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이종호의 LA 음식열전
돼지국밥 (1)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음식
#. 내 고향은 부산이다. 대학 가기 전 20년을 살았으니 나의 원초적 입맛도 자연스럽게 부산 음식에 길들여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땐 거들떠보지도 않던 음식이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좋아지고 옛 추억까지 떠올리게 해주니 고향 음식이라 하면 일부러라도 찾아보는 지경이 됐다. 나의 '힐링푸드' '소울푸드'라고나 할까. 부산의 향토 음식인 복국, 재첩국, 밀면, 김치국밥, 갈치국, 회 등이 그런 음식이다. 돼지국밥도 그 중 하나다.
돼지국밥은 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푹 삶은 돼지고기 편육과 밥을 넣어 먹는 요리다. 소를 사용하는 설렁탕과 달리 돼지 육수 특유의 강렬한 향취가 있어 개인별 선호도 차이가 큰 음식이다. 전에는 냄새 때문에 아예 못 먹는 사람도 많았지만 요즘 전문점에서 끓여내는 돼지국밥은 거의 냄새를 잡고 나오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유래는 다양하다. 그중 가장 유력한 설은 전쟁 중에 피란길을 전전하던 이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의 부속물로 끓인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요즘 돼지국밥은 부산의 향토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밀양, 양산, 울산, 대구 등지에서도 각각의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지금은 활발한 교류 덕분에 각 지방 향토음식들이 대부분 전국화 되고 대중화 되었지만 돼지국밥만은 아직도 타지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은 메뉴다. 이유가 있다. 고기에 구둣솔 같은 뻣뻣한 돼지털이 그대로 박혀있기도 하고 내장과 함께 삶은 국물이라 돼지 특유의 구린내도 강하게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고, 그만큼 시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밀양 돼지국밥
#. 나도 어릴 때는 돼지국밥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입이 짧고 비위가 별로 좋지 않아서다. 사람도 첫 인상이 중요한 것처럼 돼지국밥에 대한 첫 만남이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던 탓도 있다.
돼지국밥에 대한 나의 기억은 냄새에 대한 불편함과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두 가지로 아련하게 남아있다.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니까 50년도 더 지난 1960년대 초반이었을 거다. 부산에 터를 잡았던 아버지는 고향인 밀양에 자주 가셨는데 당신의 외가가 있던 그곳을 '진외가'라며 어린 나도 곧잘 데리고 다니셨다.
지금이야 부산-밀양이 한나절도 안 걸리는 지척 거리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거의 하루 날 잡고 가야할 만큼 멀었던 것 같다. 털털거리던 완행 시외버스를 타고 흙먼지 풀풀 날리던 비포장 시골길을 한참이나 달려가야 했고, 버스에서 내려서도 마을까지 들어가려면 다시 끝도 없이 걷고 걸어야 했던 기억 때문에 실제보다 더 멀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밀양에만 가면 아버지는 돌아 올 때 읍내 시장통이나 버스 터미널 부근에서 국밥을 사 주시곤 했다. 돼지국밥이나 김치국밥이었다.
그 때 국밥은 요즘과 달리 국 따로 밥 따로가 아닌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게 밥을 한꺼번에 말아서 주는 말 그대로 '국밥' 이었다. 아버지는 함께 식당에 가면 으레 당신의 그릇에 있는 고기를 건져 내 쪽으로 옮겨주곤 하셨는데 나는 그게 싫어 투정을 부리곤 했다. 냄새도 싫었고 배가 부른데도 자꾸 더 먹으라며 덜어주시던 것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런 풍경도 더 이상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밀양의 이름 모를 국밥집. 지금도 돼지국밥 냄새를 맡으면 그 때 그 곳이 눈물 나게 그리운 장면으로 떠오른곤 한다.
미국서 다시 만난 돼지국밥
#. 대학 진학을 위해 부산을 떠나면서부터 돼지국밥이란 말은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서울서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도 십수년을 했지만 돼지국밥을 먹어 본 기억은 한 번도 없다. 주변에도 돼지국밥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돼지국밥을 파는 식당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기억에서 멀어졌던 돼지국밥을 몇년 전 뜻밖에도 LA 한인타운에서 만났다. 3가와 세라노 코너에 있는 '진솔국밥'이란 식당에서다. 그곳 메뉴를 보면서 이 식당 주인은 필경 부산 사람이거나 부산 음식에 일가견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돼지국밥 전문점인 것도 그랬지만 비빔당면이라는 메뉴도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노란색 양은 그릇에 담겨져 나오는 알록달록 비빔당면은 옛날 중고등학생 때 학교 주변 분식집에서 즐겨 먹던 그 맛 그 모습 그대로여서 무척 반가웠다.
메인 메뉴인 돼지국밥은 어떨까. 일단 형식은 웬만하다. 가볍게 양념한 부추(부산서는 정구지라고 한다)를 따로 주는 것도 그렇고, 간 맞추라고 새우젓을 따로 구비해 놓은 것만 봐도 기본은 되어 있다. 국밥 속 건더기는 두툼하지는 않지만 살코기와 내장이 적당히 섞여 있어 구색을 갖추었다. 예민한 사람은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도 거의 나지 않는다.
