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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별의 노래, 동심초

남편의 마지막을 보살피던 친구는 생전에 네 것, 내 것 가리면서 까칠하게 굴었던 남편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떠나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친구는 금생(今生) 보다 전생(前生)과 보이지 않는 끈이 삼라만상 안에 우리를 묶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친구는 불교 신자가 아니다. 삼라만상이라…. 사전을 찾아보니 수풀 삼(森), 그물 라(羅), 일만 만(万), 코끼리 상(象), 네 글자로 만들어진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심오한 뜻이 있어 보였다. 나무 목(木)자 세 개가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아, 울창한 나무숲을 뜻하는 것 같다. ‘빽빽한 나무숲에, 만 마리의 코끼리가 망에 갇혀 있다?’ 무척 답답한 형상이다. 그것이 우리 생이란다.     친구는 한 줌의 재로 남은 남편을 흰 항아리에 넣어서 비둘기 한 마리가 겨우 들락거릴 수 있을 만한 작은 공간에 놓아두고, 자리를 뜨면서 허무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했던 긴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방정식을 잘 풀었는지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구는 남편과의 이별을 그렇게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많은 부고(訃告)가 도착했다. 어느 때보다도 죽음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함께 가족으로 살았던 길고양이 두 마리도 우리 곁을 떠났다. 세상을 뜬 친지들은 코비드19 때문에, 코비드 백신 부작용으로, 암 때문에, 또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이생을 떠나서 가야만 하는 다음 세상이 어디인지 모른다. 모르니까 흔히 이터니티(eternity)라 하고, 이를 영겁의 곳, 영원한 시간이 있는 곳 정도로 얼버무린다. 그런 테마를 갖고 쓰인 자서전적 책, 소설, 영화, 드라마도 심심치 않게 부상한다. 요즘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천당이나 지옥에 안착하기 전에 거쳐야 한다는 중간 지점, 연옥에 있다가 다시 깨어난 후에, 이생과 그 중간 지점을 넘나들고 살면서, 악귀들을 잡아 영원히 가둔다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허상인 것을 알면서도 시청률이 높은 것은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되돌아보면,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들은 집단적인 이별을 많이 겪었어야 하는 팔자였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4개의 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까지….이별의 괴로움으로 늘 가슴이 아팠던 엄마는 아픔을 삭여 보시려고 그랬는지, 평생 우울을 되씹으며 사셨다. 우울은 괴로움을 그리움으로 덮었고, 죄 없는 엄마는 그리움이 죄인 양, 이에 대한 보속(補贖)을 연일(連日) 하셨다.     하루 중에 엄마가 가장 괴로워했던 시간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이었다. 손위 형제들이 집을 떠난 후라, 거의 혼자 자라다시피 했던 나는 우울한 엄마에게 싸이코테라피스트 역할도 했다. 그런 시간이면 엄마가 좋아하는 신청곡을 받고, 독창을 하곤 하였다. 많은 레퍼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엄마는 ‘동심초(同心草)’라는 가곡을 자주 듣고 싶어 하셨다.     ‘동심초’는 ‘산유화’, ‘이별의 노래’, 동요 ‘잘 자라 우리 아가’로 우리에게 친근한 김성태 작곡가가 만든 가곡으로 6·25 전쟁 이후 소개된 곡이다. 가사는 순수 한국 시가 아니고 7세기 중국 당나라 시를 김안서 시인이 번안(원작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풍소, 인명, 지명등을 작기 나라에 맞게 바꾸어 고치는 것)했던 것이라고 한다. 김안서 시인은 1950년 납북된 언론인이며 작가이다.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고, 김소월의 스승이었으며, 타고르의 ‘키탄잘리’를 번역하기도 했다. 1950년 납북된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한국민족의 슬프고 어두운 역사의 한 부분이다. 참고로 신사임당이 작사자라는 것은 낭설이다.   ‘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동심초(同心草)’란 같은 마음을 나누는 종이(草)라는 뜻으로 현대말로 표현하자면 ‘러브레터’이다. ‘풀 초(草)’가 들어간 것은 종이는 풀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가사가 여류시인인 설도(薛濤)가 쓴 춘망사(春望詞, 봄날의 바램)‘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이 2017년 1월 5일자, 새만금일보 ’동심초는 과연 풀이름인가‘라는 정복규 기자의 글에 자세히 발표된 바 있다.) 정기자는 김억(김안서)가 했던 말, ’시의 번역은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라는 내용도 곁들였다. 내가 보기에도 ’동심초‘ 가사는 원문의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 창작 같아 보인다. 나도 이 분석을 읽을 때까지, 동심초는 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동심초‘ 노래를 불러 드릴 때, 엄마의 그리움을 잘 표현하려고, 꽃이 바람에 지는 것을 상상하면서 멋을 부려가며 노래하곤 했다. 번역이 아닌 번안한 말들이었기에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 같다. 애절하고 충분한 위로의 말들로 이어졌던 노래이었다. 다시는 이생에서의 만남이 없을 이별이었건만, 떠난 이와 같은 마음을 보이지 않는 종이에 써서, 바람에 날려 보내곤 하셨을 것이다. 친구도 그가 남편과 함께 이루었던 사랑을 방정식으로 써서 지금 바람에 날려 보내고 있지 않을까.  류모니카 / 종양방사선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수필 이별 동심 김안서 시인 코비드 백신 친일반민족행위 명단

