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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7월에 있었던 일

프랑스에는 7월 1일 출생자 가운데 유명인이 세 명 있다. 1725년에 태어난 콩 드 로샹보 장군, 1804년엔 출생한 소설가 게올쥐 상, 그리고 1872년의 비행사 루이 블레리오가 그들이다.  반면, 미국에선 7월에 전쟁이 많았다. 1863년 7월에 펜실베이니아에서 남북전쟁의 최후 결전이 벌어졌고, 1898년에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샌 주엔 힐을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7월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달이다. 바로 1776년 7월 4일 연방의회에서 독립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를 발표한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 중 한 명인  존 핸콕이 가장 먼저 서명을 했다. 그래서 이 날을 미국의 독립기념일 (Independence Day)로 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세계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쟁 두 가지가 7월에 일어났다.  첫째,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했고, 1937년 7월 7일에는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됐다.              이달에는 또 큰 사건도 많았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에서는 바스티유 혁명이 시작됐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이 혁명은 프랑스 왕정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사막에서는 몇몇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그 후 8월 6일엔 일본의 히로시마, 8월 9일에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마침내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났다.  또 1969년 7월 20일에는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해 달 표면을 걷는 역사적 일이 있었다. 달 표면을 가장 먼저 걸은 우주인이 그 유명한 닐 암스트롱이다.     한국에서는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됐고, 1980년 7월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군사정권 하에서 내란음모 사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밖에 7이 들어간 격언이나 문구도 제법 있다.  7자가 들어간 어휘를 살펴보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섞여 있어 꽤 재미있다.     7자가 겹친 ‘칠종칠금 (七縱七擒)’은 마음대로 잡았다가 놓아 주었다 하는 비상한 재주를 의미하고, 사업이 계속 실패하거나 잇단 불운으로 갈피를 못 잡을 때는 ‘칠령팔락 (七零八落)’ 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칠월이 되면 으레 장마가 온다는 의미의 ‘칠월 장마는 꾸어서 해도 한다’, 또 수입이 줄어 살기 힘들다는 의미의 ‘칠팔월 은어 끓듯’이라는 한국 속담도 있다. 윤경중 / 목회학 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광장 바스티유 혁명 프랑스 왕정 independence day

2024-06-30

[문예 마당] 4·19혁명과 어머니

이 우울은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 바닷바람에 소리 없이 흘러가는 산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함께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산안개처럼 가기도 하고, 때로는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한다. 6·25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4월을 돌고 돌아 우리 형제들을 치마폭에 안으셨던 어머니 생각에 우울한가 보다. 아니, 어쩌면 이십여 년 전, 오피스 근방 길거리에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입양되어 살았던 두 마리 고양이와 친구도, 배필도 없이 그리피스 공원에서 십여 년을 맴돌던 외톨이 산사자 P-22의 외롭고 아팠던 삶과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실 것이다.     숱한 일을 겪으셨던 어머니는 4월이 되면 다시 이생을 방문하신다. 나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데모가 정권을 뒤엎을 수 있었던 ‘4·19 혁명’의 정치적 관념과 멀리 있었다. 그저 쫓기는 흑백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 희뿌연 최루탄 연기가 기억 속에 멈추어 있을 뿐이다. 범벅의 카오스 가운데 엄마가 있고, 엄마는 엄마의 특수했던 그 날의 동선(動線)과 함께 되돌아온다.   엄마의 동선은 이랬다. ‘4·19 혁명’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터졌다. 정치인들의 부패를 규탄하는 데모가 혁명 이전부터 거의 매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주워듣던 신문보도에 의하면 데모는 나날이 격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꽤 많은 초, 중고교 캠퍼스가 사대문 안에, 주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큰 조카와 내가 각각 다른 여자 중학교에, 작은 오빠는 근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산재한 학교들과 학생들에게 경계를 이루지 않는 매운 최루탄 연기는 아비규환의 전쟁 아닌 전쟁터를 넓히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로 학생들은 즉시 퇴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고 조카의 학교로 향하셨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카는 자기 엄마와 분가해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다. 나는 혼자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랬던 4월은 내 기억에 회색과 검은색으로 희미하게 채색되어 남아있다. TS 엘리엇(1888-1965)은 ‘황무지’라는 무려 434행으로 구성된 시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인기가 많다. 시 ‘황무지’는 나에게는 철학 논문 같기도 하다. 그의 개인적 삶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한 글이다. 엘리엇도 4월에 전사한 친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시로 쓴 것이었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준다. 어디 4월만 잔인하랴. 어디 죽음만 있으랴.   뮤지컬 ‘캣츠’로 많은 이에게 친근한 엘리엇은 미국 출생이었지만 영국에 귀화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도 재학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영국은 편안한 곳이었나 보다. 시, 희곡, 소설 등 다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그는 평론가이며 출판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 ‘황무지’의 서두가, 월트 휘트먼과 제프리 차우서의 시와 많이 닮았다는 혹평도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인도 철학, 로마나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내용으로 짜깁기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4·19 학생운동’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학교가 강제로 폐교되었을 때, 나를 뒷 전으로 하셨던 어머니, 쌔~애 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서둘러 조카를 찾아 그 애의 학교로 향하셨던 어머니가 카오스의 광화문 광장 중심에 있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을 리는 없다. 그저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던 그때에도 조카의 아버지를 잃어서 생겼던, 아물기를 거절하고 있던 생채기가 세상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제는 칼라바사스에 있는 킹 질렛 커뮤니티 파크 센터에서 하는 소품 전시회에 들렸다. 소박하고 유명세에 관심이 없는 화가들의 작품은 평화로웠다. 전시 센터에서 P-22의 얼굴이 새겨진 9″x 12″x 0.5″ 크기의 우드버닝(pyrography) 작품을 발견했다. 녀석의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강렬했던 눈빛이 좀 온순하게 표현되기는 했어도,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P-22라는 이름표를 달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시던 어머니도 P-22를 아끼실 것 같다.   류 모니카 / 수필가문예 마당 어머니 혁명 어머니 생각 여자 중학교 혁명 이전

