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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마녀 할머니

한 달쯤 전에 손주 A가 말했다. “내 꿈에서 할머니가 ‘마녀’로 나왔어.” “뭐라고?” 마녀라는 말에 가슴이 움찔했다. “할머니가 내 친구에게만 잘해줬어.” 친구? 나는 A의 친구를 본 적도 없다. 현실에서 라이벌이 자기 누나일 텐데, 꿈에서 친구로 바뀌어서 나타난 것 같았다.
 
사실 A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건은 주로 학교에서 픽업한 오후 시간에 벌어진다. 나는 큰 애와 붙어 앉아서 숙제하고 책 읽고 산수도 한다. 작은 애는 처음 얼마 동안은 혼자 논다. 그러다가 누나의 숙제 시간이 길어지면 심술이 슬슬 나는 모양이다. 곁에 와서 쿠션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온갖 난리를 친다. 나는 시끄럽다고 할아버지에게 가라고 소리친다. 꼼짝 못 하고 피하던 아이가 요즘은 ‘이이이이 우우우우’ 이상한 소리로 나를 반격한다. 입을 오므리면서 놀리는 소리에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유치원에서 친구들끼리 저렇게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또 야단을 친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 느닷없이 A가 우리 집에 쫓겨왔다. 아들은 책만 열댓 권 들어있는 A의 백팩을 건네주며 말했다. “엄마 아버지는 TV 하루 정도 안 봐도 되지요?” 유치원에서 친구와 싸운 벌로 주말에만 허용하는 특권을 금지했다고 한다. “노 오 티브이, 노 오 게임, 노 오 캔디”라고 한다. 저녁에 아들네는 마침 선약이 있어서, 큰아이는 외할머니네로, 작은 아이는 우리 집으로 보내졌다. 벌을 받는 중이므로, 외가에 같이 보낼 수 없다고 한다.  
 
A가 온 그 저녁에 남편은 자리를 피해주었다. 둘이 잘해 보란다. A는 여기에 누나가 없으니, 안심하고 자기 책을 들이민다. 애가 펼치는 슈퍼맨 책을 보았다. 무슨 이런 슈퍼맨 책이 있담? 애들 그림책이 간단하지 않았다. 수많은 슈퍼맨틀의 특징을 공학적으로 연구해 놓은 무슨 전문적인 도감 같았다. 자잘한 글씨로 기술한 캐릭터를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이거 할머니 못 읽어.” “왜?” “너무 복잡해.” “그냥 읽으면 되잖아.”
 


다행히 공룡 책은 읽어 줄 수 있었다. 그 책 역시 백과사전같이 두꺼웠지만, 그나마 아는 주제라서, 그럭저럭 같이 넘길 수 있었다. A의 백팩에는 한글 숙제도 들어 있었다. 연필을 엉성하게 잡고 ㄱ ㄴ ㄷ을 거꾸로 쓰는 아이를 보면서, A에게 책을 읽어준 적도, 숙제를 봐준 적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A는 할아버지 옆에서 단잠을 자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내 옆은 오지 않는 아이가 할아버지 옆에는 자석처럼 붙어 있다. 아침으로 요거트와 바나나를 넣은 오트밀 와플을 구워 주었다. 바싹하게 구운 와플이 과자 같은지 2개나 먹었다. 와플은 손녀가 좋아하지 않아서 만들지 않았던 메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손녀가 좋아하는 음식만 했던 것 같다. 큰아이가 잘 먹으니 작은 아이도 잘 먹을 줄 알았다. 작은 아이의 첫 마디는 무조건 “오 노”였다. “나 그거 싫어해.” “왜 싫어? 이거 먹어야 해.” 작은 애를 향한 내 목소리는 어느새 올라가 있곤 했다.
 
남편은 두어 번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A가 언제까지나 5살인 줄 알아? 자라서 중학생, 고등학생 될 텐데, 그때 어쩌려고 그래?” 키가 장대 같고 어깨가 우람한 A가 나를 본체만체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어이쿠, 큰일 났다. 지금이라도 만회해야 할 것 같다. 나의 기준은 큰아이에 맞춰져 있었다. 작은 애를 누나 옆에 붙어서 반쯤은 가려있는 애로 여겼던 것 같다. 처음으로 A의 작은 얼굴과 작은 키가 내 눈에 오롯이 들어왔다.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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