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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강제북송, 동포들 두 번 죽이는 일”

“중국정부는 탈북자 강제북송을 중지하라!”   14일 오후 뉴욕 유엔본부 인근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맨해튼 다그 함마슐드 광장에 모인 뉴욕한인회와 민주평통뉴욕협의회, 재향군인회 미동북부지회 등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 50여 명은 탈북자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며 집회를 열었다.     집회 참가자들에 따르면, 2000명 넘는 탈북자들이 중국에 억류돼 있는 가운데 지난 8일 620여 명이 강제 북송됐다. 김광석 뉴욕한인회장은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은 죽거나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된다”며, “중국 정부의 반인권적 행위를 전 세계적으로 규탄해야 한다”고 전했다.     탈북자 구호인 씨는 강제북송을 당했던 본인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는 “2000년 탈북을 시도했다가 중국에서 잡혀 3일 동안 감옥에 있다가 북송됐는데, 북한 감옥에서 나체로 벗겨진 채 구타를 당했다”며, “그 후 강제 노역을 하러 농장으로 보내졌는데, 혹독한 업무 강도에 아파서 쓰러지니 장례조차 치러주기 싫다며 달구지에 실어 집으로 보냈다”고 설명했다. 몸이 회복된 그는 다시 탈북을 시도해 성공했고, 현재는 뉴욕의 주유엔북한대표부와 유엔 본부 앞에서 매주 탈북자를 위한 시위를 하고 있다.     테렌스 박 아시안아메리칸유권자연맹 대표는 “탈북자들은 누군가의 할아버지이자 아버지, 또 아들”이라며, “강제 북송은 살인 행위”라고 호소했다.     시위를 이끈 최윤희 뉴욕한인회 교육문화담당 수석부회장은 “바이든 행정부와 유엔이 협력해 중국 정부를 설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길 바란다”고 외쳤다.     중국에는 억류된 1400여 명의 탈북자들이 아직 남아있고, 이들도 강제 북송될 위험에 처해 있다. 제임스 정 뉴욕구국동지회 회장은 “남은 북한 동포들을 살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며,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이 원하는 나라로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   글·사진=윤지혜 기자 yoon.jihye@koreadailyny.com강제북송 탈북자 탈북자 강제북송 탈북자 문제 김광석 뉴욕한인회장

2023-11-14

탈북자 자녀 위해 시니어 정성 모아

탈북자 자녀들을 돕기 위해 한인 시니어들이 정성을 모았다.   라구나우즈 한인골프회(회장 송기평)가 지난달 29일 라구나우즈 빌리지 컨트리클럽에서 개최한 탈북자 자녀 장학기금 모금 골프대회에 150여 명이 참가,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보탠 것.   송기평 회장은 이날 시상식에서 “라구나우즈 한인회가 골프회 회원 중심으로 화합하고 협력해 라구나우즈 빌리지가 즐거운 타운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특별히 오늘 대회를 탈북자 자녀 장학금을 마련하는 의미 있는 행사로 치를 수 있게 돼 회원 모두에게 감사하다. 해가 갈수록 발전하는 골프회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라구나우즈 한인골프회는 대회 수익금 전액을 라구나우즈 한인회(회장 김일홍)를 통해 탈북자 자녀들의 장학금 지원에 쓸 것이라고 밝혔다.   골프회 임원은 송 회장 외에 장금주 부회장, 조재성 총무, 김종배·김수지 진행위원, 복진성 경기위원 등으로 구성됐다.   남가주의 대표적 실버 단지인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한인들은 지난 2014년부터 탈북자를 돕는 비영리단체 링크(LiNK)에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라구나우즈빌리지는 총 27홀 규모 골프 코스를 보유하고 있다.골프 탈북자 탈북자 자녀들 한인 시니어들 시니어 정성

