가고 된장이나 고추장을 풀어서일 것이다. 서울식은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어 끓인다. 이름도 '추어탕'아 아니라 '추탕'이다. 하지만 요즘은 미디어와 교통의 발달로 전국이 단일 문화권이 되다시피 하면서 조리법이 뒤섞여 딱히 지방색 구분이 힘들어지는 느낌도 있다. LA서 만나는 추어탕도 그렇다. 추어탕에 대한 영양학적 예찬은 넘쳐난다. 대부분이 원재료인 미꾸라지에 대한 예찬이다. 우선 한방적인 접근. 허준의 동의보감에선 미꾸라지를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달며 속을 보하고 설사를 멈추게 한다"고 했다. 조선 고종 때 황필수가 편찬한 의서 방약합편에서는 "기를 더하고 주독을 풀며 목마름병(당뇨)을 다스리고 위를 따뜻하게 한다"고 적었다. 요즘 성업 중인 웬만한 추어탕집 벽에도 미꾸라지 좋다는 홍보 문구가 액자로 붙어 있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칼슘과 철분, 아연 등 무기질이 풍부하며 각종 비타민이 고루 들어 있어 원기를 북돋운다, 남성 정력 증강과 여성 미용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내용들이다. 종합하면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 한 그릇은 웬만한 보약 한 재보다 낫고 보신탕 부럽지 않은 원조 보양식이라는 얘기다. 어머니의 추어탕 #. 누구나 그러하듯이 음식은 추억을 만들고 추억은 그리움으로 남는다. 나도 추어탕 하면 아련한 기억들이 있다. 내가 자란 부산은 대도시이긴 했지만 1970년대 초까지도 변두리엔 여전히 논밭이 많았고 맑은 물도 흘렀다. 먹을 게 없던 아이들은 수시로 도랑이나 개울에 나가 시간을 보냈고 미꾸라지를 비롯해 자잘한 물고기도 잡았다. 특히 개울 바닥을 헤집고 미꾸라지를 집어 올릴 때는 녀석이 워낙 미끄러워 손에 쥐었다가도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도 요령이 생겨 손아귀 힘을 적당히 조절해가며 용케도 잡아낼 줄 알았다. 그렇게 미꾸라지를 잡아오면 어머니는 "꼴랑 이기가?(겨우 이것이냐?)"라면서도 귀찮은 내색 않고 이것저것 함께 넣어 탕을 끓여내곤 하셨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머니는 잡아온 미꾸라지를 양푼에 넣고 굵은 소금을 적당히 뿌려 한참을 두었는데 처음 소금 뿌릴 때 요란하게 퍼더덕거리던 모습이 징그러우면서도 신기했다. 그러다 금세 동작이 잦아지고 나중에는 흰 거품과 함께 입 속 흙을 토해냈는데 어머니는 "이래야 흙내가 안 나는 기라"하셨다. 그 과정이 '해감하는' 것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고는 텃밭에 자라던 억센 호박잎을 몇 장 끊어다가 쓱쓱 찢어 넣고 미꾸라지와 함께 싹싹 비볐는데 미끈거리는 점액질도 없애고 나중에 으깨기 쉬우라고 그렇게 하셨던 것 같다. 추어탕 조리와 관련된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 다음은 어머니 몫이었고 나는 다시 휑하니 밖으로 놀러 나갔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과 어둑어둑해 질 때까지 놀고 있으면 어머니가 "조~오야, 밥 무~라"라며 몇 번씩이나 목청껏 불러야 겨우 들어왔는데 그렇게 집에 오면 아까 잡은 녀석들이 추어탕으로 변해 기다리고 있었다. 추어탕을 먹을 땐 항상 방아를 넣거나 초피가루를 뿌렸다. (어머니는 초피가루를 늘 '재피까리'라고 발음했다). 방아는 작은 깻잎 비슷하게 생겼는데 향이 독특하고 진해서 추어탕 말고도 된장국 같은데도 넣었다. 어머니의 추어탕은 요즘 식당에서처럼 마늘이나 풋고추 썬 것 같은 양념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국물도 진하지 않았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별로 넣을 것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저 배추 우거지나 무청 시래기 같은 건더기만 있었지만 그래도 요즘 먹는 어떤 전문점 추어탕보다 맛있던 걸로 기억에 남아있다. 어릴 때 입맛이 평생 입맛을 결정한다고 한다. 나도 추어탕 하면 찌개처럼 뻑뻑한 것보다는 밥 말아먹기 좋은, 조금 묽고 슴슴한 국같은 것을 좋아한다. 초피가루도 가능한 한 듬뿍 넣는다. 그 강렬한 향 때문에 못 먹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일부러 더 진한 향을 찾으니 정말 사람 입맛은 가지가지인 것 같다. 남원골과 구포집 추어탕 #. 미국에 살면서도 마음대로 추어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더구나 요즘은 한인마켓에 가면 냉동 포장된 추어탕도 여러 종류가 있어 집에서도 간편하게 조리해 먹을 수가 있다. 값도 싸고 맛도 웬만하다. 그래도 추어탕 하면 역시 잘 하는 식당 찾아가 땀방울 떨어뜨려가며 뜨끈하게 한 그릇 뚝딱 하는 맛이라야 제격이다. 내게는 LA한인타운에 있는 구포집과 남원골 두 곳이 그런 곳이다. 8가와 베렌도에 있는 구포집(3017 W. 8th St. LA)은 이름 그대로 부산식을 근간으로 하는 추어탕 집이다. 부추, 마늘, 다진 풋고추 양념에 들깨가루는 기본이고 오리지널 '재피가루'가 친근감을 더한다. 가끔은 어릴 때 즐겨먹던 방아를 따로 구비해 넣어주기도 해서 좋다. 전반적으로 깔끔, 담백한 맛이 특징. 밑반찬으로 나오는 콩나물 무침과 두부, 물김치도 맛깔스럽다. 피코길의 남원골(3623 W. Pico Blvd. LA)은 전라도식으로 국물이 좀 더 진하고 걸쭉한 게 차이다. 마늘, 썬 풋고추, 들깨가루 등 부속물은 구포집과 별 차이가 없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와 가자미 식혜가 별미다. 같은 이름으로 자바시장 상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다운타운 분점(550 E. Olympic Bl. LA)도 있는데 아직 가보진 못했다. 두 집을 비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경상도식에 가까운 구포집이 내 입엔 더 맞다. 하지만 남원골은 오래된 만큼 유명하기도 해서 지인들이 많이 찾고, 덩달아 나도 자주 가는 편이다. 하지만 10년 전쯤과 달리 요즘은 갈수록 두 집의 맛 차이는 점점 없어져 간다는 느낌도 든다. 