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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어슴새벽

첫눈 내리고 찬 바람이 불어 / 나무에 기대어 사는것도 숨이 차올 때 / 촛불 하나 불 밝히면 그게 온 세상 다인 / 당신이라는 호주머니 속에 살고 싶었네 /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픔으로 눈길을 걷네 / 낯선 어둠이 길을 막고 서 있네 / 내안에 흔들리는건 내가 아니었네 // 얼어붙은 단풍잎 하나 집어들다가 /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꿈에서 깨었네 / 맞은편 하늘도 내려앉아 새벽이 아파 오네 / 손에서 바스러지는 낙엽의 마지막 숨 / 하늘이 발밑에 무너져 내린 것이네 // 막다른 길위에도 바람이 스쳐 오네 //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맞이한 별빛도 / 하늘을 나르는 새의 깃털같은 자유도 / 뒹그는 붉은 나뭇잎 하나만도 못해 / 새벽길을 더듬으며 너의 흔적을 찿네 // 빛처럼 내리는 고요의 숲길을 걸으며 // 마지막 길을 함께 못한 회한이 나무처럼 서있네 / 창가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아침은 오는데 / 먼발치로 바라 보는, 가지 못한 길이 서럽네 // 별빛 영롱해지고 파도 잔잔한 날 / 지나온 시간과 함께 다가올 시간도 꼭꼭 싸매 / 당신 바라보는 별빛아래 놓아두기로 했네 / 안녕, 그 고통의 아름다움을 껴안네 // 내려오는 발길에 선물처럼 먼동이 트는데       설명하는 지인의 눈은 밝고 빛이 났다. 그 표정이 얼마나 진지했던지 그의 말 속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들어 보았음직한 단어이었음에도 한 번도 내 입을 통해 말해 본 적 없는 정겨운 단어였다. “맞아, 걷기 좋은 날이면 맞은편 언덕으로 달려 갔던 그 시간” 바로 그 시간이 *어슴새벽이었다.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어스레하게 밝아오는 길은 하루를 여는 가슴뛰는 시간이었다. 기대 하지 못한 풍경을 만나고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마지막 한 생명의 호흡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아직 가지에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는 바람에 떨고 있었지만 기꺼이 가지로부터 떨어져 봄에 피어날 새싹을 위해 썩어질 준비를 마친 후 같이 비장해 보였다.     빈들이 되어버린 언덕에 첫눈이 내렸다. 순식간에 세상은 하얗게 변해 버렸다. 보이는 풍경이 하나로 되어 세상의 불협화음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나도 소리없이 입을 막고 눈길을 걸었다. 발밑에 뽀득이는 소리가 좋아 일부러 눈길을 찿아 걸었다. 고요가 맞은 편 숲길에서 걸어 나왔다. 이 고요는 벌거벗은 나무를 껴안고, 까만 씨앗을 품은 들꽃을 쓰다듬고 있었다.     하루의 시간 중 어슴새벽은 늘 경이로운 시간이었다. 깨어나는 시간이고, 품어주는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시간이고 용서하는 시간이었다. 이 순간을 거슬릴 수 없다면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어 나도 하얀 풍경으로 남아 이시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창가에   목련노을이 지면   하루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숨쉬듯 반짝이는   별이 뜨고   내 마음 가득 담은   널 닮은 달도 오르고 말지   빈들엔 고요의 축제   하얀 풍경의 시간이   거기 멈추어 섰네 (시인, 화가)     *어스레하게 밝아오는 새벽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남아 이시간 맞은편 하늘 맞은편 언덕

