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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 주지사, 부인 뉴저지 연방상원의원 선거 지원에 주정부 자원 사용

필 머피 뉴저지주지사가 부인 태미 머피의 연방상원의원 도전을 홍보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주정부 자금을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머피 여사가 연방상원의원 선거 출마를 밝힌 직후부터 눈에 띄게 주정부 홍보가 머피 여사에게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다.   29일 뉴욕포스트는 "머피 여사가 지난해 11월 15일 연방상원의원 출마를 선언한 이후, 뉴저지주정부는 머피 여사의 행보에 대한 각종 보도자료를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머피 여사의 연방상원의원 출마 선언 직후 머피 부부는 주지사 저택에서 열리는 홀리데이 오픈 하우스를 홍보했다. 주지사 관저 오픈하우스는 매년 열리는 행사이지만, 머피 여사가 출마를 선언한 뒤 뉴저지주민들을 초대해 홍보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외에도 주정부에서 발표한 각종 이벤트나 보도자료는 머피 여사가 중심이었다. ▶산모가 병원이나 출산 시설에서 둘라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도록 해야 한다는 머피 여사의 발표(2023년 11월 20일) ▶머피 여사의 뉴저지주 모자보건위원회 이사회 위원 발표(2023년 12월 13일) ▶머피 여사, 2024년 신년연설 특별게스트 발표 ▶머피 여사, 둘라 액세스 법안(S4119/A5739) 서명 축하(1월 16일) ▶머피 여사, 산모건강 인식의 날 기념 라운드테이블 주최(1월 23일) 등이 대표적이다.     머피 여사는 뉴저지주 연방상원의원인 로버트 메넨데즈가 기소된 후 출마를 선언했고, 한인 2세인 앤디 김(민주) 연방하원의원과 맞붙게 된 상황이다. 머피 여사는 주지사 부인 자격으로 공립학교의 기후변화 교육 강화와 영아 사망률 감소 운동 등을 펼쳤지만,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는 정치 신인이다.   주정부 내 공화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머피 주지사의 부인 지원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뉴저지주정부는 판매세·법인세·휘발유세 등 세금 인상을 고민하는 것으로 전해져 더욱 반발을 사고 있다. NJ닷컴은 "최근 주정부가 NJ트랜짓 요금 인상을 결정한 가운데, 주정부 예산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다른 세금인상도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머피 주지사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행정예산안을 다음 달 공개할 방침이다. 김은별 기자 kim.eb@koreadailyny.com주지사 주정부 머피 뉴저지주지사 머피 주지사 머피 여사

2024-01-29

카터 전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 별세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사진)가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카터 센터는 성명을 통해 로잘린 여사가 지난 19일 오후 조지아주 플레인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했다고 밝혔다. 성명에 따르면 지난 5월 치매 진단을 받은 로잘린 여사는 지난 18일 호스피스 케어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월부터 자택에서 호스피스 케어에 들어간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로잘린은 내가 성취한 모든 일에서 동등한 파트너로 필요할 때 현명한 조언과 격려를 해줬다. 로잘린이 세상에 있는 한 나는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지지한다는 사실을 항상 알았다”고 말했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함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결혼 77주년을 맞은 지난해 9월 고향 플레인스에서 열린 연례 땅콩 축제였다.     직설화법으로 유명한 로잘린 여사는 카터 대통령 재임(1977~1981년) 동안 각료 회의에 참석하고 해외 순방을 다니는 등 가장 활동적인 영부인 중 한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퇴임 후 부부는 애틀랜타에 비영리 싱크탱크인 카터 센터를 설립했으며 아프리카 등 수십 개국의 의료 및 농업 프로젝트를 후원했다.     생전에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인식 제고와 개혁을 위해 힘쓴 로잘린 여사는 1991년 남편과 함께 예방접종 프로그램인 ECBT(Every Child By Two)를 창립하기도 했다.대통령 카터 카터 대통령 대통령 부인 여사 별세

2023-11-19

"유미 호건 여사, 아시안 의원 8명 힘 모은다"

