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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김영옥] 〈21> 사무라이 김 ②

머리 위로 불 뿜는 예광탄…7명 포로로 잡아
영옥의 머리는 컴퓨터처럼 신속히 적군 파악
길레스피 소령 "완벽한 임무수행 믿을 수 없다"

구름에 가려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독일군 기관총 소리가 들리면서 서 있던 병사가 쓰러졌다. 총탄에 맞은 병사는 기어서 나머지 반을 건넜다. 합류한 병사의 부상이 종아리 관통상으로 비교적 경상임을 확인한 영옥이 다그쳤다.

"명령에 불복종한 이유가 뭐냐?"

"바닥에 돌이 많아 포복으로 건너자니 아플 것 같았고 모두 안전하게 건너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바보 같은…. 혼자 귀대할 수 있겠나?"

"네."

"지금은 한 명도 아쉬운 처지라 아무도 붙여 줄 수 없다. 한 번 기어 보라."

병사가 기는 모습을 지켜 본 영옥은 혼자 귀대할 수 있겠다고 판단해 혼자 가라고 한 후 나머지 부하들을 점검해 방향을 틀어 산길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지형을 보니 저 멀리 둔덕이 있고 그 둔덕을 넘으면 원래 독일군 기관총 여러 대가 동시에 불을 뿜는 것을 보고 길레스피 대대장이 걱정했던 산으로 이어졌다. 영옥이 갑자기 부대를 정지시키면서 말했다.

"모두들 저 둔덕 보이지? 이 산과 저 산 사이에 있는 저 둔덕 말이야. 저기 분명히 독일군 기관총이 있다."

"…"

"…"

"어둡고 거리도 멀어 우리 눈에는 둔덕도 잘 안 보이는데 소대장님 눈에는 독일군 기관총까지 보입니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못해도 50야드는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둔덕을 가리키며 영옥이 하는 말을 병사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농담조로 받았다.

"눈에 보여야만 아나? 내가 적군이라면 분명히 저기 기관총을 배치했을 거다. 독일군은 아주 이론적이고 원칙에 충실하다. 분명히 저기 있다. 저것을 어쩌지 않고는 목적지로 갈 수 없으니 저것부터 손을 보자."

영옥은 1개 분대는 자기를 따라 정면에서 공격하고 다른 1개 분대는 우회해 뒤에서 협공하라고 지시한 후 몸을 굽히고 일단 앞에 보이는 덤불을 목표로 소리를 죽이고 신속히 움직였다. 덤불로 몸도 감추고 덤불 사이로 앞을 더 잘 보기 위해서였다.

덤불에 도착한 영옥이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덤불에 얼굴을 바짝 갖다대는 순간 갑자기 덤불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또 다른 얼굴 하나가 반대편에서 쑤욱 나왔다. 독일군이었다. 영옥은 심장이 멎는 듯 했고 당황한 독일군 병사는 무어라 두 마디 독일어를 내뱉었다. 얼떨결에 병사가 내뱉은 말이 아마도 그날 밤 암호일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영옥의 머리를 스치는 순간 영옥의 손가락은 이미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스즈끼 대위가 주고 간 권총은 이번에도 방아쇠가 잘 당겨지지 않았다. 권총이 불발이라는 것을 직감한 영옥이 이번에는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구르는 순간 영옥의 등 뒤에서 총성이 일었다. 이번에도 다케바였다. 다케바가 총을 쏘자 독일군이 기관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영옥이 짐작했던 그 위치였고 덤불에서는 불과 10야드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으로 기관총에서 쏟아져 나오는 예광탄들이 머리카락을 스치듯 영옥 위로 날아갔다. 전장의 병사들은 가끔씩 코미디언이 되곤 한다. 철모를 짓누르며 땅으로 기어들면서도 병사들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야 정말 기관총 아냐?"

"우리 소대장은 마술사라니까…."

