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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잃어버린 이상이 부른 남북전쟁

남북전쟁은 스콧 재판 4년 뒤인 1861년 4월 12일 0시 30분, 남부연맹이 찰스턴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면서 시작, 1865년 4월 9일 남군 리 총사령관이 버지니아 애퍼매톡스(Appomattox)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공식 종결되었다. 결과는 62만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20~45세 북부 남성 10%, 18~40세 남부 백인 30%가 사망하는 미 역사상 미국민이 가장 많이 죽은 참혹한 내전이었다.   남부의 면화주들이 내전을 일으킨 결정적 계기는 1860년 4월 5일 대선에서 링컨이 단 1명의 남부주 선거인단 확보 없이도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 데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필두로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였고 이어 1776년 대륙회의 때처럼 각주 대표들이 모여 아메리카 남부연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하였다. 그런 뒤 1861년 2월 4일에 제퍼슨 데이비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앨라배마의 몽고메리를 수도로 정하였다. 이어 버지니아(웨스트버지니아 제외),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가 합세 11개 주가 되었으나 경계 주인 웨스트버지니아,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는 그대로 연방에 잔류하였다.   어렵게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 취임도 하기 전 내전을 지휘해야 하는 딜레마였지만 ‘갈라진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 ‘대통령으로 노예제에 대해 간섭할 헌법적인 이유도 생각도 없다’는 당근과 함께 연방 탈퇴행위는 ‘반란’으로 불응 시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채찍도 취임사에 담았다. 그러나 남부는 자국 내 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중요 요새와 병기창을 무력 점령하였고 심지어 조폐국 창고에 있던 금을 탈취하는가 하면 친 연방 정치인들을 폭력으로 쫓아내는 등 일전불사의 길로 치달았다.   남부 백인이 바라봤던 연방에 대한 시각은 특이했던 것 같다. 그들은 ‘잃어버린 이상(Lost Cause)’ 즉 가난한 하층 백인이지만 신대륙에서 땀 흘려 일하면 언젠가 노예를 마음껏 부리는 귀족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을 불리한 관세를 부과하거나 각주에 부여된 고유 권한과 자유를 연방이 침해하므로 그들의 선한 ‘이상’이 깨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컬럼비아대학을 중심으로 한친남부학자들 또한 남북전쟁은 남부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각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위해 연방정부가 시작한 전쟁이라고 정의한다고 하니 혼란스럽다.   따라서 남북전쟁을 단순히 노예 문제의 이해관계 충돌로 해석함은 무리다. 여기에는 남북 간의 다른 상황을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부추긴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노림도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시 노예 1인의 가격은 800~1000달러에 달할 정도로 비싸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소유한 부호가 아니면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실제로 5% 미만의 백인이 이에 해당했다. 그 외 80%의 중소규모 농장주들은 노예를 부린 적도 부릴 형편도 못 되었다. 그런데 노예 폐지에 앞장서거나 남북전쟁에 목숨 건 부류는 이들이었다. 이유는 아무리 못나고 가난한 백인이라도 영혼 없는 검xx 보다 우월하다고 세뇌되어 왔기 때문이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남북전쟁 웨스트버지니아 제외 아메리카 남부연맹 남부 백인

