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노트북을 열며] ‘노 재팬’이라는 이름의 유령

지난달 16일 일본 도쿄 다이칸야마(代官山)의 차코트 발레 스튜디오. 수업이 끝난 후, 한 일본 여성이 다가와 “한국에서 오셨다니 반가워요”라며 배우 박서준의 사진을 보여줬다. 발레 선생님도 “요즘 한국 분들이 다시 꽤 오셔서 반갑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쿄에선 어디를 가도 한국어가 들려왔다. 지난 정권 일었던 ‘노 재팬’ 물결에 용일(用日)을 주장했다가 “친일 토착 왜구의 OO를 찢어버리자”는 악플·악메일 세례를 받았던 게 3년이 채 안 됐는데, 격세지감이다.   숫자도 ‘노 재팬’의 종언을 증거한다. 지난해 출국한 658만145명 중 109만260명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한 달에만 45만6100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방일 한국인은 조용하지만 확실히 늘고 있다. 팬데믹 끝에 여행 수요가 폭발했고, 엔저 효과 덕이라고? 하지만 ‘노재팬’ 당시를 생각해보라.     반일감정으로 국민을 조종했던 정치 세력은 휴화산일 뿐이다. 특정 정치세력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그간 이해보다 단죄에 에너지를 쏟았다. 서로의 판단 기준만이 옳다며 두 개나 가진 귀는 틀어막고 하나뿐인 입만 열어왔다. 지금 중요한 건 ‘노 재팬’ 썰물이 남기고 간 잔해를 점검하는 일이다. ‘노 재팬’ 밀물에 휩쓸려간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일본 여행 갔다고, 일본 맥주를 마셨다고, 일본 차를 몰았다고 뭇매 맞은 이들 말이다.   정치적으로 선동·악용된 ‘노 재팬’ ‘죽창가’는 영어 표현으로 ‘방 안의 코끼리’다. 불편하지만 모르는 척하는 존재를 뜻한다. 방의 5년짜리 주인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질 뿐. 얼렁뚱땅, 은근슬쩍, 두루뭉수리하게 없었던 일로 지나가서는 코끼리를 방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오해 마시라. 친일하자는 얘기가 결단코 아니다. 일본에게 따질 것은 냉정한 머리로 끝까지 따져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이사할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국익을 위해 일본은 경계는 하되 때론 손을 맞잡아야 하는 상대다.   차코트에선 “한국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싶다” “BTS는 언제 입대하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인근 에비스의 댄스 스튜디오에선 K팝 클래스가 문전성시다. 정치인들은 소모전을 계속해도 민간교류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더욱, ‘노 재팬’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직시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노 재팬 정치’의 진자추는 되돌아올 것이고, 한국은 다시 반일이란 소모적 논란에 굴복하며 뒷걸음질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성장한 멋진 대한민국에 이웃 국가 일본은 잘 이용해야 할 전략적 파트너다.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 팀장노트북을 열며 재팬 이름 재팬 정치 방일 한국인 가도 한국어

2023-03-01

[커뮤니티 센터 꿈 이룬 일본계] "일본 커뮤니티만 위한 것 아니다" 명분·타이밍 적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공감하게 외부를 설득하는 것 부도칸은 바로 '연결고리' 미-일·동서양·각 세대 이어 '신 리틀 도쿄' 연관은 역사와 정체성 회복하는 것 17일 오전 10시15분. LA시의회에서 리틀도쿄의 다목적 체육시설인 'LA부도칸' 건립 승인안이 최종 통과됐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를 때 LA시의회장 한쪽에서는 한 노인이 잠잠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하야히코 다카세(81)씨는 LA부도칸의 건축 디자이너다. 40여 년 넘게 부도칸 프로젝트와 함께 했던 하야히코씨를 통해 LA부도칸 건립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 LA부도칸의 디자인은 언제 그려졌습니까. "저는 1964년도에 일본에서 다니던 건축회사를 통해 '신 리틀 도쿄' 건립을 위한 목적으로 LA에 왔어요. 그때 한 일본계 아이가 리틀도쿄 길거리에서 공놀이하는 것을 한참 동안 보게 됐죠. 영어를 쓰는 아이였는데 길거리는 학교 체육관이 아니잖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서는 일본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어요. 그 후로 40년 동안 LA부도칸을 제 마음속에서 그려 왔습니다." - '신 리틀 도쿄'는 무엇이고 체육관 건립은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당시 리틀 도쿄는 지금과 달리 매우 황폐했어요. 세계 2차대전으로 인해 미국 내 일본인들이 수용소로 옮겨 갔다가 다시 하나 둘씩 돌아오면서 '신리틀 도쿄' 건립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죠. 일본 커뮤니티의 체육관 건립의 꿈은 '신 리틀 도쿄'의 부흥 역사와 정체성 회복과 맞물린 것입니다." - LA부도칸 건립이 승인되기까지 고비는 없었나요. "그 사이 고비가 왜 없었겠습니까. 우선 1990년대 초반까지 크고 작은 커뮤니티 미팅들을 통해 체육관 건립에 대한 여론만 있었죠. 하지만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 단체가 필요했어요. 리더역할을 리틀 도쿄 서비스센터(LTSC)가 맡는 과정에서도 부지선정이나 건립 명분 등에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죠." - 외부적으로도 부딪히는 문제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외부를 설득하는 것이었죠. 일본 커뮤니티만을 위한 명분은 절대 먹히지 않았어요. 커뮤니티를 넘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목적이 필요했죠. 그때부터 우리는 리틀 도쿄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한편으로는 다음 세대들과 LA시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꿈'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 명분.타이밍이 중요하단 말이죠. "LTSC를 중심으로 체육관 건립을 위해 일미 국립박물관 일미 문화센터 등 다양한 단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자료를 모으며 함께 명분과 목적을 세우는 작업에 힘을 쏟았어요. 단순히 스포츠뿐 아니라 각 분야의 전통을 체육관 건립 명분에 녹이면서 이를 LA시의 이익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목적으로 직결시키는데 주력했어요." - 단순히 '명분 전달'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우리는 다음 세대의 중요성을 함께 역설했어요. 특히 2009년에는 어린이들이 리틀 도쿄 거리를 마음껏 뛸 수 있도록 '펀 런(Fun run)'이라는 행사도 개최했습니다. LA부도칸은 커뮤니티의 많은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예전에는 프로젝트 이름이 '리틀도쿄 레크리에이션 센터'였다고 하던데요. "프로젝트명이 'LA부도칸'으로 변경된 것은 2009년입니다. 이는 1964년 올림픽을 위해 도쿄에 건립됐던 '부도칸' 체육관이 롤모델인 것이죠. 현재 도쿄의 부도칸은 스포츠뿐 아니라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다목적이라는 컨셉을 담고 있는 명칭이라 모두에게 어필 되기에 충분했죠. 또 '부도칸'이란 이름은 일본인 모두가 아는 명칭으로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담고 있죠." - 건축가로서 부도칸에 담고 싶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다리(bridge)가 되고 싶었어요. 나라와 나라 동양과 서양 세대와 세대 리틀 도쿄의 전통과 LA의 문화를 잇고 싶었어요. 40년간 마음속에 그려왔던 부도칸이 이제 현실로 지어지게 됐네요." ☞하야히코 타카세 오늘날의 개성있는 리틀 도쿄 건축물 구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 했던 하야이코 옹은 1930년에 태어나 국립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으로 유학, 하버드 대학(1956년)에서 건축 디자인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일본내 건축회사에서 일을하던 도중 LA로 건너와 리틀 도쿄내 주요 건축물을디자인했다. 그의 주요 디자인 작품으로는 히가시 혼간지사원, 옛 뉴 오타니 호텔을 꼽을수 있다. 장열 기자

