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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길을 잃은 사람들

  며칠 전 나는 연로하고 노쇠한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때는 피 끓는 청춘의 강을 건너느라 힘들고 아팠던 사연들을 저마다의 가슴에 훈장으로 새긴 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어쩌면 저들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나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예감에 사로잡혀 입술을 뚫고 나오는 노래는 자꾸만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스물을 꿈꾸었다. 스물이 되었을 때는 삼십을 꿈꾸었고, 삼십일 때는 사십을 꿈꾸었다. 그러나 오십일 때는 육십을 생각하지 않았고, 육십일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 그 누구인들 나이 들어감을 꿈으로 생각하겠는가.   두 번째 노래가 끝나도록 그림 같이 앉아만 있던 어른들은 손뼉을 유도하는 몸짓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늙음과 질병이 그들의 즐거움을 느끼는 기관까지 잠식했는지 얼굴까지 무표정이다. 아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몸이 고단하고 힘이 들 때는 그 힘들고 아픈 것에 에너지가 다하여 다른 것에는 미처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만사가 귀찮다는 것을.   4곡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 다시 4곡의 노래를 부를 때는 분위기가 훨씬 나아져 몇몇 어른들은 손뼉을 치면서 장단을 맞춰 주셔서 오히려 우리가 위안을 받는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가 망고나무에는 망고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아보카도도 이쁘고, 반질반질하게 열려 있었다. 처음치고는 별 무리 없이 공연을 마친 우리는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나오는데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놓고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넷째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즈음 나는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무척 예민해져 있었는데 이유는 언니 오빠가 다 칠팔십대 고령이라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될까 봐 지레 불안한 탓이다. 전화 내용을 요약하면 우리 형제의 웃 세대로는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친척분을 어제 모 요양 병원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구십을 넘기신 분은 안 가겠다고 떼를 쓰셨다는데 별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일주일 정도는 전화와 방문을 자제해야지만 요양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할 것이니, 그 일주일 동안은 전화도 방문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양로원을 떠나면서 무언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했던 이유가….   나는 평생 그 어른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밖에는 보지 못하고 살았지만,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단절의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겪고 계실 그분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에 무거운 쇳덩이를 얹어 놓은 듯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4살 때 제 삼촌을 따라 교회 식구들과 함께 캠핑하러 간 적이 있다. 엄마와 떨어져 처음으로 밤을 보내게 되는 일이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당시 시동생이 그 교회 전도사였기에 괜찮으려니 하고 보냈다. 그러나 밤 열두 시가 넘어 아이는 반실신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많이 보채고 힘들게 했느냐고 묻는 나에게 담당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보채지도 않고 힘들게도 안 했어요. 밤에 잘 자나 한 바퀴를 돌아보는데 아이가 얼마나 소리도 없이 많이 울었는지 베개가 다 흥건히 젖어 있더라는 것이다.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맞이했던 그 밤의 익숙하지 않은 방과, 침대와 엄마 없음은,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과 설움이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그 어른 심정 또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본다.   양로원이나 요양 병원은 매일 의사나 간호사들이 상주해 있고 간호조무사들이 정성스럽게 환자들의 일 거수 일투족을 거들어 주니 연세가 많거나 몸이 불편한 어른들께는 더없이 안락한 곳일 수 있다. 오늘 내가 다녀온 곳만 하더라도 태평양을 배경으로 세워진 최상의 시설과 서비스를 자랑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에 즐거운 곳이어도 연습 없이는 낯선 곳에 불과하다. 더구나 수십 년 동안 친숙했던 것들과의 갑작스러운 생이별은 심신이 허약한 노인들께 치명적인 아픔과 슬픔이 될 것이다.   자식이 태어나 서너 살이 되면 유아원이나 유치원에 보내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며 공동생활에 적응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처럼 노인들에게도 시설로 들어가기 전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인생에서 나 또한 앞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만, 바라건대, 나부터라도 늙고 병들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살아온 생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곳이라는 사고를 마음에 새겨 좀 더 단단한 노년을 준비해 보리라 다짐을 한다.   매달 한 번의 양로원 방문은 즐거움보다는 슬픔이 앞서는 일이지만 슬픔의 돌이 슬픔에 부대껴 저 스스로 둥그러질 때, 나 또한 그 무게에서 조금씩 놓여나 조만간 이곳으로 올 때 연습이 되어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다음 달에 부를 노래의 악보를 손에 들고 잘 굴러지지 않는 혀로 팝송을 부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뼉을 친다, 노래를 부른다, 모두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래, 지금 저 어르신들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길에 제대로 서 있는 것이리라. 고 옥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양로원 방문 어른 심정 전화 내용

2024-04-25

[문예 마당] 속삭임의 삶

  ‘거룩한 천사의 음성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날의 그 언약이/어두운 밤  지나고 폭풍우 개이면 동녘엔 광명의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고/     속삭이는 앞날의 보금자리  즐거움이  눈 앞에 어린다.’   멀고 먼 추억 속 무대에서 짐 리브스의  ‘희망의 속삭임’이 맑고 구수한 음성으로 들려 온다.  이 노래는 원래 셉티머스 위너가 1868년 에 발표한 곡이라고 한다.   늘 가족들에게 미소와 사랑을 나누어 주신 처형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들은 처형의 90세 생일 축하 특별 이벤트로 임영웅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합창하기로 했다. 나 역시 이 노래를 배우려 유튜브의 노래 교실을 통해 수십번 따라  불렀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음을 잡을 수가 있게 됐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흥얼거리며 잠을 청하고 가사를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주위의 모든 사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또 얼마나 필요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날 믿고 따라준 사람들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고진감래라는 말도 있지만 인생이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것처럼  늘 위기의 연속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다리 밑은 강물이요, 뒤로는 갈 수가 없고 어떤 고난이 있어도 넘어야 하는 항상 아슬아슬한 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     노년의 삶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건강이 가장 문제다. 나는 아내의 깊은 숨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물론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어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몇 년간 계속한 투석이 너무 힘에 겨워 중지하고 한동안 주사와 약으로, 그리고 또 다른 치료법으로 몇 년을 견디어 왔다. 팔순이 넘어 병들고 부자연스러운 몸이 되다 보니 과거의 강인한 개척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누군가 도움을 받을만한 인연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씨앗은 흙을 만나야 싹이 트고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숨을 쉰다고 하였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리 왕년에 잘 나갔다 하여 큰소리를 쳐봐도 세상엔 독불장군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만나야  행복하고 주변을 살피면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우리 부부도 예외 없이 건강상의 이유로 그 기고만장하던 패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딸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엄마, 아빠 함께 살자”고 권유했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고 궁리한 끝에 딸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라스베이거스 레드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나 역시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딸의 권유가 고맙기만 할 뿐이다.   팔순이 넘다보니  왜 이리  신체의 고장이 많은지. 청력이 약해지다 보니 아내와  주고받는 대화도 늘 반문이 따르게 되고 아내는 그것이 불만이다. 아내도 몸이 쇠약하다 보니 자연히 목소리가 잦아져 좋게 말해서 우리 부부는 속삭임의 대화가 계속된다.     최근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겪었다. 당시 비대면 접촉이 권유되면서 기업들의 재택근무 도입이 늘었다. 이렇게 도입된 재택근무는 팬데믹이 끝난 요즘도 더욱 확대되는 모습이다.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도 한 사람은 아래층에서, 또 한 사람은 이층에서  재택 근무를 하고 있어 우리 부부는 업무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한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작아진 이유도 있지만  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습관이 생겼다. 늘 조용조용 사랑을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대화한다. 속삭임의 삶을 사는 셈이다.     귀가 밝은 딸은 우리 부부의 대화 내용을 다 알아듣고도  모른척 빙그레  웃곤 한다. 가끔 “네 흉보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딸에게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귀가  밝은데 우리  시니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나의  속삭임의 삶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반드시 우리에게  거룩한 천사의 음성이 내 귀를 두드려, 어두운 밤이 지나고 광명의 햇빛이 눈 부시게 비칠 때, 아슬아슬한 인생의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왜 이리 눈물이 나요.’ 오늘 밤도 콧노래를 부르며 잠을 청해 본다. 백인호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재택근무 도입 노래 교실 건강 문제

2024-04-18

[문예 마당] 함께 나누는 대화

며칠 전 커피숍에서 무엇인가 아쉬운 마음으로 나오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친우들과의 대화 내용은 몸 어디가 아프다는 이야기, 자식 이야기, 손자 이야기 그리고 남 이야기가 주였다. 은퇴 후 시간 여유가 있다 보니 친구들, 또는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런데 대화를 자주 하다 보니 조심해야 할 소재들이 있음을 느낀다.   주위에 나이 든 사람이 많다 보니 몸 곳곳에 아픈 십자가들을 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문제는 본인의 아픈 이야기를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이런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대화는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본인의 과거 이야기, 자식 또는 손자들에 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나온다. 대부분이 자랑거리다. 하지만 아무리 자랑스럽고 좋은 이야기라도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면 듣는 사람은 부담을 느끼게 된다. 사생활 (privacy)을 중시하는 미국 사람들은  본인의 이야기, 혹은 자식이나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잘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 소재다. 한국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얼굴을 붉히는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고 우리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한국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자기주장이 강한 논쟁보다는 차라리 토론 형태로 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논쟁은 누가 옳은지 흑백을 가리자는 대화이기에 서로 열을 받게 되지만, 토론은 무엇이 옳은지를 찾는 것이기에 언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작다. 한국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직접 할 수일은 별로 없지 않은가. 더구나 본인이 미국 시민권자라면.     우리는 본인이 직접 보거나 경험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들은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도 많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경우 대부분이 좋지 않은 내용이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가 주고받았다는 이야기 내용이 흥미롭다. 소크라테스는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인 플라톤 이, 특히 크세노폰 등이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우가 “네 친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라고 말하자,  소크라테스가 먼저 세 가지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이러했다.     친우: “네 친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소크라테스: “나에게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네가 직접 들은 이야기인지 혹은 다른 사람한테 들을 이야기인가?”   친우: “실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소크라테스: “그러면 너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모르는구나. 그런데 그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인가, 아니면 안 좋은 이야기인가?”     그리고 끝으로 소크라테스는 다시 물었다. “자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인가? 만일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를 할 이유가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질문에는 “사실이 아닌 남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전하지 말라”는 내용과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도 좋지 않은 내용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그리고 “만일 그 내용이 좋지 않더라도 내 생활에 경각심을 울리는 이야기”라면 듣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좋은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목적이 분명하고 참석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상대방의 대화를 중간에 끊지 말고, 존중하는 자세로 경청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고려와 예의를 차리는 것이 건강한 대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와 더불어 대화를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지난 일보다는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책을 읽고 나 자신이 말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명렬 / 작가문예 마당 대화 수필 이야기 자식 손자 이야기 이야기 내용

