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음악으로 읽는 세상] 마법사의 제자

프랑스 작곡가 폴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는 독일 작가 괴테의 이야기 시를 음악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옛날에 늙은 마법사에게 어린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외출하자 제자는 빗자루에게 마법을 걸어 물을 길어오게 한다. 그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여기서 빗자루가 물 긷는 모습은 파곳이 경쾌하게 묘사한다. 파곳에 이어 네 개의 혼(horn)과 바이올린이 물 긷는 주제를 이어받는 동안 물은 계속 불어난다. 어느덧 온 집안이 물바다가 되고 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자가 빗자루에 말한다. “멈추어라. 너의 재능을 다 보았느니라.” 그런데 이를 어쩌나. 마법을 푸는 주문을 잊어버린 것이다. 제자는 빗자루가 계속해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다. 빗자루 역할을 맡은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들은 힘차게 행진을 계속하고, 제자 역할을 맡은 현악기들은 위아래로 불안하게 오르내리며 비명을 지른다. 당황한 제자는 도끼로 빗자루를 내려친다. 그 결과 빗자루가 쪼개진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된다. 빗자루가 두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지가 생긴 빗자루들은 더욱 의기양양하게 물을 퍼 나른다. 양동이의 물을 부을 때마다 심벌즈가 ‘짠’하고 화려한 소리를 낸다.   이 상황을 자기 힘으로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제자는 스승을 부른다. 제자가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마법사가 주문을 왼다. 여기서 마법사 역할은 금관악기가 맡는다. “빗자루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그러자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간다. 상황이 정리된 후, 제자는 두려운 눈빛으로 마법사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제자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든 악기들이 상승하는 네 개의 음을 짧고 힘차게 연주한다. 마법사가 제자를 꾸짖는 일성(一聲)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마법사 제자 마법사 역할 제자 역할 빗자루 역할

2024-08-19

“각 가정 넘어 제자들로 일어나길”

    와싱톤중앙장로교회(담임목사 류응렬, KCPC)가 더블레싱 목요여성모임을 다음달 8일(목) 개강한다.   이 모임은 예배를 원하는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말씀 중심으로 가르치고 회복하여, 삶의 전도자들로 세상의 복이 되는 여성으로 세워가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달 8일부터 5월30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 KCPC 다목적실에서 17주 과정으로 진행되는 이번 봄학기 모임에서는 말씀과정(리딩지저스 성경통독 챌린지, 리딩지저스 성경통독 챌린지+55), 양육과정(복음에 견고한 자녀양육, 마음을 다루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세상으로 달려가는 아이 신앙위에 세우려는 엄마, 자녀에게 꼭 가르쳐야 할 10가지), 훈련과정(2:7제자양육 1,2,3과정), 온라인 과정(리딩지저스 성경통독챌린지, 사춘기부모교실) 등의 더 블레싱 소그룹이 개설되며 더블레싱 다음세대 클래스로 영유아를 위한 예배와 소그룹, 엄마와 아기가 함께 하는 ‘아기학교’가 준비된다.     배명훈 지도목사는 “여성들에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하게 세워지도록 리딩지저스, 아기학교 등의 양육, 훈련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마련된다”면서 “이번 봄학기 훈련을 통해 여성들이 각 가정을 넘어 교회와 지역사회에 사역의 장을 펼치고 제자들로 일어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배 목사는 “지난 해 100가정 심방을 하며 환우를 섬기는 선교에도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더블레싱 목요여성모임은 올해 4월 18일, 영화배우 겸 감독, 제작자인 추상미씨를 초청해 여성예배 특별집회로 간증 및 나눔의 시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제자 목요여성모임 리딩지저스 성경통독챌린지 7제자양육 123과정 리딩지저스 아기학교