2011-05-18

[이웃 커뮤니티에서 배운다] 전통문화에 축제·경제 얹어라

‘문화 마케팅을 통해 성장하자.’ LA는 미국내에서도 대표적인 다민족 도시로 꼽힌다. 그만큼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 사회가 잘 형성돼 있다. 한인타운을 비롯, 차이나타운, 리틀도쿄,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 타이타운 등 다양한 소수민족 타운이 형성돼, 자체적인 특징을 유지하며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본지는 ‘한인타운 구역안’ 결정을 계기로 지난 2월부터 ‘이웃커뮤니티에서 배운다’ 코너를 통해 남가주내 대표적인 소수민족 커뮤니티들을 소개해 왔다. 이를 토대로 한인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한번 조명해 본다. ▷구역은 어떻게=차이나타운 리틀도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소수민족 타운은 자체 구역이 있다. 시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공식적인 구역이다. 공식 구역 여부와 관계없이 이들 커뮤니티의 공통점은 각 민족의 이민사가 시작된 지역이라는 것. 각국에서 '꿈'을 안고 미국땅을 밟은 이민자들이 처음 정착한 곳인 동시에 지금도 갓 도착한 이민자들이 처음 찾는 곳이다. 이중 눈에 띄는 것이 LA의 차이나타운 리틀도쿄 타이타운이다. LA다운타운 북쪽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은 LA시청 북쪽인 동서로는 차베스 애비뉴와 메인 남북으로는 예일과 LA리버의 10여블럭 구간이다. LA다운타운내 리틀도쿄의 경계는 동서로 로스앤젤레스와 알라메다 남북으로 템플과 4가 약 16블럭 규모다. 할리우드 동쪽의 타이타운의 규모는 약 6블럭으로 동서로 웨스턴과 노먼디 남북으로는 할리우드 불러바드와 선셋이다. 이들 세 커뮤니티 구역을 보면 20여블럭이 채 안된다. 다시 말해 한곳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다닐 수 있을만한 크기이다. 이 안에 전통 식당 옷가게 등 소매업소들이 활발하게 영업을 해 트래픽이 집중된다는 장점이 있다. 타이커뮤니티개발센터(TCDC)의 샹샤니트 마토렐 디렉터는 "98년 LA시의 승인을 받은 타이타운의 구역이 90년대 초 추진했던 것보다 크게 축소됐다"며 "하지만 그만큼 타이 비즈니스가 집중돼 관광객들이 걸어서 타이타운을 구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 가든그로브의 리틀 사이공은 이들 커뮤니티에 비해 규모가 커 차로 이동해야 한다. LA한인타운 역시 이들보다 큰 규모를 보유하고 있다. LA한인회(회장 스칼렛 엄)가 지난 1월23일 LA시청에 제출한 한인타운 구역안은 동서로 후버와 크렌셔 남북으로 피코와 멜로즈에 이르는 지역으로 면적은 약 7.3 스퀘어마일에 달하고 있다. 한인회의 이창엽 이사장은 "이번 한인타운 구역안의 크기는 한인 비즈니스 및 한인소유 건물을 기반으로 형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 마케팅=커뮤니티 구역의 설정은 발전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동안 구역에 대한 개념없이 급성장한 한인타운이나 대표적 '볼 것 많은' 커뮤니티로 성장한 차이나타운과 리틀도쿄 역시 시정부의 공식 구역안이 없다. 따라서 각 커뮤니티를 살리는 것은 바로 커뮤니티의 문화 인구밀집도 비즈니스 등이다. 특정 구역에 이런 성장동력이 갖춰지면 성장에 가속도가 붙는다. 때문에 각 커뮤니티는 고유의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차이나타운은 1940년대 현 위치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랜드 플랜을 세웠다. 바로 차이나타운에 중국 문화의 색깔을 입히고 유지하는 것. 차베스 애비뉴에는 두 마리의 용 장식의 거대한 게이트웨이가 세워져 있으며 차베스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들의 외형 디자인은 중국 전통 건물 양식을 따왔다. 심지어 차이나타운내 메트로 역도 중국 전통 양식을 따랐다. 리틀사이공의 대표적인 샤핑몰인 아시안가든몰도 베트남 전통 건물 양식을 그대로 옮겨왔다. 리틀도쿄는 일본 전통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재패니스 빌리지 전통극장 재패니스 아메리칸 시어터 미주일본인들의 이민사를 엿볼 수 있는 이민사 박물관을 세웠다. 또한 코반(Koban)이라는 자율방범대 사무실을 열어 방범과 함께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소 역할을 하고 있다. 차이나타운과 리틀사이공의 '뉴이어 축제' 리틀도쿄의 '사무라이 축제'는 문화를 외부로 알리는 길이다. 이같은 문화시설은 각 커뮤니티에 관광객을 유치하는 마케팅 수단이 된다. 커뮤니티 내부에서 보면 이들 문화시설은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외부에서 보면 '색다른 것'이 된다. 나성중화회관의 피터 잉 회장은 "새로 건물이나 쇼핑몰이 개발되면 커뮤니티 차원에서 중국식의 디자인을 부탁하고 있다"며 "미국내 중국 문화가 살아 숨쉬기 때문에 타주 중국인 뿐만 아니라 타인종 관광객들도 유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LA한인타운을 대표하는 문화시설은 현재 올림픽과 노만디의 다울정 뿐이다. ▷성장원동력=이처럼 각 커뮤니티가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고 발전해 온 것은 각 커뮤니티의 경제력 신장도 주요 요인이다. 이민자들이 모이고 식당 등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 커뮤니티와 상권이 함께 발전을 거듭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치력이다. 정부기관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커뮤니티 성장에 지원을 받아 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리틀사이공. 베트남 커뮤니티는 다른 커뮤니티에 비해 정치력에 높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리틀사이공이 포함된 가든그로브와 웨스트민스터 시의회에는 베트남계 정치인이 2명씩 있다. 이외에도 주의회를 비롯 시 카운티 주정부 곳곳에 베트남계 공무원이 포진해 있어 커뮤니티 성장에 대한 정치적인 지원을 받는다. 그 뒤에는 베트남 이민자들의 높은 정치 참여율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2007년 자넷 그웬 OC수퍼바이저가 베트남 이민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57%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리틀 사이공 파운데이션(LSF)의 켄 구엔 회장은 "높은 선거 참여율과 함께 정부기관의 지역 프로젝트에 있어 펀드레이징 등 다양한 방법의 지원을 해왔다"며 "이런 것들이 결국 리틀 사이공에 대한 정치적인 보호 및 지원으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반면 한인타운 관련 커뮤니티재개발국(CRA) 공청회나 각종 선거에 있어 한인들의 참여율이 낮은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오픈마인드=기자가 취재하면서 공통적으로 들은 얘기가 있다. 바로 '오픈 마인드'이다. 이들 각 커뮤니티 관계자들은 "LA는 다민족이 사는 사회인 만큼 타커뮤니티에 개방 교류를 넓혀가며 고유의 문화를 알리는 것이 이민자의 역할"이라며 "그러기위해서 타커뮤니티에 대한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준비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리틀 도쿄는 일본 문화를 알리기 위해 영문 간판 영어 메뉴 등을 구비 타인종 고객을 유치하고 있다. 타이타운내 타이식당에는 주류 손님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에 비해 한인사회는 타커뮤니티에 비해 아직은 다소 폐쇄적이라는 것이 각커뮤니티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한인사회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하지만 강한 경제력은 있지만 문화시설나 정치력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개개인의 발전이 아닌 커뮤니티의 거시적 차원에서 한인타운의 질적 성장을 추구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서기원 기자 kiwons@koreadaily.com

