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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폭동 재발 막는다

연방정부가 올해 11월 대통령 선거 결과를 연방의회가 내년 1월 초 인증하는 절차를 대통령 취임식 수준의 국가 특별안보 행사로 지정했다.   이는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 인증을 저지하기 위해 그다음 해 1월 6일 워싱턴DC 연방의회 주변에 집결해 시위를 벌이며 의사당에 난입한 사태의 재발을 막으려는 조치다.   비밀경호국은 2025년 1월 6일 워싱턴DC에서 실시되는 선거인단 투표 집계 및 인증이 국토안보부 장관에 의해 국가 특별안보 행사로 지정됐다고 11일 발표했다.   선거인단 투표 집계 및 인증은 당선자가 드러난 이후 밟는 대선의 형식적 절차로, 각 주의 선거 결과를 반영한 선거인단 투표와 상·하원의 인증이 이뤄진다.   비밀경호국의 고위 인사 경호 부서 책임자인 에릭 라나한 특수요원은 “국가 특별안보 행사는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행사”라며 “비밀경호국은 연방 및 주, 지역 파트너들과 협력해 이 행사와 참가자의 안전 및 보안을 보장하기 위한 포괄적이고 통합된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국가 특별안보 행사의 경호와 보안은 비밀경호국이 주도한다.   내년 1월 20일 열리는 차기 대통령 취임식은 이미 국가 안보특별 행사로 지정돼 관련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김은별 기자의회 폭동 의회 폭동 의회 인증 연방의회 주변

2024-09-12

한인 추정 경관, 의회 폭동 유죄 판결

한인 추정 아시아계 경관이 지난 2021년 1월 6일 연방 의회 폭동에 시위대로 참가했다가 유죄를 선고받았다.     지난 23일 연방 검찰 워싱턴DC 지검에 따르면 메릴랜드주 몽고메리카운티 경찰국 저스틴 이(25) 경관이 공공질서 문란과 경관 폭행, 저항, 방해 등 2개 중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외에도 제한 구역 건물 무단 침입, 무질서 행위, 연방 의회 건물 내 무질서 행위 등 3개 경범죄 혐의에 대해서도 죄가 인정됐다.   현재 이 경관은 경찰국 내에서 무급 정직 처분을 받은 상태다.     연방 법원 워싱턴DC 지법(담당 판사 트레버 맥페이든)에 제출된 증거 영상에는 이씨가 폭동 당시 시위대 속에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는 가장 폭력적인 공격이 발생한 곳으로 알려진 연방 의회 서쪽 하단 테라스 문으로 이어지는 아치웨이(터널)에 있었다.     해당 장소에서 이씨는 경찰을 향해 최루탄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비롯한 물건들을 던지고, 손전등으로 불빛을 쏴 혼란을 주기도 했다. 또 그는 메릴랜드 주기가 그려진 마스크를 쓴 채 다른 시위 인파와 함께 경관들을 물리적으로 밀치며 진입을 시도했다.     몽고메리카운티 경찰국은 규정에 따라 이씨를 곧 해직 처리할 방침이다.     이에 앞서 이씨는 지난해 7월 경관으로 근무하던 중 무장한 용의자를 총으로 쏴 조사를 위해 업무에서 배제된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국 측은 “이씨 개인의 일"이라며 “이씨가 폭동에 참가했을 당시에는 경관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경찰국에 따르면 이씨는 폭동 6개월 뒤인 지난 2021년 7월 경찰에 지원했고 이듬해인 1월에 정식 경관으로 채용됐다.     한편, 이씨의 형량 선고는 오는 11월 22일 연방 법원 워싱턴DC 지법에서 진행된다. 김경준 기자아시아계 최루탄 아시아계 경관 의회 폭동 정식 경관

2024-08-25

LA폭동 32년 정치권 침묵…배스 시장 27단어 성명서

LA폭동 32주년을 맞아 정치권이 침묵 또는 망각을 이어가고 있다. 1992년 경관들의 로드니 킹 폭행과 두순자 총격 살해 사건〈본지 4월29일자 A-1면〉으로 사우스 LA에서 촉발된 LA폭동으로 한인 청년 1명을 포함해 60여 명이 사망했으며,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재산상 피해를 남긴 초대형 인재였다.   하지만 올해도 지난해처럼 이를 기억하고 되새겨 재발 방지에 나서야할 정치권은 대부분 입을 닫은 하루였다.   당시 청년으로 사태를 목도했던 존 이 시의원(12지구)은 26일 성명을 통해 “4.29는 우리 모두가 LA 시민이자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했다”며 “특히 한인 사회에는 앞으로도 고통과 아픔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 의원은 동시에 “어떤 이유에서도 이와 같은 폭력과 증오는 앞으로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며 시민의 대표로 한인사회의 대표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캐런 배스 LA시장은 29일 오전 “당시의 아픔을 발판 삼아 더 강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영문 27 단어의 짧은 메시지를 냈다. 백악관과 가주.카운티 정부에서는 폭동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폭동 메시지 폭동 메시지 la폭동 32주년 정부 카운티

2024-04-29

LA폭동 32주기 평화대행진 개최…“다음 세대에 역사 알려야”

“4.29 LA폭동을 겪은 이민 1세대는 고령으로 은퇴하고 있습니다. 잿더미에서 새롭게 한인타운을 일군 아픔과 역사를 다음 세대가 꼭 기억해야지 않겠어요.”   4.29폭동 32주기를 맞아 당시 약탈과 화재가 처음 시작된 장소에서 ‘평화대행진 퍼레이드’가 열린다.     그동안 4.29 평화대행진은 월드스페셜연맹(총재 존 김·사진)이 주최해 왔다. 사우스LA에서 태권도, 검도, 킥복싱 등 무도를 알려온 김 총재는 2년여 만에 평화대행진을 다시 개최한다고 알렸다.     김 총재는 한인사회와 흑인 커뮤니티 간 소통과 지속적인 교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4.29폭동이 발생한 지 32년이 지났고, 많은 분이 그런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며 “하지만 4년 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때 웨스트LA 상가가 약탈당하고 불에 탔다. LA한인타운에는주방위군이 배치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잊고 싶다며 과거의 아픔을 덮어버리면 안 된다. 젊은 세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리고, 여러 커뮤니티가 계속 소통하며 이해를 넓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올해 평화대행진 행사는  27일 오전 11시 열린다. 1992년 4.29 폭동 당시 처음 약탈과 방화가 시작된 상가 주차장(1355 W. Florence Ave)에서 시작한다.     이날 행사는 중앙무대에서 남가주기독교총연합회 목사회장 기도, 한-흑 다민족 커뮤니티 화합 기원 촛불점화, KCBC 기독합창단, 세계탈북인협회아리랑평화통일무용단, 태권도 시범 등으로 시작한다. 이후 참가자들은 다같이평화대행진에 나설 예정이다.     또한 주최 측은 4.29폭동 당시 한인타운 지키기에 앞장선 봉사자를 찾아 ‘제3회 한인타운 지키기상’을 수여한다.   이번 행사에는 흑인 커뮤니티 인사와 단체가 여럿 참여한다. 주최 측은 한인과 단체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강조했다.   김 총재는 “‘사우스LA가 아프리카보다 더 멀다’는 말은 한인사회의 한 단면”이라며 “지금도 사우스LA에서는 한인 1세대의 사업을 이어받은 2세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한인 차세대에게 우리가 겪었던 아픔과 재건 노력을 알려야 한다. K팝 등으로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흑인 커뮤니티와도 더 친근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주최 측은 평화대행진 퍼레이드에 함께 할 한인단체 문의(213-503-2007)도 환영했다. 김 총재는 “한인 청소년 봉사단체가 퍼레이드에 참여하면 1세대가 겪었던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적 효과도 클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평화대행진 폭동 평화대행진 퍼레이드 29폭동 당시 올해 평화대행진