2024-03-21

[문예 마당] 마음은 언제나 30대

“우리 새 가게 이름을 ‘Forever 31’으로 지으면 어떨까?”   나보다 딱 10살이 많았던 사장님의 부인과 직원들이 오손도손 점심을 먹는 시간이었다. 사장님의 부인은 항상 거침없이 대화의 주도권을 이어나가는 분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그녀의 말에 추임새를 넣으며 30분의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 오픈하는 의류 지점의 상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화제였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그 당시 31살로 막내였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굳이 서른 한살이 영원하다면 무엇이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나 혼자만 공감을 못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모두 40대 였던 동료 언니들은 미시족 고객이 대상인 만큼 그 이름이 좋다고 모두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장님의 마지막 결정 과정에서 미끄러졌는지 새로운 가게 상호는 ‘포에버 31’이 아닌 다른 것으로 결정됐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내가 40대 중반의 나이가 됐을 때 문득 동료 언니들의 격한 호응이 떠오르면서 과거 나의 서른한 살 때가 많이 그리워졌다. 사실 당시에는 올망졸망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느라 내 30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났다. 나는 주위 친구 가운데 가장 먼저 아이를 낳고 키웠다. 당시 독신주의를 외치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친구들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그렇게 의미 없이 10년의 세월이 지나간 줄만 알았다.   아이들에게 ‘어서 자라라’ 하며 시간이 달려가기만을 소망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세월은 비호처럼 날아가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어 돌아보니 내게는 30대 시절이 인생의 전환점이 아니었나 싶었다. 젊고, 순수했지만 웬만한 사랑 타령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시절이었다. 물론 신혼 초라 가끔 사랑싸움 때문에 며칠씩 다툴 때도 있겠지만 그 당시 남편은 금세 미안하다며 사과도 잘했던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사랑싸움도, 미안함도 필요 없는 척하면 다 아는 사이로 변했지만…. 지금은 결혼 초 투덜투덜 사랑싸움이 왠지 그립기도 하다.   나의 30대 시절, 아이들은 세상에서 엄마가 전부인 것처럼 나에게 의지했다. 13살 이후 사춘기가 와서 하루가 다르게 성숙해진 딸을 보며 낯설어진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내 30대는 끝이 났던 것 같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말끝에 “그때 해맑았던 너의 모습이 그립다”고 했더니 눈치가 빠른 딸이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영원한 36살이야”라고 한다. 딸은 엄마가 좋아하는 말인 걸 알기에 “항상 엄마는 늙지 않는 것 같다”며 립서비스를 해주곤 한다. 미용실에라도 다녀오면 무뚝뚝한 아들도 “오늘은 엄마가 좀 젊어 보이네”라고 한마디 툭 던진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잠깐 한 적이 있다. 돌잡이 미만 아이들부터 5살 정도까지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이 30대였다. 그들을 대하면 마냥 밝고 이쁘게 보여 젊음이 참 부럽기까지 하다.   과거 20대 시절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옆에 있던 지금의 내 나이쯤 된 분이 수줍어하는 나에게 등을 밀어주겠다고 하시더니 “젊어서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마 지금 똑같은 상황이 되면 나도 그분처럼 수줍어하는 아가씨 등을 밀어주며 똑같은 말을 할 것 같다.     가끔 30대의 엄마들이 어린 자녀와 함께 가는 뒷모습을 보면 예전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순수했던  예전 모습을 찾고 싶어서.     왜 나는 30대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까? 그때는 폴더용 휴대폰이라 사진도 많이 못 찍었다. 아이들이 주인공이고 나는 매일 애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던 거 같다. 이제 아득한 아기 엄마 때의 시절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영원한 31세로 살아야겠다.   문득 거울에 보이는 새치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팔자 주름이 펴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휴대폰 글자 크기를 키운다고 기죽지도 말아야겠다.   앞으로도 ‘포에버 40년, 50년’, 마음 먹은 대로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오늘 하루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며 즐겁게 보내야겠다. 이선경 / 독자문예 마당 마음 수필 아기 엄마 사랑싸움 때문 30대의 엄마들

2024-03-14

[수필] 렌터카

지난가을 한국여행을 다녀왔다.  둘째 딸 부부가 한 학기 안식년으로 한국을 간다기에 우리 부부도 동행했다. 코로나 탓에 6년 만에 형제자매 친지들을 만났다. 조금씩은 변했지만 건강하게 사는 그 자체로 감사하고 반가웠다. 여행 기간을 2주로 잡았기에 계획대로 바삐 움직였다. 노래 가사처럼 서울, 대전, 광주, 임실, 보성 등을 점만 찍고 다녀야 했다.     이번 여행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떠날 때 자식들과 굳게 약속했다. 나이도 있고 오랜만에 가니 길도 많이 변해 운전이 위험해서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짐을 간단히 하려고 신경을 썼지만 반갑다고 주고받는 선물은 여행 동안 큰 짐이 됐다.     사위가 미국인이라 대전에 갈 때는 KTX를 이용했다. 발전된 한국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가방을 들고 서울역 광장 계단을 올라야 했고 기차 플랫폼까지는 내려가야 했다. 가방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렌터카 생각이 간절했다. 애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대전을 떠나 호남 지방을 갈 때는 차를 빌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딸 부부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틀 후 딸은 우리를 전송하러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고속버스와 택시를 타고 다니라고 일렀다. 그런다고 했지만 남편과 나는 이미  렌터카를 예약했기에 미리 부른 택시를 타고 도망치듯이 렌터카 회사로 향했다. 딸과 사위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은 더 힘들 것 같았다. 우리 사정을 말로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고 걱정만 더 할 것 같아서 비밀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서 여직원 두 사람이 밝은 얼굴로 우리를 반기며 설명을 잘 해주었다. 특히 내비게이션 사용법은 몇 번이나 반복해 일러주었다. 남편의 반복되는 질문에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너무 정확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 놀랄 정도였다.       차 트렁크에 가방 두 개를 넣고 자잘한 짐들을 뒷 의자에 놓고 우리 부부는 먼저 기도를 드렸다. 절대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몸이 편하니 마음도 즐거웠다. 휴게소마다 들러 국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오후 1시쯤 사촌 시숙께서 정성껏  관리하신 임실 시댁 선산에 도착했다. 술잔을 올리며 그분들의 삶을 기렸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점만 찍고 다음 장소로 또 이동해야 했다. 시어머님과 큰형님, 사촌 형님께서 왜 그렇게 총총 가느냐고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다. 속으로 “해 있을 때 가려고요”라고 답하며 광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친절하고 낭낭한 목소리는 여행길을 즐겁게 해주었다.     순창, 담양 등의 이정표가 보였다. 그리운 조국의 시골 마을이다. 고추장, 떡갈비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광주에서 5시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부지런히 달려 4시 반쯤 도착했다. 서울에서 온 두 동생과 함께 약속된 음식점에서 여고 동창들을 만났다. 여고 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도 두 명이나 있었다. 마치 매일 만난 친구처럼 격이 없었다.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모두가 편안한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들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고향인 보성 득량으로 향했다. 두 동생을 차에 태우고 고향산천을 달리니  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전히 내비게이션 아가씨는 낭낭한 목소리로 길을 안내했다.     산소에 가기 전에 고향에 오면 항상 들리는 꼬막 정식을 먹으려 벌교를 찾았다. 대충 지리를 아는 터라 들판만 건너면 되리라고 아무 의심도 없이 내비게이션 아가씨 말대로 들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길이 없어졌다. 큰 도로에서 200미터는 족히 들어온 후였다.  자세히 보니  양쪽으로는 수로가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후진해야 했다. 남편은 창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어 뒤를 보며 후진을 했다. 차바퀴가 자꾸 난간으로 갔다. 두 동생과 나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차 뒤에 서서 “핸들 돌리지 말고 고개 내밀지 말고 백미러만 보고 내가 손짓하는 대로 내 말을 잘 듣고 따라서 와라”고 했다. 남편은 고집이 있는 터라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소리를 질렀다. 잘못하다 양쪽 수로에 바퀴가 빠지면 일이 복잡해지니 내 손짓만 믿으라고 했다.     우리 부부가 서로 소리를 지르니 막내는 놀라 아무 말 못 하고 난감해하는데 다른 동생은 멀리 앉아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에 나도 웃음이 터졌다. 결국 남편은 내 손짓과 말을 들으며 무사히 후진에 성공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웃던 동생이 “언니, 요즘 내가 웃음을 잃었다고 의사도 친구들도 걱정했는데 드디어 오늘 웃음을 찾았네”라고 말했다.  그러면 이런 치유를 주시려고 그런 고통을? 동생이 다시 웃게 됐다니 무얼 더 바라리.      2박 3일의 성묘 일정을 끝내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아무 탈 없이 차를 반납했다. 미국에 있던 큰딸이 전화로 칭찬했다. 대중교통 잘 이용한다고. 나는 더듬거리다가 고백했다. 차를 빌렸다고. 그리고 서울행 고속버스 안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짐 없는 여행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렌터카 렌터카 회사 렌터카 생각 내비게이션 아가씨