2023-05-26

[살며 생각하며] 남북전쟁의 도화선, 드레드 스콧 재판

사우스캐롤라이나 동부 해안에는 콘데 나스트 트레블러(Conde Nast Traveler)가 뽑은 인구 약 14만여 명의 소도시 찰스턴이 있다. 미식 문화, 다채로운 명소,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 다양한 볼거리와 조용한 즐거움을 안기는 이상적인 여행지로 소문나면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항구이자 군항 도시다. 이곳에 가면 꼭 둘러봐야 할 명소 한 곳이 있는데 Old Slave Market이라는 로만스카 양식의 오래된 건물, 노예 박물관이다. 150여년 전 대서양을 건너온 노예들을 목욕시키고 배불리 먹인 뒤 온몸에 기름까지 바르고 새 옷을 입혀 매대에 진열하면 남부 각지의 농장주나 중간상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감정한 뒤 상품의 가치를 흥정하던 곳이다.   1859년 건축 당시 노골적으로 노예를 사고파는 빌딩임을 과시하려 중앙 표지석에 새겨놓은 ‘Mart’라는 단어는 오늘날까지 선명히 남아 있어 관람객들의 마음을 참담케 한다고 한다. 이곳 외에도 워싱턴DC,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 및 NJ 잉글리시 타운 같은 곳이 노예 도소매 시장으로 유명한데 이곳들은 아프리카 출항 당시 가격의 두 배 정도인 인당 400달러에 거래되었고 그 후 최대의 수요처이자 노예 센터로 연간 13만5000명의 노예가 사고 팔린 것으로 알려진 뉴올리언스로 옮겨지면 값이  750달러로 껑충 뛰었다고 하니 노예무역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음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그 거위는 이제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종 되어 어린이는 8달러, 어른들에게는 14달러의 알을 챙기게 하는 수익상품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렇게 특정 백인들의 전유물 같았던 미국의 노예제도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역사적 전기가 찾아온다. 바로 1857년 ‘드레드 스콧 재판’이다.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1858)은 부인과 두 딸을 둔 흑인 가정의 세대주로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군의관 에머슨 박사 소유의 노예였다. 그들 가정은 주인의 근무지를 따라 여러 주로 이주하며 살다 주인이 사망하자 자유인이 되길 원했지만 소유권을 양도받은 에머슨 부인은 합의금이 너무 적다며 거부하였고 이에 스콧은 1846년 변호사 프린시스 머독과 아프리카 침례교회 존 앤더슨 목사의 도움으로 연방법원에 제소, 온 미국사회가 초미의 관심을 갖고 지켜본 세기의 소송이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스콧의 주장을 7:2로 기각한 뒤 “노예는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연방법원에 제소할 권리 자체가 생길 수 없다고 하며 한발 더 나아가 노예제도를 폐지함은 불법이며 정당한 절차 없이 노예주에게 노예를 빼앗을 수 없다”고 판시하면서 미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문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다.   결론적이지만 이 판결은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성경 말씀은 물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의 건국 정신에도 반하는 가장 미국답지 않은 판결이 되고 말았다. 판결 후 반응은 사뭇 달랐다. 노예가 필요악이자 헌법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던 남부 지주들은 환호했으나 펜실베이니아주를 비롯하여 이미 노예제도를 불법이라며 해방을 명문화한 동부의 산업주들은 크게 실망하면서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음은 불문가지였다.   결국 이 재판이 도화선이 되어 북남은 결코 함께하기에 먼 당신이 되어갔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남북전쟁 도화선 드레드 스콧 수요처이자 노예 건물 노예