2024-04-15

1·6 의사당 폭동때 입었던 먼지 투성이 양복보며 상원 도전 결심

‘첫 한인 연방 상원의원’의 꿈은 이뤄질 것인가.   연방하원 3선인 앤디 김(뉴저지) 의원이 상원 도전에 나서면서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도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 의원은 3주 전 도전 의사를 밝히고 현역이자 같은 당 출신인 밥 메넨데스 의원을 상원에서 퇴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본지 9월 25일자 A-1면〉   그는 “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더는 묵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2년 전 의사당 폭동 사태와 트럼프 탄핵 등 요동치는 워싱턴 정가의 난맥을 직접 경험한다면 누구든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원 출마, 반가운 소식이다.   “많은 한인들이 응원해주셨다. 감사할 따름이다. 한인들의 목소리가 더 반영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상원 선거 준비는.   “매우 활발하게 시작을 했다. 3주 동안 큰 이벤트도 있었던 덕에 오늘까지 190만 달러를 모으는 실적을 냈으며 이 중에는 상당수 한인이 참여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꿈이 이뤄진다면 동부 지역에서 첫 아시안 연방 상원의원이 되는 셈이다. 뉴저지에는 무려 100만여 명의 아태계 주민들이 거주하며, 이 중에는 수많은 한인도 있다. 지난 2주 동안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그 에너지가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열망을 상원으로 이어갈 것이다.”   -메넨데스 의원에 대한 법적 판단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서두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맞다. 사법적인 절차가 남아있으며 그의 법적인 권리도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제기된 혐의들을 보면 그가 적어도 도의적으로 상원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원 외교위원장으로서 기대되는 자격과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연방 검찰이 그가 다른 나라 정부를 위해 일한다고 판단했다. 공직자로서 명예와 자존심을 파괴한 사람이다. 그가 아직도 중요한 정보와 자료에 대한 접근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그의 퇴출을 요구하고 있다.”   -짐 조던 하원의장 후보의 선출이 가능해 보이나.   “오늘(17일) 아침 첫 투표에서 정족수 미달로 선출이 좌절됐다. 앞으로 여러 차례 투표가 있을 수 있고 내부적으로 조율이 안 된다면 다른 후보가 나올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조던 후보는 자질이 없다고 본다. 극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으며 2020년 선거 결과에 대해 왜곡하는 언행을 해온 사람이다.”   -또 다른 전쟁이 벌어졌다. 백악관(버락 오바마 행정부) 안보팀에서 일했고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도 갔다.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미국은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여전히 힘을 가진 나라라는 것이 확인될 것이다. 어떤 정치인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우방 국가들과 연대를 굳건히 해야 하며 이스라엘도 같은 상황이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를 벌이고 있는 하마스 세력에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   -‘아이들의 아버지’라서 상원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는데.   “아내와 아이들(6살과 8살 아들)에게 항상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출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모두가 이 난국을 헤쳐나가는데 현명하고 헌신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으며 전적으로 응원하겠다고 동의했다. 반드시 승리로 보답할 것이다.”   -2021년 의사당 폭동 사태 때 모습이 화제가 됐다.   “2021년 1월 6일은 정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날이다. 의사당에서 쓰레기를 치우며 ‘이게 우리가 배운 미국의 모습인가’ ‘의사당에서 미국인들이 서로 총칼을 들이대는 것이 맞나’라는 생각을 내내 했다. 국민을 대변하는 나의 일터가 그토록 전쟁터처럼 된 것에 마음 아팠다. 쓰레기 정리는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많은 분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연락해왔다. 여전히 부끄럽다.”   -당시 입었던 푸른색 양복도 화제가 돼서 스미스소니언에 기증했다고 들었다.   “1월 6일 레이번 의원회관과 로텐더홀에서 그 옷을 입었고, 일주일 후인 13일 트럼프 탄핵 투표 시 입었다. 그리고 그 옷은 먼지와 땀이 배인 채 집 옷장에 걸려있었다. 왠지 다시 입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 와중에 스미스소니언에서 연락이 왔고 기증하게 됐다.”   -연말 세일에 샀다고 하던데 혹시 가격을 기억하나.   “50% 할인해서 200달러 정도 주고 샀을 것이다. 그 옷은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된 후 내가 두 번째 하원 임기를 시작하며 산뜻하고 기쁜 마음으로 직접 샀던 기억이 역력한데, 결국 우울한 역사의 증거로 남게 돼 유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옷은 국민에게 진 마음속 깊은 빚과 부끄러움으로 남았고 상원 도전의 밑받침이 된 셈이다.”   -‘한인 첫 상원의원’이 이제 나올 때가 된 것인가. 아니면 오래된 숙원인가.   “당연히 숙원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 해야 했을 일이라고 믿는다.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한인들이 큰 역할을 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왔다. 앞으로 진출할 2~4세들에게도 큰 귀감이 된다는 차원에서 우리에게는 미뤄둔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반드시 이번 기회에 그 유리 천장을 뚫어야 한다고 본다.”   -예전에 김 의원을 지지했던 머피 뉴저지 주지사의 부인이 최대 경쟁자로 부각됐다. “연락한 지가 꽤 됐다. 그들의 결정을 존중한다. 많은 일을 해온 분들이다. 하지만 나는 3선으로 하원 경력을 갖고 있고 유권자들은 새로운 세대가 상원에 진출해 새로운 정책을 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믿는다.”   -한인사회에 지지를 호소한다면.   “꿈과 용기를 가진 한인 상원의원이 탄생하는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시면 좋겠다. 모든 국내 한인과 전 세계 해외 한인들에게도 제가 믿고 있는 것에 동의하신다면 지원과 관심을 당부드린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감사하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투성이 폭동때 상원 도전 상원 출마 의사당 폭동

2023-10-17

[중앙시론] 상처와 교훈을 동시에 준 ‘4·29 LA폭동’

지난해 4월은 사이구(4·29) 폭동 30주년으로 정말 바쁜 시간을 보냈다. CNN, LA타임스, NPR, AFN 등을 비롯해 한인 언론들, 그리고 한국 언론과도 인터뷰를 했다. 특히 CNN은 2시간짜리 사이구 30주년 특집 다큐를 제작했는데 1시간은 한인 사회를 집중 조명했다. 폭동 이후 30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한인 사회 모습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만큼 한인 사회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과거 한·흑 갈등에 질문의 초점을 맞췄던 것과 달리 작년에는 한인 사회의 변화와 위상에 대한 궁금증이 주를 이뤘다는 것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가 급증하면서 아시안 아메리칸, 특히 한인 사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UCLA 아시안 아메리칸 센터는 사이구 폭동 30주년을 맞이해 한인 기자들의 시각으로 본 특집 편저 책을 준비했는데 필자에게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논문을 써 달라는 부탁이 와 몇 번의 수정 작업을 한 후 최근 출판이 되었다. 이 책의 앞뒷면은 퓰리처상을 2번이나 수상한 강형원 전 LA타임스 기자의 사진으로 꾸몄다. 폭동 당시 한인들이 합심해 한인 상가의 불을 끄는 모습이다.  당시 한인 타운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하지만 소방차와 경찰이 출동하지 않아 한인들 스스로 화재 진압에 나서야 했다. 이 사진은 당시 한인 사회의 피해에 대한 관계 기관의  무관심과 방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논문을 통해 사이구는 흑·백의 문제를 넘어 한인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교훈을 던져준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는 31주년이라 별다른 행사가 없었다.  그런데  31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이구를 역사적으로 되새기며 차세대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이 너무 슬프다. 사이구 폭동은 미주 한인 사회 100년사에서 가장 큰 상처와 교훈을 준 역사적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가 기억하며, 차세대들에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될 공간이 없는 것이다.   한미박물관은 1990년대 이후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2012년 10월 LA시로부터 한인타운 6가와 버몬트의 시 소유 주차장 부지를 1년 1달러의 임대료로 50년간 장기임대를 받았다. 한미박물관 건립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이어 본격적인 기금 모금이 시작되었고 한인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호응을 얻은 듯했으나 설계가 4번이나 바뀌는 등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이는 커뮤니티 사업으로 진행되며 성공적인 기금 모금 활동 등을 통해 완공한 일미박물관, 아르메니아박물관과 대조된다.     일미박물관은 일본계 커뮤니티, 정치권, 일본의 다국적 기업이 합심해서 이루어낸 훌륭한 역사적 업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00대대 출신으로 일본계 미국인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던 고 김영옥 대령도 일미박물관 건립에 큰 역할을 했고, 그는 한미박물관 설립 사업 초기 배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글렌데일의 아르메니안 박물관은 사업 시작 7년 만에 문을 열어 한인 사회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성공적인 기금 모금과 정치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밑바탕이 됐다.     한미박물관이 계획대로 완공되었다면 사이구 관련 각종 행사의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행사는 물론 폭동 관련 전시물과 강연,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한인 사회가 경험한 아픔을 차세대와 타 커뮤니티와 공유하고 함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차세대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사이구 폭동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차세대들에 올바로 알릴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미박물관은 일부 이사들이 아니라 한인 사회가 주인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기금 모금 등에 차세대의 참여가 절실히 요구된다. 필자는 한미박물관등의 건립과 운영은 차세대들이 주도하고, 1세대들은 기금 모금과 정부 등의 매칭 펀드 확보에 주력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이구 폭동 31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제 우리의 숙원인 미주한인사 정립 및 보존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역사를 모르면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배처럼 정처 없이 표류하게 된다. 상처와 교훈을 동시에 던져준 사이구의 역사적 의미를 통해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 확립해야 한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은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역사의식에서 출발하고 가능하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la폭동 상처 한인 사회 사이구 폭동 한인 언론들