2009-03-22

[이웃 커뮤니티서 배운다 -6] 글레데일 아르메니안 커뮤니티, 높은 정치관심 ‘파워 업’

글렌데일시의 아르메니안 커뮤니티는 다른 소수인종 커뮤니티와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LA 다운타운의 차이나타운, 리틀 도쿄, 할리우드의 타이타운, OC의 리틀 사이공은 특정 구역에 민족색 짙은 스몰비즈니스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글렌데일 아르메니안 커뮤니티는 비즈니스가 밀집되어 있기 보다는 시 전체에 골고루 퍼져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아르메니안 커뮤니티의 한인회격인 ‘아르메니안 내셔날 커미티(ANC)’의 아다시스 카자키엔 디렉터는 “글렌데일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구석 구석 아르메니안 식당, 그로서리 스토어 등을 발견할 수 있다”며 “또한 글렌데일시로부터 지정된 구역도 없다”고 밝혔다. 글렌데일의 아르메니안 커뮤니티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특히 최근에도 신규 이민자들의 유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카자키엔 디렉터의 설명이다. 아르메니안 커뮤니티의 이민사는 다른 소수 민족에 비해 빠르게 시작됐다. 1800년대 말 터키 제국의 폭정을 피해 미국을 비롯 이란 이스라엘 남아프리카 등으로 떠난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두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 이란 회교혁명이 발생하면서 이란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안들의 1차 대규모 유입이 있었고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면서 2차 대규모 유입이 이루어졌다. ▷거주와 비즈니스 결합=글렌데일 아르메니안 커뮤니티의 특징은 '거주'가 기반이 된다. 아르메니안이 운영하는 비즈니스가 번창하기 보다는 거주 인구 위주로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아르메니안 이민자들이 글렌데일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 당시만해도 글렌데일에는 아르메니안이 운영하는 그로서리 스토어는 2개였을 정도로 커뮤니티 발전이 미약했다. 하지만 이민자들이 경제적인 안정을 찾으며 글렌데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카자키엔 디렉터는 "아르메니안들도 한인들 못지 않게 교육열이 높다"며 "따라서 교육 환경이 LA보다 좋은 글렌데일로 이주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렌데일 남쪽의 아파트 밀집 지역에는 주로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북쪽의 싱글홈이 몰려 있는 지역에는 이민온지 오래됐거나 재정적으로 성공한 아르메니안들이 몰려있다. 또한 글렌데일에 아르메니안 이민자들의 유입이 늘어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교회다. 글렌데일에는 성메리 그리스정교 교회 등 아르메니안들을 위한 그리스정교 교회 10여개가 들어서 있다. 카자키엔 디렉터는 "아르메니안은 로마가 기독교를 믿기 이전에 이미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민족"이라며 "아르메니안 이민자들에게 있어 교회는 큰 의미를 차지한다"고 전했다. 이처럼 글렌데일에 아르메니안 인구가 늘어나면서 곳곳에 아르메니안 식당 그로서리 스토어 카페트 가게 등 스몰 비즈니스도 형성이 됐다. ▷높은 정치 관심=아르메니안 커뮤니티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치력이다. 지난 2007년 글렌데일 시의원 선거에서 밥 요세피엔 아라 나자리엔 라피 마노우키엔 등 3명의 아르메니안이 시의원으로 선출됐다. 글렌데일 시의원 5자리 중 3자리를 아르메니안이 차지한 것. 현재 글렌데일 시의회에는 밥 요세피엔 아라 나자리엔 의원이 남아있다. 하지만 오는 4월 글렌데일 시선거를 앞두고 3자리의 시의원을 위해 12명의 후보가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중 7명이 아르메니안이다. 통상 이같은 선거가 있으면 전체 투표자 중 절반 이상이 아르메니안들일 정도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카자키엔 디렉터는 "아르메니안 커뮤니티가 정치력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며 "아르메니안 유권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시정부에서 커뮤니티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라고 강조했다. ▷뿌리의식 잊지 말자=긴 이민사와 글렌데일시에서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안 커뮤니티 역시 다른 커뮤니티와 마찬가지로 당면 과제가 있다. 바로 아르메니안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알리는 것. 현재 아르메니안 커뮤니티는 글렌데일에 아르메니안 문화를 알릴 기념비 또는 공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미국정부에 터키제국이 약 1세기전 자행한 '아르메니안 대학살'을 알리는 것도 아르메니안 이민자들의 주요 과제다. 이를 위해 LA의 '리틀 아르메니아'에서는 매년 4월 24일 '아르메니안 대학살'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를 개최하고 있다. 이같은 과제 해결에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아르메니안 커뮤니티의 정치력이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력이야 말로 커뮤니티 성장을 위한 큰 지원군이죠." '유권자 절반이 아르메니안'…ANC 아다시스 카자키엔 디렉터 ANC의 아다시스 카자키엔 디렉터(사진)가 강조했다. 최근 글렌데일시에서 1999년 아르메니안 라피 마노우키안 후보가 시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빠르게 아르메니안 커뮤니티의 정치력이 신장되고 있다. 단순히 아르메니안계 시의원이 선출된 것이 아니다. 이들 아르메니안계 정치인들이 선출되는데는 커뮤니티 차원의 펀드레이징 캠페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높은 투표율이 뒷받침됐다. 오는 4월 글렌데일 시선거에서도 전체 등록된 유권자 2만~2만4000명 중 절반인 1만~1만1000명이 아르메니안일 정도로 투표 참여율이 높다는 것. 그는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안 부모들은 자식들이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직종 종사자가 되길 바라지만 정작 자녀들이 정치에 뛰어들기 원하는 부모가 많지 않다"며 "하지만 이는 개인의 성공을 위해 좋을지는 몰라도 커뮤니티 성장을 위한 정치적인 힘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할리우드 '리틀 아르메니아'는…70년대 초반 초기 이민자 정착지 글렌데일에 앞서 아르메니안 커뮤니티가 형성된 곳이 바로 할리우드다. 지난 2000년 LA시는 남-북으로 산타모니카 불러바드와 할리우드 불러바드, 동-서로 버몬트 애비뉴와 101프리웨이를 ‘리틀 아르메니아’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 구역은 타이타운과도 일부 겹쳐져 있으며 ‘리틀 아르메니아’ 사인이 없다면 무심코 지나칠 정도로 아르메니안의 특색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리틀 아르메니아는 1970년대초 아르메니안 이민자들이 LA에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당시 저렴한 렌트비로 아르메니안 이민자들이 크게 유입되며 아르메니안 커뮤니티가 번창했다. 지금도 일부 아르메니안 이민자들이 카페트 가게, 식당 등 스몰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다. 서기원 기자 kiwons@koreadaily.com