2023-09-0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이별 연습

성경 전도서에 보면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으면 아플 때가 있고, 재물을 얻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고, 좋을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사랑을 받을 때가 있으면 사랑을 받지 못할 때가 있고, 인정을 받을 때가 있으면 인정을 받지 못할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고, 평안할 때가 있으면 근심할 때가 있고, 행복할 때가 있으면 불행할 때가 있고, 성공할 때가 있으면 실패할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죠.   우리는 즐거운 상황을 만나기도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땐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그 상황을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문제의 열쇠가 되겠지요.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가 지은 시 가운데 죽음과 삶을 나타내는 두 개의 격언이 있지요. 그 하나가 메멘토 모리이고 다른 하나가 카르페 디엠이지요. 메멘토 모리는 자신이 언젠가 죽는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진지하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이겠지요. 카르페 디엠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라는 의미로 지금 접해있는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겠지요. 아무리 위대한 인간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잊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현재에 충실하며 오늘을 살라는 말이지요.     한해가 다 지나가고 있어요. 한 주 전 시카고에 폭설이 온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큰 눈은 내리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던 폭설은 그냥 이야기로 묻혀 버렸네요. 그런데 나는 폭설이 기대 되었어요. 폭설에 푹 묻히고 싶었어요. 나는 하늘이 하얗게 내려앉은 폭설에 깊이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를 그려보는 상상을 했어요. 생각도 잠기고, 시간도 잠기고, 미세한 움직임마저 잠겨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기다렸다고나 할까요?   정오가 지나갈 무렵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고 이내 세상은 하얗게 물들고 나무 가지마다 눈꽃이 피었어요. 눈이 쌓일수록 마음 속은 거추장스런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린 수묵 산수화처럼 흑백의 단순한 세상 속으로 나를 이끌고 갔지요. 데크 위에 설치한 카노피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내듯 마음속 상념을 털어내었어요. 차가 끊기고 사람의 발길이 사라진 거리에는 바람이 실어다 주는 희끗한 눈발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죠. 눈으로 시작된 하루가 온 종일 눈으로 꽃을 피우고 눈으로 채워져 갔지요. 높은 나무 잔가지가 눈 무게에 견디다 못해 툭 툭 부러졌지요. 쌓인 눈 위로 마른 나뭇잎들이 바람에 미끄러지듯 빠르게 구르고 있어요.   이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나이가 되었나 봐요. 돌아보면 그 길 끝에서 힘들었던 시간들이 보이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넘어 문득 아픔의 시간들도 다가 오고 있어요. 늘 바쁘게 살았고 걷기보다는 뛰어야 할 시간이 더 많았던 한 해. 서로를 돌아보지 못한 분주함으로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주기 보다 내 생각을 고집하며 살아온 순간들이 많았어요.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야 함’이 마땅함에도 겸허한 마음으로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간들이 후회가 되네요.   Fireplace에 불을 집히고 깊숙이 앉아있어요. 한 해를 돌아 보는 시간, 스치는 모든 일상이 내게는 스승이었고, 다정한 친구였고, 따뜻한 연인이었어요. 내게 다가왔던 모든 순간의 일들은 생각하고 다짐해야 할 삶의 화두였고, 헤쳐 나가야 할 하루의 과제였어요.     나무가 불 길을 내며 타오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어요. 우리 인생도 이처럼 훨훨 타오를 때가 있었지요. 누구도 말리지 못할 만큼 쉬지 않고 달려 갔던 시간이 있었지요. 불꽃이 시들어 가면서 나무는 마침내 재가 되어 가고 있어요. 이 작은 몸에 지나간 모든 일들을 채워놓을 수 없어 장작이 꺼져가듯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 슬프고도 행복한 추억들을 하나 하나 끄집어내 이별을 고하고 있어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이별 연습 이별 연습 마음속 상념 나무 잔가지

