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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누울 자리

6촌 동생의 생일에 다녀왔다. 나와 내 동생, 우리가 아저씨라 부르는 아버지의 6촌 동생, 그리고 생일을 맞은 6촌 동생네, 이렇게 4집이 모였다. 일가친척이 귀한 실향민의 자식들이다 보니 촌수와 상관없이 가깝게 지낸다. 지난해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부모님 세대는 모두 떠나시고, 이제 우리 시대가 되었다.     모이면 화제는 정치도 연예인의 스캔들도 아니다. 주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복용하는 약, 어디 아픈 데는 무엇이 좋다더라는 이야기들이다. 이날은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온 숙모 탓에 자연스럽게 아픈 이야기로 시작해 장지 준비로 이어졌다. 6촌 동생의 아내가 장지를 마련하려고 요즘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나와 내 동생은 부모님 돌아가신 후 장지를 사 두었다. 장지는 5년 할부로 구입했고, 할부가 다 끝난 후에는 다시 장례보험을 5년 할부로 구입했다. 부모님은 같은 해 봄, 가을로 돌아가셨는데, 살아생전 미리 마련해 두셨던 장지와 장례보험 덕에 마음 편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주변에 나이 든 친구들이 여럿 있지만, 장지를 미리 마련해 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아마도 아직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죽은 후 어디로 갈 것인지는 개인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것이다. 산소 쓰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장 후 납골당이나, 아예 바다나 산에 뿌려 달라는 사람도 있다.     내가 일찌감치 장지를 사놓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내게는 4명의 자녀가 있다. 나 죽고 나면 아내까지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5명이 의견을 모아야 한다.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부터, 관이며 꽃, 장지, 화장해서 재를 뿌리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방법에 따라 발생하는 비용도 천차만별이다. 살림에 여유가 있는 놈은 비용이 좀 드는 방법을 선호할 수도 있고, 형편이 어려운 놈은 은근히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을 바랄 것이다. 서로 눈치를 보고, 언짢은 말이 오갈 수도 있다.     경험해 보니, 나는 보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산소가 좋다. 얼마 전에도 딸아이가 부모님의 산소 번호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알고 보니 그날 친구 할머니의 장례식 참석차 로즈 힐스에 갔는데, 간 김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고 가려고 한 것이다. 잠시 후, 산소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임에도 이를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은 소홀히 하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내 이야기를 남기는 일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내가 그분들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분들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고,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으며, 그 힘든 시절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글로 써 놓았다. 내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외가와 일가친척 이야기까지 썼다. 4년 전부터 매일 일기를 쓴다. 요즘은 번역기가 좋아 훗날 자녀나 손자들도 한글 원고를 번역기에 올려 영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기억하고, 행여 내게 받은 상처가 있다면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일가친척 이야기 할아버지 할머니 장지 준비

2024-04-10

[살며 생각하며] 마녀 할머니

한 달쯤 전에 손주 A가 말했다. “내 꿈에서 할머니가 ‘마녀’로 나왔어.” “뭐라고?” 마녀라는 말에 가슴이 움찔했다. “할머니가 내 친구에게만 잘해줬어.” 친구? 나는 A의 친구를 본 적도 없다. 현실에서 라이벌이 자기 누나일 텐데, 꿈에서 친구로 바뀌어서 나타난 것 같았다.   사실 A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건은 주로 학교에서 픽업한 오후 시간에 벌어진다. 나는 큰 애와 붙어 앉아서 숙제하고 책 읽고 산수도 한다. 작은 애는 처음 얼마 동안은 혼자 논다. 그러다가 누나의 숙제 시간이 길어지면 심술이 슬슬 나는 모양이다. 곁에 와서 쿠션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온갖 난리를 친다. 나는 시끄럽다고 할아버지에게 가라고 소리친다. 꼼짝 못 하고 피하던 아이가 요즘은 ‘이이이이 우우우우’ 이상한 소리로 나를 반격한다. 입을 오므리면서 놀리는 소리에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유치원에서 친구들끼리 저렇게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또 야단을 친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 느닷없이 A가 우리 집에 쫓겨왔다. 아들은 책만 열댓 권 들어있는 A의 백팩을 건네주며 말했다. “엄마 아버지는 TV 하루 정도 안 봐도 되지요?” 유치원에서 친구와 싸운 벌로 주말에만 허용하는 특권을 금지했다고 한다. “노 오 티브이, 노 오 게임, 노 오 캔디”라고 한다. 저녁에 아들네는 마침 선약이 있어서, 큰아이는 외할머니네로, 작은 아이는 우리 집으로 보내졌다. 벌을 받는 중이므로, 외가에 같이 보낼 수 없다고 한다.     A가 온 그 저녁에 남편은 자리를 피해주었다. 둘이 잘해 보란다. A는 여기에 누나가 없으니, 안심하고 자기 책을 들이민다. 애가 펼치는 슈퍼맨 책을 보았다. 무슨 이런 슈퍼맨 책이 있담? 애들 그림책이 간단하지 않았다. 수많은 슈퍼맨틀의 특징을 공학적으로 연구해 놓은 무슨 전문적인 도감 같았다. 자잘한 글씨로 기술한 캐릭터를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이거 할머니 못 읽어.” “왜?” “너무 복잡해.” “그냥 읽으면 되잖아.”   다행히 공룡 책은 읽어 줄 수 있었다. 그 책 역시 백과사전같이 두꺼웠지만, 그나마 아는 주제라서, 그럭저럭 같이 넘길 수 있었다. A의 백팩에는 한글 숙제도 들어 있었다. 연필을 엉성하게 잡고 ㄱ ㄴ ㄷ을 거꾸로 쓰는 아이를 보면서, A에게 책을 읽어준 적도, 숙제를 봐준 적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A는 할아버지 옆에서 단잠을 자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내 옆은 오지 않는 아이가 할아버지 옆에는 자석처럼 붙어 있다. 아침으로 요거트와 바나나를 넣은 오트밀 와플을 구워 주었다. 바싹하게 구운 와플이 과자 같은지 2개나 먹었다. 와플은 손녀가 좋아하지 않아서 만들지 않았던 메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손녀가 좋아하는 음식만 했던 것 같다. 큰아이가 잘 먹으니 작은 아이도 잘 먹을 줄 알았다. 작은 아이의 첫 마디는 무조건 “오 노”였다. “나 그거 싫어해.” “왜 싫어? 이거 먹어야 해.” 작은 애를 향한 내 목소리는 어느새 올라가 있곤 했다.   남편은 두어 번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A가 언제까지나 5살인 줄 알아? 자라서 중학생, 고등학생 될 텐데, 그때 어쩌려고 그래?” 키가 장대 같고 어깨가 우람한 A가 나를 본체만체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어이쿠, 큰일 났다. 지금이라도 만회해야 할 것 같다. 나의 기준은 큰아이에 맞춰져 있었다. 작은 애를 누나 옆에 붙어서 반쯤은 가려있는 애로 여겼던 것 같다. 처음으로 A의 작은 얼굴과 작은 키가 내 눈에 오롯이 들어왔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할머니 마녀 마녀 할머니 이거 할머니 숙제 시간