2009-03-15

[이웃 커뮤니티서 배운다-5] 리틀 사이공

오렌지카운티에 위치한 리틀 사이공을 둘러보다 보면 한인타운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차이나타운, 리틀도쿄, 타이타운처럼 상대적으로 작은 사이즈에 밀집해 있기보다는 9마일 스퀘어피트에 흩어져 있다. 다시 말해 한인타운처럼 차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넓게 흩어져 있다. 각 블럭마다 대형 샤핑몰이 들어서 있고 곳곳에 식당, 마켓, 의류, 보석업소 등 스몰비즈니스가 베트남인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가 활발하게 영업을 하고 있다. 또한 보험, 변호사 등 각종 전문직들도 많이 눈에 띈다. 리틀 사이공은 웨스트민스터, 가든그로브, 샌타아나, 파운틴밸리 등 4개 도시에 걸쳐서 형성됐다. 남-북으로 에딘저에서 웨스트미니스터, 동-서로 비치에서 하버길에 이르는 넓은 구역에 베트남 비즈니스가 퍼져있다. 이중 가장 중심이 되는 길은 웨스트민스터시와 가든그로브시를 지나는 볼사 길이다. 볼사 길에는 베트남 커뮤니티의 대표적인 샤핑몰인 아시안가든몰을 비롯, ‘웰컴투 리틀 사이공’이라는 표지판이 여러개 세워져 있다. 1980년대 말 웨스트민스트시는 남-북으로 트래스크와 맥파덴, 동-서로 매그놀리아와 유클리드를 공식적으로 리틀 사이공으로 인정했다. ▷리틀 사이공은=베트남 인구, 비즈니스, 건물 소유가 미주에서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리틀 사이공이다. 2000년 센서스 조사에 따르면 웨스트민스터시 인구의 30.7%, 가든그로브시의 21.4%가 베트남계다. 아시안 아메리칸 비즈니스 여성협회(AABWA)의 김옌 운 회장은 “볼사 길에서 영업중인 비즈니스의 80% 이상, 상업용 부동산의 80% 이상이 베트남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주내 베트남 커뮤니티에서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연간 리틀 사이공을 찾는 타주 베트남 관광객만 50만명에 달하고 있다. ▷베트남인들의 고향=리틀 사이공은 미국에 거주하는 베트남 이민자들의 고향이다. 리틀 사이공이 오렌지카운티에 정착한 것은 1975년 사이공이 패망한 이후다. 전쟁에서 진 베트남 정부 고위직, 중산층, 상류층 인사들이 공산주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왔다. 이후 1980년대 베트남을 떠난 보트 피플 등 베트남 난민들이 샌디에이고 난민 수용소를 거쳐 처음 정착한 곳이다. 70년대 베트남 난민들이 정착할 당시만해도 현재 리틀 사이공 자리는 딸기밭, 자동차 수리업체 등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쇠퇴해가고 있었다. 베트남 난민들이 정착하며, 20년만에 성장을 거듭해왔다. 한인사회의 한인회격인 리틀 사이공 파운데이션(LSF)의 켄 구엔 회장은 “특히 리틀 사이공은 돌아갈 곳 없는 베트남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라며 “그만큼 리틀 사이공, 미국에 대한 애착이 높다”고 말했다. ▷강한 정치력을 통한 성장=베트남 커뮤니티의 강점은 정치력이다. 베트남 커뮤니티는 가주의회의 조셉 카우 하원의원, OC 수퍼바이저 자넷 구엔, 웨스트민스터 시의원 2명, 가든그로브 시의원 2명 등 로컬과 주의회에 10여명의 현역 정치인을 배출했다. 이에에도 시, 카운티 정부기관에 진출한 베트남계 공무원도 제법된다. AABWA 운 회장은 “이들 정치인들의 지역에 리틀 사이공이 포함돼 있어 커뮤니티 발전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그만큼 커뮤니티 차원에서 베트남계 정치인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지역 정치 참여도가 높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 지난 2007년 자넷 그웬 OC 수퍼바이저가 당선될 당시, 득표율이 57%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이 베트남 이민자들의 표다. 또한 이 선거에서 행해진 부재자 투표의 절반 이상이 베트남 이민자들의 표였다. 이처럼 지역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이 베트남 커뮤니티의 강점이다. 또한 지역에 대한 커뮤니티의 기여도도 높다. 예를 들어 시정부에서 리틀 사이공내 가로등을 교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 커뮤니티 차원에서 펀드레이징 통해 12만달러를 모아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또한 지난 9·11테러시 200만달러, 쓰나미 피해를 위해 100만달러를 커뮤니티에서 모아 전달했다. 구엔 회장은 “베트남 난민들에게 정착의 기회를 제공했던 OC, 미국에 환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성장 방향은=리틀 사이공의 성장 단계는 한인타운과 흡사하다. 75년 이후 리틀 사이공은 베트남 난민들의 재정착-베트남 커뮤니티와 비즈니스의 건설-커뮤니티 비즈니스 개발 등의 단계를 거쳐왔다. 현재 리틀 사이공이 직면한 네번째 발전단계는 베트남 커뮤니티의 문화적인 특성과 비즈니스를 개발, 확장하는 것이다. LSF의 구엔 회장은 “현재 펀드레이징을 통해 130만달러의 자금을 모아 리틀 사이공의 상징물인 게이트웨이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라며 “베트남 문화를 유지하고 알리는 것이 앞으로 리틀 사이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했다. 서기원 기자 kiwons@koreadaily.com

