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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끝나지 않은 전쟁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했다.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등 한국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이후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맥아더 장군의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이 결정적이었다. 이어 9월28일에는 서울 탈환에 성공했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북진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달라졌다. 그 겨울 영하 30~40도를 넘나드는 혹한에 동사자까지 발생했다. 세계 전쟁사에 겨울 전투로 유명한 ‘장진호 전투’도 이때 벌어졌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가 주축인 유엔군 3만 명이 중공군 10만 명에 맞서 벌인 전투였다. 당시 유엔군은 끝 없이 밀려오는 인해전술의 중공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마고지 전투도 국군 9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에 맞서 벌인 전투였다. 10일 내내 백마고지의 주인이 24차례나 바뀔 정도였다니 얼마나 치열했는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런 전투 중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전쟁 발발 3년1개월2일(1129일)만이다. 무수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겼지만 전쟁은 휴전했을 뿐이지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도 북한은 온갖 도발 행위를 그치지 않고 있다. 끊임없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이젠 오물풍선까지 남한으로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휴전선은 1953년 휴전 협정을 통해 생겼다. 지금도 남북 간 긴장감이 흐르는 곳이다.     올해는 9·28 서울 수복 74주년이 되는 해다. 6·25 전쟁의 교훈을 잊지 말고 지속적인 국방력 강화가 필요하다. 전쟁은 힘의 대결이고 평화도 힘이 있어야 유지된다.  강한 힘만이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킬 수 있다. 노영자·풋힐랜치 거주독자 마당 전쟁 세계 전쟁사 백마고지 전투도 장진호 전투

2024-09-24

목숨 건 공중 진화…“일상의 전투 비행”

