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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몽상] 미남 배우 ‘아랑 드롱’의 추억

그를 예전에 한국에선 ‘아랑 드롱’이라고 불렀다. ‘아랑 드롱처럼 잘 생겼다’나 ‘한국의 아랑 드롱’ 같은 말은 그의 영화를 동시대 극장가에서 본 적 없는 아이들도 무슨 말인지 또렷이 알았다. ‘아랑 드롱’은 미남의 대명사였고, 그는 곧 ‘세기의 미남’이었다. 이달 중순 별세한 배우 알랭 들롱 얘기다.   개인적으로 그의 외모에 감탄한 건. 뒤늦게 TV에서 본 영화 덕분이다. 제목도 줄거리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마지막에 그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영화였다. 추정컨대 시몬 시뇨레와 함께 나온 ‘미망인’(1971, 원제 Le Veuve Coderc) 아닐까 싶은데, 확실하지 않다.   사실 그가 마지막에 총에 맞아 죽는 영화는 한둘이 아니다. ‘암흑가의 세 사람’(1970, 원제 Le Cercle Rouge)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그는 5년 만에 감옥에서 나와 탈주범, 전직 경찰과 손잡고 보석상을 터는 역할이다. 얼굴에 콧수염을 붙였지만, 미남인 줄 몰라보긴 힘들다. 더구나 그의 ‘바바리 코트’ 차림은 극 중 상황을 모르면 패션 화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물론 ‘태양은 가득히’(1960, 원제 Plein soleil)를 보지 않고 ‘아랑 드롱’을 말하기는 힘들다. 당시 25세의 그는 잘 생긴 외모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청년이 아니라 부잣집 아들의 가난한 친구 톰 리플리로 나온다. 말이 좋아 친구지, 부잣집 아들 필립은 톰을 하인 대하듯 한다.   톰은 요트 위에서 필립을 죽이고, 그의 서명과 편지를 위조하고,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넘기고, 결국 바라던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듯 보인다. 그 다음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톰의 거짓말과 살인은 이제 막 탄로가 났는데, 톰 자신은 이를 모른 채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와 전혀 다른 결말이다. 덕분에 그 미소는 일그러진 청춘의 욕망을 응축한 듯 보인다.   “눈빛은 그 사람의 영혼을 나타내는 것”. 그가 1996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당시 내한 목적은 그의 이름을 딴 코냑과 향수 홍보였으니, 한국 영화계와의 접점이라면 2007년 칸영화제를 꼽게 된다.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 당시 시상자가 바로 그였다. 지금 찾아보니 당시 기사에 ‘세기의 미남’이란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 그의 삶에 대해 잘 몰랐다. 스타의 언행이 실시간 전파되는 요즘 같은 시대를 거쳐왔다면, 그처럼 ‘세기의 미남’으로 기억이 봉인되는 배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족으로 덧붙이면 ‘리플리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거짓말을 거듭하다 스스로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는데, ‘태양은 가득히’에는 이런 묘사가 없다. 의심스러우면 찾아보시길. OTT에 알랭 들롱의 출연작이 여러 편이다. 이후남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미남 배우 미남 배우 한국 영화계 배우 알랭

2024-09-02

[영화몽상] 물과 불이 서로 사귈 때

불과 물과 흙과 공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라면 몰라도, 21세기에 이런 네 가지 원소로 세상이 이뤄져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애니메이션 같은 판타지의 세계에서라면 몰라도 말이다.   국내 극장가에서 500만 넘는 관객을 모은 ‘엘리멘탈’이 바로 그런 애니메이션이다. 네 원소가 마치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도시에서 ‘불’에 속하는 앰버가 주인공이다. 앰버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이 도시로 이주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주민 2세대. 아버지가 맨손으로 시작해 일군 가게를 외동딸 앰버가 언젠가 물려받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하고 기대하는 바다.   문제는 그야말로 불같은 성격. 앰버는 손님들의 이런저런 요구에 아버지처럼 능숙하게 대처하는 대신 종종 불같이 화를 내며 폭발한다. 그러다 어느 날 대형 사고를 친다. 이를 수습하려다가 시청 공무원이자 물에 속하는 청년 웨이드와 엮이게 된다. 적대적 관계로 처음 만난 두 사람, 아니 원소는 점차 서로에게 이끌린다.   불과 물이라니, 상식적으로 상극 중에 상극이다. 서로 만나면 치명적이다. 불이 꺼지든 물이 끓어 기화하든 서로의 존재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 게다가 불은 이 도시에서 다른 원소들과 어울리지 않고 특정 지역에 모여서 살아왔다. 암암리에 차별도 받았다. 어린 시절 앰버도 그런 경험이 있다. 이와 달리 물은 이 도시의 주류다.   한데 이런 설정이 낯설지만은 않다. 신분과 빈부의 차이에 더해 서로 첫인상부터 나빴던 두 주인공이 결국 사랑에 빠지는 건, 한국 로맨스 드라마에서도 자주 보아온 전개다. 흔히 비슷한 사람에게 끌린다고 하지만, 세상에 꼭 같은 사람은 없다. 차이를 넘어서는 것은 극적 로맨스의 필수 과정이나 다름없다.   이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게 그래서만은 아니다. 앰버는 웨이드와 만나면서 자신의 재능에 새로이 눈을 뜬다. 가게를 물려받는 것 이외에 다른 삶을 꿈꿔 본 적 없는 앰버는 혼란에 빠진다. 그는 부모의 헌신과 희생을 절감하며 자란 자녀, 그래서 부모에 반항하거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 체화한 자녀다. 한국 사회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부모-자식 관계다.   눈에 띄는 건, 그렇다고 앰버가 엄청난 자기 확신 속에 새로운 인생을 추구하게 되는 건 아니란 점이다. 따지고 보면 젊은 날 아버지의 선택에 비하면, 앰버의 선택은 반항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부모가 원하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길에서 벗어나, 기존에 생각해 본 적 없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직접 타진해 보기 위해 조심스레 한 발을 떼는 정도에 가깝다. 돌아보면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이 새롭기보다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외동딸 앰버 시절 앰버