2024-03-07

손주에게 남기고 싶은 인생 교훈

시니어 작가인 제이니 이머스(Janie Emaus)가 소개한 '손주에게 남기고 싶은 인생 교훈'이 온라인에서 화제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주는 조언과는 조금 궤를 달리한다.  제이니 이머스의 조언을 참고해서 우리도 손주들을 위한 인생 교훈을 남겨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꿈을 따르라= 누구도 자신의 길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 손녀는 댄서와 배우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다. 손자는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들에게 내 할머니의 말씀을 반복했다. 누구도 자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네게 말하도록 두지 마라. 춤추고 싶으면 춤춰라.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그림을 그려라.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도 한때는  젊었다. 모두 꿈에서 시작했다.     ▶비오는 날을 위해 아껴두라=우산은 비를 맞으며 걸어가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성인이 되서야 알게 된다. 손주들에게 저축과 401(k) 프로그램을 설명해야 한다.     ▶피부를 관리하라=할머니 세대는 비누를 사용하여 피부를 깨끗이 씻었다. 현대는 아름다운 피부와 영원한 젊음을 강조하면서 햇빛을 너무 많이 쬐고 있다. 나이가 들면 회복이 불가능하니 젊어서 피부를 잘 관리하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삶이 아무리 잔인해 보일지라도 곧 좋은 일이 나타날 것을 가르쳐라. 모든 일은 어떤 이유 때문에 일어난다. 처음에는 그 이유가 항상 명확하지 않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일이 발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재미있는 것을 찾아보라=유머 감각을 심어주고 웃게 만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라. 손주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웃음이 집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게 하라.   ▶편리한 도구 상자를 마련하라=손주가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도구상자를 사주라. 항상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도 간단한 일을 고칠 수 있는 것,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라.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으면 삶이 훨씬 쉬워진다.  장병희 기자손주 인생 인생 교훈 할머니 세대 도구 상자

2024-02-11

[문장으로 읽는 책]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줄도 몰랐다. ‘받은 사람이 받은 줄도 모르게 하는 것’. 그것조차 명인의 솜씨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할머니에게 배운 사랑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주는 평화’일 것이다. 그 사랑은 평화였다. 할머니가 나에게 무언가 잘해주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저 그분의 작은 평화 속에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끌어 안으셨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이에게 무언가 잘해주려 애쓰다가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고 불만과 다툼의 늪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는 나에게 평화로 가득 찬 작은 방을 주셨는데, 그 방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서 내가 힘들 때 들어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딸을 낳고서야 작가는 비로소 할머니의 사랑을 되돌아본다. 말수 적은 “언어의 미니멀리스트” 할머니는 잘했든 못했든 “장혀”라며 등을 두들겨줬다. “뭘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이 장하다는 소중한 인정”이었다. 과정에 대한 칭찬이었다.   “할머니가 베푼 관용은 나에게 심리적인 안전판이 되었다. 혹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관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씨앗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창의력의 씨앗이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고, 반대하는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할머니

2024-01-17

[살며 생각하며] 70년만의 졸업

나이 꽤 드신 분들이 공부하시거나 무엇을 추구하는 스토리는 항상 내 마음을 뛰게 한다. 81세 나이로 중학교 1학년 재학 중이셨던 박은순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을 때나, 5년간 무려 960번 도전 끝에 운전면허를 취득한 전북 차사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랬다. 지난주에는 한국의 만 87세 김금자 할머니가 나를 또 한 번 유쾌하게 놀라게 하셨다.     1936년생 김금자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 1945년 해방되면서 2년간 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그나마 6·25 전쟁이 터지며 또 중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중 양부모님을 다 잃고 오빠와 단둘이 남은 할머니는, 공부는 꿈도 꿀 수 없었고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셨다고 한다. 할머님의 공부는 이렇게 1950년에 전쟁과 함께 끝나버렸다.     하지만, 이후 결혼해 1남 3녀를 기르면서도 늘 학교 다니는 학생을 보면 부러워 눈물을 훔쳤다는 김금자 할머님은, 80세 넘어 우울감에 시달렸다. 중학교를 좀 다녀보면 우울감에서 벗어날 것 같아 알아보니, 초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하다 하여 인근 초등학교에 입학하셨다.     이렇게 정부 운영 18세 이상 대상의 초중 학력프로그램 학교에서, 아니면 일반 학교에서도 손주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한국 중년과 시니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한국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 이렇게 할머님은 입학 6개월 만에 초졸 자격검정고시를 봤다. 수학 문제들을 보니 어지럽기만 했다. 그러나 2020년, 초졸 자격고시 역사상 최고령인 84세의 나이로 첫 시도에 처억 합격하셨다. 70년 만의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질 팔십 대 중반에, 왕복 세시간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공부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듬해 중졸 검정고시에도 합격하신 할머님은 건강이 허락한다면, 대학까지 가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이 꿈도 이루어졌다. 할머님은 2023년 전문대 두 곳에 합격했다. 사회복지학과였다. 87세에 대학생이 된 것이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아니, 공부에는 때가 없다. 내가 사년 째 이끄는 Sunflower English Book Club의 연령대도 아주 다양하다. 40대 초반부터 70대 초반의 분들이 참여한다.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가장 피곤해서 누워 쉬고 싶은 시간인 저녁 8시나 9시에 줌 앞에 모이는 이분들, 그리고는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된 책을 함께 읽으며 공부하는 이분들이 나는 매우 매우 자랑스럽다. 아프면 비디오 끄고 소리라도 들으며 참여하는 이분들, 아이들 대학에 다 가고, 직장을 은퇴하고, 마침내 삶에서 자기 시간이라는 게 생겼을 때, 무엇을 할까 하다가 북클럽의 문을 두드렸다는 이분들, 마음도 비슷하고 열정도 비슷한 이 길벗들과 또 축복 되게 한 해를 맞는다.     지난주 북클럽 연말 파티에서, 한 분이 처음으로 장문의 편지를 두 딸에게 써 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남편 말에 그저 맞추어 살다 공황장애를 경험했던 분은, 북클럽에서 배운 ‘I’ 메시지로 자신의 심정을 잘 전달하여 남편과의 사이가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성숙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나이 들수록 더 공부해야 함을 느낀다. 공부하는 인생에 나이란 없다! 60년 만에 돌아온 청룡의 해에, 우리 모두의 비상을  꿈꿔본다! (counselingsunflower@gmail.com)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졸업 초등학교 졸업장 인근 초등학교 김금자 할머니