2024-12-0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마음이 가는 길

마음에도 길이 있다. 가고 싶은 길, 안 가고 싶은 길. 유년의 감꽃이 흐드러진 골목길, 생각나면 눈물 고이는 아득한 추억의 길, 잊어버리고 싶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는 캄캄한 길,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길, 영원히 지우고 싶은, 기억 속의 슬픈 길, 막혀버린 담장 끝에서 죽음처럼 어둔 골짜기를 헤매던 길.     강물은 흔적 없이 흘러가지만 마음의 길은 돌뿌리로 남아 상처를 덧나게 한다.     사랑이 스쳐간 곳도 흔적이 남는다. 새벽이면 영롱한 이슬 머금고 반짝이지만 무지개 빛 햇살과 한나절 뜨겁게 달구던 태양이 기울면 사랑은 낙엽 되어 뒹군다. 영원을 다짐하던 사랑도 책갈피 속 마른 꽃잎의 흔적으로 남는다.   암수의 눈이 하나씩이라 짝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하는 비익조(比翼鳥), ‘두 그루면서 한 나무로 얽힌’ 연리지(連理枝)의 사랑도 양귀비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도 우정도 믿음도 의리와 목숨까지도 영원한 것은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의 고통이 제일 아프다. 우정에 금이 가고 신뢰가 허물어지면 공들여 쌓아 올린 믿음의 성벽이 무너진다. 칼에 베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지만 마음에 긁힌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다. 딱지를 떼고 지우고 잊으려 해도 상처 난 마음의 흔적은 수시로 덧난다.     살다 보면 별이 일이 다 생긴다. 믿었던 사람이 양다리 걸치고 다정했던 동료가 등 돌리고 배신 때리는 일이 생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변한다. 어제의 인연에 연연해서 오늘과 내일을 멍들게 하는 선택은 바보짓이다. 상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어둔 길로 잘못 들었으면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면 된다.     말 바꾸기와 권모술수로 이득을 취하고, 평온한 일상에 재를 뿌리며, 타인의 인생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사람과는 잡은 손은 놓는 것이 지혜롭다. 세상에는 겸손하며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   봄 봄이다! 이세상 모든 슬픔과 아픔, 묵은 상처의 흔적들을 지우는 찬란한 계절이다. 뒷마당을 병풍처럼 둘러싼 나무들이 연녹색 잎새들을 가지에 피울 때마다 새들은 새벽부터 합창을 한다. 눈보라 치는 겨울동안 어디서 둥지를 틀고 살았을까. 때지어 동그라미나 포물선을 그리며 혹은 담장에 한 줄로 앉아 합창을 한다. 같은 크기 같은 색깔 비슷한 모양의 새들이 나란히 앉아 재잘거린다.   미국 속담 ‘날개가 같은 새들이 함께 모인다(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는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모인다는 뜻이다.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 나는 도토리 (중략)/ 내가 더 크고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중략) / 크고 윤 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박노해의 ‘도토리 두 알’중에서   믿음과 우정, 참과 거짓의 굴레에서 흐트러진 마음 가다듬고 숲 속 길을 걷는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시인은 참나무가 되기 위해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진다.     갈림길에선 선택이 필요하다. 가질 것인가 버릴 것인가. 지킬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사람이던 물건이건, 사랑이던 우정이건, 덧난 상처를 추스리며 걸어가는 마음의 길은 보잘 것 없는 도토리의 길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마음 돌뿌리로 남아 어둔 골짜기 권모술수로 이득