2022-12-29

[중앙 칼럼] 죽은 자와 산 자의 이별 시간

1980년대 한 시골마을. 대여섯 살 남짓한 아이들이 한 무리의 뒤꽁무니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긴 행렬 앞에서 동네 아저씨들은 커다란 꽃상여를 어깨 위로 맸다. 꽃상여 앞쪽에는 한 할아버지가 앉아서 손에 든 작은 종을 쳤다. 그 할아버지가 긴 곡조로 종을 치면서 뭐라고 노래하면, 상여를 맨 아저씨들과 뒤따르던 이들은 ‘어~야~어~여~어~’라고 장단을 맞췄다. 꼬맹이 눈에 그 모습은 묘한 신비로움이었다. 꽃상여는 고인의 추억을 달래듯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장지로 향했다. 그 소박한 행렬은 장엄해 보였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 꽃상여 소리마저 정겨움으로 남아 있다. 꼬맹이에게 죽음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저 꽃상여 무리 뒤꽁무니를 따라가면 중간 쉬는 길목에서 빵을 얻어먹을 수 있어 기뻤다. 유년시절 각인된 추억이다.   성인이 되고 처음 마주한 죽음의 실체는 할아버지와의 이별이다.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할아버지는 5년 이상 전동휠체어에 의지하시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다. 육신과 정신의 간극을 극명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육신은 이미 생명을 다했다. 각종 의료기기의 도움 없이는 육신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정신은 맑았다. 할아버지는 말 안 듣는 육신 때문에 짜증도 냈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는 간호사를 부르더니 “수고혔어. 고마워…”라고 인사했다. 간호사는 생명이 다한 노인의 마지막 인사를 직감했던 걸까.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할아버지는 퇴원 2주 뒤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의식은 또렷했다. 기능을 다한 육신 때문에 그분의 의식마저 사라진다는 사실, 지켜보는 이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란 실체를 온몸으로 체험한 시간이었다. 결국 의식마저 사라진 할아버지의 시신을 만지며 죽음이란 허망함을 곱씹어야 했다. 인간의 의식은 육신에 갇힌 유한한 인생이란 자각이 컸다.   죽은 자와 산 자 이별의 시간은 정신이 없었다. 삼일장이 치러지는 동안 가족은 문상객을 받느라 녹초가 됐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 친지는 그나마 위로가 됐다. 장례식장과 장지로 이어지는 삼일장은 그렇게 끝이 났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인과 마지막 이별을 하는 시간은 장례식이다. 이제는 시골마을에서의 삼일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에서 틀에 박힌 절차를 밟는 과정을 당연시한다. 미국은 한 번의 추모식으로 끝나 더 간소하다.   장례식,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마지막 인사다. 영영 떠나는 이의 넋을 위로하고, 이승에 남은 자들은 미안함과 그리움을 애써 달래는 자리다. 진심을 매만지고 인생의 의미를 되짚는 진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최근 한인사회에 고인과 이별하는 장례식의 변화가 눈에 띈다. ‘가족장’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장은 유족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에 집중한다고 한다. 고인의 부고를 굳이 널리 알리지 않는다. 문상객도 가족과 친지, 평소 고인과 정말 친하게 교류한 이들만 모인다.     한 세대 이상 장례식을 도운 장의사들도 가족장을 추천한다. 수많은 고인과의 이별을 지켜본 이들 눈에도 가족장이 주는 ‘울림과 깊이’는 크다고 한다. 한 장의사는 “장례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자”고 묻는다. 그는 고인을 기리는 자리가 아닌 유가족의 허례허식이 주가 되는 요즘 장례식을 아쉬워했다. 장례식만큼은 ‘죽은 자와 남은 가족의 진중한 이별’에 의미를 두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김형재 / 경제부 부장중앙 칼럼 이별 시간 진중한 이별 진중한 시간 자의 이별

