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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관계 좋던 이란-이스라엘 두 나라…‘이슬람 혁명’ 이후 틀어졌다

[이란, 이스라엘 공격]
이란, 팔 분할에 반대했지만
이스라엘 건국 뒤 국가 인정
기업 합작과 미사일 공동개발

호메이니 집권 뒤 관계 단절
이란 핵개발 나서며 더 악화

1968년 이란과 이스라엘이 합작 투자한 송유관(왼쪽 사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스라엘제 무기로 싸우는 이란군 병사. 관계가 돈독했던 두 나라는 이슬람 혁명 후 틀어졌다. [로이터·위키피디아]

1968년 이란과 이스라엘이 합작 투자한 송유관(왼쪽 사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스라엘제 무기로 싸우는 이란군 병사. 관계가 돈독했던 두 나라는 이슬람 혁명 후 틀어졌다. [로이터·위키피디아]

이스라엘이 이란 영사관을 공격하고 이란이 이스라엘 본토를 공습하는 초유의 사태로 중동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지고 있다. 한때 경제 협력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뭉쳤던 양국은 왜 이토록 반목하게 됐을까. 양국이 역사적으로 중동의 역학 구도를 놓고 치밀하게 ‘밀당’을 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양국 관계는 돈독한 편이었다. 당초 이란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47년)과 유엔 가입(49년)을 반대했다. 하지만 막상 이스라엘이 건국되자(48년), 2년 뒤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주요 이슬람 국가 중에선 튀르키예에 이어 두 번째 승인이었다.
 
유럽에 망명 중이던 친미 성향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1953년 친위 쿠데타로 ‘샤(왕)’에 다시 오르면서 양국은 더 빠르게 가까워졌다. 정식 수교는 하지 않았지만, 대표부를 두고 텔아비브와 테헤란을 잇는 직항편을 운항했을 정도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을 비아랍권 국가로 분류하고 우호 세력으로 삼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 연합군과 치른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1967년)’ 이후엔 석유의 상당 부분을 이란에서 수입했다. 유럽으로 수출하는 이란산 석유를 보낼 송유관과 항만 시설을 운영하는 양국 기업 간 합작회사도 운영했다. 급기야 양국은 ‘플라워(flower)’란 명칭의 탄도미사일 공동 개발 프로젝트(77~79년)까지 가동했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으로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이란 정권을 거머쥐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팔레비 왕조를 축출한 혁명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이슬람의 적”, “위대한 사탄(미국)에 기생하는 작은 사탄”이라고 선언하며 모든 공식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이듬해 이란·이라크 전쟁(80~88년)이 발발하면서 양국 간 군사 밀월이 시작된다. 당시 이라크의 핵개발을 우려하던 이스라엘은 이란에 무기를 지원하고 군사고문관을 파견했다. “이란이 전쟁 발발 직후 구입한 무기의 약 80%가 이스라엘에서 온 것”이란 말이 돌 정도였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이스라엘이 이란에 건넨 미사일만 1500발에 달한다는 집계도 있다.
 
이스라엘은 그 대가로 이란으로부터 석유와 함께 이라크 군사시설과 관련한 상당량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81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부의 오시라크 핵시설에 대한 공습(오페라 작전)도 이런 군사정보를 참고한 것이었다.
 
하지만 겉과 속은 달랐다. 호메이니 정권은 전쟁 중에도 이스라엘을 겨냥한 칼날을 은밀하게 갈고 있었다.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에 무기를 제공하고 군사훈련까지 시키며 길고 긴 ‘대리전(proxy war)’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90년대부터 헤즈볼라의 테러가 이스라엘을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29명이 숨진 아르헨티나의 이스라엘 대사관 폭탄 테러(92년)를 시작으로 85명의 사망자를 낸 아르헨티나-이스라엘 친선협회 건물(AMIA) 폭탄 테러(94년)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의 배후로 이란을 지목했지만, 이란은 테러 관련설을 끝까지 부인했다.
 
이에 대항해 이스라엘 역시 이란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반군 세력인 이란 인민무자헤딘(MEK), 준달라(PRMI·이란 인민저항운동) 등을 군사적으로 은밀히 지원했다.
 
2000년대 들어 이란이 핵개발에 나서면서 양국 간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2005년 우라늄 농축을 재개한 이란은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며 공세적으로 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과학자들을 암살하고, 2010년엔 이란 우라늄 농축시설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까지 가했다. 악성코드(스턱스넷·stuxnet)를 핵시설 컴퓨터에 침투시켜 시스템을 셧다운 시켰는데, 당시만 해도 전례가 없는 공격 방식이었다.
 
2009년 이스라엘에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2기 정권이 출범하면서 양국 간 ‘강 대 강’ 국면이 더 악화된 측면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 계획)를 일방적으로 파기했을 때도 국제사회는 우려했지만 네타냐후 정권은 가장 먼저 환영했다.
 
이란 역시 2020년부터 미국이 주도한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 간 관계 정상화를 훼방 놓는 등 이스라엘을 ‘중동 내 왕따’로 고립시키는 전략을 계속 구사했다. 특히 수니파 종주국으로 이란과 대립 관계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이슬람 국가가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는 건은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행위”(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라고 맹비난했다.
 
이 때문에 이란의 군사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기습 공격한 것이 우연이 아니란 풀이가 나왔다. 아랍국들이 공히 분노하는 지점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도마에 올리기 위한 전략이었단 얘기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하마스가 실권을 장악한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에 나서면서 그간 추진하던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는 모두 멈춰선 상황이다. 이스라엘 내부에선 “이란이 놓은 덫에 걸렸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이 지난 1일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수뇌부를 제거하기 위해 시리아 주재 이란 영사관을 공습하면서 사태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25만 병력의 IRGC는 최고지도자(호메이니) 친위 부대로 이란 정규군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 조직이다. 그간 헤즈볼라, 하마스,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등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테러 세력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장본인이다.
 
이스라엘이 사실상 ‘대리전’의 틀을 깨고 먼저 공격에 나서자 이번엔 이란이 도발했다. 공개적으로 ‘보복’을 밝힌지 2주일 만인 13일 새벽 이스라엘 본토를 겨냥해 300여발의 미사일·드론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앞으로 양국의 군사 행동이 더 고조되면 중동 정세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날 뉴욕타임스는 “이번 공격으로 큰 사상자나 물리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그 영향은 심각하다”며 “이스라엘 안보 당국자들은 (이란 영사관 공습 이후) 이란이 자국 군대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전했다.
 

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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