2024-04-16

[시로 읽는 삶]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시인의 ‘옛 노트에서’부분       앵두나무는 장미목과의 낙엽 활엽관목으로 분홍색 혹은 흰색의 꽃이 피고 열매는 오뉴월 익는다. 앵두꽃의 꽃말은 ‘수줍음’이다. 가지에 빨간색 열매가 오종종히 달린다. 예전에는 울 밑에나 우물가 옆에 흔하던 나무인데 우물도 사라지고 울 밑도 귀해져서인지 요즘은 전보다 만나기 쉽지 않다.   아파트 현관 옆에 앵두가 익어가고 있다. 젊은 여자 둘이 깨금발을 하고 앵두를 몇 알 따서 손바닥 위에 놓고 즐겁게 재잘거린다. 한 알을 입에 물더니 “앵두가 익을 무렵 뭐 그런 시가 있잖아.” 한 여자가 말하자 “맞아, 맞아, 찾아보자”하며 얼른 휴대폰을 켜 검색을 한다.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고 있다고 하는데 둘 사이가 한 편의 시 같다.   그 모습이 친근하고 정겨워 나도 앵두 몇 알을 따서 입 안에 넣어본다. 시의 힘이란 놀랍다. 시가 준 이미지의 확장은 사물의 본체까지도 확장해 놓는다. 앵두는 맛으로 음미하기보다 그리움으로 느껴야 제맛을 알게 되는 듯 생각되니 말이다. 이 시가 발표된 지도 꽤 오래전인데 여전히 앵두를 보면 맘이 아리다.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란 구절에서 울컥해지던 사십 대가 스멀스멀 몰려온다.     누구나 리즈시절이라고 할 만한 생의 한때가 있었다. 황금기는 못되었을지라도 젊음의 피가 원활하게 돌던 때는 무수한 빛들에 휘감겼다. 무한 상속되어 허투루 써도 되는 것 같아 낭비인 줄도 모르고 써대던 시간이나 마음의 뒤란에서 수런거리며 부유하던 열망이 솟구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을 보내고 그리움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때, 아무렇지도 않은 때가 앵두가 익을 무렵이라니.     미래라는 아득한 헛것에 취해 무작정 걷던 길 위에서 마주치던 인연들, 그것은 사람이 되었건 장소가 되었건 다 그리움으로 남아 갈대처럼 서걱댄다. 시간을 견딘다는 말에는 쓸쓸한 권태가 남아 있지만 그 견딤의 시간 안에는 ‘간신히’라는 다행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기도 하다.   그렇게 간신히 너를 잊고, 그 시간을 잊고, 그 장소를 잊을 수 있게 될 무렵이 앵두가 익을 무렵이더라는 시인의 성찰은 눈부시면서도 측은하다. 그리움이란 어딘가에서 발원하여 어딘가로 흘러간 흔적들, 남겨진 날들에 볼모로 남아 줄기차게 가슴을 훑는 후폭풍이지만 살아온 날들이, 살아온 날들만이 남길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기를 보낸 곳에는 그 과정이 떨 군 먼지조차도 다 그리움으로 남는다. 더군다나 오랜 타국생활로 그리움에 중독되어 있다 돌아와 보면 낯익음 속에 깃든 낯섦도 별나고 반갑다. 고향에서는 좀체 저항할 수 없는 지존 앞에서처럼 몸이 낮아지기도 한다.   유채꽃이 진 자리 옆으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코스모스, 자두가 익어가는 과수원 길, 한옥 흙 마당 싸리비질 자국, 초등학교 앞 문방구, 쓰던 가전제품을 산다는 한낮의 소음까지도 다 그리움의 프레임 안으로 모여들어 숨을 고르게 된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앵두가 남아 갈대 장석남 시인 빨간색 열매

2023-06-20

[글마당] 풀 끝에 오른 이슬

풀 끝에 오른 이슬이 한평생의 기간인가   마른 풀잎엔 젖은 이슬만 흥건하네       불 꺼진 창으로 들어오는 외로움의 포효   나목의 쓰린 상처가 멈춰선 계곡의 소리들을 들추고   생명의 빛으로 순환을 하는 그대처럼 아름다운 이 봄에   그대 감긴 실타래 풀어 긴긴날을 홀로 남아 가게 하나       반평생 다 못한 찢긴 바람의 갈기를 잡아매려   풀 끝에 서린 칼바람 등에 지고 나섰던 길   아성의 편집만을 고집하지 않는 그대가 있어   글 새들의 퍼석한 깃 하늘을 날게 하고       무거운 겨울의 그늘을 견디고 있는   동백의 작은 볼에도 붉은빛이 감도는 순환의 터에   이름 지우고 떠나는 그대 앞에 이름 없는 이 자리에 앉아   오색 다리 무지개를 타고 있네       한 귀퉁이로 나를 몰아세우고 나를 보는 나   살아 보자고 소리치는 작은 소리의 목 맺힘이   아직도 나의 볼을 때리는데   꽃이 꽃밭으로 들어가 꽃으로 지네       꺾이다가 밟히다가 누런 전 잎으로 처져 있던   풀잎들의 끝이 몸을 추스르고 숨을 쉬는 맑은 날   그림자 없이 그렁거리는 어제의 미소와   향으로 오르는 오늘의 그 얼굴       모두가 일어선 봄의 향연   숨통을 트이게 하는 생명의 길목에   찾아갈 수 없는 그리움 멀리 그대 사라진 거리에   바다의 미풍만 서럽게 반짝이네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이슬 김규화 오색 다리 남아 가게