2023-07-10

[김형석의 100년 산책] 자유를 찾아서…나도 탈북자의 한 사람이었다

1947년의 일이다. 해방 2년 후였기 때문에 북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정권 밑에서는 교육다운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내가 추진해온 중고등교육을 단념하고 월남하기로 했다.   그해 여름방학이 되었다. 7월 10일이었다. 집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등지고 생각에 잠겼다가 꿈을 꾸었다. 제복을 입은 보안서원이 나타나 장총을 내게 겨누며 “왜 김일성대학에 교수로 오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미안하다. 더 좋은 사람을 추천하기로 했으니까 좀 기다려 달라고 약속했다” 했더니, 그가 그렇게 됐느냐는 표정으로 하늘로 향해 발포했다.   아내와 함께 탈북자 수용소 갇혀   그 총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산 아래 동네를 내려보았다. 내 동생이 헐떡이면서 뛰어오더니 “형님, 빨리 산속으로 도망치세요. 저 아래 자동차에 김현석 장로가 잡혀가는데 형님도 잡으러 올라올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 한 대가 우리 집으로 오는 길목에 서 있고, 두 사람이 우리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차가 다시 떠났다. 김 장로는 내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 이사장이었는데, 그날 체포되었다가 6·25 때 피살되었다.   나는 탈북을 서두르기로 했다. 8월 16일 아침, 아내는 10개월 된 아들을 업고, 나는 아무 짐도 갖지 않기로 했다. 평양에 들렀다가 다음 날 아침에 기차를 타고 사리원에서 해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다. 늦은 오후에 간신히 해주역에 도착했다. 가까이 있는 한 여관을 찾았다. 여관주인이 우리를 깊숙한 안방으로 안내했다. “안심해도 됩니다.” 탈북인으로 직감한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용강 바닷가로 가다가 검문을 받고 탈북자 수용소로 인계되었다. 초등학교 비슷한 두 채의 건물이었는데 앞 건물은 취조실과 남자수용소, 뒷 건물은 여자수용소였다. 나를 인계받은 계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벽에 걸린 전화통이 요란히 울렸다. 계장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통화 내용이 내게까지 들려왔다. “○○계장입니다.” “오늘도 월남하다가 잡혀 온 놈들이 많아요?” “예, 어제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막 평양에서 지시가 왔는데, 지금부터 잡히는 놈들은 책임지고 무조건 북송하라는 명령입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온 계장이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딴방에 대기 중이던 아내에게 나오라고 했다. 부하 한 명을 불러 “이 가족을 버스 정거장에서 떠나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가 나간 후에 갑자기 쪽지 생각이 났다. 나와 함께 교사로 있던 조 선생이 “혹시 도움이 될까 알려 드리는데 제 누님이 해주에 살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을 돕고 있는데 제가 전화번호를 드리겠습니다”라며 건넨 메모였다.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묻더니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여자는 내 아내를, 남자는 나를 이끌고 나섰다. 안내를 받아 들어갔더니, 조 선생 누님이 인사를 하면서 “죄송하지만, 불편하시더라도 선생님은 다락방에서 쉬시고 사모님만 거실에 머물러 달라”고 했다. 검문관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언제 떠나겠느냐고 물었다. 빠를수록 좋다고 했더니, 오늘 밤이나 새벽에 떠나도록 해보자고 했다.   자정이 넘었을 때였다. 안내원을 따라나섰다. 수수밭 안으로 들어서더니 바다 쪽을 향해 숨을 죽이고 걸었다. 다행히 아들애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경비원들이 200~300m씩 왕복하면서 바닷가를 순시하고 있었다. 그 중간시간에 작은 나룻배가 와 닿았다. 탈북자는 우리만이 아니었다. 옆 숲속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서 배는 순식간에 만원이 되었다. 나는 아내를 태우고 더 올라탈 수가 없어 다음 배를 기다렸다. 10여 분 후에 또 한 척이 왔다. 남자 다섯이 곧바로 승선했다.   우리 배를 본 경비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나 배는 이미 바다에 들어선 뒤였다. 마치 작은 배들의 전쟁터 같았다. 경비원이 탄 배가 나룻배를 쫓아가고 나룻배들은 큰 어선 사이로 숨어가곤 했다. 사공이 “위급하게 되면 수영을 하는 손님은 바다로 뛰어들어 어선들 뒤에 숨어라”고 했다. 아내가 탄 배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들애가 울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하느님께 돌보아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느님께 기도, “자유 만세” 외쳐   얼마 후 사공이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라고 했다. 한 사람이 “자유 만세!”를 선창했다. 나도 눈물을 닦았다. 새벽 시간이었다. 바다 남쪽 해안에는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있었다. 서북청년단원들이 월남한 사람들을 위해 새벽 한기를 피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사공이 “선생님들이, 우리도 자유로운 새 나라에서 살게 도와 달라”던 음성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서북청년단원에게 아내 이름을 적어 주면서 내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모닥불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날 밤 탈북자가 50~60명, 또는 그 이상일 것 같기도 했다. 20여 분이 지났을까. 아내가 청년의 안내를 받아 찾아왔다. 우리는 말 없이 쳐다보았다. 이렇게 될 줄 믿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아내는 나를 위해,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드린 것에 대한 감사의 모습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경비정에 끌려가는 나룻배를 셋이나 보았다는 것이다. 아들애는 그제야 눈을 뜨면서 엄마 품에 안겼다. 나는 마음속으로 울음을 참고 참았다. 자유는 목숨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탈북자 자유 탈북자 수용소 아내 이름 자유 만세

