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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고 김영옥 대령 ‘한미동맹상’ 수상 의미

고 김영옥 대령이 ‘제11회 백선엽 한미동맹상’을 수상했다.  ‘한미동맹상’은 한국 국방부가 주관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상으로 한미 관계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에게 주어진다. 국방부는 “고 김영옥 대령이 보여준 뛰어난 용맹과 애국심, 인간애는 양국 국민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미동맹상’은 10년 전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첫 수상자인 6·25 전쟁 영웅 고 월튼 워커 예비역 대장을 비롯해 지난해 댄 설리번 연방상원의원까지 역대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권위가 있는 상이다.     고 김영옥 대령은 첫 한인 수상자라 의미가 크다. 따라서 이번 수상은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LA에서 출생한 고 김영옥 대령은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에 참전,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일본계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맡아 리더십을 인정받았고, 6·25 발발 소식이 들리자 자진 재입대 참전했다. 이런 공로로 미국에서 수훈십자장,은성무공훈장 등을 한국에서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미주 한인 사회의 영웅이기도 하다. 한인 사회의 명예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한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등 비영리 단체들을 설립해 한인 권익 향상에도 기여했다. 그의 이런 헌신은 한인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LA한인타운에 김영옥 중학교가 생기고, UC리버사이드에 김영옥 연구소가 설립된 것도 이런 그의 공로를 기억하고 차세대에게 전하기 위함이다.  지난 5월에는 미 육군 명예의 전당에 헌액돼 미 육군의 역사를 빛낸 위대한 군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현재 연방의회에는 그에게 연방의회 금메달을 수여하자는 법안이 상정되어 있다. 한인 연방 의원들이 중심이 돼 추진하는 것이다.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한인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사설 한미동맹상 김영옥 김영옥 대령 백선엽 한미동맹상 김영옥 중학교

2023-11-15

[중앙시론] ‘명예의 전당’에 간 고 김영옥 대령

지난 5월 16일 필자는 캔자스시티의 포트 레번워스(Fort Leavenworth)에서 열린 고 김영옥 대령의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다녀왔다. 미 육군의 공식 초청을 받은 자리였다. 이에 앞서 김 대령은 지난 4월 그가 장교 훈련을 받았던 조지아주 포트 무어(Fort Moore)의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명예의 전당은 특정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존경받는 인물을 기념하는 곳이다. 김 대령이 두 곳의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한인사회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고 김영옥 대령’은 더 친숙한 이름이 되고 있다. 지난 2018년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부에나파크 근처의 5번 프리웨이 구간을 ‘김영옥 메모리얼 하이웨이’로 명명했고, 평택의 미군 기지내 예비군 훈련 빌딩도 ‘김영옥 빌딩’이 됐다. 2009년 LA통합교육구는 한인타운 6가와 버몬트에 신설된 중학교를 ‘김영옥 중학교’로 명명하기도 했다.     필자는 2010년 UC 리버사이드에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를 정식 개소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의 강제노역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위해 미국 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정에 제출할 자료 수집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USC에서 연구 기금을 신청키로 했는데  친일 교수들의 방해로 무산이 됐다고 한다. 그때 김 대령이 필자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관계자들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결국 필자가 앞장서 기금 신청을 했고 이때 장기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소 설립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캔자스시티 공항에 도착하니 포트 레번워스 관계자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헌액식은 다음날 ‘루이스 앤 클라크 센터’라는 곳에서 성대하게 진행됐다. 행사는 포트 레번워스의 사령관인 밀포드 H. 비클 주니어 중장이 직접 주관했다. 비글 중장은 흑인이다. 아마 그가 흑인이기에 김영옥 대령이 아시아계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행사장엔 군인과 가족 약 100여명으로 꽉찼다. 비글 사령관의 인사말과 함께 헌액식이 시작됐다. 사회자가 김 대령의 업적과 일생을 소개했다. 이어 필자의 5분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준비했던 내용은 이미 비글 사령관과 사회자가 다 소개한 터라 즉흥 연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필자의 미군 경험담으로 시작했다. 예전에는 위생병 Medic이 91B이었는데 지금은 68W로 바뀐 걸 구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참석자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1979년 김 대령과의 첫 만남, 그리고 그의 임종 2일 전 병실 방문 얘기를 들려줬다. 이어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책 출판과 영문 번역 관련 내용, 김 대령이 은퇴후 평생을 약자와 소수계, 그리고 한인 사회와 일본인 사회를 위해 봉사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포트 레번워스’는 단순한 미군 기지가 아니라 미 육군의 중요한 교육시설(Army Intellectual Center)이다.  특히 매년 소령으로 진급하는 1100명이 이곳에서 11개월 동안 재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미군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곳인 셈이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장교들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김 대령이 헌액된 장소에서 미군의 한인 소령, 한국군 소령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 헌액 작업을 주도한 피터 임 교관은 필자가 번역한 ‘Unsung Hero: Col. Young Oak Kim Story’를 읽고 김영옥 대령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그의 노력 덕에 김 대령의 헌액이 가능했다.     필자는 1978년 5월 미군 제대 후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닐 때 ‘United Way’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김 대령을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1990년대 말에서야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됐다. 당시 그는 일본계 커뮤니티에서 더 유명했다. 그는 일미박물관 건립을 주도했고 바로 옆에 세워진 ‘Go For Broke Monument’ 건립도 주도했다. 또한 일본계 미국인 재향군인회인 ‘Go For Broke Educational Foundation’ 회장을 역임했다. 일본계 미군 전역자들이 김 대령을 리더로 인정하고 따른 것이다.     포트 레번워스의 명예의 전당은 미군의 전설인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장군도 있는 곳이다. 한인사회의 자랑인 고 김영옥 대령을 2세들에게 더 많이 알려야 한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김영옥 명예 김영옥 대령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김영옥 중학교

