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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노예는 투쟁할 줄 모른다

얼마 전 신문에서 공감이 가는 글을 만났다. 현대 사회를 분석하며 ‘우리는 이미 지구라는 정신 병동에 함께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갇혀버리지 않는 일상이 되기를 꿈꾼다.   잘못된 습관에 저항하지 않아 결국은 악습이 된 두 번째 본성과, 존재로 지향하는 참된 자아로서의 본성이 대치 상태로 싸우는 것은 두 본성의 결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과 존재가 지향하는 자유는 확연히 갈라지는 길이다. 이 길을 뒤섞어 놓고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된 것은 판도라의 빗장이 풀렸음을 의미한다.   판도라는 끝을 모르는 욕망이다. 통제가 되지 않을 때는 파괴의 위력으로 다가온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 또한 점진적으로 높아져 미친 놀이판의 면적 또한 넓어져만 간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는 이 사회적 불안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밤의 어두움은 더 기괴한 느낌이다. 창조적인 영감을 주던 그때의 그 밤이 아닌 것 같아서 저녁 시간 교회에 나가는 일도 망설인다. 새벽에도, 대축일 늦은 밤에도 걸어가서 참석하곤 했는데….모든 스케줄이 태양이 떠 있을 때까지로 고정되어 버린 듯하다.   나 역시 태양의 빛을 따라서 일상을 시작하고 끝내기로 했다. 새벽 다섯시쯤에 일어나 명상 1시간, 스트레칭 40분, 그리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삶은 계란과 치킨 소시지, 전날 만들어 둔 샐러드와 커피 한잔이다. 9시쯤이면 손빨래를 하고 손글씨를 쓰고 신문을 읽는다. 점심 전까지 손과 두뇌를 움직이기 위해 꼭 하는 것이 필사와 독서다. 필사는 속도가 느리긴 해도 독서보다 기억의 기능이 좋아진다. 오후 3시쯤엔 요구르트와 넛 종류로 이른 저녁식사를 한다. 중간중간 레몬수를 마시고, 과일과 집에서 구운 팥 소가 든 홀그레인 호떡도 먹는다. 먹는 일이 심플해지면 삶의 짐에서도 가벼워진다.   자유는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덜어내는 행위이다. 소유하려는 것은 탐욕의 반복일 뿐 자신의 모든 것을 쓰레기통으로 만들게 된다. 정신병동의 면적이 넓어지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 너무 풍요로워서 불행해진다면 가던 길을 바꿀 것이다.   나에게는 가난과 자유가 터닝 포인트였다. 정신병동이나 다름없었던 늪을 빠져나오도록 다그치는 각성의 소리를 따르게 되었는데, 사막으로의 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텐트의 역할 그 이상이 되어주지 못하는 육신을 끌어안고, 적게 먹고, 쓰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공동의 유산임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했다.   지구촌의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마실 물 조차 모자라는 실정이다. 선진국의 미래는 생태학적 빚더미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성하도록 만든다. 개개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자업자득이기에 그렇다.   온전해진 내면의 힘이야말로 창조목적으로 이끄는 것을 더욱 원하고 선택하게 한다. 파괴의 목적을 멈추고 생명 창조로의 전환을 위해서 정신병동에 갇히지 않으려면 생활 방식에 투쟁이 있어야 한다. 최경애 / 수필가이 아침에 노예 투쟁 본성과 존재 정신 병동 사회적 불안감

2024-10-31

[신 영웅전] 에이브러햄 링컨

아마도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은 역사가 자기를 잘못 평가하고 있다고 구천에서 투덜거릴 것이다. 링컨이라면 노예 해방부터 떠올리지만, 역사의 평가는 다르다. 노예 해방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역사가들은 그가 전쟁이 끝난 뒤 적의(敵意)에 가까운 남북을 통합해 대제국을 건설한 ‘건국의 중부(仲父)’라는 데 더 큰 의미를 둔다.   켄터키의 촌뜨기로 태어난 링컨은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해 겨우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지만, 인자한 계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실하게 공부했다. 역사상 처음 고졸 출신으로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상류 사회의 푸대접을 많이 받았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볼이 움푹 팬 링컨은 추남이었다. 대선에 출마하자 선전 포스터를 찍으려던 사진사가 그 얼굴을 보고 절망했다. 그때 베델이라는 소녀가 편지로 “아저씨는 수염을 기르면 못생긴 얼굴을 좀 가릴 것 같다”고 아이디어를 줬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 그때부터 수염을 기르니 ‘송장 같던 얼굴’이 우아하게 보였다. 물론 수염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그 덕을 톡톡히 봤는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링컨 때부터 미국 대통령은 수염을 기르는 것이 관례가 됐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이던 1863년 11월 19일 그는 격전지 게티즈버그에서 전몰장병 추모 연설을 했다. 본디 연사는 하버드대 총장 에드워드 에버렛이었다. 그는 2시간에 걸쳐 사자처럼 열변을 토했다. 주최 측에서 오신 김에 한 말씀 해달라는 부탁이 있어 링컨은 쪽지에 몇 마디 적어뒀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 그 전 일요일 교회에서 들은 목사님 설교가 머리에 떠올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끝맺고 내려왔다. 267단어다. 연설이 너무 짧아 마그네슘 플래시를 장착하던 사진사가 꾸물거리다가 사진 찍을 여유도 없었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 노예 해방 대통령 자리