2024-01-03

[이 아침에] 88세 할머니의 덕질

한국의 동생이 카톡을 했다. 가수 임영웅이 필리핀에서 상을 받는데 엄마가 거기에 가고 싶어 해서 고민이란다. 동생은 아이들 방학을 맞아 취소할 수 없는 여행계획이 있다나. 개인 콘서트라면 나라도 한국에 나가 모시고 가겠지만 수상식이라니 노래 한두 곡 하는 것이 다일 텐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핑계를 찾는다. 동생에게 부모님 시중을 떠맡겨 온지라, 마음이 개운치 않다.     콘서트에 몇 번 가본 후 엄마의 덕질은 시작됐다. TV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세계란다.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피케팅(피가 튀는 전쟁터와 같이 치열한 티케팅)'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컴퓨터 속도로는 어림도 없고 광속을 자랑하는 피시방에서 ‘피케팅’을 해야 한다.     서울에서 표를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미국은 조금 수월해서 LA공연 표를 구해 다녀가셨다. 암표 살 돈이면 우리도 만날 겸 미국에 오는 게 훨씬 경제적이란 계산이다. 가수의 팬클럽 ‘영웅시대’에서 나온 하늘색 후드티를 입고 행여 깨질까 여러 겹 조심스레 싸 온 응원봉을 꺼낸다. 응원봉은 공연장 필수 아이템이라 비싸지만 계속 사용할 테니 샀단다. 평생 엄마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우리는 깔깔 웃었다. 거울을 보며 희미한 눈썹을 새로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 후 공연장인 코닥극장으로 갔다.   엄마는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돌볼 만큼 건강하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다. 등도 굽고 쪼그라든 엄마에게 세월이 보여 안쓰러웠는데, 덕질을 시작하며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힘들어하던 스마트폰 사용도 가수의 팬이 되면서 금세 익혔다. 여러 유튜버에게 얻은 정보를 지치지 않고 부지런히 전한다. 노래 실력도 좋지만, 예의 바르고 성품이 훌륭하다고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일찍 혼자되어 고생하며 외아들을 키운 가수의 엄마와 가수가 대견하고 애틋하단다.   나이 들며 재미있는 일도, 감동할 일도 줄고 매사에 시큰둥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엄마를 보면 나이는 진정 숫자에 불과하다. 아버지 떠난 빈자리를 손주 나이의 가수가 채워서 허전함을 위로받는다. 누구보다 사리 분별 명확하고 이성적이던 엄마의 뒤늦은 덕질이 당황스럽다.     나는 팬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학창 시절에도 흔하던 브로마이드를 벽에 붙여본 적 없고 하다못해 연예인 얼굴을 코팅한 책받침도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BTS의 인기곡이 무엇인지 멤버가 몇 명인지 당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메마른 내가 비정상인가. 내가 몰두할 열정과 호기심은 어디 있을까.   세월은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열정과 흥미를 잃을 때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항상 뜨거운 응원과 격려로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주던 씩씩한 엄마,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디 아프지 말고 계속 영웅이를 벗 삼아 오래도록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 최숙희 / 수필가이 아침에 할머니 덕질 가수 임영웅 평생 엄마 스마트폰 사용

2023-12-20

[독자 마당] 어떤 감사

나는 오늘 팔십 평생에 처음으로 모르는 분에게서 맛있는 점심 대접을 받았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 6명도 함께였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가까운 산을 찾는 할머니 등산 클럽 회원들이다. 회원은 8명으로 20년째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오늘은 모임의 막내가 80세 생일을 맞아 한턱내는 날이었다. 모두 맛있게 식사를 하며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식당 웨이트리스가 오더니 어떤 분이 우리의 식사비를 대신 낸 것은 물론 팁까지 넉넉하게 주고 방금 나가셨다는 게 아닌가. 민첩한 친구 두 명이 바로 뒤따라 나갔다. 막 차에 타려는 젊은 분이 있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 젊은 분은 우리의 다정한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고, 우리를 보는 순간 사랑하는 할머니 생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식사비를 냈다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오늘 80세 생일을 맞은 친구는 더 감격스러워했다. 우리 일행은 식사 후 식당 근처에 사는 한 친구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그분을 위해 합심 기도를 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처럼 선행을 배풀 수 있도록 해 달라고도 했다.     언젠가 한 거피 업소에서의 릴레이 선행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커피 업소의 드라이브 스루 창구에서 앞차 손님이 뒤 차 손님의 커피값까지 내주는 선행이 수백명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뉴스를 접하고 이 소식은 정말 좋은 은혜의 릴레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은혜를 받고 보니 ‘우리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선행으로 인해 얼마나 많을 영혼들이 기쁨을 얻고 가슴 뿌듯해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분의 앞날과 하고자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줄리 김·가든그로브독자 마당 감사 릴레이 선행 할머니 생각 식당 웨이트리스

2023-11-21

[열린광장] 시각장애인의 미술작품 감상

“작품들의 색상(color)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 인물화( Jesus portrait )는 너무 감동적입니다.”     여느 미술전시회에서나 작가들이 관람객으로부터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필자는 지난 달 20일 연 개인전에서 시각장애인 할머니 관람객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동생의 도움을 받아 전시회에 온 이 관람객은 수년 전 병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실명 전에는 그림을 무척 좋아했으며 시력을 완전히 잃은 이후 미술전시회 관람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동생은 자신이 언니에게 작품의 색상이며 형상을 일일이 설명하니 언니는 시각장애인이 아닌 것처럼 모든 전시작품을 즐겁게 감상했으며 너무 행복해했다는 것이다.     여러 번의 전시회를 열었던 필자는 시각장애인의 전시회 관람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저 놀랍고 또 숙연함에 두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감사함에 보답하는 의미로 필자의 작품세계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해줬다. 시각장애인들이 촉감으로 그림의 형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미술작품 감상 보조장치 등의 도구도 없는 상태에서 시각장애인 관람객과의 대화는 작은 기적이며 필자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최근 시각장애인의 예술작품 감상을 돕기 위한 ‘블라인드 터치(Blind-touch)’ 장비 개발이 활발하다. 이는 3D프린터를 이용해 예술작품을 부조(relief) 형태로 제작해 시각장애인이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서 그림의 형태를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부분에 대해 부가적으로 오디오 설명 및 주변 효과음을 제공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재현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미술 작품 감상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접근방식으로 미국에서 개발된 ‘터치 그래픽스’의 ‘테이킹 택틀 태블릿(Taking Tactile’ Tablet)‘은 터치 감지 그래픽으로 3D 모델에 통합된 NFC 태그를 기반으로 하고 착용식 NFC 판독기로 인쇄(부조 프린트)된 패턴을 감지하여 관람자가 손으로 작품 속에 있는 특정 물체를 만지면 해당 물체의 의미에 대한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마련되어 장애인도 문화·예술 시설을 이용하고 문화·예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법적 제도는 마련되었으나, 시각 위주의 전시문화로 인해 미술전시회를 한 번도 관람하지 못했다는 시각장애인의 비율이 96%에 이른다는 2014년도 조사결과도 있다.   최근 포스코와 경북도청이 공동 주최, 포스아트(PosART)로 조선시대 명화 56점을 선보인 ’철 만난 예술, 옛 그림과의 대화‘ 행사가 열렸다. 포스아트는 부식에 강한 철판에 수차례 반복적으로 물감층을 쌓아 올리는 적층 인쇄 기법으로, 시각장애인들이 촉감으로 그림의 형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후천성 시각장애인 경우 미술작품에 대해 말로 설명해주면 그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많은 시각장애인이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싶어 하지만 시각 위주의 문화예술 행사 및 관람 환경으로 인해 시각장애인에게는 그 장벽이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각장애인의 예술작품 감상을 돕는 ’블라인드 터치‘가 미술전시장에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많은 시각장애인이 미술작품 감상의 즐거움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이 황 / 서양화가·칼럼니스트열린광장 시각장애인 미술작품 시각장애인 관람객 시각장애인 할머니 미술작품 감상