2024-02-02

[수필] 제자의 고백

그 시절은 6·25전쟁 직후라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고향의 모교인 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처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라 설렘과 두려움의 기억이 까마득한 데 오랜 세월이 지나갔건만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학교 건물은 폭격으로 반 이상이 폐허가 되었고 넓은 강당과 교실 10여 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강당을 여섯 개의 교실로 나누었다. 그중 한구석에서 학생들은 송판에 네 다리를 세운 조그만 책상을 각자 가져와서 공부했다. 찬 마룻바닥에 앉아 오들오들 떨면서 매서운 추운 날씨였지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맞아 주었던 3학년 1반 남아들이었다.   학생들의 손등은 터서 갈라지고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벌겋게 부어 있는 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며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이 대견했다. 그중에는 산 넘고 들길을 1시간 이상 걸어온 학생도 있었다. 전쟁 중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지내는 학생도 3명이 있었다.   하루는 가정방문을 핑계 대고 보육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3명의 학생이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시설은 너무도 비참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웃음을 잃고 양지바른 곳에서 병든 병아리처럼 웅크리고 않아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들은 배고픔에 먹을 것만 신경 쓰고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 당시 보육원은 구호물자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 가여운 아이들,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은 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일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매월 기성회비(학교 운영비)를 담임이 독촉하여 걷는 일이었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우리 반이 항상 꼴찌였다. 무상으로 교육할 수 있으면 좋을까 싶었다. 그런데 형벌처럼 전교 학급에서 수납된 기성회비는 나에게 다 가져왔다. 서무과장에게 매일 통계를 내어 돈과 함께 보고하는 업무를 내게 맡으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다 아찔한 사건이 벌어졌다. 받은 기성회비를 교실에 두고 자리를 비운 사이 돈이 없어진 것이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속만 태우고 조심하지 않은 나의 실수라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진땀을 흘리며 친지께 사정하여 겨우 해결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서산을 바라보니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의 고운 빛깔은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삭막한 내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 듯 황홀하고 포근하게 가슴 속 깊은 곳에 다가왔다.   그런데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웃는 얼굴의 똑똑한 반장, 조윤모가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반장과 함께 집으로 오는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원도에서 피난 나올 때 부모를 잃고 작은 엄마와 둘이 삽니다. 작은 엄마는 돈 벌어 오라며 밥도 안 주고 매질까지 해요.” 윤모는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어할까, 마음이 쓰렸다. 나는 저녁을 먹이고 위로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할 말이 있는듯한데 눈치만 보고 망설이다 말을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근무했던 4년간 많은 사연을 뒤로하고 대전에 있는 초등학교로 옮기며 고향을 떠났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하루는 해군 제복 차림의 말쑥한  군인이 집에 찾아왔다. 어떻게 왔을까? 그는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선생님. 저 조윤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잊지 않고 찾아온 제자가 고맙고 반가웠다. 제자는 단정히 앉아 망설임 없이 “용서해 주세요. 제가 선생님의 돈을 훔쳤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제자가 그 일로 인해 오랜 세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그러면서 제자의 진정한 고백에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제자를 안아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용서하는 기쁨, 용서받는 기쁨, 그 순간의 감동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모진 세파를 겪으며 참고 견디었으니 잘 살기를 마음 깊이 빌어 주었다.   어려운 시절 만고풍파 겪으며 살았을 불쌍한 아이들,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제 이순을 넘긴 노년이 된 제자들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겠지 싶다. 만남과 헤어짐은 우연이 아니고 깊은 인연이 있다 생각한다. 제자는 진심으로 양심 고백을 할 수 있는 심성을 가졌으니 틀림없이 올바르게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정직하게 정도를 걸어온 사람만이 마음의 평화와 축복을 받을 것이리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이 몇이나 있으랴. 잠시 있다 가는 인생길, 많이 사랑하고 아름다운 발자취 남기고 싶다. 이복자 / 수필가수필 제자 고백 양심 고백 강당과 교실 반장 조윤모

2024-01-25

[필향만리] 未之能行 唯恐有聞 (미지능행 유공유문)

공자 제자 자로는 “배우고서도 아직 실천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가르침을 또 들을까 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더러 지나치게 과감하여 스승으로부터 지적을 당하곤 한 자로였으니 실천력도 남달리 강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의식주에 소용되는 물건도 그렇지만 지혜로운 삶에 필요한 ‘말씀’도 실은 많이 필요하지 않다. 한마디 말, 한 가지 진리라도 제대로 터득하여 ‘남의 말’로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실천하는 삶이라야 알차고 행복하다. 좋은 말씀과 유익한 정보를 많이 듣겠다며 이곳저곳 허덕이듯이 돌아다니는 삶은 오히려 불행하다. 그래서 독일 시인 칼 부세(1782~1928)는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기에 남의 말을 믿고서 행복을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왔네’라고 읊었다.   잡다한 ‘검색’으로 허겁지겁 때우며 사는 삶이 아니라, 진지하게 ‘사색’하며 착실하게 실천하는 삶이라야 아름답다. 사색도 실천도 없이 챗봇의 생성만 기다리는 삶은 삭막하고 무의미하다. ‘지식을 검색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채 실천 없이 거푸 배우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한 자로의 시대가 부럽다. 김병기 /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필향만리 유공유문 사색도 실천도 공자 제자 너머 저쪽