2023-07-09

LA도서관, 김영옥 대령 집중 조명

고 김영옥 대령(1919∼2005)이 한인 최초로 미 육군 장교 교육기관인 육군 지휘참모대학(CGS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가운데 〈본지 5월 19일 자 A-1면〉, LA시 공공도서관(LAPL)도 아태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김 대령을 조명하고 그의 이야기를 담은 책 3권을 소개해 눈길을 끈다.   LAPL은 소식을 전하는 블로그에 김 대령을 “1919년 LA에서 태어났으며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한국계 미 육군 장교이자 시민 지도자이며 인도주의자였다”고 소개하고 그의 활동과 업적을 성장기,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아시안 커뮤니티에 대한 헌신까지 4개 섹션으로 나눠 자세히 설명했다.   먼저 김 대령이 대단한 애국심을 갖고 성장했으며 당시 미군이 아시아계의 입대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군대에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정된 법에 따라 1941년 1월 육군에 입대한 최초의 징집번호를 가진 군인이 됐다고 소개했다.     특히 김 대령이 1948년과 1952년 올림픽에서 다이빙 금메달을 딴 최초의 아시안이자 한인 커뮤니티의 또 다른 전설인 새미 리 박사와도 친구였다고 알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운영하던 세탁소를 팔고 다시 한번 한국에서 싸우기 위해 미군에 입대했으며, 미군에서 전투 대대를 지휘하는 최초의 아시안으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이후 김 대령이 퇴역한 후 아시안 커뮤니티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현 이웃케어의 전신인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인박물관, 한인타운청소년센터의 전신인 한인청소년문화센터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는 일본계 커뮤니티를 도와 일미박물관 설립을 도왔으며 마이크 혼다 전 연방의원이 상정해 제정된 위안부 결의안을 강력히 지지한 리더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밖에 2009년 한인타운에 김영옥중학교가 개교했으며, 2010년 UC리버사이드에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가 설립돼 이름을 빛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LAPL는 김 대령의 일대기가 담긴 책으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장태한 소장이 번역한 ‘이름 없는 영웅: 김영옥 대령의 이야기’, 데릭 밀러의 ‘한국전쟁에서 싸운 소수계 군인들(Minority Soldiers Fighting in the Korean War)', 테어도어 준 유의 '한국: 분단된 두 나라의 탄생(The Koreas: The Birth of Two Nations Divided)'을 추천했다.   자세한 내용은 도서관 웹사이트(www.lapl.org/collections-resources/blogs/lapl/spotlight-young-oak-kim)에서 찾을 수 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la도서관 김영옥 김영옥 대령 la도서관 김영옥 세계대전 한국전쟁

2023-05-18

김영옥 대령 육군지휘참모학교 명예의 전당 헌액

고 김영옥 대령(1919∼2005)이 한인 최초로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 콜린 파월 전 국방부 장관 등과 함께 육군 장교 교육기관 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캔자스주 캔자스시티에 있는 포트 레번워스 ‘육군 지휘참모대학(CGSC)’은 16일 오전 페이스북을 통해 포트 루이스앤클라크센터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 영웅으로 추앙받는 고 김영옥 대령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고 밝혔다.   CGSC에 따르면 육군연합병과센터와 포트 레번워스의 사령관 밀포드 비글 주니어 중장이 헌액식을 직접 주최했으며, 한인 장교 10여명을 포함해 100여명이 넘는 고위 장교들이 참석해 행사를 끝까지 지켜봤다.   비글 주니어 중장은 이날 고 김 대령에게 세계대전 군 사령부의 명예 증서도 수여했다.   김 대령의 자서전 ‘이름 없는 영웅 김영옥 대령’의 번역가로 초청받아 이날 헌액식에 참석한 장태한 박사는 참석자들에게 김영옥 대령을 영상과 함께 소개하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장 박사는 “미국의 유명한 영웅들이 있는 명예의 전당에 김영옥 대령의 이름이 올라간 건 역사적인 사건이자 미주 한인들의 자랑”이라며 “무엇보다 한인 2세들 중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나 ROTC(학생군사교육단) 출신 장교들이 많은데 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CGSC는 향후 김 대령의 이야기를 교과 과정에 다루는 것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LA에서 태어난 김 대령은 미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뛰어난 무공을 세워 미국 정부로부터 특별·은성·동성 무공훈장을 받았고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무공훈장, 한국 태극무공훈장도 수훈한 전쟁 영웅이다.   2차대전 참전 후 예편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입대해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참모를 거쳐 미군 역사상 유색인종 가운데 처음으로 전투대대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고아 500여 명을 돌보며 인도주의를 보여주기도 했다.   1972년 전역한 후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을 만드는 데 앞장섰고, 가정폭력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한인 입양아 등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쳤다.   2005년 12월 LA에서 별세한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LA한인커뮤니티는 6가와 버몬트 애비뉴 인근의 중학교에 그의 이름을 딴 ‘김영옥 아카데미’로 명명해 김 대령을 기억하고 있다.   한편 육군 지휘참모대학은 미군 고위 지휘관으로 양성하는 곳으로, 1881년에 설립돼 1883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뒤 수많은 장교를 재교육했다. 장군을 꿈꾸는 장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엘리트 코스로, 소령급 이상이 짧게는 수주에서 길게는 2년 동안 지휘관이 반드시 갖춰야 할 리더십과 전술 등을 교육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지낸 조지 마셜 장관,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 콜린 파월 전 국방부 장관 등이 이곳을 졸업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김영옥 김영옥 대령 전쟁영웅 김영옥 육군 지휘참모학교