2023-05-12

[수필] 링컨을 생각하며

 “에이브러햄 링컨은 사람을 사랑한 인격자다 이전에 원한이 있는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용서와 화해를 하는 위대한 정치가였다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정치에서 실현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켄터키 호젠빌에서 태어났다. 1865년 4월 14일 성공회 신도인 존 윌크스 부스 일당에게 포드 극장에서 총격을 당한 지 하루 만인 4월 15일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남북전쟁을 끝내고 며칠 후에 숨을 거뒀다.   링컨은 20세 이후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결혼도 하고 변호사 개업도 했다. 그가 생전 이룬 업적은 모두가 잘 아는 바다. 남북전쟁을 통해 연방을 유지했고 남부의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통일된 한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링컨은 집안이 가난해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모두 1년여 정도 학교 공부를 했고 그는 독서광이어서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3년 동안 머리 싸매고 공부했다. 특히 그는 마크 트웨인을 좋아해서 그의 소설을 많이 읽었고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시도 탐독을 했다. 어머니가 9살 때 세상을 뜨면서 성경책을 물려주었는데 성경을 늘 읽으면서 인생의 모든 해답이 성경 속에 들어 있다고 했다.   미국 남북전쟁(1861-65)이 진행되고 있던 1863년 11월 19일, 링컨은 전쟁의 전환점이 된 혈전지 게티즈버그(펜실베이니아주)를 방문하고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석했다. 그 식전에서 불과 2분간의 짧은 연설을 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다.   그는 마지막 부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곳에 에이브러햄 링컨의 숨겨진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가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 이면에 어떤 일화가 있었을까.       일리노이주에서 애송이 변호사로 일할 때였다. 에드윈 스탠턴이란 유명한 변호사와 함께 사건을 맡게 되었다. 링컨에게는 변호사에 대한 공부를 할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래서 무척 좋아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 유명한 스탠턴에게 많을 것을 배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링컨 혼자의 생각이었다.     스탠턴은 은근히 화가 났다. “저런 촌뜨기 애송이와 어떻게 일을 함께 하란 말인가. 난 못합니다.” 스탠턴은 큰소리치며 법정 밖으로 휭 나가 버렸다. 마음이 들떠 있던 링컨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몹시 당황했다. 그런 모독은 세상 나고 처음이었다.     그 후 링컨은 미국의 대통령이 됐고 전쟁 장관(secretary of war)을 누굴 택할까 고민하다 스탠턴을 신임 전쟁 장관에 임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참모들은 깜짝 놀랐다. “대통령님, 몇 년 전 그 일을 잊으셨습니까? 스탠턴의 무례한 행동을 벌써 잊은 것은 아니시지요?”   참모들이 일제히 임명 반대를 하고 나서자 링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수백 번 무시 당해도 좋아요. 다만 그 사람이 전쟁 장관이 되어 우리 국방을 튼튼히 하고 임무 수행을 잘 하기만 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소? 더욱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국정을 잘 수행해 나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 내 편을 만드는 것이요. 안 그렇소?”   참모들은 링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며 스탠턴도 있는 힘을 다해 링컨을 도와 나랏일을 열심히 했다.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정의라는 것은 널리 사랑을 가지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다듬어진 인격의 만남을 통해 사랑과 정의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우정 관계는 돈독해져서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스탠턴을 전쟁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링컨이 암살 당할 때도 임종을 지켜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지금 모든 시대에 속합니다(Now he belongs to the ages).”   링컨 대통령은 사람을 사랑한 인격자였다. 비록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용서와 포용하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가였다. 우리나라에도 새 대통령이 당선되고 참모진도 뽑았다고 한다. 적수와 같았던 상대방이라 해도 신뢰할 만한 인격과 능력을 갖추고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정치가라면 기꺼이 등용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협력의 정치를 펼쳐주기를 새 대통령 당선인에게 간곡히 바란다.  김수영 / 수필가수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 혼자 남북전쟁 당시