수도 DC는 인구 67만의 작은 지역이다. 행정수도의 역할을 하지만 사실상 북동으로는 메릴랜드와 뉴욕, 포토맥강을 건너면 버지니아주로 둘러싸여 있다. 볼티모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 사회, 주거, 물가 등의 영향을 직접 받는다. 대도시라 여전히 인종간 긴장감은 있지만 유독 인종 혐오 범죄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반면 인구가 10배 가까이 많은 메릴랜드는 최근 3년 동안 관련 범죄가 오히려 DC보다 2배로 적었다. 지난주 DC에서 2015년 한인 최초로 주 하원에 진출한 마크 장 의원(32지구)을 만나 그 배경을 분석했다.     -3선을 지난해 이뤘다.     “20지구 데이비드 문 의원과 함께 진출해 활동하고 있으며 앤애룬데일 카운티 지역을 대표하고 있다. 원래 공화당원이었는데 2012년 민주당으로 옮겨 출마해 당선됐다. 현재는 주 하원 예산배정위, 감사위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안 증오 범죄는 전국적인 문제다. 메릴랜드는 어떤 모습이었나.     “팬데믹이 시작된 시기 유미 호건 여사(래리 호건 전 주지사 부인)가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아시안 커뮤니티에 많은 지원이 이뤄지도록 힘썼고 덕분에 큰 문제 없이 힘든 시기를 지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188명 상.하원 의원 중에 8명의 아시안 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다고 본다. 주민들이 아시안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은 지속해야 한다고 본다.”     -주의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접근을 했나.     “카운티별로 관련 범죄가 최소화되도록 지역 사법당국과 긴밀히 연락하고 정보를 주고받았다. 2021년을 기준으로 전체 인구 610만 명 중 약 40만여 명이 아시안이며 이 중 10%인 4만8000여 명이 한인이다. 한인들은 몽고메리와 하워드 카운티에 주로 거주한다. 주 의회는 수백만 달러가 아시안 커뮤니티에 투입되도록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호건 여사의 기여는 컸다.”     -구체적으로 주정부와 의회에 호건 여사가 어떤 영향을 준 것인가.     “호건 여사가 존재하고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주민들과 정치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다. 8년의 세월을 통해 쌓은 신뢰도 큰 힘이 됐고, 주정부에 더 많은 아시안이 채용되도록 노력했던 점은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DC와 LA가 가장 인종 혐오 범죄가 많다고 법무부는 보고한다.     “DC보다 오히려 매우 적은 수가 보고된다. 특성상 아시안들은 나서지 않고 충돌을 피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상황이 벌어져도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범죄 수가 적은 것이 그 이유 때문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스스로 혐오 범죄 피해를 받은 적은 없나.     “80~90년대에 있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유사한 일을 겪은 바 있다.”     -애틀랜타와 텍사스의 총격에 이어 진행된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항상 조용히 일만 하고 큰 사건들을 묵묵하게 견뎌온 아시안들의 애환이 애틀랜타 스파 총격 사건으로 수면위로 떠오른 것인데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을 시스템상으로 가져가지 못한 점은 아직도 숙제라고 생각한다.”     -수도 DC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 이런 아시안 혐오의 시작은 어디인가.     “아시안들을 대변하고 보호하기 힘든 현재의 정치 구조와 일부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발언과 접근이 복합적으로 만든 문제라고 본다. 더 답답한 것은 팬데믹이 지나면서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잦아들거나 우리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한인사회가 해야 할 일을 제안한다면.     “LA든 뉴욕, DC이든 서로 자주 교류하고 상황을 함께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권자 등록과 투표, 출마를 모두 관심 있게 추진해야 한다. 하다못해 학교 학부모 모임에서도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목소리를 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15만 주민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3선을 지냈으면 한인 이민자로 성공한 것인가.     “80~90년대 부모님들은 의사, 변호사가 아니면 실패(Failure)라고 항상 말했다. 하지만 의회에서 아시안과 한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제 병원과 법원이 아니어도 한인 2~3세들이 더 많은 곳에서 성공할 수 있고 그랬으면 좋겠다.”     최인성 기자아시안 유미 아시안 혐오범죄 인종 혐오범죄 여사 아시안