2023-05-01

4·29 ‘포스트 트라우마 센터’ 세운다

“그날, 그때를 기억하는 건 여러분들뿐입니다. 목소리를 내주세요.”   LA한인타운을 유린한 4·29폭동이 일어난 지 벌써 31년이 지났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HK 리 다큐영화 감독은 매년 나오는 폭동 이야기에 회의감이 들었다. 미래를 위한 포부는 없이 과거의 아픔에 멈춘 것은 답이 아니라고 느꼈다.     26일 리 감독은 “4·29폭동에 관한 책들도 많고 3000여건의 상담 자료도 있지만 모든 게 다 그저 기록일 뿐”이라며 “그걸로 끝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해답이 없으면 이런 상황은 또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 감독은 조만철 정신과 전문의, 폴 이 작가와 함께 아이디어를 냈다. 한인사회에 ‘포스트 트라우마 연구센터(이하 연구센터)’를 설립하자는 것이다.     조만철 전문의는 폭동 당시 500여명의 피해자를 상담한 5명의 정신과 전문의 중 한 명이며, 이 작가는 폭동의 도화선이 된 ‘두순자 사건’의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포스트 트라우마 연구센터는 미주 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재난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을 상담하고 전문가들과 협업해 사회적·범죄학적·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예방 및 치료 프로그램을 이어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리 감독은 “LA폭동은 1965년 와츠(Watts) 폭동 당시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있다”며 “남 탓만 하며 보상받는 것에 치중해선 안 된다. 미래를 예방하지 않는다면 재난은 되풀이될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4·29폭동 피해자들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정신적인 피해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공유의 힘이 크다”며 “본인이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도 좋다. 얼마든지 나눠달라”고 독려했다.     이들은 피해자들의 사연을 기록한 책과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리 감독은 “오는 2024년쯤 관련 다큐 영화가 개봉할 예정”이라고 전망했다.     4·29폭동과 관련해 사연을 접수할 한인들은 조만철 박사(310-713-8382)나 크리스토퍼 리 감독(213-925-3003)에게 연락하면 된다.   한편, ABC7뉴스는 25일 한인 부부가 운영하는 잉글우드 지역 ‘S&H 리커스토어’의 4·29폭동 극복 스토리를 전했다. 피해 업주인 서성호·경옥 부부는 끝까지 가게를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30년 넘게 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부부와 흑인 직원 리차드 힉스의 끈끈한 우정은 지역 사회에서도 알려지면서 지난해 이들의 얼굴을 그린 벽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본지 2022년 4월 29일 자 A1면〉     피해 업주의 아들인 폴 서는 가주법무부 차관 검사(deputy attorney general)이자 랜초팔로스버디스 시의원이다.   그는 “부모님은 절대 분개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며 “이제 우리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때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장수아 jang.suah@koreadaily.com이야기 폭동 폭동 이야기 29폭동 피해자들 29폭동 극복

2023-04-26

[프리즘] LA폭동 30주년을 생각한다

1965년 8월 11~16일 사우스LA의 남쪽 끝자락 와츠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경찰이 음주운전으로 의심되는 흑인 운전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시위로 34명이 사망하고 건물 600여 채가 약탈과 방화로 파괴됐다. 당시 피해자는 상당수 유대계였고 재산 피해가 현재 가치로 3억22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 원인으로 흑인과 유대계의 인종갈등이 지목되지 않았다.     약 30년 뒤인 1992년 4월 29일~5월 4일 LA폭동이 발생했다. 경찰은 추격전 끝에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60회 이상 구타했지만 4명 모두 무죄 평결을 받았다. 무죄 소식과 함께 사우스센트럴에서 시작된 폭동은 한인타운까지 확산하며 한인 업소만 2300여 곳이 불타거나 약탈을 당했고 초기부터 원인으로 한흑 인종갈등이 규정됐다.     두 폭동 모두 근본적인 원인은 흑인을 향한 경제·사회·사법의 구조적 소외나 차별의 누적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와츠폭동의 근본 원인으로 수십년간 누적된 차별을 지목한다. 1940~1965년 주로 남부 출신이 이주해 오면서 LA카운티 흑인 인구는 7만5000명에서 65만 명으로 급증했지만 이중 60%가 정부 보조를 받을 정도로 소외됐다. 당시 LA경찰국(LAPD) 윌리엄 파커 국장은 시위대를 “동물원의 원숭이”라고 불러 폭동에 기름을 부었다.   LA폭동의 근본 원인도 흑인(혹은 라티노를 포함한)의 경제적, 사회적 소외다. 여기에 LAPD의 ‘망치작전’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LAPD는 1984년 LA올림픽을 앞두고 갱단을 소탕하는 망치작전을 펼쳤는데 지역적으로는 사우스센트럴과 이스트LA에 집중됐다. 망치작전은 사실상 1990년까지 계속돼 5만 명 이상이 체포됐지만 대부분 기소도 되지 않았다. 이 기간 젊은 흑인 남녀의 체포 건수는 와츠폭동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로드니 킹 과잉진압 경찰 무죄 평결은 오랜 기간 누적된 경찰에 대한 불신을 폭발시켰다.   폭발은 작은 불꽃이 퉁겨질 때 일어난다. 하지만 오랜 기간 누출돼 방을 가득 채운 가스를 탓하지 않고 작은 불꽃 하나를 탓한 것, 그것이 LA폭동 당시의 시각이었다.   1990년대. 인구가 급증한 한인은 다른 소수계와 접촉면이 늘어났다. 갈등 가능성도 당연히 높아졌을 것이다. 급증한 한인 업소 중에 흑인 고객과 갈등이나 충돌을 빚은 곳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폭동이 발생하자 흑인 고객이 자발적으로 지켜준 한인 업소도 적지 않다. 한인이라서 갈등이 생긴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폭동의 휘발성이 높은 상황에 한인이 있었다.   지난달 29일은 LA폭동 30돌이다. 30돌 행사가 한인 커뮤니티의 역량과 소망을 모두 담은 입체적인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고 산발적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럴만하다는 수긍도 간다. 그동안 쌓아온 정치력과 경제적 성장, 네트워크가 작동한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한인타운은 이미 경제적으로 여러 인종이 이익을 공유하고 있어 폭동을 방치해도 되는 수준을 넘어섰다.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색깔을 가진 매력적인 지역으로 변모했다.     폭동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이 세워지지 않은 점은 더 아쉽지만 박물관 추진의 모멘텀이 약해진 것 또한 현실이다. 어쩌면 소프트파워로도 충분히 참극을 막을 역량이 된다고 안도했을까. 폭동을 기억하는 2세 위주의 할리우드 한인들이 30돌 행사를 여는 것을 보며 우리의 기억이 결국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생 때 폭동을 봤던 한인 배우 존 조가 폭동을 소재로 출간한 소설 ‘트러블메이커’도 개인이 세우는 저마다의 박물관일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아서, 비난을 받더라도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한인회가 나섰더라면 박물관이 지어졌을까 딴생각을 한다.   그래도 두 가지는 성난 얼굴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는 LAPD가 마치 흑인의 분노가 소진될 때를 기다리듯 폭동을 방치하다 끝내 관할지역을 포기하고 경계선 끝에 가 베벌리힐스를 지킨 것. 또 하나는 주류 언론이 폭동 초기부터 로드니 킹이 구타당하는 장면과 거의 폭동 1년 전에 일어난, 한인 업주가 흑인 10대에 총격을 가한 사건을 계속 언급해 피해자 흑인-가해자 한인 이미지를 연결했다는 점이다. 안유회 / 사회부장·국장프리즘 la폭동 생각 la폭동 당시 한인 업소 폭동 모두