2024-09-02

주상원, 흑인 노예 후손 보상안 발의…1인당 최대 120만불 보상금

‘설마, 그게 가능하겠냐’는 반응을 불러왔던 가주 내 흑인 노예 후손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 계획이 가주 상원에 정식 법안으로 발의됐다.   주정부가 ‘노예 보상 테스크포스(이하 TF)’를 꾸리고 구체적인 조사, 보상 절차와 방식을 연구한 지 3년 만이다.     ‘흑인 노예 후손 보호법(SB 490)’을 발의한 스티븐 브레드포드(민주·가디나) 가주 상원의원은 “처음으로 관련 법안을 상정할 수 있어서 벅차다”며 “올해 최종 보고서가 주지사실과 의회에 전달됐으며 이를 기반으로 법안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TF는 지난 7월 1000쪽이 넘는 분량의 최종 보고서에서 주정부와 의회가 ‘가주 아메리칸 프리드맨 사무처(California American Freedman Affairs Agency)’를 만들고 이를 통해 피해 보상과 관련 업무를 돌볼 수 있도록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1900년 이전에 노예의 신분으로 가주에 오거나 끌려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여기에는 1인당 최대 120만 달러의 보상금도 포함됐다. 산정 기준에는 노예 선조들이 겪은 고초와 가주에서 머물렀던 시간 등이 고려됐다.     브레드포드 의원은 “결국 돈만을 본다면 그 핵심이 흐려지는 것이 될 것”이라며 “고통을 겪은 후손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그 의미”라고 전했다.   그는 또 “꼭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도 해당 커뮤니티와 가족에게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안에는 보상과 함께 교육 비용, 보건 비용, 세제 혜택 등이 주어질 수 있다고 적혀있다.     TF가 제안한 보상금액 산정 기준이 공개되면서 일부에서는 전체 보상액수가 8억 달러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한편 2020년 10월 TF 구성 때부터 개빈 뉴섬 주지사는 원칙적으로 보상 계획을 지지하며, TF의 보고를 기반으로 구체안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온 바 있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주상원 보상금 보상금액 산정 노예 보상 노예 후손

2023-08-24

[열린광장] ‘노예 해방의 날’의 영적 의미

미국 역사에서 링컨 대통령의 1863년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은 의미가 깊다. 그리고 1865년 6월19일은 텍사스주에서 마지막 노예해방이 있던 날이다. 이를 기념하는 것이 ‘흑인 노예해방 기념일(Juneteenth)’이다.  노예해방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명제지만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굴레의 무게는 무거웠다.        ‘노예 해방 선언’ 100주년을 맞은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유명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을 통해 진정한 노예해방은 진행 중임을 강조했다.     21세기의 미국은 교육, 직업, 의료 등 모든 분야에서 인종,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정의를 성취하기 위한 큰 비전을 안고 있다.      병원에서 활동하는 목사 입장에서 의료계의 발전하는 모습은 희망을 갖게 한다. 하지만 고정관념과 편견은 아직 많은 진전이 필요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시니어 혹은 장애를 가진 환자를 방문하는 경우 인지적 판단 능력, 혹은 참을성이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은 환자의 영혼을 치유하는 ‘스피리추얼 케어(spiritual care)’의 효과를 약화한다.  이는 임상목회 교육(CPE)시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국의 역사는 시민의 자유로운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아가 인류의 역사 또한 과거의 여러 가지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의 발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영적 자유(Spiritual Liberation)’도 함께 성취하기 위한 마음이 간절하다. 돌아보면, 과연 출애굽기 430년간의 노예생활로부터의 자유,  복음서에 “주께서 온갖 질병과 병든 자를 낫게” 하심,  그리고 사도행전 사도들이 보내심의 사명을 이루어 낸 그 모든 자유함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   성서의 기록을 본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 할 때 영적 자유의 마음을 경험하고 지금껏 가졌던 가치관과 바라던 것보다 오히려 인종과 언어를 넘어 소외된 자와 불우한 자, 애통해 하는 자와 병든 자를 향한 새 돌봄이 시작되었다.     ‘노예 해방의 날’의 다른 한 면인 영적 자유함이 이민의 순례 여정을 가는 우리에게도 더욱 공감되어 서로의 돌봄이 확장되기를 기원한다.   김효남 / HCMA 디렉터·미주장신 교수열린광장 노예 해방 흑인 노예해방 마지막 노예해방 노예 해방