2023-12-10

[필향만리] 聞一以知十 (문일이지십)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안회 중 누가 더 낫느냐?”고 물었다. 자공은 “제가 어찌 안회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알 정도입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서 각각 작은 재주와 큰 재주를 일컫는 ‘문일지이(聞一知二)’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자공의 답을 들은 공자는 “암 그렇지. 나도 네가 안회만 못함을 인정한다”고 했다. 언뜻 듣기에 자공을 완전히 무시한 말로 들리지만 실은 큰 애정으로 격려한 말이다. 안회보다 14살 어린 자공도 공자로부터 “지나간 것을 말해주니 다가올 것까지 아는구나(告往知來, 학이편)”라는 칭찬을 들은 제자이다. 이런 자공이 스스로 안회만 못하다며 매우 겸손한 답을 하자, 공자는 대견하게 여기며 “그래, 내 눈에도 네가 아직 안회만 못한 것 같구나”라고 하면서 선배 모범생을 들어 후배 제자를 면려(勉勵)한 것이다.   공자가 만약 오늘날 한국의 학교 선생님이었다면 자공의 부모로부터 ‘학생인격모독’이라며 고소당했을 것이다. 속 깊은 격려는 아예 헤아리지도 못한 채, 입에 붙은 칭찬만 원하는 학부모가 고작 하는 일이라곤 그런 고소뿐이다. 빈 칭찬에 헛춤을 추는 코끼리가 가엽다. 김병기 /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필향만리 문일 자공의 부모 후배 제자 하자 공자

2023-11-29

[종교와 트렌드] 무지한 성도가 교회를 망친다

교회에서 최고의 미덕 중 하나가 ‘은혜’이다. 은혜롭게, 만장일치로 의사 결정이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꼽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은혜롭게 좋은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되면 좋지만, 교회가 나쁜 방향으로 만장일치가 된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가 자칫 잘못하면 파시즘처럼 개인의 목소리는 묻히고 거대한 권력으로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것도 자칫 집단오류에 빠질 수 있다.     또한, 교회의 방향이나 의사결정에 무관심한 성도들도 문제이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이 되고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가야 한다. 문제를 목회자의 문제로만 탓할 수 없다. 거기에는 무관심하고 무지한 성도들의 잘못도 있다. 무조건 교회의 방향과 담임목사의 결정에만 순종하는 것이 미덕으로 되어 있으니 점점 더 자신들의 지성과 영성의 스위치를 끄고 교회에 가다 보니 사유를 할 수 없는, 안 하는 성도들이 양산되고 있다.   마틴 루터가 거대한 종교권력에 반박하지 않았다면 종교개혁과 개신교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마는 의심하는 믿음 없는 제자로 많은 목사님이 설교하지만, 그는 의심을 통해서 진정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한 제자로 거듭난 훌륭한 제자이다.   의심과 질문을 하지 않는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도 자라기 쉽지 않다. 질문을 통해서 지속해서 사유하고 이것이 본인의 신앙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무조건 믿음으로 은혜로 믿으라는 방식은 예전에 교육 못 받고 살기 어려웠던 구시대적 발상이다.   요즘 기업들은 ESG 경영을 도입한다. 사회적(Social), 환경적 (Environmental) 책임을 다하고 지배구조 (Governance)도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투명한 의사결정과 윤리경영에 힘쓰고 있다.   교회도 사회적, 환경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 총체적 복음의 구성요소라면 투명한 지배구조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과 윤리적 경영, 섬기는 지도력이 필요한 분야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되어도 지배구조나 의사결정 구조는 세상보다 뒤떨어지는 현실이다.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같이 만들어 가는 교회여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도 영성과 신학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들에게 자신의 영적 생활, 아니 삶의 전체를 맡겨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요즘같이 복잡한 세상에 목회자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헤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려면 삶의 여러 방면에서 영적/신학적 소양이 있는 성도들과 같이 고민하고 교회의 방향과 삶의 대안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요즘은 선악이 불분명한 시대다.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모르는 시대이다. 나라 간에 그렇고 정치적으로 그렇고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지와 무관심이 악이 될 수도 있다. 2차 대전시에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했던 충실하고 순하게 생긴 아이히만을 보라. 그냥 생각 없이 자기 일을 한 것뿐이다. 노예로 살 것인가 예수님 제자로 살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jay@jnbfoodconsulting.com 이종찬 / J&B 푸드 컨설팅 대표종교와 트렌드 무지 교회 의사결정 구조 예수님 제자 영성과 신학