2023-11-03

80년 전 러브레터에 담은 애틋한 사랑…영어·일본어 섞어 쓴 75통 편지

  한반도의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쳐 미국까지 사랑을 이어온 두 한인 남녀의 80년 된 러브레터가 발견돼 화제다.     지난 2018년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손녀 자넷 곽(40·샌디에이고)씨는 옷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박스 하나를 열어보고선 깜짝 놀랐다. 내용물은 노랗게 빛바랜 편지 75통.     대부분이 30여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연애 시절 할머니에게 보낸 연애편지들이었다.     곽씨는 그 시절 할아버지 곽종기씨와 할머니 정영숙씨의 사랑 이야기의 발자취를 찾아 지난 8일부터 오는 22일까지 한국을 방문 중이다.   곽씨는 “자유를 억압받던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시절에도 사랑을 나누며 서로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는 모두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질 것이라 생각했고, 더 알고 싶어져 남동생과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대구에 살며 1928년생 옆집 사는 동갑내기 친구로 만나 연인이 된 곽씨의 조부모는 할아버지가 서울대학교로 진학해 서로 떨어지게 되면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1943년에 시작된 연애편지는 그 뒤로 무려 10년이나 이어졌다.   당시는 황민화 정책이 추진되며 자유가 억압받던 시기였다. 경북여고를 다녔던 할머니는 총동원 체제 때 강제 동원돼 근로 활동을 해야 했다.     또 언어가 통제된 탓에 할아버지의 편지도 대부분 일본어로 쓰였다. 하지만 편지 속 한국의 서정적 정서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곽씨는 “할아버지는 당대 한국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인용해 할머니에게 사랑 고백을 전하는 로맨티스트셨다”며 “미군정 시기에 들어서부터는 편지의 서두는 항상 ‘To my darling(내 사랑에게)’로 시작했고 ‘You’re my sunshine, you're my higher love(당신은 나의 햇살, 당신은 나의 높은 사랑)’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셨다. 편지들을 발견한 후에 한자와 일본어가 많아 해석 도움을 받고자 SNS에 올렸는데 많은 분이 할아버지의 낭만적인 시적 표현들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름다운 내용도 많지만, 당시 위태로웠던 시대적 상황도 적나라하게 담겼다. 북한이 서울을 침공했을 때 할아버지는 아는 사람을 통해 어렵게 편지를 전달하며 급박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현실에 불안해하는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대구 집에 있던 감나무 얘기를 자주 하시며 함께 꾸려나갈 밝은 미래를 약속하셨다”고 말했다.     결국 둘의 사랑은 할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한 후 대구에 돌아가 할머니와 결혼을 하면서 결실을 보았다.     두 아들을 낳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후 1989~1990년쯤 둘째 아들인 곽씨의 아버지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왔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곽씨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두 분이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운 이야기는 미래를 살아갈 자식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준다”며 “아무래도 한인 2세들에게 이런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한 사랑 이야기는 생소하다. 요즘 K팝 등 한류가 널리 퍼지고 있는데 이렇게 당시 시대상과 역사가 담긴 러브스토리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한국을 다녀와 갤러리 전시나 책 출판 등을 고려 중이다”고 말했다.   남동생과 한국을 방문 중인 곽씨는 현재 경북대학교 김경남 사학과 교수와 함께 과거 할아버지·할아버지 자택과 편지 속 나오는 장소들을 방문 중이다. 일본강점기 때 주소이기 때문에 현재 주소를 찾기 위해서는 해당 관할지 중구청의 협조가 필요해 김 교수가 이를 돕고 있다.   김경남 교수는 “학술적으로 봤을 때 역사학과 기록학에서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일상사라는 관점과 재미동포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성이 있을 거 같다”며 “자넷씨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기록을 소중히 남겨 놓았던 것처럼 그 기록을 남겨놓으면 후손들은 그것을 보고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일본 러브레터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 이야기 시절 할아버지

2023-10-12

부산 할머니 손맛, LA 반찬가게로…LAT, 김지희씨 '페릴라' 소개

부산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 LA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한인이 눈길을 끌고 있다.     21일 LA타임스는 음식 섹션에서 김지희씨의 반찬가게 ‘페릴라(Perilla)’를 소개했다. 신문은 반찬과 도시락을 판매하는 김씨의 작은 가게 안에서 눈이 즐거운 다양한 한식을 맛볼 수 있다고 전했다.     2020년 여름 테이크아웃 형태의 반찬가게 페릴라를 시작한 김씨. 지난 7월에는 260스퀘어피트 규모로 옮겼다. LA차이나타운과 에코파크 경계에 자리 잡은 김씨의 작은 반찬가게는 웹사이트(perillala.com)를 통해 입소문을 타고 있다.   김씨 가게는 오이 김치, 계란말이, 미역 줄거리, 배추김치, 고추 장아찌, 계란 장조림 등 한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본 반찬을 판매한다. 최근에는 미국 내 인기 절정인 김밥도 한국식 양념장과 함께 선보였다. 김씨의 김밥에는 아보카도도 들어간다.     이밖에 다양한 반찬과 구운 생선이 들어간 일반도시락, 불고기 덮밥, 버섯 덮밥, 닭고기 도시락, 아보카도 도시락 메뉴도 인기다.   김씨는 부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스무살 때 샌디에이고로 이주했고, 샌프란시스코 조리학교를 나온 뒤 고급식당에서 일했다. 북가주 베이지역에서 자리 잡았던 김씨는 돌연 남편과 남가주 행을 택했다고 한다. LA지역에 사는 가족과 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한다.     LA로 이주한 김씨는 지난 2020년부터 어릴 적 맛보던 전통 한식을 만들어 판매하는 시도에 나섰다. 김씨가 한식에 매료되고 관심을 쏟게 된 것은 유년시절 경험에서 나왔다.   40여년 전 그의 할머니는 부산에서 식당을 차렸고, 부모님 또한 그 식당을 이어받아 운영했다. 김씨는 어린 시절 반찬을 만들기 위해 매일 아침 시장에 나가 장을 봐오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그의 10대 시절은 된장, 고추장 등 다양한 반찬 식재료가 늘 함께한 셈이다.     김씨가 LA에서 반찬가게를 차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는 반응이다. 할머니의 손맛과 부모님의 반찬가게 운영 노하우 등 한식의 기본기가 몸에 배어 있어서다.     김씨는 ‘인위적인 퓨전’ 시도는 지양한다고 한다. LA 등 미국에서 한식을 선보일 때 현지 입맛에 맞게 식재료나 양념에 변화를 시도하곤 한다.     반면 김씨는 한식 고유의 맛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고춧가루, 된장, 젓갈, 마늘, 생강 등 한식의 맛을 결정짓는 재료를 고수한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캘리포니아’ 스타일에 맞게 살짝 맛의 변화를 꾀할 뿐이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반찬가게 할머니 반찬가게 운영 la 반찬가게 부산 할머니