2023-05-17

[사설] 김영옥 대령 ‘골드 메달’ 추서 의미

고 김영옥 대령 ‘연방하원 골드 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 추서가 다시 추진된다. 미셸 박 스틸, 영김, 메릴린 스트릭랜드, 앤디 김 등 한인 연방하원의원 4인방은 지난달 30일 관련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의원들은 “김 대령의 결단과 용기는 모든 미국인의 귀감”이라며 초당적 발의 이유를 밝혔다. ‘연방하원 골드 메달’은 연방의회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상이다.     한인 연방의원들은 지난 2021년에도 골드 메달 추서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당시 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져 지원에 나섰지만 아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 김영옥 대령은 한인사회의 영웅이다. 독립투사의 아들로 LA에서 태어난 그는 미군 장교로 세계 2차대전과 6·25 한국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에서는 최고 무공훈장을, 미국에서는 십자훈장 등을 받았다. 아시아계 최초의 미군 전투부대 대대장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한인사회에도 그의 업적은 남아있다. 그는 전역 후 많은 한인 비영리단체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인건강정보센터,코리아타운청소년센터, 한미연합회 등이 그가 설립에 참여한 단체들이다. 이런 업적으로 지난 2009년 LA한인타운에 문을 연 중학교의 이름이  ‘김영옥 아카데미’로 명명되기도 했다.     고 김영옥 대령은 한인사회에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의 리더십과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은 차세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고 김영옥 대령 골드 메달’ 추서 법안 통과에 한인사회의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이를 위해 추진위원회의 재가동도 필요하지만 한인들이 지역구 연방 의원에게 전화나 이메일로 지지를 호소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인 이민역사 120년을 맞았지만 ‘한인 영웅’들에 대한 제대로 된 조명 작업은 부진했다. 이런 의미에서 고 김영옥 대령 골드 메달 추서 추진 작업은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사설 골프 김영옥 김영옥 대령 메달 추서 추서 의미

2023-02-01

‘김영옥 의회 골드메달’ 한인 의원 4명 재추진

‘전쟁 영웅’ 고 김영옥 대령에게 연방하원 골드 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을 추서하자는 법안이 발의됐다.   30일 연방하원에 따르면 한인 연방하원의원 4인은 초당적 협의를 통해 김 대령에게 골드 메달을 추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연방의회 골드 메달은 의회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상이다.     미셸 박 스틸 의원(공화 가주 45지구)은 “김 대령의 결단과 용기는 모든 미국인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그에게 메달을 수여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영 김(공화 가주 40지구), 앤디 김(민주 뉴저지 3지구), 매릴린 스트릭랜드(민주 워싱턴 10지구) 의원도 뜻을 같이해 공동 발의에 나섰다.     한인 의원 4인은 2021년 3월에도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해 5명 의원의 추가 지지 서명을 받았지만 끝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스트릭랜드 의원은 “한국계 미국인 하원의원으로서 우리가 김 대령의 모범적인 유산을 기리고 고양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며 “그는 군사적 영웅인 동시에 확고한 지역사회의 리더이자 인도주의자로서 이 높은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김 대령은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역 후에도 다양한 활동으로 한인과 아시안 커뮤니티의 모범이 됐다. LA한인타운 6가와 버몬트 애비뉴 인근의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딴 ‘김영옥 아카데미’로 명명해 김 대령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한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최고 무공 훈장을, 미국에서는 수훈십자훈장을 받은 바 있다. 그는 86세였던 2005년 방광암 투병 중에 별세했다.     연방하원 골드 메달은 1776년에 시작된 후 매년 국가적 영웅에게 수여했는데 초창기에는 조지 워싱턴(첫 수상) 등 주로 전쟁 공훈에 대한 인물이 많았으나 1860년대 이후 개척자, 발명가, 외교관,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이들에게 돌아갔다. 지난해에는 1979년 이란에 인질로 잡혔던 피해자들이 수상했고, 올해 1월 5일에는 50년대 민권운동가인 에멧 킬과 매이미 틸 모빌리가 수상했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연방한인의원 김영옥 연방한인의원들 김영옥 김영옥 대령 김영옥 아카데미

2023-01-30

"덕분에 행복했습니다"…김영옥 이민법 변호사 은퇴

떠나는 마음은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죠.”   지난 29일 본지를 비롯한 일간지 지면에는 이색 전면광고가 게재돼 눈길을 끌었다.   지난 30여년간 LA한인타운에서 이민법 변호사로 활동한 김영옥 변호사가 “감사, 그리고 이별의 글을 삼가 올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퇴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1990년 변호사 라이선스를 받은 후 31년 만이다. 오하이오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1978년 LA로 이주해 이민법 변호사 사무실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법대에 진학한 시간까지 합치면 총 43년을 이민법 업무에 종사한 셈이 된다.   김 변호사는 광고에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귀한 분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려왔다. 그분들의 부모, 자녀, 손주들까지 4대에 걸쳐 이민 관련 일을 돌볼 기회를 가졌다”고 적었다. 이어 “수많은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취업 이민 관련 기회를 제게 많이 줬다”며 “그 많은 기회를 주신 여러분께 머리 숙여, 허리 굽혀 깊은 감사의 인사 드린다”고 소감을 남겼다.   앞으로 물 흐름과 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알린 김 변호사는 “덕분에 그동안 참으로 보람 있는 멋진 삶을 살아왔다. 행복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한편 김 변호사가 운영하던 로펌 ‘희망법률그룹’은 지난 2018년 사무실을 합병하면서 파트너로 함께 한 스티븐 조 변호사가 끌고 간다. 김 변호사는 은퇴 후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라디오코리아 미디어그룹 운영에 집중할 계획이다.     김 변호사는 “(변호사와 미디어 대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은퇴를 결심했다”며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앞으로 다른 모습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장연화 기자김영옥변호사 관련사진 2면 김영옥변호사 동료변호사 직원들 김영옥 변호사