2022-03-17

[남북전쟁 발발 150주기 기획] 1865년 4월 그날 밤에는 무슨 일이…

1주 전 암살당하는 꿈꿔…모세 잃은 흑인들 슬픔에 포드극장 1960년대 부활…박물관겸 공연장으로 “부은 손으로 서명을 하다 서명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훗날 사람들이 내가 어디에 사인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비난할 겁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정부를 외친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 2.12~1865. 4.15)이다. 그로부터 145년 뒤 미국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켰고, 이달은 노예제가 폐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남북전쟁 발발 150주기를 맞았다. 링컨 대통령의 사망 146주기가 되던 지난 15일. 기자는 링컨이 암살된 날의 배경과 그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책 ‘그들이 파파를 죽였다(They have killed papa dead)’의 저자 앤소니 피치(Anthony S. Pitch)를 백악관 정문 앞에 있는 라파옛 공원에서 만났다. 프레스센터가 마련한 이날 자리에서 그는 3시간 이상 DC곳곳을 돌아다니며 링컨 대통령을 둘러싼 사건들의 숨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줬다.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링컨이 남부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유명 배우였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1838.5.10~1865.4.26)가 쏜 총에 맞은 1865년 4월 14일 전후 이야기들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했다. ▷암살 6주전 백악관의 운영비용을 담당했던 벤자민 브라운 프렌치는 의회 상원 건물에서 훤칠한 젊은 남자가 군중 속에서 몇 피트 앞에 있던 링컨 대통령쪽을 향해 뛰쳐나오는 것을 봤다. 빛나는 잿빛 머리칼에 가려진 그의 눈은 매서웠다. 프렌치는 재빨리 그를 멈춰 세웠다. 그를 붙잡긴 했지만 법을 어긴 게 없었기 때문에 심문할 수는 없었다. ‘신참 의원일 수도 있겠구나’싶어 잡았던 그의 팔을 놓아 주었다. 그가 놓아 준 이 사내는 6주 뒤 링컨의 머리에 총을 쏜 존 윌크스 부스였다. ▷암살 1주전 간밤에 링컨 대통령은 이상한 꿈을 꿨다. 2층에서 자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사람들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밑에 내려가봤다. 오른쪽 끝에 있는 방에 가보니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울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죽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누가 죽었습니까?”링컨은 물었다. “대통령이요. 대통령이 죽었습니다! 암살당했어요!” ▷암살 4일전 1865년 4월 11일. 백악관 2층 창가에 선 링컨은 창문 밑 잔디밭에 구름처럼 모여있는 군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군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남부 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이 항복한 지 약 48시간이 흐른 뒤였다. 4년간 62만 명의 군인이 희생된 내전이 드디어 끝나가고 있었다. 링컨은 이미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흑인도 동등하게 투표권을 가져야 합니다.”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미국 역사상 첫 번째 선언이었다. 한편 이 군중 속에는 부스도 있었다. 남부인들이 겪는 고통을 모두 링컨 탓으로 돌리며 그를 증오했던 부스와 그의 일당은 그날 라파옛 공원에서 음모를 꾸몄다. 격분에 찬 목소리로 부스는 말했다. “오늘 연설이 링컨의 마지막 연설이 될 거다.” ▷1865년 4월 14일 오후 8시 30분쯤 링컨 대통령과 영부인 메리 토드 여사는 포드극장에 도착했다. 27세의 헨리 라스본 소령과 약혼녀 클라라 해리스가 동행했다. 미국 최고의 비극 배우로 평가 받고 있는 에드윈 부스가 연기하는 ‘우리의 미국인 친척’ 공연이 이미 시작된 터였다. 대통령 일행이 무대 오른쪽 2층 난관의 귀빈석에 들어서자 배우들은 잠시 연기를 멈추고 그에게 짧게 목례를 하며 예를 표했다. 오후 10시 13분. 1600명의 관객들이 한창 공연을 보고 있을 때 부스가 귀빈석으로 들어와 링컨의 뒷머리에 총을 겨눴다. ‘탕!’ 공연장은 갑자기 혼란과 공포의 장으로 바뀌었다. 라스본 소령은 대통령에게 총을 쏜 부스에게 달려들었다. 총을 떨어뜨린 부스가 칼을 꺼내들어 라스본 소령의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베었다. 부스는 12피트 떨어진 무대로 뛰어 내렸다. 오른 다리 뼈가 부러졌지만 광기 어린 그는 개의치 않았다. 손에 쥔 칼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영원한 폭군이여! 남부는 복수했다!” 뒷문으로 빠져 나온 그는 준비해 놓은 말을 타고 도주했다. ▷총에 맞은 링컨 가장 먼저 링컨의 관람석으로 들어온 의사는 불과 6주전 뉴욕에서 의대 과정을 마친 릴 박사였다. 미국 수장의 운명이 신참 의사의 손에 달리게 된 것이다. 영부인 링컨 여사는 의식을 잃은 남편 옆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몇 분 후 태프트 박사도 합류했다. “백악관까지 길이 울퉁불퉁해서 옮기다가 대통령이 죽을 수 있습니다. 가까운 민가로 옮깁시다.” 링컨 대통령을 옮긴 곳은 포드극장 건너편에 있는 허름한 군인용 임대주택이었다. 작고 낡은 방에 놓여있는 침대는 6피트 키의 링컨의 발이 나올 만큼 작았다. 링컨의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태프트 박사는 릴 박사의 응급 조치가 없었더라면 링컨 대통령이 10분도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머리에서 나오는 피는 의사들의 가운을 빨갛게 적셨다. 