2023-02-17

[기고] 생존자, 후손, 구경꾼

“사람들은 다큐 감독을 인간쓰레기라고들 하지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감독 양영희가 최근 관객과의 대화에서 꺼낸 첫마디다. 그는 재일코리안 2세로 자기 가족 이야기를 26년째 화면에 담고 있는 “잔인한” 사람이다. 그의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는 여러 모서리 중 하나에 제주 4·3을 배치했다. 어머니가 겪은 역사다. 이 이야길 읽고 다음날 나는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고,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의 영화를 보고 감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해 제주 4·3평화공원을 다녀온 뒤 현기영의 ‘순이삼촌’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4·3을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열광적인 구경꾼의 위치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구경꾼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4·3을 겪지 않았고, 그런 가족을 두지 않아 트라우마 없이 공원을 거닐고 영화를 관람하며 독서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경꾼의 안전한 위치를 역사상 수많은 학자와 문필가가 고찰했고, 파선한 배를 바라보는 구경꾼들을 고찰하며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역작을 펴낸 바 있다. 다행히 근대에 들어 헤겔이 구경꾼에게 ‘반성적 주체’의 지위를 부여하면서 구경꾼과 난파선 생존자 간의 거리감은 좁혀졌다. 게다가 국가나 사회가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불신이 팽배한 현대에는 구경꾼조차 땅 위에 서서 널빤지를 잡고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한다.   어떤 재난이나 참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상당수는 침묵을 지킨다. 대체로 20세기의 참사들은 이념과 긴밀히 엮여 있어 권력이 함구를 명했고, 사람들은 입을 여는 순간 목이 날아가리라는 위협을 느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로즈너의 어머니가 그랬고,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가 그랬다. 하지만 난파자의 2세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걸 글로 쓰거나 카메라에 담는다. 그들은 부모의 입이 언젠가 열릴 것을 알아 작가로서 기량을 연마했다가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제 몸속에 새긴다.   사실을 기록하는 다큐 감독은 역사가와 비슷한 임무를 띤다. 즉 인간의 고통을 잘 전달하기 위해 초연한 르포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양 감독은 어머니의 말문이 트이길 오래 기다렸다. 자신의 입은 닫은 채. 인터뷰어가 재촉하면 상대는 오히려 말을 삼킨다. 한번 다물어진 입은 웬만해선 열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좀더 객관적으로 증언하게 할 매개체가 우연히 주어졌으니, 양 감독이 남북 이데올로기와는 동떨어진 일본인 남자를 사귀게 된 것이다. ‘백지상태’의 인물이 등장하자 어머니는 친절하게 자신의 기억을 불러내기 시작했고, 감독은 70년도 더 된 이야기를 눈앞의 현실처럼 목격할 수 있었다.   이야기에는 논픽션과 픽션이 있다. 둘 다 중요한 역할을 떠맡는다. 유대 신비주의 연구자 숄렘은 ‘역사 기록’을 통과하지 않은 채 현실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들의 본질에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다큐 감독 역시 가만히 놓인 사물을 통해 역사에 침투해 들어간다. 역사를 탐구하는 일과 이야길 들려주는 일은 사실상 동일하다고 숄렘과 아감벤 등은 강조한다.   이때 작가가 주의할 점은 이야기 속에서 자신은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망각해야만 밑바닥에서 떠오르는 “검은빛 조각들”이 있다. 망각한다는 것은 양영희식으로 바꾸면 상대가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곧 죽거나 치매로 기억을 잃을 위험이 있어도 기다려야 한다. “자신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애가를 참을성 있게 읽지 못하고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송가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작가라고 할 수 없다.”(크라카우어)   영화와 글을 보는 구경꾼은 자칫 방관자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니 이들도 생활세계 속에서 자신을 역사가의 위치에 놓으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어리석은 채 즐기는 이가 되거나 혹은 사건들이 주는 두려움에 꼼짝없이 붙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4·3이든 10·29 참사든.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했던 말인 “더 많이 본 사람은 더 많은 부담을 떠안는다”는 오늘날의 구경꾼에게도 해당된다. 나와 함께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본 화가 P는 고향 함양을 떠올렸다. 산청·함양·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집안 어른들이 희생됐기에 4·3의 난파로부터 살아남은 양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씨를 구경하며 발 하나를 파도 속에 밀어 넣더니 언젠가 자기도 작품 속에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듯했다. 다큐든 그림이든 사료는 남아 구경꾼 속에서 자기 확장을 낳을 것이다. 이 사료를 통과한 우린 더 이상 이전의 자신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이은혜 / 글항아리 편집장기고 생존자 구경꾼 남아 구경꾼 난파선 생존자 다큐 감독