한국에서도 그렇듯 이곳 역시 구할 수 있는 재료가 가 비슷하고 고객 선호도도 비슷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맛도 닮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오렌지카운티 추어탕집 #. 워낙 추어탕을 좋아해서인지 2016~2017년 2년간 오렌지카운티에서 근무할 때도 자주 추어탕을 먹으러 갔다. 비치불러바드, 부에나파크와 가든그로브 사이에 있는 남원골추어탕(10332 Beach Blvd, Stanton)이 그곳이다. LA 남원골 분점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지금은 이름만 그렇지 다른 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렌지카운티 가까운 세리토스 시골추어탕(16430 Norwalk Blvd. Cerritos)도 자주 들렀다. 이집은 주변에 오래 산 한인들에겐 꽤 유명한 집이라고 하는데 갈 때마다 그럴만 하다 싶었다. 하지만 입맛 까다로운 나로서는 두 집 모두 그저 추어탕 한 그릇 먹는다는 정도였지 매혹적인 전문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른 메뉴들을 이것저것 함께 취급하다보니 아무래도 추어탕 비중이 낮아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바다 건너 미국 땅에서 그렇게라도 입맛을 달랠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싶어 고마운 마음으로 찾아 가곤 했다. ----------------------------------------------------- 아시나요 ▶미꾸리와 미꾸라지 #. 요즘은 누구나 추어탕 재료 하면 으레 미꾸라지인 줄 안다. 하지만 원래는 미꾸리와 미꾸라지 두 종류였다. 둘 다 한반도에 자생하는 민물고기다. 생긴 것도 생태도 비슷하다. 중학교 때 쯤 배운 생물 분류 단위 '문-강-목-과-속-종'에 따르면 둘 다 잉어목-기름종개과-미꾸리속이다. 하지만 그 아래 분류 단위인 종(種)은 엄연히 다르다. 미꾸리는 잎 가 수염이 짧고 몸통이 동그스럼하다. 반면 미꾸라지는 수염이 좀 더 길고 세로로 납작하다. 미꾸리는 주로 진흙 바닥에 살고 미꾸라지는 맑은 물에서도 잘 자란다. 다 자란 성체는 미꾸라지가 좀 더 크다. 외모로 구분하자면 '둥글이는 미꾸리, 납작이는 미꾸라지'라고 외워두면 쉽다. 원래 한반도엔 미꾸리가 더 많았다. 당연히 추어탕 재료도 미꾸리가 더 보편적이었다. 옛날 기록을 봐도 미꾸라지보다는 미꾸리가 훨씬 많이 등장한다. 음식인문학자 주영하의 '식탁 위의 한국사'에 따르면 1610년 경 쓰여진 동의보감에는 한자로 추어(鰍魚), 한글로는 '밋꾸리' 라고 표기되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19세기 초에 지은 '임원경제지'에는 니추(泥鰍)라고 적고 한글로는 '밋구리'라고 썼다. 니추란 진흙 속에 사는 미꾸리라는 뜻이다. 어원도 재미있다. 보통은 워낙 미끌미끌해서 이름도 미꾸리나 미꾸라지가 되었거니 생각하지만 실은 생태적 특성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원로 생물학자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미꾸리나 미꾸라지는 모두 아가미 호흡을 하는데 물에 산소가 부족하면 이따금 물 위로 올라와 공기를 마신 뒤 항문 쪽으로 뽀글뽀글 공기방울을 뿜어낸다고 한다. 말하자면 방귀를 뀌는 것인데 그래서 '밑이 구린 녀석'이라는 의미로 '밑구리'가 되었고 이것이 밋구리→미꾸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맛도 미꾸리가 미꾸라지보다 더 구수하고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추어라는 이름 그대로 가을이 제철이기 때문에 자연산만으로는 사시사철 영업하는 그 많은 추어탕집 수요를 맞출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양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꾸리보다는 미꾸라지가 더 빨리, 더 크게 자란다. 추어탕 재료가 미꾸리에서 미꾸라지로 역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미국의 추어탕집에선 근교에서 직접 양식한 미꾸라지를 받아다 쓴다는 집도 있고, 마켓에서 사다 쓴다는 집도 있다. 하지만 추어탕 맛이야 비슷하니 믿기 힘든 원산지 따지기보다는 주인의 자부심과 정성을 살피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초피와 산초 #. 추어탕에 꼭 따라 나오는 것이 미꾸라지의 비린 맛을 없애주고 찬 성질을 중화시켜 준다는 초피가루다. 초피(椒皮)의 초는 산초, 고초, 후초 할 때의 초이고 피는 껍질을 의미한다. 보통은 산초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초피와 산초는 미꾸리와 미꾸라지가 다른 종류이듯 엄연히 다른 나무다. 초피는 가시가 많고 잎사귀 주변은 톱니처럼 생겼다. 나무 자체에서 나는 향도 산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초피나무의 열매 껍질을 갈아 만든 게 초피가루인데 맵싸하고 얼얼하며 강렬한 향이 난다. 부산에선 이것을 추어탕 말고도 물김치나 된장찌개에도 곧잘 넣어 먹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잎사귀를 따다 간장에 절여 밑반찬으로도 내놓기도 했다. 산초는 '난도'라고도 불렀는데 집 주변보다는 산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잎 모양은 초피와 비슷하지만 좀 더 매끈하고 녹색이 더 짙어 조금만 살펴도 쉽게 구분이 된다. 열매는 거의 향이 느껴지지 않는데 주로 기름을 짜서 약용으로 쓰인다. 초피가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도 재미있다. 부산 경남에선 초피를 대부분 '재피'라고 불렀다. 그것 말고도 '제피' '젬피', 심지어 '죔피' '젠피'라고도 쓰는 경우도 보았다. 아마 웅얼거리듯 얼버무리는 경상도 발음의 모호성 때문에 이렇게 여러 가지로 뒤죽박죽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이종호 논설실장