2022-05-01

[시론] 폭동 30주년…남겨진 과제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우리에게 악몽이었던 4·29폭동 30주년을 맞이했다.     폭동 30주년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CNN, LA타임스, NPR, AFN 등 미 주류언론과 한국언론, 미주 한인언론 등 다양한 매체였다. 특히 CNN은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인데 1시간은 한인사회를 집중 조명한다고 했다. 30년 전 상황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 연구실 문을 여는 순간 전화 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어떻게 생각하냐?(What do you think?)"며 다짜고짜 물었다. 필자는 “무슨 질문이냐?"고 되물었다.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들의 '무죄 평결(Not Guilty)'에 대한 기자의 질문이었다. 필자는 그날 오후 6시 앤젤라 오 변호사와 함께 한인식당 우래옥에서 젊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흑 갈등'에 대한 특강을 하기로 돼 있었다.     필자는 무죄 평결로 사태가 심각하게 번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면서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8시쯤 우래옥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101번과 10번 프리웨이 일부가 폭도들이 점거해 폐쇄됐다면서 빨리 피신하라는 전화였다. 젊은 유대인들에게 사태가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으니 프리웨이를 타지 말고 일반 도로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미주 한인들은 4·29폭동을 경험하면서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다인종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도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리안아메리칸 즉 미주 한인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면서 주인 의식을 갖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행사하기 시작했다.   30년이 지난 2022년 한인타운은 완전한 재기에 성공했고 한인사회는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미주 한인 인구는 이제 거의 200만 명에 근접하고 있고 연방 하원의원 4명을 탄생시켰으며 LA시의원도 2명 배출했다.     4개로 쪼개졌던 한인타운이 한 개의 지역구로 통합돼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는 성과도 올렸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아시안 증오범죄가 크게 증가하면서 한인들도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코로아19 팬데믹을 '쿵플루(Kung-flu)' 또는 '차이나 바이러스(China Virus)'라고 공식 석상에서 많이 언급하면서 아시안 인종혐오 범죄를 조장하기도 했다.     30년 전에는 사우스센트럴과 한인타운이 불에 탔지만 2020년 흑인 시위 때는 백인 부촌이 시위대의 공격 대상이 됐다. 백인들에게 인종 문제의 책임을 느끼고 해결책에 동참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폭동 3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인사회는 더 이상 '희생양'이 돼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한다. 우리의 힘을 기르고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해 권익을 보호하고 차세대에게 희망찬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4·29가 남긴 교훈이다. 장태한 /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시론 폭동 과제 무죄 평결로 29폭동 30주년 한인식당 우래옥

2022-04-28

[사설] 폭동 30주년…재도약의 기회로

한인 이민사의 가장 큰 시련이었던 4·29폭동이 일어난 지 30주년을 맞는다. 흑인 용의자를 무차별 폭행한 백인경찰에 대해 무죄 평결이 내려지면서 폭동은 시작됐다. 무죄 평결로 흑백간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고 폭도들의 파괴와 약탈은 한인커뮤니티를 기반부터 흔들어 놓았다. 아직도 당시의 분노와 울분이 남아 있는 피해 한인들이 많다.     아메리칸드림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도 한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폭동이 남긴 상처를 치유해 갔고, 새로 시작하는 계기로 삼았다. 다문화 사회에서 인종간 교류와 화합의 중요성도 뼈저리게 배웠다. 정치력 부재로 무력하게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은 다수의 한인 정치인 배출로 이어졌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4·29의 교훈은 아직도 생생하고, 교훈은 항상 과제를 남긴다. 소수민족으로서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커뮤니티의 미래를 위한 계획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2세들에게 폭동의 역사를 어떤 의미와 교훈으로 남겨야 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폭동의 잿더미에 일어난 한인사회는 남가주 소수계 중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영향력 있는 커뮤니티로 발전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이제 폭동 30주년을 넘어 또 다른 30년을 맞는다. 역경과 시련의 지난 시간을 뒤로 하고, 재도약을 위해 다시 힘찬 출발을 시작해야 할 때다. 사설 재도약 폭동 폭동 30주년 한인 이민사 무죄 평결

2022-04-27

[기고] 4·29폭동이 남긴 과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지역에 천재지변이나 사회적 대형 소요사태가 발생하면 위정자들은 으레 사회 구성원 중 소수민족 또는 소수집단을 골라 희생양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그들에 대한 근거 없는 혐의와 소문을 퍼뜨려 성난 군중으로 하여금 그들을 복수와 분풀이의 대상으로 삼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는 언론의 역할이 크다. 30년 전에 일어난 4.29폭동 당시 우리 한인들이 흑인 폭도들의 표적이 된 이면에는 주류방송과 신문사의 역할이 컸다. 성난 흑인들이 폭동을 저지른 원인은 로드니 킹을 인정사정 없이 폭행한 4명의 경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이 평결이 두순자 사건 판결과 공교롭게도 겹쳤다.     두순자 사건 판결이 난 후 1주일 내내 주류 일간지는 한인이 운영하는 업소에 1달러19센트 오렌지 주스 한 명을 사러 들른 15살밖에 안된 흑인 소녀와 가게 주인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보도했다. 신문은 업소 주인과 고객의 다툼 끝에 주인이 어린 소녀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보도를 연일 계속했다. TV도 이런 내용의 영상을 1주일 내내 방영했다.     두순자 사건을 다룬 재판 과정에서는 사실과 다른 점들이 밝혀졌다. 15살밖에 안되는 어린 소녀로 묘사된 라타샤 할린스는 실제로는 나이답지 않게 덩치가 크고 건장했다. 업소 주인을 위압할 정도였고 연약한 가게 주인을 주먹으로 가격해 두 번이나 쓰러뜨린 장면이 방영되었다.     또한 흑인지역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강도에 살해되고 시달렸는지도 알려졌다. 목숨은 잃지 않더라도 매일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르는 공포 속에 제대로 장사를 못한다는 사실 등이 법정 심리 중에 논의됐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판사는 주로 어린이 복지문제를 다루던 변호사였다. 그는 언론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밝혀지는 것을 보면서 가벼운 형량을 판결했다.     한인 커뮤니티는 4.29 폭동의 희생양이 되어 인명과 막대한 재산 피해를 겪었다. LA 전체가 당한 8억 달러의 피해 중 한인 피해액이 4억 달러였다. 2300개 이상의 한인업체가 피해를 당했으며 그 중 많은 점포가 문을 닫았다.   4.29는 한인 이민 역사에 경종을 울린 가장 큰 사건이다. 한인들은 이 같이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전보다 더 발전하는 저력을 보였다. 또한 4.29는 우리로 하여금 정치력 신장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은 있다. 주류사회에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할 대변인이 필요하다. 4.29 폭동 때에도 앤젤라 오 변호사가 우리의 사정과 억울함을 주류사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앞으로도 한인 커뮤니티에서 더 많은 정치인들이 배출돼야겠지만 이와 함께 사명감을 갖고 커뮤니티의 의견과 상황을 주류사회나 매체에 전달할 대변인도 필요하다.     한인사회에는 여러 장학재단이 운영돼 학생들의 학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런 장학금의 일부를  이들 커뮤니티 대변인 배출에 사용한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주류에 전달하는 효과적인 창구가 될 것이다. 서동성 / 변호사기고 폭동 과제 한인 커뮤니티 한인 피해액 29폭동 당시