2023-10-30

[독자마당] 한국교육의 문제점

요즘 한국에서 교권, 즉 교사의 권리,권위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옛 유학의 가르침에 ‘군사부일체’라 하여 왕과 스승, 부모는 사람이 태어나 살아감에 가장 중요하고 은혜로운 존재로 극진히 섬겨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세상에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키워 주고, 가르쳐 주고, 질서와 평안으로 보호해 주는 것 이상의 은혜는 없을 터이다.     옛 제도와 그 가치를 현시대에 접목해 보아도 국가, 교육, 가정은 여전히 각 개인에게 소중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사람이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고, 공동체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려면 바른 인성과 다양한 지식, 기능을 갖춰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스승이란 특정인만을 일컫는 게 아니다. 본인에게 필요한 무엇이든 가르쳐주고 깨우쳐주고 나아갈 바른 길을 가르쳐줄 수 있는 누구라도 해당이 된다.     현재의 교육제도에서 스승과 제자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다. 시대가 달라졌어도 사제지간의 섬김과 존중의 의미는 달라질 수 없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이 소중한 가치는 어디서나 뒤로 밀려나고 교사의 권리, 권위 또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만연한 배타적 이기주의는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맥을 끊고 미움, 불신, 다툼으로 갈라서게 하고 있다. 이타적 양보, 존중, 겸양으로 자신을 뒤로할 때, 신뢰와 화목이 회복된다.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상처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너를 키울 것이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잘못된 교육에 대한 미망을 일깨워준다.     스승과 교사들의 꾸중과 채찍은 제자, 학생들에게 학습능력, 분별력을 키워주며 세상 적응력을 한층 키워줄 것이다. 윤천모 / 풀러턴독자마당 한국교육 스승 부모 제자 학생들 학습능력 분별력

2023-09-05

[등불아래서] 우리 손에 가득한 자랑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를 여럿 작사한 호나티우스 보나에게 누군가 물었다.     "하나님께 어떻게 갈 수 있나요?"   "형제여, 우리는 우리의 죄와 함께 하나님께 갑니다. 우리는 그 외에 진정 우리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그러하기에 교회는 겸손했다. 교회는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하기 전에 "주님, 우리는 빈손 들고 주님 앞에 갑니다"라고 고백했다. 오직 빈손만이 십자가를 붙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손에는 자랑이 가득하다. 선교를 시작하면 선교사 수가 자랑이고, 예배당을 세우면 교세와 건물이 자랑이다. 제자 훈련이 자랑이고, 성경 통독 횟수가 자랑이다. 시작은 창대하지만, 나중이 미약한 것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나누어 줄 사랑과 물질이 없어서가 아니다. 정부를 제외한 어느 단체보다 많은 예산을 세우고 사용할 것이다. 여전히 병원과 보육원, 전쟁터와 난민촌에는 어김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우리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우리뿐 아닌가. 세상이 우리를 보고 제자라고 하지 않고 우리끼리만 서로 성도이고 제자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놀라지 않는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는 미소 띤 얼굴과 괜찮은 교양으로 덮어버렸다.   사랑은 아무 일도 없어서 항상 좋은 것이 아니다. 다툼과 시기, 분쟁과 분노를 돌이켜 용서와 화해, 진실과 겸손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서로 죽고 못 사는 것이 다는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대개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잘해 주는 사람들, 괜찮은 사람들,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당연하다. 교회는 속이 거북한 사람들, 하는 짓마다 얄미운 사람들, 말마다 속을 긁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 곳이다. 싸워야 할 몽둥이는 사랑의 땔감으로 쓰고, 찌르고 싶은 칼로 땅을 일구어 나무를 키운다. 하나님이 바로 이런 능력자이심을 증명하는 곳이다.   이 일을 하지 않으니, 회개도, 용서도 없고 평화도, 믿음도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의인끼리 재밌게 살고 싶다. '나는 부족하지만'이라고 덧붙이면서. 끝까지 잘나고 싶은 우리에게 주님은 험한 십자가를 붙들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은 고통은 바로 그의 몸이신 교회의 이기심이요 탐욕이며 눈물이다. 그 피 흘린 몸이 교회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아래서 자랑 제자 훈련 주님 우리 회개도 용서