2023-06-18

[로컬 단신 브리핑] 링컨 노예 해방 선언 원본, 스프링필드서 전시 외

#. 링컨 노예 해방 선언 원본, 스프링필드서 전시    제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서명한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 원본이 일리노이 주도 스프링필드에서 전시된다.     스프링필드 소재 링컨 박물관은 흑인 노예 해방 기념일(Juneteenth, 6월 19일)을 맞아 2주 동안 노예 해방 선언 원본을 전시한다고 발표했다.     현존하는 20여 개의 원본 중 하나인 해당 선언문은 오는 19일부터 23일까지, 그리고 오는 26일부터 30일까지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노예 해방 선언은 1863년 1월 처음 발표됐지만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후인 1865년 12월 노예 제도를 금지시킨 연방 헌법 수정 제13조와 함께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스프링필드 링컨 박물관은 무료 입장이 가능하며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문을 연다.    #. 그럽허브, 시카고 본사 포함 대규모 정리 해고    시카고에 본사를 둔 음식 배달업체 '그럽허브'(Grubhub)가 대규모 정리 해고를 발표했다.     그럽허브측은 지난 12일 전국적으로 전체 직원의 15%에 해당되는 400여명을 해고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그럽허브는 시카고에만 약 850명의 직원들이 근무 중인데 이 가운데 120명 정도가 해고될 것으로 전해졌다.     그럽허브측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회사를 경쟁력 있는 수준에서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어 "회사 전체 사업 규모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수준을 넘어 섰으나 운영비 및 인건비 부담은 더 늘어났다"고 전했다.     회사측은 이번 정리 해고 대상자에게 16주 치의 주급을 제공할 방침인데 협력 업체 직원과 운전자는 대상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그럽허브는 지난 202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기반을 둔 '저스트 잇 테이크어웨이'(Just Eat Takeaway)가 49억4000만 달러에 인수했는데 또 한번 매각 수순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Kevin Rho 기자로컬 단신 브리핑 스프링필드 링컨 스프링필드 링컨 노예 해방 링컨 노예