2023-09-21

원로학자 차종환 박사, 매일 글쓰기로 시간 가는 줄 몰라

참 부지런한 저자가 있다. 바로 수 백권(330권?)의 책을 출간한 차종환 박사다. 1935년생인 차 박사는 한국 국회도서관에 등록된 저서가 그 정도다. 현재도 제주 4.3사건과 관련된 책을 쓰고 있다.   그래서 차 박사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8시간 이상을 책 쓰기에 할애하고 있다. 차 박사는 "2018년 쓰러져서 스텐트 수술을 받은 후부터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면서 "남은 시간 더 집필해서 한국기록원에 공인된 최다 저서 집필자로서의 타이틀을 뺏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남가주 호남 인맥의 대부이기도 한 차 박사는 유신시절 해직된 교수로 미국에 와서도 UCLA연구교수(식물영양학 전공)로 22년간 봉직했다. 포스닥 과정 하러 미국에 왔다가 눌러 앉은 경우다. 원래 한국으로 돌아가 학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은 것. 가족들은 이것이 '불행중 다행'이 아닌 '천재일우'였다는 얘기를 한다고 전한다.     우선 부인 차순애 여사와 함께 시작한 나성백화점이 성업을 이뤄 리스로 들어간 건물을 소유하게 됐고 동업자들과 시작한 부동산이 커져 한인타운 한복판에 한 블럭을 소유하고 있다. 한인타운에서 돈을 벌어 한인타운에 투자한 경우다.     사범대(서울사대)를 나온 것의 의미를 살려 '한미교육연구원'을 설립했다. 예전에는 학부모를 위한 교육세미나를 열은 바 있고 또 꿈나무 장학생을 올해로 45회째 선발하고 있다.     2남1녀 자녀교육에도 성공했다.  장남 윤호는 발정형외과 전문의로 활약중이고 딸 은 공인회계사, 차남은 LA시 검사로 근무하고 있다. 자녀들에게는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고 직업에 충실하고 항상 선두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항상 감사 기도를 드리는 삶도.   세상에 바라는 것은 역시 남북통일이다. 황해 재령 출신인 차순애 여사가 북한을 6번 방문했는데 결국 남북이 평화롭게 교류하는 게 우선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그는 말했다.   차박사의 가장 보람된 순간은 식물학으로 이학박사를 받은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차 박사는 호남향우회와 인권문제연구소 LA지부장(2002-2004)을 역임한 바 있고 전두환 정권에 반대했기 때문에 '종북좌파'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지만 좌표찍기를 하고 괴롭혔던 주동자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을 통해 25만달러 배상 판결을 받는 등 승소해 진실을 밝혔다고 말했다.   장병희 기자원로학자 차종환 원로학자 차종환 한인타운 한복판 차순애 여사