  ━   원문은  LA타임스 9월3일자 ‘Hot, dirty, dangerous: Aerial firefighting is a labor of love’ 제목의 기사입니다.   가주 산림화재예방국(California Department of Forestry and Fire Protection)의 소방 항공기 파일럿 제프 레이놀즈(Jeff Reynolds)는 첫 산불 시즌의 어느 날 비행중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비행기의 빈 날개에는 연료가 가득 차 있었고, 기체의 배 속에는 화재 억제제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는 뜨겁고 얇은 공기를 헤치고 ‘무겁게 비행’하고 있었다.   저고도로 낮고 천천히 비행함으로써 비행기의 기동성을 제한한 터라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변 지형도 잘 보이지 않는 짙은 연기 속으로 일부러 다이빙하고 있었다. 한가지만으로도 위험한 조건들이 쌓이면서 결국은 가장 위험한 상황이 연출됐다.   “마치 재앙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죠.”   레이놀즈는 당시 목표 지점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항공조정사는 그에게 회항해 다시 목표 지점으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1000갤런의 화재 억제제를 실은 채 그는 자동추력장치(throttle)를 밀어넣어 엔진에서 더 많은 힘을 짜내고, 기체를 천천히 상승시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창문 너머 바로 눈앞에서 이상한 흰색 물체를 발견했다. 산 언덕을 따라 올라오고 있던 트럭이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고도까지 와있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그는 이미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고, 오른쪽에 있던 언덕과의 충돌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레이놀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때의 충격적인 순간은 여전히 날 괴롭히고 있다”면서 “평생 잊지 못할 악몽 같은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우리는 종종 뉴스 영상에서 높은 상공에서 항공기가 화재 진압을 위해 붉은 화재 억제제를 불길 위에 뿌리는 장면을 본다. 또는 헬리콥터가 거대한 물 양동이를 매달고 주택 주변에 뿌려 불길을 막는 멋진 광경도 목격한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규모의 산불이 매년 발생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소방 항공기 파일럿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소방 항공기 파일럿은 극소수다. 이들은 대형 여객기나 사설 제트기 회사에서 제공하는 상대적인 호화로운 환경과 높은 임금을 마다하고, 뜨겁고 더럽고 위험한 공중 소방 작업에 뛰어들고 있다. 직접 비행기를 청소하고 연료를 채우며, 때로는 낡은 작업복을 입는다. 임금도 상업 항공기 조종사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다.   근무 환경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연방교통안전위원회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전국에서 공중 진화 작업중 최소 14건의 항공기 및 헬리콥터 추락 사고가 발생해 최소 25명의 파일럿과 승무원이 사망했다. 그 중 일부는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산비탈에 충돌하거나, 물을 끌어올리던 호스가 헬리콥터 로터에 엉켜 추락하기도 했다. 같은 기간 미국 상업 항공사 소속 파일럿중 비행 중 사고로 사망한 파일럿은 단 한 명도 없다.   항공 소방 파일럿들의 근무 일정은 고용주에 따라 다르다. 일부 계약업체들은 연중 내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산불이 발생하는 곳에서 비행한다. 반면, ‘화재 시즌’에만 일하는 파일럿도 있다. 그런데 시즌 파일럿들이 과거에는 여름철 건조한 시기에만 일했지만 최근 몇 년간 그 기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이들은 대개 10일 연속 근무 후 5일간 휴식을 취하는 일정을 따른다.   최근 새크라멘토 메트로폴리탄 소방국에서 은퇴한 수석 파일럿 몬티 반랜딩햄은 “항공 소방은 ‘일상 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전투 비행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항공 소방업계에 진입하려면 학생들은 기본적인 이착륙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일하거나, 넓은 시골 지역에서 전력선이나 송유관을 감시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수행하며 경력을 쌓아야 한다. 이들은 열악한 근무 조건과 지루한 업무를 견뎌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천 시간의 비행 경험을 쌓아야 한다.   항공 소방 파일럿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열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새크라멘토 소방국 헬리콥터 파일럿인 브라이스 미첼이 전형적인 예다.     그는 10대 시절 소방국의 자원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항공 소방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의 첫 상사는 그를 ‘호스를 들고 헬리콥터를 세차하던 어린 소년’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미첼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아마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 그때 즈음이었다”고 말했다.   미첼은 소방관으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다른 동료들처럼 새 차를 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돈을 모아 6만 달러짜리 훈련용 헬리콥터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비행 교관을 고용해 비행을 배웠고, 교관 자격증을 얻은 후에는 비행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는 꽤 오랜 기간 동안 가장 저렴한 비행 학교를 운영했다”며 “휴일에도 비행기 조종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비행을 가르치지 않을 때에는, 작은 R22 헬리콥터를 타고 협곡으로 나가 헬리콥터 조종사로서 항공 소방에 필요한 고난도 비행을 연습했다”고 말했다.   특히, 한여름의 더운 날에 강 위에 정지해 떠있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다. 이는 화염 위에서 고고도로 비행하는 대형 헬리콥터 조종 상황과 비슷했다.   비행 연습 외에 다른 훈련들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첫 임무는 응급처치 요원이었다. 헬리콥터 케이블에 매달려 위험한 협곡이나 가파른 경사를 내려가 부상자들 구출하는 일이었다. 이후 구출 작업의 지휘자 역할을 맡아, 조종사가 비행을 할 때 통신과 항로를 관리하고 구출 요원을 지휘하는 팀장이 되었다.   그의 역할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는 헬멧 속에서 동시에 10개의 라디오 채널을 듣는다고 설명했다. 이 채널들은 모두 중요한 정보로, 다른 항공기에서 보내는 보고, 지상 소방대원의 상황, 항공 교통 관제사들의 지시들이다.   미첼은 “극도의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지만 비행을 하면서 때때로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산기슭의 트럭과 충돌할 뻔한 아찔한 상황을 겪었던 레이놀즈의 열정도 뒤지지 않는다.   그는 사우스LA 캄튼 공항에서 광고 배너를 끌고 비행하는 일을 하며 파일럿 경력을 시작했다. 2016년 그는 사설 항공 서비스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몬터레이 공항에 고객을 내려주던 중이었다.     그때 그는 활주로에서 자신의 비행기를 청소하고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의 비행기는 불길 위를 낮고 천천히 날며 비행한 흔적인 재와 죽은 벌레로 덮여 있었다. 그는 곧 그녀가 ‘산불 공중 진화(air attack)’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인근에 발생한 산불 위에서 항공 교통을 통제하는 임무였다.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소개로 소규모 사설 계약업체에 근무하게됐다. 레이놀즈는 7년 동안 약 3000시간의 비행 경험을 쌓은 후 처음으로 항공 소방 작업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항공기를 조종하며 화염을 향해 다이빙하는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이다.   레이놀즈는 다른 파일럿들에게 자신의 일을 설명할 때, 그들이 종종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본다고 한다. 그들의 질문은 이렇다.   “여름철 아르바이트 같은 거야?” “메이저 항공사에 들어가기 위한 대기 중인 거야?”   레이놀즈의 대답은 한결같다. “아니요, 이게 제 진짜 직업인데요.”   그는 비행으로 큰 돈을 벌긴 어렵다. 도쿄행 대형 여객기를 조종하거나, 유명인사들을 제트기로 칸 영화제에 데려다주며 고소득을 올리는 파일럿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목숨과 집을 구할 수 있다.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건 사명이라고 밖에 대답 못할 것 같습니다. 보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좋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죠.” 잭 돌런 기자비행 전투 소방 항공기 비행중 머리카락 상업 항공기