2024-03-07

[수필] 시들어도 꽃은 꽃이다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비뚤고. 거울을 보여줄까 꼬마 눈사람.’                     겨울이 되니 나도 모르게 이런 옛날 동요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은 아직 동심의 세계를 헤매고 있나 보다. 가끔 나는 내 나이를 잊어버리고 화장대에 앉아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낯설어지기도 한다.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왼뺨에 희미한 반점이 여러 곳 보인다. 입술 언저리에는 아무리 화장품을 발라도 자글거리는 주름살들이 결단코 자리를 비켜 주지 않고 좌정하고 있다. 마음은 차마 청춘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렇게까지 늙었다고 느끼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내 모습에 절망한다. 아! 이젠 아주머니가 아니고 할머니구나.  손자가 여러 명 있으니 진짜 할머니인 것은 틀림없지만, 누군가 할머니하고 부를 때면 나는 못 들은 척 한다. 나를 부르는 소리인데도….   사실 말이지 식당에 갔을 때, 웨이트리스가 “어서 오세요, 할머니” 보다 “아주머니”라고 할 때 좀 듣기가 괜찮다. 괜한 주착인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탱탱하던 볼이 호물호물해지며 때깔 곱던 손등에 굵은 심줄이 돋아 값비싼 반지를 끼워도 어색하기만 하여 보기 민망하다. 마음은 갓 잡아 온 물고기처럼 팔팔한데 마음과 몸이 함께 가지 않고, 마음 따로 몸 따로 놀면서 굵은 나태가 느직느직 거리는 몸이 한심스럽다.   젊은 날, 나이 많은 어른을 뵈면 저분들은 겉모습처럼 마음도 늙었겠구나 하고, 나는 절대로 저렇게 꼬부랑 할멈은 안 될 거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누구를 차별하고 특혜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나라고 팽팽한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말이다. 공연히 쓸데없는 권위의식 같은 것 부리지 않고 알량한 설교 따위로 젊은이들의 눈총 맞으며 꼰대 소리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   그러면서도 쉽게 노여워하고 걸핏하면 삐지기를 잘하는 감정은  늙은이의 안쓰럽기까지 한 철딱서니 없는 옹졸한 감정인가 한다. 겉으로는 의젓하고,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노인네로 알아주기를 원하지만, 속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는 외로움이나, 소외감은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열등감 같은 게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자고 마음은 늙지 않고 육체만 늙느냐 말이다. 안팎이 달라서 뒤집어 입을 수도 없는 옷처럼 때론 자신도 난감할 때가 있다. 어느 날, 아들하고 백화점에 갈 기회가 있었다. 잡동사니들을 사고 난 후, 한 편에 한국산 옷들이 걸려 있기에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가 브래지어를 한 개 샀다. 계산대를 지나 걸어 나오던 아들이 “엄마도 그게 필요해요”라고 했다. 늙은 엄마는 이젠 여자도 아닌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주름이 자글거리는 엄마, 허리까지 약간 휘어진 늙은 여인, 아들 눈에는 엄마가 중성으로 보이겠지 하면서도 섭섭했다. 마음만 이팔청춘이면 뭘 해, 비싸고 예쁜 옷으로 휘감고 덕지덕지 화장품 떡칠을 해도 자글거리는 터키 목주름은 ‘늙었다고’ 나팔 불고 있잖은가.     지금은 성형외과에 가서 재건축하여 몇십 년 젊은 사람으로 둔갑도 한다지만, 고린 전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여염집 여인이 살, 기름 빠져 주굴 거리는 얼굴에 많은 돈 들여 재포장하는 일이 그리 쉬운가.         하나님이 인생을 그만큼만 살고 오라고 정하신 기한이 있을 거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면 육신이 힘을 잃고 살가죽은 찌그러지고 힘도 빠진다.     뉴질랜드 산 사슴뿔로 만든 명약을 먹어도 나이는 숨길 수 없다. 새해 인사가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다. 그 소리가 전에는 고맙고 듣기 좋았는데 나는 그런 소리가 별로다. 오래 건강하면 다행이지만, 낡은 뼈는 삐끗거리며 피둥거리던 살갗은 부대조각처럼 퍼석거린다. 거기다가 더 늙어 대소변을 못 가려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한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 너무 오래 살면 우선 자식들에게 부담을 준다. 아니면 양로원에 가서 하늘만 쳐다보고 누웠다, 앉았다 할 꼴을 상상하면 치가 떨린다.   옛날엔 육칠십만 살아도 환갑,진갑 다 지나 장수했다고 하고 적당한 때에 죽었으니 가는 이나 보내는 이나 모두 섭섭하고 슬픈 아름다운 이별을 했었다. 그러나 늙은이가 백 살을 살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장수라는 것은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아닌 것 같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하는 덕담이 듣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아는 분이 어떤 이해득실에 걸린 재판에서 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은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했다고 한다. ‘백삼십 살까지 살면서 잘해 보라고’     그 말은 저주였다. 쭈그러들고 청포묵처럼 흐물흐물해진 넓적다리가 지탱해주고 있는 몸, 힘은 빠졌어도 마음은 따라서 늙지 않고 남은 생을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살아가는 늙은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자식들은 엄마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그냥 엄마일 뿐이다.  김명선 / 소설가수필 엄마 허리 꼬마 눈사람 터키 목주름

2024-02-29

[문예마당] 내 고향은 어디인가

한국 체류 중이던 지난해 10월 미국에 사는 5명의 친지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중 3명은 여행사 단체여행 상품으로 왔다가 개인 시간을 보낸 후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모두 가깝게 지내는 분들인데 하필 그때 발가락을 다쳐 뉴욕에서 온 친구 한 명만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미국서 함께 살다 한국에서 만나면 더 반갑고 새로운 느낌이었을 텐데 전화 통화만 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하기도 했다.         LA로 돌아온 후 그중 한 명을 만났더니 “한국은 타향이니 이제 고향인 LA에서 만나야죠”라고 말한다. 그 말에서 ‘옛 친지가 그리워 한국을 찾았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고 낯선 도시만 헤매다 왔다’는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대학 졸업 직후 유학을 왔거나 유학생 배우자를 따라왔으니 반세기 훌쩍 넘게 고국을 떠나 살았다. 한국에서 산 날보다 미국에서 지낸 세월이 훨씬 더 길다. 이젠 미국이 제2의 조국이라 생각하고 살지만 아련한 향수에 잊지 않고 고국을 찾는 분들이다.     남편은 얼마 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자주 한국을 찾는다. 그런데도 친지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으면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만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는데 불쑥 나타나서 내 자리를 찾으려는 것은 무리다. 앞으로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지에게만 귀국 소식을 알려야겠다.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 이주를 고려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민 와 고생하다가 애들도 다 커서 독립했고, 형제자매가 있는 한국서 살고 싶다”, “늘 마음속으론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았죠”, “한국적인 문화가 더 친숙한 것 같아요” 등 이유도 다양하다. 한마디로 고향이 그립기 때문일 게다.  대체 고향이 뭐길래!   오랜 세월 미국에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소위 ‘미국물’이 든다. 오랜만에 돌아가면 한국은 말이 잘 통하는 또 다른 외국일 수 있다. 달라진 한국 문화나 생활 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또 미국생활을 청산해서 한국에 들어와 살기 힘들 정도로 한국의 주택가격과 물가가 올랐다. 어쨌든 목표가 뚜렷해야 후회하지 않는다.   지인 중에는 “미국과 한국, 어디가 더 살기 좋아요?” 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 이 물음에 나는 “한국에 가면 한국이 좋고, 미국에 오면 미국이 좋다”고 답한다. 공연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남편은 한국에 살고, 애들은 미국에 살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미국과 한국이 늘 함께 자리 잡고 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데 그러면 내 고향은 어디인가?       타국 땅에 수십 년을 살아도 한국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마음속에 ‘내 나라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 확실한 답을 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지금 한국에 가도 모두 낯선 풍경으로 바뀌어 기억 속의 옛 모습은 다 사라졌다. 마음에 품고 있는 나라보다는 세월이 갈수록 내 몸이 머무는 땅이 우리나라가 된다.       한국은 ‘우리나라’라는 의미보다는 고향이라는 의미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갈 땅이 미국이라면, 한국은 나의 고향이다. 고향인 한국이 잘되고, 살고 있는 나라도 잘되는 것, 그것이 이민자가 품고 있는 이중적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LA에 ‘hi-5’ 라는 5명의 친구 모임이 있다.  전부터 인연이 있거나 새로 알게 된 친구들로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직도 LA 한인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지만 한번 만나면 몇 시간이고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친구들이다.     미국에 ‘hi-5’가 있다면 한국에는 역시 5명의 친구 모임인 ‘오색회’가 있다. 학연으로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내가 외국에 나가 사는 동안 그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듯해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중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빨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내가 많이 아팠고 서로 시간을 맞추느라고 이제야 만나자고 연락한다.”     서운했던 마음이 스르르 봄눈 녹듯 사라졌다.  5명이 모두 모였다. 한 명은 침대에서 떨어졌다며 가슴 둘레에 거북이 등 같은 보장구를 하고 나왔고, 또 한 명은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귀가 잘 안 들려 큰 소리로 말해야만 소통이 되는 친구도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걸 참으며 보장구를 착용한 친구에게 “야, 너 검투사 같다”며 웃어버렸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를 만나려고 나와 준 친구들이 너무 고마워 귀갓길 전철 속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서양 속담에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된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고려 말 길재는 500년 도읍지 개경을 둘러보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라고 탄식했다. 오늘날 한국은 아파트와 빌딩 숲으로 변해 옛 모습은 사라졌으나 옛 친구들은 여전하다. ‘산천은 간데없고 인걸은 의구하네’라는 생각을 한다. 오랜 친구들이 나를 변함없이 반겨 주는 곳, 그곳이 내게는 고향이다.   배광자 / 수필가수필 고향 고향인 한국 친지가 한국 한국 문화