2023-06-09

힘들게 탈북, 자유 찾은 미국서 추방…멕시코서 밀입국 뉴욕 거주

힘들게 북한을 탈출했는데 자유를 찾아온 미국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멕시코를 통해 밀입국해 뉴욕에 사는 40대 탈북 여성 유심(가명)씨의 이야기다.   온라인 매체 ‘다큐멘티드’는 최근 유심씨의 딱한 처지를 전했다. 과거에는 밀입국이라도 망명이 허용된 탈북자 케이스들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민 당국이 밀입국을 엄중하게 다루고 있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본명과 얼굴을 숨긴 채 인터뷰에 응한 유심씨는  여동생이 한국과 미국의 TV 드라마가 담긴 CD를 다량 소유했다는 죄목으로 가족 모두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갔다.   10여년을 그곳에서 굶주림과 매질, 정신적 학대를 경험했다는 유심씨는 2013년 브로커를 통해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모르는 남성에게 팔려가 노예처럼 살며 성 착취를 당했다. 중국 공안에 적발돼 북한으로 추방되면 사형당하는 게 더 두려워 참고 지내다 결국 2016년 그렇게 원하던 한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더 힘들었다. 말투로 탈북자임을 식별해 조국을 버린 ‘배신자’ 또는 ‘스파이’라는 눈길을 보내며 차별하는 한국인들의 태도에 극심한 우울증과 고립감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한국 정부 공무원이 그녀의 개인 정보를 다른 탈북자에게 공유한 것을 알게 된 후 가족들의 안전에 불안감을 느낀 유심씨는 2021년 봄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밀입국하고 망명을 신청했다.   하지만 현재 유심씨의 케이스는 기각된 상태로, 현재 한국으로 추방 절차를 밟고 있다.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지난해 말 유심씨의 케이스를 기소재량권(prosecutorial discretion) 절차를 이용해 수속해 달라는 변호사의 요청에 “해당 케이스는 기소재량권으로 검토할 수 없으며 망명 이유도 해당하지 않는다”며 기각 통지서를 보냈다. ICE의 기소재량권은 담당자 재량으로 케이스를 승인하거나 기각할 수 있어 일반 케이스보다 대기 기간이 짧아 망명 신청자들이 선호하는 절차다.     항소심을 제기한 유심씨는 “미국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끼며 살고 있다. 또 한국으로 추방되면 북한의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강조하며 ICE의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한편 시라큐스대 산하 업무기록평가정보센터(TRAC) 데이터에 따르면 2002년부터 올 2월까지 이민법원에 접수된 망명 신청 중 북한 국적자 케이스는 36건이다. 가주 15건, 뉴욕 12건, 애리조나 4건, 텍사스 3건, 워싱턴과 일리노이주에서 각각 1건씩 접수됐다. 이중 승인된 케이스는 25건이며 11건이 기각됐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미국 멕시코 밀입국 뉴욕 탈북자 케이스들 탈북 자유

2023-04-07

“빈부격차 느끼지만 노력만큼 기회있어 행복”

  “뉴욕의 살인적 물가를 온몸으로 느낍니다. 홈리스·범죄를 보며 빈부격차도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북한에 빈부격차가 없었을까요. 노력한 만큼 기회를 얻는 이 시스템이 모두가 가난한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북한에 억류됐다 숨진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부모가 주는 장학금의 첫 수혜자가 된 탈북자 이서현씨. 지난 5일 뉴욕에서 화상으로 만난 이 씨는 “어떤 장학금보다 의미가 크다”며 비슷한 처지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바깥세상을 경험한 북한인들은 실태를 인지하면서도, 까마득한 두려움이 있다”며 “자유 세계에서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고, 도와주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금고를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와 2014년 한국으로 탈출한 이 씨는 2016년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뉴욕에 거주하며 이번 학기부터 컬럼비아대 국제행정대학원(SIPA·School of International and Public Affairs)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북한 주민이 미래에 부유한 삶을 살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이 씨와의 일문일답.   -장학금 수혜 소감은, 언제 처음 북한 문제를 인지했나.   “웜비어 부모에 대한 죄송함과 응원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북한인권위원회(HRNK) 갈라에서 만났다. 대학원 합격 후 연락드렸더니 큰 결정을 해 주셔서 감사하다. 2012년 중국 유학시 ‘왜 북한은 이렇게 못 살지’라는 질문에 빠져 있었는데, 중국인 택시 기사의 ‘중국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했는데, 왜 너희 지도자는 한 번도 그런 결정을 안 하냐’는 질문이 확 꽂혔다.”   -장성택 처형 등을 지켜보며 탈북을 결정했다.   “통상 간부가 해외에 거주하면 자녀들은 인질인데(때문에 이 씨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다 정책이 바뀌어 중국 유학을 나왔다), 운 좋게 온 가족이 해외에 있어 제3국 비행기 티켓을 살 수 있었다.”   -북한 젊은 층이 한국을 보는 시각은.   “드라마·영화 영향에 살기 좋은 자유로운 나라라고 알고 있고, 말투·옷·헤어스타일도 따라하며 동경한다. ‘오빠, 이거 할거야?’ 라는 말투를 많이 따라하고 웃었다.”   -장마당 세대(북한판 MZ·고난의 행군 이후 청년들)의 변화 주도 가능성은.   “장마당이 자연스레 형성됐다고 보는 것은 오해로, 철저한 통제시장이다. ▶시간(오후 2~5시) ▶판매자격(55세 이상 여성만) 등이 엄격해 변화주도 가능성은 제한적. 한 사람 희생으로 가능했다면 충분히 북한도 변했을텐데, 연좌제가 문제다.”   -그만큼 아버지가 대단한데.   “저희가 나와 있어 결정이 가능했다. 한국으로 온 뒤에도 도청·해킹에 시달렸고, 북한 정권이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북한에 남은 할머니와 친척을 출연시키기도 했다. 신변 위협이 커 미국 이민을 선택했다.”   -뉴욕에 살며 불만은 없는지.   “윈스턴 처칠의 ‘자본주의의 고질적 폐해는 풍요의 불평등한 분배, 사회주의의 태생적 미덕은 가난의 평등한 분배’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회주의를 이론으로 배운 사람은 신봉자가 되고, 몸으로 배운 사람은 반공주의자가 되는 것 같다. 전 몸으로 배워서(웃음). 학비가 너무 비싼 것은 고민이다. 최근 고펀드미(https://gofund.me/891bfa7c) 페이지와 기부 연락처(pyonghattanite@protonmail.com)도 만들었다.”     -한·미 지도자에게 한마디.   “북미정상회담에 북한이 나왔던 것은 제재와 군사압박 때문이고, 핵 포기 의지는 없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북한이 장기집권 체제를 포기하고 개방하도록 강력히 요구해줬으면 한다.”   -북한에 대해 그리운 것이 있다면.   역시 사람이다. 제가 아는 모든 분이 무사하길 바란다. 하루빨리 뵈었으면 좋겠다.  김은별 기자 kim.eb@koreadailyny.com뉴욕 탈북자 탈북민 이서현 오토웜비어 웜비어 장학금 북한 컬럼비아대