2024-04-25

[FOCUS] 관계 좋던 이란-이스라엘 두 나라…‘이슬람 혁명’ 이후 틀어졌다

이스라엘이 이란 영사관을 공격하고 이란이 이스라엘 본토를 공습하는 초유의 사태로 중동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지고 있다. 한때 경제 협력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뭉쳤던 양국은 왜 이토록 반목하게 됐을까. 양국이 역사적으로 중동의 역학 구도를 놓고 치밀하게 ‘밀당’을 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양국 관계는 돈독한 편이었다. 당초 이란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47년)과 유엔 가입(49년)을 반대했다. 하지만 막상 이스라엘이 건국되자(48년), 2년 뒤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주요 이슬람 국가 중에선 튀르키예에 이어 두 번째 승인이었다.   유럽에 망명 중이던 친미 성향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1953년 친위 쿠데타로 ‘샤(왕)’에 다시 오르면서 양국은 더 빠르게 가까워졌다. 정식 수교는 하지 않았지만, 대표부를 두고 텔아비브와 테헤란을 잇는 직항편을 운항했을 정도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을 비아랍권 국가로 분류하고 우호 세력으로 삼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 연합군과 치른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1967년)’ 이후엔 석유의 상당 부분을 이란에서 수입했다. 유럽으로 수출하는 이란산 석유를 보낼 송유관과 항만 시설을 운영하는 양국 기업 간 합작회사도 운영했다. 급기야 양국은 ‘플라워(flower)’란 명칭의 탄도미사일 공동 개발 프로젝트(77~79년)까지 가동했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으로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이란 정권을 거머쥐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팔레비 왕조를 축출한 혁명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이슬람의 적”, “위대한 사탄(미국)에 기생하는 작은 사탄”이라고 선언하며 모든 공식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이듬해 이란·이라크 전쟁(80~88년)이 발발하면서 양국 간 군사 밀월이 시작된다. 당시 이라크의 핵개발을 우려하던 이스라엘은 이란에 무기를 지원하고 군사고문관을 파견했다. “이란이 전쟁 발발 직후 구입한 무기의 약 80%가 이스라엘에서 온 것”이란 말이 돌 정도였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이스라엘이 이란에 건넨 미사일만 1500발에 달한다는 집계도 있다.   이스라엘은 그 대가로 이란으로부터 석유와 함께 이라크 군사시설과 관련한 상당량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81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부의 오시라크 핵시설에 대한 공습(오페라 작전)도 이런 군사정보를 참고한 것이었다.   하지만 겉과 속은 달랐다. 호메이니 정권은 전쟁 중에도 이스라엘을 겨냥한 칼날을 은밀하게 갈고 있었다.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에 무기를 제공하고 군사훈련까지 시키며 길고 긴 ‘대리전(proxy war)’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90년대부터 헤즈볼라의 테러가 이스라엘을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29명이 숨진 아르헨티나의 이스라엘 대사관 폭탄 테러(92년)를 시작으로 85명의 사망자를 낸 아르헨티나-이스라엘 친선협회 건물(AMIA) 폭탄 테러(94년)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의 배후로 이란을 지목했지만, 이란은 테러 관련설을 끝까지 부인했다.   이에 대항해 이스라엘 역시 이란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반군 세력인 이란 인민무자헤딘(MEK), 준달라(PRMI·이란 인민저항운동) 등을 군사적으로 은밀히 지원했다.   2000년대 들어 이란이 핵개발에 나서면서 양국 간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2005년 우라늄 농축을 재개한 이란은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며 공세적으로 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과학자들을 암살하고, 2010년엔 이란 우라늄 농축시설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까지 가했다. 악성코드(스턱스넷·stuxnet)를 핵시설 컴퓨터에 침투시켜 시스템을 셧다운 시켰는데, 당시만 해도 전례가 없는 공격 방식이었다.   2009년 이스라엘에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2기 정권이 출범하면서 양국 간 ‘강 대 강’ 국면이 더 악화된 측면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 계획)를 일방적으로 파기했을 때도 국제사회는 우려했지만 네타냐후 정권은 가장 먼저 환영했다.   이란 역시 2020년부터 미국이 주도한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 간 관계 정상화를 훼방 놓는 등 이스라엘을 ‘중동 내 왕따’로 고립시키는 전략을 계속 구사했다. 특히 수니파 종주국으로 이란과 대립 관계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이슬람 국가가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는 건은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행위”(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라고 맹비난했다.   이 때문에 이란의 군사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기습 공격한 것이 우연이 아니란 풀이가 나왔다. 아랍국들이 공히 분노하는 지점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도마에 올리기 위한 전략이었단 얘기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하마스가 실권을 장악한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에 나서면서 그간 추진하던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는 모두 멈춰선 상황이다. 이스라엘 내부에선 “이란이 놓은 덫에 걸렸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이 지난 1일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수뇌부를 제거하기 위해 시리아 주재 이란 영사관을 공습하면서 사태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25만 병력의 IRGC는 최고지도자(호메이니) 친위 부대로 이란 정규군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 조직이다. 그간 헤즈볼라, 하마스,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등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테러 세력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장본인이다.   이스라엘이 사실상 ‘대리전’의 틀을 깨고 먼저 공격에 나서자 이번엔 이란이 도발했다. 공개적으로 ‘보복’을 밝힌지 2주일 만인 13일 새벽 이스라엘 본토를 겨냥해 300여발의 미사일·드론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앞으로 양국의 군사 행동이 더 고조되면 중동 정세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날 뉴욕타임스는 “이번 공격으로 큰 사상자나 물리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그 영향은 심각하다”며 “이스라엘 안보 당국자들은 (이란 영사관 공습 이후) 이란이 자국 군대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전했다.   김상진 기자FOCUS 이스라엘 이슬람 이스라엘 본토 당시 이스라엘 이슬람 혁명

2024-04-15

[문화산책] ‘포노 사피엔스’ 낙오자의 변명

바야흐로 ‘포노 사피엔스’ 시대다. 이런 시대 흐름의 낙오자인 나는 이 ‘포노 사피엔스’라는 낱말이 두렵다. 그렇다고 적응하려고 발버둥 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불편하더라도 그냥 허름한 아날로그 꼰대로 여생을 보내는 편이 행복할 것 같다.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란 단어는 스마트폰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가 있는 인간)를 합성한 신조어로,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15년 특집 기사에서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며 스마트폰을 자기 몸의 일부처럼 여기는 사람들, 즉 ‘스마트폰을 24시간 손에서 놓지 않는 신인류’를 일컫는 것이다. 스마트폰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니, 전 인류가 ‘포노 사피엔스’인 셈이다.   스마트폰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팔린 기계’로 매우 빠른 속도로 세상과 우리 일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농업 혁명에 5000년, 산업 혁명에 200년, 디지털 혁명엔 30년이 걸렸지만, 스마트폰 혁명엔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거칠게 말하자면,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스마트폰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기계의 편리함에 길들었을 뿐, 그 편리함이 중단됐을 때의 혼란에 대비할 방책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는 ‘노모포비아’를 걱정하고,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나 심신을 치유하자는 ‘디지털 디톡스’ 운동도 벌어지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위험성과 폐해를 아무리 절박하게 외쳐봐도, 이미 시작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막을 수 없다. 머지않아 스마트폰에 인공지능(AI)이 장착될 전망이라니 상황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포노 사피엔스’로 인해 인류가 어떤 위기와 기회를 맞고, 어떻게 변할 것인지 짐작조차 어려운 형편이다.   그런데도 ‘호모 사피엔스’들은 끊임없이 더 편리하고, 더 작고 가볍고, 더 달콤한 기계에 목을 맨다. 그러는 동안 인간 자체가 변해간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바뀌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 없다. 특히, 창조적 상상력과 개성을 목숨처럼 여기는 예술가들에게는.   세계적 철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한병철 박사는 최근 저서 ‘서사의 위기’에서 단순한 정보와 이야기(서사)를 주제로 이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 느낌,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라고 진단한다. 한병철은 “우리가 억압도, 저항도 없는 스마트한 지배체계에서 자기 삶을 SNS에 게시하며 정보화하도록 조종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플랫폼에서 얻는 정보로 인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슈만 쫓느라 정작 자기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중독 사회’라는 고발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서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회복, 상대방의 말을 사려 깊게 들어주는 경청과 인내심, 이야기가 갖는 치유의 힘 등을 제시한다. 서사 없는 삶에 행복은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야기와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예술이다. 달리 말하면,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인간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는 창조적 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보 검색만으로는 자기 사랑, 자신만의 이야기, 사람 냄새, 삶의 의미와 방향 제시, 깊은 사유, 소통과 배려, 치유, 꿈, 더불어 사는 삶 같은 근본적 가치를 지켜낼 수 없다. ‘아날로그 꼰대’를 낙오자로 낙인찍기 전에 잠시 ‘사색’하기 바란다.   “검색보다 필요한 것은 사색이다”라는 말이 나온 지 벌써 오래되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사피엔스 낙오자 스마트폰 혁명 호모 사피엔스 스마트폰 중독