2022-11-18

[삶의 뜨락에서] 방 한구석이 바로 왕국

태도를 바꾸면 주변이 변한다. 이는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 제8부의 주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주위 사람들의 행동과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 있다. 우리는 이를 태도라고 부른다. 기본적 태도가 두려움인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인 사람은 마음이 열려 있어 타인에 관대하다. 부정적인 사람은 자신의 실수도 남 탓으로 돌리고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게 되며 결국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배울 수 있고 무에서도 기회를 창조하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환영을 받게 되어 매사가 기쁘고 활기차다.     러시아의 유명작가 안톤 체호프는 자신이 처한 역경을 스스로 극복하고 태도를 바꿈으로써 의사가 되었고 동시에 문학가로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매일 두려움에 휩싸여 아침을 맞았다. 분명한 이유도 없이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지팡이나 채찍으로 아들 다섯과 여동생까지 몇 차례씩 후려갈겼다. 가족은 지옥 같은 나날을 견뎌내야만 했다. 결국 그의 집안은 몰락하였고 온 가족은 모스크바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안톤은 고향 시골에 혼자 남아 고등학교를 마치기로 결심한다. 가정교사자리를 여러 곳 구해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방 한구석을 빌려 문학, 철학, 과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의대 진학을 준비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모스크바 가족과 합류하게 된다. 막상 모스크바에 당도해보니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그의 가족은 모두 술과 마약에 자기 파괴적인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자기 가족에게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로 결심한다. 가족들에게 설교한다거나 비난하는 대신 스스로 좋은 모범을 보여주기로 한다. 집 안 청소부터 다림질까지 도맡아 하고 장학금으로 동생들을 다시 학교에 보낸다. 서서히 가족들은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생활이 안정권에 들어서자 그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갖게 된다. 가난하고 불운했던 고향 땅의 방 한구석! 거기가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산실이라고 생각했다. 그 방 한구석에서 그는 읽고 또 읽고 그 만의 세계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가족이 모두 떠나고 그 방 한구석에 혼자되었을 때 그는 덫에 걸려 두렵다는 생각 대신, 해방감과 자유를 얻어 새로운 세계를 향해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책 속에서 길을 얻은 것이다. 그는 가슴 속 깊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농노였던 체호프 일가의 비애가 이해되었다.     이렇게 아버지를 이해한 것이 토대가 되어 어느 날 갑자기 부모에 대한 연민과 조건 없는 사랑이 밀려옴을 느꼈다. 그는 마침내 원망과 분노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부정적인 감정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는 자유로웠다. 그는 이 체험을 모두 적어나갔다.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마음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기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되새기면서!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한구석 왕국 모스크바 가족 술주정뱅이 아버지 남아 고등학교