2023-06-13

[살며 생각하며] 남북전쟁의 도화선, 드레드 스콧 재판

사우스캐롤라이나 동부 해안에는 콘데 나스트 트레블러(Conde Nast Traveler)가 뽑은 인구 약 14만여 명의 소도시 찰스턴이 있다. 미식 문화, 다채로운 명소,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 다양한 볼거리와 조용한 즐거움을 안기는 이상적인 여행지로 소문나면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항구이자 군항 도시다. 이곳에 가면 꼭 둘러봐야 할 명소 한 곳이 있는데 Old Slave Market이라는 로만스카 양식의 오래된 건물, 노예 박물관이다. 150여년 전 대서양을 건너온 노예들을 목욕시키고 배불리 먹인 뒤 온몸에 기름까지 바르고 새 옷을 입혀 매대에 진열하면 남부 각지의 농장주나 중간상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감정한 뒤 상품의 가치를 흥정하던 곳이다.   1859년 건축 당시 노골적으로 노예를 사고파는 빌딩임을 과시하려 중앙 표지석에 새겨놓은 ‘Mart’라는 단어는 오늘날까지 선명히 남아 있어 관람객들의 마음을 참담케 한다고 한다. 이곳 외에도 워싱턴DC,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 및 NJ 잉글리시 타운 같은 곳이 노예 도소매 시장으로 유명한데 이곳들은 아프리카 출항 당시 가격의 두 배 정도인 인당 400달러에 거래되었고 그 후 최대의 수요처이자 노예 센터로 연간 13만5000명의 노예가 사고 팔린 것으로 알려진 뉴올리언스로 옮겨지면 값이  750달러로 껑충 뛰었다고 하니 노예무역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음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그 거위는 이제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종 되어 어린이는 8달러, 어른들에게는 14달러의 알을 챙기게 하는 수익상품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렇게 특정 백인들의 전유물 같았던 미국의 노예제도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역사적 전기가 찾아온다. 바로 1857년 ‘드레드 스콧 재판’이다.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1858)은 부인과 두 딸을 둔 흑인 가정의 세대주로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군의관 에머슨 박사 소유의 노예였다. 그들 가정은 주인의 근무지를 따라 여러 주로 이주하며 살다 주인이 사망하자 자유인이 되길 원했지만 소유권을 양도받은 에머슨 부인은 합의금이 너무 적다며 거부하였고 이에 스콧은 1846년 변호사 프린시스 머독과 아프리카 침례교회 존 앤더슨 목사의 도움으로 연방법원에 제소, 온 미국사회가 초미의 관심을 갖고 지켜본 세기의 소송이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스콧의 주장을 7:2로 기각한 뒤 “노예는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연방법원에 제소할 권리 자체가 생길 수 없다고 하며 한발 더 나아가 노예제도를 폐지함은 불법이며 정당한 절차 없이 노예주에게 노예를 빼앗을 수 없다”고 판시하면서 미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문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다.   결론적이지만 이 판결은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성경 말씀은 물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의 건국 정신에도 반하는 가장 미국답지 않은 판결이 되고 말았다. 판결 후 반응은 사뭇 달랐다. 노예가 필요악이자 헌법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던 남부 지주들은 환호했으나 펜실베이니아주를 비롯하여 이미 노예제도를 불법이라며 해방을 명문화한 동부의 산업주들은 크게 실망하면서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음은 불문가지였다.   결국 이 재판이 도화선이 되어 북남은 결코 함께하기에 먼 당신이 되어갔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남북전쟁 도화선 드레드 스콧 수요처이자 노예 건물 노예

2023-05-12

[살며 생각하며] 사람이 아닌 화물이 된 흑인 노예

콜럼버스가 1492년 발견한 신대륙이 유럽인에게는 축복의 땅이었을까? 표면적으로 그들은 금과 은을 찾아 나섰으며 식민촌으로부터 들여온 설탕, 담배 등으로 부호들의 기호를 자극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다. 이 과정에 수많은 원주민의 노동이 강제되었고 병이 옮겨져 주민들이 떼죽음하자, 이제 인간으로 차마 용서될 수 없는 흑인 노예제도를 합법화하므로 하나님이 내린 지구상 최상의 기름진 옥토와 신비로운 천혜의 미 대륙이 한때 최악의 인권 침해지로전락한 뒤 지금도 그 후유증이 여전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1619년 19명이 제임스타운에 첫발을 디딤으로 시작된 노예제도라는 ‘죄악의 불씨’는 들불처럼 번져 1860년 남북전쟁 직전 390만명에 달했고 일부 지역은 노예의 수가 백인 인구를 능가할 정도였다. 북미 대륙이 이처럼 흑인 노예로 범람한 직접적인 원인은 18세기 중엽 발원된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종전까지 옷 하면 양모를 수작업한 실과 천이라면 이제 목화를 기계에 넣고 돌리면 따뜻하고 가벼운 면직물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시대로 변천한 것이다.   수요가 공급을 부르는 법! 이렇게 되자 지금껏 무주공산처럼 버려져 있던 신대륙이 목화재배 플랜테이션 용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신대륙은 땅만 있다. 그 땅을 개간하고 씨앗을 뿌린 뒤 거름을 주고 수확을 하기 위해서는 기계처럼 막 부릴 인력이 필요했다. 특히 목화는 7~8월 한낮 더위에 수확하는데 이때를 놓치면 건조된 솜이 낙하하여 상품가치를 상실한다. 또 아무리 솜사탕같이 부드러운 목화지만 그 속에는 평균 20여개 정도의 씨가 박혀있는데 이 또한 일일이 발라내고 가공해야 하니 농장주 입장에서 면화산업은 ‘노예가 필요악’이라 강변할지 모르지만 사람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1793년 엘리 휘트니가 목화에서 씨를 빼내는 훌륭한 기계를 발명해 소요인력이 많이 줄었다 해도 욕심에 가속이 붙은 농장주들은 더 많은 땅에 면화를 심기 위해 노예선이나 노예시장을 찾거나 기웃거렸음은 불문가지다.   흔히 노예선을 가리켜 ‘지하 감옥’ 또는 ‘떠다니는 지옥’이라고 불렀다. 당시 흑인 노예들은 사람이 아닌 화물 취급을 받았는데 이는 마치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중국 땅에서 운용한 731부대가 생체실험 대상자를 가리켜 일본말로 껍질 벗긴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라칭한 것과 흡사하다.     아무튼 노예선 선장들은 화물칸을 선창부터 사람이 누워 뒤척일 최소 공간인 50cm 간격의 7층 나무침상으로 개조한 뒤 맨 아래층부터 6명씩 사슬로 묶고 다시 옆의 두 사람씩 발에 족쇄를 채운 채 발가벗겨 지그재그로 눕혀 실었다. 이렇게 수개월 누운 채 용변이나 토사물을 해결한 뒤 본인 또는 타인의 배설물 위에 뒹굴다 보니뉴욕 주민들은 노예선 입항을 냄새를 통해 알았고 산소 부족은 촛불조차 견딜 수 없었다.   노예선은 대략 100~300톤 정도의 소형선박이었는데 수백명, 많게는 500명까지 노예를 태우다 보니 물과 식량을 실을 공간이 부족하여 식사는 하루 한 끼 강냉이 또는 조죽을 주걱에 묻혀 뿌려주었고 물은 한두 모금으로 때웠으니 탈수, 이질, 괴혈병 등으로 15~33% 정도의 치사율을 보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떠다니는 지옥선’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화물 노예 노예선 입항 노예선 선장들 화물 취급

