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김영옥]〈14> 아이러니
갈등 있었지만 아시아계 이민 2세라는 공통점 존재일본계 병사 자신이 태어난 미국 정부로부터 의심 받아
영옥은 식민지배 받는 한국에 대한 편견과도 맞서 싸워야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얘기처럼 하면서 영옥이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 같은 별명을 부르며 불평을 늘어놨다.
영옥은 이런 얘기가 들려올 때면 못 들은 척 했다. 영어로 늘어놓는 불평을 영옥이 모르는 척하자 이번에는 더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일본계 장교들도 가세했다.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영옥과 얘기할 때 '피진 영어'(Pidgin English)를 쓰는 것이었다. 피진 영어는 하와이 주민들이 영어와 원주민어를 섞어 만든 잡탕이었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처음 그들의 말이 피진 영어라는 것을 몰랐을 때 영옥은 속으로 사병들은 그렇다 쳐도 도대체 하와이대학은 어떤 곳이기에 표준영어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에게 졸업장을 주고 장교로 임관시키나 생각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00대대 장병들이 자기 부대를 부르는 이름인 '원 푸카 푸카'(One Puka Puka)도 피진 영어였다. '원'은 영어였고 '푸카'는 하와이 원주민어로 구멍이라는 뜻인데 전화번호 같은 것을 유머러스하게 말할 때 '0'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들의 피진 영어는 처음에는 영옥을 아주 곤혹스럽게 했지만 장병들 사이의 일체감을 높여줬을 뿐 아니라 유럽전선에서는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이들이 피진 영어에 가끔 일본어까지 한 두 마디 섞어 무전교신을 하면 독일군으로서는 도무지 알아챌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옥과 일본계 장병들의 관계가 갈등만으로 점철됐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정도 갈등이란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있는지 모른다.
그들의 부모가 일본인이고 영옥의 부모가 한국인이어서 그들이 자라면서 한국인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영옥과 다르고 영옥이 자라면서 일본인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그들과 달랐지만 둘은 훨씬 더 절박한 것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우선 둘은 언제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함께 전쟁터로 가야 하는 공동운명체였다. 전장으로 떠날 때는 자유를 수호한다거나 민주주의를 지킨다거나 하는 거창한 구호 속에 떠나지만 일단 전장에 투입되면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영옥도 병사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외에도 둘은 함께 나눴던 절박한 공통분모가 또 있었다. 둘은 모두가 아시아계 이민 2세로 철저한 인종차별의 피해자였다.
당시 유색인에 대한 미국의 인종차별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백인과 유색인은 서로 다른 화장실을 써야 했다. 화장실뿐 아니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대합실 역시 마찬가지로 백인전용 대합실과 유색인 전용대합실이 따로 있었다. 이런 경우 유색인이 백인전용 화장실이나 대합실을 사용하게 되면 즉시 체포됐다.
여기서 유색인이란 엄밀히 말하면 흑인을 얘기하는 것으로 황인종인 아시아계가 백인전용 화장실이나 대합실을 사용하면 경찰들도 이들을 체포해야 하는지 아닌지조차 혼돈스러워했다. 다시 말해 아시아계는 법적 정의조차 제대로 내려져 있지 않은 3류 시민이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그렇게 심했으니 흑인보다 열등한 종족으로 치부되던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할 만할 것이다. 제국주의의 팽창 과정에서 아시아를 식민지배의 대상 정도밖에 여기지 않았던 서구인들의 시각이 그대로 살아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미국사회에 팽배했던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더욱 심해졌다. 일본계 장병들은 부모형제들이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피를 흘려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라고 강요 받고 있었다.
미국은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도 싸우고 있었지만 독일계 이민자들이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격리 수용하지는 않았다. 같은 이민자라 해도 백인과 아시아계는 그만큼 본질적으로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다.
영옥도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다니던 대학도 걷어치우고 오랜 시간 방황해야 했다. 외모만으로는 아시아계 이민자를 앞에 두고 누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알기 어렵던 백인들은 길가는 한국계 이민자들에게도 '잽'(Jap)이라 부르며 토마토를 던지기도 했다. 영어로 '잽'은 한국어로는 '왜놈'이나 '쪽바리' 정도 되는 말로 일본인들을 비하해 부르는 아주 나쁜 말이었다.
장교고 사병이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두고 부대원들의 토론도 끝없이 계속됐다. 어떤 때는 장교나 사병들이 같이 모이기도 했지만 보통은 장교는 장교끼리 사병은 사병끼리 모였다. 장교들의 토론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영옥을 비롯해 소위와 중위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참가했다.
토론은 매주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시작해 다음날까지 끝없이 계속됐다. 막간을 이용해 카드 게임도 하고 유크렐리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불렀지만 모임의 핵심은 "왜 싸워야 하느냐?"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느냐?"에 대한 토론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이 토론은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장병들 모두에게 천금 같은 정신교육이 됐다.
보통 미군들은 한 가지 전쟁만 하면 됐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는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상대로 싸우는 군사적인 전쟁이었다. 일본계 장병들은 보통 미군과 본질적으로 달리 두 개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들 일본계 장병들은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것 외에도 자기들이 태어난 나라이며 자기들이 목숨 바쳐 싸우는 국가가 자기들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심과 편견을 상대로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영옥은 여기에서 한 가지 전쟁을 더 치러야 했다. 영옥의 세 번째 전쟁은 일본계조차 멸시받는 상황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한국인에게 쏟아지는 편견과의 전쟁이었다. 세 전쟁 모두 절대로 질 수 없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훈련과 토론 속에서도 시간은 계속 흘렀고 1943년 여름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부로부터 이동명령이 내려왔다. 목적지는 북아프리카 오란이었다. 드디어 전장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훈련장에서 같이 땀을 흘렸던 영옥과 일본계 병사들은 앞으로는 전쟁터에서 같이 피를 흘려야 했다.
8월21일 영옥도 소대원들을 챙겨 제임스 파커 호에 몸을 실었다. 한 때는 유람선이었다가 전쟁과 함께 수송선으로 징발된 제임스 파커는 서서히 파도를 가르며 뉴욕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조금씩 멀어졌고 잠시 후 자유의 여신상도 수평선 아래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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