2024-02-08

[수필] 소름 끼치는 지구 재앙

탈 성장만이 지구의 재앙을 늦추거나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믿고 있는 세상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탄소배출량 감축을 위해 유럽의 몇 나라들이 애를 써왔지만, 조금씩 가난해지는 길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 경제 부흥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경지에까지 오른 황금만능의 위력 앞에서 지구 온난화는 하찮고 귀찮은 걸림돌일 뿐이다. 풍요로움에 길든 이 습성은 변화될 기미가 거의 없다. 귀담아듣고 볼 수 있는 능력보다 쾌락과 흥미 위주의 발포성 흥분을 더 탐하는 문화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존층 파괴로 아프리카 대륙은 빈민국과 기후 난민이 늘고 있다. 기후학자들은 항공노선 증가로 인한 일산화탄소 증가가 기온 상승과 오존층 파괴를 불러올 것이라 경고하지만 일반인들은 이에 무관심 하다못해 항공 여행을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형 쿠르즈 한 척의 탄소 배출량은 자동차 4300대와 맞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1년에 두세 번은 쿠르즈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니 이들이 업을 쌓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스웨덴의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15세 때 피켓을 들고 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전 세계 청소년들과 공유하게 된다. 그녀의 엄마는 유럽에 알려진 오페라 가수였기 때문에 자주 항공 여행을 했다. 그러나 지구 환경 보호를 위해 활동 반경을 항공 여행이 필요 없는 국내로 한정했다고 한다. 수입 감소를 감수하면서 말이다.   툰베리는 UN유엔 연설에서 각국 대표들을 향해 “당신들은 나와 당신 자녀들의 미래를 도둑질했다”라고 일갈하는 바람에 트럼프 전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툰베리는 풍속으로 항해하는 배를 타고 이동하느라 스웨덴과 뉴욕을 오고 가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던 이 소녀의 행로는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했고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지구를 병들게 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환경을 위해 15가지 생활 규칙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는 분들을 위해 10가지 정도만 나누고자 한다.     주변에는 “나 한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되랴” 하는 무력감을 가진 분들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지구 공동체를 떠날 날이 닥쳤을 때 이 땅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지를 숙고해 본다면 “몰라서 못 했다. 너무 하찮아 신경 쓰지 않았다”라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의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회한을 어찌 감당할 것인지? 큰일 작은 일을 따지다 정작 놓쳐 버린 시간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흔적은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물병·텀블러를 갖고 다닌다. 〈발암 물질인 PFAS와 쓰레기를 줄인다.〉   *온·냉방기 사용 없이 28년 동안 계절에 적응해 살았다. 〈건강 유지에 필수다〉   *옷가지를 줄이고 세탁기 대신 손빨래를 즐기며 숱하게 사들인 옷 무덤에서 해방되었다.   *수도꼭지를 콸콸이 아닌 졸졸로 조절. 〈가주는 물 부족이 심각하다. 앞으로 정화한 폐수를 식수로 전환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니 매우 슬픈 일이다〉     *주로 냉수를 사용하고 온수는 필요할 때만.   *샤워 시간 줄이기. 〈온수를 틀고 만족한 샤워를 좋아했던 나는 상당히 이기적이었다.〉   *천으로 만든 그로서리 가방과 망사 백을 사용한다. 〈플라스틱 사용을 많이 줄인다.〉   *스마트폰 사용 자제. 〈신문과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릴 확률도 줄어든다. 〉   *온라인 쇼핑 자제. 〈중독성이 너무 강하다.〉   *소비주의 억제. 〈탈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개인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런 현실은 오지 않겠지만 나를 포함한 누군가는 자발적 가난의 이름으로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다만 의식화된 무소유의 정신과 실천 없이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스페인에는 ‘하느님은 늘 용서하시고, 사람은 가끔 용서한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걸 뒤집어 본다면 자연은 우리가 행한 대로 베풀든지 아니면 복수를 한다는 의미가 아닐지? 소름 끼치는 느낌이다.   최경애 / 수필가수필 소름 지구 지구 환경 지구 온난화 지구 공동체

2024-02-01

[수필] 제자의 고백

그 시절은 6·25전쟁 직후라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고향의 모교인 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처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라 설렘과 두려움의 기억이 까마득한 데 오랜 세월이 지나갔건만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학교 건물은 폭격으로 반 이상이 폐허가 되었고 넓은 강당과 교실 10여 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강당을 여섯 개의 교실로 나누었다. 그중 한구석에서 학생들은 송판에 네 다리를 세운 조그만 책상을 각자 가져와서 공부했다. 찬 마룻바닥에 앉아 오들오들 떨면서 매서운 추운 날씨였지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맞아 주었던 3학년 1반 남아들이었다.   학생들의 손등은 터서 갈라지고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벌겋게 부어 있는 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며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이 대견했다. 그중에는 산 넘고 들길을 1시간 이상 걸어온 학생도 있었다. 전쟁 중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지내는 학생도 3명이 있었다.   하루는 가정방문을 핑계 대고 보육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3명의 학생이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시설은 너무도 비참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웃음을 잃고 양지바른 곳에서 병든 병아리처럼 웅크리고 않아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들은 배고픔에 먹을 것만 신경 쓰고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 당시 보육원은 구호물자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 가여운 아이들,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은 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일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매월 기성회비(학교 운영비)를 담임이 독촉하여 걷는 일이었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우리 반이 항상 꼴찌였다. 무상으로 교육할 수 있으면 좋을까 싶었다. 그런데 형벌처럼 전교 학급에서 수납된 기성회비는 나에게 다 가져왔다. 서무과장에게 매일 통계를 내어 돈과 함께 보고하는 업무를 내게 맡으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다 아찔한 사건이 벌어졌다. 받은 기성회비를 교실에 두고 자리를 비운 사이 돈이 없어진 것이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속만 태우고 조심하지 않은 나의 실수라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진땀을 흘리며 친지께 사정하여 겨우 해결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서산을 바라보니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의 고운 빛깔은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삭막한 내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 듯 황홀하고 포근하게 가슴 속 깊은 곳에 다가왔다.   그런데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웃는 얼굴의 똑똑한 반장, 조윤모가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반장과 함께 집으로 오는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원도에서 피난 나올 때 부모를 잃고 작은 엄마와 둘이 삽니다. 작은 엄마는 돈 벌어 오라며 밥도 안 주고 매질까지 해요.” 윤모는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어할까, 마음이 쓰렸다. 나는 저녁을 먹이고 위로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할 말이 있는듯한데 눈치만 보고 망설이다 말을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근무했던 4년간 많은 사연을 뒤로하고 대전에 있는 초등학교로 옮기며 고향을 떠났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하루는 해군 제복 차림의 말쑥한  군인이 집에 찾아왔다. 어떻게 왔을까? 그는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선생님. 저 조윤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잊지 않고 찾아온 제자가 고맙고 반가웠다. 제자는 단정히 앉아 망설임 없이 “용서해 주세요. 제가 선생님의 돈을 훔쳤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제자가 그 일로 인해 오랜 세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그러면서 제자의 진정한 고백에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제자를 안아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용서하는 기쁨, 용서받는 기쁨, 그 순간의 감동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모진 세파를 겪으며 참고 견디었으니 잘 살기를 마음 깊이 빌어 주었다.   어려운 시절 만고풍파 겪으며 살았을 불쌍한 아이들,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제 이순을 넘긴 노년이 된 제자들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겠지 싶다. 만남과 헤어짐은 우연이 아니고 깊은 인연이 있다 생각한다. 제자는 진심으로 양심 고백을 할 수 있는 심성을 가졌으니 틀림없이 올바르게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정직하게 정도를 걸어온 사람만이 마음의 평화와 축복을 받을 것이리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이 몇이나 있으랴. 잠시 있다 가는 인생길, 많이 사랑하고 아름다운 발자취 남기고 싶다. 이복자 / 수필가수필 제자 고백 양심 고백 강당과 교실 반장 조윤모

2024-01-25

[수필] 몽생미셀

아침 일찍 파리 서부 몽파르나스 역에서 렌(Rennes)으로 가는 TGV를 탔다. 몽파르나스 역은 파리 중심에 있는 북역과 크기는 비슷하다. 그곳만큼 복잡하지 않아서 방송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다. 파리 서쪽 도시들로 가는 테제베는 모두 이 역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안내 방송을 잘 들어야 한다.   오늘 목적지는 몽생미셀이지만 파리에서 렌까지 가는 프랑스의 북서부 지방은 한 번도 여행한 적이 없어서 기대가 크다. 새벽부터 서두르느라 몹시 피곤했던 동생은 기차가 출발하자 곧 졸기 시작한다. 안개가 걷히며 연도에 농촌 풍경이 스친다. 넓고 푸른 초원에 양 떼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이 끝없이 펼쳐진다. 멀리 구릉 위에 그림 같은 집들이 동네를 이루고 있는 아스라한 모습은 마치 오래전에 떠나 온 고향을 마주한 느낌이다.   두 시간 가까이 달려 기차는 렌에 도착했다. 운 좋게 시간이 꼭 맞아떨어져 곧장 몽생미셸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차는 이번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노르망디 해안을 향해 달린다. 한 시간 조금 넘게 달렸는가 싶었는데 눈앞에 불쑥 몽생미셸의 위용이 나타났다.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신비한 천 년의 수도원.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가 “사막에 피라미드가 있다면 바다에는 몽생미셀이 있다”라고 찬탄한 곳이다.   노르망디 해안에서 1km 떨어진 조그만 바위섬인 몽생미셀은 만조가 되면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 된다. 바닷물이 빠지면 모래 위를 걸어서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바위섬에 서기 708년, 아브랑슈의 주교 오베르가 수도원을 세우고 대천사 미카엘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성당의 첨탑에는 미카엘 천사상이 조각되어 있다. 갯벌 위에 걸린 다리를 걸어서 건너 섬에 들어섰다.     섬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왕의 문을 지나 맨 위의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미로 같은 골목으로 이어진다. 양옆으로 11세기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상가와 식당과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다. 중세의 돌길에서 아이러니하게 현대 사람들이 만든 상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중세의 건물에서는 천 년의 향기 대신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가 풍겨 나온다. 중세와 현대가 어우러진 곳,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거리. 태고로부터 이어져 온 인간 삶의 긴 고리 어느 시점에 어떤 의미로 나는 지금 서 있는 것일까.     초기 수도사들과 순례자들을 위한 간편식으로 이곳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는 명물 오믈렛과 크레페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동생과 호텔에서 마시려고 드미 부떼이유(demi bouteille-반병 짜리 포도주)를 한 병 샀다. 이 지방이 주산지인 보르도산 적포도주로 골랐다. 병 생김새가 작고 앙증맞아서 빈 병은 짐 속에 꾸려가기로 했다.   호텔 방에 짐을 풀고 바다 쪽의 창문을 열었다. 창턱 바로 아래에 무덤 하나가 있어서 무척 놀랐다. 모래에 반쯤 파묻힌 비석을 훑어보고 한 번 더 놀랐다. 무덤의 주인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백 년이 됐기 때문이다. 이곳의 오래된 무덤들은 유해는 없고 이제는 비석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짧은 향년을 끝으로 이곳에 갇혀 모래가 된 젊은 넋이 안쓰럽다. 어쩌면 그는 넓은 바다를 건너 바람처럼 물결처럼 항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호텔을 나왔다. 섬의 상층부로 향하는 좁은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오랫동안 내 여행 리스트에 있던 노르망디 해안이 발아래 꿈결처럼 펼쳐진다. 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유타 비치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상륙전 첫날 하루에만 만 명이 넘는 연합군이 목숨을 바친 바다는 지금은 망망대해로 푸르게 물결치고 있을 뿐, 전쟁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곳곳에 탑을 세우고 방어용 벽을 쌓아 전략상 훌륭한 요새 역할을 했던 이 섬은 백년전쟁(1337-1453) 시기에도 적에게 빼앗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백년전쟁은 영국의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의 필립 6세 때 영토와 왕위 계승 문제로 시작된 전쟁이다. 영불해협을 피로 물들이며 5대 116년간 간헐적으로 치러진 전쟁의 끝 무렵에 신의 계시를 듣고 잔 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를 구한다.     섬의 곳곳에 잔 다르크의 동상이 여럿 세워져 있다. 한결같이 남장을 하고 창과 방패를 들고  씩씩하게 서 있다. 그것은 프랑스 국민이 기억하고 싶은 잔 다르크의 모습일 것이다. 그 너머로 남성들의 전쟁에서 끝내 그 벽을 넘지 못한 여인이 떠오른다. 프랑스군에 의해 영국 측에 넘겨져 끝내는 화형대의 불꽃으로 스러져 간 여인이다. 먼 나라와 손잡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한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은 지구상에 국가라는 체제가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그새 해가 지고 바다는 섬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아름다운 노을이 바람을 타고 일렁이며 수채화가 되어 밀려온다. 일 일 관광객들은 썰물처럼 뭍으로 빠져나갔고 아침에 멀리 나갔던 바다는 수런거리며 일몰 후의 잠자리를 향해 귀가를 서두른다.     이제 바다는 천만 가지로 출렁이며 내 안에 파문을 일으킨다. 물결이 되어 바람이 되어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박유니스 / 수필가수필 몽생미셀 노르망디 해안 바다 한가운데 보르도산 적포도주