2024-02-15

[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신비로운 천사의 섬, 몽생미셸(프랑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는 이렇게 말했다. '사막에 피라미드가 있다면, 바다에는 몽생미셸이 있다'고.     몽생미셸은 애니메이션 '라푼젤' 속 코로나 왕국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몽(mont)은 산을 뜻하고 생미셸(Saint Michelle)은 성 미카엘의 불어식 발음이므로 우리말로 풀이하면 '성 미카엘의 산' 정도가 될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서기 708년, 이 일대를 다스리던 주교 생 오베르(Saint Aubert)의 꿈속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났다. 천사는 "바다의 반석 위에 나를 위한 교회를 세워라" 라고 계시를 내렸는데, 오베르는 이를 단순한 꿈이라 치부하고 무시하고 만다. 이후에도 오베르는 같은 꿈을 꾸게 되는데, 특히 세 번째 꿈에서는 미카엘이 손가락을 내밀어 오베르의 이마에 강한 빛을 비추었다고 한다. 다음날, 꿈에서 깨어난 오베르는 자신의 이마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천사의 계시를 받들어 수도원 공사에 착수한다. 오베르는 큰 바위 위에 기도대를 세웠고, 미카엘이 강림한 땅인 이탈리아 몬테 가르가노에서 화강암을 공수해 예배당을 건설했다. 그렇게 바다 위 천공의 섬 몽생미셸이 탄생하게 되었다.     성의 용도 또한 역사를 따라 숱한 변화를 겪었다. 10세기까지는 수도원으로 쓰이다가 11세기에는 교회가 건축되었고 백년전쟁 중에는 성벽이 둘러쌓여지면서 요새의 기능을 담당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혁명군의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19세기 들어 대규모 증축 및 보수공사를 거친 후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고, 역사 유적지 및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인기 있는 명소가 됐다.   해무를 발아래 감싸고 그 위에 높이 솟은 몽생미셸은 가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바다 한가운데 불쑥 솟아오른 듯 섬 전체를 덮은 수도원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몽생미셸만의 독특함이다. 특히 조수간만의 차가 유럽에서 가장 큰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에 따라 시시각각 물에 잠겼다가 드러나는 경치는 마치 마법의 성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몽생미셸은 낮에 봐도, 밤에 봐도 아름답다. 또 누군가는 썰물 때 봐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밀물 때 봐야 신비롭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여행객들처럼 당일치기로 잠깐 들르기보다는 하루나 이틀 정도 섬에 숙박하며 밀물부터 썰물까지, 그리고 야경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몽생미셸의 아름다움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말고 감상해 보길 바란다. 박평식 / US아주투어 대표·동아대 겸임교수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몽생미셸 프랑스 대천사 미카엘 프랑스 혁명 수도원 공사

2024-01-25

[삶의 뜨락에서] Reverse Mentoring

Reverse mentoring이란 젊은 직원이 멘토로서 조직의 고위 임원들에게 최신 트랜드와 아이디어를 조언하는 역 멘토링 체계를 말한다. 미국의 대표기업 GE의 잭 웰치는 1999년 출장 중 한 직원으로부터 인터넷의 중요성을 깨닫고 출장 후 500명의 임원에게 ‘후배에게 직접 인터넷 사용법을 배우라’고 지시한다. 그 결과 2000년도에는 세계 최고의 시장가치를 기록하게 했다. 한편 2012년도 구찌는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젊은 세대에게 ‘비싸고 촌스럽다. 시대에 뒤처졌다’라고 평가받았던 구찌는 30세 이하의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그림자 위원회를 구성하고 역 멘토링을 통해 최신 시장 트렌드에 대응하고 강화하며 2018년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품브랜드로 부활한다.     이처럼 놀라운 실적 반등과 브랜드 이미지에 혁신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역 멘토링 덕분이다. 명품의 트레이드마크를 고수하던 옛 고객은 퇴장하고 신세대의  트랜드를 읽는 새 아이디어를 살려 기업을 젊고 활력 있게 만들어가는 밀레니얼 세대의 사회 진출이 불가피하다.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고객이자 동료로 현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만큼 이들과의 소통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살펴보면 농업혁명은 수천 년간 지속하였고,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300여 년 지속하였다. 1970년대에 시작된 디지털 혁명은 인터넷 보급에 따른 인터넷 혁명과 스마트폰에 의한 모바일 혁명이다.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로 명명한 제3차 산업혁명은 전자기술 및 IT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1992년도에는 정보화 혁명 즉 IT 혁명이 시작되었다. 2015년경부터는 제4차 산업혁명 즉 로봇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 양자 프로그래밍, 생명공학, 3D 인쇄술, 자율주행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혁신이 나오고 있다. 신문명의 주기는 단축되어 정보혁명은 30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20년으로 예상되고, 제5차 산업혁명은 15년 정도로 단축될 것으로 예상한다.     인간 수명은 늘어나고 신문명 주기는 짧아지니 평생 네다섯 번의 혁명을 거치게 된다.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고 정보화 세대이다. 기성세대는 늦깎이로 컴퓨터를 배워 직장에서 업무를 겨우 수행할 수 있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태어나보니 벌써 컴퓨터 세상이다. 그들은 컴퓨터로 소통하고 즐기고 일한다.     역 멘토링은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성세대가 아직도 지식이나 경험, 경륜만을 중시하고 젊은이들한테 존경받고자 하는 기대치가 클수록 세대 갈등과 소통 단절에 시달리게 된다. 갈등과 단절은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배우고 선배가 후배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어 배우고 작 적응해나가는 것도 기성세대의 지혜이다.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 멘토링과 역 멘토링의 역할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열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나이, 지위, 직업과 관계없이 서로 돕고 배우는 자세가 바로 지혜이고 아름다운 관계이다. 진정 성숙한 젊은이들은 도서관과 같은 노인들을 결국은 존경하게 된다. 멘토와 멘티는 서로 돕고 배우는 순환 관계이며 또한 보완관계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는 지금 진통을 겪고 있다. 유교 사상과 문화 속에서 배우고 성장한 기성세대들의 경직된 조직문화와 자유분방한 밀레니얼 세대들 사이에 큰 갈등과 소통 단절이 큰 장애물이다. 민주화 교육을 받고 자유주의를 부르짖고 개인주의를 경배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은 인권을 주장하고 합리성을 요구하며 행복해질 권리를 주장한다. 무조건 복종하라 하는 수직적인 관계와 조직문화를 부정한다. 이런 상황일수록 위계질서를 따지기보다는 세상의 흐름과 순리에 따르는 것도 참다운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mentoring reverse 인터넷 혁명 멘토링 체계 정보화 혁명

2023-09-22

현대 도예 흐름 한눈에…풀러턴 머켄탈러 문화센터

  미국 현대 도예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그룹전이 풀러턴 머켄탈러 문화센터(1201 W. Malvern Ave)에서 열리고 있다.   ‘제너레이션 오브 클레이(Generations of Clay)’란 주제로 마련된 전시회는 지난달 3일 개막했으며,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전시회에선 ‘흙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피터 볼커스(1924~2002)를 비롯, 작고한 4명을 포함한 남가주 작가 18명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작가 중엔 김영신씨(작은 사진)가 한인으로선 유일하게 포함됐다.   볼커스는 1950년대 서부 해안 지역 흙의 혁명(West Coast Clay Movement)을 주도한 인물로 미국 현대 도예의 대부로 통하는 세계적 거장이다. 많은 미 서부 지역 현대 도예가가 흙의 혁명 영향을 받아 실용 기물 도자기에서 벗어나 흙을 순수 예술의 매개체로 삼게 됐다.   흙의 혁명으로 인해 추상표현주의가 대세를 이룬 1980, 1990년대에 4개 대학교에서 도자기 수업을 받았다는 김 작가는 “당시 은사 제리 로스먼, 빈센트 수에즈, 패트릭 크랩도 전시회에 참여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김 작가는 오는 15일(금) 오후 6~8시 문화센터에서 ‘관람객과의 대화’ 시간을 갖는다.   김 작가는 “한국 전통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하게 된 과정, 특히 분청사기에서 받은 영향을 설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전시회 출품작들은 내년 열릴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와 연계, 한국에서도 전시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시 시간은 주중 오전 10시~오후 5시다. 입장료는 5달러다. 문의는 전화(714-738-6595)로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현대 도예 현대 도예 이번 전시회 혁명 영향