2023-07-26

[영화몽상] 모험 영웅의 마지막 귀환

1980년대의 영화 팬이라면 ‘인디아나 존스’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4편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털 해골의 왕국’은 2008년인데, 1편 ‘레이더스’부터 3편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까지는 모두 80년대에 개봉했다.   개인적인 기억은 2편 ‘인디아나 존스’부터다. 중·고교마다 전교생 단체관람으로 ‘킬링 필드’를 보러 가던 때로 기억하는데, 이웃 학교 고학년들이 단체관람을 빠지고 다른 영화를 보러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업 대신 영화를 보는 자체가 좋았던 터라 그 이유를 몰랐다. 바로 그 영화가 ‘인디아나 존스’였다.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다.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배경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액션, 임기응변에 능한 주인공의 매력과 흥을 돋우는 음악까지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맛을 제대로 알려줬다. 주인공이 고고학자인지, 고고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정확히  알았던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요즘 처음 봤다면 감상이 좀 달랐을지 모르겠다. 서구 이외의 세계를 묘사하는 할리우드의 시선, 남의 나라 유물을 약탈했던 제국주의 역사를 의식하며 비판할 점부터 찾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새로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은 4편 이후 15년 만에 나온 5편. 30대에 인디아나 존스를 연기하기 시작한 해리슨 포드는 이제 80대 초반이다. 극 중 젊은 시절 묘사에 디지털 기술의 도움을 받을 거라는 건, 이미 알려졌던 터. 영화를 보면서는 엉뚱한 걱정을 혼자 했다. 대역 등이 있었더라도 액션 장면이 이 배우에게 과하진 않았을까, 이러다 인공지능으로 해리슨 포드를 만들어 시리즈를 이어가면 어쩌지 등등. 알고 보니 전편들의 설정에 따르면 인디아나 존스는 1899년생. 1969년이 주요 배경인 이번 영화에서는 아직 70대 초반이다. 또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영화사 디즈니는 이번이 시리즈의 마지막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어찌 됐건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야 비로소 안도했다. 교수도 퇴임하고 아내와도 별거하던 인디아나 존스는 옛 동료의 딸 때문에, 나치 잔당에 맞서 고대 아르키메데스의 발명품을 찾으려는 모험에 나섰다가 무사히 집에 돌아온다. 명성을 얻는 대신 상처 많은 삶을 마주하며 회복을 꿈꾸는 결말이란 점도 마음에 들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아닌 다른 감독이 이 시리즈를 연출하는 건 처음인데, 각본에도 참여한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이 시리즈의 미덕을 잘 아는 듯 보인다. 위치 추적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물론 실제는 디지털 기술을 많이 결합했겠지만, 아날로그 단서와 탈 것만으로 시리즈의 고전적 추격전을 펼친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할리우드에서도 실현되기를,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도 여기서 마무리되기를 바라게 된다. 이후남 /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모험 영웅 할리우드 오락영화 영화사 디즈니 추격전과 롤러코스터

2023-07-09

[영화몽상] 아는 영화와 아는 재미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험상궂은 폭력배들이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그 순간, 덩치 좋은 사내가 나타나 다짜고짜 이들을 제압한다. 과연 누구길래 이런 활약을 보여주는 걸까.   설명은 필요 없다. 이 영화 시리즈는 지난해 2편이 무려 1269만 명, 앞서 1편도 688만 명이나 관람했다. ‘마석도’라는 극 중 이름은 몰라도, 이를 연기한 배우 마동석을 몰라보긴 힘들다. 그 캐릭터를 모른 채 지금 ‘범죄도시3’을 보러 가는 관객은 별로 없다. 프랜차이즈라고도 불리는 시리즈 영화, 그 속편의 강점이다.   올해 극장가는 유독 속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할리우드 영화로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편이 약 400만, ‘존 윅’ 4편이 약 200만 관객을 모았다. 각각 시리즈 역대 최고 성적이다. 10편에 이른 ‘분노의 질주’도 170만 관객을 모으는 저력을 발휘했다. 앞으로 개봉할 속편도 여럿이다.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은 5년 만에, 해리슨 포드의 ‘인디아나 존스’는 15년 만에 신작이 나온다.     물론 속편이 모두 재미있는 것도, 늘 흥행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속편은 대개 전작과 비교되게 마련. 익숙한 설정을 사골 국물 내듯 우리고 우려내다 보면 관객에게 피로감을 안겨주기 십상이다. 속편에 대한 할리우드의 높은 의존도는 영화 산업의 창의력 고갈을 보여주는 것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할리우드는 줄기차게 속편을 만든다. 전혀 새로운 영화보다 흥행에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지도 낮은 새 영화보다는 홍보도 쉽다.   어쩌면 요즘 관객도 이와 통하는 것 같다. 자주 극장을 찾는다면 몰라도, 1년에 한 두 번 나들이한다면 시쳇말로 ‘믿고 보는’ 영화를 찾게 마련이다. 아는 영화, 성공한 시리즈의 속편은 그래서 유리하다. 알다시피 한국 영화산업은 코로나19 팬데믹의 타격 이후 전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는 네 편을 넘다가 팬데믹 이후 한 편 정도로 급감했다. 지난해 나아졌다고 해도 두 편 정도다. 게다가 팬데믹 시기 OTT라는 대체재도 떠올랐다. 영화 관람료도 올랐다. “관객들이 볼 작품을 더욱 신중히 선택”한다는 것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지난해 한국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의 분석이다.   아는 맛은 무섭다. 지난 주말 ‘범죄도시’를 보러 간 극장에는 중장년 관객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최근 자주 보지 못한 풍경이다. 물론 한 편이 잘 된다고 다른 영화까지 관객이 늘어나는 낙수효과를 기대하긴 힘든 시장이다. 그럼에도 기대를 갖게 된다. 친숙한 속편의 맛이 극장에서 영화 보는 맛, 누구나 알지만 한동안 잊은 재미를 되살리는 징검다리가 됐으면 싶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영화 재미 영화 관람료 지난해 한국영화산업 영화 시리즈