2023-09-04

[시조가 있는 아침]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조식 (1501∼1572)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 병와가곡집     ━   단성소(丹城疏)의 의기(義氣)     나의 생애는 추운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바위 굴에서 눈비를 맞았다. 구름 낀 볕 한쪽도 쬔 적이 없는데 서산에 해진다 하니 눈물이 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중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읊은 시조다. 경상도 합천 출신의 남명은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목격하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평생 벼슬을 거절하고 자유로운 몸으로 현실에 날 선 비판을 많이 가했다.     대표적인 글이 명종이 단성현감에 제수하자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다. “전하께서 나랏일을 잘못 다스린 지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임금에게서 멀어졌다”며 명종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後嗣)”,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라도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시고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게 하시라”고 촉구했다. 상소를 받은 명종은 분개했으나 “선비의 언로가 막힌다”하여 벌주지 못했다.   일본을 경계한 남명의 걱정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 곽재우, 김면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신속하게 일어나 의병으로 왜군과 싸웠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삼동 베옷 학문 연구 제자 양성 정인홍 곽재우

2023-08-03

[필향만리] 삼성(三省)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는 말했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에 주안점을 두고서 나를 살핀다. 다른 사람과 일하면서 최선을 다했을까? 친구들과 사귀면서 믿음을 사지 못한 일은 없었을까? 배운 것을 다 익히지 못했으면 어쩌지?” 『논어』 ‘학이편’ 제4장의 말이다.   사람이 매일 하는 일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직장에서 남과 더불어 일하고, 여가엔 친구와 어울리고, 뭐가 됐든 날마다 새로운 것을 익히는 것 외에 별다른 게 없다. 증자는 우리 삶이 본래 그러함을 간파하고 반성할 항목을 셋으로 잡은 것 같다.   반성을 게을리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장에서는 남에 대한 배려가 없이 제 이익만 챙기는 얄미운 사람이 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신망이 없는 사람으로 찍히게 된다. 그리고 날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정보를 간과하면 서서히 도태당한다. 증자의 시대나 지금이나 직장 내의 화목, 친구 간의 신의, 그리고 자기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반성하며 정진해야 한다는 점에서 세상은 사실 달라진 게 없다.   반성은 부끄러움을 낳고, 부끄러움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평화를 낳고, 평화는 행복으로 직결된다. 반성이 행복으로 향하는 첫 관문인 것이다. 김병기 /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필향만리 삼성 제자 증자 화목 친구 친구들 사이

2023-03-27

신약의 인물탐구- 나인성의 행렬

 우리가 잘 아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 관한 말씀은 4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의 병을 고치신 후에 ‘나인’이라는 성으로 향하십니다. 여기에 나인은 갈릴리의 북쪽의 작은 성읍입니다.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신 것은 이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의 행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우연하게 만나서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여러 성읍이 있었고, 큰 성읍도 있었지만 이 작은 성읍으로 향하신 것은 과부의 삶에 일어난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인성을 향해서 가실 때에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누가복음 7장11절. 여기에 ‘많은 무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무리에 해당하는 원어가 ‘오클로스’로 ‘대중, 민중’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제자와는 대조가 됩니다. 제자는 ‘마태테스’로 ‘제자, 배우는 사람, 생도’의 뜻입니다. 성경은 지금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두 부류로 나눕니다. ‘배우는 사람’인 ‘제자’와 ‘그냥 많은 대중, 군중’입니다.      오늘날에도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는 두 부류가 존재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군중’입니다. 그러면 배우는 사람인, 제자는 군중과 무엇이 다를까요? 지금 우리는 군중입니까? 아니면, 배우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나인 성’에서 나오는 무리입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누가복음 7장12절. 여기에 ‘많은 사람’으로 해석이 된 부분도 ‘오클로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군중과 함께 독자를 잃은 과부 어미도 함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바로 죽은 아들입니다. 나인성에서 나오는 무리의 부류를 보면, 이미 죽은 아들과 아들을 잃은 과부 어미, 그리고 군중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과 같습니다. 죄로 인해서 이미 죽은 삶, 그리고 이 땅에서 죄와 악으로 인해서 고통받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어떤 해결책도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군중입니다. 이 무리들이 성문에서 만난 것은 바로 ‘예수님과 제자, 군중’의 행렬입니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제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을 만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누가복음 7장13절.   ‘불쌍히 여기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로 ‘동정하다, 측은히 여기다’의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2회 사용된 단어로, 단순한 동정의 의미가 아니라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안타까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행렬을 보시면서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측은함’을 느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홀로 남은 여인에게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잃음, 아픔이 아니라 방향과 목적, 해결책을 모르고 그냥 영원한 죽음의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대해서 100% 이해할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교회 밖의 사람들도 구원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인생을 보면서 그렇게 심각하게도, 창자가 뒤틀릴 정도로 심각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 모르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문제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허구라고, 거짓이라고 말하며 믿지 않습니다. 심각성이 납득이 가고, 믿어져서 장례 행렬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덤에 아이를 묻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냥 그 길을 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무덤’이 아니라,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알게 된 겁니다. 믿어지지 않습니까?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냥 지금 그대로 사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다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 ‘생명’을 깨닫고, 예수님을 통해서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인물탐구 나인성 나인성 과부 제자 군중 장례 행렬