2023-09-08

[열린광장] 윌리암 펜과 미국의 헌법

사파이어처럼 투명한 9월이다. 이런  9월을 더 밝게 해주는 날들이 있다. 9월 16일과 17일이다.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영국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를 떠났다. 그들은 54일을 항해한 끝에 그해 11월 21일 케이프코드에 첫발을 디뎠고 그곳을 플리머스라 이름 지음으로써 미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 청교도들은 왜 영국을 떠나 머나먼 미국 땅을 향해 배를 저었을까?  우리는 마틴 루터를 종교개혁가로 알고 있다. 루터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가 95개 조의 논조를 성문교회에다 부친 것은 종교개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황이 면죄부를 파는 것에 대한 잘잘못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종교개혁으로 번진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구교의 모든 제도와 예배의식을 지켜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영국 국교인 ‘영국교회’가 구교의 예배의식을 따르는 것은 바로 루터의 영향 때문이다. 많은 영국 교인들은 예배의식에만 치중하고 성서적 바탕에 따른 예배를 드리지 않는 ‘영국교회’를 정화해야 된다고 부르짖었지만, 그들에겐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이윽고 이들은 영국교회로부터 떨어져나와 새로운 교파를 만들었다. 이들이 바로 청교도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불법 교파로 취급된 탓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으로 향했고 ‘필그림’으로 불렸다. 이들은 미국의 종교, 사회 및 정치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청교도들은 미국 최대 보수교단인 침례교의 모체가 되었고 회중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육에도 관심을 쏟아 하버드나 예일 같은 명문 대학들을 설립했다. 청교도들의 미국 이주 22년 뒤에 영국에서는 청교도들과 왕정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영국 시민전쟁’인데 이를 일명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무렵 옥스퍼드 대학에 다니던 윌리엄 펜은 의무적으로 영국교회에 다녀야 하는 교칙에 항의하다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는 아일랜드에 갔다가 퀘이커 교도가 되었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이주를  결심했다. 그리고 찰스 2세 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1687년 미국 땅으로 건너왔다. 그는 지명을 ‘울창한 숲’이란 뜻의 ‘실베이니아’에  자기의 성인 ‘펜’을 붙여 펜실베이니아로 지었다.  아울러 펜은 퀘이커교의 정신인 ‘형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도시 이름을 헬라 말 ‘사랑의 도시’란 뜻의 필라델피아로 지었다.     나중에 주지사가 된 펜은 최초의 헌법(Charter of  Privileges)을 만든 다음 상원 (Provincial Council)과 하원(General Assembly)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미국 정부와 의회의 효시가 되었다.  마침내 이 도시에서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고, 1787년 9월 17일에는 이 도시의 ‘펜실베이니아 스테이트 하우스’ (오늘의 디펜덴스 홀)에서 미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어제의 미국을 세운 필그림은 청교도들이다. 그리고 오늘의 미국을 여물게 한 필그림은 바로 이민자들이다.  그래서 미국은 필그림의 나라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증경회장열린광장 미국 윌리암 청교도 혁명 구교의 예배의식 도시 이름

2023-09-07

'예수 혁명' 흥행 "암울했던 그때, 지금과 비슷"

19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기독교 부흥 운동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예수 혁명(Jesus Revolution)'이 극찬 속에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당시 영적 각성 운동이었던 '예수 운동(Jesus Movement)'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전국 2400개 이상 상영관에서 개봉, 누적 흥행 수익만 3000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남가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다 당시 젊은 세대였던 중장년층의 종교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실재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관객과 공감대를 쉽게 형성한다. 영화 속 인물인 그렉 로리 목사는 현재 리버사이드 등 곳곳에서 캠퍼스 교회를 둔 '하비스트 크리스천 펠로우십(Harvest Christian Fellowship)'을 운영하고 있다. 예수 운동을 이끌며 LA 갈보리 채플을 개척했던 척 스미스 목사(2013년 사망)의 신앙 이야기도 담겨있다.     영화 '예수 혁명'이 지금 이 시점에서 주목받는 이유에 대해 알아봤다.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박스오피스 순위권에 진입한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데이브 노 목사(어바인)는 "곳곳에서 전통적인 기준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대두하면서 오히려 많은 이들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 시대를 다시 갈망하게 되는 것 같다"며 "예수 혁명은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 기독교가 어떻게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줬고, 그들을 신앙으로 회복시켜 나갔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며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예수 운동은 남가주에서 젊은 히피 세대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일었던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영화는 1970년대 당시 히피였던 그렉 로리가 히피 출신 설교자인 로니 프리스비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수많은 젊은이와 함께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를 본 김서준(28.LA)씨는 "영화에서는 교회 내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그려지는데 교회 문이 진정한 의미에서 열릴 때 부흥이 일어나더라"며 "당시 젊은 세대가 예수를 믿고 기독교의 부흥을 경험하는 것을 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로서 부럽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 영화에서는 당시 전통적인 교회의 사역자였던 척 스미스 목사가 히피족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수용하라는 프리스비 전도사의 조언을 듣고 방황하던 히피들을 갈보리 채플로 불러 수많은 젊은이를 예수 운동으로 이끌게 된다.   이 영화는 오늘날 시대상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렉 로리 목사는 크리스천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때도 거리에는 폭동이 있었고, 인종 갈등, 전쟁의 공포 등으로 미국이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로리 목사는 "오늘날 각종 문제로 인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 세대를 보면 내가 젊었을 때인 1970년대 당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던 당시 청년들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그때 우리 세대가 희망이 필요했듯이 이 영화를 통해 오늘날 젊은이들도 희망과 답을 찾길 바란다"고 전했다.   특히 영화 '예수 혁명'은 지난 2월 에즈베리대학에서 16일간 이어졌던 부흥 예배 소식본지 2월 28일 자 A-16면〉과 맞물리며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를 만든 존 어윈 감독은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에즈베리대학에서 일어난 부흥이 전국을 휩쓴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도 주목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이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윈 감독은 타임지가 당시 1면(1971년 6월 21일 자)에 예수의 얼굴과 함께 'The Jesus Revolution(예수 혁명)'이라고 장식한 표지를 보고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만큼 당시 예수 운동이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유석 목사(LA)는 "영화에서 전도사가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당신이 마음을 열 때 모두에게 자리가 생긴다'는 대사가 있었다"며 "당시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문을 열었더니 복음을 통해 그 시대에 소망이 퍼져나가는 걸 보면서 깨달음이 컸다"고 말했다.   당시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록 음악, 자유로운 이성 관계, 쾌락 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자유, 평화 등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 우드스탁 페스티벌 등도 유행했다. 그렇다 보니 반작용으로 무분별한 자유를 반대하고 절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일부 히피들이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펼치면서 일어난 것이 예수 운동이었다.   월드미션대학 가진수 교수는 "당시 예수 운동은 코스타메사 지역 갈보리 채플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며 "기독교의 직설적이고도 복음적인 가사와 당시 유행하는 록 음악의 결합을 통해 경직되고 획일적인 모습을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고 전했다.   당시 교회들은 고전적인 찬양과 경직된 형태로 운영됐었다. 하지만, 예수 운동을 통해 젊은 세대가 교회로 유입되면서 교회 음악이 서서히 바뀌고 염세주의에 빠져있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감각으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기독교 문화 전문가로 활동하는 알렉스 맥팔랜드 작가는 크리스천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점차 '워크(woke)' 영화 등의 폭격으로부터 떠나고 싶어하는 대중의 심리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워크'는 '깨어있다'는 뜻으로 오늘날 인종, 성 정체성, 환경, 동성결혼 등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진보적 사상을 견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맥팔랜드 작가는 "이 영화에는 기독교 예수 운동에 따른 반응이 수십 년간 지속할 때 시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절감케 하는 가치가 배어있다"며 "예수 운동의 여파로 수많은 젊은이가 복음을 통한 사랑을 접하고 개발도상국으로 선교를 떠났으며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단체들이 생겨났다"고 전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예수 암울 예수 운동 예수 혁명 영화 예수