2022-09-2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은 늙지도 않아

사고가 발생했다. 맛난 김치 담가주시던 할머니가 잔디밭에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남편은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노인 거주 마을에 혼자 산다. 피붙이가 없어 강아지가 자식이다. 이래저래 연락 받고 수술환자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은 쓰러진 할머니를 발견한 옆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친구, 모두 한국사람들이다.   수술은 두 시간쯤 걸린다고 했는데 감감 무소식이라고 난리들이다. 영어를 못 알아들어 갈팡질팡, 일단 정학한 정보로 환자를 찿는 게 급선무다.     할머니는 도망 잘 가는 강아지 잡으러 나갔다가 강아지 줄에 감겨 옆으로 엎어졌다. 꼼짝도 못했는데 다행히 핸드폰이 있어 뒷집에 사는 할아버지께 도움을 청했다. 할아버지 증언에 의하면 온몸이 마비상태였고 부축도 불가능해 들것에 실어 할머니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12시간이 지난 후에 앰블런스를 불러 급히 수술을 하기에 이르렀다.   엎어지거나 낙상을 당하면 환자에게 절대로 손대지 않고 응급차를 불러야 한다. 낙상은 넘어져서 몸을 다치는 것을 말한다. 노인에서 주로 일어나지만 모든 나이에서 발생한다. 나이가 들면서 다리 근육이 약해지고 균형감각이 저하되면서 낙상의 위험이 증가된다. 특히 노인 낙상의 발생은 크게 늘어나 뼈를 다치거나 골절을 당해 심각한 손상을 당하거나 합병증으로 사망에까지 이른다.   미국의 65세 이상 노인 중 3분의 1 이상에서 연간 한 번 이상 낙상을 경험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65세 이상 노인의 신체 손상 중 반 이상의 원인이 낙상이다.   노인 낙상은 사망뿐만 아니라 중증의 손상으로 삶의 질이 현저하게 감소되는 사회적 문제를 초래한다. 지난 20년간 엉덩이 골절 발생이 증가하고 있는데 활동수준의 저하에서 비롯된다. 나이가 들면 뼈의 골밀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규칙적인 운동이 중요하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면 추락과 낙상 예방에 큰 효과를 얻는다. 연구에 의하면, 운동수준을 늘림으로써 골반 골절위험이 40~60% 감소한다고 설명한다.   할머니는 엉덩이뼈 골절 봉합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에서 금방 나온 얼굴은 석고로 빚은 미이라처럼 백지장보다 더 창백하다. 겨우 얼굴은 알아보고 “혼자 있기 너무 무서워요. 가지 마요.”라며 내 손을 잡는다. 남편도 피붙이도 가족 한 사람도 없이 홀로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다행히 수술 결과는 양호하고 재활 센터에 입원해 몇 주간 전문치료를 받는 걸로 문제는 해결됐다.   할머니는 혼자 살아도 인심이 후하고 음식 솜씨가 좋아 친구가 많다. 여러 사람이 할머니를 방문하고 돕는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강아지도 돌봐주고 집안 챙겨주고 한국말 동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쓰러진 할머니를 구해준(?) 뒷집 할어버지가 자원봉사자로 발탁됐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돌보는지 보기에도 훈훈하다. 친절한 봉사라도 좋고 사랑이면 더욱 좋겠다.   사랑은 늙지 않는다. 깊어질 뿐이다. 불꽃 같이 타오르는 성애(性愛)의 신 큐피드나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도, 가슴 저민 플라토닉 한 영혼의 결합이 아니라도, 밥 먹고 숭늉 마시듯, 매일 살아남기 위해 담장이 넝쿨처럼 엉켜 사는 그런 사랑이여도 좋겠다. 세월이 가도 봄이 다시 오듯, 살아있는 것들 중에 작은 목숨으로 남아 사랑은 향기로 꽃을 피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 할머니 친구 노인 낙상 남아 사랑