2024-09-04

[열린광장] 장미꽃 피는 6월에 일어난 일

어느덧 6월이다. 장미꽃이 활짝 피는 아름다운 달이다.     먼저 이름에 ‘장미(Rose)’라는 말이 들어 있는 한 여성이 생각난다.  바로 어네스틴 포로우스키 로즈라는 여성 인권 운동가다. 그녀는 1869년에 ‘국민여성참정협회(National Woman Suffrage Association)’라는 단체를 창설하는 등 여성의 정치 참여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아름다운 6월이지만 역사적으로 치열한 전투도 벌어졌던 달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75년 6월 17일,  독립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진 벙커힐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 독립전쟁은 미국 13개 주가 독립을 위해 영국군과 싸운 것으로 1775년 4월 19일 시작해 8년 간이나 지속했다. 또 하나는 세계 2차대전 중이던  1944년 6월 6일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다. 당시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을 물리쳤다.     역사적으로 6월에도 많은 일이 벌어졌고 유명인들의 출생도 많았다.     6월에 있었던 역사적인 일 가운데 하나가 미국 국기의 탄생이다. 연방의회는 1777년 6월 14일 성조기(Stars and Stripes)를 미국 국기로 채택한다고 발표했다.     6월에 출생한 대표적 인물은  프랑스의 천재 철학자이자 과학자,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이다. 그의 출생일은 1623년 6월 19일이다.   독일의 유명 작곡가인 로버트 슈만이 1810년 6월 8일 태어났고, 미국의 웅변가이자 성직자인 헨리 워드 비처는 1813년 6월 23일에 출생했다. 그런가 하면 1875년 6월 6일에 태어난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과 17년 뒤인 1892년 6월 26일에 출생한 미국의 여류 소설가 펄 벅은 나란히 노벨상을 받았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회복지 사업가로 유명한 헬렌 켈러 여사가 출생한 것은 1880년 6월 27일이다. 켈러 여사는 출생 후 두 살이 될 때까지 심하게 병을 앓았다. 그로 인해 결국 시력과 청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켈러 여사는 7살 때 앤 설리번이라는 은인을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설리번은 실명 위기까지 갔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켈러 여사에게 글씨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켈러 여사는 활발한 저술 활동과 사회 활동을 벌였으며 그 공로로 많은 상을 받았다.     6월에는 건설 분야에서도 뛰어난 인물이 태어났다.  조지 고털즈라는 미 육군 공병장교다. 1858년 6월29일 태어난 고털즈는 독특한 공법으로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파나마 운하의 완성을 이끈 인물이다.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고털즈 중령을 파나마 운하 건설 책임자로 임명했다. 고털즈는 1914년에 군에서 전역한 후 파나마지역 주지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는 ‘장미’라는 단어가 들어간 잡지가 있었다. 1921년 창간호를 낸 한국 최초의 시 전문 동인지 ‘장미촌(薔薇村)’이다. 하지만 낭만주의를 표방했던 장미촌은 아쉽게도 그해 5월 창간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윤경중 / 목회학 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광장 장미꽃 켈러 여사 파나마지역 주지사 벙커힐 전투

2024-06-09

[우리말 바루기] ‘전략’과 ‘전술’의 차이

세계 곳곳에서 발발한 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확전되고 있다. 이에 언론에서는 “후티 반군의 공격이 나날이 대범해지면서 미국의 ‘전략/전술’ 재수립이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포위하고 지상 작전에 돌입한 가운데 하마스의 치고 빠지는 ‘전략/전술’로 인해 수렁에 빠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등의 기사가 쏟아졌다.   전쟁 관련 기사를 접할 때 이처럼 ‘전략’과 ‘전술’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그 의미가 비슷한 듯하면서도 약간 차이가 있어 구분해 쓰기가 쉽지 않다.     ‘전략’은 전쟁을 전반적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이나 책략을 의미하며, ‘전술’의 상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전술’은 전쟁 또는 전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기술과 방법으로,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전망을 갖는 ‘전략’의 하위 개념이다. ‘전략’의 궁극적 목표가 전쟁에서의 승리라면, ‘전술’은 각각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한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뜻한다.   첫째 예문은 전쟁에서의 전반적인 방법 수정을 말하고 있으므로 ‘전략’을 쓰는 게 더 적절하다. 둘째 예문에서는 치고 빠지는 전투의 구체적인 방법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전술’을 사용해야 그 뜻이 적확하다.우리말 바루기 전략 전술 전투 상황 전쟁 관련 방법 수정

