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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김영옥]〈16> 서전②

전투 첫날 길 위로 소대 전진시키라는 상관 명령에
영옥 병사들 희생시킬 수 없다며 끝까지 맞서
군법회의 회부될 수 있는 불명예도 무릅써

상륙을 마친 100대대는 부대를 정비해 트럭을 타고 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볼투르노강을 끼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부대가 몬테 마라노에 도착할 때까지 독일군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폭우가 심해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장병들은 빗줄기가 철모에 부딪혀 귓가로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 앞으로 갔다. 쏟아지는 비로 땅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다.

행군의 선두는 영옥이 속한 B중대였다. 폴 프로닝 소위의 3소대가 제일 앞에 서서 중대를 인도하고 영옥이 이끄는 2소대는 중대 후미에서 중대를 따라갔다. 행군을 시작한지 너덧 시간 정도 지나자 여기저기 낮은 언덕들이 모여 있는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영옥이 첫 구릉에 오르니 길은 언덕을 따라 내려가며 왼쪽으로 뻗다가 날카롭게 커브를 그리며 오른쪽으로 뻗어 있었다. 이미 첫 구릉 꼭대기를 넘은 앞선 소대들은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 선두가 막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기관총 소리가 훈련소에서 듣던 미제 기관총과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길의 오른쪽 끝에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독일군의 기습이었다.

중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됐다. 일제히 땅에 엎드리거나 길옆으로 몸을 피했다. 몸을 조금이라도 지면에 더 밀착시키려고 윗주머니에 있던 담뱃갑까지 빼 던지거나 맨손으로 땅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계급이나 체면 따위는 사치였다. 장교고 사병이고 가릴 것이 없었다.

총성이 들려오는 곳을 보니 독일군이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처음으로 본 적군의 모습이었다. 전체 지형은 구릉지대로 여기저기 굴곡이 있어 독일군 기관총과 영옥의 2소대 사이에는 계곡이 있었다.

영옥은 2소대가 계곡을 가로질러 공격한다면 대대 전체에서 2소대의 현재 위치가 독일군과 가장 가깝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독일군은 아직 언덕으로 오르지 못한 2소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대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기도 어려울 터였다.

원래 미군 전투수칙에 따르면 소대장은 중대장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야 했으나 영옥은 중대장 타로 스즈끼 대위가 처음으로 적의 실제 공격을 받고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명령을 내렸다.

"나를 따르라!"

영옥은 그대로 계곡을 향해 뛰었다. 계곡을 지나 독일군 기관총을 향해 소대를 이끌면서 중대장 타로 스즈끼 대위를 무전으로 불렀지만 교신이 되지 않았다.

영옥이 기관총 진지로 가까이 접근해 나무덤불 위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기관총 진지를 지키던 독일군이 영옥을 발견하고 슈마이쩌 기관단총을 쏘기 시작했다. 즉시 땅에 엎드린 영옥이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해 부하들을 데리고 기관총 진지의 뒤로 돌아가자 그 사이 위험을 느낀 독일군은 기관총을 걷고 철수했다.

독일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오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주방어선 보강을 위한 지연작전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여오지는 않았다.

독일군이 기관총을 걷으면서 B중대도 공격에서 벗어났지만 첫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는 조 다카다였다. 다카다는 2차대전에서 보병전투로 사망한 첫 일본계 미군이 됐다.

독일군 기관총을 철수시켜 중대를 위기에서 구한 2소대는 영옥의 지시에 따라 독일군 기관총이 있던 곳에 그대로 몸을 숨긴 채 혼돈에서 벗어난 중대가 전진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2소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온 중대장 스즈끼 대위가 영옥에게 명령했다.

"길 위로 소대를 올려보내고 길을 따라 소대를 전진시켜라."

"안됩니다."

"뭐? 안 돼? 길 위로 전진시키라니까!"

중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됩니다. 부하들을 개죽음시킬 수 없습니다. 적군이 바로 저기 있습니다. 이쪽 계곡을 건너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영옥이 있는 곳에서는 적군 수백 명이 탱크 세 대까지 거느리고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에 보이는 탱크만 세 대였을 뿐 더 있을 수도 있었다.

"길 위로 행군하라는 것은 네가 적군을 만나기도 전에 내린 명령이야!"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적의 위치를 알았으므로 적을 없애야 합니다."

영옥이 스즈끼 중대장의 명령을 거부하자 화가 치민 중대장은 씩씩거리며 뒤를 향해 뛰어갔다. 중대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길옆으로 내려선 영옥은 소대원들을 데리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잠시 후 대대장 터너 중령이 대대참모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대대장은 굳은 표정으로 명령했다.

"김 소위 중대장 명령에 복종하라!"

"안됩니다. 이쪽으로 계곡을 건너 독일군을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김 소위 이것은 명령이네."

대대장과 함께 온 러벨 소령도 타이르듯 거들었다. 그러나 영옥은 계속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런 방식은 잘못입니다. 병사들만 희생됩니다."

그렇게 10여분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는데도 영옥이 계속 버티자 터너 중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명령에 불복종하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

"군법회의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길 위로 병사들을 전진시키면 쓸데없이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이쪽 계곡을 지나 적을 공격하면 사상자가 생길 수는 있지만 적어도 적과 싸울 수는 있습니다."

화가 난 대대장이 일행과 함께 사라진 후 이번에는 군의관 고메타니 대위가 영옥에게 달려왔다. 고메타니 대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타일렀다.

"영 오늘은 우리 대대의 첫 전투다. 군법회의 같은 불명예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돼. 제발 내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 다오."

영옥은 다른 사람의 명령은 거부해도 고메타니 대위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군의관님 생각해보십시오. 저기 독일군 탱크가 세 대나 빤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길 위로 전진하면 보나마나 저들이 공격할 것입니다."

"네가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차라리 몇 사람 다치는 것이 전투 첫날 군법회의 같은 일이 있는 것보다는 낫다."

미군 지휘부나 미국 사회가 과연 일본계 2세들이 어떻게 싸울지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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