지켜보던 영부인은 기절하고 말았다. ▷그날 밤 같은 시간 그날 암살 타깃은 링컨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부스 일당은 앤드류 존슨 (Andrew Johnson 1808.12.29~1875.7.31)부통령과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1801.5.16~1872.10.10)국무장관을 없애면 연방정부가 무너지고 남부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날 국무장관의 암살 임무는 근육질에다 덩치가 컸던 루이스 페인이었다. 1주일 전 마차사고로 중상을 입은 수어드 장관의 주택은 백악관 앞 라파옛 공원 옆에 있는 4층 벽돌집이었다. 페인은 의사가 보낸 약 배달원을 가장했다. “약만 주시고 돌아가시죠. 아버지께서는 주무십니다.” 아들 프레드릭이 그를 저지했다. 수어드 장관의 옆은 28세인 딸 페니가 지키고 있었다. 돌아서는 척 하던 페인은 몸을 돌려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불발이었다. 총으로 프레드릭의 얼굴을 힘껏 내리쳐 기절시킨 페인은 수어드의 딸 페니마저 밀쳐내고 누워있던 수어드 장관의 양쪽 목을 칼로 깊게 찌르고 도주했다. ▷“그들이 파파를 죽였다!” 1965년 4월 15일 오전 7시 22분. 링컨 대통령이 총에 맞은 지 9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향년 56세.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게 자란 그는 호화로운 백악관이 아닌 허름한 임대주택에서 역사의 품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4시간 30분 뒤 성조기에 싸인 링컨의 시신을 장교들이 예를 갖추고 백악관으로 옮겼다. 여기저기서 통곡소리가 나왔고 교회들은 종을 울렸다. 링컨의 어린 아들 테드(12)가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백악관 2층으로 달려들어갔다. 문지기가 소리쳤다. “그들이 파파를 죽였다!” 백악관 2층의 맨 오른쪽 끝 방에서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링컨 대통령의 부검이 시작됐다. 지금은 대통령의 다이닝 룸으로 사용되는 이 방이 당시에는 주요 손님방이었다. 링컨의 머리를 절개한 의사가 링컨의 뇌를 꺼냈다. ‘쨍그랑’ 차이나 도자기 쟁반위로 새끼 손가락 첫 마디보다 작은 총알이 떨어졌다. “총알이 뇌에 박혀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9시간을 버티다니, 링컨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죽음에 온 나라는 슬픔에 빠졌다. 슬픔은 여기저기서 폭력으로 표출됐다. 충격에 빠진 링컨 여사는 장례식에도 불참하고 5주 동안 백악관의 어두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특히 흑인들의 슬픔도 컸다. 그들의 모세(13세기 이집트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탈출시킨 지도자)를 잃었으니까. ▷허술했던 보안체계 링컨 대통령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비밀요원이 없었다. 이들의 임무라고는 위조수표 발행범을 잡아내는 일이 전부였다. 일례로 링컨 대통령은 어느 날 아침 백악관 정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침 유명한 정치 기자 노아 브룩스가 백악관 앞에 서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신문 배달원을 봤나요?” “예, 대통령님. 저기 코너를 돌아가시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서거 후 그의 책상 서랍에는 '암살'이라고 적힌 서류 봉투가 발견됐다. 그 안에는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들이 있었다. 항상 위협이 있었지만 그는 아무일 없듯이 살았던 것이다. ▷링컨 대통령 서거 후 링컨 대통령의 서거 3일 뒤.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수어드 국무장관의 암살 기도범 페인이 체포됐다. 교수형에 처해진 그는 목이 매달린 채 7분을 버텨 주변을 놀래 키기도 했다. 12일 뒤 링컨을 죽인 부스는 버지니아의 한 농장 담배창고에서 연방군인 쏜 총이 목을 관통해 최후를 맞았다. 숨이 붙어 있던 마지막 몇 시간, 그는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에게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전해달라.” 죽는 그 순간까지 링컨을 암살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한편 수어드 장관은 공격을 당한 뒤에도 7년을 더 살았다. 눈앞에서 링컨 대통령의 암살을 목격한 라즈본 소령은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우울증에 빠졌다. 클라라와 결혼한 그가 외교관으로 독일에 머물던 어느 날. 정신이 정상이 아니었던 그는 아내를 총으로 살인,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28년을 지내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링컨 대통령이 총을 맞은 장소였던 포드극장은 그 후 100년 동안 문을 닫았다. 일국의 수장이 암살 당한 장소에서 더 이상의 공연은 불가능했다. 정부 건물로 전환됐던 이 극장이 다시 옛 모습으로 부활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현재는 링컨 시절과 그대로 재연해 박물관 겸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미국의 대통령들은 이곳을 방문하지만 그 누구도 링컨 대통령의 좌석이 있는 귀빈석에는 들어갈 수 없다. 링컨이 숨을 거둔 임대 주택은 현재 보수 공사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수시간 동안 작가 피치와의 동행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함과 현장감이 넘쳤다. 피치는 “링컨 대통령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해와 포용, 지혜 정의감, 유머 등 존경 받을 만한 면모를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난했고 배우지도 못했고 독학으로 변호사가 됐지만 여전히 2류였던 그가 미국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그는 우리의 유산입니다.” 이성은 기자