2022-09-08

[수필] ‘윈디’와 이별하기

“더는 너의 희생을   요구할 수가 없구나 몸 지탱하는 것이   고통이 되었고   숨쉬기가 그렇듯   힘이 드는데 어찌 널   사랑한답시고   그 상태로 견디라고…”     밤새 비몽사몽간에 윈디의 상태를 살피며 잠을 설치는 날들. 숨소리가 안 들린다. 벌떡 일어난다. 윈디도 기척을 느끼곤 움칠한다. 아직 살았구나. 안심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면 살아있는 윈디를 보게 해주심에 먼저 감사드린다. 이어 윈디에게도 고맙다 말한다. 행복한 하루의 시작을 허락 받았음에 마음 뜨거워지며 일상을 시작한다.   이렇다 할 병은 없지만 늙어 기운 떨어지고 특히 소화기관이 작동을 게을리 하는 듯하다. 가끔 토하고 안 먹고 사흘 정도 끌면 남편과 난 윈디의 마지막이라 믿고 온갖 필요한 준비를 다하곤 했다. 남편 출근한 후 나 혼자 윈디를 간호하다가 진정 이별할 시간이라 생각되어 사진도 찍고 울며불며 이별 준비하기를 대여섯 번. 그러다 물 마시기 시작하고 조금씩 밥도 먹기 시작하면서 2~3주 살아낼 기운을 얻어 거짓말처럼 소생하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숨죽이고 윈디의 숨소리를 듣고자 가까이 간다. 다리를 쭉 뻗으며 기척을 보인다.     “에구 우리 이쁜 윈디, 잘 잤지요? 사랑해요. 나도 알아요. 윈디가 나를 사랑하는 거.”   이젠 혼자 일어나 바깥 잔디밭까지 걸어 나가지 못한다. 안아서 데리고 나가  잔디밭에 내려 놓고 배 둘레에 긴 띠를 둘러 잡아 들고 있으면 다리를 휘청거리며 간신히 볼 일을 본다. 그런대로 작은 볼 일은 쉽게 할 수 있지만 큰 볼 일은 좀 걸어야 나올 터니 20~30여 발자국 떼어 놓기가 여간 힘에 부치지 않는다. 힘들어 하는 윈디를 보는 나도 힘든다. 이제 그만 이 상황에서 헤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을 친다. 그러나 뒤 따르는 미안한 마음. 아마도 윈디는 이렇게라도 우리 곁에 있기를 원하겠지. 뒷바라지가 귀찮다는 엄마를 원망할까.   아니다. 윈디의 눈은 이렇게 말한다. 내 일상에 어느 순간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 이쁘다는 감탄사를 쏟아 놓을 상대가 있느냐고. 자기라도 있어 줘야 내가 기뻐할 수도 있고, 사랑한다 말 할 수도 있고, 쓰다듬어 주며 행복해 할 수도 있는데, 자기가 죽으면 엄마는  어찌 사느냐며, 버티기 힘들어도 나를 위해 윈디가 살아 있기를 애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내 일상이 그렇게 바삭 말라 있다. 윈디 눈빛이 말하는 그 거, 다 맞는 소리다. 그렇다고 숨이 곧 끊어질 듯 몰아 쉬는 괴로운 숨소리 어디가 아픈지 아파서 내는 신음소리 먹기는 잘 먹었는데 소화 못 시키고 누런 물까지 토해내는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 다리에 근육 다 빠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심지어 잠시 서 있기도 힘겨워 하는 모습, 죽은 듯 축 처져 밤낮을 가쁜 숨 몰아 쉬며 시간을 헤아리는 소리, 이젠 분 초를 헤아리고 있다.     