2022-05-17

[오픈 업] 아직도 남아 있는 4·29의 상흔

 2001년 9월 11일, 뉴욕 시민들은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비행기 테러 공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었다. 건물 붕괴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가 2996명이었고 부상자도 약 2만5000명에 달했다.     이 같은 참극이 발생하면서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우려했었다.     외상성 사건(trauma) 이후에 반복적으로 침습하는 고통스러운 기억, 그와 관련된 악몽, 똑같은 사건이 재연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행동하게 되는 해리성 반응( Flash back), 더 이상 행복·만족·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부정적인 기분 등이 PTSD의 주요 증상이다.     테러 이후 정신과 의사들은 뉴욕 초등학교들을 찾아갔다. 종이와 크레용을 주고서 아이들에게 그 당시의 장면을 기억나는 대로 그려 보라고 했다. 이는 아이들이 당시의 기억을 ‘회피’하는 대신에 그 힘들었던 사건 속으로 들어가 재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건물이 무너질 당시의 무섭고 공포스러웠던 감정들을 꾹 눌러 감추는 대신에 아이들이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교사와 사랑하는 친구들, 전문의 등의 격려 속에서 그 끔찍했던 장면들을 그리며 자신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30년 전 4월 29일을 우리 한인들은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 친구들이 땀흘려 마련한 생활의 터전인 업소와 건물들이 아무 이유 없이 폭도들에 의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폭도들로부터 주민들을 지켜주어야 할 경찰은 방관했다. 파괴와 방화가 일어나고 도난이 자행되는 현장에 경찰은 없었다. 경찰은 폭도들의 파괴 행위가 없는 백인 지역을 예방 차원에서 지키고 있었다.     당시 총성이 요란했던 LA다운타운에서 신발 소매업을 했던 필자의 시동생은 30대의 가장이었다. 준비한 총을 들고 어렵게 마련한 가게의 지붕으로 올라가 방화범으로부터 업소를 지켜야만 했다. 경찰이 보호해주지 않는 무법천지의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자구책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자신의 업소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이러한 행동을 주류언론은 한흑간의 갈등으로 왜곡해 보도했다. 4·29폭동 이후 많은 한인들이 LA에 환멸을 느껴 타주로 이주하기도 했다. 한인들은 혈압과 맥박이 심하게 오르고, 얼굴에 진땀이 흐르며, 소화불량이 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증상을 경험했다. 작은 소리에도 기겁을 하며 놀라 공포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자기 몸에서 떠나 천장에서 내려다 보는 것 같은 해리 현상을 경험한 한인도 있었다. 자신이 항상 있던 곳이 마치 다른 사람의 집 같이 느껴지는 비현실감을 경험하기도 했다.     가게가 불타고 있을 때의 뜨거운 열기가 마치 현재에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몸에 뜨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즉 과거에 자신도 모르게 느꼈던 생리적, 감정적 반응이 그대로 다시 느껴지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이나 타인,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세상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내가 바보야’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커져 공포, 경악, 화, 죄책감, 수치감을 느끼기도 한다. 간혹 공격적이 되어 가정폭력을 일으키거나 싸움을 한다.     4·29폭동 30주년이 다가온다. 아직도 당시의 기억 때문에 PTSD를 겪는 환자들이 있다. 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상처를 이야기 하거나, 연극으로 표현하거나, 그림이나 글로 나누는 것은 어떨까. 정신상담 전문가와의 개인 또는 집단 치료를 통해 당시의 기억을 극복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같은 항우울제도 크게 도움이 되니 전문의를 찾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30년 전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남아 상흔 해리성 반응 친구들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