2021-10-29

"한인 지지 열기 큰 힘 발휘"…'김영옥 하이웨이' 서한·청원 1000건 육박

가주의회 교통위원회(이하 교통위)가 16일 '김영옥 대령 기념 하이웨이' 지정 결의안(ACR 188)을 만장일치로 승인한 데는 한인들의 뜨거운 지지 열기가 큰 힘이 됐다는 후문이다. 이날 교통위엔 섀런 쿼크-실바(민주·65지구), 최석호 의원(공화·68지구) 측이 지난 2월 28일 ACR 188을 공동발의한 이후,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벌인 김영옥 하이웨이 지정 지지 서한 발송과 온라인 청원 서명 캠페인 결과가 전달됐다. 결과물은 서한과 온라인 서명을 합쳐 총 986건에 달했다. 이 가운데 서한은 851통이고 나머지 135건은 온라인 서명이다. 특히 851통의 지지 서한 중 618통은 어바인, 풀러턴, 세리토스 지역 한국학교 학생, 교사, 학부모가 보낸 것으로 집계됐다. 박동우 쿼크-실바 의원 보좌관은 ACR 188의 교통위 통과와 관련, "쿼크-실바 의원 사무실에선 한인들의 지지 열기가 큰 힘을 발휘한 결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서한과 청원을 합치면 1000건에 육박하는데 특정 법안이나 결의안에 대해 이렇게 많은 지지가 쏟아진 것은 유례가 드문 일"이라며 "통상 대중이 관심을 갖는다고 간주되는 법안에 관해 접수되는 편지도 20~30통 정도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박 보좌관은 "한인사회의 열띤 호응이 앞으로 주의회 표결에서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상환 기자 limsh@koreadaily.com

2018-04-16

[영웅 김영옥] 〈21> 사무라이 김 ②

구름에 가려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독일군 기관총 소리가 들리면서 서 있던 병사가 쓰러졌다. 총탄에 맞은 병사는 기어서 나머지 반을 건넜다. 합류한 병사의 부상이 종아리 관통상으로 비교적 경상임을 확인한 영옥이 다그쳤다. "명령에 불복종한 이유가 뭐냐?" "바닥에 돌이 많아 포복으로 건너자니 아플 것 같았고 모두 안전하게 건너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바보 같은…. 혼자 귀대할 수 있겠나?" "네." "지금은 한 명도 아쉬운 처지라 아무도 붙여 줄 수 없다. 한 번 기어 보라." 병사가 기는 모습을 지켜 본 영옥은 혼자 귀대할 수 있겠다고 판단해 혼자 가라고 한 후 나머지 부하들을 점검해 방향을 틀어 산길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지형을 보니 저 멀리 둔덕이 있고 그 둔덕을 넘으면 원래 독일군 기관총 여러 대가 동시에 불을 뿜는 것을 보고 길레스피 대대장이 걱정했던 산으로 이어졌다. 영옥이 갑자기 부대를 정지시키면서 말했다. "모두들 저 둔덕 보이지? 이 산과 저 산 사이에 있는 저 둔덕 말이야. 저기 분명히 독일군 기관총이 있다." "…" "…" "어둡고 거리도 멀어 우리 눈에는 둔덕도 잘 안 보이는데 소대장님 눈에는 독일군 기관총까지 보입니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못해도 50야드는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둔덕을 가리키며 영옥이 하는 말을 병사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농담조로 받았다. "눈에 보여야만 아나? 내가 적군이라면 분명히 저기 기관총을 배치했을 거다. 독일군은 아주 이론적이고 원칙에 충실하다. 분명히 저기 있다. 저것을 어쩌지 않고는 목적지로 갈 수 없으니 저것부터 손을 보자." 영옥은 1개 분대는 자기를 따라 정면에서 공격하고 다른 1개 분대는 우회해 뒤에서 협공하라고 지시한 후 몸을 굽히고 일단 앞에 보이는 덤불을 목표로 소리를 죽이고 신속히 움직였다. 덤불로 몸도 감추고 덤불 사이로 앞을 더 잘 보기 위해서였다. 덤불에 도착한 영옥이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덤불에 얼굴을 바짝 갖다대는 순간 갑자기 덤불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또 다른 얼굴 하나가 반대편에서 쑤욱 나왔다. 독일군이었다. 영옥은 심장이 멎는 듯 했고 당황한 독일군 병사는 무어라 두 마디 독일어를 내뱉었다. 얼떨결에 병사가 내뱉은 말이 아마도 그날 밤 암호일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영옥의 머리를 스치는 순간 영옥의 손가락은 이미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스즈끼 대위가 주고 간 권총은 이번에도 방아쇠가 잘 당겨지지 않았다. 권총이 불발이라는 것을 직감한 영옥이 이번에는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구르는 순간 영옥의 등 뒤에서 총성이 일었다. 