윈디는 내게 기쁨을 준다. 윈디의 존재 만으로도 난 행복하다. 밥 달라고 미동도 않으며 줄 때까지 서 있는 끈질긴 모습에도 난 웃는다. 볼 일 보러 밖에 나가야 한다고 문 앞에 서서 조르는 모습도 이뻐서 어쩔줄 모른다. 힘겨워 할딱이며 축 처져 자는 모습도 내겐 감사함이니 엔도르핀 생성 조건이다. 건강할 때와는 달리 포옥 안겨 고개 떨구고 따끈한 체온 전해주는 것도 가슴 뛰게 하는 사랑 나눔이다.   이렇듯 내 욕심만 생각하며 적당히 일상을 조절해서 스키도 가고, 암벽등반도 가며 윈디를 집에 두고 다녔다. 그러나 이젠 잠시도 내 손길을 거둘 수 없이 윈디의 몸 상태가 나빠진다. 이런 상태라면 곁에 없는 나를 원망하며 홀로  아픔과 외로움으로 마지막 호홉을 몰아 쉬게 되겠지.     윈디에게도 최선이 되고, 나에게도 최선이 되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내게 기쁨이 되고자 애쓰는 윈디의 사랑을 크게 확대해서 내 마음에 담자. 윈디가 없어도 그 마음을 가슴에 안고 살면 여전히 난 커다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윈디야, 많이 많이 고마워. 분양하는 사람 집에 가서 ‘Show Dog Champion’ 종자인 너를 첨 봤을 때, 낯가림도 없이 내 목에 매달리던 이쁜 것. 그 순간 넌 내 딸이다 선언하고 입양을 결정했지. 그 후, 준비되는 한 달을 기다렸다  집에 데려온 후 오늘까지 넌 내 기쁨의 샘이었고 행복의 근원으로 너의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단다. 그래서 윈디야,  더 이상은 너의 희생을 요구할 수가 없구나. 몸 지탱하는 것이 고통이 되었고, 숨쉬기가 그렇듯 힘이 드는데 어찌 널 사랑한답시고 그 상태로 견디라고 내 욕심만 주장하겠니.       그래서 하나님께 부탁드렸어. 윈디가 가장 편안하게, 고통 없이 잠들게 해 주십사고. 그렇다고 내가 내 생활을 모두 접고 너만 지키며 살 수도 없으니 이쯤에서 우리 손을 놓자. 나와 너를 이어주던 단단하고 따스한 끈을 놓고 돌아서자. 내가 먼저 놓을게.   윈디 너도 마음 준비하고 편히 자렴. 고마워. 엄청나게 행복한 너와의 추억이 있어 앞으로도 넉넉하게 잘 살아갈 테니까. 내가 일상으로 돌아가 네 곁을 지키지 못하는 시간 말고, 이렇게 내가 네 곁을 지키고 있을 때, 내게 마지막 네 온기를 주고 편히 잠들면 제일 좋겠다. 하나님께서 그리 해 주시겠지.”   단단히 마음 준비하고 윈디가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련다. 그래도 윈디 뜻을 존중하며 인위적 이별 방법만은 피하고 싶다. 여전히 밥 먹을 시간 되면 배고프다 조르고, 억지로 힘을 내서 홀로 일어서려는 저 살고자 하는 의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다 읽고 있는 나와 남편의 마음이 사랑임을 윈디가 느끼게 하리라. 노기제 / 수필가수필 윈디 이별 윈디 눈빛 인위적 이별 이별 준비하기