2023-06-07

[영화몽상] 어느 비디오 가게 사장님의 전성시대

예전에는 ‘비디오 가게 주인’을 꿈꾸는 회사원들이 드물지 않았다. 좋아하는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즘으로 치면 ‘덕업일치’를 꿈꿨던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할리우드 유명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젊은 시절 비디오 가게 점원이었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수많은 작품을 갖춘 비디오 가게는 때로는 필름 아카이브나 영화 학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중에도 뉴욕의 ‘킴스 비디오’는 보통 비디오 가게가 아니었다. 재미교포 김용만씨가 1980년대 중반 창업한 곳인데, 예술영화와 B급영화를 아우르며 희귀본 비디오를 잔뜩 구비해 뉴욕의 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1996년 8월 3일자 중앙일보 기사는 “소장 테이프의 양과 질에서 미국 최고 수준”이라며 회원 중에 뉴욕의 유명 감독들과 배우들, 뉴욕대 영화학과 교수들도 있다고 전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다큐멘터리 ‘킴스비디오’(원제 Kim‘s Video)는 그 화려한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다큐에 등장하는 예전 직원들은 이 유명한 가게의 대표적 지점이 2009년 문을 닫을 당시, 25만 회원 가운데 영화감독 코엔 형제는 연체료가 600달러나 됐다는 등의 얘기로 그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 이 다큐의 공동 감독 데이비드 레드먼 역시 왕년의 회원이자 영화광. 그는 지점이 문을 닫은 뒤 5만점이 훌쩍 넘는 소장 비디오의 행방을 추적한다. 뜻밖에도 이를 보관 중인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역의 작은 도시 살레미, 예전에 만난 적 없는 창업주 김용만 사장이 사는 뉴저지 등을 오가며 결국 그 비디오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   사실 흥미로운 건 이 다큐만이 아니었다. 이 다큐의 상영장 열기도 예사롭지 않았지만, 다큐의 주인공 격으로 영화제에 참석한 김용만씨에게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은 단연 이채로웠다. 대부분 비디오 세대로는 보이지 않는 젊은 관객들이었다.   디지털의 시대, 영화관 대신 OTT 서비스 등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일상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김 사장의 말마따나 비디오 가게의 “건방진” 점원들이, 웬만한 손님보다 아는 게 많은 점원들이 아니라 이용자 데이터에 기반한 알고리즘이 영화를 추천하는 시대다. 『도시의 승리』를 쓴 미국 하버드대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사람과 재능과 아이디어가 모이는 것을 도시의 강점으로 예찬한 바 있다. 비디오라는 물리적 매체와 비디오 가게라는 물리적 공간은 영화광을 불러 모으는 도시 속의 영화 도시이기도 했다. 그 열기가 영화제라는 한시적 물리적 공간, 일시적인 영화 도시에서 재현되는 걸 목격하는 건 흥미로운 체험이었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전성시대 비디오 비디오 가게 소장 비디오 시절 비디오

2023-05-03

[영화몽상] 왕관의 무게를 견딘 ‘칸의 여왕’

요즘은 한국 영화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탄들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이기가 겸연쩍다. 국제 영화제만 아니라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이미 엄청난 활약을 봤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작품상·감독상을 포함해 트로피 네 개를 휩쓸었고, 윤여정은 미국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서구의 국제 영화제 중 이름난 칸영화제는 말할 것도 없다.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즉 최고상을 안은 데 이어 지난해에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과 ‘브로커’의 송강호가 나란히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미래의 한국 관객들에겐 실감이 덜 할지 몰라도, 2007년 전도연의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은 호들갑을 떨고도 남을 일이었다. 한데 한국 배우 사상 첫 칸영화제 트로피가 그에게 영광만 안겨주진 않았다. 수상 이후 신작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오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든 데다, 들어오는 작품도 다양하지 않았다고 한다. ‘칸의 여왕’인데 이런 작품을 할까 하는, 그가 최근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쓴 표현을 빌리면 “무게감 있고 영화제에 갈 법한 작품”이나 “작품적으로 인정받는 작품”만 할 것이란 지레짐작이 작용했던 셈이다.   그가 연기 잘하는 배우,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인 배우란 건 진작부터 이견이 없었다. 동시에 그는 대중 스타, 멜로나 로맨스를 포함해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캐릭터로도 친근한 스타였다. 지난달 종영한 TV드라마 ‘일타 스캔들’은 그 장기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반찬가게 사장님이자, 조카를 딸처럼 키워온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고 연애하는 모습을 특유의 연기로 아주 사랑스럽게 그려냈다. ‘맞아, 전도연이 이런 배우였지’하는 느낌을 준달까.   이어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길복순’의 전도연은 또 다르다. 중학생 딸을 둔 엄마이자, 기업형 살인 청부 조직의 에이스 킬러로 등장한다. 장르의 전형성을 판타지적 스타일로 변주하는 이 영화는 이 관록의 배우가 지닌 이미지 역시 살짝살짝 변주해 투영하는 듯 보인다. 극 중 킬러들이 일할 때 ‘슛 들어간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 역시 총을 쏜다(shoot)는 뜻이 아니라 영화 촬영(shoot)에 킬러의 일을 비유하는 듯 들린다.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는 걸 밥 먹듯 해온 배우 메릴 스트리프는 수상 트로피들을 집에 전시해 두지 않는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적 있다. 영광의 순간은 흘러간다. 전도연이 이전에 보여준 연기의 스펙트럼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보여줄 게 많은 배우란 점에서 ‘칸의 여왕’으로만 그를 기억하는 건 공평하지 않을 듯싶다. 그게 한국 영화의 영광스러운 자산을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할 터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왕관 무게 칸영화제 트로피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국제 영화제

2023-04-12

[영화몽상] 코로나 마스크가 카메오?

억만장자가 소유한 그리스 외딴 섬 저택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섬에 있던 사람은 억만장자와 그의 초청을 받은 손님들뿐. 육지를 오가는 배는 끊긴 상태다. 고전적 추리극의 면모가 물씬하게 풍기는 이 영화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2019년 세계적으로 흥행한 ‘나이브스 아웃’에 이어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속편이다.   주요 출연진은 억만장자 역의 에드워드 노턴을 비롯 10명 안팎. 한데 엔딩 크레딧에는 이보다 많은 유명한 이름들이 눈에 띈다. 단역으로 잠깐 출연한 유명인 카메오가 많다는 얘기다.   그중 테니스 스타 세레나 윌리엄스나 첼리스트 요요마, 배우 휴 그랜트 등은 난도가 낮은 편. 누가 봐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반면 배우 조셉 고든 래빗을 비롯해 사전 정보 없이는 대체 무슨 장면에 어떻게 나왔는지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도 여럿이다. 덕분에 범인 찾기만 아니라 카메오 찾기로도 흥미를 부른다.   미국의 뮤지컬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도 쉬운 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과문한 탓도 있지만, 출연 장면이 워낙 뜻밖이라 짐작도 못 했다. 알고 보면 이 장면에 같이 나온 다른 세 사람도 모두 유명인. 왕년의 미국 프로농구 스타 카림 압둘 자바도 그중 하나다. 안젤라 랜스베리도 있다. 1980~90년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미국 TV 시리즈 ‘제시카의 추리극장’의 추리소설가 제시카였던 바로 그 배우다.   이들의 등장 장면도 그렇지만, 이 영화는 극중 시대 배경에 대한 단서를 또렷하게 흘려 놓았다. 손님들이 억만장자의 섬으로 가는 배에 타기 전, 경호원인 듯한 사람(알고 보면 카메오)이 뭔가 주사를 놓는 장면도 그 예다. 특히 손님들이 저마다 마스크를 쓴 채 선착장에 나타나는 모습은 단박에 코로나19 시대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가 지난 연말 넷플릭스에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해도, 마스크는 우리 일상의 필수품이었다. 이제는 의료기관, 대중교통 등을 제외하고 마스크 실내 착용 의무가 해제된 마당이다. 그런데도 습관처럼 마스크를 챙기곤 한다. 팬데믹이 불러온 고통과 비극을 그저 과거지사로 여기기에는 여전히 이른 것 같단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카메오는 카메오일 뿐. 마스크가 상징하는 코로나19는 저명 카메오들이 그렇듯 극중 사건 전개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어쩌면 카메오 아닌 주연으로, 인류가 가장 최근 경험한 팬데믹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라면 당분간은 굳이 볼 마음이 내키지 않을 듯싶다.   사족이지만 이 영화는 랜스베리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그는 지난해 이 영화의 공개 직전에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손드하임은 한 해 앞서 2021년 91세로 별세했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코로나 마스크 유명인 카메오 저명 카메오들 카메오 찾기