2023-07-30

벌레 먹은 나뭇잎

벌레 먹은 나뭇잎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세상에 태어나면 '나만의 존재 이유'가 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이다. 그 존재 이유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까지를 위한 이타적인 것으로 확장될 때 아름다운 삶이 된다. 백선행 여사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평양의 이름 높은 교육사업가이자 사회사업가였다. 백선행 여사는 16세  때 남편을 잃고 평생을 홀몸으로 살면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근검절약으로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사회를 위해 써서 평양은 물론 전 조선인의 어머니처럼 숭상받던 여인이다.     백선행은 1848년 (헌종 15년)에 가난한 농민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그녀는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성상을 ‘백 과부’로 불렸다. 16세에 과부가 된 백씨는 친정으로 돌아왔다. 과부 모녀는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 닥치는 대로 일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과부 모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10년을 하루 같이 살다 보니 150냥짜리 집 한 채와 현금이 1000냥 남짓 생겼다. 구차한 살림살이를 겨우 면했을 때, 어머니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백씨는 봉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모친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서러웠지만, 모친의 상여 뒤를 따를 상주 한 사람 없는 게 더 원통했다. 백씨는 조카뻘 되는 친척을 모친의 사후 양자로 입적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그러나 양자는 장례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모친의 유산에만 관심을 두었다. 양자는 아들인 자신이 모친의 전 재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씨는 모친과 함께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현금 1000냥을 양자에게 빼앗기고, 150냥짜리 집 한 채만 겨우 물려받았다. 백씨는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시 10년을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살다 보니,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그때부터 백씨의 재산은 해가 다르게 불어났다. 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땅을 불려 나갔다. 백씨가 재산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사내가 그의 재산을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1900년 악명 높은 탐관오리 팽한주가 평양 부윤으로 부임했다. 그는 박구리에 사는 백 과부가 기백 석 추수의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죄 없는 백씨를 잡아다 하옥했다. 백씨에게 갖은 누명을 씌운 후, 재산을 바치면 풀어주겠노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40여 년간 과부로 갖은 풍파를 겪은 백씨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씨가 죽어도 재산은 바칠 수 없다고 버티자, 부윤은 10여 일 만에 그를 풀어주었다. 과부 혼자 사는 집에는 수시로 강도가 침입했다. 백씨는 강도의 완력 앞에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뒷머리와 앞이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강도의 침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백씨는 ‘목숨보다 귀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문, 중문, 방문, 부엌문, 들창, 장지 등 집안 곳곳을 굵은 철창살로 에워쌌다. 백씨는 그 철창살 속에서 돈 궤짝을 부둥켜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1908년, 백씨가 태어난 지 한 갑자(甲子)가 흘렀다. 과부생활 45년 동안 앳되고 뽀얗던 얼굴은 강도에게 맞은 흉터와 깊게 팬 주름으로 거칠어졌지만, 끼니를 걱정하던 곤궁하던 살림살이는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나아졌다. 백씨는 환갑잔치도 하지 않고, 대동군 객산리 남편 묘소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씨는 객산리 마을에 들러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을 전했다. “나무다리를 허물고 돌다리를 놓아주겠소.” 객산리 나무다리는 낡아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을뿐더러 교각도 몹시 낮아 큰 비라도 내리면 물이 넘쳐 다리 구실을 못하기 일쑤였다. 백씨는 서울에서 석공기술자를 불러와서 목교가 있던 자리에 넓고 튼튼한 석교를 놓았다. 객산교(客山橋)를 준공하기까지 든 3000원 남짓의 비용을 모두 백씨가 부담했다. 객산리 사람들은 백씨의 은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善行)’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조선의 윤리와 법도가 아직 굳건하던 헌종 시절 태어난 백씨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백선행은 허튼 욕심 부리지 않고 매사에 신중했지만, 딱 한 번 교활한 거간에게 속아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1917년 백선행은 평양에서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강동군 만달산 부근의 토지가 좋다는 거간의 말만 믿은 채, 평당 7~8원을 주고 수천 평의 땅을 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석회질이 많아서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황무지였다. 1~2전을 받고도 팔기 어려운 박토 중에 박토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일본인이 그 지역에서 시멘트 원료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부근 토지를 모조리 평당 3~4원을 주고 매수했다. 백선행에게도 토지를 팔라고 매매 교섭을 했다. 백선행의 땅을 사지 않고는 시멘트 공장을 도저히 세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2전 하던 땅값은 순식간에 100배가 올라 1~2원을 호가하더니 얼마 후 10~20원까지 뛰었다.   매수호가가 백씨가 산 가격의 2~3배가 되었어도 백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결국 평양 부윤을 찾아가 사정했다. 평양 부윤이 주선해 성사된 매매가격은 평당 70원. 백선행이 속아서 산 가격보다 10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이 거래 한 건으로 백선행의 재산은 30만원으로 불어났다. 속아서 산 황무지 덕분에 백선행은 동네 부자에서 평양 굴지의 대재산가로 올라섰다. 백선행은 한평생 학교는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다. 그럭저럭 재산을 관리할 수 있다고 해서 못 배운 것이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백선행은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평양 시내 사립학교에 수십만원을 기부했다. 친지들이 돈을 그렇게 마구 쓰다간 얼마 못 버틴다고 충고할 때마다 백선행은 이렇게 말했다. “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쓰지 않으려면 돈은 모아서 뭐 하노.” 1928년까지 평양에는 조선인이 집회를 열 만한 공회당이 없었다. 부립공회당은 사실상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조만식, 오윤선이 백선행을 찾아가 조선인 중심의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뜻을 전하자 백선행은 흔쾌히 건립 자금을 내주었다. 백선행은 1933년 5월 8일 새벽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35만원(현재가치 3500억원)의 재산은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선행은 돈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지를 알려준 최초의 부자이자 과부였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수년 전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 실렸던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의 한 구절이다. 벌레 먹은 나뭇잎은 쓸모없게 된 나뭇잎이다. 구멍이 뚫린 나뭇잎이므로 나무에게도 사람에게도 별로 도움 될 게 없는 나뭇잎이다. 벌레가 먹고 남은 흔적이 흉하게 몸에 남아 있는 나뭇잎이다. 그런 나뭇잎을 시인은 예쁘다고 말한다. 시인은 나뭇잎이 제 몸에 상처가 생기는 걸 알면서 벌레를 먹여 살렸다고 생각한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떡갈나무 잎에 뚫린 구멍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엇을 남에게 베풀며 살아왔는가 생각해 본다.   김지민 기자나뭇잎 벌레 백선행 여사 모두 백씨 과부 다리