2023-03-20

[시로 읽는 삶] 색깔의 유혹

아무래도 나는 빨강이 되어가는 중이다// 빨강을 만난 건 겨울이었으나 겨울이 아니었더라도, 그 흰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혹은 얼음 속의 불// 우리는 잠시 스쳤을 뿐인데// 묻었나봐/ 꼭 여며두었던 소매 끝이거나 긴 목도리의 한쪽/ 열꽃이 번지고// 나는 사흘에 한 번 빨강을 앓고 하루에 한 번 그를 앓으며// 빨강이 되어간다/ 빨강은 얼어붙은 불이거나 불타는 얼음(…)   -유병록 시인의 ‘빨강’ 부분     코로나가 시작되고 우울감이 가중되던 때 빨간색으로 차를 바꿨다. 토스터도 커피포트도. 세상이 다 칙칙해 보이고  마음도 바닥으로만 길을 내서 빨강이면 좀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주위에서는 웬 빨강, 하면서 빨강색 차는 도난의 위험도 크다고 하고 너무 튀는 것 아니냐며 다소 의아해했다.   빨간색 차가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 공헌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빨강의 역할로  좀은 기분이 나아지기도 한 것 같다. 코로나라는 터널을 어둡지만은 않게 지내왔다고 생각된다. 얼어붙은 불이거나 불타는 얼음으로 표현되는 빨강의 내부에는 생명력이 잠재해 있음은 확실하다.   ‘색채의 향연’ (장석주 지음)은 색에 관한 통찰이 매력적인 책이다. 색에 관한 작가의 관찰이 남다르다. 지은이는 “사람이 식별할 수 있는 색깔은 1000개 정도다. 놀라지 마시라, 디지털 기술로 빛의 삼원색을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색깔은 1600개! 이토록 많은 색깔은 저마다 만물과 조응하면서 마음 깊은 곳 금(琴)을 울린다. 색깔은 오감과 비벼지면서 감정과 심리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고 기술했다.   그 많은 색깔 중에서도 빨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빨강은 생명의 원점이다. 생명은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절대 가치에 속한다. 그래서 빨강은 고귀하다. 빨강은 이성을 압도하는 본성의 색깔이다, 열정과 희열은 검정도 아니요 노랑도 아닌 빨강을 타고 온다. 빨강은 사랑과 열정의 신호색이다”   적색은 가시광선 중에서 가장 긴 파장을 가지고 있다. 갓난아이에게 가장 먼저 인지되는 색이라고 한다. 인류가 찾아낸 대표적인 빨강의 원천은 진드기류의 빨간색을 띤 벌레였다. 그중에서도 질 좋은 빨강을 제공하는 ‘코치닐’은 최상이다. ‘코치닐’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로 붉은색을 띠는 암컷만을 말린 후 붉은 색소로 사용된다.     에너지와 생명의 상징인 빨강,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크다. 격렬, 폭력, 무자비, 혈투, 전쟁, 파괴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빨강의 문화사’를 쓴 스파이크 버클로(회화복원 전문가)는 신화, 종교, 과학, 언어학, 고고학, 인류학, 미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빨강의 변화무쌍한 일대기를 추적한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붉은 깃발은 흔히 공산주의, 좌파, 혁명, 노동자를 상징한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볼셰비키와 중국 공산당 등이 붉은색을 상징으로 삼은 탓이다.   하지만 사실 빨강은 각 나라의 국기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색이다. 전 세계 80%의 국기에 빨간색이 포함되어 있다. 빨강은 혁명의 색 이전에 왕의 위엄과 헌신, 정치적인 인내심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빨강은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하는 색이었다.     흰색에서 검정에 이르기까지 잦아들고, 내치고, 부딪치면서 탄생했을 색깔들, 밝고 부드러운 색과 차고 서늘한 색들이 대치하지 않고 스며들어 가며 봄은 색깔을 탄생시킨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색깔 사실 빨강 사회주의 혁명 디지털 기술

2023-03-14

엔버월드, 채널A ‘블록체인 혁명, 골든타임을 잡아라’에서 특허 기술 공개

25일 채널A에서 방송된 다큐 특별기획 ‘블록체인 혁명, 골든타임을 잡아라’에서 블록체인 전문기업 ‘엔버월드(NvirWorld)’가 소개되었다.   이 날 방송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다양한 활용처를 보여주었는데, 그 중  엔버월드가 NFT 기술을 활용하여 CSR 캠페인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함과 동시 자체 특허 기술을 공개했다.   엔버월드는 발달장애 대안학교 ‘산돌학교’와 함께 진행하는 'BLUE ROSE' NFT 기부 캠페인을 통해 발달장애 학생들이 그린 ‘파란장미’ 작품 및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발달장애 예술가 정은혜 작가의 ‘파란장미를 든 제니’ 작품을 NFT로 제작하여 오프라인 전시공간인 ‘엔버갤러리(NVIRGALLERY)’ 와 메타버스 공간인 ‘엔그라운드(N-ground)’에서 전시하는 모습이 담겼다.   해당 캠페인을 통해 나오는 수익금은 발달장애 환우를 위해 산돌학교에 전액 기부된다. 배우 김영호도 '산돌학교' 홍보대사로 캠페인에 함께하였고 해당 방송에도 나레이션으로서 참여해 더욱 뜻깊다.   블록체인 기술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모습과 함께 엔버월드의 독자적인 블록체인 특허 기술인 ‘스테이펜딩’도 함께 공개되었다.   ‘스테이펜딩’은 거래데이터를 저장해두었다가 지정시간에 데이터를 한번에 블록체인으로 전송하는 기술로 기존 탈중앙화 거래소의 단점인 거래(트랜젝션) 시마다 발생하는 가스비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엔버월드는 이를 적용한 하이브리드 탈중앙화 거래소 ‘이노덱스(INNODEX)’의 런칭을 앞두고 있다.   엔버월드의 이진숙 대표는 "앞으로도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기부 캠페인 같은 좋은 활동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며, “많은 이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상용화될 수 있는 서비스를 다각화해 개발하여 공급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한편 방송에 소개된 엔버갤러리에서는 한국 미디어 아트의 거장인 이이남 작가의  〈조우(遭遇) : Encounter〉展이 진행되고 있다. 해당 전시회를 통한 엔버갤러리의 수익금은 대지진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이재민들을 위해 전액 기부할 예정이다.   강동현 기자 kang_donghyun@koreadaily.com블록체인 골든타임 블록체인 기술 블록체인 특허 블록체인 혁명