2023-09-21

‘만세 할머니’ 백인명 여사, 고국 위해 웰페어 모든 돈까지 기부

백인명 여사(1898~1987)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건 1921년 12월이었다.   본적도 없는 남편의 얼굴 사진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사진 결혼을 통해 낯선 이국땅을 밟았던 백 여사는 생전 ‘만세 할머니’로 불렸다.   백 여사는 옥고를 치른 직후 미국으로 왔다. 경기도 가평 공립보통학교와 황해도 연안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1919년 3월1일 진명여고 앞에서 독립을 외치다 체포됐다.   본지는 3.1여성동지회가 제공한 백인명 여사의 생전 육성 파일(1976년 2월28일 녹음)을 들어봤다.   2분 남짓한 녹음 파일에는 카랑카랑한 백 여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나라가 말살될 것이라는 감정 속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애국심…허리춤에 감춘 독립선언서를 이 상점, 저 상점에 다니며 전했다. 방방곡곡이 독립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때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 여사는 북가주 맥스웰 지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이후 윌리엄스 지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다 LA로 왔다. 그때가 1945년이었다.   백 여사는 광복을 LA에서 맞았다. 그때의 감회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너무 좋아서 택시를 불러 대한인동지회 사무실로 달려갔다. 밤새도록 목이 메어라 만세를 부르며 날을 보냈다.”   백 여사는 이민 초창기 세대다. 쉴 틈 없이 일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고 어머니 그리고 아내로서 세월을 흘려 보냈다. LAPD의 한인경찰관 1호(1965년)인 레이 백씨가 백 여사의 아들이다.     백 여사는 푼푼이 모은 돈도 늘 고국을 위해 썼다.   UCLA에는 한국 전통음악과가 있다. 당시 백 여사가 학교 측에 쾌척한 2000달러를 기반으로 1973년에 개설된 학과다. 당시 화폐 가치를 오늘날 기준으로 환산(연방노동부 데이터)해보면 약 1만5000달러에 달한다.   한국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모금 때도 웰페어를 조금씩 모아 마련한 1000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썼던 이철수씨 사건 당시에도 구명 운동에 후원금을 냈다. 한국 정부는 백 여사에게 대통령상(1970년), 외무부장관상(1970년), 문화공보부장관상(1973년) 등을 수여했다.   백 여사는 평소 이승만 박사를 존경했다. 대한인동지회 지방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인 사회내 각종 행사 때마다 ‘대한민국 만세’를 선창했다.   본지 신문에도 백 여사의 기록이 남아있다. 지난 1974년 11월3일, LA지역 맥아더 공원에서는 중앙일보 미주판 발행 및 동양TV개국 기념을 맞아 2만 명의 한인이 모인 가운데 ‘미국에서의 장수무대’가 열렸다. 이때 백 여사가 1등 장수상을 받았다. 76세였다.   그는 유머와 재치도 있었다.   사회자가 “미국서 시어머니 노릇 하기가 어떠냐”고 묻자 “아들은 많은데 모두 미국 며느리라서 시어머니 노릇 하기도 어렵다”고 답해 관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백 여사는 지난 1987년 9월 눈을 감았다. 향년 89세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대신 미국땅 곳곳에 그가 심은 대한민국의 흔적은 생생하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미국 할머니 만세 할머니 대한민국 만세 한국 독립기념관

2023-09-21

[삶의 뜨락에서] 나이에 등급이 있다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전과 다른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럽고 아직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친구는 아직도 펄펄 날아다니는데 나만 그런 것 같아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유전자의 축복을 받은 소수의 사람이나 책과 방송에 나오는 기적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는 혹시 나도 하는 짧은 기대와 역시 나는 하는 긴 우울감에 빠지게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으로 이어지는 상실 5단계는 더는 젊지 않은 내 몸과 이별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단계마다 머무르는 시간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이 과정을 겪으며 현실 속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현재 좌표를 정확하게 인식할수록 항로와 도달할 장소 그리고 방법을 잘 정할 수 있다. 막연했던 몸의 신호가 좀 더 선명해지면 더는 미루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과거에는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질 때 우리는 이전 같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 뱃속에서 수정이 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전과 같은 때는 한순간도 없다. 사진 속의 내가 나를 닮은 누군가인 것은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 머릿속 생각들 그리고 가슴에 품고 있는 감정들이 계속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변한다는 것은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우리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한국 할머니를 보았다.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자세가 꼿꼿하고 걸음걸이도 반듯하게 적당한 속도로 걸어가신다. 손가방을 어깨에 메고 마켓에 가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약속이 있어 누군가와 만나기로 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분이 가게에 옷을 세탁하러 오셨다. 본인 것이 아니고 남자 옷이었다. 이상해서 물었다. 본인은 80살인데 79살 할아버지와 76살 할아버지 두 분을 돌보는 일을 하신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두 노인 양반들을 돌보세요. 힘드실 텐데요.” “그냥 힘들지 않게 슬슬 돌봐요” 한다. 어떻게 노인네 돌보는 일이 쉽겠느냐마는 담담하게 말한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바지에 실례해서 물로 씻었는데 냄새가 가시지 않아 비닐봉지에 바지를 싸서 왔다. 80이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두 할아버지를 돌본다는 것 쉽지 않다.     하루는 시간을 내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얼굴도 고우시고 손도 매끈해서 어렵게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누구나 남이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게 마련인데 남편이 34살에 천국에 갔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골수암으로 떠났고 며느리와 손자가 한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믿기지 않았다. 그 뒤로 남을 돌보는 일이 힘들지 않고 가엽게 여겨지고 할아버지 배설물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심으로 돌보며 살고 있다고 했다. 보통 노인들 보면 메디케이드를 받으면서 편하게 사는 것 같은데 그런 여건은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으며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몸이 이전 같지 않다고 느낀다면 이제 몸과 마음을 그리고 삶을 좀 더 섬세하게 다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선택과 집중의 시기가 온 것이다.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방향이다. 과거와 외부에 시선을 돌리면 전과 같지 않고 남보다 못한 나를 보기 쉽다. 하지만 시선을 미래와 내부로 돌리면 지금의 나와 가야 할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며 내가 아닌 것을 하나둘 내려놓다 보면 삶은 자연스럽게 된다. 우리는 운 좋게도 이전보다 오래 산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급해진 것 같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즐기며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나이 등급 할아버지 배설물 한국 할머니 보통 노인들