2022-09-07

탈북민 지원 다큐 콘서트 개최…라구나우즈 탈북자 돕기회

 ‘라구나우즈 한인 탈북자 돕기회’가 오는 15일(화) 기금 모금을 위한 다큐 콘서트를 연다.   다큐멘터리와 공연이 결합된 이 콘서트는 이날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유튜브의 닥터 도토리(Dr. Dotori) TV로 생중계 된다.   프렌치 정 박사가 진행하는 콘서트에선 오랜 기간 작업 끝에 완성된 탈북 관련 다큐 동영상이 공개된다. 정 박사는 다큐 제작, 편집, 나레이션을 모두 맡았다. 정 박사는 Dr. Dotori TV로 음악과 역사 강의를 하고 있다.   콘서트에선 타인종을 포함한 자원봉사자 40명의 국악과 서양 음악, 전통 무용 공연이 이어진다.   미국에서 전통 음악을 알려온 국악인, 모금 운동을 지원하는 타인종 음악가 등이 장구, 대금, 가야금, 난타, 기타, 클래식 기타, 첼로, 바이올린, 잉글리시 호른, 피아노 등을 연주한다.   라구나우즈 한인 탈북자 돕기회는 지난 2013년부터 탈북자 지원을 시작했다. 1명의 탈북 경비는 3000달러로 알려져 있다. 이 단체는 지금까지 77명의 탈북을 도왔다.   기부는 탈북자 지원 비영리단체 링크(LINK)에 연결된 온라인 계좌(bit.ly/3toQ9rh)에서 하면 된다.   행사 및 기부 관련 문의는 박승원씨(253-583-6588)에게 하면 된다.탈북민 콘서트 탈북자 지원 다큐 콘서트 탈북민 지원

2022-03-09

[OC] 선박 이용한 밀입국 조직 OC로 우회상륙 급증

선박을 이용한 밀입국 시도가 증가하는 가운데 오렌지카운티를 상륙지점 또는 상륙 후 임시 거점으로 이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멕시코 국경지대와 인접한 샌디에이고 카운티에서 해안경비가 강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침투가 용이한 오렌지카운티에 상륙을 시도하는 밀입국 기도가 증가하는 것. 연방이민세관감시국(ICE)은 지난 달 29일 애너하임의 밀입국자 임시 거처를 급습 13명을 체포했다. ICE의 2일 발표에 따르면 수사관들은 이날 오전 3400 에어리얼 플레이스의 아파트 단지내 한 유닛에서 밀입국 조직원 4명을 체포하고 이들을 통해 불법 입국한 9명의 남성 여성 1명의 신병을 확보했다. 당시 밀입국자들은 젖은 옷을 입은 채였고 온 몸에 모래가 묻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버지니아 카이스 대변인은 "ICE가 이날 오전 랜초 팔로스버디스 해변에 밀입국자를 태운 보트가 당도할 것이란 제보를 입수 해안경비대 등과 함께 해당 지역을 감시했지만 문제의 보트가 엔진 고장을 일으켜 칼스배드에 상륙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수사요원들은 칼스배드에서 밀입국자를 태우고 애너하임으로 향한 밴 차량을 미행한 끝에 밀입국 조직을 일망타진했다"고 덧붙였다. 수사 결과 밀입국자들은 불법입국의 대가로 일인당 6000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단속과 관련 국토안보국측은 최근 들어 바다를 이용한 밀입국 시도가 늘고 있으며 보트의 상륙 지점 또한 샌디에이고 카운티 일변도를 벗어나 오렌지카운티 심지어 LA 카운티로 확산되는 추세라고 밝혔다. 오렌지카운티에선 지난 2월 샌오노프레 주립공원 해변에서 18명을 태운 밀입국선이 당국에 의해 적발됐다. 또 지난 해 12월에도 크리스탈 코브 주립공원 해변에서 보트로 밀입국을 기도하던 이들이 단속망에 걸리는 등 밀입국 조직이 노리는 주요 상륙지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ICE 국토안보국 등은 오렌지 LA카운티를 겨냥한 범죄조직의 선박 이용 시도가 증가함에 따라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난 해 말 OC.LA카운티 통합해양지휘소를 만들고 해안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통합해양지휘소엔 두 기관 외에 국경수비대 OC LA카운티 셰리프국도 참여하고 있다. 당국은 지난 회계연도 중 밀입국을 시도한 배 110척과 867명을 적발한 바 있다. 이 수치는 이전 회계연도에 비해 약 두 배 가량 증가한 수치이다. 올 회계연도에선 지난 해 수준을 뛰어 넘는 단속 실적이 예상되고 있다. 지난 2월 중순 현재까지 당국은 카운티 남부에서 적발된 3건의 밀입국 기도를 포함 40척의 밀입국선에서 265명을 체포하는 실적을 올렸다. 임상환 기자 limsh@koreadaily.com