2024-01-25

[수필] 아인슈타인과 마릴린 먼로

이미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됐지만 아인슈타인과 마릴린 먼로가 생전에  데이트를 하며 친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마릴린 먼로는 아인슈타인에게 청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박사님의 두뇌와 저의 육체가 합쳐지면 우리 사이에 태어나는 자식들은 세계 최고의 두뇌를 가진 세계 최고의 미녀나 미남일 것입니다.”   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어이 먼로양,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구먼.  만약 당신의 두뇌와 내 육체를 닮은 아들이나 딸이 태어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러우면서 가장 못생긴 아들이나 딸이 태어날 것이오”라고 대답해 결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이 내용은 누군가가 유머로 만들어 낸 얘기다. 관점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발상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다. 조선의 시조 이태조가 왕이 된 다음 무학대사를 궁으로 불러들여 국정 자문을 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장기를 두면서 소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느 날 장기를 한참 두는 도중에 이태조는 느닷없이 짓궂은 장난기로 이렇게 물었다.   “대사, 내 눈에는 당신 얼굴 모습이 꼭 미련한 돼지같이 보이는 데 당신 눈에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기분이 상한 무학대사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제 눈에는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이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이태조는 또다시 “다 같은 사람의 눈인데 어찌하여 내 눈에는 당신이 돼지로 보이는 데 당신 눈에는 내가 부처님으로 보이는가.” 하고 반문했다. 그제야 긴장을 풀고 웃음 띤 얼굴로 무학대사는 입을 열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돼지의 눈에는 돼지밖에 안 보이고 부처님의 눈에는 부처님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학대사 본인은 부처님이고 이태조는 돼지에 불과하다는 대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 대답에 이태조는 꿇어앉아 자기의 잘못을 크게 사과했다는 에피소드가 조선야사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한 마디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 두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 빌립보 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쉬임없이 믿고 바라고 입으로 시인하며 살 때 주 안에서 우리들의 꿈이 이루어 질 줄 믿는 것이다.   미국의 갑부인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도 늘 긍정적인 마인드로 매사에 임했을 때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유명한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가 못했다. 그가 55세가 됐을 때 1년 밖에 못 산다는 의사 진단을 받고 휠체어를 타고 가는 데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란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살펴보니 딸의 입원비를 내지 못한 여성이 병원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었다.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입원비를 대납했고 나중에 그녀의 딸이 기적적으로 완쾌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얼마 후 록펠러도 병으로부터 완쾌가 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선한 일에 힘썼고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록펠러가 병원 로비에서 읽었던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성경 말씀으로 사도행전 20:35절에 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말씀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미국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마음이 뿌듯한지 하나님께 또 한 번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좌절하려면 끝없이 좌절할 수 있는 환경에서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로 최선을 다했을 때 성공한 사례들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에 무수한 사례들을 볼 수가 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도 그런 예다. 그는 1923년 9월 16일 출생하여 35세에 혜성처럼 싱가포르 정계에 등장했다. 그는 빈사 상태의 싱가포르를 20여년 만에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부유한 국가로 성장시킨 지도자다. 그도 하면 된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신념을 갖고 업무를 추진했고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능력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 위대한 잠재능력을 잠재우고 있다는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잠재능력을 긍정의 힘으로 일깨워 100%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고 염원해 본다. 김수영 / 수필가수필 아인슈타인 마릴린 마릴린 먼로 하나님 말씀 뿌듯한지 하나님

2024-01-18

[수필] 피아노 건반

지난해 연말 지인과 함께 엔시노의 한 교회에서 열린 연주에 참석했다. 첼리스트 이방은과 피아니스트 폴 피트맨의 연주회였다. 첫 번째 곡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가 “신선하며 열정적인 곡”이라며 좋아했다는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A 플랫 장조, Op.70이 연주되었다. 이 음악은 조용함 속에서도 때로는 활기찬 템포로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을 주었다. 다음 곡 역시 첼로와 피아노을 위한 요한 브람스의 E단조 소나타, Op.38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13년 동안 수많은 수정을 거치며 1878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그의 예술적 성취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연주곡 모두 널리 알려진 첼로와 피아노 협주곡이다. 첼리스트 이방은님이 첼로의 4줄을 우아하게 움직이는 양팔의 모양에 따라 울려 나오는 아름다운 선율과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피트맨님의 힘찬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첼로의 선율을 따라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소리와 피아노 건반에서 튀어 오르는 개성 있는 소리의 하모니 속에 내 마음은 나를 떠나 먼 곳에 머물러있었다. 휴식 시간 음률의 하모니 속에서 깨어나면서 인생의 여정을 피아노 건반에 비유한 글이 생각났다.     “인생은 피아노와 같습니다.     (Life is like a piano.)   흰색 건반은 행복을 나타내고 검은 건반은 슬픔을 나타냅니다.   (The white keys represent happiness and the black shows sadness.)     그러나 인생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두 건반이 음악을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But as you go through life‘s journey, remember that both keys also create music.)”   ― 에산(Ehssan)   피아노에는 52개의 흰색과 36개의 검은색을 합쳐 총 88개의 건반이 있다. 흰색 건반은 온음으로 주로 자연 음계를 형성하며, 검은색 건반은 반음계를 나타낸다. 이 88개의 건반은 피아노 연주자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우리에게 다양한 색채와 감정을 전달한다. 흰색 건반은 순수하고 밝은 소리를 만들어내며 기쁨, 사랑,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반면, 검은색 건반은 어두운 소리를 만들어내며 슬픔, 고독, 긴장감과 같은 감정을 나타낸다.     우리의 삶도 항시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힘들었던 때도 그리고 괴로웠던 때도 있다. 또한 밝고, 혹은 어두웠던 일들을 모두 경험하면서 우리는 성장하며 삶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아노의 흰색 건반과 검은색 건반이 어울려 아름다운 화음의 소리를 내듯, 우리의 삶 역시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의 건반을 치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피아노의 88개의 음계 소리가 각기 다르듯 우리 또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학교 동문, 혹은 직장 동료들이지만 이곳 이민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민족은 물론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이로 인해 대화 또는 소통의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피아노의 여러 건반을 두드리듯이 그 덕에 우리의 이민 생활 역시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이처럼 복합적인 면이 있는 이민 생활 속에서 우리는 삶의 피아노를 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연주가 끝나는 어느 날,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그 사람이 만들어 낸 삶의 연주를 생각하면서 그 사람의 연주장에서 나오겠지.   마지막 연주곡으로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로 유명한 세자르 프랭크(Cesar Franck)가 63세 되던 해 28세이던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Eugene Ysaye)의 결혼 선물로 썼다는 프랭크의 A장조 소나타(Sonata in A Major)가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프랭크의 뛰어난 작곡 능력과 감성적인 표현력을 잘 보여주며, 많은 음악 애호가와 연주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마지막 악장의 강렬한 에너지와 열정적인 연주의 여운에 흠뻑 빠져 연주회장을 나오고 있었다. 이명렬 / 수필가수필 피아노 건반 흰색 건반과 피아노 건반 피아노 연주자