2022-04-25

[로컬 단신 브리핑] '우수'에 찾아온 시카고 겨울폭풍 외

▶'우수'에 찾아온 겨울폭풍… 20여개교 온라인수업           봄을 알리는 절기 '우수'(2월18일)를 앞두고 찾아온 겨울폭풍으로 크고 작은 피해가 잇따랐다. 각 학교는 17일 하루 교실수업을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했다.     국립기상청은 지난 16일 밤부터 18일까지 록키산맥 동부 덴버에서부터 시카고•디트로이트•버팔로를 포함하는 오대호 지역, 뉴잉글랜드 지방에 강풍을 동반한 폭설 또는 얼음비를 예보했다.   중서부 지역에는 시간당 1~2인치의 폭설이 쏟아져 '시계 0'(whiteout) 상태가 되기도 했다. 특히 락포드와 우드스탁 등 일리노이 북부 지역에 많은 눈이 내렸으며 일부 지역은 8인치 이상의 적설량을 기록했다.     시카고 기후 공식 측정지인 오헤어 국제공항에는 3.6인치의 눈이 예보됐다.     이에 따라 시카고 인근 블루밍데일, 빌라파크, 오크브룩, 버 리지, 벤슨빌 지역의 20여개 학교가 17일 하룻동안 휴교하고 온라인 수업을 진행했다.     교통 당국은 17일부터 기온이 떨어져 일부 지역 도로는 눈과 얼음비가 얼어 붙어 운전하기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며 운전자들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2020 시카고 폭동 선동 20대 남성 유죄 인정     2020년 여름 시카고 일대 업체들은 물론 주민들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던 대규모 폭동 및 약탈 등을 주도한 20대 남성이 혐의를 인정했다.    제임스 매시(23)는 지난 15일 연방법원에서 체포된 지 약 1년만에 유죄를 인정했다.     시카고 선타임스는 “메시는 최대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을 수도 있었지만 혐의를 인정함으로써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매시는 지난 2020년 8월 9일 페이스북 등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카고에서의 이틀 간의 폭동을 주도하며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당시 그는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장갑을 끼고 다운타운으로 오라"며 "나는 물건을 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썼다.   검찰은 법정에서 매시가 타이어 지렛대를 들고 유리창을 깬 후 의류 매장, 핸드폰 업소 등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는 영상들을 공개했다.     당시 폭동과 약탈로 이틀 사이 2명이 총에 맞고, 10여명의 경찰이 부상했다. 또 100여명이 체포됐다.     매시는 오는 5월 10일 법원에 다시 설 예정이다.        ▶드폴대 브루노 감독,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40년 가까이 드폴대학 여자 농구팀을 이끌고 있는 더그 브루노(71) 감독이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헌액된다.     일리노이 주 노멀 출신인 브루노 감독은 지난 14일 명예의 전당 입성 소식을 들은 후 "매우 큰 영광이다. 선수 시절 나를 이끌어줬던 감독들은 물론, 나와 함께 해준 코치들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드폴대 졸업생인 브루노 감독은 1976년~1978년 드폴대 여자농구팀 감독을 지낸 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로욜라대학 남자농구팀 코치를 지냈다.     이후 다시 드폴대 여자농구팀 감독으로 복귀한 그는 통산 731승357패를 기록 중이다. 5번의 빅 이스트 토너먼트 우승(2014-2015, 2018-2020)과 2012•2016올림픽 여자대표팀 코치로 금메달을 일궈냈다.     올 시즌 20승7패를 기록 중인 드폴대는 브루노 감독 지휘 아래 25번째 NCAA 토너먼트 진출을 앞두고 있다.     그는 "학생들은 내가 은퇴하면 나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은퇴하고 나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말들을 할 것을 알고 있다"고 농담을 던진 후 "지금 당장은 명예의 전당이나 은퇴보다 오는 20일 빌라노바 대학과의 경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메트라 기관사 상대 강도질       총을 들고 통근열차 '메트라'(Metra) 기관사를 협박, 현금 등을 빼앗은 남성이 체포됐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15일 오후 2시경 시카고 다운타운 아트 인스티튜트 인근 '밴 뷰렌'(Van Buren) 역의 '엘렉트릭 라인'(Electric Line) 노선 열차에 탑승한 강도가 총을 꺼내 기관사를 협박한 후 현금을 강탈, 도주했다.     경찰은 이튿날인 16일 새벽 시카고 남부 칼루메 시티에서 용의자를 체포했다.  Kevin Rho 기자로컬 단신 브리핑 겨울폭풍 시카고 시카고 폭동 시카고 인근 시카고 디트로이트

2022-02-17

트럼프 책사 스티브 배넌, '의회 폭동 사태' 증언 거부로 기소

(서울=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책사였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지난 1월 6일 의회 폭동 사태를 조사 중인 하원 특별위원회의 증언 요구를 거부해 기소됐다. 12일(현지시간) AP, AFP통신 등에 따르면 미 법무부는 의회 증언을 요구하는 소환장을 무시하고 관련 서류를 제공하지 않는 등 2건의 모욕 혐의로 배넌을 기소했다고 이날 밝혔다. 앞서 하원 특위는 지난 9월 23일 배넌 등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 4명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극우 인사 배넌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백악관 수석전략가와 고문을 지냈다. 특위는 그가 의회에 난입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과 백악관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특위는 의회 폭동이 벌어지기 전날 의회의 조 바이든 대통령 대선 승리 인증을 막기 위해 모인 모임에 참석했고, 당시 그가 "내일은 모든 지옥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을 지목했다. 특위의 조사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행정 특권을 주장하며 참모들의 증언과 의회의 문서 접근을 막기 위해 소송 등을 하고 있고, 배넌 이를 앞세워 행정 특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의회에서 출석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이에 하원은 이 문제를 법무부에 넘겼다. 다만 그동안 사안이 가진 복잡한 정치적 배경을 고려하면 법무부가 실제 행동에 나설지는 불분명하다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법무부는 이날 '법치주의'를 앞세워 배넌의 기소 사실을 밝혔다. 혐의가 확정될 경우 각각 1개월∼1년의 징역형이 부과될 수 있다. 메릭 갈런드 법무부 장관은 성명에서 "나는 취임 첫날부터 직원들에게 법무부가 법치주의를 준수하고 사실과 법을 따르며 법에 따른 공정한 정의를 추구한다는 말과 행동으로 미국인들에게 함께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며 "오늘의 기소는 이런 원칙에 대한 법무부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nomad@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트럼프 책사 의회 증언 의회 폭동 트럼프 행정부

2021-11-12

4불짜리 칼에서 폭동이 시작됐다

지난해 발생한 볼티모어 폭동의 도화선은 일반 가게에서 판매하는 4달러짜리 칼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프레디 그레이가 소지한 칼은 체포 당시부터 기소 경관들에 대한 법정 공방 때까지 전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소지 여부의 적법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된 칼(사진)을 볼티모어 경찰이 전격 공개했다.  경찰이 공개한 그레이가 소지한 칼은 칼날이 3인치 정도며, 일반적으로 보조 칼(assist knife) 또는 구조용 보조 칼로 불리고 있다. 소매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체포 당시 그레이가 소지한 흉기는 용수철이 들어 있어 튀어나오듯 칼날이 나온다고 밝혔다. 볼티모어 시내에서는 불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경찰의 설명과는 달리 그레이가 소지한 칼은 현행법상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관련 경찰 6명을 기소했다.   볼티모어 순회법원은 경찰관에 대한 재판을 진행해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후 나머지 3명의 경관에 대한 기소를 철회했다. 무죄 판결을 받은 경관들은 매릴린 모스비 검사장을 직권 남용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연방 검찰은 혐의가 없다며 각하했다.   한편 그레이는 지난해 4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붙잡혀 호송차로 이송 중 목뼈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졌다. 그의 장례식 후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다.   허태준 기자

2016-10-19

'프레디 사망' 경찰 "무죄"…볼티모어 흑인폭동 도화선

볼티모어 흑인 폭동의 도화선이 된 프레디 그레이(사망당시 25세) 사망사건으로 기소된 경찰 6명 중, 두 번째로 법정에 선 에드워드 네로 경관(30)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그레이는 지난해 4월 경찰에 체포된 뒤 호송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도중 척추 중상을 호소했지만 이는 무시됐고 결국 약 1주일 뒤에 목숨을 잃었다. 그레이의 죽음을 계기로 볼티모어에서는 경찰의 직권 남용이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약탈과 방화를 수반하는 대규모 폭동사태로 이어졌다. 23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순회법원은 그레이 사망의 가해 경찰관으로 폭행혐의로 기소된 네로 경관이 그레이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작은 역할만 했다면서 그의 주요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판결했다. 이날 선고는 배심원 평결 없이 판사의 판결만으로 이뤄졌다. 베리 윌리엄스 판사는 "범죄가 발생하는 당시 네로 경관이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다"면서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볼티모어 순회 법원은 지난해 12월 다른 피소 경관 윌리엄 포터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언했다. 법원은 나머지 4명의 관련 경찰관들에 대한 재판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이번 판결로 인해 흑인 인권단체의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16-05-23

