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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남북전쟁의 도화선, 드레드 스콧 재판

사우스캐롤라이나 동부 해안에는 콘데 나스트 트레블러(Conde Nast Traveler)가 뽑은 인구 약 14만여 명의 소도시 찰스턴이 있다. 미식 문화, 다채로운 명소,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 다양한 볼거리와 조용한 즐거움을 안기는 이상적인 여행지로 소문나면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항구이자 군항 도시다. 이곳에 가면 꼭 둘러봐야 할 명소 한 곳이 있는데 Old Slave Market이라는 로만스카 양식의 오래된 건물, 노예 박물관이다. 150여년 전 대서양을 건너온 노예들을 목욕시키고 배불리 먹인 뒤 온몸에 기름까지 바르고 새 옷을 입혀 매대에 진열하면 남부 각지의 농장주나 중간상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감정한 뒤 상품의 가치를 흥정하던 곳이다.
 
1859년 건축 당시 노골적으로 노예를 사고파는 빌딩임을 과시하려 중앙 표지석에 새겨놓은 ‘Mart’라는 단어는 오늘날까지 선명히 남아 있어 관람객들의 마음을 참담케 한다고 한다. 이곳 외에도 워싱턴DC,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 및 NJ 잉글리시 타운 같은 곳이 노예 도소매 시장으로 유명한데 이곳들은 아프리카 출항 당시 가격의 두 배 정도인 인당 400달러에 거래되었고 그 후 최대의 수요처이자 노예 센터로 연간 13만5000명의 노예가 사고 팔린 것으로 알려진 뉴올리언스로 옮겨지면 값이  750달러로 껑충 뛰었다고 하니 노예무역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음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그 거위는 이제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종 되어 어린이는 8달러, 어른들에게는 14달러의 알을 챙기게 하는 수익상품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렇게 특정 백인들의 전유물 같았던 미국의 노예제도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역사적 전기가 찾아온다. 바로 1857년 ‘드레드 스콧 재판’이다.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1858)은 부인과 두 딸을 둔 흑인 가정의 세대주로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군의관 에머슨 박사 소유의 노예였다. 그들 가정은 주인의 근무지를 따라 여러 주로 이주하며 살다 주인이 사망하자 자유인이 되길 원했지만 소유권을 양도받은 에머슨 부인은 합의금이 너무 적다며 거부하였고 이에 스콧은 1846년 변호사 프린시스 머독과 아프리카 침례교회 존 앤더슨 목사의 도움으로 연방법원에 제소, 온 미국사회가 초미의 관심을 갖고 지켜본 세기의 소송이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스콧의 주장을 7:2로 기각한 뒤 “노예는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연방법원에 제소할 권리 자체가 생길 수 없다고 하며 한발 더 나아가 노예제도를 폐지함은 불법이며 정당한 절차 없이 노예주에게 노예를 빼앗을 수 없다”고 판시하면서 미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문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다.
 
결론적이지만 이 판결은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성경 말씀은 물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의 건국 정신에도 반하는 가장 미국답지 않은 판결이 되고 말았다. 판결 후 반응은 사뭇 달랐다. 노예가 필요악이자 헌법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던 남부 지주들은 환호했으나 펜실베이니아주를 비롯하여 이미 노예제도를 불법이라며 해방을 명문화한 동부의 산업주들은 크게 실망하면서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음은 불문가지였다.
 


결국 이 재판이 도화선이 되어 북남은 결코 함께하기에 먼 당신이 되어갔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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