2023-09-0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집으로 가는 길

동네 길목마다 삼삼오오 모여 동그라미 그리며 버스를 기다린다. 키가 훌쩍 자란 고등학생, 여드름 송송 돋은 중학생, 잠시도 가만히 서있지 못하는 초등학생들이 옹기종기 버섯처럼 모여있다. 아빠 손 잡고 형과 누나 전송하러 나온 꼬마들은 눈을 비비며 신바람이 났다. 유모차에 아기 싣고 온 식구가 총출동한 가족까지 등장한다. 아기 안고 기다리는 엄마 얼굴은 아침 햇살 받아 홍조를 뛴다. 샛노란 개나리꽃 색깔의 버스 문이 열리자, 형 따라 버스에 오르려던 세살배기 아이는 아빠가 손을 잡아 끌어내리자 앙 울음을 터트린다.     아! 해방이다. 부모에게는 길고 긴, 아이들에게 짧은 여름 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학교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이들은 친구 다시 만나 즐겁고 부모는 긴 여름 동안 애들과 씨름하며 부대낀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어 대환영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날!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말은 구전설화로 암행어사 박문수가 가난한 오누이를 도와 나란히 혼례를 치르게 하는 이야기다.     어느 날 박문수가 가난한 오누이 집에서 저녁을 얻어 먹었는데 가세가 기울어 내일이면 정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다고 슬퍼했다. 이야기를 들은 박문수는 지략으로 도령을 장가 들게 도와주고, 처녀와 하례를 치르기로 한 신랑은 누이와 짝 지어 남매 둘을 혼인시킨다. 일거양득, 꿩 먹고 알 먹는 이야기다.   우리 동네가 ‘Back To School’로 분주해서 연락했더니 딸이 사는 뉴저지는 다음 주부터 학교가 시작한다고 했다. 곧이어 새 옷 샤핑하며 모델처럼 비비꼬며 폼 재는 손녀 사진이 텍스트로 날아온다. 할머니 체면에 못 본 척 할 수 없어 금일봉을 전달한다. 딸 사위 아들 며느리에 손주가 넷이니 일년 동안 할러데이와 기념일, 생일 등 기억할 날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쌈짓돈마저 마를 지경이다. 달력에 빼곡히 적어놓는데 어쩌다 놓치면 할미 노릇 못하는 어미로 추락한다.     딸은 레이쳘레이쇼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방송에 출연하며 승승장구했는데 둘째를 낳은 뒤 아이 키우는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다. 한 점 후회 없이, 정성을 다해 얼마나 열심히 키우는지 엄마 노릇 대충한 내가 부끄러울 정도다.     우리 아이 셋은 할머니가 애지중지 정성을 다해 키웠다. 상록회 어른들 모임에서 성경공부하고 찬양연습이 끝나면 부리나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 식탁에 알록달록 좋아하는 간식과 과일 담아놓고 아이들의 노란 버스를 기다렸다. 개나리꽃 버스에서 내린 애들은 빛의 속도로 달려와 할머니 품에 안긴다. 할머니는 해바라기처럼 큰 미소로 아이들을 맞는다. 학교로 가는 길은 희망을 안고 달리는 꿈 길이다. 집으로 오는 길은 사랑이 넘치는, 꿀이 담긴 귀향이다. 옛날 옛적에 보따리 가방을 매고 꼬불꼬불 좁은 시골 길 따라 학교에 갔다. 동무들과 재밌게 놀면서도 집으로 가는 시간을 기다렸다. 비가 오면 어머니는 비닐 우산 쓰고 측백나무가 보초를 선 학교 앞에서 날 업고 집으로 갔다.     꼬부랑길 따라 달려 갈 때면 빈 양은 도시락 안에서 젓가락이 달그락거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머니 젖무덤처럼 편안하고 행복했다. 수양버들나무에 묶인 그네와 짚으로 엮은 사립문이 보이면 가슴이 콩닥거렸다. 달려가 하얀 소복 입은 어머니 품에 안기면 보름달처럼 환하게 안도의 숨을 쉰다. 딸의 염색체가 나를 건너뛰고 할머니를 닮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자식은 사랑과 정성으로 자란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개나리꽃 버스 할머니 체면 개나리꽃 색깔

2023-08-22

[삶의 뜨락에서] 허리케인(Hurricane) 심(Sim)

팬데믹 이후 근 2년 동안  뉴저지에서 꼼짝 않고 있는 나를(언니 오빠네 식구도) 보러 조지아의 둘째 딸과 손녀·손자가 굉장한 비바람을 몰고 쳐들어왔다. 뉴저지에 도착하는 7월 17일, 즉시 그길로 맨해튼의 워터 보트를 타기로 돼 있었는데 날씨도 나쁘고 시간도 늦고 해서 다음날로 미루고 우리는 큰딸네에 온 식구들이 모여 3년 만에 회포를 푸는데 그동안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손자·손녀들 서로 부둥켜안고 그 좋아하는 모습이란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맨해튼을 가로지르는 페리(Ferry)를 처음 타 보는 양 근 4년 만에 둘러보는 허드슨 강은 여전했고 시끌버끌하는 뉴욕시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이들은 ‘The beast was the boat’를 타며 온몸에 물세례를 맞는 기분이 통쾌하다고 재잘대며 우리는 리틀 이탈리아와 차이나타운을 거쳐 식사하고 거리에 쏟아지는 선물 가게를 둘러보고 밤늦게 페리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조지아 식구들은 맨해튼에서 친구와 만난다고 이틀을 호텔에서 머무르며 친구와 푸드 투어를 하고 ‘Six’라는 브로드웨이 쇼도 보고 뉴욕대와 워싱턴스퀘어파크도 둘러보고 Summit 0ne Vanderbilt도 보았다.   조지아의 손자녀석이 11살이라 무엇이든지 흥미로워 뉴저지의 해변도 봐야 한다고 해서 세븐 프레지던트 해변으로 향해 떠나는데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서 좀 난감했는데 해변에 다다르니 해가 뜨며 푸른 하늘이 우리를 환영하고 있어 너무나 기뻤으며 아이들은 종일 물속에서 잘 놀면서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지난 7월 22일 토요일 다시 페리로 뉴저지로 돌아와 렌터카를 몰며 보스턴의 하버드 서머 스쿨로 세 식구는 떠났는데 그 지난 일주일 동안의 나에게 일어난 일은 그동안 침체해 있던 나의 심신(心身)을 팬데믹 이전으로 일깨워주는 듯했다. 우리는 가끔 마음속으로 한없이 침체하여 있을 때는 무엇으로든지 한 방 맞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온다고 했을 때는 기쁘면서도 아직도 난리인 세상에 어떻게 컨트롤 할까 염려도 있었건만 막상 만나니 팬데믹이고 뭐고 기를 못 피게 세상은 여전히 힘차게 돌아가고 있음을 절감했다.   내가 지난 십여 년 넘게 플로리다에서 살 때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뉴저지의 딸·아들네와 조지아의 둘째 딸네가 매년 들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한 해 먼저 내려와 있던 큰딸이 “엄마! 허리케인이 하루 일찍 온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심결에 “아니,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무슨 허리케인이냐!” 하니 하하 웃으며 “조지아에서 심 패밀리가 하루 일찍 온다는 소리야” 해서 한참을 웃었다.     허리케인이란 북대서양, 북동 태평양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 중 최대 풍속이 시속 64KTS(74마일) 이상인 것을 말하며 강한 바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조지아 아이들이 플로리다 할머니 집에 오면 너무 반갑고 좋아 이방 저방으로 어찌나 극성스럽게 돌아다니는지 그때 붙여진 별명이다. 이번에도 할머니인 나를 보고 조지아를 좀 다녀가라고 하건만 꿈쩍도 안 하니 이렇게 바람을 몰고 쳐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팬데믹 이후 너무나 반갑고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정순덕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hurricane 허리케인 조지아 식구들 조지아 아이들 플로리다 할머니