2023-02-24

[아름다운 우리말] 말의 힘과 언어관

언어관이라는 말은 언어를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언어관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언어신성관이 있습니다. 이 관점은 말 그대로 말을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을 신성하게 보는 이유로는 말을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이 구분되는 이유를 말의 사용에서 찾고, 말을 신이 주신 선물이기에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언어신성관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종교의 경전이나 기도문을 옛말로 사용하고, 바꾸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언어신성관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언어를 통해 신과 소통하기에 최초의 언어가 신의 언어에 더 닮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신성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신성관은 일반 사회에서는 언어권위관이 됩니다. 언어권위관 역시 언어의 변화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조어나 유행어를 잘못된 것으로 보고, 표준이나 규범을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말에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언어 권위관인 셈입니다. 언어권위관은 우리 삶 속에서 널리 퍼져있습니다. 아이들의 말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속어를 나쁘게 보는 것 등도 모두 언어권위관에서 나오는 관점입니다. 아마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언어권위관에 사로잡혀 있을 겁니다.   언어신성관이나 언어권위관과는 달리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로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언어도구관이라고 합니다. 언어도구관을 최근에 나온 관점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언어는 시작부터 도구관의 산물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뜻을 통하게 하는 게 언어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에서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서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바로 언어도구관인 셈입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에서는 말이 변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서 순경음 비읍, 반치음 등을 만들고 사용하게 됩니다. 언어권위관도 있었던 셈입니다. 거기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자를 만들어 소통을 한 것이니 위로의 도구, 소통의 도구였던 셈입니다.   언어도구관은언어혁명도구관 등으로 모습을 바꾸기도 합니다. 도구로서의 기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능의 언어를 원하는지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진 겁니다. 사회주의 혁명에서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면서 언어를 혁명의 도구로 보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에 의해서 문맹 퇴치에 앞장서게 되거나 쉬운 말 쓰기 운동 등이 일어납니다. 결과적으로는 민중을 위한다기보다는 혁명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도 언어의 실용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특히 국가 간의 교류 또는 침탈이 활발해 지면서 외국어 교육이 발달하게 되는데 외국어 교육의 핵심적인 관점 역시 실용성에 있었습니다.     언어관과 함께 주목해야 할 점은 말의 힘입니다. 말은 세계를 담은 틀입니다. 따라서 말을 안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한 언어를 하나의 세계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한계라는 말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신과 소통하는 사제를 부르는 말은 스승이나 무당이라는 어휘였습니다. 무당이나 점치는 행위인 무꾸리 등의 어원을 말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신과의 소통은 말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사제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록에 남아있는 많은 시가나 무가 등에서 말의 위력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의 구지가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위협적인 말을 통해서 지도자를 맞이하는 의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신라의 수로부인 이야기에서 해가라는 노래의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우리말에서 말이 힘이 되는 장면은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관 모두 언어권위관 도구 소통 사회주의 혁명

2022-10-02

[J네트워크] 미디어 시대의 여왕

장엄하고도 화려한 서사극 한편이 끝났다. 마지막 무대는 1000년 역사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영연방, 종교, 고귀함, 왕관, 후계자, 추종자 등 군주의 통치를 상징하는 게 한데 집결한 가운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마지막 ‘미디어 여정’을 시작했다.   방송사에 따라 십수 시간 이어진 장례식 생중계는 영국 국왕으로서 처음이었다. 이를 지켜본 세계인이 41억 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36억 명)을 뛰어넘는 역대 최다 시청 기록이다. 일부는 TV로 봤지만, 많은 이들이 컴퓨터 모니터로, 대형전광판으로, 손안의 휴대전화로 봤다. 모두가 여왕의 재위 기간(1952~2022) 거듭된 미디어 혁명을 통해 나온 것들이다.   여왕은 등장부터 미디어 친화적이었다. 1953년 그의 대관식은 영국 가정에 막 보급되던 TV 수상기로 전달됐다. 윈스턴 처칠 당시 총리가 “연극 공연처럼 보일 수 있다”고 염려했음에도 중계는 성공적이었다. 오랫동안 발코니 위에 있던 군주가 신민의 안방으로 들어왔다.   영연방은 붕괴하고 있었지만 세계를 누비는 여왕의 발길은 국민적 긍지를 되살렸다. 왕실의 비극조차 스펙터클을 갈망하는 타블로이드와 TV쇼에 안성맞춤 소재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미디어 산업의 연금술 속에 결혼식, 양육, 패션, 불화 등 모든 게 ‘로열 워칭’의 대상으로 탈바꿈했다.   “엘리자베스의 통치는 좋든 나쁘든 전례 없는 가시성으로 특징지어졌다”고 그의 사후 뉴욕타임스는 썼다. 여왕도 생전에 “믿기 위해서는 내가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의 관음 욕망과 왕실 구성원의 사생활은 종종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미디어는 그 간극을 파고들며 왕실 내 ‘인간의 얼굴’을 드러냈다. 1995년 다이애나비의 BBC 인터뷰로 시작된 폭로의 정점은 지난해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왕자비의 오프라 윈프리 쇼였다. 이 인터뷰에서 그들은 로열패밀리를 가리켜 가족이 아니라 기업(a firm)이라고 털어놨다.   군주제의 존속을 떠나 현대의 왕실이 대중의 선망·환상·질시·연민 등에 기대어 굴러가는 셀럽 비즈니스 공동체란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아이러니한 것은 70년 재위 내내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도 여왕이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런던올림픽 개막쇼에 제임스 본드와 등장하고 플래티넘 주빌리 당시 패딩턴 베어 인형과 차를 마시는 순간에도 여왕은 자연인이 아닌 임무(duty)에 충실한 공직자였다. 묻히는 순간까지 그는 본분에 충실했다. 기꺼이 참배 줄(이른바 the Queue)에 함께한 이들은 여왕의 헌신을 기리며 1인 미디어로 남겼다. 미디어에서조차 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았다. 강혜란 /국제팀장J네트워크 미디어 여왕 미디어 혁명 미디어 여정 미디어 산업

2022-09-21

[김창준] 4·19 혁명 직후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9〉 손에 200불 쥐고 유학길 올라 영어 문제 극복하며 아르바이트로 버텨 '땀 흘려 일해야' 대가 삶의 기본 깨달아   군대에서 빨리 제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국은 부패가 만연했고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더 오래 있어 봤자 안 좋은 것만 계속 볼 것 같았다.     당시 군대 의무복무기간은 36개월. 나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의병 제대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대전에 있는 63육군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악성치질.   병원에서는 주말마다 외출증을 끊어주며 나보고 집에 가라고 했다. 주말에 배급되는 내 양식을 빼돌리기 위해 나를 내쫓는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고문관들로 구성된 병원 감사반이 들이닥쳤다. 계획이 틀어졌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만한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급한 대로 치질 수술을 했다. 멀쩡한 생살을 찢고 꿰맨 것이다. 그런데 수술 후 처리를 잘못 했는지, 수술 부위가 감염돼 엄청난 고생을 했다. 10개월 만에 의병 제대를 했다.     치질 수술 부위는 계속 말썽을 일으켰다. 잘 걷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도 한동안 고생했다.   어쨌든 조기 제대를 했다. 미국 유학 시험 준비를 서둘렀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있던 한국외국어학원(FLI)을 찾아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FLI는 한국 정부에서 유학 준비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정식 영어교육기관이었다.     그날도 FLI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에서 경찰이 길을 막았다. 경찰 어깨너머로 사람들 머리가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이기붕을 죽이고 이승만은 물러가라.”   다다다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나도 겁에 질렸다. 몸을 웅크리고 뛰었다.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선거도 부정으로 얼룩졌다. 정권연장에 눈먼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저질러 학생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그날 내가 맞닥뜨린 것이 4·19 혁명이었다.     유학 시험은 국사 과목에서 한차례 낙방했다. 석 달 만에 다시 치러 합격했다.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이승만 정부가 물러났다. 허정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호적초본을 떼는 데도 양담배 한 통을 건네줘야 했다. 국방부에 출국증을 받으러 가니 담당 직원은 양복 한 벌을 요구했다.   모든 수속을 끝냈다. 미국에 가져갈 수 있는 한도액 200달러를 손에 쥐고 1961년 1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하얗게 얼어붙은 김포벌판을 날아오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웅 나오셨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채피 대학이 있는 LA 인근 업랜드(Upland) 시에 방을 얻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 같은 도시였다. 미국에 도착하니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문제였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외국어학원에서 도대체 무얼 배운 것인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1961년 당시만 해도 남가주에는 아시안이 적었던 시절이다. 나는 세계 최빈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한 단어는 “파던(pardon: 뭐라고요)?”이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서머타임을 몰라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 기다린 적도 있다. 친척도, 친구도, 돈도 없었다. 아파도 혼자였다. 미국 교회를 가려 해도 여의치 않았다. 잘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일요일에도 일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할 때였다.   ‘내가 미쳤다고 왜 이 타지에 왔지?’ 미국에 온 지 2주도 안 돼 가난과 부패에 찌든 한국이 너무도 그리웠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뿐이었다.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주님, 제 옆에 바짝 붙어 지켜 주세요. 저 혼자서는 이 고난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말 자동차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자동차 살 돈이 없었던 나는 중고 오토바이 한 대를 샀다. 그걸 타고 동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해 생활비를 벌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오토바이 운전 실력도 늘었다.   어느 날, 철길 근처에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순간 오토바이가 ‘붕’하고 높이 떠올랐다. ‘아, 기분 좋다’하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오토바이에서 튕겨 나갔다. ‘쿵’하고 오토바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사고가 난 지 이틀이 지났다고 했다. 정신을 잃었을 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원실을 나가려 하자 병원 관계자들이 들이닥쳤다. 병원비를 정산하라고 했다. 200달러 들고 와 방을 얻고 오토바이를 샀으니 무슨 돈이 남아 있겠는가. 들어놓은 보험도 하나 없었다.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병원 관계자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란 점을 고려해 병원비의 4분의 1만 받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받아갔다.   명동 암달러상한테 바꿔온 돈 200달러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일푼이 된 나는 방값이며 밥값을 버는 게 급선무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지만, 새벽이면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일어났다.   병원 청소도 했다. 업랜드에 있는 샌안토니오 병원의 더러운 마룻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고 피고름 묻은 거즈가 가득한 쓰레기통을 치웠다. 서울이었다면 코를 틀어막고 도망갈 일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각이 바뀌니 못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에서 누구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훗날 나는 샌안토니오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 병원에서 지역구 연방하원의원을 초청했다. 병원의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저는 이 병원을 잘 압니다. 매일 밤 제가 청소하던 곳이니까요.” 사람들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농담이 아닙니다. 30년 전 저는 이 병원의 청소부였습니다. 마룻바닥 닦는 일을 제일 많이 했지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손뼉 치며 환호했다.     미국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학교 수업도 따라가기 힘든데 아르바이트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영어도 못하고 주머니에 돈도 없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서울에서는 돈과 ‘백’에 의지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햄버거 하나를 먹어도 내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만 먹을 수 있었다. ‘1+1=2’라는 삶의 기본을 깨달아가는 날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도 정작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버지 힘을 빌려 손쉽게 모든 일을 해결했다.   미국에서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해진 이유. 그것은 나의 힘으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미국 혁명 병원 감사반 중고 오토바이 부정선거 책임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05