2024-02-26

[열린광장] 격납고와 장진호 전투 생존자

오렌지카운티 터스틴의 옛 해병대 기지 격납고가 불타버렸다. 불에 타다 남은 건물이 을씨년스럽다. 이 목조 건물은 1942년에 격납고로 건축되었으며, 17층 높이에 길이 1000피트, 넓이 300피트로 1999년까지 헬리콥터 격납고로 사용하다 문을 닫았다. 오렌지카운티의 관광 명소였다.   나는 1995년 1월 13일, 그 격납고 옆의 장교식당에서 나의 북한 탈출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대상은 6·25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가운데 하나인 장진호 전투 생존자 모임(The Chosin Few) 회원과 그 가족들이었다.   ‘Chosin Few’라는 말은 어디서 왔는가. 한국 전쟁 때 사용한 지도는 구 일본군이 만든 지도로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다. 장진은 일본 발음 ‘Chosin’이다. 미국 사람들은 ‘choose’의 과거분사 chosen과 발음이 비슷하고 선민(選民)의 뜻도 포함하고 있어 ‘Chosin Few’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50년 유엔군의 북진으로 남북통일을 이루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나 했더니 중공군의 개입으로 모든 것이 수포가 되었다. 중공군 7개 사단 병력 12만 명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한 미 해병 1사단과 10군단 3만여 명을 포위했다. 약 2주간의 치열한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보았으며, 미군은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철수했다.     그날 저녁 나는 16세 소년의 탈북 모험담을 들려줬다. 나는 고향 집 땅굴 속에 숨어 있다 유엔군이 점령한 초도로 탈출해 소나무 가지로 움막집을 만들고, 배급받은 월남 쌀로 연명했다. 단벌로 입고 나온 옷에서 이가 생겨 모닥불 위에서 옷을 털면 팝콘 터지는 소리와 고약한 냄새가 났다. 어머니가 그리워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으로 되돌아가다 검은 구름을 만났다. 선장은 검은 구름은 폭풍이 올 징후라며 배를 돌려 초도로 돌아갔다. 구름은 지옥으로 가던 나의 길을 가로막았다.   두 달 후, 탱크 수송선이 약 2000명의 피난민을 군산으로 이송했다. 흥남 철수 작전에 비해 조용한 초도 철수 작전이었다. 한국 방문 당시 그 탱크 수송선이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봤다.  뱃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고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장진호 전투 생존자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의 북한 탈출을 도와주고 한국과 미국에서 일자리까지 제공해 준 은인입니다.” 그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나의 연설은 마무리됐다.     며칠 후, 나의 상사에게 감사장이 왔다. ‘당신 사무실의 북한 출신 공무원이 우리 ’Chosin Few‘ 생존자와 가족들에게 감동적인 연설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글 끝에 ‘Semper Fi’라고 적었다. 라틴어로 미 해병대의 좌우명, ‘영원한 충성’이란 말이다. 장진호 전투 생존자들은 대부분 고인이 됐고 격납고도 불타버렸다. 하지만 Semper Fi 정신은 살아있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격납고 장진호 장진호 전투 헬리콥터 격납고 장진호 북쪽

2023-12-18

군인을 존중하고 예우해야 강국이 된다

군인을 존중하고 예우해야 강국이 된다   / 나는 해병대에서 5년을 보냈다.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국가전략기동부대다.  해병대는 다른 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지만, 소수정예를 의미하는 ‘작지만 강한 해병대’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해병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강한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해병대는 붉은 명찰과 팔각모로 상징된다. 붉은 명찰은 피와 정열, 용기, 신의, 약동하는 젊음을 의미하며, 글자색인 황색은 땀과 인내를 의미한다.     소위로 임관되어 처음 배속 받은 곳은 포항 제 1상륙사단 11연대였다. 병과가 포병이었기 때문에 가끔 야외로 포사격훈련을 나갔다. 일선부대 근무를 하면서 나는 선배들로부터 6.25전쟁 때 해병대가 피땀 흘려 쌓아올린 ‘상승해병’신화를 들었다. 그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도솔산 전투다. 한국전쟁 중 도솔산 전투는 원래 미 해병대가 맡았던 전투였다. 도솔산은 강원 양구의 중동부전선에 위치한1148고지로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곳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도솔산 점령 임무가 갑작스럽게 한국 해병대로 바뀌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미 해병대가 도저히 이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며 발을 뺐기 때문이었다. 미 해병대가 도솔산 전투를 포기한 이유는 도솔산이 워낙 험준할 뿐만 아니라 그곳을 방어하던 북한군이 좁고 가파른 암석지대에 지뢰를 묻고 수류탄과 중화기를 배치해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요새화함으로써 이를 공략해야 했던 미 해병대는 처음부터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 해병대가 그런 인명 손실을 내고도 도솔산 전투를 도저히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도솔산 점령 임무는 미 해병대에서 한국 해병대로 바뀌었다.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와 교대해 도솔산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누구 할 것 없이 어안이 벙벙했다. 세계 최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미 해병대가 포기한 도솔산 점령을 화력과 장비가 미군에 비해 월등히 부족한 한국 해병대가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한국 해병대는 결의를 다지며 각오를 새롭게 했다. 김대식 연대장은 “미 해병대가 못한 일을 기필코 해냄으로써 한국 해병의 기개를 보여주자!”며 움츠려있던 부하 장병들을 다독였다. 1951년 6월 4일 해병대는 공격작전을 개시했다. 해병대는 험준하기로 이름난 도솔산의 가파른 능선 자락을 기어오르며 피와 땀으로 얼룩진 혈전을 치렀다. 인명 손실이 많은 주간공격이 막히자, 야음을 이용한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특공대원들은 대검 한 자루와 수류탄 두 발을 들고 낮은 포복으로 전진해 목표를 하나씩 공략해 나갔다. 이때 소대장들이 앞장서 지휘했다.     그렇게 견고하기만 하던 북한군의 방어진지도 해병들의 목숨을 건 투혼에 하나둘씩 무너졌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대대장·중대장·소대장들도 총상을 입고 여기저기서 쓰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후송을 거부한 채, 이를 악물고 부대를 지휘했다. 해병대는 도솔산에서 모두 그렇게 싸웠다. 해병대의 도솔산 전투의 승리에 군 수뇌부는 물론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이 맨 먼저 달려와 승전 축하와 함께 부대표창을 했다. 도솔산 점령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영웅’들을 격려하기 위해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부대 표창을 하고 ‘무적해병’이란 친필 휘호를 내린다. 또 이 대통령은 그날 생일을 맞은 공정식 대대장에게 깜짝 이벤트도 마련했다. 헬기로 생일 케이크를 공수해 온 것이다. 이 대통령은 태극기와 성조기로 장식된 케이크를 공정식 대대장에게 직접 전달했다.     군대의 존재목적은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군대는 여름철 난로와 같다. 당장 쓸모가 없다고 해서 내팽개쳐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다. 미국인들의 제대군인(Veteran)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예우는 남다르다. 군대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두 배도 더 비싼 비행기 좌석을 양보받기도 하며, 군인들에게는 항공사의 우대고객인 1등석 승객조차 밀리는 것이 미국에서 군인들의 위상이다. 수년 전 미국의 한 6·25전쟁 참전용사 장례식에 고인과 일면식도 없는 수천 명의 시민이 몰려 화제가 되었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스프링 그로브 묘지에서 90세에 별세한 참전용사 헤즈키아 퍼킨스 씨의 장례식이 열렸다. 그런데 건강상 문제로 유족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묘지 측은 장례식 하루 전날 SNS에 특별한 안내문을 올렸다. “젊은 시절 한국을 위해 싸운 미국 군인의 상주 역할을 가족을 대신해 지역주민이 해주길 요청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놀랍게도 장례식날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수많은 시민과 함께 여러 전쟁에 참여했던 제대군인들이 제복을 입고 참석했으며 일부는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달려왔다. 장례식에선 군악대의 연주와 오토바이를 선두로 한 추모 차량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퍼킨스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나라를 위해 싸운 군인들을 일상의 삶 속에서 우대하는 정서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이 공공장소를 찾거나 비행기에 탑승하면 방송으로 알리고 주변 사람들은 기립박수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또 대통령과 장군을 비롯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들에게 먼저 경례를 하며 존경의 뜻을 표한다. 2009년 10월29일 새벽 4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중 전사한 18명의 유해가 비행기에 실려 공군기지로 돌아올 때 새벽 시간임에도 운구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미국이 세계 1위 군사 강국을 장기간 유지하는 비결은 세계 최고 국방비 등 첨단 군사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보훈제도와 국민들 사이에 깊이 뿌리를 내린 보훈문화가 미국을 장기간 유일 초강대국으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는 군 초급장교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학군사관후보생과 사관학교의 중도퇴교자가 늘고 선발경쟁률은 갈수록 내림세다. 이유는 박봉과 열악한 근무여건 때문이란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이 더는 ‘애국 페이’에 기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군의 초급장교는 국가안보의 중추다. 국방의 중추가 흔들리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수많은 군인들과 군 복무에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바친 모든 이들이 미국의 군인들처럼 존경과 감사를 마땅히 누릴 수 있는 날이 대한민국에도 오기를 바란다. 그들의 꽃같은 청춘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국민의 의무라는 이유로 오롯이 감당한 군인들은 국가와 국민의 감사와 존중을 누림이 마땅하다. 군인을 존중하고 예우할 줄 모르는 나라가 강국이 될 수는 없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김지민 기자군인 존중 한국 해병대 신현준 해병대사령관 도솔산 전투