2022-06-09

[추모의 글] 큰 스승과의 이별

한인사회 큰 어른이 우리 곁을 갑자기 떠나셨습니다. 랠프 안 선생 서거에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민족의 위대한 스승인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의 막내 아들인 랠프 안 선생께서 별세하신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습니다.   랠프 안 선생은 초기 이민사회와 지금의 이민사회에서 똑같이 존경과 사랑을 받은 ‘작은 도산’이셨습니다. 아버지 도산의 말씀처럼 항상 웃는 얼굴이셨습니다. 자상하고 긍정적 사고방식에 늘 겸손하셨지요. 항상 남을 칭찬했던 마음을 기억합니다.   안 선생은 무엇보다도 가정적인 분이셨습니다. 맏형인 영화배우이자 독립유공자인 필립 안을 아버지처럼 생각했고, 둘째 형님 필선 안에 대한 존경도 특별했습니다. 또한 수산 안과 수라 안 두 누나를 참으로 좋아했지요.     아버지 도산께서 1909년 2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회를 창립한 큰 뜻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 나와 차세대 학생들을 위해 독립운동 역사 설명을 자상하게 해준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2018년 8월 도산 안창호의 날이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제정됐습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과 흥사단, 미주도산기념사업회 등 애국단체가 주최하는 기념식 때면 꼭 참석해 감동적인 명연설을 하셨습니다.   리버사이드에 도산 동상이 세워지고 파차파 지역이 독립운동의 명소가 되기까지 헌신 또한 크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난해 7월에는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과 함께 흥사단 단소 보존을 위해 힘쓰셨습니다.   랠프 안 선생은 95세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항상 건강하셨습니다. 갑자기 떠나신 먼 길에 깊은 애도와 명복을 빕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차세대를 위해 도산의 독립운동 정신을 더욱 열심히 교육해 나가겠습니다.  윤효신·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이사장추모의 글 스승 이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흥사단 미주도산기념사업회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2022-04-26

[이 아침에] 이별을 위한 만남

 나이가 들면서 좋은 것 하나는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의 여유로움이라고 할까. 내 주위의 일들에 대해 크게 좋지도 썩 나쁠 것도 없이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힘든 이민 생활이 만들어준 내공 같은 것일 수 있고, 하나님이 나의 든든한 배경이라는 자신감일 수도 있겠다.   지인의 생일파티를 즐겁게 하고 돌아온 날, 한국에서 카톡이 여럿 들어와 있었다. 무음으로 휴대폰을 세팅해 놓았기에 몰랐다. 한국의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가 ‘임종실’로 옮겨 갔다는 비상사태를 알리는 거였다. ‘임종실’이라는 말에 가슴이 무너졌다. 엄마는 세상을 뜨려는데 외동딸은 희희낙락하고 있었다니, 눈물이 왈칵 나면서 무심하던 평소의 자세가 크게 흔들렸다.     나만 빼고 가족이 다 모였는데 반응 없던 엄마가 눈도 뜨고 발도 움직였다며 “어머니가 형님을 기다리시나 봐요” 하는 올케의 전언이다. 이별이 멀었다 싶었는데 깜짝 놀라 한국행을 서둘렀다.     격리 면제를 위한 서류를 만들고 영사관의 허락 받느라 꼬박 하루가 걸리고 다음날 밤 비행기로 한국에 왔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정말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엄마께 미안했다.   살아 생전에 뵙는 것과 장례식에서 만나는 건 의미가 매우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비행기 안에서 기도하고 기도했다. 다행히 엄마는 기다려주시고 딸과 사위를 보자 힘이 나신 듯 다시 병실로 옮겨 가셨다.     임종실과 중환자실을 여러 차례 오가는 어머니. 코로나 역병이 멀리서 온 딸과 죽음을 앞둔 엄마의 상봉을 가로막았다. 중환자실은 평소엔 면회가 안 되고 임종이 가까워야 비로소 식구들의 면회를 허가한다. 두 번 대면하면서 엄마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슬펐다.   격리 면제서를 들고 왔어도 다음날 관할 보건소에 가서 다시 한번 코로나19 테스트를 받고, 1주일 후 또 받았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꼼짝하지 말라고 한다. 과연 철저한 한국의 방역시스템이긴 하다.     하지만 쓸데없이 지나쳐 분통이 터진다. 아까운 날들이 낭비되어 어렵게 받아온 격리 면제서가 무색하다. 이별을 위해 먼 길을 온 가족들의 애달픈 마음도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번의 만남은 헤어지기 위한 만남이었다. 이별을 위한 만남. 엄마는 최선을 다해 나를 기다려주셨다. 엄마가 남아있는 우리들 걱정일랑 마시고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게 가셨으면 한다. 하늘에 먼저 터를 잡은 아버지도 만나고 이모도 만나서 활짝 웃으면서 지내시길 소원한다.     조카가 임신 사실을 알리니 알아들은 듯 기쁜 표정 지으셨다는 엄마. 1933년이 가고 2022년이 오는, 두 세대가 어느새 바통 터치를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신기한 하늘의 조율이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이별 격리 면제서가 임종실과 중환자실 코로나 역병

