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발발 150주기 기획] 1865년 4월 그날 밤에는 무슨 일이…
앤소니 피치가 말하는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
'미 지도자 된 2류' 그에겐 항상 암살 위협이…
링컨 숨 거둔 임대주택은 아직도 공개 안해
포드극장 1960년대 부활…박물관겸 공연장으로
“부은 손으로 서명을 하다 서명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훗날 사람들이 내가 어디에 사인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비난할 겁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정부를 외친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 2.12~1865. 4.15)이다.
그로부터 145년 뒤 미국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켰고, 이달은 노예제가 폐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남북전쟁 발발 150주기를 맞았다.
링컨 대통령의 사망 146주기가 되던 지난 15일. 기자는 링컨이 암살된 날의 배경과 그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책 ‘그들이 파파를 죽였다(They have killed papa dead)’의 저자 앤소니 피치(Anthony S. Pitch)를 백악관 정문 앞에 있는 라파옛 공원에서 만났다.
프레스센터가 마련한 이날 자리에서 그는 3시간 이상 DC곳곳을 돌아다니며 링컨 대통령을 둘러싼 사건들의 숨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줬다.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링컨이 남부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유명 배우였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1838.5.10~1865.4.26)가 쏜 총에 맞은 1865년 4월 14일 전후 이야기들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했다.
▷암살 6주전
백악관의 운영비용을 담당했던 벤자민 브라운 프렌치는 의회 상원 건물에서 훤칠한 젊은 남자가 군중 속에서 몇 피트 앞에 있던 링컨 대통령쪽을 향해 뛰쳐나오는 것을 봤다. 빛나는 잿빛 머리칼에 가려진 그의 눈은 매서웠다.
프렌치는 재빨리 그를 멈춰 세웠다. 그를 붙잡긴 했지만 법을 어긴 게 없었기 때문에 심문할 수는 없었다. ‘신참 의원일 수도 있겠구나’싶어 잡았던 그의 팔을 놓아 주었다.
그가 놓아 준 이 사내는 6주 뒤 링컨의 머리에 총을 쏜 존 윌크스 부스였다.
▷암살 1주전
간밤에 링컨 대통령은 이상한 꿈을 꿨다. 2층에서 자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사람들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밑에 내려가봤다. 오른쪽 끝에 있는 방에 가보니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울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죽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누가 죽었습니까?”링컨은 물었다.
“대통령이요. 대통령이 죽었습니다! 암살당했어요!”
▷암살 4일전
1865년 4월 11일. 백악관 2층 창가에 선 링컨은 창문 밑 잔디밭에 구름처럼 모여있는 군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군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남부 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이 항복한 지 약 48시간이 흐른 뒤였다.
4년간 62만 명의 군인이 희생된 내전이 드디어 끝나가고 있었다. 링컨은 이미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흑인도 동등하게 투표권을 가져야 합니다.”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미국 역사상 첫 번째 선언이었다.
한편 이 군중 속에는 부스도 있었다. 남부인들이 겪는 고통을 모두 링컨 탓으로 돌리며 그를 증오했던 부스와 그의 일당은 그날 라파옛 공원에서 음모를 꾸몄다.
격분에 찬 목소리로 부스는 말했다.
“오늘 연설이 링컨의 마지막 연설이 될 거다.”
▷1865년 4월 14일
오후 8시 30분쯤 링컨 대통령과 영부인 메리 토드 여사는 포드극장에 도착했다. 27세의 헨리 라스본 소령과 약혼녀 클라라 해리스가 동행했다. 미국 최고의 비극 배우로 평가 받고 있는 에드윈 부스가 연기하는 ‘우리의 미국인 친척’ 공연이 이미 시작된 터였다.
대통령 일행이 무대 오른쪽 2층 난관의 귀빈석에 들어서자 배우들은 잠시 연기를 멈추고 그에게 짧게 목례를 하며 예를 표했다. 오후 10시 13분. 1600명의 관객들이 한창 공연을 보고 있을 때 부스가 귀빈석으로 들어와 링컨의 뒷머리에 총을 겨눴다.
‘탕!’
공연장은 갑자기 혼란과 공포의 장으로 바뀌었다. 라스본 소령은 대통령에게 총을 쏜 부스에게 달려들었다. 총을 떨어뜨린 부스가 칼을 꺼내들어 라스본 소령의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베었다. 부스는 12피트 떨어진 무대로 뛰어 내렸다. 오른 다리 뼈가 부러졌지만 광기 어린 그는 개의치 않았다. 손에 쥔 칼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영원한 폭군이여! 남부는 복수했다!”
뒷문으로 빠져 나온 그는 준비해 놓은 말을 타고 도주했다.
▷총에 맞은 링컨
가장 먼저 링컨의 관람석으로 들어온 의사는 불과 6주전 뉴욕에서 의대 과정을 마친 릴 박사였다.
미국 수장의 운명이 신참 의사의 손에 달리게 된 것이다.
영부인 링컨 여사는 의식을 잃은 남편 옆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몇 분 후 태프트 박사도 합류했다.
“백악관까지 길이 울퉁불퉁해서 옮기다가 대통령이 죽을 수 있습니다. 가까운 민가로 옮깁시다.”
링컨 대통령을 옮긴 곳은 포드극장 건너편에 있는 허름한 군인용 임대주택이었다.
작고 낡은 방에 놓여있는 침대는 6피트 키의 링컨의 발이 나올 만큼 작았다.