'프레디 그레이' 관련 경관 무죄

볼티모어의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 사망사건'에 연관된 경관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순회법원은 23일, '프레디 그레이 사망사건'으로 기소된 경관 6명 가운데 한 명인 에드워드 네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산호세 머큐리가 이날 인터넷판에서 보도했다. 이날 선고는 배심원 평결 없이 판사의 판결만으로 이뤄졌다. 담당 판사는 네로 경관이 그레이 체포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네로 경관은 폭력과 직권 남용 등 모두 4건의 혐의로 기소됐었다. 프레디 그레이는 지난해 4월 경찰에 체포된 뒤 호송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도중 척추에 중상을 입었고 약 1주일 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지역 흑인사회에서는 경찰의 직권남용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약탈과 방화를 수반하는 대규모 폭동으로 사태가 커져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었다. 볼티모어 순회 법원은 지난해 12월 다른 피소 경관 윌리엄 포터에 대한 재판에서 배심원단이 포터의 유·무죄 여부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판 무효를 선언한 바 있다. 관련 경관의 재판에서 잇달아 실형이 선고되지 않은 결과여서 앞으로 흑인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되고 있다. 이날 법원 앞에는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소수의 시위대가 있었고 법원 판결 이후 일부 시위대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물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머지 4명의 관련 경관에 대한 재판은 올해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김병일 기자 kim.byongil@koreadaily.com

2016-05-23

폴 에드워드 네로 경관, “무죄” …볼티모어 시장 “주민들 자제” 요청

프레디 그레이 사망사건으로 기소된 경찰 6명 중 하나인 폴 에드워드 네로(30) 경관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23일 오전 볼티모어 순회법원 베리 윌리엄스 판사는 검찰이 기소한 4건의 혐의에 대해 “유죄로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면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후 네로 경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변호인들과 껴안고 기쁨을 나눴다. 마크 자이온 변호사는 “네로 경관의 악몽같은 나날들이 마침내 끝났다”고 네로 경관과 가족들에게 축하를 전했다. 스테파니 로울링 블레이크 볼티모어시장은 주민들에게 "판결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기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시장은 성명서에서 ”사법부의 판단을 인정해야 하며, 무죄판결을 받은 네로 경관의 직무 유지 여부에 대해서는 경찰국 위원회에서 판단할 것“이라면서 ”시정부는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주민들과 업소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충분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볼티모어시 경찰국 T.J. 스미스 대변인은 무죄판결을 받은 네로 경관은 “사건으로 기소된 5명의 재판이 끝나고 경찰국 내사과의 조사가 완결될 때까지 내근직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세용 기자

2016-05-23

“상처 크지만, 한인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4월 볼티모어 폭동이 한인 사회에 남긴 상처는 여전히 크고 현재 진행형이다. 비록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정상을 되찾았지만, 아직 한인 업소 중 일부는 불에 탄 가게를 열지 못한 곳도 있고, 시 정부를 상대로 한 피해 업소들의 소송도 한창이기 때문이다.   폭동 1주년을 맞아, 한인들이 바라본 볼티모어 폭동의 의미와 당시 대응, 앞으로 한인사회가 나가야 할 과제 등을 폭동 당시 맨 앞에서 활동한 이들을 통해 짚어본다. 좌담회는 1년 전 바로 그날인 27일 오후 3시 메릴랜드 총국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편집자 주>    좌담회 참석자:  백성옥 MD 한인회장  송기봉 MD 식품주류협회 회장  최향남 한인 여성회 회장  찰리 성 변호사  진행 허태준 기자    -꼭 1년 전이다. 지난해 볼티모어 폭동은 한인사회에 많은 문제점과 도전 과제도 던져줬다. 지난 1년간 한인사회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    송기봉(이하 송): “긍정적인 부분은 협회 회원 가입이 조금 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바뀐 것이나 달라진 부분은 없다.”   찰리 성(이하 성): “한인 사회에 큰 변화는 없다. 다만 상처만 계속되고 있다. 비즈니스 환경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피해만 더 커졌다.”   백성옥(이하 백): “모든 일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 같다. 침체 되면 침체했지 좋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최향남(이하 최): “한인사회가 당시에도 볼티모어의 문제로 한정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지금도 하나도 안 변했다.”    -폭동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한인사회에서 본 볼티모어 폭동 원인은  성: “단순히 프레디 그레이 사망이 원인이 아니다. 70년대 이후 공장 지대가 떠나면서 일자리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사실상 고아들이 됐다. 실업률과 범죄, 마약이 혼합된 악순환의 고리에서 그레이가 도화선이 됐다.”   최: “못 배우고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연쇄적인 문제들이 결합해 일어났다.”   백: “볼티모어에서만 30년을 살았다. 흑인들은 피해 의식이 크고, 항상 핑곗거리를 찾는 것 같다. 그레이를 통해 낙담을 폭력으로 분출했다.”    -폭동사태를 처음부터 경험했다. 당시 폭동에 대처하는 한인사회의 모습, 어떠했나.  최: “처음으로 겪는 상황이다 보니 초기에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있었다. 특히 주류사회에 한인들의 현황과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2세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또다시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배우고 고민해야 한다.”     백: “한인 부모들은 2세들에 자신의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고생할망정 자식들은 일을 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의 상황을 알게 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알려줄 필요가 있다.”   성: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한인 커뮤니티가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러워했다. 다만 초기 일 처리 과정에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도 한다. 가령 일부 행사의 경우 실질적인 도움이 없었다. 특히 각 기관이 약속한 부분을 확인하고 이행하는지를 따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   송: “당시에는 주위에서 무엇을 해준다는데 기대가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피해를 당한 한인들의 삶이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세금 보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준비됐더라면 쉽게 권리를 찾았을 것이다.” -1주년을 맞아 볼티모어 피해 상인들을 둘러봤다. 많은 이들이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는 볼티모어 한인 비즈니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백: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의 세금 보고는 예전보다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영세 비즈니스는 운영 방법을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은 사실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대책은 없었다. 이번 폭동 사태를 계기로 미래를 내다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폭동 관련 소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성: “처음 소송에 참여한 65개 업소 중 15개 업소가 빠졌다. 지금은 50개 업소가 소송을 진행 중이다. 올 초 시 정부에서 소송 참여 업소들의 구체적인 피해 내용을 요구했다. 3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최근 시 정부에 전달했다.” -이번 폭동에서 한인들의 피해가 컸다. 한인 업소들이 타깃이 된 것인가.  송: “한인 업소들이 타깃은 아니다. 폭동이 발생하고 이동하는 선상에 한인 업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흑인들이 필요로 하는 주류나 뷰티 서플라이 업소들이 많이 당했다. 대부분 한인이 운영한다. 한인들 피해는 절대로 한-흑 갈등이 아니다. 폭동 이후 일부 단체들이 한-흑 갈등 문제를 얘기하는데 절대로 아니다.”   -메릴랜드 한인사회에서 볼티모어가 갖는 의미는 크다. 하지만 여러 환경이 한인커뮤니티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한인사회가 헤쳐나갈 방안은.  송: “단합해야 한다. 단체들이 한인회를 중심으로 모이고,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집중해야 한다. 앞으로 이에 대해 좀더 깊게 논의를 해야 한다.”   최: “한인 커뮤니티는 이제 우리끼리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다른 커뮤니티와 어울려야 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성: “투표를 통해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도 중요하고, 한인들 스스로 정치인을 길러야 한다. 폭동 당시 볼티모어에 2~3명의 한인 정치인이 있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백: “볼티모어 시장 예비선거에서 이긴 캐서린 퓨 후보의 승리 파티장에 갔다. 뜻밖에 목사들이 많았다. 한인 사회도 교회들이 참여해야 한다.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도록 목사들이 나서야 한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다.” -볼티모어 폭동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백: “1979년 눈폭풍이 있었다. 당시도 도시 기능이 마비됐다. 가게는 다 털렸다. 이후 눈만 오면 가게에서 잤다. 이번 폭동은 나에게 두 번째 폭동이다. 한인들을 대변할 단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한인회가 우리들의 보험이다. 평소에는 있으나 마나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목소리의 창구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폭동의 여파가 한인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하면 좋겠다. 한인 커뮤니티가 더 가까워지고, 비즈니스인들이 한 단계 발전하는 등의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송: “당시 한인회와 교계가 한 덩어리 됐다는 것에 의미가 크다. 하지만 아직도 따로 논다. 개인적인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한 덩어리가 됐으면 좋겠다.”   최: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원봉사한다는 정신, 젊은이들과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긴급 상황에는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정리=허태준 기자