2022-10-07

[신약인물탐구] 마태

 오늘 살펴볼 신약의 인물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신약 성경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입니다. 마태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마태를 ‘레위’라고합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당시는 아랍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이 함께 혼용되어서 사용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2개 이상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레위라고도 하는 마태의 직업은 당시 세관의 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세관은 운임이나 통행료를 받는 곳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하는 세리가 근무하는 사무실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받아서 로마 정부에 상납을 하는 과정에서 세리들은 부당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거두어야 하는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사람들에게 징수해서 나머지 돈은 모두 자신이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세리를 싫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세리들이 취급하는 돈을 깨끗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이방인들의 돈과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이익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그 돈을 만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정결하지 않은 자로 취급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리들이 도둑질한 돈, 창기들의 부정한 돈을 취급하기 때문에 정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성전에 드려지는 헌금에도 이 돈들이 돌고 돌아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의 헌금을 자기 것으로 챙겼습니다. 얼마나  이율 배반적입니까? 돈을 더럽다고 말하면서 돈을 밝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죄인과 세리는 항상 함께 취급을 합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세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복음9장10절, 11절. 세리를 부정한 사람,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서 오늘도 여전히 돈에 집중된 삶을 사는 마태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복음9장9절.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라고 마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지금 잠깐 나와 함께 갈 데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고 있던 삶에서 빠져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부당한 이익을 챙겨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삶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쉬울까요? 우리가 흔히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말하는데 제자가 무엇입니까? 내 삶은 그대로 있고 거기에 예수님을 스승, 선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삶의 우선 순위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생각, 내 주관, 내 이익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입으로만 따른다고, 순종 한다고 말하는 것이 제자가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누가복음 5장28절. 여기에 버리다는 헬라어로 ‘카탈레이포’입니다. ‘버리다’, ‘떠나다’, ‘남겨두다’, ‘소홀히 하다’의 뜻입니다. 나중에 다시 찾을 것을 대비해서 다른 곳에 보관해 두는 것이 아니라 잃어 버려도 상관 없다는 생각으로‘내팽개쳐버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부여잡고 살던 세리라는 직업. 그것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이익 등 여러 가지를 한 순간 포기하는 것, 잃어버릴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것을 마태는 각오하고 자신이 깔고 앉아있던 ‘세관’을 박차고 나와서 예수님이 서 계신 곳, 제자의 길에 섭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아픈 데가 없어지고,실패 없이 성공 만 있고, 부유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아픈 사람,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서 기도 제대로 안 해서, 신앙생활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고 판단합니다. 약 33세에 단명하신 예수님은 실패한 인생입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잘 나갔지만 예수 믿고 난 뒤부터 고난, 핍박, 매 맞음의 고생길을 산 바울도 실패한 인생입니까? 믿음은 우리 인생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하나쯤 있으면 나쁘지 않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내 것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결단입니다. 무늬만 기독교인 삶, 입으로만 순종을 떠드는 삶이 아니라 마태처럼 결단하고 예수님께로 오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길입니다. 마태와 같은 결단과 순종으로 예수님 제자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신약인물탐구 마태 목회칼럼 예수님 제자 가운데 예수님 우리 인생