카스트로 장례식 '가느냐 마느냐' 정상들 고민

살아생전 독재자와 혁명 영웅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던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타계한 뒤 세계 정상들이 발표한 애도 성명과 장례식 참석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카스트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난 26일 이후 중국과 러시아, 남미 좌파 국가 지도자들은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친밀한 동지이자 진실한 친구를 잃었다"며 이례적으로 감성적인 조전을 보냈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 위대한 국가 지도자의 이름은 진실로 현대 세계사에서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고 애도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역사가 그를 판단할 것이라며 카스트로의 가족에게 애도를 보내고 쿠바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쿠바계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인 테드 크루즈와 마코 루비오가 당장 오바마 대통령 비난에 나섰다. 루비오(플로리다주) 의원은 27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카스트로가 저지른 범죄를 지적하지 않으면서 그를 애도해서는 안된다"며 오바마 대통령의 성명이 "한심하다"고 공격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에게 오바마 정부의 대쿠바정책을 재설정하겠다는 대선 공약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크루즈 의원도 이날 ABC방송의 '디스 위크'에 출연해 카스트로 사망을 계기로 쿠바에서 자유가 확대하길 기대한다면서 트럼프가 미국과 쿠바와의 관계를 재검토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카스트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28일 "오바마 대통령이 피델 카스트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쿠바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공화당은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조 바이든 부통령이나 존 케리 국무장관도 카스트로 장례식에 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스트로를 "전설적인 혁명가이자 웅변가" "뛰어난 지도자"라고 칭하는 애도성명을 발표했다 논란에 휘말린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도 카스트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트뤼도 총리는 카스트로를 높이 평가한 성명에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다음날 카스트로를 독재자라고 생각한다며 "타계한 옛 국가지도자를 기리기 위한 의도였을 뿐"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유럽에서도 진영에 따라 입장이 갈렸다.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는 "그는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인물 중 한 명"이라면서 조문 의사를 밝혔지만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카스트로의 타계에 대해 아무 발언도 하지 않았다. 텔레그래프는 앨런 덩컨 외교부 차관이 조문할 것이라고 전했다.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도 트위터에 "카스트로의 죽음으로 세계는 많은 사람에게 영웅이었던 사람을 잃었다"고 썼다가 비슷한 지적을 받았다. 브라질의 두 전직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와 지우마 호세프, 카스트로와 각별한 사이였던 우고 차베스의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등 남미 좌파 지도자들은 일제히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신복례 기자 shin.bonglye@koreadaily.com

2016-11-28

미 대통령 11명 상대, 638번 암살 시도 모면

"인간 불사조" "20세기 절반을 움직인 남자" AFP통신은 25일 타계한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철권 통치자 피델 카스트로의 삶을 여섯 가지 키워드로 되짚었다. 그의 인생은 '무수한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고 11명의 미국 대통령의 정적이었으며, 20세기 절반을 움직인 남자'로 요약됐다. ◆끈질긴 생명력=1926년 8월 태어난 카스트로는 쿠바 수도의 아바나 대학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가 됐다. 이후 친미 성향의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무력투쟁을 벌였다. 55년 망명지인 멕시코에서 운명적으로 체 게바라를 만났다. 59년 두 사람이 이끄는 혁명군이 아바나를 점령하고 공산정권을 세웠다. 카스트로는 이때부터 2006년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물려주기까지 50년간 쿠바를 통치했다. 쿠바가 공산화한 시기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하던 때였다. 미국의 코앞에서 들불처럼 번진 공산주의 혁명은 '적색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쿠바 비밀정보국(DI)에 따르면 미 중앙정보국(CIA)은 카스트로 집권 시기 그의 시가에 독극물을 바르거나 시가폭탄, 밀크셰이크에 독약을 타는 등 638차례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암살 시도는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 ◆시가를 문 매력남=군복, 비스듬히 문 시가, 텁수룩한 턱수염은 카스트로의 상징이었다. 카스트로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사생활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AFP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했고 3명의 여성 사이에 7명의 자녀를 뒀다. 카스트로는 건강상 이유로 60세부터 시가를 끊었다. "시가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원수에게 주는 것"이란 말도 남겼다. ◆반미주의자 또는 폭군=카스트로는 61년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소련과 손을 잡았다. 62년 소련의 핵탄도 미사일 배치 요구를 받아들여 미.소 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초래했다. 2014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와 53년 만에 국교 정상화를 했을 때도 카스트로는 "미국의 사탕발림"이라고 비난했다. 카스트로는 내부 정적들을 가혹하게 탄압해 독재자로도 불렸다. 2003년 반체제 인사 75명을 투옥하는 '검은 봄' 사태를 초래했다. ◆불가능에의 도전=카스트로는 집권 초기인 61년 문맹률을 없애기 위해 교육운동을 펼쳤다. 또 "쿠바를 의료 대국으로 만들겠다"며 3000명에 불과하던 의사 수를 8만8000명으로 늘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경제를 살리는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좌파의 아이콘=카스트로는 남미 전역의 좌파 게릴라 투쟁을 지원했다. 콜롬비아 좌파 무장혁명군(FARC)의 지도자 이반 마르퀴스는 그를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꼽았다. 미.소 냉전 시기 카스트로는 아프리카.중동 등 전세계 38만6000명을 파병해 좌파를 지원했다. ◆공산혁명의 전설=59년 카스트로가 공산정권 수립을 천명하는 연설을 할 때 그의 어깨 위로 흰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AFP는 "이 순간부터 그는 전설이 됐다"고 평가했다. 2008년 정계 은퇴를 한 후에도 쿠바인들에게 존경 받았던 카스트로는 올해 4월 "누구나 차례가 온다"는 말로 작별을 예고했다. 그로부터 7개월 뒤, 냉전 시대의 마지막 붉은 별은 마침내 영원히 지상을 떠났다. 이유정 기자