2023-05-25

한인 전 미군장교 우크라서 전사…폴 김 대위 자원병 참전

한인 전직 미군 장교가 우크라이나 전투에 자원병으로 참전했다가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 산하 전략통신정보보안센터(CSCIS)가 지난달 5일 폴 이 김(사진) 전 미군 대위가 남부 미콜라이우 지역에서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최근 전했다.     CSCIS에 따르면 김 전 대위는 미군 제82공수여단 소속 등으로 12년간 미군으로 복무한 뒤 전역했고, 지난 8월 우크라이나의 외국인 의용병 부대 ‘국토방위군 국제여단’에 합류했다. 그의 식별부호(콜사인)는 ‘킬로(Kilo)’였다고 한다.     CSCIS는 그의 전사 경위에 대해 “김 전 대위에게 치명적이었던 그날, (미콜라이우) 테르노비포디에서 유독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사들이 러시아군 12명을 사로잡았고, 격분한 침략자들이 대규모 포격을 퍼부었다. 적군의 포격에서 김 전 대위와 다른 우크라이나 병사가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설명했다. 숨진 날은 김 전 대위의 35번째 생일 이틀 전이었다.   국제여단은 김 전 대위를 기리는 취지에서 그의 소속 부대 이름을 ‘팀 킬로’로 명명했다고 CSCIS는 덧붙였다.   김 전 대위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모교와 지역사회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이 노력한 모든 일과 봉사에 감사드린다”, “진정한 영웅이자 민주주의의 방패였던 폴 김 대위의 희생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 등 수십 개의 추모 메시지를 보내며 그를 애도했다.   김 전 대위의 시신은 키이우를 거쳐 고향인 텍사스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됐고, 장례식은 4일 오전 텍사스에 위치한 그린우드 채플에서 진행됐다.   한편 텍사스 현지 매체인 더 포트워스 스타-텔레그램 부고에 따르면 그는 1987년 텍사스 어빙에서 태어났으며 2006년 텍사스 얼리도고교 졸업 후 군에 입대했다. 그는 일반 사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해 2011년 보병 장교로 임관했다.   김 전 대위는 2007년부터 1년간은 이라크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이후 제82 공수사단 등을 거쳐 2017년 대위로 제대한 뒤 오클라호마 대학교를 졸업했다. 또 2019년부터는 텍사스 알링턴 대학에서 ROTC 후보생들에게 군사 과학을 가르쳤다.   김예진 기자미군장교 우크라 미군장교 우크라 대위 자원병 우크라이나 전투