2024-01-11

[수필] 명품의 애환

어떤 여배우가 큼지막한 가방을 둘러매고 비행기에서 내린다. 그 가방이 많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는 것은 가방의 주인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리라. 영락없이 기저귀 가방 같은 볼품없는 것이 명품으로 신분상승을 타게 됐으나, 섣불리 구매할 수 없는 가격임을 알게 된 것은 친지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화였다.   “형수님도 명품가방 갖고 다니세요?” 다짜고짜로 문의하는 그의 음성이 부드럽지 않았다. “그런 거 사본 적 없는데…. 뭔일이예요? 하고 물었다.” "그렇지요? 형수님, 그놈의 가방 때문에 말이죠. 애 엄마가 5000달러가 넘는 가방을 사겠다고 저러니 기가 막히네요."   듣고 있는 나도 기가 막혔고 그때야 명품 가방이라는 게 수천 달러에서 수 만 달러를 호가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하소연 전화까지 했을까 하는 심정,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랴, 남의 부부싸움에 공평처사 밖에 더 좋은 게 있을지.     "요즈음 명품이 대세라고 하니 너무 나무라지 말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 참 형수님도 가방쪼가리 같은 걸 사려고 한 달 생활비를 쓰라고요? 나 그렇게 못합니다. 빠듯하게 사는 주제에 5000달러짜리 가방이라니요. 턱도 없이 허영에 날뛰는 거지요.”   “방도가 있긴 한데요. 공휴일에 파트타임 일을 해서 돈을 모아 사라고 하면 될 텐데….” 격앙되었던 그의 음성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대책이 돼줄 소지를 짐작했는지 그는 잘 주무시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부디 좋게 타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생각지 못한 돈 액수가 농담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말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여성들의 눈에 콩깍지를 씌운 여배우의 가방을 원망해야 할지, 어쨌든 명품 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불화를 일으킨다면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 같다. 싸움을 하고 분노까지 치솟게 만드는 이유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들 사이에 욕망의 불을 지펴놓고 그 아우성을 지켜보며 회심의 미소를 흘리고 있는 그 존재는 무엇일까? 친지의 말마따나 턱도 없이 날뛰는 허영이라는 무질서다.  개인적 욕망의 단가가 높아지다 보니 명품을 탐하는 욕망이 대세처럼 굳혀지는 것이지 원래 명품이라는 물질은 없었던 걸로 인식하는 것이 무질서의 반대말인 질서다. 허영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소박함이 아니던가?   무질서는 고통을 야기한다. 우리 삶의 터전이 점점 더 해체되어 가는 것도 그만큼 무질서가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나의 문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온갖 부정의 기운이 침입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허락 없이는 마음 안에 가정 안에 희생 제물을 만들지 않는 인간 관계가 지켜져야 한다. 5000달러짜리 가방도 그렇고 가족과의 상의 없이한 성형수술로 낯선 모습에 적응하지 못해 갈등하던 가정의 비극도 보았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불운이 선택의 결과가 되어준 셈이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놀이판으로 뛰어들든가 아니든가는 순전히 선택이다.   질서의 열매가 조화일진데 풍요로운 삶을 지속시키려면 무질서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문제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모두가 또한 알고 있다. 자연과 우주 만물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역시 소비주의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환경파괴에 가담하기까지 우리는 무질서의 노예적 근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을 사들이는 것이 자유인의 행동으로 보이지만 소유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자유다.   간디는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당신 자신이 평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면 우리도 말할 수 있겠다.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바로 당신이라고. 최경애 / 수필가수필 명품 애환 명품 때문 5000달러짜리 가방 기저귀 가방

2024-01-11

[수필] 손녀의 대학 입학

나는 자식 셋에  손주가 모두 다섯명이다.  그중에서 가장 위인 첫 손녀가 지난해 9월에 대학에 입학했다. 손녀는 들어가기 힘들다는 캘리포니아의 여러 대학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미국 전역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대학들이다. 그중에 몇 학교는 장학금 혜택까지 있었다. 우리는 손녀에게 선택의 지혜를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손녀는 스스로 여러 가지를 비교 분석해서 지금의 학교를 택했다.     매주 목요일이면 손녀가 오는 날이다. 목요일 저녁은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식사를 한다. 그녀의 일주일간의 학교생활을 들으며 다투어 궁금한 내용들을  물어본다. 손녀가 처음 기숙사에 들어간 날이다. 사위는 먼저 손녀와 같이 짐들을 싣고 학교로 갔다.  딸이 엄마도 같이 가자고 하였다. 나는 궁금했던 차에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동행했다. 학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학교에서 마련한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손녀의 옷가지 침구 등은 바퀴 달린 큰 바구니  두 개에다 나눠 넣어 방 호실을 써서 트럭이 싣고 갔다.     많은 선배 학생들이 나와서 친절하고 정확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셔틀에서 내리니 손녀의 짐은 미리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바구니를 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기숙사 방에 들어갔다. 방은 세 명이 사용하게 되어있었다. 선배 둘과 미리 연락되어 손녀는 2층 침대를 사용하게 되었다. 천장과 맛닿아 있는 침대가 앞으로 1년 동안 자야 할 침대라고 생각하니 나는 겁이 덜컥 났다. 그동안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침대다.     우리는 서로 말을 아끼며 침대 정리를 한 다음 올라가는 연습을 시켰다. 누웠다 일어나서 내려오는 연습도 수없이 시켰다.  우리는 걱정이 되면서도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침대 펜스가 높아 아늑하다, 옷장이나 책상이 아주 고급이다 등등 좋은 점을 들어 손녀를 기분 좋게 하였다.   일주일이 지났다. 손녀가 집에 오자마자 제 침대를 껴안고 누웠다. 마치 엄마의 포근한 가슴에 안기는 어린아이처럼 침대를 쓰다듬었다. 자기 침대가 무척 그리웠다 한다. 그래서인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수업이 끝난 목요일이면 집에 온다. 별일이 없으면 금요일 토요일은 집에서 공부하며 그리운 침대에서 자고 간다. 학교는 교통체증이 없는 시간이면 집과 한 시간 거리다.     손녀를 키우려 미국과 한국을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비행기 타는 일이 너무 힘들어 우리 부부는 영주권까지 받으며 손녀를 돌보았다. 무려 18년이 되었다. 손녀는 유치원 초중고를 다니며 힘들다고 짜증 부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항상 밝게 웃으며 매사를 즐겁게 풀어나가는 긍정 마인드 손녀다.     손녀가 18개월이 되었을 때 체류 기간 만기 한 달 전에 한국에 입국해야 했다. 딸과 사위가 일하는 낮에 어딘가 맡겨야 하는데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밤에 꿈을 꾸는데 어떤 수녀님이 나타나 양손을 벌리며 오라고 하였다. 그곳은 24개월이 된 아이부터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도 안 했다. 그래도 실오라기만 한 희망을 가지고 이튿날 찾아가서 꿈 얘기를 했더니 난처해 하면서도 웃으며 허락해 주셨다. 나중에 들으니 손녀는 적응을 못하고  수녀님 치마만 잡고 종일 지냈다고 한다.   손녀는 유난히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할아버지가 식사 때 잔기침을 조금만 해도 금세 일어나 물을 갖다 드린다. 그리고 “할머니가 만든 음식은 다 맛있다”고 한다. 할아버지 생일에 축하의 말과 앞으로의 각오를 한글 편지로 썼는데 받침 하나 틀린 곳이 없었다. 손녀를 미국에서 키우며 우리도 다시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 되었다. 유치원, 초중고의 많은 행사에 참여해 마냥 신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손녀는 바이올린을 했고 고등학교 때는 댄스팀 활동을 해  발표회가 많았다. 발표회는 항상 환상적이었고 손녀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했다.         이제 대학생이 된 늠름한 우리 큰 손녀, 언니답게 누나답게 동생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자신감을 주었다. 본인의 더 큰 꿈을 향해 가다 보면 2층 침대 같은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극복하리라 믿는다.  오늘도 기숙사 앞에 내려주며 등에 십자 성호를 그어주었다. 손녀는 자기가 바빠서 집에 가지 못하면 우리더러 학교에 와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도 한다.  60평생 삶을 뒤로하고 미국 땅에 온 보람이 손녀의 마음 씀씀이에 모두 스며있는 것 같아 대견하고 흐뭇하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손녀 대학 대학 입학 침대 펜스 학교 주차장

2024-01-04

[수필] 벌거벗은 나무처럼 의연하게

지난밤에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간신히 버티고 있던 집 앞의 단풍나무 잎새들이 다 떨어져 버렸다.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들이 없어지자 나무의 몸통과 가지들이 앙상하게 드러났다. 화려했던 모습을 다 내려놓고 벌거벗은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즘 부쩍 늙어 보이는 것 같아 거울 보기가 싫다. 팽팽했던 얼굴 피부가 탄력을 잃고 주름도 부쩍  많아졌다. 흰머리가 섞인 푸석한 머릿결은 생기가 없다. 게다가 옛날 할머니 같은 헤어스타일로 더욱 노인처럼 보인다. 거울을 보고 나서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됐지?” 한숨을 푹 내쉬며 옆에 있는 남편에게 공연히 짜증을 내면, 남편은 말한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그대로 받아들여. 늙어서는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이 최고야. 고상한 외양에만 신경 써.”     누구나 살아온 만큼 나이를 먹고 늙는다. 까맣게 윤기 흐르던 머릿결은 거칠어지고 희끗희끗해진다. 피부는 늘어지고 눈도 처지기 시작하면서 세월을 실감케 된다. 그때부터 대부분이 머리 염색 등 젊어 보이려 필사적으로 애쓴다.         최근 한국 방문에서 느낀 것은 젊은 여성들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연예인 등 자주 대중 앞에  서는 사람들은 성형수술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연예인 가운데는 예전 TV에서 봤던 젊은 시절의 얼굴을 지금도 유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보톡스를 너무 맞아 내가 보기에는 얼굴이 망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은 젊게 보이려고, 젊은이는 더 예뻐지려고 성형수술을 한다.  요즘은 쌍꺼풀이나 코 수술 정도는 스스럼없이 공개하기도 한다. TV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가수는 쌍꺼풀 수술을 했는데 마음에 안 들어 두 번이나 했다고 밝혀 놀랐을 정도다. 참 용기가 대단하다.     지난여름 프랑스에서 열린 ‘칸 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에선 회색빛 머리를 늘어뜨리고 등장한 여배우 앤디 맥다월(65)이 플래쉬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등에 출연한 90년대 원조 로코 퀸이다. 60대가 되고 나서도 그녀에게는 ‘변함없는 미모’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 그녀가 풍성한 갈색 마리가 아닌 흰머리가 섞인 반백의 모습으로 나타나 주목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에 이제 지쳤어요. 더는 젊어지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어요. 사기극을 계속할 수 없어요. 나는 늙고 싶어요.  나이 들어가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싶어요.” 그녀는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염색을 중단했다고 한다.  “외출이 줄며 원래 내 얼굴과 피부, 눈의 생김새 등을 볼 수 있었죠. 그리고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을 때 더 행복했고, 머리색이 회색빛이 되게 놔두고 나서 행복하게 내 나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또 “늙어가는 일에 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외모의 완성은 헤어스타일이라고 한다. 머리 모양에 따라 10년은 젊어 보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한다. 헤어스타일의 변화로 인상도 바뀐다.       내 머리 모양은 옛날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쪽찌던 시대의 모습과 비슷하다.  비녀 대신 머리핀을 사용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LA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혼자 한국으로 혼자 귀국한 후부터다. 아이들 교육 문제로 한국과 LA 두 집 살림하다 보니 남편 월급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일하려고 해도 나이가 있는 데다 한국 경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지출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미장원 출입을 꺼렸던 게 30년이 훌쩍 넘었다. 내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이 나를 억지로 미장원에 데라고 가려 한 적도 있었다. 이젠 그 머리 모양이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하지만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검은 머리와 흰 머리가 섞여 희끗희끗해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와 인상이라고 생각한다. '멋’ 하면 젊은이의 전유물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머리가 반백인 노인의 기품은 젊은이들과는 다른 멋을 느끼게 된다.     노년의 멋이란 고상한 품격에서 나온다. 붉게 물든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서산의 노을은 황홀하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로 손꼽히는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니어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나간 젊음을 아쉬워만 하지 나이 듦을 인정할 생각을 못 한다. 영국의 작가 겸 교수인 루이스 월포트는 ‘You’re Looking Very Well'이라는 책에서 연령이 많은 사람이 행복지수도 높다고 밝혔다.  김형석 교수도 '100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65세부터 황금기”라고 주장했다.     유대인 정신 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오랜 기간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몸뚱아리의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는 “최고의 존재는 벌거벗은 존재” 라고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적나라하게 내 늙음을 드러낼 용기가 없다.  짙은 눈화장으로 처진 눈을 보정하고 회색 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쓴다.       또 한 해가 기우는 연말이다. 나뭇잎을 다 떨구고 의연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에서 내려놓음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 나의 참모습을 보여줘야겠다.   배광자 / 수필가수필 나무 의연 단풍나무 잎새들 얼굴 피부 남편 월급