2016-04-29

더딘 변화, 높은불신의 벽…여전한 긴장감

볼티모어 폭동 1주년을 맞아 주류언론들은 일제히 특집기사로 볼티모어의 지난 1년간 변화와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기사들은 공통적으로 26일 민주당 예비선거와 함께 볼티모어 시의 새로운 시장의 윤곽이 들어날 것이라면서, 폭동 1년 후인 현재에도 볼티모어는 살인사건 증가와 빈곤한 흑인 저소득층의 소외된 삶으로 시름하고 있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기사들은 볼티모어에 시민들 및 공무원들의 각성과 함께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CNN : “볼티모어가 ‘원죄’와 마주한다” 볼티모어 시민들 중 일부는 ‘볼티모어 폭동’은 ‘봉기’(uprising)였다고 믿고 있다. 볼티모어가 당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 날 벌어진 사태 한 가운데 섰던 많은 이들이 그 사건을 ‘폭동’이냐 ‘봉기’냐 하나로 결론짓지 못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방화가 있었고, 약탈이 있었다. 볼티모어 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사건을 완전히 매듭지을 수 있는 구심점과 리더를 찾고 있는 상태다. 지역 변호사로 볼티모어 시의 역사를 주제로 각종 서적을 출간해온 에덴 스파라코는 “볼티모어 폭동이 일어난 이후 모든 것이 정지된 채로 모든 이들이 누군가가 나서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런 가운데 볼티모어는 26일 열리는 민주당 시장후보 경선의 결과로 새로운 시장을 맞게 된다. 이 선거가 볼티모어의 미래를 결정 지을 것이라는 의견이 크다. 이와 함께 5월부터 재개되는 일련의 재판으로 여섯 경찰관들의 유죄여부가 결정되면, 프레디 그레이의 죽음으로 야기된 볼티모어 사태는 어느정도 결말을 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선거로도, 재판결과로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있다. 폭동 이후 볼티모어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사상최고 수준으로 급증했다. 2015년에 기록된 344건의 살인사건은 시 역사상 두 번째로 높다. 살인사건의 해결 및 범인 체포율은 30%에 불과하다. 시민단체들은 폭동 이후 경찰 순찰이 줄어들었고 치안의 공백이 커졌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편으로 거리의 주민들은 폭동의 결과로 볼티모어를 지배했던 마약 조직들의 역학관계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폭동당시 불탔던 CVS 등 약품상에서 도난당했던 마약성 진통제 ‘펄코세트’ 등이 대거 유통되며 마약조직의 ‘전쟁’이 벌어졌다는 보도도 있다. 볼티모어가 정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해답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해결에 앞장서느냐에 달려 있다. 주민과 시관계자들뿐만이 아니라 메릴랜드 주전체의 정치인들과 지역사회가 볼티모어의 경제회복을 위해 나서야 한다. 볼티모어 시내의 극빈층에 몰린 흑인들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도달하는 상태다. 불씨가 생기면 또다시 타오를 것은 자명한 일이다. 볼티모어 폭동과 같은 또다른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는 위정자들의 방관과 무책임 탓일 것이다. 볼티모어 선 : “그레이 죽음 이후, 변화는 있는가?“ “볼티모어 폭동은 감정적인 분노의 표현이었나? 변화를 원한 몸부림이었나?” 볼티모어 폭동 1주년을 앞두고, 자말 브라이언트 목사는 주민들에게 26일 열리는 메릴랜드주 예비선거의 참여를 종용하며 이렇게 외쳤다. 프레디 그레이의 죽음을 둘러싼 대혼란이 펼쳐지고 1년이 지난 볼티모어. 2015년 4월27일의 그 날의 의미를 찾기위한 거대한 분석작업들이 여기저기서 펼쳐졌다. 시민운동가들은 볼티모어의 변화를 일으킬 선거 및 정치참여를 촉구하며 연일 행동하고 있다. 시장선거에 뛰어든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볼티모어의 개혁과 발전을 이룰 적합자라며 외치고 있다. 그레이를 사망케 한 경찰관들의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경찰국은 변화와 화합, 주민들과의 공존을 위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경찰국은 순찰을 강화했다. 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갈 길은 아직도 멀다. 하지만 분명히 진전은 있었다. 슬램가 흑인 꼬마들이 경찰관의 이름을 부르며 친근히 이야기한다. 한 동네에서 발생한 강간사건에 수십명의 경찰관들이 일일이 지역 가정집을 탐문하며 수사에 나섰다. 폭동 이전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그레이의 죽음에 관련된 경찰관들의 재판이 다음달부터 재개되면 경찰국의 노력은 또다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모든 지역사회가 재판결과를 지켜볼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천만 다행인 것은 심각한 방화 및 약탈에 가담한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폭동 가담자들이 기소중지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존스홉킨스대학 사회학과 스테파니 데루카 교수는 “기회가 있었고, 대화가 있었으며, 이제 에너지도 생겼다. 이제 볼티모어는 무언가 변화가 이뤄질 시점에 도달했다”며 긍정적인 미래를 예측했다. 한편 사회학자들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은 저소득층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지원이야말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티모어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학진학을 통해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된 저소득층 출신 흑인 젊은이들 대부분이 출신지역으로 되돌아와 지역사회를 살찌우는 선순환에 기여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결과다. USA 투데이 : “1년 지났지만 여전한 긴장감…갈등은 진행상태” 25세 흑인 프레디 그레이의 죽음은 하나의 상징으로 우뚝섰다. 선거철을 맞아 거리에 나붙은 수많은 시장 후보들의 포스터는 담벼락 한귀퉁이를 차지한 거대한 그레이의 얼굴 벽화에 빛이 바랜다. 길거리의 아티스트들은 볼티모어 거의 모든 모퉁이 벽에 억울하게 죽은 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어떤 것은 평화를 갈구하고, 어떤 벽화는 투쟁을 선동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떠한 해결책을 촉구하고 있다. 그레이의 마지막 모습을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제임스 브라운씨(54)는 “그의 발은 부서진 상태였다. 경찰들은 관을 들쳐매듯 그레이를 들어 경찰 벤에 쑤셔넣었다”고 증언한다. 참혹했던 그의 죽음으로 얼마간의 변화는 생겼다. 이제 모든 경찰 벤에는 감시카메라가 부착됐다. 경찰측은 시민들과의 갈등 해소를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실시중이고 불탄 업소들은 재건되고 있다. 올 12월 퇴임을 앞둔 스테파니 로울링스-블레이크 시장은 62만1000여명의 시민들에게 보다 나은 볼티모어를 남기고 떠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은 “우리가 폭동을 겪으며 확인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지역사회의 ‘강인한 회복력’이다. 최악의 나날들을 뒤로하고 정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내와 노력으로 볼티모어시는 빠르게 나아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같은 시장의 의견에 다수의 주민들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회복은 완전치 않다. 절망한 상인들과 발전에서 소외된 저소득층 주민들은 그때처럼 탄식하고 있다. 그레이가 살았던 곳과 사정이 비슷한 도시 곳곳 슬램가 주민들과 경찰 사이에 자리잡은 뚜렷한 긴장감은 여전히 깊고 쓰라리다. 볼티모어 경찰국 케빈 데이비스 국장은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프레디 그레이 사건의 큰 원인은 80년대 마약전쟁 시기에 확립된 경찰의 범죄자 대응 문화와 경찰들의 슬램지역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제자리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데이비스 국장은 “도시의 치안은 경찰만이 아니라 학교와 시민단체, 각 공공기관의 공조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세용 기자 park.seyong@koreadaily.com