2016-11-27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허문 시장 벽…한국 대중문화, 세계로 훨훨

해외로 뻗어나는 한국 대중문화 '한류(韓流)'가 지구촌을 휩쓰는 소셜 네트워킹 열풍을 타고 제2 전성기를 맞았다. 세계 각국의 네티즌들은 유튜브.트위터.페이스북을 통해 좋아하는 한류 스타의 영상과 노래를 퍼뜨리고 공유한다. 소비자들이 기업의 마케팅을 공짜로 대신해준다. 인터넷이 되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한국 가수의 음원을 즉각 구매할 수 있어 사업가치도 엄청나다. 시장은 커지고 비용은 줄며 수익원은 다양해졌다. 2000년대 중반 침체기를 거쳐 활짝 피어나는 제2 한류.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드라마 중심에서 온라인 콘텐트 전반으로 빠르게 확장되는 현장을 들여다봤다. 지난 8월 25일 도쿄 하네다 공항. 일본 첫 '쇼케이스(홍보공연)'를 위해 이곳을 찾은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일본 열성팬 800여 명이 공항 로비를 점거하다시피 한 것이다. 쇼케이스 현장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룹 멤버 윤아는 "일본 땅을 밟은 게 처음이고 데뷔도 안 했는데 2만2000여 명이 운집해 어안이 벙벙했다"고 말했다. 일본 팬들은 어떻게 현지에서 음반 한 장 낸 적 없는 이들의 노래를 어떻게 척척 따라 불렀을까. 한국 TV를 많이 봐서일까. 답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였다. # 인터넷 되면 어디든 '마켓' 지구촌을 휩쓰는 SNS 혁명이 '제2 한류(韓流)'의 진앙지로 자리잡고 있다. 1990년대 말 시작된 '제1 한류'는 동남아시아 중심 드라마와 대형 콘서트 중심이란 특징이 있었다. 인종.지역이라는 물리적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불붙기 시작한 제2 한류는 다른 차원이다. 인터넷 특히 SNS가 '허브' 역할을 한다. 다른 인터넷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SNS엔 인종과 국가.자본의 경계가 없다. 누가 올린 정보(콘텐트)이든 가치 있고 재미있으면 세계 도처로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제2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 각지로 빠르게 확산되는 연유다. 중심 콘텐트도 드라마보다 음악으로 바뀌고 있다. 인터넷 공유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한국 최대 음반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김영민 대표는 "독이던 인터넷이 약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콘텐트 불법 복제의 온상이던 온라인이 한류의 글로벌 도약대 역할을 하게 됐다는 뜻이다. 이 회사 소속 소녀시대가 일본 진출 전에 이미 수십만 명의 팬을 확보하고 현지 데뷔 두 달 만에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한 것도 SNS 덕분이라는 것이다. # 마케팅 비용. 사업 리스크 확 줄어 SNS는 무엇보다 글로벌 시장 진출에 필요한 마케팅 비용을 크게 줄였다. SNS의 사이버 공간에서 홍보와 마케팅의 주력 부대는 기업이 아닌 일반 네티즌이다. 지난달 트위터에선 인기 그룹 '슈퍼주니어' 멤버 김희철의 이름이 나흘 내내 주요 검색어에 오르는 이변이 일어났다. 세계 팬들이 10월11일을 '김희철의 날'로 정해 각국 언어로 관련 '멘션(140자 미만으로 작성하는 트위터 글)'을 일제히 쏟아낸 덕분이다.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한류 커뮤니티 '숨피닷컴'의 조이스 김 대표는 "김희철의 사례를 미국 쇼비즈니스 업계에선 '스트리트 팀(Street Team)'이라 부른다"고 전했다. 과거엔 그저 '팬덤(열성적 지지)'을 활용한 입소문 마케팅을 뜻했지만 SNS 시대엔 각국 팬들이 한날 한시에 좋아하는 스타를 일제히 지목함으로써 세계적 붐을 주도하는 것을 뜻하게 됐다. 해외시장 개척에 드는 시간과 비용 위험부담도 확 줄었다. '빅뱅' '2NE1' 등이 소속된 한국 YG엔터테인먼트의 황민희 팀장은 "과거엔 국내 최고 스타라도 해외에 진출하려면 많은 스태프가 현지 숙소를 잡고 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이젠 온라인으로 미리 반응을 체크한 뒤 각 시장에 맞는 세부 전략을 세울 수 있어 위험 부담이 줄었다"고 말했다. 이나리 기자

2010-11-26

중국계 10대 "소녀시대 Gee가 18번곡"…한류 이끄는 소셜네트워킹

#. 지난해 러시아에서 LA로 어학연수 온 이스크라(22) 씨는 할리우드 팝스타 어셔와 비욘세 만큼 좋아하는 가수가 있다. 원더걸스다. 이스크라 씨는 원더걸스의 히트곡 '노바디(Nobody)'의 'Nobody Nobody But You' 가사에 강한 중독성을 느끼며 한쪽 다리를 들고 손가락으로 찌르는 춤 또한 귀엽다고 말한다. 이스크라 씨는 LA서 알게된 한인 친구의 페이스북(Facebook)을 방문했다 우연히 원더걸스를 알게 됐다. #. 어바인에 사는 중국계 2세 니키(17) 양. 지난 9월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린 SM엔터테인먼트 소속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합동 콘서트를 관람한 니키 양의 18번 곡은 소녀시대의 '지(Gee)'다. 노래와 함께 춤도 매스터했다. 그녀는 이 노래를 유튜브(YouTube)에서 반복해서 들었다고 했다. '한류(韓流)'가 소셜네트워킹 열풍을 타고 가속도를 내고 있다. 10.20대 네티즌들이 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 등을 통해 한국 가수의 동영상과 노래를 올리면 친구들끼리 서로 공유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형식이다. 인터넷의 특성상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오프라인 한류 전파와는 속도와 거리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유튜브에 따르면 원더걸스의 '노바디' HD 뮤직비디오는 조회수 1700만이 넘는다. 일반 화질의 '노바디'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무려 4500만건. 소녀시대 '지' 뮤직비디오는 약 3000만 조회수에 달하며 슈퍼주니어 '쏘리쏘리'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1800만을 초과했다. 한국 연예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소식과 한국 가수를 소개하는 '올케이팝(www.allkpop.com)' 사이트 같은 경우, 지난 3년새 방문자수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에는 매달 300만 명이 넘는 전세계 네티즌들이 방문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이 사이트에 올라온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끼리 프로젝트 그룹 결성 소식에는 무려 2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폭발적인 반응이다. LA한인타운의 24시간을 담고 있는 트위터 '코리아타운(http://twitter.com/koreatown)'에는 22일 현재 팔로우어만 3400명이 넘는다. 제니퍼 이(15)양은 "요즘은 책이나 잡지 등을 통해 알게되는 것보단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알게 되고 알리는 것이 훨씬 많다"며 "타인종 친구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소셜네트워킹을 통해 한국을 배운다"고 말했다. 최근 인터넷 트래픽을 조사하는 구글 트렌즈에 따르면 올케이팝에 가장 많이 접속하는 도시는 말레이시아 쿠안탄 시로 나타났다. 싱가포르가 그 뒤를 잇는다. 가주 플레즌튼 시와 어바인 시도 'Top 10' 안에 포함된다. 중국인들이 밀집해 있는 LA 아케이디아 시 볼드윈과 듀어리 인근 한 가전제품 전문점에는 '대형 TV+가라오케' 세트 판매 전략의 일환으로 한국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원더걸스의 공연 장면을 틀어놨다. 업주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가라오케 음악으로 원더걸스 노래가 인기 최고"라며 "중국어로 변환된 노바디 노래를 가족들끼리 다같이 신나게 부른다"고 말했다. 한류가 해외 1.5세·2세들의 '선봉장'역할과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확산으로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고 있다. 박상우 기자 swp@koreadaily.com

201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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