2011-04-26

남북전쟁 발발 150주기 기획…링컨 암살현장을 가다

“링컨의 죽음에 대한 책은 많지요. 사실만 건조하게 전달할 뿐 이 비극이 얼마나 슬펐는지 표현한 책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슬픈 일 중에 하나인데도요…” 9년 동안 자료 수집해…9·11보다 더 공포스러워 링컨 동상 편 손은 사랑…주먹 쥔 손은 통일 의지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서거 146주년이 되는 지난 15일. ‘그들이 파파를 죽였다(They have killed Papa dead)’의 저자인 앤소니 피치(Anthony S. Pitch)를 백악관 앞 라파옛 공원에서 만났다. ‘불타는 워싱턴: 1814년 영국의 침략’ 등 다수의 미국 역사서를 쓴 그는 3년 전 이 책이 탄생하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을 자료 수집에 보낸 '링컨 전문가'다. “당시 링컨의 목소리는 어땠는지, 주변인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궁금했죠. 링컨의 죽음과 관련해 당시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에 대한 묘사는 교과서에도 없잖아요.” 처음 책을 쓴다고 했을 때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학자들이 비웃었죠. 더 이상 뭐를 더 쓸 수 있겠냐고요.” 의회 도서관 등에서 관련인들의 일기장부터 편지, 기사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수집했다. 자료를 수집할수록 백과사전 같던 링컨의 이야기는 감정과 감성이 풍부한 한 편의 영화처럼 퍼즐이 맞춰졌다. “링컨 측근이었던 벤자민 프렌치는 심지어 음모자들이 교수형을 당할 때 각 사람의 어깨에 점프하고 싶다고 일기에 적었어요. 그 만큼 링컨의 죽음에 분개한 거죠.” 책 제목도 그가 수집한 문구에서 나왔고 시카고 트리뷴은 그 해 최고의 책 제목으로 이 책을 선정했다. “링컨 대통령과 함께 죽을 뻔 했던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의 딸 페니는 매일 일기를 쓰던 사람이었어요. 작문 실력도 뛰어났죠. 페니의 일기장을 인용해 책을 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놀라웠죠.” 링컨 대통령이 총에 맞은 포드극장 귀빈석에도 책을 쓰는 ‘특권’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그 자리에는 현직 대통령도 못 들어가요. 항상 1층 오케스트라 레벨에 앉아야 되죠. 링컨 대통령 자리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니 12피트가 아니라 20피트는 되는 것처럼 높았어요.” 피치는 “존 윌크스 부스가 1600명의 관객이 있는 극장에서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쏘고 이 높이를 뛰어내렸는지, 그리고 무대에서 대통령을 죽였다고 큰 소리로 자랑할 수 있었는지는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전기도 없고 TV도 없던 시절이에요. 911테러보다도 더 공포스러웠던 사건이죠.” 그는 기자에게 링컨 기념관에 가봤냐고 물었다. “링컨의 동상을 보면 오른손은 펴져 있고 왼손은 쥐고 있어요. 편 손은 링컨의 인내와 용서, 사랑,동정심 등 따뜻한 내면을 표현했고 주먹 쥔 손은 양분된 미국을 통일시키겠다는 그의 결단력과 의지의 상징입니다.” 이성은 기자

201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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