2023-04-27

[이 아침에]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

시간은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 시미밸리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기념관을 방문했던 건 시간에 대한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다. 10월 9일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이 전시된 그곳은 포성 없는 전쟁터였다. 실제 크기의 탱크에서부터 통신 장비와 암호를 찍어내던 타자기들, 작은 파편조각까지 오밀조밀하게 전시된 대통령 기념관 안에는 꽤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주로 백인들이었고 아시아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장소에 섬광을 뿜어내듯 한 전시판이 눈에 확 뜨였다. 어! 저 사진은?   군복을 입고 찍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3남매 사진과 설명이 적힌 판이었다. 한 손으로 권총을 쥐고 사격하는 수산 여사의 사진과 필립 안의 모습 등 4점의 사진과 훈장이 걸려있었다. 백인 관람객들이 이민자로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했던 도산 안창호 가족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었다.     한 가족의 자녀들이 각각 해군과 육군에 입대해 복무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한국계 안수산 여사가 미 해군 최초로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되었다는 건 당시 상황으로서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국가안보국 (The National Security Agency)에서도 암호분석가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안 여사의 기록을 미국 대통령 기념관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암호는 보안을 필요로 하는 내용의 주요 통신수단이다. ‘나바호 코드’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전술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윈드 토커(Wind Talker)’가 떠올랐다. 원주민 암호병과 특수부대원의 암호를 사수하기 위한 갈등을 그린 영화였다. 그때는 그 암호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일본군의 암호해독력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군이 원주민의 언어로 절대 해독할 수 없는 코드를 만들어 냈다는 참전군인의 증언과 기록은 매우 흥미로웠다.   원주민 말로 besh-lo(iron fish)는 ‘잠수함’을 뜻했으며 dah-he-tih-hi(hummingbird)는 ‘전투기’로 통했다. Po′sa taibo(Crazy White man)은 ‘히틀러’를 의미했다고 한다. 만약 원주민 암호병이 적에게 포로가 되면 그 암호를 파기하고 새로 암호를 만들었다 하니 암호는 전쟁의 승패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밖에 음료수 환타가 탄생하게 된 비화, 브래지어 제작 회사가 만든 통신 비둘기용 옷, 적을 속이기 위한 위장술 등 갖가지 비화가 소개되었다. 전쟁 중에 원재료가 귀해지자 물자공급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기록에 한국전쟁이 떠올랐다. 그 전쟁 중에 미군들을 통해 얻은 밀가루로 피란민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가 있었는데 그건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 따위의 부식들로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었던 이야기와 더불어 한국인들의 가슴 아픈 전쟁 비밀이다.   대통령이 일하던 집무실을 지나 낸시 여사에게 보냈던 편지를 둘러보고 전용기 공군 1호기(Air Force One)에 올랐다. 그가 평범한 시절을 거쳐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어느 부분은 부족했고 어느 시간은 충분했으리라.   전시판에 적힌 “안전한 삶만 추구한다면 자신이 얼마나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안수산 여사의 고백처럼 나도 고난을 기회로 여기기로 했다. 권소희 / 소설가이 아침에 세계대전 비밀 안수산 여사 원주민 암호병 암호해독력 때문