2016-04-26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서 새로운 희망 일군다

차례 1. 폭동 그 후 1년 현장 르포 2. 폭동 1주년 주류언론 시각 3. 좌담회 - 회고와 희망 찾기 지역사회는 물론 전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한 볼티모어 폭동이 일어난지 오는 27일이면 일년이 됩니다. 당시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한인업소만 100곳이 넘습니다. 폭도들에게 폭행당해 중상을 입은 상인들의 소식까지 들려오면서 한인들은 비통에 잠겨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본지는 폭동 1주년을 맞아 세 차례에 걸쳐 절망을 딛고 새롭게 일어서는 상인들의 모습과 폭동 1주년을 바라보는 미 주류사회의 시각을 전하는 한편 한인지도자들과 함께 아직도 아물지 않은 아픔을 달래고 새 희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1968년 이후 거의 반세기 만에 재현된 무법천지. 메케한 연기와 화염, 투석전, 무차별 파괴와 약탈, 지난해 4월의 끝자락 볼티모어의 풍경이다.   폭동의 진원지에서 한인 상점들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분노와 화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룻밤 새 망가진 400여 업소 중 25%가량이 한인 업소였다. 쑥대밭으로 변한 가게를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졌다. 이들에게 가게는 삶의 터전이고,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었기 때문이다.   폭동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지 꼭 1년. 여전히 볼티모어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다. 폭동의 상처와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이 약이던가? 피해 한인들 상당수는 새로운 희망을 위해, 또 다른 일부는 살기 위해서 쓰라린 아픔을 기억의 뒤편으로 밀어내고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재기의 몸부림을 펴고 있다.   지난 20일 폭동의 시발점이 된 고 프레디 그레이가 살던 동네를 찾았다. 볼티모어 서쪽 샌드타운-윈체스터다. 빈집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가장 낙후한 지역 중 하나다.   이곳에서 30여 년째 그로서리를 운영하는 그레이스 여 씨. 폭동 당시 4개의 가게 중 한 곳이 전소됐다. 가게 이름은 한국식인 ‘해 뜨는 마켓’이다.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물쇠가 굳게 잠가져 있다. 입구 처마는 불에 탄 시커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철조망 사이로 들여다본 내부도 일부는 수리했지만, 불에 탄 냉장고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하지만 가게 옆 건물 외벽은 벽화 그림으로 가득 찼다. 호랑이와 독수리, 사람의 눈동자, 아프리카 야수인 팬더스 등이 화려한 색으로 그려져 있다. 폭동 사태 이후 메릴랜드 미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수소문 끝에 그녀를 찾아와 희망을 노래하며 그린 그림이다. 상처 속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의 속삭임이기도 하다.   “처음 두 달은 너무나 어수선했어요. 불에 탄 가게도 가게지만, 미국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어요. 또 원망스러웠죠. 여러 생각이 다 들었어요. 하지만 내 터전이 여기라는 것, 나를 통해서 이곳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어요””   1981년 이곳에 정착한 여 씨에게 샌드타운은 제2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모두 ‘마마’라고 부를 정도로 이민자가 아니라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이 지역에 희망을 불어넣자는 의미로 그녀는 가게 이름을 ‘해 뜨는 마켓’, ‘불루밍 선’, 블루밍 드림스 마켓, 뉴 샌드타운 마켓 등으로 지었다. 그런 그녀의 가게가 불에 탄 것이다.   가게를 복구하기 위해 그동안 SBA 융자 등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자격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시 당국으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여 씨는 “결국 내가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하나님이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해요. 해 뜨는 마켓은 6월 중에 다시 오픈할 생각입니다. 이곳에 평화를 심을 겁니다”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 씨의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모셔 스트리트 선상의 OK 그로서리. 황정연 씨가 방탄유리를 앞에 두고 고객들에게 물건을 건네준다. 그의 가게도 그날 털렸다. 하지만 남다른 유명세는 그 뒤에 이어졌다. 폭동이 나고 며칠 후 경찰과 언론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레이 호송차가 가게 앞 사거리 부근에서 멈춰선 지역으로, 사망 사건의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내달 열리는 경찰관 재판에 참고인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에게 볼티모어 폭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 사건 이후 가게를 포기하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어요. 장사도 안될뿐더러 자꾸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생각나고, 지금은 그냥 흐르는 대로 가자는 생각뿐입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선상의 원더랜드 리커스토어. 21년째 가게를 운영하면서 작년 같은 상황은 처음이었다. 모든 물건이 다 털린 것이다.   윤혜경 씨는 “새벽에 알람이 울렸지만, 어떻게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물건만 훔쳐가고 장비를 부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폭동사태 이후 다시 가게 문을 열자 고객으로 오던 일부는 문을 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다시 오게 돼 고맙다.”, “맘 우리가 앞으로 도와주겠다.”, “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고 윤 씨는 말했다.   노스 애비뉴 선상의 킴스 리커스토어. 이한엽씨 가게다. 폭동 이후 하루 만에 다시 문을 열었지만, 진절머리 나는 사건에 가게를 내놓았다. 하지만 팔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버텨가고 있다.   “ CCTV에 밤새도록 찍힌 장면을 보고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 이들을 다 감옥에 보낼까 생각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약해지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요.”   다만 폭동 사건 이후 아이들이 오히려 순진해졌다고 덧붙였다. CCTV에 찍힌 걸 아는지 그 이후 1년 동안 단 한 건의 도둑도 없었다고 말했다.   볼티모어 서쪽 루트 40 에드먼슨 부근의 프레디스 리커스토어. 약탈범들에 폭행까지 당한 박영민 씨다. 당시 10만 달러 가량을 털렸다. 약탈 후 3개월 만에 다시 오픈했다.   박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의욕을 잃었어요. 가게도 내놓았지만 팔리지가 않습니다”고 말했다. 일부 보험 처리는 됐지만, 턱없이 부족한 액수고, 바로 옆 빈집 철거 공사까지 겹치면서 매출도 오르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집도 규모를 줄여 아파트로 이사했다.   “미국에 와서 첫 가게였어요. 13년 동안 지탱해 준 고마운 동네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정이 떨어졌어요. 그만 두려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후회는 없어요.”   삶의 의욕이 떨어진 박 씨 부부는 최근 들어 매주 화요일에는 일찍 문을 닫고 배드민턴 동우회 활동으로 의욕을 보충하고 있다.   폭동의 기억에 아직도 몸서리치는 이들도 있다. 김종민·김영미 씨 부부다. 김 씨 부부는 볼티모어에서도 다운타운에 있는 가게를 운영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폭동은 이들의 삶의 터전까지 앗아갔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한 달 동안 술만 먹고 살 정도로 폐인이 됐지요. 아내는 자다가도 악몽에 벌떡 일어날 정도였어요. 볼티모어라는 이름만 나와도 정색을 했으니까요.”   결국, 이들 부부는 가게를 팔기도 전인 지난해 12월 볼티모어를 떠났다. 13년 동안 청춘을 쏟아부은 가게를 포기할 정도로 볼티모어가 싫었기 때문이다. 고객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다는 것도 떠난 이유 중의 하나다.   고민하다 이들은 하워드카운티 컬럼비아 108번 선상에 애나스 커피숍을 차렸다.   김종민 씨는 “커피는 마실 줄만 알았지 만드는 방법을 몰라 처음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많았어요. 이제 한 5개월쯤 하다 보니 손님의 취향을 맞춰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볼티모어보다 수익이 줄었다는 이들 부부는 아직은 젊어서 스스로 선택에 결코 후회가 없다면서, 커다란 욕심 없이 열심히 사는 것으로 만족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에 대한, 이웃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했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큰 사건을 경험하면서 주위에 의외로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결국 사람들로 인해 힐링되고, 살아가는 힘을 얻었습니다.”         ☞볼티모어 폭동 일지  4월 12일 프레디 그레이 경찰 체포후 1주일만에 사망  4월 27일 그레이 장례식 이후 폭동으로 번짐,  4월 28일: 주 정부 비상사태 선포, 야간 통행금지, 주 방위군 투입  4월 29일: 한인 공동대책위 구성  5월 1일: 시 검찰, 경찰관 6명 전격 기소  5월 3일: 야간 통행금지 해제 허태준 기자

201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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