2019-02-02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역사가 깊고 문화가 발달한 민족일수록 음식도 다양하다.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요리가 유명한 이유가 그렇다. 우리 한식도 빠지지 않는다. 육해공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한 수많은 요리가 있고 지방마다, 동네마다 다른 향토음식도 많다. LA에도 그런 맛을 지켜가고 잇는 한식 맛집들이 수두룩하다. 2019년을 신년 기획 'LA 음식열전'은 그런 음식과 식당들을 찾아 간다. 단, 보통의 맛집 소개 기사처럼 식당 주인 이야기를 들어 전하는 홍보 기사가 아니라 100% 음식 소비자 입장에서 미국 속 우리 음식들을 한 번 들여다보자는 것이 기획 의도다. 마침 2019년은 돼지해이니 돼지국밥으로부터 첫 발을 내디뎌 본다.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음식 #. 내 고향은 부산이다. 대학 가기 전 20년을 살았으니 나의 원초적 입맛도 자연스럽게 부산 음식에 길들여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땐 거들떠보지도 않던 음식이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좋아지고 옛 추억까지 떠올리게 해주니 고향 음식이라 하면 일부러라도 찾아보는 지경이 됐다. 나의 '힐링푸드' '소울푸드'라고나 할까. 부산의 향토 음식인 복국, 재첩국, 밀면, 김치국밥, 갈치국, 회 등이 그런 음식이다. 돼지국밥도 그 중 하나다. 돼지국밥은 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푹 삶은 돼지고기 편육과 밥을 넣어 먹는 요리다. 소를 사용하는 설렁탕과 달리 돼지 육수 특유의 강렬한 향취가 있어 개인별 선호도 차이가 큰 음식이다. 전에는 냄새 때문에 아예 못 먹는 사람도 많았지만 요즘 전문점에서 끓여내는 돼지국밥은 거의 냄새를 잡고 나오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유래는 다양하다. 그중 가장 유력한 설은 전쟁 중에 피란길을 전전하던 이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의 부속물로 끓인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요즘 돼지국밥은 부산의 향토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밀양, 양산, 울산, 대구 등지에서도 각각의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지금은 활발한 교류 덕분에 각 지방 향토음식들이 대부분 전국화 되고 대중화 되었지만 돼지국밥만은 아직도 타지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은 메뉴다. 이유가 있다. 고기에 구둣솔 같은 뻣뻣한 돼지털이 그대로 박혀있기도 하고 내장과 함께 삶은 국물이라 돼지 특유의 구린내도 강하게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고, 그만큼 시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밀양 돼지국밥 #. 나도 어릴 때는 돼지국밥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입이 짧고 비위가 별로 좋지 않아서다. 사람도 첫 인상이 중요한 것처럼 돼지국밥에 대한 첫 만남이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던 탓도 있다. 돼지국밥에 대한 나의 기억은 냄새에 대한 불편함과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두 가지로 아련하게 남아있다.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니까 50년도 더 지난 1960년대 초반이었을 거다. 부산에 터를 잡았던 아버지는 고향인 밀양에 자주 가셨는데 당신의 외가가 있던 그곳을 '진외가'라며 어린 나도 곧잘 데리고 다니셨다. 지금이야 부산-밀양이 한나절도 안 걸리는 지척 거리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거의 하루 날 잡고 가야할 만큼 멀었던 것 같다. 털털거리던 완행 시외버스를 타고 흙먼지 풀풀 날리던 비포장 시골길을 한참이나 달려가야 했고, 버스에서 내려서도 마을까지 들어가려면 다시 끝도 없이 걷고 걸어야 했던 기억 때문에 실제보다 더 멀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밀양에만 가면 아버지는 돌아 올 때 읍내 시장통이나 버스 터미널 부근에서 국밥을 사 주시곤 했다. 돼지국밥이나 김치국밥이었다. 그 때 국밥은 요즘과 달리 국 따로 밥 따로가 아닌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게 밥을 한꺼번에 말아서 주는 말 그대로 '국밥' 이었다. 아버지는 함께 식당에 가면 으레 당신의 그릇에 있는 고기를 건져 내 쪽으로 옮겨주곤 하셨는데 나는 그게 싫어 투정을 부리곤 했다. 냄새도 싫었고 배가 부른데도 자꾸 더 먹으라며 덜어주시던 것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런 풍경도 더 이상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밀양의 이름 모를 국밥집. 지금도 돼지국밥 냄새를 맡으면 그 때 그 곳이 눈물 나게 그리운 장면으로 떠오른곤 한다. 미국서 다시 만난 돼지국밥 #. 대학 진학을 위해 부산을 떠나면서부터 돼지국밥이란 말은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서울서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도 십수년을 했지만 돼지국밥을 먹어 본 기억은 한 번도 없다. 주변에도 돼지국밥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돼지국밥을 파는 식당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기억에서 멀어졌던 돼지국밥을 몇년 전 뜻밖에도 LA 한인타운에서 만났다. 3가와 세라노 코너에 있는 '진솔국밥'이란 식당에서다. 그곳 메뉴를 보면서 이 식당 주인은 필경 부산 사람이거나 부산 음식에 일가견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돼지국밥 전문점인 것도 그랬지만 비빔당면이라는 메뉴도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노란색 양은 그릇에 담겨져 나오는 알록달록 비빔당면은 옛날 중고등학생 때 학교 주변 분식집에서 즐겨 먹던 그 맛 그 모습 그대로여서 무척 반가웠다. 메인 메뉴인 돼지국밥은 어떨까. 일단 형식은 웬만하다. 가볍게 양념한 부추(부산서는 정구지라고 한다)를 따로 주는 것도 그렇고, 간 맞추라고 새우젓을 따로 구비해 놓은 것만 봐도 기본은 되어 있다. 국밥 속 건더기는 두툼하지는 않지만 살코기와 내장이 적당히 섞여 있어 구색을 갖추었다. 예민한 사람은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도 거의 나지 않는다. 주문한 돼지국밥이 나오면 먼저 부추를 양껏 덜어 뚝배기에 넣고 새우젓으로 적당히 간을 한다. '다데기(다진양념)'는 이미 국물 속에 한 숟가락 들어있어 살짝만 저어도 국물이 금세 불그스름해 지며 입맛을 돋운다. 기호에 따라 들깨를 두어 숟가락 넣으면 한결 풍미가 좋아진다. 밥을 말아 먹을지 그냥 먹을지는 자유다. 곁에 따라 나오는 국수사리가 있어 그것만 담갔다 건져 먹어도 웬만큼 양은 되기 때문이다. 일단 국물부터 먼저 한 숟가락 떠 보자. 코끝에 설핏 돼지 육향이 서리지만 입안에 흘려 넣어보면 혓바닥이 뜨끈해지며 가라앉았던 미각이 일제히 살아난다. 이번엔 좀 더 깊이 숟가락을 넣어 건더기까지 건져 올려보자. 깍두기나 김치를 얹어 한입 가득 밀어 넣으면 '어~ 좋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렇게 한 그릇 뚝딱하고 나면 어느새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속이 확 풀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반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주 한 잔 생각이 굴뚝같겠지만 아쉽게도(?) 이 집은 술은 팔지 않는다. 돼지국밥이 망설여지면 순대국밥을 시키면 되는데 모양만으로는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순대국밥은 순대가 따로 접시에 담겨져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가격은 돼지국밥 10.95달러. 순대국밥 11.95달러, 비빔당면 5.95달러. ▶주소: 4253 W. 3rd street. Los Angeles, CA 90020 돼지국밥에게 밀리면 인생이 밀린다 #. 부산에선 '돼지국밥한테 밀리면 인생 전부가 밀린다'는 속설이 있다. 부산사람들이 돼지국밥 이야기만 나오면 목청이 높아지는 이유다. 실제로 부산 사람들은 돼지국밥같은 향토음식에 대해 저마다 일가견이 있다. 그래도 결론은 언제나 똑같다. 돼지국밥만큼 사나이다운 야성이 느껴지는 음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음식 즐기는데 무슨 남녀 구분이 필요할까. 요즘은 돼지고기가 미용에 좋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오히려 여성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어쨌든 돼지국밥은 원초적으로 거칠고 투박한 음식이다. 거기다 강한 양념까지 더해 땀 뻘뻘 흘리며 먹어야 제맛이 난다. 경남 창녕 출신 최영철 시인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돼지국밥을 소재한 그의 시 전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돼지국밥은: 서민들 애환 담긴 눈물의 음식 사전에 보면 국밥은 ‘국에 밥을 말아낸 음식’을 국밥이라 했다. 다른 말로 '장국밥' 혹은 '국말이'라고도 했고 한자로는 탕반(湯飯)이라 했다. 재료에 따라 소고기국밥, 돼지국밥, 김치국밥 등 다양했으며 설렁탕이나 추어탕도 일종의 국밥이다. 원래 국밥은 가난과 눈물의 음식이었다. 유래를 봐도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겼다. 동아시아 음식 문화사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전공교수 주영하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 생긴 근대적인 외식업종이 국밥집이라고 했다(식탁위의 한국사 p.59). 가난한 사람들이나 급하게 한 끼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국밥처럼 간편하고 좋은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밥은 반찬으로 김치나 짠지 하나만 있어도 숟가락 하나 들고 게 눈 감추듯 금세 먹을 수 있는 끼니거리였다. 또 밥을 국에 말았기 때문에 양도 두 배로 늘어나는 효과가 있어 없는 사람들에겐 제격인 음식이었다. 하지만 1960대 이후 먹을거리가 풍부해지자 국밥 안에 들어가 있는 밥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결국 식당에서 파는 국밥은 이름과 달리 국 따로, 밥 따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로국밥’이라는 이름이 붙은 메뉴는 한국전쟁 이후 대구에서 처음 생겼고 1980년대 이후 전국 대부분의 국밥집에서 이런 방식을 따라하게 되었다는 것도 주영하 교수의 주장이다. 또 1920년대 이후 전국의 읍면 소재지에 상설시장 함께 5일장이 자리를 잡으면서 장에 가서 먹는 국밥은 장 구경만큼이나 매력적인 우리 문화가 되었는데 ‘장터국밥’이라는 이름도 그때 생겨났다고 주영하 교수는 알려주고 있다. --------------------------------------------- 야성은빛나다 -최영철(1956~ )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양파 새우젓이 있다 푸른 물 뚝뚝 흐르는 도장을 찍으러 간다 히죽이 웃고 있는 돼지 대가리를 만나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바닥은 곳곳에 야성을 심어 놓고 파는 곳 그따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야성만을 연마 하기 위해 일념으로 일념으로 돼지국밥을 밀고 나간다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것 그래도 남은 몇 가닥 털오라기 같은 것 비게나 껍데기 같은 것 땀 뻘뻘 흘리며 와서 돼지국밥은 히죽이 웃고있다 목 따는 야성에 취해 나도 히죽이 웃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면 마늘 양파 정구지가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 바닥 곳곳에 풀어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이종호 / 논설실장