링컨의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태프트 박사는 릴 박사의 응급 조치가 없었더라면 링컨 대통령이 10분도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머리에서 나오는 피는 의사들의 가운을 빨갛게 적셨다. 지켜보던 영부인은 기절하고 말았다.
▷그날 밤 같은 시간
그날 암살 타깃은 링컨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부스 일당은 앤드류 존슨 (Andrew Johnson 1808.12.29~1875.7.31)부통령과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1801.5.16~1872.10.10)국무장관을 없애면 연방정부가 무너지고 남부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날 국무장관의 암살 임무는 근육질에다 덩치가 컸던 루이스 페인이었다.
1주일 전 마차사고로 중상을 입은 수어드 장관의 주택은 백악관 앞 라파옛 공원 옆에 있는 4층 벽돌집이었다.
페인은 의사가 보낸 약 배달원을 가장했다.
“약만 주시고 돌아가시죠. 아버지께서는 주무십니다.”
아들 프레드릭이 그를 저지했다.
수어드 장관의 옆은 28세인 딸 페니가 지키고 있었다.
돌아서는 척 하던 페인은 몸을 돌려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불발이었다. 총으로 프레드릭의 얼굴을 힘껏 내리쳐 기절시킨 페인은 수어드의 딸 페니마저 밀쳐내고 누워있던 수어드 장관의 양쪽 목을 칼로 깊게 찌르고 도주했다.
▷“그들이 파파를 죽였다!”
1965년 4월 15일 오전 7시 22분. 링컨 대통령이 총에 맞은 지 9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향년 56세.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게 자란 그는 호화로운 백악관이 아닌 허름한 임대주택에서 역사의 품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4시간 30분 뒤 성조기에 싸인 링컨의 시신을 장교들이 예를 갖추고 백악관으로 옮겼다. 여기저기서 통곡소리가 나왔고 교회들은 종을 울렸다.
링컨의 어린 아들 테드(12)가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백악관 2층으로 달려들어갔다.
문지기가 소리쳤다. “그들이 파파를 죽였다!”
백악관 2층의 맨 오른쪽 끝 방에서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링컨 대통령의 부검이 시작됐다.
지금은 대통령의 다이닝 룸으로 사용되는 이 방이 당시에는 주요 손님방이었다.
링컨의 머리를 절개한 의사가 링컨의 뇌를 꺼냈다.
‘쨍그랑’
차이나 도자기 쟁반위로 새끼 손가락 첫 마디보다 작은 총알이 떨어졌다.
“총알이 뇌에 박혀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9시간을 버티다니, 링컨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죽음에 온 나라는 슬픔에 빠졌다. 슬픔은 여기저기서 폭력으로 표출됐다. 충격에 빠진 링컨 여사는 장례식에도 불참하고 5주 동안 백악관의 어두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특히 흑인들의 슬픔도 컸다. 그들의 모세(13세기 이집트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탈출시킨 지도자)를 잃었으니까.
▷허술했던 보안체계
링컨 대통령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비밀요원이 없었다. 이들의 임무라고는 위조수표 발행범을 잡아내는 일이 전부였다.
일례로 링컨 대통령은 어느 날 아침 백악관 정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침 유명한 정치 기자 노아 브룩스가 백악관 앞에 서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신문 배달원을 봤나요?”
“예, 대통령님. 저기 코너를 돌아가시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서거 후 그의 책상 서랍에는 '암살'이라고 적힌 서류 봉투가 발견됐다. 그 안에는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들이 있었다. 항상 위협이 있었지만 그는 아무일 없듯이 살았던 것이다.
▷링컨 대통령 서거 후
링컨 대통령의 서거 3일 뒤.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수어드 국무장관의 암살 기도범 페인이 체포됐다. 교수형에 처해진 그는 목이 매달린 채 7분을 버텨 주변을 놀래 키기도 했다.
12일 뒤 링컨을 죽인 부스는 버지니아의 한 농장 담배창고에서 연방군인 쏜 총이 목을 관통해 최후를 맞았다. 숨이 붙어 있던 마지막 몇 시간, 그는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에게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전해달라.” 죽는 그 순간까지 링컨을 암살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한편 수어드 장관은 공격을 당한 뒤에도 7년을 더 살았다.
눈앞에서 링컨 대통령의 암살을 목격한 라즈본 소령은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우울증에 빠졌다.
클라라와 결혼한 그가 외교관으로 독일에 머물던 어느 날. 정신이 정상이 아니었던 그는 아내를 총으로 살인,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28년을 지내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링컨 대통령이 총을 맞은 장소였던 포드극장은 그 후 100년 동안 문을 닫았다. 일국의 수장이 암살 당한 장소에서 더 이상의 공연은 불가능했다. 정부 건물로 전환됐던 이 극장이 다시 옛 모습으로 부활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현재는 링컨 시절과 그대로 재연해 박물관 겸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미국의 대통령들은 이곳을 방문하지만 그 누구도 링컨 대통령의 좌석이 있는 귀빈석에는 들어갈 수 없다.
링컨이 숨을 거둔 임대 주택은 현재 보수 공사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수시간 동안 작가 피치와의 동행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함과 현장감이 넘쳤다.
피치는 “링컨 대통령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해와 포용, 지혜 정의감, 유머 등 존경 받을 만한 면모를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난했고 배우지도 못했고 독학으로 변호사가 됐지만 여전히 2류였던 그가 미국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그는 우리의 유산입니다.”
이성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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