이번에도 다케바였다. 다케바가 총을 쏘자 독일군이 기관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영옥이 짐작했던 그 위치였고 덤불에서는 불과 10야드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으로 기관총에서 쏟아져 나오는 예광탄들이 머리카락을 스치듯 영옥 위로 날아갔다. 전장의 병사들은 가끔씩 코미디언이 되곤 한다. 철모를 짓누르며 땅으로 기어들면서도 병사들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야 정말 기관총 아냐?" "우리 소대장은 마술사라니까…." 독일군 기관총은 100발 정도만 쏘더니 갑자기 잠잠해 졌다. 뒤로 돌아간 1개 분대가 등 뒤에서 총을 들이댄 것이었다. 여기서 영옥 일행은 기관총 1대를 노획하고 독일군 7명을 포로로 잡았다. 영옥은 부하 2명이 포로들을 대대본부로 데려가게 한 후 골짜기를 타고 원래 목표했던 산으로 올라갔다. 산꼭대기로 다가서고 있다고 느낄 때쯤 위로부터 꽤 많은 무리가 땅을 밟는 군화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골짜기를 벗어나 매복한다." 영옥은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골짜기를 끼고 옆으로 난 오솔길 뒤로 부하들을 데리고 몸을 감췄다. "쏠까요?" 부하들이 물었다. "아냐. 그대로 기다린다." 영옥의 머리는 컴퓨터처럼 신속히 돌아갔다. 19명이 출발해 1명은 부상으로 돌려보내고 2명은 포로들을 데리고 갔으니 나머지는 16명이었는데 독일군은 우선 숫자가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영옥 일행이 매복해 있고 적군이 앞을 지나기는 하지만 선두를 공격하면 후미가 반격해올 것이고 후미를 공격하면 사실상 대부분은 놓치게 된다. 매복대형도 일렬횡대로 자칫하면 부하들 반쯤은 희생될 수 있다. 그것도 적진 속이다. 한마디로 지형도 익숙하지 않고 포진도 나쁘고 중과부적이란 얘기다. 게다가 내려오는 무리는 아무래도 길레스피 대대장이 걱정하던 기관총을 쏘던 바로 그들 같았다. 쓸데없이 부하를 희생시키며 전투를 벌일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영옥 일행의 매복을 모르는 독일군은 무어라 큰 소리로 주고받으며 골짜기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50명은 더 될 것 같은 독일군 무리를 보고 영옥은 아마도 기관총조 5~7개는 될 것이라고 계산하면서 두서없이 왁자지껄 주고받는 말은 제대로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짐작했다. 독일군이 완전히 빠져나가기를 기다린 영옥은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며 부하들을 데리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와 독일군 7명을 포로로 잡고 기관총 1개를 제거했던 둔덕을 다시 지나 포복명령을 어긴 병사가 부상을 당했던 지점에 이르자 독일군 한 명이 서성대고 있었다. 잡고 보니 덤불을 헤치고 얼굴을 들이밀면서 암호 같은 것을 외쳤던 독일군이었다. 영옥은 부하들을 정지시키고 말했다. "우리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적은 내일 다시 온다. 너희는 여기 있어라. 나는 대대본부에 보고하고 다시 오겠다." 영옥은 포로로 잡은 독일군 한 명을 앞세우고 대대본부가 있는 600고지로 돌아갔다. 길레스피 대대장은 오랫동안 위궤양으로 고생했는데 대대장이 된 후 병세가 더 악화됐다. 영옥이 길레스피 소령에게 갔을 때 그는 막 심한 통증에서 벗어나 간신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얼굴을 찡그린 채 배를 움켜쥐고 엉거주춤 선 자세로 신음소리를 내며 영옥의 보고를 들었다. "수고했다. 막상 보내긴 했지만 참으로 어려운 임무였는데…. 네가 떠난 후 얼마 있다가 갑자기 독일군 기관총들이 잠잠해진 것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했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래 부하들은 어디 있나?" "아직 그곳에 있습니다." "…?" "대대장님 아직 상황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군은 내일 아침 저 산을 다시 뺏기 위해 분명히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까 걱정하시던 똑같은 위험에 다시 빠지게 됩니다. 우리 뒤에 적군 기관총이 깔려 있는 상황이 됩니다." "음…" "…" "그래서?" "제가 남았으면 합니다." "좋다. 그렇게 하라." 영옥은 부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2014-10-14