2009-03-08

[이웃 커뮤니티서 배운다-4] 타이타운. '문화 마케팅'으로 지역경제 일군다

할리우드 동쪽의 타이타운의 특징은 ‘공존’이다. 지리적으로 아르메니안 커뮤니티인 ‘리틀 아르메니아’와 인접해 있는데다가 할리우드라는 특성상 타인종들의 트래픽이 높다. 실제로 타이타운내 타이식당 ‘타이 패티오’에는 점심시간 타이 손님들보다 타인종 손님들이 80%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타인종 손님들도 많이 찾고 있다. 따라서 타이 문화와 주류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공식적인 타이타운의 경계는 동-서로는 웨스턴과 노만디, 남-북으로는 할리우드 불러바드와 선셋에 이르는 6블럭이다. 1998년 LA시로부터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구역이다. 주요 타이 상권은 할리우드를 따라 형성돼있다. 할리우드길에 운영중인 타이업소는 타이식당, 타이마켓, 마사지업소, 비디오 가게, 관광용품업소 등 50여개에 달한다. 이외에도 로스, 랄프 등 주류 대형 체인점을 비롯한 업소들도 자리를 잡고 있다. 타이커뮤니티개발센터(TCDC)에 따르면 현재 남가주내 거주하는 타이 이민자는 약 5만2000여명, 이중 절반 이상이 남가주에 거주하고 있다. ▷왜 타이타운일까=한인타운 차이나타운 리틀 도쿄 등 타커뮤니티와 같이 현 타이타운은 타이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타이 이민사에 있어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신규 이민자들이 타이타운 인근에 정착 타이 식당이나 마켓에서 일자리를 찾으면서 신규 이민자 유입은 꾸준하게 늘고 있다. 타이커뮤니티개발센터(TCDC)의 샹샤니트 마토렐 디렉터는 "태국에서도 할리우드는 잘 알려져 있다. 타이 이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향했던 곳이 현 타이타운"이라며 "지금도 갓 미국에 도착한 타이 이민자들은 할리우드에 정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타이 인구와 함께 상업적인 이유도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타이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스몰 비즈니스가 많으며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TCDC의 알렉산더 홀샤이머 커뮤니티 플래너는 "실제로 타이타운에 타이 이민자들이 소유한 상가는 거의 없지만 타이 관련 업소들이 활발하게 운영되고있다"며 "이같은 배경으로 타이타운을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할리우드라는 지역적인 특성상 성장에 제약도 있었다. 타이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원. 하지만 할리우드의 높은 부동산 가격 때문에 타이타운내에 세우지 못하기도 했다. ▷문화 시설을 강화한다=타이타운이 LA시에서 승인을 받은 것은 1998년이다. 하지만 타이 커뮤니티가 자체적으로 구역 신청한 것은 1992년이다. 92년 흑인 폭동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커뮤니티 자체적으로 공식적인 타이타운의 필요성이 대두 된 것. 당시 구역안을 추진한 TCDC는 자체 설문 조사와 함께 차이나타운 리틀도쿄 한인타운 리서치를 통해 발전 모델을 추진했었다. 당시 타이 커뮤니티가 제안한 타이타운 구역은 동-서로 멜로즈와 버몬트 남-북으로 할리우드 불러바드와 라브레아였다. 하지만 1994년 노스리지 지진으로 인해 밸리 지역의 타이 커뮤니티가 큰 피해를 입으며 커뮤니티의 관심이 구역안보다는 재해 복구에 쏠렸다. 이후 구역안을 재추진 92년 현재의 6블럭을 타이타운으로 승인받았다. 마토렐 디렉터는 "초기 계획보다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메트로 레드라인이 지나면서도 관광객들이 찾아 걸어다닐수 있는 사이즈"라며 "타이타운이 추구하는 성장 계획에 딱 적당하다"고 말했다. 이후 타이 커뮤니티는 2000년 웨스턴과 할리우드 불러바드에 타이 전통 신화의 천사 압손시(Apsonsi) 동상이 세워진 게이트 웨이를 세웠다. 10여년 전부터 매년 4월 타이 뉴이어 축제 9월 타이 문화의 날 등 대형축제를 개최해왔다. 작년 4월 타이 뉴이어 축제에는 약 10만여명의 관광객들이 몰리기도 했다. 마토렐 디렉터는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타이 사원의 승려들이 시주를 받으러 나오곤 한다"며 "이런 것도 타이 타운만의 볼거리"라고 말했다. ▷문화는 마케팅 수단이다=타이 커뮤니티는 타운내 문화 상품을 강화해 마케팅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계획이다. 타이 문화를 보고 듣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시설과 서비스를 갖춰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것. 결국 타이 문화를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 지역 경제를 보다 활성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앞으로 게이트웨이 외의 다른 상징물 각종 스몰 비즈니스 프로모션과 행사를 통해 타이 음식 그림 전통 의상 무에타이를 더욱 알릴 수 있도록 고심하고 있다. 마토렐 디렉터는 "92년 폭동이후 당시 슬램화됐던 할리우드 동쪽에 타이타운을 세워 관광객을 유치 지역경제를 보다 활성화시키자는 것이 타이타운의 성장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서기원 기자