2022-11-04

한국전 장진호 전투 영웅 별세

  ■  「   」   6.25 전쟁의 격전지였던 장진호 전투에서 활약했던 스티븐 옴스테드(사진)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92세.   24일 미국의소리(VOA)에 따르면 그는 지난 20일 버지니아주 애넌데일 자택에서 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을 거뒀다. 뉴욕주 올버니 출신인 옴스테드 장군은 미국 해병 1사단 소속 병사로 6.25 전쟁에 참전해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에서 맹렬히 싸웠다. 장교로 진급한 뒤 1989년 3성 장군으로 예편하면서 41년간의 군 생활을 마쳤다. 이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부 부차관보를 지냈으며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 추진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12월 미국 해병 제1사단이 함경남도 장진군과 함주군 일대에서 영하 30도 안팎의 혹한 속에서 중공군 제9병단과 맞붙은 전투다. 미 해병대는 당시 10배 가까이 많은 12만명 규모의 중공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퇴각 작전을 수행했다.   옴스테드 장군은 2017년 6월 29일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박물관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만났다. 당시 문 전 대통령은 옴스테드 장군에게 고개를 90도 가까이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옴스테드 장군은 문 전 대통령의 양복 옷깃에 장진호 전투의 상징인 ''고토리의 별'' 배지를 달아줬다.   문 전 대통령은 미군의 도움으로 흥남 철수 때 월남한 실향민의 아들로서 미군 참전용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10만명의 피난민을 구한 흥남 철수는 미 해병대가 장진호 전투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면서 가능했던 작전이다.   고인의 장례식은 27일 콴티코의 해병대 기념 예배당에서 열리며 콴티코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철재 기자게시판 장진호 장진호 영웅 장진호 전투 한국전 장진호

2022-07-25

[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블랙 호크(Black Hawk)– 1

인디안 블랙 호크는 시카고 프로 아이스하키 팀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미국에서는 NHL(National Hockey League) 프로 하키 게임 인기가 대단한데 블랙호크는 여러 번의 우승으로 시카고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NHL은 미국과 캐나다 각지에 연고지를 둔 31개 팀으로 구성되어 있어, 매년 9월 하순 개막하여 경기를 치르며, 이듬해 4월부터는 플레이오프에 돌입하여 6월에 열리는 스탠리 컵 결승에서 우승 팀을 가린다.  특히 캐나다는 하키 종주국답게 경기가 있는 날이면 미국까지 관중이 대거 몰려와 응원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NHL은 신년 맞이로 매년 1월 1일이면 도시를 바꿔가며 실내에서 하는 게임을 야외로 바꿔 특별 경기를 갖는다. 금년은 미네아폴리스 야구장에서 개최 되었는데 화씨14도(섭씨 -10도)임에도 불구하고 입장료 300불을 내가며 4만명 만석을 이뤘다. 작년은 코로나19 때문에 쉬고, 재작년에는 텍사스 달라스 커튼보울 미식 축구장에서 하였는데 날씨가 따듯한 도시라 그런지 무려 8만명이 몰렸다. 아이스하키는 다이나믹한 게임으로 블랙 호크의 용맹성이 잘 드러난 운동이다.   블랙 호크는 1767년 오늘날 Rock Island라고 불리우는 일리노이 주 Rock River 강변에 있던 소케누크(Saukenuk)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크족은 여름 동안은 그 마을에서 옥수수를 재배하고 겨울에는 사냥을 위해 미시시피 강을 건너곤 하였다. 블랙호크는 소크족 가운데 위대한 추장이었던 “천둥(Thunder)”이란 이름을 가진 “나나마키”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비록 그가 모든 부족이 선출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부족 추장은 안되었지만 전투 추장으로 인정되어 전쟁에 자주 참가했고 15살에 이미 적을 살해한 경험이 있으며 18세가 되기 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도 갖고 있었다.   블랙 호크는 소크족 전투 추장으로 있으면서, 아메리카 원주민 땅을 미국 정부에 양도하는 것에 반대했다. 특히 그는 선대(先代)인 콰시콰메(Quashquame) 추장이 1804년 내용도 제대로 아는 것 없이 소크족과 팍스족을 대표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인디안 땅을 미국에 양도한다고 당시 인디애나 준주(準州)의 주지사인 윌리암 해리슨(William Harrison)과 얼떨결에 협정을 한 것은 일종의 사기술이라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블랙 호크와 그 부족은 선대의 추장이 전체 회원의 의견을 수렴하지도 않았으며, 그를 협상 대표자로  뽑은 적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근처에 세워진 미국군 메디슨 요새를 쳐들어 갔는데 그것이 그가 미국을 상대로 한 첫 작은 전투였다.   1812년은 영국이 불란서의 나폴레옹을 평정하고 여력이 생겨 그동안 괘씸하게 독립을 한 미국과 전쟁을 한바탕 한 해였는데, 당시 영국의 모피상 디킨스 대령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작전을 수행 중인 영국을 위해 위스콘신 주 그린베이 근처에 상당한 인디안 세력을 모았다. 디킨스가 모은 인디안은 포타와토미, 호천크, 키카푸, 그리고 오타와 족이었다. 200여명의 소크족 전사들도 소집했는데 이때 블랙 호크에게 영국군의 명예 준장 계급을 달아주면서 그린베이에 모인 모든 인디안을 지휘하는 명령권을 부여하였으며, 비단 깃발과 훈장 그리고 영국군으로부터 선의의 동맹군이 되었다는 증서를 전달하였다. 그 증서와 깃발은 전쟁 후 20년이 지나발견되었다.     전쟁동안 블랙 호크와 그의 전사들은 이리호(Erie)의 경계선에서 영국의 헨리 프록토 육군 소장과 함께 여러번 전투를 하였다. (hanprise@gmail.com)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black 블랙 블랙 호크 인디안 블랙 전투 추장