2019-01-13

한 홀서 물에 공 5번, +8, 13타

공이 3번 물에 빠졌을 때 해설자는 "이번 주 가르시아는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공 두 개가 더 물에 들어갔다. 천신만고 끝에 지난 해 그린재킷을 입은 챔피언 세르히오 가르시아가 5일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에서 벌어진 마스터스 1라운드 15번 홀에서 8오버파 13타를 쳤다. 13타는 마스터스 역사상 모든 홀을 통틀어 가장 높은 스코어 타이다. 530야드 파 5인 15번 홀은 쉬운 홀이다. 드라이버만 잘 맞으면 2온이 되기 때문에 버디를 잡는 홀이다. 지난해 4라운드에서 가르시아는 8번 아이언으로 2온을 시켰다. 이날 가르시아는 322야드 드라이브샷을 쳤다. 205야드를 남기고 2온을 시도했는데 공이 그린 앞 물에 빠졌다. 가르시아는 벌타를 받고 웨지로 4번째 샷을 준비했다. 핀 위치로 봤을 때 롱아이언으로 치는 것 보다 웨지가 더 위험했다. 핀은 호수 바로 앞에 꽂혀 있었고 내리막 경사였기 때문이다. 스핀이 걸린 웨지샷은 물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길게 쳐야 했다. 가르시아는 그러지 않았다. 웨지로 과감하게 공격했다. 공은 슬금슬금 굴러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물로 들어가 버렸다. 벌타를 받고 친 여섯 번째 샷도 비슷했다. 가르시아는 화가 났는지 다음에도 비슷한 샷을 했는데 결과는 같았다. 4번 물에 공을 빠뜨린 가르시아는 다음 샷은 좀 다르게 치려 한듯했으나 실수가 나왔다. 역시 물에 들어갔다. 가르시아는 12번째 샷은 방향을 바꿔서 안전하게 쳐 그린에 올렸다. 다행히 1퍼트로 홀 아웃해 13타로 마무리했다. 그래도 8오버파로 이름도 생소한 옥튜플 보기가 됐다. 이전까지 2오버파였던 가르시아의 스코어는 10오버파로 늘어났다. 가르시아는 다음 홀에서 버디를 잡아 9오버파로 라운드를 끝냈다. 그나마 사고가 난 곳이 13번홀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가르시아가 최근 출생한 딸의 이름을 13번 홀의 별칭인 어제일리아(철쭉, 진달래)로 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가르시아가 두 번째 아이를 갖는다면 15번 홀의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15번홀의 별칭은 firethorn(장미과의 관목)이다. 이전까지 마스터스 15번 홀에서 가장 많은 타수는 11타였다. 가르시아는 이를 2타 늘렸다. 마스터스 전 홀을 통틀어 한 홀 최다 타수는 13타다. 1978년 나카지마 추네유키가 13번 홀에서, 1980년에 톰 와이스코프가 12번홀에서 기록했다. 두 홀 모두 아멘코너에 있는 홀이었다. 가르시아는 아멘코너 이외에서 최고 타수를 기록한 선수가 됐다. 전년도 우승자, 이른바 디펜딩 챔피언이어서 더 자주 회자될 것이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2018-04-05

우즈, 복귀전 1오버파 중위권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사진)가 3년 만에 돌아온 마스터스 토너먼트 첫날 1오버파(공동 29위)를 기록했다. 우즈는 마스터스에서 4차례 우승한 이 대회 강자다. 그러나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2015년부터 3년간은 이 대회에 나오지 못했다.우즈는 3번 홀(파4)에서 버디를 잡았지만 4번 홀(파3)과 5번 홀(파4)에서 연속 보기를 냈다. 11번 홀(파4)과 12번 홀(파3)에서도 연속 보기를 쳤지만 14번 홀(파4)과 16번 홀(파3) 버디로 만회했다. 우즈가 마스터스 파 5홀에서 버디를 하나도 잡지 못한 라운드는 이번이 5번째다. 또 우즈는 2005년 마스터스 1라운드에서도 70타 이상을 쳤지만(74타) 우승자가 입는 '그린재킷'을 차지했다. 우즈는 "이 대회에 돌아와서 기쁘다. 지난 몇 년간은 이곳에 챔피언 만찬을 먹기 위해서만 왔는데 경기를 위해 오고 내 앞에 코스가 펼쳐져 있다는 게 좋다"고 마스터스 복귀 소감을 밝혔다. 한편 조던 스피스와 토니 피나우(이상 미국)가 4언더파로 순위표 가장 위에 있다. 스피스는 4개 홀을 피나우는 1개 홀을 남겨놓고 있다. 피나우는 전날 이벤트 대회로 열린 파3 콘테스트에서 홀인원을 기록하고 좋아하다가 발목을 접질렸던 선수다. 중국의 리하오퉁 등 5명이 3언더파로 뒤를 잇고 있다. 한국인 중 유일하게 마스터스에 출전한 김시우(23)는 버디 2개와 보기 5개를 묶어 3오버파 75타로 공동 55위를 기록했다.

2018-04-05

안병훈·최경주 '마스터스 출전 어렵네'

안병훈(27)의 3년 연속 PGA 투어 시즌 첫 메이저 대회 마스터스 출전이 사실상 불발됐다. 최경주(48)는 4년 연속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을 밟을 수 없게 됐다. 안병훈은 30일 텍사스주 험블의 휴스턴 골프클럽(파72.7441야드)에서 열린 대회 2라운드에서 이글 1개 버디 1개를 잡았으나, 보기도 3개를 기록하며 이븐파 72타를 쳤다. 안병훈은 중간합계 3언더파 141타에 그치며 예상 컷 라인에 1타가 모자라 3라운드 진출이 어렵게 됐다. 컷을 통과해도 선두와는 8타차로 벌어져 이번 대회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한 장의 마스터스 출전권을 손에 넣기는 힘들게 됐다. 안병훈은 2016년 마스터스에는 컷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지난해에는 공동 33위를 차지한 바 있다. 최경주는 이날 1언더파 71타를 치며 1, 2라운드 합계 1오버파 145타를 적어내 컷 통과 실패가 사실상 확정됐다. 2015년부터 3년 동안 마스터스에 출전하지 못했던 최경주는 코랄레스 푼타카나 리조트&클럽 챔피언십 공동 5위에 오르며 자신감이 높아졌지만, 다시 내년을 기약하게 됐다. 김민휘(26)는 중간합계 2오버파 146타로 역시 3라운드 진출에 실패했고, 강성훈(31)은 기권했다. 재미교포 제임스 한(37)이 이날 하루에만 5타를 줄이며 중간합계 8언더파 136타로 공동 11위에 자리했다. 선두는 세계랭킹 214위 보 호슬러(미국)가 나섰다. 아직 PGA 투어 우승이 없는 호슬러는 이날 4타를 줄이며 단독 선두 자리를 꿰차며 마스터스 출전에 한 발짝 다가섰다. 마스터스 출전을 앞두고 샷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는 리키 파울러(미국)가 10언더파 134타로 공동 2위에 자리했다. 2015년 마스터스 우승자인 조던 스피스(미국)는 이날 5타를 줄이며 9언더파 135타로 1라운드 공동 18위에서 공동 6위로 뛰어올랐다. 통산 마스터스 3회 우승을 차지한 필 미컬슨(미국)은 공동 43위(5언더파 139타)에 자리했다.

2018-03-30

[봉화식의 레포테인먼트] 마스터스와 탱크&호랑이

수많은 남자골프 이벤트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는 단연 마스터스다. 4대 메이저 가운데 역사가 가장 짧지만 제일 먼저 개최되고 유일하게 같은 장소(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클럽)에서만 치러지며 출전선수 숫자도 100명 미만으로 가장 적다. 품위 유지를 위해 일체의 스폰서를 배격하고 오로지 티켓·TV 중계권료와 현장에서 판매하는 기념품 판매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구성' 보비 존스가 디자인한 오거스타는 한때 여성과 유색인종의 입회·라운딩을 금지하며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모임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지만 이제는 모두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48)는 15년전인 2003년 처음으로 마스터스에 출전했다. 그전까지 한인 언론의 출입을 비공식적으로 금지해오던 오거스타는 처음으로 무더기 취재 크리덴셜 발급을 허락했다. 최경주 선수 덕분에 필자도 난생 처음으로 마스터스 현장을 경험할수 있었지만 편집국장에게 두차례나 신분 확인전화가 걸려오는 등 오거스타 사무국의 지나치게 의심많은 절차에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타이거 우즈가 전무후무한 대회 3연패를 노렸지만 그린재킷의 주인공은 캐나다의 왼손잡이 마이크 위어가 차지했다. '황금의 곰' 잭 니클러스와 한조로 1라운드 초반 3언더파의 단독선두에 오르기도 했던 최경주는 톱텐진입에 실패한뒤 캐디를 해고했다. 이후 한차례 우승 추가에 머물고 있는 우즈는 다음달 3년만에 전직 챔프 자격으로 마스터스에 출전, 13년만에 처음이자 통산 5번째 타이틀을 노린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경주는 올해 출전자격을 얻지 못했다. 우즈의 컴백으로 오거스타의 갤러리 티켓값은 수천~수만달러를 호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우즈가 무술년 마스터스 현장에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주목된다. 봉화식 bong.hwashik@koreadaily.com bong.hwashik@koreadaily.com