2009-03-01

[이웃 커뮤니티서 배운다 -3] 필리피노 타운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은 지리적으로 LA한인타운과 인접해 있다. 타운 형성 역사는 LA다운타운의 차이나타운이나 리틀도쿄에 비해 늦지만 소수계 이민지 커뮤니티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현지화' 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을 가보니=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 내 번화한 길을 꼽으라면 동서를 잇는 베벌리 불러바드 템플 스트리트 그리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알바라도길이다. 하지만 이들 번화한 길에서 필리핀 커뮤니티의 색채를 느낄만한 업소나 상가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심지어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 구역내 베벌리 불러바드 선상에는 한인 자동차 업소 한인교회 병원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을 정도다. 이 타운에는 필리핀 상권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수많은 업소들 중 바하이쿠보 내나이 글로리아 등이 대표적인 필리핀 식당일 정도다. 또한 필리핀 이민자가 소유한 상가는 템플길 선상의 루존플라와 라모스 빌리지스 정도다. 필리피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상징물도 유니온과 템플 인근 벽화와 교회 레이크 스트리트 선상의 레이크 스트리트 파크내 필리피노 참전용사를 기리는 석판 등이 고작이다.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 주민의회(HFNC)의 세실리아 라모스 회장은 "필리핀 커뮤니티지만 필리핀 문화 또는 상권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것은 다른 커뮤니티와는 달리 이민자 대부분이 간호사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것도 주요 이유"라며 "결국 자영업자들이 드물기 때문에 한인타운처럼 상권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시정부가 승인한 필리피노 타운=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이 LA시로부터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은 것이 2002년 8월 2일이다. 로컬화가 상당히 진행된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이 시정부로부터 공식적인 문화 구역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그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필리피노 이민자 인구 밀집도가 가장 큰 요인이다. 필리핀 이민사가 시작된 것이 1900년대 초. 미국에 이민을 온 필리피노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LA다운타운이었다. 당시만해도 인종차별이 심해 동양인 이민자들에게 거주지를 렌트해주는 지역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리핀 이민자들에게도 LA다운타운은 '이민의 첫 출발지'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현재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는 남가주에서 필리핀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꼽힌다. 이 지역 전체 거주인구중 차지하는 비율은 약 35% 정도. 라모스 회장은 "이 지역의 라티노 인구 비율이 3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라티노 인구 비중도 높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과 멕시코의 경우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는 공통점 때문에 문화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많아 잘 어울리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부터 시작=필리피노 커뮤니티의 외형적인 성장은 이들의 이민 역사에 비해 상당히 늦게 시작한 편이다. 하지만 지난 2002년 LA시정부의 승인을 받은 후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 주민의회가 중심이 돼 필리피노 커뮤니티의 경제 문화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현재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에는 로타리클럽 필리피노 노동자 센터(PWC) 등 20여개의 단체들이 HFNC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커뮤니티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실제로 매년 10월이면 필리피노 이민자 역사를 기리는 축제를 개최한다. 이 행사에는 에릭 가세티 LA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정치 관계자들도 참석한다. 현재 필리피노 커뮤니티는 필리핀 노동업계 지도자 필립 베라 크루즈의 이름을 딴 공원 국민영웅 호세 리잘의 동상 건립 등 다양한 경제적인 인센티브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큰 매스터 플랜이다. 서기원 기자

2009-02-22

[이웃 커뮤니티서 배운다-2] 리틀 도쿄, '일본 알리자' 문화시설 집중

LA다운타운 '리틀 도쿄'의 특징은 진한 일본문화의 냄새다. 한인타운처럼 외적인 성장을 거듭해 온 것은 아니지만 대신 집약형 개발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런 유명세로 관광객이 몰리면서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한인업소들의 진출도 늘고 있는 지역이다. 현재 리틀 도쿄의 경계는 남-북으로는 템플과 4가 동-서로는 로스앤젤레스와 알라메다의 약 16블럭의 구역이다. 남가주일본인상공회의소(JCCSC)의 테드 와카오 전 회장은 "리틀 도쿄에 대한 공식적인 경계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 리틀 도쿄로 알려진 지역은 일본의 사원 음식점 커뮤니티 센터 재패니스 아메리칸 내셔날 뮤지엄(JANM) 등의 일본 문화 시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JCCSC에 따르면 리틀 도쿄내 상가 및 업소들의 50%가 한인 등 일본계가 아닌 업주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지역을 리틀 도쿄 일본 문화의 중심지로 인식하고 있다. 리틀 도쿄는 지난 2차대전 이후 새롭게 형성된 이래 큰 외형적인 변화가 없었던 것도 특징이다. JCCSC의 토시오 혼다 회장은 "최근 개발중인 1가와 센트럴의 복합 샤핑몰 니케이 센터를 제외하면 1940년대 이후로 외형상 큰 변화는 없었다"며 "하지만 타인종 손님들을 비롯해 일본인 3세 4세 5세들이 일본 문화를 알기위해 찾는 곳이 바로 리틀 도쿄"라고 전했다. 서기원 기자