2023-02-08

[영화몽상] 포기하지 않는 마음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통념과 달리 관객 대부분이 성인이란 점부터 그렇다. 특히 30·40세대, 즉 성장기에 원작 만화 『슬램덩크』에 빠져들었던 세대가 흥행의 중심으로 꼽힌다. 이들 세대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 만화의 인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원작과 극장판이 20여년 시차를 두고 인기를 재현하는 현상은 단연 새롭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장편 만화 『슬램덩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건 1990년대. 일본 연재와 비슷한 시기다. 할리우드 수퍼 히어로 영화의 원작 만화와 달리 한국과 원작자의 고국에서 거의 동시에 팬이 형성됐다. 게다가 한국팬들에게는 주인공들이 ‘강백호’ ‘채치수’ ‘서태웅’ 같은 이름으로 각인된 것도 재미있는 부분. 처음 소개될 때 한국 출판사가 붙인 이런 이름은 지금 국내 극장가에서 상영 중인 극장판 자막 등에도 그대로 쓰인다.   물론 ‘슬램덩크’의 극장판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에서 인기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슬램덩크’도 만화 완간 전에 TV 시리즈와 더불어 극장판이 네 차례 나왔다. 당시는 영화·가요 등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본격화하기 이전이다. 개봉 가능성도 없었지만, 개봉했더라도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을지는 미지수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작에 충실한 일본 영화의 특징이 한국 극장가에서는 큰 매력을 끌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봤기 때문이다.   새 극장판은 각색부터 대담하고 창의적이다. 주인공은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농구 초심자이면서도 농구 천재를 자처하는 강백호가 아니라 키 작은 가드 송태섭. 새 극장판은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았다. 감독은 송태섭의 어린 시절이란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한편 만화에서부터 유명한 경기를 극적인 연출로 교차해 보여준다. 덕분에 옛 기억을 환기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서사로도 흡입력을 더한다.   비록 30·40세대는 아니지만, 낯익은 북산고 농구부 5인조가 스크린에 한 명씩 등장하는 순간 내심 반가웠다. 오랜 친구들끼리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들은 정말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고교생인 채로, 최강은 아닌 팀에서, 투지를 불태우며, 서로 부딪히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극장판에 거듭 나오는, 포기하는 순간 경기가 끝난다는 누군가의 대사는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현실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상대가 꼰대처럼 느껴졌을 텐데, ‘슬램덩크’의 세계에서는 마음을 내주게 된다. 소년 시절에, 아니 청년 시절에 만났던 성장담이 중장년에게도 소년의 마음을 다시 불러낸 덕분 같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마음 원작자 이노우에 인기 만화 퍼스트 슬램덩크

2023-01-23

[영화몽상] 나보다 멋진 나

출생의 비밀은 통속 드라마가 빈번하게 활용하는 극적 장치다. 그때마다 비판이 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장기에 한번쯤 이런 상상을 해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고귀한 집안이나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남모를 사연 때문에 지금 평범하다 못해 부족함 많은 집에서 자라고 있다는 식이다.   한데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달라진다. 제 뜻과 상관없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설움보다는 제 뜻에 따른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회한이 더 커진다. 이런 점에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원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가 선보이는 멀티버스는 어쩌면 ‘출생의 비밀’의 어른용 대체재라고도 할만하다.   이 영화의 멀티버스는 스파이더맨이나 닥터 스트레인지가 활약하는 마블 영화 시리즈의 멀티버스와는 좀 다르다. 이 멀티버스에서 ‘나’는 각 우주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데다, ‘나’는 다른 ‘나’들의 능력을 ‘버스 점프’라는 장치를 통해 흡수할 수도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에블린은 현재의 우주에서는 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중년 여성이다. 생계가 달린 빨래방은 세금 문제로 가압류된 데다, 레즈비언인 딸과는 갈등이 쌓여 폭발 직전이다. 이런 와중에 남편마저 이혼 서류를 내민다.   에블린을 연기한 배우 량쯔충(양자경)이 홍콩 무협·액션영화에서 활약해온 스타라는 건 주지의 사실. 영화는 이를 상기시키듯 레드카펫의 화려한 스타나 무협 고수를 비롯해 멋진 에블린을 여럿 보여준다. 뜻하지  않게 우주의 구원자로 낙점된 에블린은 이런 능력을 그때그때 흡수하며 적들에 맞서 화려한 액션 활약을 보여준다. 다만 ‘버스 점프’를 실현하려면 희한하고 때로는 해괴망측한 행동이 필요하다. 덕분에 영화에는 B급 감성과 코믹한 액션도 자주 등장한다.   현재의 에블린은 여러 에블린 중에도 가장 볼품없이 보인다. 영화는 이런 에블린이야말로 우주의 구원자이고 중심이라는 것을 선택과 가능성에 대한 독특한 궤변을 통해 설명한다. 사실 이 영화의 주제는 인생이란 드라마이자 이 우주의 주인공은 나, 그리고 이 드라마의 전개와 결말을 바꾸는 것도 나라는 식의 낯익은 이야기와 통한다. 영화는 재기발랄한 상상력, 그리고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자 가족의 삶과 동양 무협 영화의 액션 전통을 한데 꿰는 전개가 재미있다.   배우의 변신도 흥미로운 데 량쯔충만 그런 게 아니다. 악역으로 그려지는 국세청 직원을 제이미 리 커티스가 연기하는 것도 놀랍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마블 영화 액션 활약 통속 드라마

2022-11-20

[영화몽상] ‘네 멋대로 해라’