2018-03-21

마스터스 챔피언 가르시아, 딸 이름은 '오거스타 13번 홀 별칭'

지난해 마스터스 챔피언 세르히오 가르시아(38·스페인)가 올해 대회를 3주 앞둔 15일 첫 딸을 얻었다. 그는 아이 이름을 어제일리어(Azalea·철쭉, 진달래)라고 붙였다. 어제일리어는 마스터스가 열리는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 13번 홀의 이름이다. 꽃 묘목장 부지에 들어선 오거스타 내셔널은 홀마다 꽃 이름을 붙였다. 아멘코너의 마지막 홀인 13번 홀은 대회 기간엔 그린 뒤에 철쭉이 만발해 가장 아름다운 홀 중 하나로 꼽힌다. 가르시아는 지난해 최종라운드 13번 홀에서 지옥과 천당을 경험했다. 이 홀은 파5홀 치고는 전장(510야드)이 짧은 편이어서 버디가 많이 나오는 곳이다. 그런데 가르시아는 지난해 이 홀에서 티샷을 숲으로 보냈다. '언플레이어블' 볼을 선언하고 친 3번째 샷도 그린에 올리지 못했다. 반면 경쟁자인 저스틴 로즈(잉글랜드)는 버디 기회를 잡았다. 2타 뒤지고 있던 터라 가르시아로서는 타수 차가 더 벌어지면 우승 기회를 날릴 위기였다. 그러나 가르시아는 웨지로 핀 1.8m 옆에 공을 붙인 뒤 어려운 파 퍼트를 넣었다. 반면 로즈는 버디 퍼트를 넣지 못했다. 기사회생한 가르시아는 14번 홀에서 버디, 15번 홀에서 이글을 잡은 뒤 연장전 끝에 우승했다. 마스터스는 가르시아에겐 큰 축복이다. 1999년 PGA 챔피언십 당시 19세였던 그는 타이거 우즈(42)와 우승을 다투다 아쉽게 졌다. 가르시아는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메이저 대회 상위권에 올랐지만, 번번이 우승 목전에서 물러났다. 그러다 지난해 마스터스 우승으로 한을 풀었다. 당시 가르시아는 미국 골프채널 기자로 활동한 여자 친구 앤젤라 에이킨스의 응원을 받으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가르시아는 3개월 후 에이킨스와 결혼했다. 피로연에서는 마스터스 챔피언이 입는 그린 재킷을 입었다. 결국 가르시아는 올해 마스터스를 앞두고 또 다른 경사를 맞았다. 올해 마스터스는 4월5일 개막한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2018-03-15

마당에 그린까지 설치해 훈련…우즈, 내달 마스터스 제패 가능성↑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2)가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빨리 기량을 회복한데는 자택 뒷마당에 설치한 그린 시설이 큰몫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즈는 11일 플로리다주 팜하버의 PGA 발스파 챔피언십에서 9언더파를 치며 한타 뒤진 준우승을 차지했다. 지난해 4월 허리수술을 받고 두달전에 PGA 대회에 복귀한 우즈는 불과 4번째 대회만에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최근 한달간 3개 이벤트에 참가하고 한때 시속 208㎞에 달하는 클럽 헤드 스피드(1위)를 기록하는 등 컨디션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비록 최종일 퍼팅숫자가 32개에 달하며 한타차로 우승하진 못했지만 3라운드까지 숏게임도 전성기때의 실력을 발휘하는 뒷심을 선보였다. 우즈의 친구인 노타 비게이는 12일 우즈의 비밀 훈련 시설을 공개했다. 플로리다주 주피터의 자택 뒷마당에 4개의 연습 그린을 설치했다는 것. 우즈의 스탠포드대 골프팀 동료인 비게이는 "베이힐 코스와 같은 종류의 잔디로 만들고 또 하나는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에서 근무한 사람을 직접 스카웃해서 연습 그린을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발스파 대회 3라운드 9번홀의 칩샷 버디는 뒷마당 그린에서 수없이 연습해 얻은 결과라는 것이다. 베이힐 코스는 15일 개막하는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 개최지로 우즈는 이 대회에 무려 8차례 우승했다. 또 시즌 첫 메이저인 마스터스는 4번 정상에 올랐다. 비게이는 "우즈가 현관문을 열면 곧장 베이힐·오거스타와 똑같은 곳에서 연습하는 시설을 설치한 셈"이라 덧붙였다. 한편 우즈의 분전으로 베팅업체 사이트는 그의 마스터스 우승 배당률을 2위로 올렸다. 세계랭킹 1위 더스틴 존슨(미국)이 15-2로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10-1인 우즈, 저스틴 토머스ㆍ조던 스피스(이상 미국)는 나란히 11-1을 기록했다. 봉화식 기자 bong.hwashik@koreadaily.com bong.hwashik@koreadaily.com

2018-03-12

[CEO를 만나다] 해밀턴 아이언워크스 한나남대표…철강업계선 흔치 않은 '철의 여인'

'해밀턴아이언 워크스'라는 철강업체를 경영하는 한나 남(49) 대표는 철강업계의 흔치 않은 여성 CEO다. 해밀턴사는 W빔(한국선 I빔)으로 알려질 철골을 건물 형태에 맞게 자르고 변형시켜 납품하는 업체다. 가디나의 2에이커가 넘는 공장부지에 7.5톤짜리 크레인 3개 5톤짜리 크레인 2개 각종 밀링머신 등의 시설을 갖추고 다양한 공사 주문을 소화해 내고 있다. 이미 LA국제공항 위티어 장로병원 더글라스 파크 페퍼다인 대학 등 굵직굵직한 신축 및 확장 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주류업계에 확실한 인상을 심어줬다. "사실 철강업계는 유색인종의 진입이 쉽지 않고 더구나 여성 CEO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금녀의 산업분야죠. 학교에서 따로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 현장 경험을 중시하고 각종 공사 규격이 까다로워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아요." 17세에 고향 부산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온 남 대표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던 그를 철강업계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남편의 공(?)이다. 동업자가 떠난 소규모 철강업체를 인수한 남편이 남씨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20년 전 처음 오픈할 때만 해도 한인타운에 진출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게 오히려 주류 공사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큰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납품 경험과 제작 능력이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에 규모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공사 수주를 따냈다. 그러다 1996년 LA국제공항 확장 공사에 참여하면서 도약의 기회를 잡았다. 까다로운 공항 공사에 입찰하기 위해 각종 서류 작업에서부터 시공 능력 직원 관리 등을 통해 전반적으로 회사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전에는 소수계 비즈니스를 지원하는 정책(MBE)으로 인해 참가하게 됐지만 이를 계기로 시공 능력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중소 철강업체로는 드물게 직원들에 생명보험과 의료보험 혜택을 주는 등 직원 복지를 강화했다. 또 공사가 많다고 함부로 직원을 뽑기보다 오버타임을 주더라도 기존의 직원에게 혜택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FB01380'. FB(Fabricator licence)란 LA시가 허가해 주는 철골 제작 라이선스로 남 대표가 취득한 자격번호이다. LA시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남씨가 취득한 것이다. 주에서 발급하는 구조 철골 자격증 C51(Steel Structural)도 보유하고 있다. 현장 경험이 5년이상 되어야 하고 각종 기계를 운영하는 지식을 갖춰야 합격할 수 있어 여성은 시험 응시자도 찾아 보기가 힘들다. 최근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 공사도 감소하면서 해밀턴사도 그 여파를 고스란히 맞고 있다. 수년 전보다 공사 실적이 거의 절반 가량이 줄었지만 남 대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온 휴식을 여유있게 즐기고 있다. 작년부터 남편과 함께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한인사회에 봉사의 기회를 살펴보게 된 것도 오랜만의 불황 덕분이다. 해밀턴사는 올 하반기부터 로욜라 대학 성소피아 성당 확장공사 준비로 다시 바빠지게 된다. 노란색 안전모를 집어들고 공사 현장으로 향하는 남 대표가 이렇게 말한다. "능력있는 한인 여성들이 대학 졸업 후 집안에 머무는 게 안타까워요. 미국이니까 어느 분야든지 도전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상태 기자 stchoi@koreadaily.com