2009-02-15

[이웃 커뮤니티서 배운다-2] 리틀 도쿄, '상징건물' 대부분 기부로 건립

리틀 도쿄가 현재 위치에서 70여년간 자리를 잡아오며 지켜온 것이 있다면 바로 일본 문화에 대한 '정체성'이다. 리틀 도쿄의 시작은 다른 커뮤니티와 마찬가지로 이민 초기 일본인들이 1800년대 말쯤 처음 정착하면서부터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현재보다 경계가 더 넓었다는 것이 지역 관계자들의 전언. 하지만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지역내 일본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격리수용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격리수용이 끝나면서 새롭게 조성된 것이 현재의 리틀 도쿄다. ▷일본 문화시설의 중심지=현재 약 16개 블럭 규모의 리틀 도쿄에는 다양한 문화시설이 운영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1992년 1가와 센트럴에 오픈한 '재패니스 아메리칸 내셔날 뮤지엄(JANM)'이다. 이를 비롯해 일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1가-센트럴-2가-샌페드로의 재패니스 빌리지 2가와 센트럴 인근의 전통 극장 '재패니스 아메리칸 시어터' 3가와 샌페드로길의 '재패니스 아메리칸 커뮤니티 문화센터(JACCC)'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일본 전통 사원도 5개나 된다. 이들 시설 모두 일본의 문화 및 전통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일본 커뮤니티에 있어 이들 문화 시설은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주류 및 타인종 커뮤니티에 일본 문화를 알리는 역할과 동시에 미주내 일본인 3세~5세들에게 일본 문화를 잊지 않도록 하는 역할이다. 와카오 전회장은 "일본인 이민사가 130년 가까이 되면서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후세들의 미국화"라며 "어렸을 때는 미국 문화를 쫓던 젊은 일본인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일본인으로서 정체성을 찾게 됐을때 찾아오는 곳이 리틀 도쿄"라고 강조했다. ▷커뮤니티의 높은 참여도=지난 70년간 리틀 도쿄에 다양한 문화시설이 세워지며 남가주에서 일본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데는 커뮤니티 차원의 높은 참여도가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리틀 도쿄의 상징적인 건물 대다수가 성공한 일본인들이 기부금으로 지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1992년 오픈한 JANM은 건설을 위한 시드머니 대부분이 일본 커뮤니티에서 나왔다. 2차대전 당시 미 정부에 의해 재산이 몰수돼고 강제수용소에 격리 수용된 일본인들은 10개 시설에 10만여명에 달했다. 일본인들은 이에 대해 꾸준히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고 레이건 행정부 시절 격리수용에 대한 미 정부의 공식 사과와 함께 1인당 2만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었다. 이때 받은 보상금 대부분이 JANM 건립을 위한 시드머니로 기부됐다는 것. 이 모든 시설이 커뮤니티에 기부된 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JCCSC의 토시오 혼다 회장은 "개개인의 성공뒤에는 커뮤니티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열린 마인드=리틀 도쿄는 관광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일본 문화에 생소한 타인종들이 찾기 편하다는 의미다. 이같은 열린 마인드는 단순히 관광객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JCCSC에 따르면 지역 비즈니스 50% 가량이 비일본인 오너에 의해 운영된다. 건물 소유도 유사한 비율을 보인다. 또한 거주인구도 비일본인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LA일본영사관에 따르면 LA카운티내 거주하는 일본 국적자는 6만4734명 하지만 정작 LA 리틀 도쿄 인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많지 않다. 지역 관계자들은 이민 인구가 늘어나면서 남가주내 일본 인구들이 OC 등으로 흩어지면서 상대적으로 타인종의 유입이 늘어나는 것으로 분석했다. 따라서 단순히 일본 커뮤니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비일본인들에게도 오픈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0년전부터 운영되고 있는 '리틀 도쿄 커뮤니티 위원회(LTCC)'다. 이 위원회에는 약 100여개의 일본 커뮤니티 단체들이 속해있다. 이들은 매달 네번째 화요일 오후 3시에 모여 리틀 도쿄 관련 각종 이슈를 논의 방침을 결정한다. LTCC의 크리스 아이하라 회장은 "LTCC는 리틀 도쿄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참석해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모임"이라며 "이 모임에는 단순히 일본인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내 비즈니스를 운영하거나 건물을 소유한 타인종들도 자유롭게 참여해 의견을 밝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다 회장은 "미국 특히 LA는 다양한 민족이 어우려져 사는 곳"이라며 "일본 문화를 유지하는 동시에 또한 일본 문화를 알리는 것이 바로 리틀 도쿄의 역할"이라고 전했다. JCCSC 토시오 한다 회장 '자원봉사로 치안·청결 유지' “지금의 리틀 도쿄는 모두 커뮤니티가 함께 만든 것입니다.” JCCSC의 토시오 한다 회장이 강조했다. 리틀 도쿄는 한인들을 비롯한 젊은층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일본 만화, 음식 등 일본 문화를 즐기고 싶은 젊은층들이 많다. 이외에도 이국적인 일본 문화를 느끼기 위한 관광 명소로 꼽힌다. 특히 리틀 도쿄가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인식이 높아 젊은 여성들이 즐겨 찾는다. 한다 회장은 “리틀 도쿄의 이같은 이미지는 누구 하나의 노력만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라며 “20녀년전 코반을 세우고 커뮤니티 관계자들이 자원봉사를 통해 거리 치안과 청결에 신경을 쓰는 등 꾸준한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다. 커뮤니티의 발전은 누구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어 “한인타운이 많은 젊은층들에게 매력적인 곳임을 잘 알고 있다”며 “하지만 치안과 함께 비한인 손님들을 맞을 준비 아쉬운 점”이라고 덧붙였다. LTCC 크리스 아이하라 회장 '다양한 단체 통일된 목소리' “일본인의 이민사가 처음 시작했다는데 리틀 도쿄의 의미가 있습니다.” 리틀도쿄커뮤니티카운실(LTCC)의 크리스 아이하라 회장이 리틀 도쿄의 역사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이같은 리틀 도쿄의 의미를 유지하는 중심에는 LTCC가 자리잡고 있다. 리틀 도쿄내 비즈니스, 교화, 사원, 거주인을 비롯, 다양한 일본계 비영리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LTCC다. 이외에도 비일본인이지만 리틀 도쿄와 관련있는 비즈니스, 개발업자들도 참석한다. LTCC의 역할은 바로 리틀 도쿄의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아이하라 회장은 “LTCC가 생길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 생길때 관련 단체장들이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며 “따라서 처음부터 활성화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LTCC는 리틀 도쿄의 전통과 이익을 보호하고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녀는 이어 “이처럼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큰 이슈와 함께 커뮤니티 차원의 지지가 필요하다”며 “이번 한인타운 구역 이슈를 통해 한인사회도 보다 통일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서기원 기자

2009-02-15

LA 차이나타운…전통양식 건물 '척 봐도 차이나'