2023-04-28

[살며 생각하며] 미국의 흑역사, 흑인 노예

쿤타 킨테! 1976년 출판된 알렉스 헤일리(1921~1992)의 소설, 뿌리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드라마 및 영화로도 나와 세계인들을 전율케 한 뿌리는 작가 자신의 외할아버지 쿤타 킨테가 1767년 서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납치되어 미국 땅에 노예로 끌려와 뿌려놓은 후손들의 삶을 역으로 더듬어 가는 한 일가의 고난사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것조차 언감생심 분에 넘친다고 보았던지 ‘메릴랜드 애나폴리스’ 부둣가에 설치한 쿤타 킨테 기념 명패를 설치 이틀 만에 탈취한 뒤 아직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니 미국에서 유색 갈등은 끝난 이야기가 아닌성싶다.   외할아버지 흑인 노예 무역의 시작은 9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제국이다. 그들은 아프리카 부족장들과 짬짜미하여 럼주, 의류, 총 같은 것들을 주고 대신 흑인들을 상품으로 받아 유럽 각국에 팔아 왕국재정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보셨던지 왕국 자체가 소리소문없이 망했고 대신 그 사업은 해양강국 포르투갈이이어받았다. 그러다 1640년 로마 교황청이 노예무역을 금하는 칙령을 선포하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 사업은 영국으로 넘어가 북미 신대륙에서 만개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영국은 1534년 헨리 8세가 교황청과 관계를 단절한 뒤 영국에서의 교권은 국왕에게 있다는 수장령을 제정하면서 명실상부 교황 칙령의 치외법권국이었다.     이제 영국의 노예상들은 왕실의 묵인하에 럼주 및 무기, 옷감 등을 실은 선박을 아프리카 해안에 정박, 사냥꾼들이 잡아 온 흑인들과 바꿔치기한 뒤 바하마, 쿠바 등 서인도제도의 대규모 플랜테이션에 노예로 넘기면서 상품값으로 금은보화 같이 귀한 설탕, 당밀을 받아 영국의 럼주 생산업자들에게 파는 삼각무역을 통해 영국왕실의 재정을 배를 불리게 하였다.   노예무역이 신대륙에 안착한 계기는 1619년 8월 하순, 남미 쪽으로 항해하던 네덜란드 상선이 19명의 흑인 청년들을실은 채 부족한 식량을 구할 셈으로 버지니아 제임스 타운에 불시착하면서다. 1616년부터 1699년까지 영국식민지의 수도 역할을 했던 제임스 타운은 신대륙 개척의 중요 거점이었다. 광활한 대지를 갈아엎어 담배 및 면화농사를 짓던 농장주들에게 인력이 곧 돈이었다.     초창기 인디언이나 가난한 영국인들을 계약노동자로 활용해왔었는데 여러 이유로 채 2년을 못 버티고 죽어 나가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판국에 19명의 흑인이 계약 없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 채 굴러들어온 셈이었고 아! 흑인 노예라는 악한 영감이 그들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결국 1622년 버지니아주가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합법화하였고 향후 400년 동안 1250만~1500만명의 아프리카인이미국 땅에서 사고 팔리는 흑역사의 희생물이 된다.   성경에도 노예라는 말이 나온다. 전쟁 중 포로로 잡혔거나 이웃 간에 진 빚을 못 갚을 경우 자신 또는 자녀를 노예로 넘김을 허용하고 있다. 노예로의 삶이 억울한 죽음보다 낫다는 선하신 하나님의 배례에서다. 대신 기한을 최대 6년으로 하고 7년째는 몸값을 물지 않은 채 자유인이 된다고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흑인 노예는 전쟁 중 포로도 아니고 빚 대신 잡혀 온 담보물도 아닌데 6년은커녕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고통 속에 죽어감은 성경은 물론 천륜을 거슬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미국 흑역사 노예 무역 서아프리카 감비아 외할아버지 쿤타

