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삶] 색깔의 유혹
아무래도 나는 빨강이 되어가는 중이다// 빨강을 만난 건 겨울이었으나 겨울이 아니었더라도, 그 흰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혹은 얼음 속의 불// 우리는 잠시 스쳤을 뿐인데// 묻었나봐/ 꼭 여며두었던 소매 끝이거나 긴 목도리의 한쪽/ 열꽃이 번지고// 나는 사흘에 한 번 빨강을 앓고 하루에 한 번 그를 앓으며// 빨강이 되어간다/ 빨강은 얼어붙은 불이거나 불타는 얼음(…)- 유병록 시인의 ‘빨강’ 부분
코로나가 시작되고 우울감이 가중되던 때 빨간색으로 차를 바꿨다. 토스터도 커피포트도. 세상이 다 칙칙해 보이고 마음도 바닥으로만 길을 내서 빨강이면 좀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주위에서는 웬 빨강, 하면서 빨강색 차는 도난의 위험도 크다고 하고 너무 튀는 것 아니냐며 다소 의아해했다.
빨간색 차가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 공헌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빨강의 역할로 좀은 기분이 나아지기도 한 것 같다. 코로나라는 터널을 어둡지만은 않게 지내왔다고 생각된다. 얼어붙은 불이거나 불타는 얼음으로 표현되는 빨강의 내부에는 생명력이 잠재해 있음은 확실하다.
‘색채의 향연’ (장석주 지음)은 색에 관한 통찰이 매력적인 책이다. 색에 관한 작가의 관찰이 남다르다. 지은이는 “사람이 식별할 수 있는 색깔은 1000개 정도다. 놀라지 마시라, 디지털 기술로 빛의 삼원색을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색깔은 1600개! 이토록 많은 색깔은 저마다 만물과 조응하면서 마음 깊은 곳 금(琴)을 울린다. 색깔은 오감과 비벼지면서 감정과 심리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고 기술했다.
그 많은 색깔 중에서도 빨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빨강은 생명의 원점이다. 생명은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절대 가치에 속한다. 그래서 빨강은 고귀하다. 빨강은 이성을 압도하는 본성의 색깔이다, 열정과 희열은 검정도 아니요 노랑도 아닌 빨강을 타고 온다. 빨강은 사랑과 열정의 신호색이다”
적색은 가시광선 중에서 가장 긴 파장을 가지고 있다. 갓난아이에게 가장 먼저 인지되는 색이라고 한다. 인류가 찾아낸 대표적인 빨강의 원천은 진드기류의 빨간색을 띤 벌레였다. 그중에서도 질 좋은 빨강을 제공하는 ‘코치닐’은 최상이다. ‘코치닐’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로 붉은색을 띠는 암컷만을 말린 후 붉은 색소로 사용된다.
에너지와 생명의 상징인 빨강,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크다. 격렬, 폭력, 무자비, 혈투, 전쟁, 파괴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빨강의 문화사’를 쓴 스파이크 버클로(회화복원 전문가)는 신화, 종교, 과학, 언어학, 고고학, 인류학, 미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빨강의 변화무쌍한 일대기를 추적한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붉은 깃발은 흔히 공산주의, 좌파, 혁명, 노동자를 상징한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볼셰비키와 중국 공산당 등이 붉은색을 상징으로 삼은 탓이다.
하지만 사실 빨강은 각 나라의 국기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색이다. 전 세계 80%의 국기에 빨간색이 포함되어 있다. 빨강은 혁명의 색 이전에 왕의 위엄과 헌신, 정치적인 인내심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빨강은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하는 색이었다.
흰색에서 검정에 이르기까지 잦아들고, 내치고, 부딪치면서 탄생했을 색깔들, 밝고 부드러운 색과 차고 서늘한 색들이 대치하지 않고 스며들어 가며 봄은 색깔을 탄생시킨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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