2023-08-01

[수필] 8학년들의 반란

포토맥강은 애팔래치아산맥에서 발원하여 워싱턴 DC를 돌아 대서양 연안의 체서피크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665km의 강이다. 강 주변에 분위기 있는 카페나 작은 레스토랑이 많고 무엇보다 봄에는 벚꽃이 장관이다. 벚나무들은 강기슭에 허리를 꺾어 닿을 듯 말 듯 강물에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그중에서도 뭉게구름처럼 피는 분홍색 겹벚나무는 4월 DC의 맑은 파란 색 하늘과 어울려 한 번 보고 오면 오래도록 눈앞에 아른거린다.     워싱턴 DC의 여러 언론 매체에서는 4월 초순 경부터 ‘올해의 벚꽂 만개일’을 예상해 발표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3월 늦게 시작해서 5월 말까지 벚꽃은 늘 그곳에 무리 지어 피어 있고 매해 절정기는 4월 중순 무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굳이 그 복잡한 만개 일에 맞추어 그곳을 방문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지니아 북쪽 소도시에 자리 잡은 딸의 신혼집을 늘 그 무렵에 찾았고 일정에 딸 가족과의 그날의 포토맥강 방문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으니 만개 일의 그 소란에 나도 매해 일조하는 셈이었다.   그해도 4월이 되기를 기다려 DC로 향했다. 딸은 손자와 손녀를 데리고 덜레스 공항 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살 된 데이비드는 달려와 안겼고 두 살 된 앨리스는 유모차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나를 주시했다. 할머니라면 가까운 메릴랜드 집으로 자주 찾아뵈는 그랜마가 있는데 또 하나의 할머니라니. 나와 데이비드의 뜨거운 재회를 앨리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보고 있었고 내가 유모차로 다가가자 마지못해 상체를 조금 기울여 주었다.     첫 손주들이었던 두 아이를 사돈 내외는 많이 아꼈다. 주말마다 아들 내외를 집으로 불러 시간을 함께 보냈다. 데이비드가 세발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날, 지칠 줄 모르고 타는 아이가 다칠세라 바깥사돈은 거의 두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 곁을 따라다녔다. 스윗하고 매사에 빠른 편인 데이비드에 비해 앨리스는 말도 조금 늦되고 상황을 늘 말없이 관찰하는 편이었다. 딸은 이 점이 마음에 쓰여 내게 걱정하곤 했는데 나는 차분한 앨리스가 오히려 사물에 대한 파악이 빠를 것이라 짐작했다.     그해 가을 어느 날, 딸네 집으로 전화를 걸자 앨리스가 수화기를 들었다. 앨리스가 그랜마라고 하자 딸은 무심코 “어느 그랜마?” 했는데 놀랍게도 앨리스는 “The one you love”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받을 때 제 엄마가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하며 공손하게 응대하는 메릴랜드 할머니와  ‘하이, 맘’ 하며 심상하게 대답하는 캘리포니아 할머니. 그 두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차이를 예리한 앨리스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아득해 보이기만 하던 8학년 고지에 올라섰다. 얼떨결에 세월에 떠밀려 온 지점이어서 별다른 감회는 없었는데 여태 고분고분하던 몸이 반란을 시작했다. 먼저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창틀이 흔들렸다. 백내장 수술과 안검하수 수술을 받았다. 긴 세월 버텨 온 치아도 어긋나기 시작해서 매달 치과를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딸이 동행했다. 아직 운전도 가능하고 백인 의료인들과의 의사소통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딸이 곁에 있으면 그들은 좀 더 친절했고 조금 더 세세하게 내 증세에 관해 설명해 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내 병원 진료일은 딸의 스케줄에 맞춰 정해지기 시작했고 딸은 시간을 내어 나와 병원을 오가는 날이 늘어 갔다.   이 무렵 딸의 가정에는 또 하나의 반란 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8학년이 된 앨리스의 변화였다. 그토록 스윗하던 앨리스가 학교에 다녀오면 제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프리스쿨 때부터 가깝게 지내 온 친구들과 헤어지고 캘리포니아에서의 새로운 학교생활에도 무난히 적응했었는데 이즈음 부모의 모든 질문엔 퉁명스럽게 ‘노’로 일관했고 어디든 부모와 동행하기를 거절했다. 딸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대화를 시도했는데 앨리스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온  가족이 살얼음 위를 걷듯 앨리스의 기분을 살피는 나날이 이어졌다. 사위는 통통한 딸의 볼을 한 번 만져보기 위해 미리 허락을 받고 어렵사리 딸의 볼에 간신히 손을 대보는 형편이었다.     저녁마다 딸의 긴 하소연이 계속되었다. 그토록 감겨 오던 앨리스가 허그도 뽀뽀도 모두 거부하자 딸은 크게 상심했다. 이 일은 시간이 가면 다 해결되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딸에게는 그리 위로가 되지 않았다. 딸의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나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꺼내들었다. 프랑스의 과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질량불변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Mass)’은 ‘닫힌 계의 질량은 상태 변화와 관계없이 같은 값을 유지한다’는 이론이다. 마찬가지로 자녀들의 일생 GR의 총량은 일정해서 조금 일찍 시작하면 일찍 끝나고 어렸을 때 별일 없이 지나가면 다 커서 반드시 정해진 양 만큼 그리고 더 고약하게 반항하게끔 되어있다는 ‘GR 총량 불변의 법칙’이다.   팔순 엄마의 병원 뒷바라지와 아이의 반항기가 겹쳐 딸은 힘들게 갱년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손녀가 생리를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닫히는 문 너머로 새롭게 열리고 있는 또 하나의 여성의 문. 노을 속으로 하나의 방이 스러지고 있을 때 하늘은 그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방을 열고 있었다.   박유니스 / 수필가수필 반란 캘리포니아 할머니 메릴랜드 할머니 반란 세력