2010-08-29

[한인 CEO 열전-7] 에어컨 설비회사 '센트럴 텍' 이상민 대표

이 회사는 최근 주류 병원로부터 대형 공사를 따내는 등 오히려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이 회사가 샌타바바러 카운티 소재 골리타 밸리 코티지 하스피털로부터 따낸 공사 규모는 총 800만달러로 최근 완공한 에퀴터블 시티센터의 에어컨 설비 공사가 200만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번 공사를 발주한 회사는 세인트루이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HBE’사로, 미국내 의료빌딩 공사에서 1~2위를 다투는 유명한 회사이다. 주류시장을 파고든 비결을 이상민 대표를 통해 짚어봤다. '불경기가 와도 일이 끊어지지 않는 회사를 만들겠다.' 16년전 '센트럴 텍'을 시작한 이상민(52) 대표의 창업 신념이었다. 이 대표가 '센트럴 텍'을 창업한 1990년대 초반은 지금처럼 어려웠던 시절.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로 접어들면서 실물 경제가 얼어붙었다. 미국에 온 지 10년 에어컨 설비회사에 한 우물만 팠던 그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다. 입사 2년만에 총매니저가 되는 등 초고속 승진하며 성실성 하나만큼은 인정을 받았던 그는 일감이 없자 월급만 축낸다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창업을 하게 된다. 대부분 지인들은 만류했지만 오히려 불경기에 창업을 하게 된 게 전환점이 됐다. 건설공사가 올스톱된 한인타운 대신 주류시장 공략은 '선택'이 아닌 절체절명의 생존 과제가 되었다. ◇에어컨 공사에도 주기가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닷컴 열풍으로 실리콘밸리가 가열됐던 시기였다. 곳곳마다 반도체 설비 공장이 증축되면서 에어컨 공사 수요도 폭증했다. 이씨가 창업한 센트럴 텍이 그 길목을 노려 주류 공사를 연거푸 따냈다. 닷컴 열풍이 잠잠해질 무렵 한인사회에는 대형교회 신축 바람이 불었다. 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인원대비 에어컨 용량이 큰 시설을 갖춰야 해 기술 업그레이드에 큰 도움이 됐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를 시작으로 밸리 비전교회 최근 신축한 은혜한인교회 수양관 등의 에어컨 설비는 모두 그의 회사를 거쳤다. 최근엔 에퀴터블 시티센터 마당 등 대형 쇼핑센터 신축을 눈여겨 보다 공사를 따냈다. 주기를 타면 일감을 찾기가 쉽다는 것도 알게됐다. ◇병원에서 찾은 '블루오션' 매번 새로 공사를 따내야 회사가 운영되는 만큼 마진이 높고 경쟁이 덜한 분야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고심하다 발견한 것이 병원 쪽이었다. 병원의 에어컨 설비 규정은 일반 빌딩 공사보다 규정이 까다로왔다. 병원이 요구하는 특수한 코드에 맞게 도면을 읽고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있는 기술력을 갖추는 게 가장 중요했다. 2004년 스카이파크 메디컬센터을 시작으로 마틴 루터 킹 병원(2006년) 하버 UCLA 병원(2008년) 에어컨 공사를 잇달아 수주하며 시공능력과 역량을 키웠다. 나중에 알게됐지만 주류 회사일수록 대형공사일수록 이전 실적을 많이 참고한다는 사실이다. 병원 공사 경험이 있는 업체여야 입찰을 할 수 있는 까닭에 경쟁이 덜했고 공사 마진도 일반 공사보다 1.5~2배가 컸다. ◇타인종 직원 고용해야 주류 간다 일반적으로 에어컨 하면 한인들은 막노동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에어컨 설비 협회나 컨퍼런스에서는 유색인종이 운영하는 회사를 거의 찾기 힘들다. 공사를 수주하거나 시공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프로젝트 매니저 서비스 매니저 등 주요 자리를 타인종 직원으로 채용하면서 이같은 고민을 덜게 됐고 오히려 주류회사의 업무 방식을 배우는 계기가 됐다. 또 이들과 일하며 이민 1세인 이 대표가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미국 문화를 습득하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또 사장 인맥으로 공사를 따내면서 발생하는 가격 후려치기 편법 공사 등의 문제도 타인종 직원이 관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최상태 기자 stchoi@koreadaily.com

2009-12-02

[한인 CEO 열전-6] 미 동부서 네일·스파 체인점 52개 운영····플로리스 인터내셔널 최우진 사장 '럭셔리···부유층 공략 통했다'

플로리스는 미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52개 매장(직영점 11곳)을 운영하며 연매출 4000만달러를 올리고 있는 네일업계의 강자. 불경기가 본격화된 올해에도 작년보다 15% 이상 성장해 업계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플로리스가 내년 초 캘리포니아에 입성한다. 입성 준비에 분주한 최우진 사장(42)을 만났다. 여성스러움의 대명사인 네일숍 52곳을 총지휘하는 전략이 모두 그에게서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우선 남자이고 대학 전공도 경영학. 졸업 후에도 네일샵과는 거리가 먼 부동산 개발 전문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쇼핑몰의 성공여부는 입점 업소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부가가치와 단골 확보가 높은 네일숍에 주목하게 됐다. 기존의 네일업계는 베트남계가 섬세한 손놀림과 서비스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시설투자를 하지않아 영세성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네일숍도 매장을 고급스럽게 꾸미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면 주류시장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소득 수준도 높은 곳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철저히 주류 시장을 타겟으로 삼았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데 여유가 있어야 손톱 다듬는 데 돈과 시간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개인 소득 평균 8만 달러 이상인 부유층 지역 내 쇼핑센터 입점 ▷규모 5000~8000스퀘어피트의 대형 매장 ▷헤어와 스파를 겸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라는 플로리스의 컨셉은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됐다. 최 사장은 업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철저한 시장조사와 고객들의 성향을 파악한다. 주류 스파들을 발이 닳도록 다니며 타인종들이 선호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도 철저히 점검했다. 또 경험있고 유능한 건축가들에게 인테리어 작업을 맡겨 고급스런 실내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신경을 썼다. 네일샵은 여성에겐 단순한 치장을 떠나 일종의 휴식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네일숍에 대한 고객의 반응은 대단했다. 97년 뉴욕에서 첫 가게를 시작한 이후 뉴저지 코네티컷 펜실베이니아 등으로 확장되더니 최근 5년새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52개 매장 중 매출이 가장 적은 곳이 80만달러며 많이 버는 곳은 350만 달러에 달하는 곳도 있다. 이처럼 동부에서 든든한 조직을 구축한 플로리스는 내년에는 캘리포니에도 본격 진출한다. 우선 베벌리힐스와 팔로스버디스 라캬나다 할리우드 등을 중심으로 '키 체인(key chain)' 역할을 할 업소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시장를 '네일업계의 블루오션'으로 평가한다는 최우진 사장은 "날씨는 물론 인구 수가 많은 캘리포니아는 페디큐어 시장만 놓고 봐도 뉴욕 시장의 20배에 달한다"며 "성장 잠재력은 무궁한 편"이라고 말했다. 또 자체 네일기술 학원을 설립해 숙련된 인력을 확보한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에도 진출했으며 중국에도 상류층을 겨냥해 대형 고급업소를 오픈할 예정이다. 이같이 쉴새없이 몰아부치는 그의 추진력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의 대답은 짧고 명쾌했다. "전세계 사람들의 손톱은 매일 조금씩 자라기 때문이죠." 최상태 기자 stchoi@koreadaily.com

2009-11-04

[한인 CEO 열전-5] 팔레스뷰티·소향 신디 조 사장, 업소 14개···"돈보다는 성취감"