2011-05-03

"한쪽에서는 굶어 죽는데 생일잔치가 웬 말"…맨해튼 북한대표부 앞서, 탈북자들 오늘 규탄 시위

북한이 오는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탈북자 단체들이 오늘(15일) 오전 11시 맨해튼 주유엔 북한대표부 앞에서 규탄시위를 벌인다. 미주탈북자선교회 산하 평양예술찬양단을 이끌고 있는 마영애 단장은 “북한대표부가 뉴욕에서도 주요 외교사절을 초청해 김정일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질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한편에서 북한 주민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뉴욕에서 이런 행사를 갖는 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시위 배경을 설명했다. 시위에는 마 단장을 비롯해 미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들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한국에서도 탈북자 단체들이 김 위원장의 생일을 앞두고 연합해 대북전단 날리기에 나선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16일 낮 12시에 파주 임진각에서 탈북자단체들이 모여 대북전단을 띄울 것”이라며 “탈북자 단체가 연합해 대북전단을 보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대북전단 날리기 행사에는 북한민주화위원회와 탈북자동지회, 북한인민해방전선 등 22개 단체가 참여한다. 안준용 기자 jyahn@koreadaily.com

2011-02-14

['아메리칸 드림' 일구는 신세대 탈북자] "내 이름은 조셉…SAT 준비하러 LA 왔어요"