2023-12-28

[수필] 주례사

이십여 년 만에 귀국했던 1990년, 홍두깨 같은 결혼주례를 생각지 않게 한 적이 있다. 대학교수는 결혼주례 청탁이 많은 위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례 경험이 없던 나는 엄두도 못 내는 의뢰를 받을 때마다 늘 사양하기 바빴다.     어느 날이다. 제자 K군과 그의 부모가 간곡하게 주례를 부탁했다. 식순에 따라 주례자가 할 일은 신랑·신부 문답, 선물 교환 후 축사 한 마디와 성혼 선포가 전부라고 했다. 계속 거절했지만 “아주 간단합니다”라는 통사정에 마음이 흔들려 엉겁결에 수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두려움과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왔다.     결혼은 한 가정을 이루는 경사인데 주례가 허수아비 같아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하기로 했으니 마음속에 담아 온 생각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견학이 필요했다. 시간을 내 결혼식장 몇 군데를 점잖은 양복 차림으로 구경 다녔다.     주례사의 시작은 틀에 박힌 내용이었다. '천지 만물이 생기를 돋구는 이 화창한 날에 공사다망하신 중 이렇게 왕림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은 사회자나 양가 대표가 할 인사말이었다. 어느 교수라고 하는 주례자는 신랑이 자기 제자이며 수재라는 칭찬만 늘어놓고 있었다. 다른 주례자는 미리 준비한 서너장의 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한바탕 연설문을 읽고 있었다. 목사인 한 주례자는 성경 말씀의 한 구절을 읽고 지루하게 설교하고 있었다. 십계명 같은 결혼 계명을 한 가지씩 일러주지만 그 내용이 신랑·신부의 머릿속에 들어갈 리 없어 보였다. 모든 약속을 이행하기엔 너무 벅찬 어깨 짐이었다. 또 '…당부한다', '…기원한다',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라' 등등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들이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지만 신랑·신부에겐 부담스러웠을 것이라 생각됐다.     마침내 결혼식이 진헹됐다.내가 주례사를 할 차례가 왔다. 결혼식을 축하한다는 인사에 이어 곧장 벼르던 말을 하나씩 내놓았다. 내용은 이랬다. 예로부터 부부 일심동체라 하는데, 나는 부부이심 이체라 외쳤다. 두 사람이 한 사람같이 화목하다는 뜻인 줄은 알겠지만, 실제로 둘이 하나가 되려면 한쪽이 거의 죽어야 아무 마찰과 탈 없이 무난할 것이라고 하였다. 부부는 서로 다른 개성과 역할을 갖고 있으며, 인연으로 만난 두 남녀는 각별한 친구이기도 하다. '각자의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반문하면서 옛 여인들의 한(恨)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를 불쑥 들먹거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동등해야 상의도 하고, 새로운 발상도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백지장도 둘이 맞들면 쉽다는 속담도 있지 않으냐는 등의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뚱딴지같은 말도 덧붙였다. 대부분 '머리카락이 파 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 살아라'라고 하지만 나는 너무 무거운 책임이 되고 평생 가두는 사슬 같으니 차라리 풀라고 했다. 그리고는 서로 자유로이 돕고 위로하고 노력하는 편이 좋겠다고 덧붙였다.     철학자 소크라테스 같은 남편과 살던 선녀 같은 부인은 크산티페(Xanthippe)처럼 악처가 되었으며, 소피아(Sophia) 같은 악명 높은 처를 만나면 남편은 대문호 톨스토이처럼 맷돌을 목에 걸고 가출하여 객사하게 된다.     부부는 처음부터 '죽자 살자' 하는 사랑보다,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의 순서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사랑은 불같아서 꺼지지 않게 계속 불을 지펴야 한다. 천생연분은 설탕에 물을 붓든, 물에 설탕을 타든 서로 녹아 단물이 된다. 하지만, 본연이 다른 물과 기름은 쉽게 혼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을 가하면 뜻밖에 잘 섞이니 꾸준히 달리는 기차 화통같이 따듯한 열기를 잊지 말라고…. 식으면 물과 가름은 서서히 따로 놀게 된다는 자연 이치의 예를 들었다.     드디어 결혼식이 끝나고 식장을 돌아보니 심상치 않은 눈총의 구름이 닥쳐오는 것 같았다. 혹시 실언했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교수님, 참 좋은 말씀 주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다른 반응도 있었다. 흰 두루마기 차림의 한 분은 “주례 선생, 신혼부부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잘 살라고 명심시켜야죠”라며 언짢은 표정으로 핀잔하는 게 아닌가.   물론 이들 부부가 잘 살기를 바라지만 주례자가 잘살라고 다짐한들 그대로 이뤄질까?  나는 보장되지도 않을 껍데기 주례사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 주례사가 어느 기자의 귀에 들어갔는지 '여성'이라는 신문에 긍정적 평가와 함께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이례적인 주례사라는 이유였다. 첫 번째 주례의 민망함 때문인지 두 번 다시 주례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 요즘은 직업적인 주례자도 있다고 한다. 또 양가 부모들이 직접 덕담과 부탁의 말로 주례를 대신하는 것이 유행이란다. 과거 별나게 했던 주례사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를 때면 그 부부의 가정에 늘 행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복성 / 수필가수필 주례사 껍데기 주례사 결혼주례 청탁 주례가 허수아비

2023-12-21

[수필] 산행, 그 첫걸음

“어려운 부탁인데, 저도 산행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오랜 망설임 끝에 최근 알게 된 지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야외 활동보다는 실내에서 지내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건강 관리를 위해 인생 후반에 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큰 용기를 내본 것이다.       나름 간절한 마음에 부탁은 했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웃도어 활동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선 오히려 불가하다는 답이 오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오래 걸리지 않아 지인이 속해 있는 하이킹 클럽 정기 산행에 참석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덜 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승낙을 받고 보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땀 흘리며 산 오르는 모습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실제 산행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여러 회원과 동반 산행이라니. 좋기도 했지만 약간 어리둥절했다. 과연 이 산행이 계기가 되어 평범한 내 일상에 어떤 변화가 찾아와 줄까?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궁금해졌다.     산행 일은 다가오는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마을 뒷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히말라야 트레킹도 가능한 장비를 갖추고 산에 오르더라”는 오래전 한국의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첫 산행이지만 초보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우선 유튜브와 각종 매체를 검색하면서 도움이 될만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이것저것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확인하려다 보니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꾸물거릴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가까운 아웃도어 스포츠용품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등산화와 배낭 등 몇몇 장비를 챙기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산행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갈 즈음, 산에 오르다 맞닥뜨릴 수 있는 갖가지 해프닝과 위기 상황에 관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인적이 드문 산에 갔다가 곰과 마주쳤는데 당황하지 않고 여러 명이 함께 소리를 질러 곰을 쫓았다는 이야기나, 꼬리에서 방울 소리를 내는 파충류와 한참 동안 눈싸움을 벌였다는 등의 무용담들은 모두 지어낸 것이니 절대 따라 하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 등이었다. 게다가 내가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산행 도중 겪을 수 있는 어려움과 부상위험에 대해 마치 자기가 수없이 겪어본 것처럼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잔뜩 겁을 주기도 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나무 사이로 걷는 기분은 어떨까? 미국 산에는 서너 명이 손을 맞잡아도 모자랄 정도로 굵직한 나무가 많다고 들었는데 정말일까? 특히 이곳 LA는 낮의 햇빛이 몹시 강해서 그늘 없는 산길을 걷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런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그늘로 뒤덮인 오솔길로 접어드는 반전도 있을 거야. 그 길에서 몸과 마음을 식혀주는 차가운 바람과 마주친다면, ‘아! 시원해’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겠지.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후 별다른 만남이나 자극 없이 지낸 나는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지냈기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 지난날 찍은 사진 배경이 늘 비슷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집 안 아니면 집 앞마당이 내 사진 배경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런데 산행을 하다 보면 이전에 없던 색다른 배경이 내 사진에 등장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서 있는 나, 운치 있는 산길을 걸어가는 내 뒷모습, 동반인들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는 장면 등등.   물론 모든 산행이 아름답고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길을 걷다가 숨이 가빠지면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고, 의도치 않게 동행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상처받는 경우도 있겠지. 인생길이든 산길이든, 결국 혼자 걷는 것이라는 생각에 허무감이 밀려드는 때도 있을 거야.   아무튼 그날이 밝았다. 소풍 가는 아이처럼 잠을 설치는 바람에 몸이 개운치 않았다. 어제저녁 미리 챙겨 둔 배낭을 메고 다소 이른 시간 집을 나섰다. 해뜨기 전 아침이라 공기는 신선했다.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있는 내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지난 며칠간 푹 빠져 있던 나만의 환상과 낭만을 좇아 그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산을 오르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산책할 때 생각할 주제를 하나씩 품고 길을 나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게도 그런 주제 하나쯤은 있을 텐데 갑자기 만들려다 보니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산행 출발 장소로 데려다줄 버스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두 해 전쯤 한국에 갔다가 우연히 들렀던 한 북카페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열된 책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던 나는 낮은 천장에 매달린 특이한 나무 액자에 눈길이 갔다. 그 순간 무엇인가에 홀린 듯 걸음이 멈췄다. 목판에는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시를 속으로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짧은 시 한 구절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내가 걸어온 삶이 스스로에게 행복해 보였던 적이 있었나?’ 내 삶의 여정 전부를 한순간에 돌아보게 한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 나무판에 새겨진 구절을 나의 첫 산행 주제로 삼아 볼까?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구절을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내가 걸어온 길이 행복해 보일 때까지,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제이크 나수필 첫걸음 산행 산행 출발 산행 도중 아웃도어 스포츠용품점