주문한 돼지국밥이 나오면 먼저 부추를 양껏 덜어 뚝배기에 넣고 새우젓으로 적당히 간을 한다. '다데기(다진양념)'는 이미 국물 속에 한 숟가락 들어있어 살짝만 저어도 국물이 금세 불그스름해 지며 입맛을 돋운다. 기호에 따라 들깨를 두어 숟가락 넣으면 한결 풍미가 좋아진다. 밥을 말아 먹을지 그냥 먹을지는 자유다. 곁에 따라 나오는 국수사리가 있어 그것만 담갔다 건져 먹어도 웬만큼 양은 되기 때문이다.
일단 국물부터 먼저 한 숟가락 떠 보자. 코끝에 설핏 돼지 육향이 서리지만 입안에 흘려 넣어보면 혓바닥이 뜨끈해지며 가라앉았던 미각이 일제히 살아난다. 이번엔 좀 더 깊이 숟가락을 넣어 건더기까지 건져 올려보자. 깍두기나 김치를 얹어 한입 가득 밀어 넣으면 '어~ 좋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렇게 한 그릇 뚝딱하고 나면 어느새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속이 확 풀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반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주 한 잔 생각이 굴뚝같겠지만 아쉽게도(?) 이 집은 술은 팔지 않는다. 돼지국밥이 망설여지면 순대국밥을 시키면 되는데 모양만으로는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순대국밥은 순대가 따로 접시에 담겨져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가격은 돼지국밥 10.95달러. 순대국밥 11.95달러, 비빔당면 5.95달러.
▶주소: 4253 W. 3rd street. Los Angeles, CA 90020
돼지국밥에게 밀리면 인생이 밀린다
#. 부산에선 '돼지국밥한테 밀리면 인생 전부가 밀린다'는 속설이 있다. 부산사람들이 돼지국밥 이야기만 나오면 목청이 높아지는 이유다. 실제로 부산 사람들은 돼지국밥같은 향토음식에 대해 저마다 일가견이 있다.
그래도 결론은 언제나 똑같다. 돼지국밥만큼 사나이다운 야성이 느껴지는 음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음식 즐기는데 무슨 남녀 구분이 필요할까. 요즘은 돼지고기가 미용에 좋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오히려 여성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어쨌든 돼지국밥은 원초적으로 거칠고 투박한 음식이다. 거기다 강한 양념까지 더해 땀 뻘뻘 흘리며 먹어야 제맛이 난다. 경남 창녕 출신 최영철 시인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돼지국밥을 소재한 그의 시 전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돼지국밥은: 서민들 애환 담긴 눈물의 음식
사전에 보면 국밥은 ‘국에 밥을 말아낸 음식’을 국밥이라 했다. 다른 말로 '장국밥' 혹은 '국말이'라고도 했고 한자로는 탕반(湯飯)이라 했다. 재료에 따라 소고기국밥, 돼지국밥, 김치국밥 등 다양했으며 설렁탕이나 추어탕도 일종의 국밥이다.
원래 국밥은 가난과 눈물의 음식이었다. 유래를 봐도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겼다. 동아시아 음식 문화사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전공교수 주영하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 생긴 근대적인 외식업종이 국밥집이라고 했다(식탁위의 한국사 p.59). 가난한 사람들이나 급하게 한 끼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국밥처럼 간편하고 좋은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밥은 반찬으로 김치나 짠지 하나만 있어도 숟가락 하나 들고 게 눈 감추듯 금세 먹을 수 있는 끼니거리였다. 또 밥을 국에 말았기 때문에 양도 두 배로 늘어나는 효과가 있어 없는 사람들에겐 제격인 음식이었다.
하지만 1960대 이후 먹을거리가 풍부해지자 국밥 안에 들어가 있는 밥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결국 식당에서 파는 국밥은 이름과 달리 국 따로, 밥 따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로국밥’이라는 이름이 붙은 메뉴는 한국전쟁 이후 대구에서 처음 생겼고 1980년대 이후 전국 대부분의 국밥집에서 이런 방식을 따라하게 되었다는 것도 주영하 교수의 주장이다.
또 1920년대 이후 전국의 읍면 소재지에 상설시장 함께 5일장이 자리를 잡으면서 장에 가서 먹는 국밥은 장 구경만큼이나 매력적인 우리 문화가 되었는데 ‘장터국밥’이라는 이름도 그때 생겨났다고 주영하 교수는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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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은빛나다 -최영철(1956~ )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양파 새우젓이 있다
푸른 물 뚝뚝 흐르는 도장을 찍으러 간다
히죽이 웃고 있는 돼지 대가리를 만나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바닥은 곳곳에 야성을 심어 놓고 파는 곳
그따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야성만을 연마 하기 위해
일념으로 일념으로 돼지국밥을 밀고 나간다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것
그래도 남은 몇 가닥 털오라기 같은 것
비게나 껍데기 같은 것
땀 뻘뻘 흘리며 와서 돼지국밥은 히죽이 웃고있다
목 따는 야성에 취해 나도 히죽이 웃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면 마늘 양파 정구지가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 바닥 곳곳에 풀어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이종호 /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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