일반 탈북자들과는 큰 차이, 유튜브에 동영상 등 올리고 SAT 준비하며 명문대 노려 한인 위탁가정서 신용 마찰, 이민자가 겪는 수업료 치러…통일, 북한주민에도 희망줘야 조셉 김(20)은 3년 전 학교 미술시간에 나무를 그렸다. 나무는 그의 인생이다. 그림 속 꺾어진 나뭇가지는 부모를 잃은 것을 뜻한다. 대신 가지가 많다. 친구들이다. 그의 나무는 키가 작다. 자라는 데 한계가 있다는 뜻이란다. 기자는 지난 해 10월 처음으로 조셉을 만났다. 유튜브에 오른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서다. 동영상 속의 소년은 일반 탈북자의 모습과 달랐다. 너무 활기차게 축구공을 차는 모습이 마치 나이키 광고 같았다. 영상 밑에 붙어나오는 자막만이 그의 과거를 확인시키고 있었다. "내 이름은 조셉입니다 저는 북한사람입니다. 축구를 좋아합니다. 북한에선 축구를 하면서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 인터뷰는 쉽지않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셉은 다를 것 같았다. ▶ 소년 김광진 조셉이 됐다 8월 초 LA에서 남쪽으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링크(LiNK) 사무실을 찾아 갔다. 링크는 탈북자들의 미국정착을 돕고 있다. 조셉이 거기 있었다. 조셉은 난민지위를 인정받아 미국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 중 한 명이다. 링크에 따르면 2010년 6월 현재 99명의 탈북자가 미국 영주권을 받았다. 조셉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16살 까지 김광진으로 살았다. 소년 김광진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이다. 두만강을 지척에 둔 중국과의 국경지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 김정숙이 태어난 곳이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다른 곳 보다는 경기가 활기찬 편이다. 하지만 회령주민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배고프기는 마찬가지다. 김광진의 아버지는 회계일을 하다 결국 굶어 죽었다. 어머니와 누나는 중국으로 탈출했다. 혼자 남겨진 광진은 소학교(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그만 뒀다. "고아로 4년을 살았어요. 빌어 먹어도 보고 도둑질도 했어요. 하지만 항상 배가 고팠어요. '여기 있으면 100% 죽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중국으로 가자. 살 확률이 50%는 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6년 2월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그것도 낮에 건넜다. 무엇보다 밤이 무서웠다. 또 밤에 건너다 잡혔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처음 한 달 간은 북한에서 보다 더 자유가 없었다. 중국 공안에게 잡힐까봐 밖으로 다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도 조금 피곤하면 악몽을 꾼다. 중국에 있는데 경찰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 꿈이다. 깨어나 보면 베개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2007년 2월15일 링크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왔다. 17살 때다. 그 이후로 김광진은 조셉 김이 됐다. ▶ SAT만 없으면 낙원이다 "내가 에세이에서 엠퍼사이즈(emphasize:강조하다)했던 건 북한을 탈출해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된 과정과 문화차이 내 꿈들이에요." 조셉은 미국에 온 지 3년이 됐다. 청소년이라 적응이 빠르다. 인터뷰 중간 중간 영어가 튀어나온다. 조셉은 버지니아의 위탁가정에서 미국인 양부모와 지낸다. 하지만 영어 발음은 아직 고칠 때가 많다. "사전 하나 가지고 영어공부를 하는데 발음기호를 읽을 줄 몰라요. 무조건 단어만 하루에 50개씩 외워요." 조셉은 늦깎이 고등학생이다. 나이는 20살이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다. 다른 청소년들 처럼 대입준비를 해야 한다. 조셉은 여름방학 동안 SAT(대학입학시험)준비를 위해 LA에 왔다. 링크가 소개시켜 준 자원봉사자가 조셉의 학업을 돕고 있다. 아침 10시 부터 오후 3시까지 개인교습을 받는다. "하루 2~3시간 자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에세이를 쓸 때는 1시간도 못 잤어요. SAT만 없으면 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점수가 1200점 밖에 안된다. 2400점 만점에 반타작을 하는 셈이다. 목표는 1800점 이상 점수를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점수와 상관없이 하버드 예일대 등 최고 명문대에도 지원할 생각이다. 조셉은 대학지원 에세이에 농구 얘기를 적었다. 미국생활에 적응하던 조셉의 첫 시련은 언어도 이념도 아니었다. 농구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의 자존심을 건든 것이다. "학교에서 농구를 했어요. 규칙도 모르고. 말도 못 알아듣고. 북한에서는 농구공을 2번 만져봤어요. 친구들이 무시하듯 뭐라고 하는데 너무 속이 상했어요. 운동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농구공을 사서 하루 2시간씩 연습했지요." 같은 또래 아이들이 사춘기를 경험할 때 조셉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다. "나도 모르게 예민질 때가 있어요. 그 때는 농담해도 짜증이 나요. 하지만 부모님이 모두 양부모라 (반항같은 것을) 못해요." ▶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불렀다 SAT공부를 위해 LA에 있는 동안 조셉은 링크가 제공하는 집에서 링크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 곳에는 대니가 있다. 또 다른 탈북 청소년이다. 대니는 오랜 만에 '북한식 김치'를 먹었다. 북한식 김치는 담그는 방법이 다르다고 한다. 엄마가 직접 담가 준 김치다. 대니는 3년 전 중국에서 엄마와 헤어졌다. 엄마는 대니를 따라 미국으로 오려했지만 주중 미국 영사관 앞에서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는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 엄마가 지난 2월 대니를 보러 미국을 방문했다. 엄마와 샌타모니카 해변을 걸으며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둘은 많이 울었다. 대니도 조셉처럼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이다. 대니가 3살이 더 많다. 대니는 18살에 북한을 탈출해 중국 용정시에서 살았다. 선교사를 통해 링크를 알게 됐고 미국 올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고향은 같지만 조셉과 대니가 처음 만난 것은 중국에서다. 둘은 링크의 도움을 받아 북한으로 오기 전 까지 중국에서 6개월을 함께 있었다. 탈북자들은 보통 중국 내 미국 영사관에서는 4개월 정도 신분확인 과정을 거친다. 진짜 탈북자인지 확인을 하는 기간이다. '김일성 장군' 노래나 북한의 최신유행 가요를 불러 보라고 한다. 고향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물어본다. 대니는 북한에서 학교를 그만둔 사정을 얘기했다. "교육은 무료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학부모에게 돈을 요구해요. 돈이 없으니 토끼가죽 같은 것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데 저는 그게 싫어서 학교에 안 나갔어요. " 2007년 미국으로 오면서 조셉은 버지니아 대니는 유타의 위탁가정에서 살게 됐다. ▶이민자가 겪는 수업료 냈다 보통 탈북자들은 한국과 미국중 하나를 목적지로 선택한다. 미국을 택하면 왜 미국으로 가려하느냐고 묻는다. 왜 한국을 택하지 않았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조셉은 영어 때문에 미국을 택한 경우다. "한국사회는 영어를 무척 강조하는 것 같아요. 영어를 모르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을 택했어요." 대니는 중국에서 봤던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음에는 그냥 자유를 찾아 왔다고 했어요. (미국 영사가) 한국은 자유가 없냐고 미국행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영사관에 머무는 동안 '신입사원'이라는 드라마를 보게됐어요. 좋은 대학을 나온 주인공이 컵라면 먹어가며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거에요. 미국 가는게 나을 것 같다고 다시 말했지요." 