‘네 멋대로 해라’는 1960년 프랑스에서 개봉한 영화인데, 널리 알려진 대로 프랑스 누벨 바그의 주역이자 지난 달 스위스에서 조력사로 별세한 감독 장 뤽 고다르(1930~2022)의 장편 데뷔작이다.   누벨 바그도 그렇지만 고다르는 흔히 영화 언어를 혁신하고 영화라는 매체를 재발명했다고까지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특히 ‘네 멋대로 해라’에 쓰인 점프 컷이나 등장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빤히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 등은 지금 봐도 신선하고 강렬하다. 여자 주인공을 연기한 진 셰버그의 첫 등장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줄거리는 까먹더라도, 요즘 봐도 멋진 차림으로 파리의 거리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며 신문을 파는 모습은 잊기 어렵다.   영화사에서 워낙 유명하고 중요한 작품이지만 지금 눈으로 보면 소박한 면도 있다. 일례로 러닝타임이 한 시간 반에 불과하다. ‘어벤져스:엔드게임’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장장 세 시간 넘는 것에 비하면 단출하다. 줄거리 따라가기도 쉽다. 요즘 블록버스터 시리즈와 달리 복잡한 세계관이나 캐릭터의 이전 이야기를 몰라도 된다.   영화도 이를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장 폴 벨몽도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이 밥 먹듯 자동차를 훔치는 것, 훔친 차로 과속을 하다 우발적으로 경찰을 죽이는 것,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인들을 만나는 것 등 눈앞에 펼쳐지는 그대로다. 이 영화는 철저히 현재진행형이다. 여러 장면에서 점프 컷으로 시간의 흐름을 불연속적으로 편집해 보여주는데, 그렇다고 그 전후 상황이 헷갈리긴 힘들다.   물론 관객에 따라 이런 방식이 생경하게, 요즘 상업영화의 방식이 더 쉽고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다. 마블 시리즈가 엔드게임 전후의 과거를 요약할 때 점프 컷을 쓴다면 불친절하다는 반응을 얻을 수도 있다. ‘네 멋대로 해라’는 60년대 프랑스 관객에게도 새로운 영화였지만 외면 받진 않았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뒀고, 장 폴 벨몽도는 스타가 됐다. 리처드 기어 주연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도 나왔다.   프랑스어든 영어든 이 영화의 본래 제목을 우리말 번역기에 돌리면 모두 ‘숨 가쁜’으로 나온다. 과거 종종 그랬듯 ‘네 멋대로 해라’는 일본에서 의역한 제목을 그대로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 ‘숨 가쁜’보다 한결 입에 잘 붙는다. 덕분인지 요즘도 여러 분야에서 눈에 띄는 문구다.   어쩌면 고다르의 영화를 모르더라도, 그의 영화에 담긴 것 같은 새롭고 자유로운 시도에 대한 갈망과 호평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것인지 모른다. 언어도, 영화 언어도 변한다. 쉽고 편안한 방식이 진부하고 지루한 것이 되기도 한다. 상업영화의 언어도 그렇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요즘 상업영화 영화 줄거리 영화 언어

2022-10-05

[영화몽상] ‘보이지 않는 것’과 영화

“문학이라는 것은 문자로 되어 있지만, 문자로 끝난 게 아니라 그걸 읽는 독자의 상상력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죠. 반대로 영화는 눈에 보여주니까, 보여주는 것 이외의 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심장소리’를 선보인 직후 관객들 앞에서 한 말이다. 그의 첫 단편이기도 한 이 신작은 주인공인 초등학생 철이(김건우)가 우울증을 앓는 엄마(전도연) 걱정에 수업 도중 교실을 빠져나와 집으로 달려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 영화 전체가 마치 한 테이크로 찍은 것처럼 커트 없이 이어진다. 덩달아 관객도 함께 달리는 듯 철이의 긴장과 불안을 맛보며 그 여정을 응원하게 된다.   감독은 이런 촬영 기법을 비롯해 제작 과정의 이모저모를 전혀 비밀이 아니라는 듯 스스럼없이 들려줬다. 감독과 문답을 진행한 평론가 이동진은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감독의 기존 장편들과 그에 대한 프랑스 감독의 다큐를 선보인 특별전 제목이다. 글머리에 인용한 감독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우리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경우가 많은데 영화는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망각하게 할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많이 환기시키면서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죠. 저는 영화가 후자를 하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상적인 이야기가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동안 객석은 젊은 관객들로 빼곡했다. 팬데믹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영화제의 풍경, 하지만 팬데믹 이후 과연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던 장면이다. 지난해 전주영화제는 객석의 3분의 1만 활용해서, 그 전해에는 아예 무관객으로 주요 행사를 열었다. 해외 게스트는커녕 국내 게스트 행사도 대개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올해는 확연히 달랐다. ‘큐어’(1997) 상영 때는 일본에서 날아온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특별프로그래머로 이 영화를 상영작에 선정한 연상호 감독이 함께 관객들 앞에 나섰다. 열혈 팬을 자처하는 연 감독의 질문, 명성이 자자한 이 영화를 처음 본 관객들의 질문이 자연스레 뒤섞였다. 이창동 감독의 말을 즉물적으로 변주하면, 어쩌면 영화도 관객이 있기에 완성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배우 강수연을 스크린 밖에서 처음 본 것도 몇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돌아보면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은 것은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는 이 영화제가 유독 힘든 시기였다. 영화제를 보러 부산에 갈 때면 스크린에 남긴 눈부신 자취와 함께 그의 스크린 밖 분투 역시 새록새록 떠오를 것 같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영화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지난해 전주영화제 이번 영화제

2022-05-11

[영화몽상] ‘대부’와 할리우드의 반세기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저는 미국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영화의 팬이라면 눈치챘겠지만, 모두 ‘대부’의 대사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가족을 통해 마피아의 세계를 그린 이 영화는 미국에서 1972년 개봉해 엄청난 호평과 함께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거뒀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회자하는 것은 대사만이 아니다. 말런 브랜도가 연기한 ‘대부’ 비토 콜레오네의 카리스마, 가업을 멀리하려다 결국 아버지를 이어 비정한 대부가 되는 셋째 아들 마이클 콜레오네의 변신을 비롯해 캐릭터와 연기, 장면과 촬영, 연출과 원작 등 얘깃거리가 넘쳐난다.   이제는 전설이 되다시피한 제작과정도 마찬가지. 마이클 역의 알 파치노처럼, 코폴라 감독이 낙점한 캐스팅 대부분이 영화사 파라마운트의 반대에 부딪혔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1편의 대성공 덕에 3편까지 만들게 되지만, 코폴라도 처음부터 이 영화를 내켜 하진 않았다. 젊은 신예였던 그를 추천한 사람은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인 파라마운트 간부 피터 바트. 직전에 마피아 영화 여러 편이 흥행에 참패한 데다, 폭력과 범죄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기에 십상인 소재라 이미 여러 감독이 연출을 거절한 뒤였다.   코폴라는 자신의 영화사 조트로프가 한창 돈에 쪼들리고 있던 상황이라 연출을 맡긴 했지만, 그의 비전은 파라마운트와 수시로 부딪혔다. 나중에 피터 바트가 밝힌 바에 따르면 파라마운트는 몇 번이나 코폴라를 해고하려 했단다.   이런 와중에 요즘 말로 ‘영혼을 갈아 넣어’ 영화를 만들었으니 코폴라 감독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새삼 눈에 띄는 것은 또 있다. 당시 할리우드가 황금기를 누리기는커녕 나날이 극장 관객 수가 줄어드는 힘든 시절이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도 파라마운트는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마침 베스트셀러 원작의 영화 ‘러브 스토리’로 뜻밖의 대성공을 거둔 이후 또 다른 베스트셀러를 찾아 영화화에 나선 것이 ‘대부’였다고 한다.   이처럼 우여곡절 속에 탄생한 ‘대부’는 명실상부 할리우드의 걸작으로 대접받는다. 50주년인 올해 파라마운트는 3부작을 최신기술로 복원한 고화질 버전을 내놓았다.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은 코폴라 감독과 알 파치노, 2편에서 비토 콜레오네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로버트 드니로 등 세 사람을 무대에 세워 50주년을 기념했다.   할리우드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자신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점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전통적인 할리우드가 아니라 넷플릭스 같은 OTT가 주도하는 지금 시대의 영화도 몇십년 뒤, 이를 기념하게 될까.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할리우드 반세기 영화사 파라마운트 명실상부 할리우드 당시 할리우드