독일군 기관총은 100발 정도만 쏘더니 갑자기 잠잠해 졌다. 뒤로 돌아간 1개 분대가 등 뒤에서 총을 들이댄 것이었다. 여기서 영옥 일행은 기관총 1대를 노획하고 독일군 7명을 포로로 잡았다. 영옥은 부하 2명이 포로들을 대대본부로 데려가게 한 후 골짜기를 타고 원래 목표했던 산으로 올라갔다. 산꼭대기로 다가서고 있다고 느낄 때쯤 위로부터 꽤 많은 무리가 땅을 밟는 군화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골짜기를 벗어나 매복한다."

영옥은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골짜기를 끼고 옆으로 난 오솔길 뒤로 부하들을 데리고 몸을 감췄다.

"쏠까요?"

부하들이 물었다.

"아냐. 그대로 기다린다."

영옥의 머리는 컴퓨터처럼 신속히 돌아갔다. 19명이 출발해 1명은 부상으로 돌려보내고 2명은 포로들을 데리고 갔으니 나머지는 16명이었는데 독일군은 우선 숫자가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영옥 일행이 매복해 있고 적군이 앞을 지나기는 하지만 선두를 공격하면 후미가 반격해올 것이고 후미를 공격하면 사실상 대부분은 놓치게 된다. 매복대형도 일렬횡대로 자칫하면 부하들 반쯤은 희생될 수 있다.

그것도 적진 속이다. 한마디로 지형도 익숙하지 않고 포진도 나쁘고 중과부적이란 얘기다. 게다가 내려오는 무리는 아무래도 길레스피 대대장이 걱정하던 기관총을 쏘던 바로 그들 같았다. 쓸데없이 부하를 희생시키며 전투를 벌일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영옥 일행의 매복을 모르는 독일군은 무어라 큰 소리로 주고받으며 골짜기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50명은 더 될 것 같은 독일군 무리를 보고 영옥은 아마도 기관총조 5~7개는 될 것이라고 계산하면서 두서없이 왁자지껄 주고받는 말은 제대로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짐작했다. 독일군이 완전히 빠져나가기를 기다린 영옥은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며 부하들을 데리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와 독일군 7명을 포로로 잡고 기관총 1개를 제거했던 둔덕을 다시 지나 포복명령을 어긴 병사가 부상을 당했던 지점에 이르자 독일군 한 명이 서성대고 있었다. 잡고 보니 덤불을 헤치고 얼굴을 들이밀면서 암호 같은 것을 외쳤던 독일군이었다. 영옥은 부하들을 정지시키고 말했다.

"우리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적은 내일 다시 온다. 너희는 여기 있어라. 나는 대대본부에 보고하고 다시 오겠다."

영옥은 포로로 잡은 독일군 한 명을 앞세우고 대대본부가 있는 600고지로 돌아갔다.

길레스피 대대장은 오랫동안 위궤양으로 고생했는데 대대장이 된 후 병세가 더 악화됐다. 영옥이 길레스피 소령에게 갔을 때 그는 막 심한 통증에서 벗어나 간신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얼굴을 찡그린 채 배를 움켜쥐고 엉거주춤 선 자세로 신음소리를 내며 영옥의 보고를 들었다.

"수고했다. 막상 보내긴 했지만 참으로 어려운 임무였는데…. 네가 떠난 후 얼마 있다가 갑자기 독일군 기관총들이 잠잠해진 것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했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래 부하들은 어디 있나?"

"아직 그곳에 있습니다."

"…?"

"대대장님 아직 상황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군은 내일 아침 저 산을 다시 뺏기 위해 분명히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까 걱정하시던 똑같은 위험에 다시 빠지게 됩니다. 우리 뒤에 적군 기관총이 깔려 있는 상황이 됩니다."

"음…"

"…"

"그래서?"

"제가 남았으면 합니다."

"좋다. 그렇게 하라."

영옥은 부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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