2023-04-14

[삶과 믿음] 노예생활과 주권 회복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스케이트를 타러 집 근처에 있는 아이스링크에 갔습니다.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데 친구들이 “야! 성낙수다”다 하며 어떤 건장한 청년에게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낙수가 누구냐고 친구에게 물어보았고, 그는 “성낙수는 아주 유명한 야구선수다” 말하며 그 친구는 황급히 그쪽으로 스케이트를 타고 갔습니다. 저도 왠지 그 유명 선수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케이트를 잘 못 타는 필자가 그 청년에게 가까이 갈 때는 이미 많은 어린이, 학생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다들 유명 야구선수를 갑자기 본지라 사람들이 종이를 가지고 있었을리 없었고 친구들은 손바닥에 그의 사인을 받고 있었습니다. 필자도 손바닥에 사인을 받았고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괜히 귀한 것을 받은 것 같아서 덩달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이 “이 사인은 아주 귀한 것이라 반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전까지 지워져서는 안 돼” 말했습니다. 필자도 그 사인이 지워질까 두려워 그 날 세수하기를 삼가며 다음날 그 유명 야구선수의 사인을 반 친구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실지 필자는 야구에 아무 관심도 없었고, 친구들의 반응도 하루가 지나자 신통치 않았고 이틀간 손을 씻지 않으니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필자의 유년시절 이야기지만 우리의 많은 삶의 모습이 이 같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나에게 있다기보다 주변 환경과 주위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주권’을 잃어버린 상태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전공과 직장, 배우자 등을 보면 실지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가치 있는것이라기보다, 우리의 판단과 선택 기준이 물질적 경쟁사회에서 이미 형성된 세속적 가치관에 바탕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뚜렷한 주관 없이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과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 또는 지배받으며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노예생활’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소태산께서는 원불교를 열게 된 개교 동기를 다음으로 말씀하십니다.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 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오.”   노예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나 자유를 빼앗겨, 자기 의사나 행동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에게 사역(使役)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법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지만, 우리 마음과 인생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휴가 가서도 일 걱정을 하며, 아이가 공부 못하면 더 잘하기를 원하며 염려하고, 공부 잘하면 더 잘해서 명문대에 가기를 바라고, 먹고 사는 것은 염려가 없는데 주변 인간관계로 괴로워하는 등 우리 마음은 이미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밧줄에 묶여있습니다- 과거 노예가 사슬로 묶여 있었던 것처럼. 내가 명예의 노예, 돈의 노예, 일확천금의 노예, 분노의 노예, 질투의 노예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거 한국이 일제 강점기에 놓여 있을 때 주권을 찾는 일은 소수 독립운동가의 노력에 의존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 삶에서의 노예생활의 해방은 자기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남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자기 스스로 ‘정신의 세력을 확장’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노예생활을 벗어나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 하라고 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노예생활 주권 노예 생활 노예 일확천금 노예 질투