2022-04-13

[영화몽상] 자이니치와 코리안 아메리칸

 배우 윤여정의 신작 ‘파친코’는 흡입력 있는 드라마이자 여러모로 색다른 작품이다. 그 중심인물인 선자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나고 자라 젊은 시절 일본에 건너간 여성. 유장한 세월을 관통하며 그와 자손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드라마답게 선자 역할의 배우만 세 명이다. 나이든 선자를 연기한 윤여정 외에 어린 선자로 아역배우 전유나, 젊은 선자로는 신예 김민하가 등장한다.   이들을 포함해 이 드라마의 크고 작은 역할에는 낯선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다들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지난주 공개된 1~3부를 한꺼번에 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이력을 찾아보니 교포 배우들도 있다. 선자의 아들이자 파친코를 운영하는 모자수 역의 아라이 소지는 ‘박소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재일교포, 선자의 손자이자 미국 유학 후 현지 은행에서 일하다 그 일본 지점에 돌아오는 솔로몬 역의 진하는 재미교포다. 이 드라마는 선자의 삶을 시대순으로 펼치는 대신 일제강점기와 1989년 솔로몬이 일본에 돌아온 무렵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제작진에도 교포가 여럿이다. 전체 8부작을 나눠서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 저스틴 전 감독은 모두 재미교포. 각본가이자 총괄프로듀서를 맡은 수 휴 역시 재미교포다. 널리 알려진 대로 원작 소설의 이민진 작가 역시 교포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려서 미국에 이민 간 그가 재미교포가 아니라 재일교포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어느 강연에서 한국인 중학생이 일본에서 겪은 차별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다. 이후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일본에서 4년을 살면서 여러 교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나온 『파친코』는 그의 두 번째 소설. 미국에서 2017년 출간과 함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선정되는 등 큰 반향을 얻었다.   ‘파친코’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교포들이 제작진의 주축일 뿐 아니라 애플TV가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드라마다. 일제강점기부터 고난을 헤치며 살아온 한국 사람들 이야기가 미국 드라마로 만들어져 전 세계 시청자에게 공개된다.     한국 시청자에게도 이 드라마는 새로운 경험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법적·제도적 차별 속에 살아온 교포, 이른바 자이니치의 이야기 자체가 우리네에게도 상대적으로 낯선 소재라는 점에서다. 미국 이민 생활을 경험한 윤여정 역시 한국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제가 자이니치를 잘 몰랐다”며 “그 사람들이 산 세월을 알고 나니 너무 미안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아직 8부작 중에 3부까지 공개됐을 뿐이지만 그 격동의 드라마를 매주 정주행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후남 / 한국 문화디렉터영화몽상 자이니치 아메리칸 재일교포 선자 재일교포 이야기 모두 재미교포

2022-03-30

[영화몽상] 배트맨이 돌아오는 세상

 가난한 고등학생 피터 파커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기업인 브루스 웨인. 사뭇 다른 두 인물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각각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의 만화를 통해 탄생한 캐릭터이자, 각자 ‘스파이더맨’과 ‘배트맨’이라는 이름으로 악당과 맞서는 수퍼 히어로라는 점은 기본. 저마다 잔혹한 범죄에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은 인물이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통해 전 세계에 낯익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영화 시리즈의 새 출발이 잦은 캐릭터라는 점도 이제는 공통점이 될 것 같다. 새로 개봉한 ‘더 배트맨’의 로버트 패틴슨은 1989년 ‘배트맨’의 마이클 키튼, 2005년 ‘배트맨 비긴즈’의 크리스천 베일에 이어 다시 배트맨 이야기의 새 출발을 알리는 주인공이다. 앞서 두 시리즈의 전개 과정은 좀 달랐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시리즈는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호평과 함께 3부작으로 완결됐다. 반면 마이클 키튼이 시작한 ‘배트맨’은 3편 발 킬머, 4편 조지 클루니로 주연이 바뀐 데다 4편 ‘배트맨과 로빈’은 졸작이란 평가와 함께 시리즈를 막 내리게 했다.   스파이더맨도 기복을 겪었다. 2000년대초 토비 맥과이어가 주연한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3부작을 마친 반면 앤드류 가필드가 주연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2부로 단명했다. 곧이어 새로운 스파이더맨으로 등장한 톰 홀랜드는 다른 수퍼 히어로와 함께한 어벤져스 시리즈와 스파이더맨 자체 시리즈 모두 흥행 활약을 펼쳤다.     로버트 패틴슨의 ‘더 배트맨’은 새로운 출발답게, 배트맨 이야기의 새로운 결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 활동한 지 이제 겨우 2년. 또 액션 영웅만 아니라 탐정 같은 면모가 두드러진다. 연쇄살인범이 남긴 암호문을 단서로 감춰진 음모를 추적한다.   여기서 실감하게 되는 것은 배트맨은 그가 나고 자란 도시, 고담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란 점이다. 스파이더맨과 달리 이 영화에서 배트맨의 상대는 먼 우주나 다른 차원에서 온 악당이 아니라 고담시의 악당이다. 배우는 다르지만 ‘다크 나이트’에서 악과 맞서기 위해 악을 자처하는 배트맨의 모습까지 본 터. 이후 스크린 밖에서는 세월이 흘렀건만 ‘더 배트맨’의 고담시는 여전히 정치인과 검찰·경찰과 범죄조직 두목이 한통속인 악의 소굴이다. 변한 게 없는 현실과 새로울 것 없는 악당들 탓인지, 극장문을 나서며 좀 우울해졌다. 어쩌면 수퍼 히어로의 활약에 더이상 큰 기대가 없는 나이가 된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배트맨 배트맨 이야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