2022-10-04

[글마당] 여왕봉 여사

‘어쩌다가 내가 그 애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친구가 될 수 없는 각각의 처지였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반에서 중간축에 들었는데 그 애는 항상 전교 톱이었다. 특히나 수학을 잘했다. 나는 수학 숙제를 하지 않아 선생님에게 야단맞는 꿈을 요즘도 종종 꿀 정도로 수학을 못 했다.     그 애가 기차로 안양에서 등하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팔랑귀가 솔깃한 것이 시작이었다. 기차 차창 밖을 내다보는 흰 칼라의 청색 교복을 입은 단정한 소녀를 상상하다가 나도 기차로 등하교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기차를 놓칠까 봐 부지런히 하교하던 그 애와 학교에서 떠들고 놀았던 기억도 별로 없다. 그런데 어쩌다가? 여고 시절 그 애의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곧바로 아버지가 숨겨 놓은 것을 꺼내기라도 한 듯 참한 아줌마와 재혼했다. 채 마르지도 않은 그 애의 엄마 무덤 앞에서 우리는 함께 서럽게 울었다. 나도 엄마가 늘 아파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 아마 같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서로의 입장이 같아서였나보다.     남편에게 말했다.   “작년 여름 우리 기차 타고 내리고 싶은 기차역에 내려서 7마일 정도 걸었을 때 빠진 뱃살이 도로 부풀었어. 줌바를 추면 그나마 줄기는 하는데 추고 나면 허리와 무릎이 아파. 내 여왕봉 친구 알지? 그 애는 남편과 함께 서울 시내를 샅샅이 걸어 다니며 둘러본다네. 뱃살이 붙어있을 틈이 없대. 멋지지 않아?”     오래전 여왕봉 친구가 LA에서 몇 년 살다 서울로 돌아간 적이 있다. 내가 LA를 방문했을 때 그 애를 여왕봉 다방에서 만났다. 남편은 나를 차로 다방까지 데려다주고 1시간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1시간이 10분으로 여겨질 정도로 후다닥 날아갔다. 이야기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남편이 다방 문 앞에서 시간을 보라는 듯 손목에다 검지 손가락질하며 나오라고 했다.   “1시간만 더 있으면 안 될까? 이야기 시작도 아직 못했는데. 제발 봐줘요.”   사정하고 돌아와 궁둥이를 붙이고 못다 한 이야기를 하려는 중 남편의 인상 쓴 큰 얼굴이 다시 다방 문 앞에 나타났다. 또 손목에 검지 손가락질하며 성질부렸다.     “뭔 수다를 2시간씩이나 떨어. 주차장을 찾지 못해 주위를 몇 바퀴나 돈 줄 알아.”   가뜩이나 목청이 큰 남편의 꽥 지르는 소리에 친구는 놀라 당황한 얼굴로 그만 헤어지자고 했다. 그런 연유로 여왕봉이라고 부른다. 친구는 그 이후 내가 다혈질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놀린다.     남편이 성질내며 추한 꼴로 죽 갔다면 참다가 싫으면 싹 돌아서는 나는 끝장을 봤을 것이다. 다행히도 남편은 ‘변해야 산다. 마누라 말 들었더니 자다가 떡이 생겼네’라며 못된 성질 누그러뜨렸다.   “내가 마누라 뱃살 책임지고 빼 줄게. 우리도 일요일마다 여왕봉 여사처럼 맨해튼을 싸질러 다니자고.”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여왕봉 여사 여왕봉 여사 여왕봉 친구 여왕봉 다방

2022-07-15

최순실 트라우마?…與, 김건희 '비선 공세' 차단 총력전(종합)

고침내용 : [발언 추가, 제목 및 부제 보완.]최순실 트라우마?…與, 김건희 '비선 공세' 차단 총력전(종합) 공약 파기 딜레마에도 제2부속실 설치 목소리 커져…내부 갑론을박     (서울=연합뉴스) 이유미 홍준석 기자 = 국민의힘은 16일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지인 동행을 놓고 '비선 논란'을 쟁점화하는 것에 대해 차단막을 치는 데 주력했다. 민주당이 박근혜 정부 당시의 '최순실 국정농단'까지 거론하며 총공세에 나서자 국민의힘은 "국민 선동", "정치 공세"라며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윤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영부인을 보좌하는 제2부속실 폐지 공약을 내걸었지만, 논란 확산을 막기 위해 제2부속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내부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다만 민주당에 '공약 파기'라는 추가 공격의 빌미까지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제2부속실 설치에 반대하는 의견도 동시에 나온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이날 YTN 라디오에서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꼬투리를 안 잡는 것이 없다"며 "현직 대통령 부인이 전직 대통령 부인을 예방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는 장려할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김 여사가 최근까지 운영한 전시기획사 코바나컨텐츠 출신 인사 2명이 대통령실에 채용된 것이 '사적 채용'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민주당도 그렇게 하고 문재인 대통령도 그렇게 했고 그걸 갖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정당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김용태 청년최고위원도 회의에서 "민주당의 질 나쁜 선동이 행해지는 것은 개탄스럽다. 비열한 정치공세"라며 "봉하마을 방문의 의미를 되새기는커녕 '아니면 말고' 식의 국민 선동으로 나쁜 프레임을 만드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허은아 의원은 김 여사를 죄수복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한 한 일간지 만평과 관련, 페이스북에서 "김 여사를 범죄자와 탈옥수로 묘사한 신문 만평은 분명 정도(正道)를 넘어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어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의혹만 가지고 대통령 부인에게 죄수복까지 입히는 것은 과도하지 않나"라며 "그 누구라도 타인의 인격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내부적으로는 여론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제2부속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최근 봉하마을 방문에 지인이 동행한 것이나 팬클럽 회장 강신업 변호사의 막말 등으로 논란이 확산되는 것이 여권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 청년최고위원은 "대통령실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이 뒷받침되도록 하는 것이 불필요한 논란을 더 이상 양산하지 않을 수 있다"며 제2부속실 설치를 촉구했다. 하태경 의원은 KBS 라디오에서 "부속실을 안 두니 팬클럽이나 김 여사 개인 회사 직원들이 부속실을 대체하는 일이 벌어진다"며 "차라리 깔끔하게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고 제2부속실을 만드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러나 권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제2부속실을 부활하지 않더라도 대통령 부인의 공적 활동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다"며 "공약 파기이기 때문에 가급적 하지 않는 게 맞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날 비공개 최고위에서도 김 여사 논란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준석 대표는 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사적 경로로 정보들이 유통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논의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제2부속실 등 형식을 논의한 건 아니고, 사적 지인이 사진을 입수해서 제일 먼저 공개하고 언론이나 공적조직은 정보가 늦는 상황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yumi@yna.co.kr [https://youtu.be/NTjD9Pf6GmY]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트라우마 최순실 최순실 트라우마 김건희 여사 제2부속실 설치