2022-03-07

"주님의 제자로 사는 2022년"

    애틀랜타한인교회협의회(회장 김상민)와 북미주 기독실업인회(회장 천경태, 이하 CBMC)가 공동주최한 2022 신년 조찬기도회 및 하례식이 지난 8일 오전 7시 30분 둘루스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는 1부 예배, 2부 신년인사, 3부 식사 순으로 진행됐다. 한인 기독교인들 100여 명이 참석했다.   1부 예배 시간에는 이춘봉 CBMC 애틀랜타지회장의 기도, 하윤선 CBMC 중부연합회 사무총장의 사역 간증, 밀알장애인선교단(단장 최재휴 목사)의 특송이 진행됐다. 하 사무총장은 "일터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 보내는 곳으로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곳"이라며 "우리 회사는 성경적 경영을 하려고 노력하며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 믿음이 곧 고객 서비스로 이어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도 직원과 고객을 섬기면서, 공의·배려·정의의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함께 성장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교협 회장인 김상민 훼이트빌침례교회 목사는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마 28장 18~20절)를 주제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새해에는 모든 가정과 기업과 교회가 평안 속에서 건강하고 잘 되길 기도한다"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제자 삼는 일에 나를 사용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변명하지 말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참석자들은 애틀랜타 지역의 모든 한인 교회의 회복을 위해, 한인 가정, 한인 사회, 한인 기업과 일터의 보호를 위해 소리 내 기도했다. 윤도기 원로목사회장, 백성봉 교협 이사, 권우현 CBMC 스와니지회 고문, 곽용식 CBMC 둘루스지회장이 각각 진행했다.     2부에는 최병일 동남부한인회연합회장, 이홍기 애틀랜타한인회장, 신동욱 애틀랜타목사회장, 배현규 CBMC 미주총연합회 회장이 신년 인사를 전했다. 배 회장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른 이유"라며 "올 한해 하나님과 함께해서 가정, 교회, 일터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자"고 밝혔다.     코로나19 여파로 식사 대신 떡을 나누고 행사를 마쳤다.   배은나 기자주님 제자 이홍기 애틀랜타한인회장 애틀랜타목사회장 배현규 원로목사회장 백성봉

2022-01-08

[한 週 漢字] 愛(애)-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광복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노래 제목에 제일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랑’이며, 가사에 ‘사랑’이 포함된 노래가 전체 가요의 65%에 달한다고 한다. 아마 노래의 주제까지도 감안하면 그 비율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사랑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이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이나 정의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으며, 대상과 범위를 어떻게 한정 지을지에 따라 사랑은 무한히 변주된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예수는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묻는데, 이 대목의 그리스어에는 각각 ‘아가페’가 두 번, ‘필리아’가 한 번 사용됐다고 한다.   아가페는 조건 없이 이타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의미하고 필리아는 형제애적인 친구 간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그리스어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라는 단어도 있다.   불교에서 사랑은 ‘자비(慈悲)’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慈)’는 즐거움을 주고 그 즐거움을 같이 즐거워 마음이고, ‘비(悲)’는 고통을 덜어 주고 괴로움을 같이 괴로워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다른 이를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연민이 사랑을 일으키고 그 사랑이 실천으로 옮겨질 때 자비가 이뤄지는 것이다.   『맹자』에서는 “군자는 만물을 아끼기는 하지만 인자하게 대하지는 않고, 사람에게는 인자하게 해 주지만 친밀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어버이에게 친밀하게 대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인자하게 대하며, 사람들에게 인자하게 하고 나서 만물을 아낀다(君子之於物也 愛之而弗仁 於民也 仁之而弗親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라고 하여, 사랑을 베푸는 데 실천의 단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아끼다(愛), 인자하다(仁), 친밀하다(親)’는 동사로 다양한 사랑을 나타낸다.   사랑은 남에 대해 가지는 진실한 마음, 뜨거운 가슴에서 시작된다는 뜻일 터이다.     친구 사이에 나누는 사랑을 더 강조하는 시대라고 해석하면 지나칠 수 있겠지만, 역시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규동/ 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교수한 週 漢字 사랑 제자 베드로 친구 사이 우리나라 대중음악

2021-10-25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