타운 외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업소까지 세자면 팔레스뷰티 리틀도쿄·다이아몬드바·어바인 그리고 선라이즈 매장 등 4개가 추가돼 14개가 된다. 주인공은 신디 조 사장. 남편 조병덕 사장과 함께 14개나 되는 업소를 운영한다. 이쯤 되면 스몰 비즈니스계의 거물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최악이라는 불경기다. 한 공인회계사에 따르면 올해들어 LA한인타운에서만 문을 닫은 식당이 30개가 넘는다. 하지만 조 사장의 비즈니스는 주춤하기는 커녕 무섭게 뻗어나가고 있다. 1년 전 요식업에 도전하며 새롭게 오픈한 소향은 이제 비즈니스 미팅을 위한 식당으로 꼽힐 정도로 자리잡았다. 그를 지난 6일 만났다. 소향을 오픈한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네자매 이야기= 신디 조 사장은 82년 미국에 유학왔다. 역시 유학와 MBA를 공부하던 남편 조병덕 사장을 만나 84년 결혼했다. 그는 일본 브랜드 금화장품의 직원으로 남편은 가주은행 론오피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나드리 코스메틱 USA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화장품을 배워갔다. 팔레스뷰티를 차린 건 86년. 한남체인 옆에 첫번째 매장을 냈다. 매장을 확장해 가든그로브 토런스 등 9개 매장까지 일궜다. 2002년엔 팔레스 미용대학을 개원했다. 미용 대학에 집중하기 위해 2004년 1호점만 남기고 각 매장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다시 시작한 건 2005년 즈음부터. 허전해서였다. 그리고 4년 만에 이전보다 많은 매장을 냈다. 지금은 남편 언니들과 함께다. 팔레스뷰티 다이아몬드바와 어바인 그리고 선라이즈 매장은 큰 언니와 공동으로 풀러턴은 둘째 언니 IB플라자 매장은 셋째 언니가 소유하고 있다. 팔레스뷰티라는 이름으로 10개(코리아타운 갤러리아 매장은 주인이 다르다) 미용학교까지 11개를 거느린 화장품 패밀리다. ◇미션 임파시블= 화장품 판매 기업으로 키운 성공 포인트는 미션이다. 조병덕 사장은 판매 장사 외에 다른 미션을 세운다. 화장품 판매도 중요하지만 고객의 아름다움을 책임진다는 미션을 마음에 새겼다. 식당을 하면서는 음식 장사를 넘어 고객에게 건강과 행복을 선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사실 매장을 늘리고 사업을 불리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니다. 윌셔+버몬트 시티센터 솔레어 등 현재 타운내 주요 쇼핑몰에는 대부분 팔레스뷰티가 들어가 있다. 조 사장 부부도 처음 시작할 때는 열심히 건물주를 따아다니며 자기소개서와 사업계획 마케팅 전략을 담은 서류를 제출하고 20대 1 25대 1의 경쟁률을 뚫고서 입점했다. 지금은 건물주가 먼저 입주를 제안해온다. 그동안 크레딧이 쌓인 것이다. 팔레스뷰티라는 브랜드 파워도 커졌다. 신디 조 사장은 그냥 지갑 안에 내가 쓸 수 있는 만큼의 돈만 들어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더 바랄 것도 없는 이다. 신디 조 사장이 사업을 늘리는 것도 요식업에 도전한 것도 돈보다는 보람 성취감 때문이다. 보람과 성취감은 그에게 있어 미션이다. ◇돈은 사람이 벌어준다= 업소가 많아 그도 어디 있는지 하나하나 대지 못한다. 한 업소에 한시간씩만 가 있는다 해도 다 돌지 못할 정도다. 어떻게 그 많은 매장을 관리할까. 신디 조 사장은 매장을 일일히 보고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했다. 그는 미용이건 헤어건 네일이건 기술도 없고 자격증도 없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요리실력이 별로다. 전문가들 앞에서 잘난척 해봐야다. 대신 적임자를 찾는다. 적임자라고 판단되면 믿고 맡긴다. 그리고 직원에게 내 생각을 내 계획을 이해시킨다. 직원의 기술과 실력 노하우를 인정한다. 직원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그러면서 내 편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직원들이 그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니까. 신디 조 사장은 서포터다. 그는 각 매장 각 사업을 자식처럼 여긴다. 아픈 자식을 살리고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하게 하고 그리고 어른이 되게 하는 서포터다. 잘 나가는 자식은 더 잘나가도록 지원한다. 소향이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지만 재투자한다. 연꽃잎 정식은 지난 추석 그야말로 히트를 쳤다. 하지만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잘 될때 그 다음을 준비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운전대를 잡으면서 생각해요. 오늘은 어디부터 갈까. 흥분(exciting)되죠. 그 흥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새로운 도전 생각만으로도 익사이팅합니다." 이재희 기자

2009-10-07

[한인 CEO 열전-4] 나노웰 션 이 대표 '브랜드가 곧 돈…5년후엔 기업 공개'

건강식품 시장에서 ‘알쓰맥스’ 바람을 일으키며 급성장하고 있는 ‘리빙포레스트/나노웰’의 션 이 대표는 “막막한 상황에서 시작한 사업이 커졌다”며 “기업을 공개해 고객이 회사의 성장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개념의 쇼핑센터를 내세운 ‘네이버스’(Nabors)를 오는 12일 오픈할 예정이다. LA한인타운 웨스턴과 올림픽 코너에 위치한 네이버스 공사현장에서 션 이 대표를 만났다. Q. 불경기에도 공격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A. 필요하면 투자하는 것이다. "광고든 사업 확장이든 돈이 있어서 하는게 아니다. 필요하면 가치가 있다면 투자하는 것이다. 대신 돈 이상의 것 나노웰이란 브랜드를 얻었다. 그동안 제품을 팔아 돈을 많이 벌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사실 돈은 못 벌었다. 나는 집도 없다. 아파트에 산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나노웰 제품을 믿고 산다. 나노웰이란 브랜드를 신뢰하고 인정한다. 가치를 인정받은 브랜드는 곧 돈이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없지만 내겐 손에 잡히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이 생겼다. 이는 돈보다 더 큰 것이다." Q. 나노웰이 성공한 비결은. A. 가격을 내리고 열심히 알렸다. "건강식품 시장에 발을 내딛였을 때 당시 제품 유닛당 가격은 120~150달러였다. 유사한 제품을 35달러에 파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노웰 제품의 70~80%는 69달러 선에 책정한다. 가격을 절반 수준으로 낮췄다.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돈 있는 소수를 위한 제품이 아니다. 1달러짜리 제품의 가치는 1달러 혹은 그 이하라고 볼 수 있다. 내 욕심은 10달러짜리 제품을 누구나 접할 수 있게 5달러에 소개하는 것이다. 대신 나노웰 제품에 대한 품질과 효과를 인정받는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제품 개발과 생산 공장에 투자를 했고 품질과 효과를 알리기 위해 열심히 광고를 했다." Q.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A.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26살 때부터 비즈니스를 하기 시작해 수산가공 및 육가공 수출입업 건축자채 및 기계설비 컴퓨터 하드디스크 수입 마켓 운영 등 6~7개 업종에서 11개 사업체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사업에 실패했다. 한국에서는 재기가 힘들다. 미국쪽 거래처에서 '미국에 와라. 이곳에서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겠냐' 했다. 그래서 쉬러 재충전하러 그리고 도전하러 미국에 왔다. 그러다 계획엔 없었지만 눌러앉았다. 97년 미국에 와 나이(당시 40살)도 있고 육체적으로 하는 일은 힘들었다. 머리를 써서 할 수 있는 일.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시스템 엔지니어 수요가 높다고 했다. 일자리 수요는 30만개인데 자격증 있는 엔지니어는 10만명이라고 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니 되겠다 싶어 105일만에 6과목을 패스하고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놓친 게 있었다. 내 상태였다. 내 나이 내 영어구사력 등. 취직이 안됐다.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 붐이 불었다. 웹사이트 만드는 법을 혼자 공부해 터득했다. 99년 가주영어학교 웹사이트를 제작해줬고 2001년 SSLIT라는 회사를 차렸다. 한미은행 윌셔은행 등에 이어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 한남체인 JC세일즈 등으로 클라이언트가 늘었다. 많을 때는 어카운트가 200개 정도 됐다. 지금도 기존 클라이언트의 광고 모니터는 관리해준다. 사실 나노웰은 제품 광고를 하다 이참에 직접 팔아보자 해서 차리게 됐다. 계획에 없었다." Q. 앞으로 계획은. A. 고객이 주인이 되는 회사를 만들겠다. "한인 이민 100년을 말한다.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에 대한 준비가 돼 있나 물으면 대답 못할 것이다. 이민 1세대 회사 창업주 모두 다음을 준비해놓지 않으면 사라진다. 회사는 괘도에 올랐지만 창업주는 기력이 쇠한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기에 창업주의 수명에도 한계가 있다. 한인 업체는 1인 집중 시스템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지만 은퇴하고 나면, 죽고 나면 없다. 나는 죽지만 회사는 남을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네이버스는 새로운 개념이다. 고객이 주인이 된다. 2010년부터 5년 동안은 사업을 공개할 계획이다. 수입, 지출을 보여줄 것이다. 속을 내보이겠다. 5년 후에는 일반에 주식을 공모할 것이다. 네이버스에서 제품을 사는데 그치지 않고 주인이 되게끔 할 것이다. 주인이 되면 회사에 애정이 생기고 그 회사 제품이 많이 팔리도록 잘못된 점을 지적하게 된다. 일하는 사람은 긴장할 것이다. 고객은 주인으로서 회사 성장을 보며 성취감을 느낄 것이다. 고객이 애착을 보이는 네이버스는 진정한 고객 만족을 향해 갈 것이다.” ◇나노웰은. 2004년 시작해 2005년 매출은 29만달러였다. 2006년에는 9배로 늘었다. 2008년엔 연 매출 800만달러를 기록했다. 30배 가까운 성장이다. 올해는 5월까지 괜찮았다. 6월과 7월은 매출이 감소했다가 8월 예년 수준을 유지했다. 2달 불황을 겪은 것이다. 올 상반기 전체로는 전년동기 대비 30% 매출이 증가했다. 출시 5년 만에 50만병 판매라는 기록을 세운 알쓰맥스가 대표상품이다. 현재 30여가지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글=이재희 기자 사진=김상진 기자