2022-09-22

신약의 인물탐구- 한 백부장

 오늘 함께 살펴볼 신약의 인물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한 백부장’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태복음 8장5절. ‘백부장’은 ‘헤카톤타르케스’로 수하에 50명~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지휘관입니다. 현대 군대로 말한다면 중대장 정도 되는 계급입니다. 그런 백부장에게 한 하인이 중풍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백부장에게 이 하인이 어떤 하인인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누가복음 7장2절.   ‘사랑하는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종은 둘로스로 단순한 종의 의미를 넘어서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종에 대해서 ‘사랑하는 종’이라는 표현이 사용돼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다’는 ‘엔트모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존경 받는, 고귀한’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인격도, 자유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종, 노예에 대해서 ‘존귀한’, ‘고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백부장이 그의 종, 노예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종이나, 노예가 없지만 업주나, 상사의 위치에 있으면서 직원이나, 팀원을 마치 종이나, 노예를 대하듯, 인격적으로 모욕하며, 함부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노예제도, 종이라는 제도가 있던 당시 상황에서 백부장이 그의 수하에 있는 종을 ‘존귀하다’, ‘고귀하다’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것이며, 백부장의 뛰어난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백부장은 당시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누가복음 7장5절.         유대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다’는 ‘아가파오’로 ‘사랑하다, 마음에 품다, 인격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다’의 의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의 표현으로 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준 지도자였습니다. 밖으로뿐 아니라 자신의 노예에게도 인격적으로 대하며,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노예를 존귀하게 여기면 주인으로 위신이 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지금 종이 중풍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유대인의 장로들이 그를 대신해서 예수께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청을 듣고 종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백부장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 때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누가복음 8장6절,7절.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다’와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감당하다’가 다른 단어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익카노스’로 ‘충분한, 넉넉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감당하다’는 ‘악시오’로 ‘고려할 만하다, 당연하게 생각하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은 성자하나님으로 이 땅에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신데, 그 분이 자신의 삶에 들어오시기에 자신은 죄인이며,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가가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죄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는 의미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인인 상태를 인정함과 함께 그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셨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게 되며, 구원에 대한 예언을 정확하게 표현한 ‘믿음의 고백’입니다.예수님은 백부장의 이런 행동을 보시면서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7장9절. 백부장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믿는 믿음의 삶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또한 그의 생활에서 비록 ‘노예’, ‘종’이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겼습니다.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주여, 주여’하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믿음입니까? 백부장과 같이 ‘이만한 믿음’으로 사는 이 시대의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목회칼럼인물탐구 백부장 종이 중풍병 인격도 자유 당시 노예

2022-08-01

[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아버지와 노예 해방

올해 6월 19일은 “아버지의 날”과 “노예 해방의 날”로 겹경사인 날이다. 아버지의 날이야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정식으로 6월 셋째 일요일을 국가 공휴일로 제정해 오래된 역사가 있지만, 노예 해방의 날은 많은 주에서는 자체적으로 그동안 오랫동안 지켜온 반면 일리노이 주에서는 다소 생소한 날이다. 연방 공휴일로 제정된 것은 작년에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후 6월 17일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러나 나는 작년도에 첫 공휴일인 토요일이 금요일로 대체되었다지만 기억이 별로 없다. 무엇보다 코로나가 극심한 시기로 직장과 상가가 모두 문을 닫고 숨죽이며 살 때라 인생의 맛이 갔을 때였다. 살기 바쁠 때에는 그냥 엎드려 죽는 게 부활이다.   이날은 텍사스 주의 흑인 노예 해방 기념일인 6월 19일 “준틴스”(Juneteenth)가 기원이다. 6월(June)과 19일(nineteenth)을 합쳐 “준틴스”라 불리는 이날은 156년 전 텍사스에 있던 마지막 흑인 노예가 해방된 날이다. Juneteenth는 흔히 합성어로 비문법적이라고 여겨지는 “Black English”(흑인 영어)에 해당하는 단어지만 그대로 굳어져 이제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 Day고 뭐고 그냥 빼버리고 그냥 흑인이 편하게 부르는 날로 정해졌다.     따라서 미국인은 독립기념일을 7월 4일로 기억하지만 많은 흑인은 그들의 독립기념일을 6월 19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미국식답다. 유럽 아니 한국 같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6월 19일은 남북 전쟁 당시 북군 소장인 고든 그레인저가 1865년 이날 군대를 이끌고 텍사스주 갤버스턴에 도착해서 링컨이 이미 1863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는 소식을 전한 날이다.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를 선포한 바람에 노예제 폐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던 농장주들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고 한다. 텍사스주의 흑인들이 노예 해방이 선언된 1월 1일이 아닌 6월 19일을 기념하게 된 기원이다.   그러나 남북 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링컨 대통령의 목적은 서부로의 계속적인 영토 확장에 있었으며 그 지역에는 노예를 허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노예제도는 궁극적으로 미국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북부인들의 생각에 새롭게 확장되는 영토에서도 노예가 허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부 주들은 각자 주가 소유한 노예에 대해 그건 자기네들이 알아서 차차 정치적,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노예를 해방해야 할 도덕적 명분 외에도 실질적인 이유가 생겼다. 남부인들이 자신들이 부리는 노예를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컨은 전쟁 발발 이듬해인 1862년에 1차 경고를 한다. “반란을 멈추지 않으면 내년(1863) 1월 1일을 기점으로 노예를 해방하겠다”라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에 대통령제라는 과격한 민주주의를 실행에 옮긴 미국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미국의 급진적인 제도가 유럽에 퍼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나라가 분열되는 것은 유럽 국가들이 은근히 원하는 결과였다. 하지만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자 이 전쟁은 명목적으로도 노예 해방 전쟁으로 바뀌었고, 그렇게까지 선언했는데 남군을 도우려는 유럽 국가들이 있다면 그 나라들은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게 된다. 그럴 경우 미국 남부의 독립을 돕기 위한 파병은 국내적으로도 큰 정치적인 부담이기 때문에 결국 남군 원조를 포기하였다.   하여튼 이날 아버지와 노예 해방이라는 단어는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어쩐지 연계성이 느껴져 더욱 기쁘기 짝이 없는 날이다.(hanhongki45@gmail.com)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아버지 노예 노예 해방 노예제 폐지 이날 아버지