2023-07-2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자유’란 이름으로

확신은 교만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이 틀어질 지 모른다. 세상에 마음 먹은대로, 제대로 되는 일은 없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고 길을 잘못 들었다가 탄탄대로로 직행하는 일이 생긴다. 뜻밖의 일로 횡재를 만나고 골 때리며 죽자사자 기획한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참사를 당한다.     나는 매일 산꼭대기에 올라가 ‘야호’를 외친다. 사실은 뒷마당으로 향한 데크로 나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감격의 하루를 맞는다. 반나절도 못돼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절망과 부질없는 힘 겨루기를 하지만 물러서지 않기 위해서다.   시집 가기 전까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이불 속을 뒹구는 늦잠꾸러기로 어머니 등골을 쑤시게 했다. 새벽형 인간으로 개과천선 한 건 챙겨줄 사람이 없기 때문.   글 쓰는 일이 두뇌와 영혼의 노동이라면, 그림 그리기는 강인한 정신력과 육체노동, 체력과의 전쟁이다. 잡사로 힘이 빠지기 전,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일어나 작업을 시작한다. 마음이 백지처럼 욕심 부리지 않아야 정화된 시간에 신선한 작품을 그릴 수 있다. 마음은 요지부동이 아니라 헝클어진 실타래 같아서 아무리 풀어도 처음 시작한 매듭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작품이 잘 되면, 혹시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처럼 되는 게 아닌가 나 홀로 감격하며 교만 떨다가 그림을 망쳐 금새 천상에서 추락한다.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여자로 살던 모지스 할머니는 76세에 그림을 시작해 101세까지 1600점의 작품을 그린 미국 국민화가다. 모지스는 살면서 체험한 모든 기억을 마법처럼 화폭에 담아낸다. 빨래하는 날, 한겨울 단풍나무 시럽 끓이기, 칠면조 잡는 추수감사절, 평범한 시골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축제와 마을 풍경을 어린아이 그림처럼 단순하게 화폭에 담는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이죠”라고 그랜마 모지스는 말한다.     시작을 꿈꾸는 삶은 늘 아름다운 소풍이다. ‘희망사항’은 높고 숭고한 가치가 아니라도 괜찮다. 하고 싶은 일, 꿈꾸던 작은 무엇을 시작하는 용기가 행복이다.     뉴저지에 사는 둘째 딸이 어린 손주 둘 데리고 다니러 왔다. 집 떠난 자식은 내 새끼가 아니다. 달력에 동그라미 쳐놓고 오는 날을 기다리고 체크 마크 하며 가는 날을 셋다. 할머니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생활 방식, 먹는 것, 입는 것, 모든 것이 다른 두 집이 한솥밥 먹으며 달그락 소리 안 내고 버티는 것은 기적 같은 사랑이다. 4월에 왔다 갔는데 두 달 만에 또(?) 왔다. “자주 올게요. 어머니 외롭지 않게”라는 말에 “난 정말 안 외로워. 자주 안 와도 돼”라고 소리칠 뻔 했다. 그들만의 리그에 매달려 얼마나 부대꼈는지 몸살 기운이 돈다.     행복 지수는 순전히 개인 몫이다. 가정, 가족, 단체, 국가별로 통계 낼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다. 돈 벌 궁리, 사업 확장할 계획은 지나간 옛 이야기, 자식들에게 줄려고 근검절약 하는 건 가난한 바보행진, 착한 척, 잘 사는 척, 잘난 척, 이쁜 척, ‘척의 가면’ 벗고, 텃밭에서 싱싱한 채소 뽑아 건강식 해먹고, 사회적인 허울 좋은 올가미에서 벗어나 나를 위해 사는 소소한 즐거움.     행복은 소리 소문 없이 자유란 이름으로 새벽을 연다. 자유는 이슬에 젖어 상큼한 향기로 다가온다. 떠나는 딸의 차를 향해 ‘자유’란 이름으로 손을 흔든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자유 이름 모지스 할머니 행복 지수 육체노동 체력

2023-07-18

[보험 상식] 할머니의 쌈짓돈

얼마 전 타운에서 85세로 하늘나라로 소천한 한 할머니의 장례식이 열렸다. 고인은 40년 전 남편을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고 평생을 홀몸으로 장사하며 5남매를 키워낸  K씨다.   3명의 아들 가운데 2명은 의사, 한명은 변호사로 활동 중이고 딸들도 각자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유복한 집안이다.     지금이야 남들로부터 자식 농사 잘 지었다는 부러움을 받을 정도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K 씨의 고생담은 절절하기 그지없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식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해온 고인은 평소에도 철저한 근검절약 정신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쌀 한톨, 양말 한 짝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고 스스로는 헌 옷을 기워서 입을망정 자식들만큼은 새 옷을 사서 입혔다.     고인이 하늘나라로 떠난 후 자녀들은 어머니 유품에서 서류봉투 속에 고이 간직해 둔 생명보험 증서를 찾아냈다. 자녀들로부터 받았던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꼬박꼬박 부어온 20만 달러의 생명보험이었다. 100만 달러가 넘는 고급 주택에 사는 자녀들의 생활규모에 비하면 결코 많은 돈이 아니지만, 자녀들의 피부에 와 닿는 돈의 가치는 200만 달러 아니 2000만 달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결국 자녀들은 보험금 전액을 형편이 어려운 한인 학생들을 돕기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을 훌륭하게 키워준 어머니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한 것이다.   K 할머니의 얘기는 절대 드물지 않은 우리 부모님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점철된 윗세대들의 헌신이 오늘날의 한인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얼마 전 칼럼에서 ‘끼인 세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현재 40~50대의 한인들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다. 그 의미는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자식들로부터 부양받지 못하는 약간은 억울한 세대가 바로 끼인 세대다. 부모세대에서는 자식을 잘 키워내는 것이 곧 노후 대책의 하나로 여겨졌지만 끼인 세대들은 자식을 잘 키워도 노후대책은 자신 스스로의 몫으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보험적인 측면에서도 이 세대는 끼인 세대가 분명하다. 지금 40~50대의 한인들은 부모들이 K 할머니처럼 생명보험을 가진 경우가 그리 흔치 않고 갖고 있다고 해도 10만 달러 안팎의 적은 액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끼인 세대들은 부모들이 생명보험 없이 돌아가신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우리 부모 세대에서 생명보험 가입이 결코 일반적인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보험이 있어서 보험 혜택이 있다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전혀 섭섭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은 어떤가. 지금 30대 미만의 젊은 층은 훗날 부모가 돌아가신 뒤 보험금을 받는 것이 유대인 사회처럼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물론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생명보험 가입이 더욱 보편화하면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부모들은 다 생명보험이 있는 데 왜 우리 부모만 보험을 하나도 가입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하다. 어쨌든 이 또한 끼인 세대들에게는 억울한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대는 이어서 흐르기 마련이다. 생명보험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사랑과 마음의 표현이다. 지금 본인에겐 혜택이 없어도 자녀들이 득을 볼 수 있다면 아낌없이 베푸는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또 단지 바로 다음 세대뿐 아니라 그다음 세대까지도 생각하는 장기적인 안목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문의:(213)503-6565 알렉스 한 / 재정보험 전문가보험 상식 할머니 쌈짓돈 생명보험 가입 생명보험 증서 보험금 전액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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