2022-04-20

[열린 광장] 늙어도 낡지 않는 마음

 누구나 태어나면 서서히 늙어 가고 또 낡아 가는 것은 철리(哲理)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늙음과 낡음의 진정한 의미를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있다. ‘늙음’과 ‘낡음’은 ‘님’과 ‘남’처럼 모음 ‘ㅡ’와 ‘ㅏ’의 차이 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뜻은 서로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글자만 다른 것이 아니다. ‘늙음’과 ‘낡음’은 삶의 본질을 갈라 놓는다.     곱게 늙어 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과 같다. 마음과 인품이 곱게 늙어 간다면, 멋 모르고 날뛰는 청년의 추함보다 고운 자태로 거듭 태어나는 노년의 모습이 더욱 빚이 나고 아름답게 비쳐질 것이다.     이를테면 주변에서 항상 밝은 미소와 따뜻한 눈빛으로 이웃을 어루만지거나, 혹 성치 않은 아내나 또는 남편과 더불어 손잡고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 노부부를 만나기라도 할라치면 그냥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다.   곱게 늙음은 가슴 속이 훈훈해지며 마치 고목에서 새싹이라도 움터 오르는 듯한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이렇듯 몸은 비록 늙어가더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새로움으로 살아간다면 평생을 살아도 낡지 않는다. 이토록 늙어도 낡지 않는다면 육신은 늙더라도 마음과 인격은 더욱 고매해지면서 내면에는 원숙한 삶이 펼쳐지고 더 깊은 깨우침이 다가올 것이다.     왜일까? 우리에게 곱게 늙어가고 싶다는 욕망은 그 속에 메마른 낡음보다는 오히려 새로움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오늘 행여 늙는 것이 두렵고 서러운가? 그리고 공연히 억울한 심정이 드나? 만약 그렇다면 이는 마음이 낡아가는 증거다. 혹 그런 마음이 든다면 먼저 생각을 바꾸어 보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새로운 마음으로 대하고 풀 한 포기, 돌멩이 한 개라 할지라도 의미를 새기고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바라보라.     여생을 살아가는 동안 부단히 늙음과 낡음을 서로를 비교하면서 ‘새로움’으로 나이테를 그려간다면, 인생의 무게는 그만큼 더 보람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 그만큼 더 원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람있고 원숙해진다는 것은 그게 바로 곱게 늙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아직은 젊은 나이인데도 낡은 마음이 지천에 깔려있다. 육신은 멀쩡히 젊었어도 욕심에 찌들어 인격(人格)은 없고 수격(獸格)만 남아 마음이 사악하고 생각이 낡은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정치꾼’들이 그렇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잘못하면 또 다른 편짜기가 될 것 같아 삼가고….   아무튼 사람은 거짓과 위선으로 똘똘 뭉쳐지면 결코 윤기 있는 ‘늙음’을 가질 수가 없다. 만약 모두가 이렇듯 탁하고 ‘낡음’만이 저잣거리에서 횡행한다면 우리들 주변엔 따듯함과 아름다움보다는 허무와 절망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행여 ‘늙음이 곧 낡음’이라는 고정관념이 바뀌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 여생이 내일부터라도 그냥 서서히 메마른 나무처럼 말라버릴까 걱정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마냥 좋은 게 좋은 것만 찾지 말자. 아닌 건 아니라고 하고, 자상할 땐 한없이 부드럽더라도 불의 앞에서는 불같이 노할 수 있는 모습을 유지하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손용상 / 소설가·한솔문학 대표열린 광장 마음 남아 마음 우리들 여생

2021-12-26

수영장 익사 한인 어린이 살릴 수 있었는데···응급 구조요원 늑장 출동

지난 주 발생한 한인 남아 익사사고〈본지 8월25일자 A-1면>는 예산 삭감에서 비롯된 소방당국의 늑장 대응 책임론이 제기돼 주목된다. 이에 따라 노동절 연휴 등을 앞두고 각종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한인 등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번 사고는 지난 26일 오후 2시55분쯤 벨에어 지역 린다 플로라 드라이브 인근 주택에서 발생했다. 당시 최군(3)은 수영장에 빠져 의식을 잃은 채 최군의 어머니에 의해 발견됐으며 UCLA 메디컬 센터로 옮겨졌으나 사고 발생 50여분만인 오후 3시35분쯤 숨졌다. 당초 단순 물놀이 익사 사고로 비춰졌던 이번 사건은 LA타임스가 1일 '구멍난 911 응급구조 실태'를 지적하는 사례로 소개하면서 다시 부각됐다. 신문은 당시 LA시소방국의 출동기록을 근거로 신고 접수후 현장 출동까지 10분 이상이 소요됐던 점을 우선 지적했다. 지난달 초 34년만에 소방국에서 은퇴한 응급구조 전문가 빌 램지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생사가 급박한 상황에서는 수분 수초가 결과에 차이를 만든다"며 "응급처지 요원이 좀더 빨리 현장에 도착했더라면 최군을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 지적했다. 이날 소방국의 출동이 늦어지게 된 것은 예산 삭감에 따른 인력 부족 때문이다. 현재 LA시 소방국은 5650만달러의 예산 적자를 메우기 위해 매일 소방차 15대와 앰뷸런스 9대의 운행을 중단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고 현장과 가장 가까운 37소방서가 신고 접수 94초 전 이미 다른 곳으로 구조대원을 보내 인력이 모자라게 되자 거리가 먼 71소방서에서 대신 출동하느라 지연됐던 것이다. 또한 당시 구조 현장을 지휘해야 할 캡틴 또한 강제휴가중이라 11마일이나 떨어진 타 소방서 캡틴이 대신 나왔지만 이 또한 소용이 없었다. 캡틴이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최군은 병원으로 옮겨진 뒤였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09-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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