[영웅 김영옥]〈16> 서전②

상륙을 마친 100대대는 부대를 정비해 트럭을 타고 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볼투르노강을 끼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부대가 몬테 마라노에 도착할 때까지 독일군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폭우가 심해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장병들은 빗줄기가 철모에 부딪혀 귓가로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 앞으로 갔다. 쏟아지는 비로 땅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다. 행군의 선두는 영옥이 속한 B중대였다. 폴 프로닝 소위의 3소대가 제일 앞에 서서 중대를 인도하고 영옥이 이끄는 2소대는 중대 후미에서 중대를 따라갔다. 행군을 시작한지 너덧 시간 정도 지나자 여기저기 낮은 언덕들이 모여 있는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영옥이 첫 구릉에 오르니 길은 언덕을 따라 내려가며 왼쪽으로 뻗다가 날카롭게 커브를 그리며 오른쪽으로 뻗어 있었다. 이미 첫 구릉 꼭대기를 넘은 앞선 소대들은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 선두가 막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기관총 소리가 훈련소에서 듣던 미제 기관총과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길의 오른쪽 끝에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독일군의 기습이었다. 중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됐다. 일제히 땅에 엎드리거나 길옆으로 몸을 피했다. 몸을 조금이라도 지면에 더 밀착시키려고 윗주머니에 있던 담뱃갑까지 빼 던지거나 맨손으로 땅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계급이나 체면 따위는 사치였다. 장교고 사병이고 가릴 것이 없었다. 총성이 들려오는 곳을 보니 독일군이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처음으로 본 적군의 모습이었다. 전체 지형은 구릉지대로 여기저기 굴곡이 있어 독일군 기관총과 영옥의 2소대 사이에는 계곡이 있었다. 영옥은 2소대가 계곡을 가로질러 공격한다면 대대 전체에서 2소대의 현재 위치가 독일군과 가장 가깝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독일군은 아직 언덕으로 오르지 못한 2소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대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기도 어려울 터였다. 원래 미군 전투수칙에 따르면 소대장은 중대장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야 했으나 영옥은 중대장 타로 스즈끼 대위가 처음으로 적의 실제 공격을 받고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명령을 내렸다. "나를 따르라!" 영옥은 그대로 계곡을 향해 뛰었다. 계곡을 지나 독일군 기관총을 향해 소대를 이끌면서 중대장 타로 스즈끼 대위를 무전으로 불렀지만 교신이 되지 않았다. 영옥이 기관총 진지로 가까이 접근해 나무덤불 위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기관총 진지를 지키던 독일군이 영옥을 발견하고 슈마이쩌 기관단총을 쏘기 시작했다. 즉시 땅에 엎드린 영옥이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해 부하들을 데리고 기관총 진지의 뒤로 돌아가자 그 사이 위험을 느낀 독일군은 기관총을 걷고 철수했다. 독일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오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주방어선 보강을 위한 지연작전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여오지는 않았다. 독일군이 기관총을 걷으면서 B중대도 공격에서 벗어났지만 첫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는 조 다카다였다. 다카다는 2차대전에서 보병전투로 사망한 첫 일본계 미군이 됐다. 독일군 기관총을 철수시켜 중대를 위기에서 구한 2소대는 영옥의 지시에 따라 독일군 기관총이 있던 곳에 그대로 몸을 숨긴 채 혼돈에서 벗어난 중대가 전진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2소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온 중대장 스즈끼 대위가 영옥에게 명령했다. "길 위로 소대를 올려보내고 길을 따라 소대를 전진시켜라." "안됩니다." "뭐? 안 돼? 길 위로 전진시키라니까!" 중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됩니다. 부하들을 개죽음시킬 수 없습니다. 적군이 바로 저기 있습니다. 이쪽 계곡을 건너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영옥이 있는 곳에서는 적군 수백 명이 탱크 세 대까지 거느리고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에 보이는 탱크만 세 대였을 뿐 더 있을 수도 있었다. "길 위로 행군하라는 것은 네가 적군을 만나기도 전에 내린 명령이야!"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적의 위치를 알았으므로 적을 없애야 합니다." 영옥이 스즈끼 중대장의 명령을 거부하자 화가 치민 중대장은 씩씩거리며 뒤를 향해 뛰어갔다. 중대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길옆으로 내려선 영옥은 소대원들을 데리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잠시 후 대대장 터너 중령이 대대참모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대대장은 굳은 표정으로 명령했다. "김 소위 중대장 명령에 복종하라!" "안됩니다. 이쪽으로 계곡을 건너 독일군을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김 소위 이것은 명령이네." 대대장과 함께 온 러벨 소령도 타이르듯 거들었다. 그러나 영옥은 계속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런 방식은 잘못입니다. 병사들만 희생됩니다." 그렇게 10여분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는데도 영옥이 계속 버티자 터너 중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명령에 불복종하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 "군법회의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길 위로 병사들을 전진시키면 쓸데없이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이쪽 계곡을 지나 적을 공격하면 사상자가 생길 수는 있지만 적어도 적과 싸울 수는 있습니다." 화가 난 대대장이 일행과 함께 사라진 후 이번에는 군의관 고메타니 대위가 영옥에게 달려왔다. 고메타니 대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타일렀다. "영 오늘은 우리 대대의 첫 전투다. 군법회의 같은 불명예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돼. 제발 내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 다오." 영옥은 다른 사람의 명령은 거부해도 고메타니 대위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군의관님 생각해보십시오. 저기 독일군 탱크가 세 대나 빤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길 위로 전진하면 보나마나 저들이 공격할 것입니다." "네가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차라리 몇 사람 다치는 것이 전투 첫날 군법회의 같은 일이 있는 것보다는 낫다." 미군 지휘부나 미국 사회가 과연 일본계 2세들이 어떻게 싸울지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2014-09-26