미국 생활은 그러나 대니의 예상과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 앞에 일하는 직원이 칠리를 잘못만든 채 퇴근해버렸어요. 매니저가 제대로 안 만들었다며 저에게 화를 내는 거에요. 내가 한 일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는데도 당장 집에 가라고 하더군요." 대니는 미국 실정을 잘 몰라 이민자가 겪는 수업료도 톡톡히 치렀다. "유타에서 한인 가족과 함께 살았어요. 위탁가정이죠. 미국에서는 신용점수가 중요하다고 해요. 신용을 쌓아 준다고 해서 소셜시큐리리티 번호를 알려줬어요. 그런데 자꾸 제 이름으로 통지서가 와요. 700달러 1000달러씩. 산 것이 없는데 왜 자꾸 통지서가 오냐고 물어도 걱정말라는 답만 들었어요. 결국 돈을 내지 않아 콜렉션으로 넘어가고 제 신용점수도 엉망이 됐어요. 한인 가족은 형편이 나쁜 것도 아니고 벤즈 BMW를 몰면서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한민족이라고 믿었어요. 어렵게 만난 거니까 기쁘고…. 한 번 당하니까 마음이 닫히더군요." ▶통일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조셉은 축구를 좋아한다. 지난 6월에는 LA한인타운에 와서 2010년 월드컵을 구경했다. "한국-우루과이전을 보러 갔어요. 모두들 빨간티를 입고 응원을 나왔는데 저 혼자…. 북한과 브라질도 봤지요. 정대세가 우는데 저도 막 눈물이 나는 거에요. 아 박두익 감독요. 북한이 44년만에 16강 본선에 올랐어요.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아직도 한국과 북한을 잘 구분 못하는 미국인들이 많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북한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적어도 조셉이 생각하기엔 그렇다. "북한에 대해서 묻는 게 '북한 말은 어떠냐 한 번 해봐라. 북에도 PC방 있냐 노래방은 있느냐' 그 정도죠. 그런 질문 받으면 조금 슬픈 것 같아요. 원망도 들고. 전쟁 이후 세대를 조금만 교육했으면. 사실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지금 세대들인데. 기껏 물어본다는 게…" 묵묵히 조셉의 얘기를 듣고 있던 대니도 끼어 들었다. "한숨이 나와요. 그냥 왕래만 할 수 있으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남북한이 같은 상황에서 시작해 한국은 올라섰는데…. 젊은 층은 통일하면 한국도 다시 힘들어 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돈을 아까워 하는 것 같아요. 통일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동서독 통일을 예로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조셉이 말을 이어갔다. "남북한은 독일과 다르다고 생각해요. 동서독은 계획대로 통일 된 것이 아니고 갑자기 됐어요. 한국은 독일을 사례를 경험했으니 정부에서 미리 통일을 준비하고 있을 거에요. 저 같은 고등학생도 생각하는 일을 정부에서 안 할 리가 없으니까요." 한국에선 최근 통일세가 논란이 됐다. 통일이 될 경우 드는 경제 비용을 대비해 지금 미리 세금을 걷자는 아이디어다. 하지만 통일세에 대한 반발도 심하다는 얘기를 조셉에게 해줬다. "국민 모두가 정치인은 아니니까요. 회사 출근하고 하루 하루 살다보면 (반대하는 것도) 이해는 되요. 공부만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모를 수 있지요.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충분히 (통일세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대니는 통일 이후에도 걱정이 된다고 했다. "통일이 돼도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 것인지 혹시 북한 고위층이 또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일반 주민들은 계속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요. 통일은 북한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방식이 돼야 할 거에요. 통일이 되면 일반 북한 주민들도 잘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할 필요도 있어요." ▶ 배고픔은 정치를 모른다 조셉은 일반 청소년들 보다 아무래도 북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그에게 북한은 무엇일까. 망설임 없이 '고향'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북한은 힘들 때도 편할 때도 그리워하는 '고향'이에요. 나서 자란 곳이지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신변보장이 된다면 다시 가보고 싶어요."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조셉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햇볕정책이 무엇인지 북한 주민들은 몰라요. 다만 옥수수 값이 내리면 좋아하죠. 바로 천진항에 한국에서 옥수수가 들어 올 때지요. 숨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잠시 숨을 쉬게 해주는 것이지요.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작은 것은 포기하는 것 같아요.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 까지 대화를 중단하는) 지금의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북한 사람들에게 결국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통일이 된다고 해도 어려서부터 체제유지를 위해 세뇌를 당한 북한 주민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지 궁금했다. "세뇌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김정일은…믿지 않아요. 세뇌된 것을 바꾸려면 인간관계를 쌓아가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요. 먼저 친해지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 지요." 조셉은 링크 사무실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배고픔은 정치를 모른다'는 표어가 적혀 있다. "저는 아메리칸 드림을 믿어요. 최선을 다하면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이민자도 주지사가 됐지요. 북한에 있을 때는 '20살 되면 북한 돈 100만원 벌겠다'는다 게 꿈이었어요. 지금은 돈 보다는 원없이 배우는 게 목표에요. 정치학도 공부하고 경제도 알고 싶어요. 힘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 북한 주민들에게 꿈이 되고 싶어요. '최선'이라는 글자를 좋아해요. 실패해도 후회는 없을 거에요." 대니는 일자리를 찾는게 목표다. 고등학교 검정고시(GED)를 준비하는 것도 취직을 위해서다. "스스로 독립해야지요. 취직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에필로그 17일 LA한인타운에서 남쪽으로 30분 정도 떨어진 도시 토런스의 한 한식당. 조셉 대니 그리고 '신'이라고만 불리는 또 다른 탈북자 한 명과 저녁을 함께 했다. '신'은 북한 수용소에서 태어난 탈북자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알리는 홍보활동을 펼치다가 위협을 받은 적이 있어 인터뷰에 동참하지 않았다. 신은 조셉을 신세대 탈북자라고 불렀다. 조셉은 페이스북으로 친구와 연락하고 고향이 그리우면 구글어스를 찾아가 회령의 모습을 살핀다. 조셉은 아직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많은 청소년이다. 조셉은 한 달 100달러의 용돈을 비영리단체로 부터 지원 받는다. 나머지 필요한 용돈을 벌기 위해 지난해 까지 매일 파트타임으로 버지니아의 식당에서 일했다. 올해는 대입준비를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였다. 그러다 보니 늘 먹는 게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다. 그날 우리는 김치만두 우거지 갈비탕 보쌈 순두부찌게 등을 푸짐하게 시켜 먹었다. "북한에 이런 말이 있어요. 잘 먹는 날이 명절이라고. 오늘이 명절이네요. 형 통일되면 두만강에서 고기 잡아 어죽 만들어 함께 먹어요." ■링크(LiNK)는…탈북자 지원·북한인권 개선, 한인 2세 주축 비영리 단체 한인 2세들이 주축이 된 비영리 단체로 탈북자 지원과 북한의 인권문제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2004년 설립돼 탈북자 15명의 미국 정착을 돕고 동영상 등을 제작 미 전국을 돌며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EU의 북한인권 청문회에 참석하는 등 국제무대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문의: (310)212-7190 글=김기정 .사진=김상진 기자 kijungkim@koreadaily.com