2022-03-14

[영화몽상] 고전적 비극과 고전적 영화

 주연이든 조연이든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관한 한 메릴 스트리프는 난공불락이다. 수상 횟수는 3번(여우주연 2번, 여우조연 1번)이지만, 후보에 오른 횟수는 무려 21번(여우주연 17번, 여우조연 4번)이다.   그다음으로 많이 후보에 오른 배우가 캐서린 햅번(1907~2003)과 잭 니컬슨인데, 각각 12번으로 메릴 스트리프의 절반 정도다. 그리고 스펜서 트레이시(1900~1967), 폴 뉴먼(1925~2008), 알 파치노, 덴절 워싱턴 등이 9번이다.   이중 덴절 워싱턴은 ‘맥베스의 비극’으로 다음달 시상식이 열리는 올해 아카데미 후보에 올라 개인 통산 7번째 남우주연상 후보가 됐다. 애플TV에서 공개된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이 바탕이다. 실제 영화 역시 연극적 분위기가 강하다. 배우들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원문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문체이고, 배경은 불필요한 장식을 최소화한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하다. 특히 영화 속 실내 공간은 현대의 미니멀리즘 건축을 연상시킬 만큼 간결하고 단순하다.   동시에 할리우드 고전 흑백영화의 분위기가 강하게 묻어난다. 영화 자체를 흑백으로 촬영한 데다, 단순화한 공간에 강한 조명을 더해 흑과 백을, 빛과 그림자를 뚜렷하게 대비시킨다. 이 강렬한 명암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란 세 마녀의 예언을 듣고 던컨 왕을 죽여 스스로 예언을 실현하지만, 광기와 죄책감에 스스로 파멸해가는 맥베스 부부의 비극에 더없이 어울린다. 감독은 조엘 코엔. ‘파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 늘 동생 에단 코엔과 함께였던 그가 처음으로 혼자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와 거리가 있던 그를 ‘맥베스’로 안내한 사람은 그의 부인이자, 극 중 맥베스 부인 프란시스 맥도먼드다. 지난해 ‘노매드랜드’를 포함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세 번이나 받은 그의 출발도 연극무대였다.   셰익스피어에 친숙한 관객이라면 ‘오셀로’의 무어인 장군이라면 몰라도, ‘맥베스’의 스코틀랜드 왕을 덴절 워싱턴이 연기하는 것이 색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흑인 배우가 맥베스를 연기한 건 처음이란다. 한데 따지고 들면 맥도먼드도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미국 일리노이 출신이다. 이 영화에선 맥베스의 몰락에 결정적인 인물 맥더프와 그 가족들 역시 흑인 배우들이 연기한다.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고전영화의 분위기로 새롭게 구현한 이 영화에는 새로운 발견도 있다. 컴퓨터 그래픽이 아닐까 의심할 만큼 기괴한 몸의 움직임과 함께 세 마녀를 연기한 배우 캐슬린 헌터다. 아카데미 후보 명단에는 없다. 물론 아카데미상이 언제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니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고전 비극과 고전적 비극과 할리우드 고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2022-02-16

[영화몽상] 1인치 장벽을 넘는 또 다른 방식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원작에는 없는, 하지만 퍽 인상적인 설정이 나온다. 연극 연출가 겸 배우인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초청을 받은 그가 현지에 두 달간 머물며 준비하는 작품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연극 팬들에게 친숙한 작품인데, 가후쿠의 연출은 오디션 장면부터 독특하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온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각자에게 가장 편한 언어로 맡고 싶은 배역의 대사를 선보이게 한다.   이런 다중언어 공연 장면은 영화 초반에도 잠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무대 위의 두 배우는 서로 다른 언어로 연기하고, 뒤편 스크린에는 관객을 위해 두 언어가 자막으로 흐른다. 두 배우의 연기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다른 언어로 연기한다는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가후쿠다. 그의 이런 작업 방식은 주변에도 널리 알려진 듯, 영화 속에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자막이라는 1인치 정도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2년 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면서 한 말이다. ‘기생충’은 미국 관객들이 자막을 읽어야 하는 외국어 영화를 싫어한다는 통념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인 화제작이 됐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연극이라고 자막과 함께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의 다중 언어는 그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연극배우들은 지루한 대본 읽기를 반복한다. 모르는 언어로 상대가 읽는 대사를 듣고, 자신의 언어로 대사를 읽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로의 연기가 강렬하게 어우러지는 놀라운 케미를 경험한다.   연극배우들은 사실 이 영화의 조연일 뿐. 이 영화는 크나큰 상실과 고통을 겪고 소통의 장벽 안에 자신을 가둬둔 인물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연극 연습을 하던 배우들이 그랬듯,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놀라운 순간을 맞이한다. 뛰어난 영화감독은 어쩌면 인간의 감정에 대한 좋은 통역자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공동각본가이자 연출자인 하마구치 류스케가 바로 그런 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본래 부산에서 촬영할 뻔했다. 감독은 가후쿠가 부산의 연극제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준비한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로케이션이 힘들어지자 지금처럼 히로시마로 바꿨다고 한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장벽 방식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다중언어 공연 히로시마 연극제

2022-01-05

[영화몽상] 서부극의 오묘한 변신

 대개의 영화 장르가 미국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 중에도 서부극은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라는 데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미국적이라고 곧 미국산이란 뜻은 아니다. 1960~70년대에는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 즉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산 서부영화가 붐을 이루기도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같은 스파게티 웨스턴은 미국으로 역수출돼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스타로 만들었고, 지금도 할리우드 고전들과 나란히 서부극의 명작으로 꼽힌다.   지난달 극장 개봉을 거쳐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는 새로운 서부극이다. 1925년 미국 몬태나의 목장이 배경인데, 총싸움이나 결투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물리적 폭력 대신 언어·심리적 폭력에 움츠러드는 인간, 유약해 보이지만 무섭도록 비정한 인간 등이 얽혀 결말을 예상하기 힘든 드라마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서부극의 전형성과 사뭇 다른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인다. 그 중에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필은 곱씹어볼 만한 오묘한 캐릭터다. 함께 목장을 경영하는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무던한 사업가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필은 말과 행동이 거칠고 담대한 카우보이다. 한데 이와 다른 면모가 켜켜이 드러난다. 실은 예일대를 다닌 지적인 인물이고, 혼자 연주하는 벤조 솜씨도 일품이다.  식당에서 종이로 만든 꽃을 보고 그 솜씨에 감탄하는 것도, 꽃을 만든 사람이 여성이 아니라 식당 주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라는 것을 알고 무자비한 조롱과 모욕을 안겨주는 것도 필이다. 교양과 폭력을 동시에 분출하는 필은 동생 조지가 남편 잃은 로즈를 아내로 맞은 이후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캐릭터의 면면에서 짐작하듯, 기존 서부극과 사뭇 다른 이 영화에선 황량하고 광활한 자연을 비롯해 서부극의 고전적 분위기가 물씬하다. 한데 이 자연은 미국 서부가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다. 주연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알다시피 미국 서부는 커녕 영국 출신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음악은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의 솜씨다. 그리고 감독은 제인 캠피온이다. 1993년 ‘피아노’로 칸영화제에서 여성감독으로는 사상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로 그 뉴질랜드 감독이다. 이 영화는 그에게 무려 12년 만의 신작이다. 어느덧 6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군더더기 없고, 빈틈없는 유려한 연출의 이 새로운 서부극으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서부극의 본고장, 미국 영화제의 반응도 궁금해진다. 이후남 / 한국 문화디렉터영화몽상 서부극 오묘 기존 서부극 유럽산 서부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2021-12-19