2021-11-14

[이 아침에] 이별을 위한 만남

 나이가 들면서 좋은 것 하나는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의 여유로움이라고 할까. 내 주위의 일들에 대해 크게 좋지도 썩 나쁠 것도 없이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힘든 이민 생활이 만들어준 내공 같은 것일 수 있고, 하나님이 나의 든든한 배경이라는 자신감일 수도 있겠다.   지인의 생일파티를 즐겁게 하고 돌아온 날, 한국에서 카톡이 여럿 들어와 있었다. 무음으로 휴대폰을 세팅해 놓았기에 몰랐다. 한국의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가 ‘임종실’로 옮겨 갔다는 비상사태를 알리는 거였다. ‘임종실’이라는 말에 가슴이 무너졌다. 엄마는 세상을 뜨려는데 외동딸은 희희낙락하고 있었다니, 눈물이 왈칵 나면서 무심하던 평소의 자세가 크게 흔들렸다.     나만 빼고 가족이 다 모였는데 반응 없던 엄마가 눈도 뜨고 발도 움직였다며 “어머니가 형님을 기다리시나 봐요” 하는 올케의 전언이다. 이별이 멀었다 싶었는데 깜짝 놀라 한국행을 서둘렀다.     격리 면제를 위한 서류를 만들고 영사관의 허락 받느라 꼬박 하루가 걸리고 다음날 밤 비행기로 한국에 왔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정말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엄마께 미안했다.   살아 생전에 뵙는 것과 장례식에서 만나는 건 의미가 매우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비행기 안에서 기도하고 기도했다. 다행히 엄마는 기다려주시고 딸과 사위를 보자 힘이 나신 듯 다시 병실로 옮겨 가셨다.     임종실과 중환자실을 여러 차례 오가는 어머니. 코로나 역병이 멀리서 온 딸과 죽음을 앞둔 엄마의 상봉을 가로막았다. 중환자실은 평소엔 면회가 안 되고 임종이 가까워야 비로소 식구들의 면회를 허가한다. 두 번 대면하면서 엄마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슬펐다.   격리 면제서를 들고 왔어도 다음날 관할 보건소에 가서 다시 한번 코로나19 테스트를 받고, 1주일 후 또 받았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꼼짝하지 말라고 한다. 과연 철저한 한국의 방역시스템이긴 하다.     하지만 쓸데없이 지나쳐 분통이 터진다. 아까운 날들이 낭비되어 어렵게 받아온 격리 면제서가 무색하다. 이별을 위해 먼 길을 온 가족들의 애달픈 마음도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번의 만남은 헤어지기 위한 만남이었다. 이별을 위한 만남. 엄마는 최선을 다해 나를 기다려주셨다. 엄마가 남아있는 우리들 걱정일랑 마시고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게 가셨으면 한다. 하늘에 먼저 터를 잡은 아버지도 만나고 이모도 만나서 활짝 웃으면서 지내시길 소원한다.     조카가 임신 사실을 알리니 알아들은 듯 기쁜 표정 지으셨다는 엄마. 1933년이 가고 2022년이 오는, 두 세대가 어느새 바통 터치를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신기한 하늘의 조율이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이별 격리 면제서가 임종실과 중환자실 코로나 역병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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