[영웅 김영옥]〈14> 아이러니

갈등 있었지만 아시아계 이민 2세라는 공통점 존재 일본계 병사 자신이 태어난 미국 정부로부터 의심 받아 영옥은 식민지배 받는 한국에 대한 편견과도 맞서 싸워야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얘기처럼 하면서 영옥이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 같은 별명을 부르며 불평을 늘어놨다. 영옥은 이런 얘기가 들려올 때면 못 들은 척 했다. 영어로 늘어놓는 불평을 영옥이 모르는 척하자 이번에는 더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일본계 장교들도 가세했다.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영옥과 얘기할 때 '피진 영어'(Pidgin English)를 쓰는 것이었다. 피진 영어는 하와이 주민들이 영어와 원주민어를 섞어 만든 잡탕이었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처음 그들의 말이 피진 영어라는 것을 몰랐을 때 영옥은 속으로 사병들은 그렇다 쳐도 도대체 하와이대학은 어떤 곳이기에 표준영어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에게 졸업장을 주고 장교로 임관시키나 생각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00대대 장병들이 자기 부대를 부르는 이름인 '원 푸카 푸카'(One Puka Puka)도 피진 영어였다. '원'은 영어였고 '푸카'는 하와이 원주민어로 구멍이라는 뜻인데 전화번호 같은 것을 유머러스하게 말할 때 '0'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들의 피진 영어는 처음에는 영옥을 아주 곤혹스럽게 했지만 장병들 사이의 일체감을 높여줬을 뿐 아니라 유럽전선에서는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이들이 피진 영어에 가끔 일본어까지 한 두 마디 섞어 무전교신을 하면 독일군으로서는 도무지 알아챌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옥과 일본계 장병들의 관계가 갈등만으로 점철됐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정도 갈등이란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있는지 모른다. 그들의 부모가 일본인이고 영옥의 부모가 한국인이어서 그들이 자라면서 한국인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영옥과 다르고 영옥이 자라면서 일본인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그들과 달랐지만 둘은 훨씬 더 절박한 것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우선 둘은 언제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함께 전쟁터로 가야 하는 공동운명체였다. 전장으로 떠날 때는 자유를 수호한다거나 민주주의를 지킨다거나 하는 거창한 구호 속에 떠나지만 일단 전장에 투입되면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영옥도 병사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외에도 둘은 함께 나눴던 절박한 공통분모가 또 있었다. 둘은 모두가 아시아계 이민 2세로 철저한 인종차별의 피해자였다. 당시 유색인에 대한 미국의 인종차별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백인과 유색인은 서로 다른 화장실을 써야 했다. 화장실뿐 아니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대합실 역시 마찬가지로 백인전용 대합실과 유색인 전용대합실이 따로 있었다. 이런 경우 유색인이 백인전용 화장실이나 대합실을 사용하게 되면 즉시 체포됐다. 여기서 유색인이란 엄밀히 말하면 흑인을 얘기하는 것으로 황인종인 아시아계가 백인전용 화장실이나 대합실을 사용하면 경찰들도 이들을 체포해야 하는지 아닌지조차 혼돈스러워했다. 다시 말해 아시아계는 법적 정의조차 제대로 내려져 있지 않은 3류 시민이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그렇게 심했으니 흑인보다 열등한 종족으로 치부되던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할 만할 것이다. 제국주의의 팽창 과정에서 아시아를 식민지배의 대상 정도밖에 여기지 않았던 서구인들의 시각이 그대로 살아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미국사회에 팽배했던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더욱 심해졌다. 일본계 장병들은 부모형제들이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피를 흘려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라고 강요 받고 있었다. 미국은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도 싸우고 있었지만 독일계 이민자들이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격리 수용하지는 않았다. 같은 이민자라 해도 백인과 아시아계는 그만큼 본질적으로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다. 영옥도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다니던 대학도 걷어치우고 오랜 시간 방황해야 했다. 외모만으로는 아시아계 이민자를 앞에 두고 누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알기 어렵던 백인들은 길가는 한국계 이민자들에게도 '잽'(Jap)이라 부르며 토마토를 던지기도 했다. 영어로 '잽'은 한국어로는 '왜놈'이나 '쪽바리' 정도 되는 말로 일본인들을 비하해 부르는 아주 나쁜 말이었다. 장교고 사병이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두고 부대원들의 토론도 끝없이 계속됐다. 어떤 때는 장교나 사병들이 같이 모이기도 했지만 보통은 장교는 장교끼리 사병은 사병끼리 모였다. 장교들의 토론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영옥을 비롯해 소위와 중위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참가했다. 토론은 매주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시작해 다음날까지 끝없이 계속됐다. 막간을 이용해 카드 게임도 하고 유크렐리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불렀지만 모임의 핵심은 "왜 싸워야 하느냐?"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느냐?"에 대한 토론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이 토론은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장병들 모두에게 천금 같은 정신교육이 됐다. 보통 미군들은 한 가지 전쟁만 하면 됐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는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상대로 싸우는 군사적인 전쟁이었다. 일본계 장병들은 보통 미군과 본질적으로 달리 두 개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들 일본계 장병들은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것 외에도 자기들이 태어난 나라이며 자기들이 목숨 바쳐 싸우는 국가가 자기들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심과 편견을 상대로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영옥은 여기에서 한 가지 전쟁을 더 치러야 했다. 영옥의 세 번째 전쟁은 일본계조차 멸시받는 상황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한국인에게 쏟아지는 편견과의 전쟁이었다. 세 전쟁 모두 절대로 질 수 없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훈련과 토론 속에서도 시간은 계속 흘렀고 1943년 여름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부로부터 이동명령이 내려왔다. 목적지는 북아프리카 오란이었다. 드디어 전장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훈련장에서 같이 땀을 흘렸던 영옥과 일본계 병사들은 앞으로는 전쟁터에서 같이 피를 흘려야 했다. 8월21일 영옥도 소대원들을 챙겨 제임스 파커 호에 몸을 실었다. 한 때는 유람선이었다가 전쟁과 함께 수송선으로 징발된 제임스 파커는 서서히 파도를 가르며 뉴욕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조금씩 멀어졌고 잠시 후 자유의 여신상도 수평선 아래로 사라졌다.

2014-09-19

[사고]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대령

영문판 출간 맞춰 캠페인…에세이·퀴즈대회도 준비 UC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소장 장태한)와 중앙일보는 '아름다운 영웅 고 김영옥 대령 알리기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색인 대대장을 지낸 김영옥 대령은 제 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워 미국과 한국은 물론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최고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입니다. 특히 전역 후 봉사활동을 펼치며 인도주의를 몸소 실천한 '아름다운 영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영옥 대령은 그동안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습니다. 한국에선 자랑스런 한인으로 교과서에 실리는데 정작 우리 자녀들은 그를 잘 알지 못합니다. 김영옥 연구소와 중앙일보는 2005년 출판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지은이 한우성)'의 영문판 'Unsung Hero: The Story of Colonel Young Oak Kim(옮긴이 장태한)'의 출간에 맞춰 그의 모습이 후세들에게 온전히 비쳐지고 그의 뜻이 올곧이 전해질 수 있도록 김영옥 대령 알리기에 나섭니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김영옥 대령을 주제로 한 에세이 또는 스피치 콘테스트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또 김영옥 대령 책을 읽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퀴즈대회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인사회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참여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영문판 김영옥 대령'을 자녀와 함께 읽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책을 통해 김영옥 대령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자녀들은 이 책을 통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깨닫게 되고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면 김영옥 대령 책을 사서 학교와 공공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차별을 딛고 한인 위상을 떨친 우리의 정신적 유산이자 '우리의 영웅'인 김영옥 대령을 알리는 이번 캠페인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951)827-5661