2010-08-25

"굶기고…고문하고…" 탈북자 정광일씨, 스탠퍼드대 포럼서 실상 증언

북가주를 방문한 탈북자 정광일씨가 22일 스탠퍼드대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증언하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정씨는 이날 오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관에 이어 스탠퍼드대 한인 학생회가 주최한 ‘북한 인권 포럼’에서 다시 한번 북한 수용소의 실체를 공개했다.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스탠퍼드대 엔시나홀에서 열린 포럼에는 정씨와 인권보호 전문가 데이비드 호크, 북한 탈북자 지원단체 ‘Crossing Border’의 덴 청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스탠퍼드 병원 샤론 페리 수석연구원 등이 패널리스트로 참석했다. 정씨는 “수용소에서는 고문 외에도 굶기는 방법으로 수감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다”며 “수감자들의 노동 강도는 엄청난 반면 그날 작업량을 끝내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아, 힘이 없어 일을 못하고 그래서 굶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탈북한지 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용소 생활과 관련된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정씨는 강연내내 수용소 생활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고, 북한 당국의 잔혹한 고문 등 인권유린 실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데이빗 호크, 텐 청, 샤론 페리씨 등은 “북한의 수용소나 북한주민의 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라며 “오늘 같은 포럼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파헤치고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북한의 인권이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판겸 기자

2010-05-24

“대북 구호품 엉뚱한 곳에 사용”

"북한 수용소에서 우리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반동’이라고 불렸고 지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22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관에서 열린 ‘북한 정치범 수용소와 북한 사회의 실체’를 주제로 한 강연은 북가주 한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강연에서 탈북자 출신으로 피눈물나는 갖가지 상황을 직접 경험한 정광일씨의 증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정씨는 “북한 수용소에서 ‘인권’이나 ‘인간’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중 하나인 요덕 관리소 출신 탈북자들이 2004년 조직한 ‘북한민주화 운동본부’의 사무국장이기도 한 정씨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낱낱이 알리고, 개선을 바라는 마음으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며 “특히 수용소의 경우 공개처형, 무자비한 고문, 구타, 성폭력, 기아와 질병, 강제노동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정씨는 간첩 활동 혐의로 요덕 관리소에 2000년부터 2003년까지 3년 동안 수감됐으며 석방된 후 12일만에 탈북, 2004년 4월22일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갇혀있던 3년 동안 400명이었던 수감자들이 200명으로 줄었다”며 “수용소는 아버지가 아들의 밥을 빼앗아 먹을 만큼 피도 눈물도 메마른 곳”이라고 설명했다. 북한 사회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대해 정씨는 “대부분의 구호물자는 군수물자로 사용되거나 군인들이 빼돌려 주민들에게 되팔고 있다”며 “UN이나 한국 정부, 국제비정부기구(NGO)에서 펼치고 있는 인도적 차원의 생필품 지원은 찬성하지만, 북한 주민들에게 정말로 전달되는지에 대해서는 모니터링을 꼭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판겸 기자

201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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