[영화몽상] 넷플릭스 1위와 개인의 취향

 또 한 번 놀랐다.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열기에 이어 이번에는 ‘지옥’이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TV시리즈 전 세계 인기 1위에 올랐다. 원작 웹툰부터 강렬한 상상력과 전개가 놀라웠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닌 한국산 콘텐트가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큰 반향을 얻는 일은 역시나 놀랍다.   이 순위는 넷플릭스의 공식 발표는 아니다. 넷플릭스는 데이터 공개에 인색하다. 나라별 가입자 수는 물론 개별 콘텐트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인기라는데 얼마나 인기인지 잘 안 밝힌다. TV로 치면 시청률, 극장으로 치면 관객 수를 알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지난해부터 좀 달라졌다. 각 나라에서 많이 본 작품 10편을 일일 순위와 함께 해당 국가 이용자에게 보여준다. 넷플릭스 첫 화면에 뜨는 ‘오늘 한국의 톱10 콘텐츠’다. 이런 국가별 자료를 매일 그러모아 일정 기준으로 전 세계 순위를 집계하는 플릭스패트롤 같은 외부 사이트도 생겨났다. 지난주부터는 넷플릭스가 ‘주간 넷플릭스 톱10’을 신설해 직접 전 세계 인기 순위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영화/TV시리즈, 영어/비영어로 나눠 시청시간에 따라 매긴 순위다. 관객 수만큼 속 시원한 수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인기인지 가늠할 수 있다.   한데 순위 공개는 다른 효과도 있다. 음원 서비스나 과거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에서 체험했듯, 높은 순위는 주목도를 높이고 이용을 늘린다. 1위에 올랐다니 그 음악을 들어보고, 그 검색어를 찾아본다. 넷플릭스 콘텐트도 순위 공개로 화제와 인기를 더하고, 히트작이 메가 히트작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넷플릭스가 자랑해온 개인화 추천 알고리즘의 지향과 상충하는 듯 보인다. 넷플릭스는 이용자 평점이나 시청 데이터를 기반으로 각자 취향에 맞는 작품을 추천한다. 인기 작품에만 쏠리는 대신 한층 다종다양한 작품이 이용자에게 노출된다. 이런 틈새 콘텐트 전체가 거둔 성과는 소수의 인기 콘텐트를 능가할 수 있다. 디지털 경제의 특징, 이른바 롱테일 법칙이 넷플릭스를 그 사례로 자주 언급한 이유다. 미국 지상파TV에 드문 아시아 드라마, 극장가에서 홀대받는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선 효자가 될 수 있다.   순위 발표가 콘텐트 다양성을 위축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은 아직 기우일 뿐이다. 반대로 그동안 자기 작품이 넷플릭스에서 거둔 성과를 정확히 몰랐던 창작자나 제작사에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이례적으로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 최고경영진이 공개 초반부터 나서 그 성과를 언급했다. 이 작품의 성공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방증이다. 이 정도면 제작비 외에 넷플릭스가 거둔 과실 일부가 창작자·제작사에 돌아가는 것도 타당하지 않을까. 이후남 / 한국 문화디렉터영화몽상 개인 취향 세계 인기 세계 순위 한국산 콘텐트

2021-11-29

[영화몽상] 게임의 규칙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이렇게 살 떨리는 게임이 될 줄 몰랐다. 술래가 돌아볼 때 움직이면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징어 게임’에서 그랬다가는 정말로 죽는다.   황동혁 감독의 이 넷플릭스 시리즈는 아이들이 많이 했던 단순한 놀이를 살벌한 생존게임으로 탈바꿈시켰다. 최후의 1인은 456억원의 상금을 받지만, 확률로 따지면 참가자 99% 이상이 죽을 운명이다. 탈출구가 없진 않다. 참가자 과반이 동의하면 게임을 중단하는 규칙도 있다. 하지만 빚에 몰리고 사람에 쫓기는 참가자들은 기어이 게임판에 돌아온다.   “최근 남한의 문화예술관련 기업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영화관 상영과 극장 공연 등이 침체 상태에 빠져들자 미국 인터넷 동영상봉사업체인 넷플릭스를 통해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미국 기업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 엊그제 북한 선전 매체가 내놓았다는 주장이다. ‘오징어 게임’ 의 세계적 반향과 함께 국내에서 일고 있는 비판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이미 알려진 대로 넷플릭스는 제작비 이외에 흥행에 비례한 수익 배분이 없다. 속편이든 리메이크든 지적재산권은 모두 넷플릭스가 갖는다. 이게 공평한지 따지기 전에 하나는 분명하다. 2013년 넷플릭스 첫 오리지널 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 때부터 이렇게 해왔다는 점이다. 한국 제작사가 이를 모르고 게임에 뛰어들었을 리 없다. ‘오징어 게임’이 거둔 엄청난 성공에 비하면 약 250억원이라는 제작비가 적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뛰어든 승자독식의 게임판과는 다르다.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건 ‘오징어 게임’의 창작과정이다. 연출자 황동혁 감독이 직접 대본을 썼다. 한국영화에 흔한 방식인데 드라마에서는 흔치 않다. 작가가 곧 감독이니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식의 통념도 경계가 무너진다.   감독은 상상력과 함께 개인적 체험을 곳곳에 녹였다. 주인공 성기훈이 사는 쌍문동은 그가 살던 곳이고, 참가자들이 입은 그리 예쁘지 않은 초록색 운동복은 그가 다닌 학교 체육복 색깔대로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경쾌하게 흐르는 ‘장학퀴즈’ 음악, 거대한 감시인형 ‘영희’의 이름과 외모 등의 디테일은 감독 또래들의 공통 기억까지 불러낸다. 극 중에 나오는 딱지치기, 구슬치기, 뽑기, 오징어 게임 등의 놀이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란 말이 떠오른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했던 걸로 기억한다며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용한 말이다. 작품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넷플릭스가 진작부터 창작자들 사이에 호평을 받은 큰 이유 중 하나다. 이후남 / 한국 문화디렉터영화몽상 게임 규칙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 봉준호 감독

202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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