2022-06-16

20일 은행·관공서 쉰다

한인은행을 포함한 은행과 우체국 등 연방 관공서가 다음주 월요일(20일) 일제히 쉰다.   오는 20일은 지난해 연방공휴일로 지정된 ‘노예해방기념일(준틴스·Juneteenth, 6월 19일)’의 대체 휴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뱅크오브호프, 한미은행, 메트로시티은행, 퍼시픽시티뱅크(PCB), 뉴뱅크, KEB하나은행 등 뉴욕 일원 한인은행 지점들이 일제히 휴무에 돌입한다.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을 포함한 금융시장도 이날은 휴장한다.     우체국과 뉴욕 일원의 주요 관공서도 마찬가지로 일제히 문을 닫는다. 주뉴욕총영사관 역시 “준틴스를 맞아 20일 휴무로, 민원인들께서는 업무에 차질이 없으시도록 당부드린다”고 밝혔다.     6월(June)과 19일(nineteenth)을 합쳐 흔히 ‘준틴스’라 불리는 이날은 미국 땅에 있던 마지막 흑인 노예가 해방된 날이다. 19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2년이 경과한 1865년 6월 19일 남부연합군 소속 텍사스주가 마지막으로 노예해방을 선포한 준틴스가 실질적인 노예 해방일로 인식되고 있다.     준틴스는 텍사스주가 1980년 처음으로 유급휴일로 지정했으며, 현재는 미국 대부분의 주들이 공휴일이나 기념일로 지정해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연방정부는 2021년 6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해당 법안에 서명하면서 준틴스를 12번째 연방 공휴일로 공식 지정했다. 김은별 기자관공서 은행 뉴뱅크 keb하나은행 노예 해방일 한미은행 메트로시티은행

2022-06-15

'노예남매' 피의자 박숙영씨…예상 깨고 최대 6년형 선고

한국에서 입양한 남매를 6년간 학대한 이른바 '노예남매' 사건의 피의자 박숙영(50.사진)씨에게 예상을 깨고 최대 6년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20일 퀸즈 검찰에 따르면 퀸즈형사법원 조셉 자야스 판사는 이날 선고 공판에서 박씨에게 2~6년형을, 그리고 이번 사건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남편 이정택(54)씨에게 5년 보호관찰형을 각각 선고했다. 박씨 부부는 지난 7월 검찰과 형량 협상을 통해 박씨는 6개월 실형에 5년 보호관찰, 이씨는 5개월 보호관찰형을 선고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날 공판에서 자야스 판사는 그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박씨 부부는 지난 7월 노동착취(labor trafficking)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고, 형량협상을 통해 6개월 실형을 받을 예정이었다"며 "판사 역시 박씨 부부가 검찰과 형량협상을 한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지만 양형 결정은 판사의 권한이며, 이날 협상 때보다 엄중한 선고를 내렸다"고 밝혔다. 선고 형량이 높아진 것은 판사가 피의자의 죄질을 나쁘다고 판단했거나 피해자인 남매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형사법 전문 정홍균 변호사는 "검찰이 피의자와 형량협상을 통해 구형하는 양형 수준을 판사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번 사건에서 판사가 그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한 것은 검찰의 구형 정도가 범죄의 죄질보다 낮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며 "특히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 특별피해자로 분류돼 재판 과정에서 더욱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씨 부부는 지난 2010년 한국에서 10대 남매를 입양한 뒤 매일 10시간가량 청소와 가사일, 마사지를 시켰으며 식료품가게에서 일을 시킨 뒤 급여를 가로챈 혐의로 지난해 1월 체포됐었다. 박씨의 변호사는 이날 입장을 묻는 본지의 취재에 "언론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답했다. 신동찬 기자 shin.dongchan@koreadaily.com

201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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