2022-01-13

[이 아침에] 장진호 전투

지난 11월 LA에서 FORGOTTEN VICTORY라는 다큐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은 행운을 얻었다. 레인 빅토리호 선상에서 금발 미모의 발레리나가 갑판을 누비며 첼로의 반주와 환상적인 안무로 시작되는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한 편의 예술영화 서막 같았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배를 타고 피난 왔던 실존 인물들이 들려주는 회고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 선박은 6·25 전쟁당시 흥남 철수작전에 참여해 피란민 7000여 명을 피난시킨 화물선으로 지급은 산페드로 항구에 정박해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 한국정부에서 매입을 희망한다는 보도를 접한 적도 있는 선박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화물선은 메리디스 빅토리아호이고(아이러니컬하게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되었다), 레인 빅토리아호는 이름이 비슷한 다소 혼동스러운 이름들이다.   마식령 산맥에 자리한 장진호의 1950년 12월은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영하 30도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침을 뱉으면 얼음판 위에 동전을 던진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십여 년 전에 읽었던 장편소설 ‘얼어붙은 장진호’(고산 지음), ‘Break out’(마틴 러스, 임상균 역)을 적당히 난방된 뉴저지 아파트에서 다시 읽었다. 그리고 15회에 걸친 다큐멘터리 장진호 전투 영상을 편안히 감상하였다. 당시 들어 보지도 못하였던 한국이라는 전쟁터에서 희생된 미군들의 조국에서, 나는 합중국의 시민이 되어 산화한 미군장병들의 안방을 차지한 것 같은 송구한 마음이 드는 불편한 심기이기도 하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전세가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의 우세는 삼팔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였다. 하지만 맥아더 원수나 트루먼 정부는 중공이 참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동경의 극동 사령부는 동결된 압록강을 야간에 도보로 침투하는 중공군의 12만 8000명의 대군이 도강하는 정보를 놓쳤다. 그후 포로된 중공군의 실체를 보고 받았으나 이 또한 간과하였다. 유엔군은 국지전에서 전술적으로는 우세한 전투가 많았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만주 폭격을 허용하였다면 한반도는 통일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아쉬움이 앞선다.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 부근에 매복한 중공군의 유인작전에 완전포위되어 북진을 멈추고 후퇴하며 막대한 인명손실로 그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동상과 동사의 위협 속에 힘겨운 후퇴를 하면서도 미 해병대의 자존심 때문에 후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격한다”는 억지를 쓰며 흥남으로 퇴각하였다. 기록영상이나 전쟁사를 보면 연합군은 항공지원과 막강한 대량살상의 화력을 가졌지만 파도처럼 겹겹으로 밀려오며 꽹가리, 피리, 수류탄으로 무장한 야간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20대의 젊은 청년들이 미국의 풍요로운 삶을 등지고 오직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에 입대하여 듣도 보지도 못한 한국의 산하에서 꽃같은 목슴을 바쳐 산화한 그들을 생각할 적에, 전후 미국 땅에 정착한 재미 한인의 한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것 같다. 한반도를 지켜주며 산화한 미국 군인들과 참전하였던 미군 장병들에게 12월의 추위 속에서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윤봉춘 / 수필가이 아침에 장진호 전투 다큐멘터리 장진호 장진호 부근 다큐영화 시사회

2021-12-10

장진호 전투 미군 70년 만 부모 곁 안장

미시간 지역 언론은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기관(DPAA) 발표를 인용,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행방불명된 육군 소속 윌리엄 E.캐벤더 병장의 유해가 고향 미시간주로 돌아와 가족 품에 안겼다고 지난 14일 전했다.   캐벤더 병장은 이날 오후 어릴 적 살던 동네인 미시간 중부 소도시 레슬리에 있는 공원묘지의 부모님 곁에 안장됐다.   안장식에는 육군 소속 현역 및 예비역 장병들이 다수 참석했고, 예포로 애도와 조의를 표했다.   캐벤더 병장은 1950년 11월 28일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에서 소속 부대원들과 함께 중국군의 공격을 받은 후 실종된 것으로 보고됐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평생 기다리던 부모님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이미 팔순이 다 된 두 여동생이 오빠의 유해를 맞았다.   이들은 “오빠와 나이 차이가 10살 이상 나기 때문에 많은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오빠가 해외로 파병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알고 있다”며 “오빠의 실종은 가족 모두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고 전했다.   이어 “오빠가 하늘나라에서 부모님과 다시 만나는 생각을 하며 위로로 삼는다”면서 “유해로나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정부의 노력에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2021-10-17