LA한인타운 구역안이 결정되면서 ‘타운’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타운 구역안’은 타운의 효과적, 집약적 성장을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정부기관으로부터의 각종 지원금 확보에도 유리하다. 중앙일보와 중앙방송이 공동으로 우리보다 앞서 타운을 형성하고 발전시켜온 이웃 타운들을 찾아 한인타운의 ‘발전 모델’을 모색해 보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한다. LA차이나타운의 성장 원동력은 ‘전통을 통한 융합’이었다. 남가주 지역에 산재한 중국 커뮤니티에서 중국 문화 전파 및 유지의 핵심으로 꼽히는 LA차이나타운은 70여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일대의 거주 인구만도 10만명 에 육박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현재 LA차이나타운의 위치는 공식적인 구역은 없지만 LA시청 북쪽인 차베스 애비뉴-예일-메인-LA리버를 경계로 하는 지역이다. LA차이나타운이 처음 형성된 것은 1880년대 무렵. 처음에는 현 유니온역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성장을 거듭해 1910년 무렵에는 건물만 200여동에 달할만큼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당시 인종차별적인 법으로 인해 중국인들의 건물 소유가 철저하게 제한되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8년 유니온 역 인근이 재개발에 들어가며 차이나타운은 현재의 위치로 옮기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리고 70여년 간 꾸준히 확장을 거듭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LA차이나타운 관계자들은 ‘중국 문화의 유지’를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개발 지침은 30년대 현재 위치로 이전하며 ‘뉴차이나타운’ 개발하면서부터 도입됐다. 이에 따라 센트럴 플라자 등 차이나타운 곳곳에는 중국 전통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나성중화회관의 피터 잉 회장은 “새로 건물이나 쇼핑몰이 개발되면 커뮤니티 차원에서 중국식의 디자인을 부탁하고 있다”며 “미국내 중국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차이나타운은 꾸준하게 발전을 해오며 현재는 LA의 관광명소로도 자리를 잡았다. 서기원 기자

2009-02-03

[우리의 이웃 커뮤니티서 배운다] 차이나타운, 세대 잇는 '고유 전통 지키기'

LA다운타운 북쪽에 위치한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거리 브로드웨이길을 따라 가다보면 중국의 거리를 걷는 듯한 인상이 든다. 중국 전통 양식의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대로변에는 식당 중국 전통 기념품이나 보석 판매점 전통 의류 가게 등 다양한 업종의 업소들이 위치해 있다.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쇼핑몰인 센트럴 플라자에 들어서면 중국의 한 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모든 건물들이 중국의 전통 양식을 따라 지었다. 중국 노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관광객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견학 온 초등학생들도 보인다. 올해로 설립 71주년을 맞는 '뉴차이나타운'의 현재 모습이다. 차이나타운은 동-서로는 예일에서 메인길 남-북으로는 시저스 차베스 애비뉴에서 LA리버로 구분되는 지역이다. LA한인타운에 비해 적은 규모지만 고유의 특징으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 있다. 거주자들이 전하는 차이나타운의 특징과 강점은 '전통'이다. 차이나타운의 한인회 격인 나성중화회관(CCBA)의 피터 잉 회장은 "남가주내에서 여러 지역으로 중국인들이나 중국 상권이 확장되고 있지만 LA다운타운 차이나타운은 남가주 중국문화의 허브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통은 타운 형성 초기부터 줄곧 유지됐다. 체스터 종 상공회의소 회장은 "약 70년 전 유니온역 인근에 있던 차이나타운이 현재 위치로 이전해 새로운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며 "당시 마스터 플랜이 바로 중국의 전통을 살리자는 것이었으며 이같은 컨셉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고유의 색깔을 수십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안전하고 깨끗한 차이나타운을 만들자'는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차이나타운 상업개발구 조지 유 이사장은 "LA경찰국(LAPD)과 매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결과 차이나타운내을 보다 안전하게 만들 수 있었다"며 "또한 지역 정치인들과도 꾸준한 관계를 형성해왔다"고 전했다. 이같은 컨셉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타커뮤니티 방문객들이 늘어날 수록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민 3~4세가 많을 만큼 이민역사가 길어지면서 사라져가는 중국 전통 문화를 지키자는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입구 격인 시저스 차베스 길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향해 날고 있는 게이트가 세워져 있다. 이 용처럼 최근 차이나타운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따라서 젊은 세대들을 유치할 수 있는 상권이나 시설을 개발하는 것이 차이나타운의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종 회장은 "이같은 진화은 어느 한 단체의 몫이 아니다. 커뮤니티내 모든 단체들이 협력해 차이나타운의 진화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LA 차이나타운 형성 LA 차이나타운이 처음 형성된 것은 1880년대 무렵으로 당시에는 유니온 스테이션 인근에 형성됐다. 1910년까지 15개 거리와 200개의 빌딩이 속해있을 만큼 성장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당시 인종차별적인 법으로 인해 중국인들의 건물 소유가 철저하게 제한되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1938년 유니온역 인근이 재개발에 들어가며 차이나타운은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이후 뉴 차이나타운은 성장을 거듭함과 동시에 할리우드에 중국 영화 붐이 일며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 받으며 주류사회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피터 잉 나성 중화회장 '일 있을때면 모든 단체 단합' "차이나타운의 성장 원동력은 바로 단합입니다." 차이나타운의 한인회 격인 나성중화회관(CCBA)의 피터 잉 회장이 강조했다. 나성중화회관은 120년의 역사를 가진 단체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단체다. 차이나타운에는 CCBA 외에도 수많은 단체들이 있지만 협조체제가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이 잉 회장의 설명. 잉 회장은 "모든 단체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관련 이슈가 생기면 해당 단체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다"며 "또한 관련 이슈에 대한 서명운동이나 공청회 등에 중국인들의 참여도가 높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이슈가 생기면 커뮤니티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해결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잉 회장은 한인타운에 대해 "빠르게 성장하는 매력적인 곳으로 식당 등 관심이 가는 곳이 많다"며 "하지만 한인친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쉽게 원하는 곳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체스터 종 상의회장 '간판에 한자·영어 함께 표기' "중국인 뿐만 아니라 타인종들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중국상공회의소 체스터 종 회장이 차이나타운 상권의 특징을 설명했다. 실제로 차이나타운은 타인종 방문객들을 위해 타운내 모든 업소들의 간판을 한자와 영어로 표기하는 등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다. 이에 따라 차이나타운에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타인종 고객들도 유치, 상권을 보다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인타운에 대해서도 "한인타운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타 커뮤니티와 보다 활발한 교류를 할 필요가 있다"며 "이같은 교류를 통해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또한 종 회장은 한인타운의 정체성 확립 문제에 대해 "차이나타운은 용조각이 들어간 게이트, 건물 등을 통해 차이나타운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워왔다"며 "한인타운도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을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전했다. 글=서기원 기자 사진=신현식 기자

2009-02-03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