2022-06-16

[글마당] 사백 번째 이야기

이백 번째 이야기를 썼을 때까지만 해도 브루클린에 사는 생활고에 찌든 화가 부부의 애환을 썼다. 상처의 고름을 짜내듯 한자씩 뱉어냈다. 삼백 번째 이야기부터는 지난 과거의 어두운 삶에서 벗어나 서서히 평상심을 일궈가는  과정을 썼다.   2008년 6월부터 중앙일보 지면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왜 그리 힘들게 살던 기억이 떠오르든지! 어느 순간부터는 고달팠던 삶의 기억이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이따금 뒤틀며 올라올 적도 있지만, 힘든 기억을 다 뱉어내고 나니 상처가 치유된 듯 더는 생각나지 않았나 보다.     글 쓰는 일은 내면을 열어젖혀 자신과 대면하고 치유하며 생각을 깨우치는 일이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응어리진 실타래를 끌어내어 풀고 어두운 과거를 청산해서인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더는 아파할 일이 없어져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졌다.     남편의 시선도 달라졌다.   “이 여사, 중앙일보에 글 쓴지 몇 년 됐지?”   “올 6월이 오면 벌써 14년이나 썼네?”   “질기네. 글이 좋고 나쁨을 떠나 사백 개 글을 시간에 맞춰 보냈다는 것만도 대단해. 마누라에게 한번 걸리면 끝장나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아무튼 질겨. 수없이 망할 듯 말 듯 하던 조선 518년의 끈질긴 전주 이씨 조상의 DNA를 받았기 때문일 거야.”     “원래 내가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을 선호하잖아. 지면에 거창하게 많은 것을 쓰려고 하면 오래 쓸 수 없어. 맛있는 것 한꺼번에 다 먹지 않고 아껴 뒀다가 조금씩 먹듯이 쓰니까. 심오한 글은 쓸 줄도 모르고 그냥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수다를 쓰니까 지금까지 버텼지.   예전엔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 신문사에 제때 글을 보내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어. 지금은 그 걱정도 없어졌어. 산책하다가 문득 소재가 떠오르기도 하고, 친구와 수다 떨다가도, 자다가도 탁 떠올라. 가만히 기다리며 소재가 문뜩 떠오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으려고 조금만 신경 쓰면 되니까.     솔직히 독자들에게는 미안해. 타성에 빠진 내 글이 지루할 수도 있잖아. 어떻게 개인사를 그렇게 까발릴 수 있냐는 말까지 지인들에게 여러 번 들었지만, 뭐 그런 소리 좀 들으면 어때. 내가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간 듯 변화하고 좋아지는데. 글 쓰는 일이 나에게는 좋거든. 인간은 무척이나 이기적인가 봐.”   지난 14년 동안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떨까? 이따금 궁금하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이야기 사백 중앙일보 지면 여사 중앙일보 화가 부부

20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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