미군, 카르자이 대통령 친척 살해

아프가니스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의 가까운 친척이 외국군에 의해 살해됐다고 카르자이 대통령의 형제와 현지 관리들이 10일 밝혔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친동생 아흐마드 왈리 카르자이는 본인 아버지의 사촌인 인척이 밤사이에 남부 칸다하르주 씨족 마을의 자택 부근에서 미군 주도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전했다. 칸다하르주의 함둘라 나제크 지사는 나토군이 전날 밤 헬리콥터로 단드 지구에 도착해 급습작전을 펼쳤다고 설명했다. 나제크 지사는 나토군이 한 가옥에 돌진하면서 “하지 야르 모하마드 칸이 순교했다”며 현재 자세한 내막을 조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왈리 카르자이는 “그건 실수였다. 미군이 작전을 벌였고 친척이 집에 있다 밖에 나왔다가 총격을 받았다”고 확인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이날 아침 친척이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극도로 슬퍼했다고 대통령 대변인이 밝혔다. 한편 남부 자리 지구 부근 파슈몰 마을에서 전날 늦게 경찰이 남자 3명과 여자 2명 등 5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민들이 주장했다. 30~60명의 마을 주민들은 칸다하르주 지사 관저 앞에서 모여 경찰의 급습 도중 이들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항의하는 시위를 펼쳤다. 또한 북부 쿤두즈주 차르다라 지구의 굴람 모흐유딘 경찰국장은 9일 아침 유탄을 맞고 여자 1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연합]

2011-03-10

"아프간 파병 절대 없을 것" 러시아 부총리, 나토 주둔군에 장비·정보만 지원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부총리(사진)는 7일 러시아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원하고 있지만 자국 군대를 투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이바노프는 이날 싱가포르에서 열린 샹그릴라 아시아안보회의에서 "내년이면 ISAF가 구 소련의 아프간 주둔 기록을 깰 것"이라며 "러시아군이 아프간에 가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바노프는 "그 이유는 알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미국과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할 것인지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구 소련은 지난 1979년 아프간 침공으로 1만3000여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으며 1989년 완전히 철수했으나 결국 연방의 와해로 이어진 쓰린 경험이 있다. 이바노프 부총리는 그러나 러시아가 장비와 운송ㆍ정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아프간 주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국제안보지원군(ISAF)을 지원하고 있다면서 미국에 아프간전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아프간 전략에 대한 평가를 묻자 "솔직히 국방장관ㆍ정보기관의 수장들ㆍ국무부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 논의는 했다"며 "만약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답은 하겠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탈레반 반군에 맞서 군사적 노력을 지원하려면 아프간의 사회ㆍ경제적 기반 시설을 개선하는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2010-06-07

아프간전 개전 104개월…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

'USA투데이'는 28일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6월로 개전 104개월째를 맞게 되며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으로 기록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인 10월7일 '테러와의 전쟁'이란 기치 아래 아프간 주요 도시에 대한 공습으로 시작된 아프간전은 내달 7일로 104개월(8년8개월)로 접어든다. 아프간전은 지금까지 베트남전이 갖고 있던 최장 전쟁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베트남전은 하원이 1964년 8월7일 북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통킹만 결의안'을 통과시켜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전권을 부여한 날부터 1973년 3월 마지막 미 지상군이 철수한 날까지 103개월 계속됐다. 미군이 참전한 이라크전의 경우 86개월째 계속되고 있고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은 81개월 남북전쟁은 48개월 제2차 세계대전은 44개월이 지나서 막을 내렸다. 이와 관련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을 공격하려는 극단주의 세력을 붕괴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제"라며 아프간전을 지속하겠다는 공약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아프간전 미군 전사자가 1000명을 넘은 것으로 집계되며 향후 오바마 행정부의 아프간 전쟁 수행은 국민설득 작업과 같은 난관이 예상된다. AP통신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진 미군 전사자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전사자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에서 숨진 15명을 포함한 숫자다. 아프간 미군 전사자 수는 이라크전 사망자 4391명보다 적고 베트남전 5만8209명에 비해서는 훨씬 적은 것이다. 미군이 참여한 전쟁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경우는 남북전쟁으로 62만5000명이 숨졌고 2차대전에서 40만5399명이 사망했다. 한편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배치 병력은 9만4000명으로 이라크 주둔 9만2000명을 추월했다. 이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처음이며 국방부가 이라크 주둔 병력을 점진적으로 철수시키는 대신 아프간에는 병력을 증파하는데 따른 결과다.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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