2011-06-02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영문판 번역 장태한 교수…그의 숨겨진 발자취 살려 한 자 한 자 번역했죠"

한글 감정 살리기 위해 꼬박 2년 고민 끝 결실 영어 더 편한 청소년에게 정체성·자신감 줄 수 있어 장태한(55.사진.UC리버사이드) 교수는 '김영옥 홀릭(holic)'이다.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를 맡고 있는 그는 지난 2005년 첫 출간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지은이 한우성)'을 직접 영어로 번역 지난달 영문판 김영옥 전기를 선보였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인간 김영옥을 다시 만났다. - 영문판 제목이 소리 없는 영웅(Unsung Hero)이다. "김영옥 대령은 우리에겐 아직 낯선 영웅이다. 아니 우리에게만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다. 김 대령은 미국은 물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최고의 전쟁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에게 헌정된 영화(잊혀진 동맹: Forgotten Valor 2001)도 있다. 숨겨진 그의 발자취를 찾아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번역했다." -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전쟁을 반대한 전쟁영웅의 이야기다. 전쟁을 배경으로 인종차별.정체성.사랑.젊음 등이 녹아있다. 특히 항상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김 대령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스케일이 크다. 사실 전쟁이 배경이라 남성독자가 많을 거라 예상했는데 정반대였다(웃음)." - 책을 번역하는데 힘든 점은 없었나. "꼬박 2년이 걸렸다. 한글에서만 느껴지는 감정을 살리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 또 군대용어.지명.전쟁자료 등이 너무 방대해 처음엔 엄두가 잘 안 났다. 그래서 두께를 줄였다. 처음부터 나는 쉽게 읽히는 책을 쓰고 싶었다. 그것이 한인 2세와 타인종 독자들에게 인간 김영옥을 더 잘 알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 영웅이란 칭호는 과장 같다. "(크게 웃으며)이 질문은 거의 매일 듣는 질문 중 하나다. 김영옥 대령에 대해 처음 배우는 학생들은 '영웅이란 단어를 막 붙여도 되냐' '그렇게 대단하면 왜 우리는 지금껏 몰랐느냐'라는 등 따지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 대령이 이순신 장군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전쟁에선 한없이 강한 군인이지만 두 분 다 인간을 사랑했다. 화려한 전력만 이야기한다면 김영옥 대령은 뛰어난 군인일 뿐 영웅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 중에도 고아들을 돌보고 평생 약자와 함께했다. 영웅이란 모두를 위한 사람이다. 김 대령은 그런 사람이었다." - 김영옥 대령과의 첫만남 기억하고 있나. "1982년도다. 난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대학생이었고 김 대령은 비영리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의 자원봉사자였다. 후줄근한 모습이 마실 나온 할아버지로 보여 전쟁영웅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분은 늘 앞에 나서는 것을 피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김 대령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셨다. 한국전쟁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평생 조용히 봉사하며 살 것이라는 약속을." - 사회봉사자로서 김 대령은 어땠나. "열정적이었다. 특히 소수민족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이라크 전쟁 중에는 반대 서명에 앞장서기도 했다. (한인커뮤니티와의 관계를 묻자) LA한인타운에 있는 건강정보센터(KHEIR).한인청소년회관(KYCC).한인연합회.한인가정상담소.한미박물관 등은 김 대령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발이 닳고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지역 정치인들을 설득했다." - 최근 한국에서 김 대령 관련 뉴스가 많다. "지난 3월 한국 초등학교 5학년 국어 교과서에 김영옥 대령이 수록됐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도 속속 촬영되고 있다. 김 대령은 이제 잊혀진 전쟁영웅이 아닌 자랑스러운 한인이다. 그의 유지를 받든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기쁘고 보람차다. 그분도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 책을 통해 배운 점이 있나. "여러 번 읽고 또 읽고 고쳐쓰기를 반복하며 나를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계속 '나는 누구인가?' 같은 원초적인 질문을 되뇌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미국인과 그 뿌리 문화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이웃을 돌아보는 김 대령과 나를 비교하며 괴롭기도 했다(웃음). 앤지(딸)에게 "아빠는 네가 김영옥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 자녀에게 권하고 싶은 책인가. "당연하다. 내가 번역을 맡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미국땅에서 태어난 내 딸에게 한인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가르치고 싶었다. 영어가 더 편한 한인 2세 청소년들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큰 혼란을 겪는다. 둘 사이에 낀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머물게 된다. 미국사회에서 한국의 뿌리를 지킨다는 것은 말처럼 쉽진 않다. 이 책에서 김 대령은 '난 100% 한인인 동시에 100% 미국인'이라는 말을 한다. 둘 다 최선을 다해 지키겠다는 뜻이다. 나약하고 쉽게 지치는 우리 자녀들에겐 이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이것이 정체성이고 자신감이다." - 인간 김영옥이 더 매력적인 것 같다. "그의 삶 자체가 매력적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나 내전 중인 모국에 제 발로 찾아갔다. 전쟁중 입은 상처로 40번도 넘는 대수술을 치렀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그의 양면적인 면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무패행진을 이어가는 남자의 순수한 이면이 좋다. 수 없이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여자와 아이들을 울리는 전쟁이 싫다고 확고히 말하는 그의 뚝심이 멋지다." - '김영옥 알리기'는 계속 되나. "책 출판은 연구소가 성공시킨 첫 프로젝트다. 1일 오후 6시 LA한인타운 김영옥 중학교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질 예정이다. 누구나 참석 책을 구입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학교와 연구소 책이 한자리에 모인다니 생각만 해도 기쁘다. 책을 읽은 청소년들이 제 2의 김영옥이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구혜영 기자

201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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