2009-09-02

[한인 CEO 열전-2] '마음경영'으로 소비자·딜러·직원 꽉 잡아

‘냉장고 업계의 도요타.’ 식당 장비 수리에서 시작해 연 매출 1억 달러 규모의 기업으로 고속 성장한 ‘터보에어’를 놓고 미국 상업용 냉장고 시장에서 부르는 말이다. 이 회사의 브라이언 김 대표는 지난 7월1일 한국 대우 일렉트로닉스의 영업용 냉장고 사업부문 인수해 화제를 모았다. 광주시 투자유치단과 투자 MOU를 맺은 지 불과 4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진 것이다. 대기업의 설비를 이용해 냉장고를 생산해왔던 미국의 중소기업이 오히려 그 대기업을 인수하게 된 상황이었다. 김 대표는 “셋방살이 하던 사람이 그 집 주인이 됐을 때의 기분”이라고 인수 소감을 말했다. 카슨에 위치한 터보에어 본사에서 만난 브라이언 김 대표로 부터 그의 경영마인드를 들어봤다. 창업 10년만에 업계 2위, 대우 영업 냉장고도 인수 ◇ 공격경영 인수가격 1400만 달러 연내 광주에 공장 설립을 위해 1300만 달러의 추가 투자가 예정된 초대형 프로젝트. 모두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불황임에도 그는 과감히 공격적 투자를 선택했다. "엄청난 호황일 때도 망하는 기업은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불황이라 해도 시장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지금 터보에어의 규모와 재정 상태는 그 정도 인수로 부담을 느낄만한 수준은 뛰어 넘었습니다. 역동적인 조직과 강한 생명력을 유지해왔다면 이럴 때에도 과감히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김 대표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CEO다. 일상생활에서는 한없이 '연성'이지만 경영자로서는 스스로도 '공격적' '도전적'이라고 평가한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보수적인 상업용 냉장고 시장에서 터보에어를 창업 10여년 만에 시장점유율 30% 판매실적 2위로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공격경영 덕분이었다. "중부지역에선 아시아계 기업에 대한 묘한 반감으로 고전하기도 했고 한인 기업이 만드는 제품이라 '약하다'라는 모함에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력을 더욱 높이고 소비자 심리를 파악해 타사 제품과 차별화 시키기 위한 노력을 엄청나게 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빠른 성장을 해 올 수 있었죠. 요즘엔 터보에어더러 '냉장고계의 도요타'라고들 하더라고요." 현장 수리경험 접목시켜 사용자 만족도 크게 높여 ◇ 분석경영 김 대표식 경영의 또 다른 핵심 중 하나는 '분석'이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나가는 예측과 대비 끊임없는 자체 평가는 지금껏 터보에어가 큰 부침없이 성장을 거듭해 나갈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다. 지금의 경제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3년 전 부터 경기불황이 올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그 때부터 직원들과 함께 이 시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왔었죠." 그는 먼저 브랜드의 가치보다 제품 자체의 품질과 가격에 더 초점을 맞추는 불황기 구매 패턴에 주목했다. 옵션이나 원자재면에서 소비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일부 제품은 워런티를 높여 소비자 만족도를 높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수금 계좌(A/R)관리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좋았을 때부터 외상을 축소하고 지불 기한을 엄격히 지키도록 한 결과 불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매주 본사 직원들과 갖는 분석 회의나 3개월에 한번씩 전 지사 매니저급들이 함께 모여 갖는 평가회의는 터보에어의 또 다른 힘. "저 혼자서만이 아니라 직원들과 함께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곳으로 잘 가고 있는지' 수시로 돌아보는 거죠. 아이디어나 전략 평가를 위해서도 중요한 시간이지만 그 동안의 성과를 보여주며 직원들에게 책임감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데도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 인간경영 브라이언 김 대표는 "경영의 성패는 '사람의 마음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렸다"고 확신한다. 그는 소비자의 마음 딜러의 마음 직원의 마음을 얻는 것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김 대표는 식당 장비 수리에서부터 시작해 현장에서 부딪히며 습득해온 상업용 냉장고 사용자들의 마음을 터보에어 제품에 그대로 담았다고 한다. "쉽게 '만들 수 있는 제품'이 아니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여자분들도 힘들이지 않고 여닫을 수 있는 바쁘게 왔다갔다 하다 모서리에 부딪혀도 다치지 않을 재질과 디자인 개발에 힘썼습니다. 손잡이의 감촉 내부 램프와 온도 조절기 사용의 편리함 등도 세세히 신경썼죠." 이렇다 보니 터보에어 제품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게 그의 믿음이다. 단기적 회사의 이익보다는 딜러나 직원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경영을 잘 하기 위해선 '분배'를 잘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들을 대했다. "딜러들이 항상 적정 마진을 남길 수 있도록 구조화했습니다.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터보에어와 관계를 맺도록 만든거죠. 직원들에게도 회사의 이익을 나눠 갖는다는 느낌이 들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번에도 40%씩 여름 보너스를 지급했어요. 자연히 근속률도 높고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남다를 수 밖에 없죠." 그는 끊임없는 긍정적 사고와 더 큰 포부를 통해 자기 자신 또한 '경영'하고 있다. "언제나 마음의 반은 현실에 또 다른 반은 미래에 두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더 좋은 방향' '더 좋은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노력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85년 도미해 자수성가 ■ 브라이언 김 대표는 1979년 청계천에서 재래식 냉장고룰 수리하며 냉장고 업계에 첫발을 딛었다. 82년 미국식 상업용 냉장고 개발 제조업에 뛰어 들었지만 실패한 후 85년 연고 하나 없이 도미해 새로운 시작을 감행, 냉장고 수리 및 설치 서비스업을 시작했다. 92년 LA한인타운에 ‘삼성식당장비’를 개업해 경영하다 97년 ‘터보에어’를 창업, 매년 30~35%의 고속성장을 기록하며 미국 상업용 냉장고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됐다. 연매출 1억달러 기업 3개 지사 직원 600명 ■터보에어는 식당, 패스트푸드체인, 편의점, 대형마트 등에서 사용하는 각종 상업용 냉장고를 제조하는 기업으로 칼슨시 본사를 포함 전국 13개 지사에 600여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연매출 1억 달러, 전체 시장 점유율 30% 가량으로 업계 2위의 판매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피자헛, 타코벨, KFC, 스타벅스 등 주요 요식업 체인에 제품을 납품하고 있으며 상업용 냉장고 외에도 상업용 캐비넷, 에어컨, 칼 제조업체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경민 기자

200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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