2023-12-14

[수필] 구멍 난 스웨터

노동절에 이어서 한해를 마감하는 두 번째 명절인 추수감사절도 지났다. 오늘따라 엷은 가을 햇빛은 게으름을 피우면서 앞뜰에 머물고 있다. 지금 것도 나무 몸체에 매달려 있는 주황색 감나무 잎들은 햇빛을 받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더 외롭고 찬란해 보인다. 입동이 지난 지 이미 며칠인데, 아열대 기후인 LA는 겨울답지 않게 따뜻하다. 그래도 흐르는 계절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감 나뭇잎을 보면서, 내가 칠십 대라는 것에 생각이 머물렀다. 이심전심인지 뉴욕에 있는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월화야, 네 수필 잘 읽고 있어. ‘고물상’도 공감이 가는 얘기야. 우리 나이에 쌓아 둔 것은 많고, 무엇을 정리할지 머리는 굳어져 있고….네 다른 수필 ‘대중이는 어디에 있을까’를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어. 그런데…우리는 요즘 ‘비목’이라는 노래를 자주 듣고 있어. 아미 스테이지(Army Stage)라는 한국의 국군 악단이 현충원에서 부르는 것을 유튜브에 올린 것이야. 군인들이 부르는 노래라 더 가슴에 울리네. 이 음악을 들으며 6·25 때 전사한 너의 큰오빠 생각을 많이 한단다. 묘지는 있지만, 유골이 없는 무덤, 그리고 묘지도 유골도 없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죽음을 맞은 많은 사람들…. 나도 늙었나 봐. 그리고 열심히 한글 홍보하는 너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Monica, 파이팅!”   나를 응원하는 짧은 문자에는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담겨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 안타까움, 억울함이 내재하여 있다. 한국 전쟁 때 3살이었을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3000마일 멀리에서, 나는 발신인(發信人)을 위로하고, 또한 응원한다. 그 발신인은 흔들리고 있던 수신인(受信人)에게 구멍 난 스웨터를 풀어서 다시 털옷을 짜고 완성하자고 한다. 내 큰오빠나, 친구의 아버님이 남기고 떠난 구멍들을 우리는 칠십 여 년 동안 열심히 메꾸어 오고 있었다.     친구가 알려 준 데로 아미 스테이지를 유튜브에서 찾아 ‘비목’이라는 노래를 들어 보았다. 이 가곡은 한명희 시인의 시에 장일남 작곡가가 곡을 붙인 것으로 1969년에 발표된 것이라고 한다. 트럼펫을 불고, 노래를 부르는 그들은 젊다 못해 무척 앳되어 보였다. 아마 내 큰오빠가 세상을 마감할 때도 그랬을 것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 가/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나는 울었다.     ‘비목(碑木)’이란 ‘비석(碑石)’의 뒷글자, 돌이라는 뜻의 ‘석(石)’을 나무라는 뜻의 ‘목(木)’자로 바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지가 죽으면, 죽은 자를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들고 자리를 표시한다. 이름과 그에 관한 간단한 사항을 돌에 새겨서 무덤 앞에 세워 놓거나, 눞혀 놓는다. 그것이 비석이다. 돌 대신 나무로 망자가 묻힌 곳을 표시한 것이 비목이다.     돌이 아닌 나무를 써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 장례 치를 시간이 없는 급박한 상황인 경우이거나 빈곤한 죽음일 것 같다. 이 가곡을 들으면 전쟁터에서, 죽은 전우를 급히 묻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상상된다. 전우를 묻은 구덩이에 서둘러 돌을 쌓고, 비목을 세우고 후퇴했을 것이다. 언젠가 돌아와 제대로 장례를 치러 줄 것을 약속하고 믿으면서, 그 자리를 떠났을 거다. 그렇게 큰 오빠의 전사 장소에 비목이 세워졌을 것이다. 비목을 세웠던 그의 전우들은 살아남았을까.     내 나이 칠십 대. 나는 큰 오빠가 이 세상에서 머물었던 기간의 세배 정도를 살고 있다. ‘칠십 대’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품고 나와 함께 있다. 흐르듯 지나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라는 추억 가운데 엉키고 설킨, 때로는 웃었고, 때로는 아파하며 울었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몇 년 전 보았던 드라마가 생각났다. 웹툰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었다. 시작 부분에 ‘나이 칠십이 되니 친구의 장례식에선 이젠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별이 점점 익숙해져 간다’라는 대사가 있었다. 확인차 넷플릭스에 들어가 찾아서 다시 보았다. 은퇴한 우편집배원이 친구들의 별세에 슬퍼하지 않게 된 ‘나이 칠십’에 발레를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겪어 가는 이야기였다. 아들들과 딸, 아내, 발레 스튜디오 교수가 어림없는 일이라고 반대할 뿐만 아니라, 내어놓고 비웃기도 했다. 노인은 장래에 발레리노로서 비상하리라 믿고 있던 23세 예비생에게 수모를 잘 견디면서 발레를 배운다. 그 천재 예비생을 따라 결국 무대 위에서 비상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친구의 응원은 어깨에 메고 살아온 짐 보따리를 내려놓게 한다. 실오라기가 풀어진 부분과 방심하다 잘못 가위질을 해서 생긴 스웨터의 구멍들을 짜깁기해서 메꾸어 보려 한다. 짜깁기가 안 되면, 스웨터를 풀어서 새 스웨터를 짜면 되겠다.   류 모니카 / 수필가수필 스웨터 구멍 큰오빠 생각 나이 칠십 고향 초동친구

2023-12-07

[수필] 중독의 늪

사람도 세상도 참 많이도 변했다.  스마트폰, 16년의 짧은 역사에 비하면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추앙을 받아 마땅할 만큼 미래의 나침반으로도 손색이 없다. 사후세계에 가 있는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발명품이 효율성 최고의 자리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우주를 지배해 보고 싶은 꿈을 이뤘노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손바닥만 하게 축소한 컴퓨터는 성공했고 진화의 극치로 AI(인공지능)를 완성하는 단계에 있다.   텍사스 어느 지역 마사지샾 앞에서 동네 주민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뉴스로 본 적이 있다.  30분에 60달러라나, 뭐 그런 곳이었는데, AI 걸들의 성매매를 보다 못한 주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인류 역사의 가장 오래된 직업으로서의 이름값을 결국 AI에게까지 씌운 인간의 욕정은 수렁 속의 끝판을 예고하는 것 같다.   AI가 완성되기까지는 인간이 일등공신이다. 네트워크를 깔아 놓고 인간의 육성을 수집하여 만든 데이터 없이는 AI가 인간의 행세를 흉내 내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스마트폰 안으로 걸어 들어간 덕분에 AI는 시간이 갈수록 천재성의 빛을 발하고 있다. 이렇듯 기계문명은 진화의 길을 가고 있는데 인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대에 맞지 않는 물음일지도 모르겠다. 시대착오적인 전화기를 쓴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으냐고, 대세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을 화나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변방으로 쫓겨나듯, 외톨이 신세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석기시대 전화기 때문에 겪은 수모지만, 강산이 두 번 변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작정한 고집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이유도 그렇다.   애플의 팀 쿡이 신년 카드에 잊지 않고 쓰는 스마트폰 구매 권유에 워런 버핏 노인장 왈 “아직은 99% 포화상태가 아니야, 마지막 1%가 내 몫이 되겠구먼, 그때 가서 보세!” 미국인 모두가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대로 살아도 무방하다는 무심의 선견지명은 그 울림이 컸다.   불면 없이 네다섯 시간을 내리 잠자기 위해, 수면 시간까지 바꾸는 것은 가장 자신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떨어져서는 안 될 1순위이기 때문에 20마일 출근길도 마다치 않고 다시 돌아가 하루에 80마일도 불사하는 집착은 더더욱 용납하기가 힘들 것 같다.   전화기와 떨어지면 왜 불안감으로 쩔쩔매야 하는 건지?  신비스러운 세계가 거기에 있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중독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날카로운 이빨이 안으로 굽어져 있는 뱀에게 물린 먹잇감은 빠져나올 수도 그렇다고 뱉어내지도 못한다. 그래서 중독이 심할 때 먹혔다는 과장된 표현을 쓴다.   이런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안구 수난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눈 건강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석기시대 전화기를 권해 보지만, “지금도 그런 전화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어요?”라며 난색을 보인다. 답이 보이지 않는 시대다.   어찌 됐든 중독은 속박이다. 마력에 가까운 힘에서 벗어나려면, 중독성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전화기 때문에 장애를 받고 있는가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고 불안감 때문에 또는 20마일을 네 번씩이나 오고 갈 촌극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면 정상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악화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진작부터 감지한 사실이 이제서야 발표됐으니, 늦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부모 세대의 생활 양식을 보고 배워온 이들의 정신건강이 중독의 악순환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억압은 외부에서 눌리는 힘이라 쉽게 감지가 되지만, 속박은 오랜 시간 자아에 들러붙어 마치 자신의 한 부분처럼 취향이나 성격상으로 믿어버린다.  자기 자신을 확신할 수 없을 만큼 혼돈스러운 상황을 경험하거나 자유의 결핍이 느껴진다면 자신을 돌아볼 좋은 기회라고 본다.   우울과 나태함은 이 시대의 고질병이다. 많은 사람이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모호한 회색지대를 살아간다. 행여나 구원의 밧줄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어 SNS가 불러주기를 기다린다. 인간의 심령에 해악을 끼친 그것은 스승도 친구도 미래의 나침반도 아니다. 그것은 구도의 길이 될 수가 없다. 진정한 구도자는 자신이어야 한다.   억압과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의 길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자들의 몫이다. 최경애 / 소설가수필 중독 석기시대 전화기 전화기 때문 정신건강 악화

2023-11-30

[수필] 2023년 한국 풍경

8개월여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며 한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돌아봤다.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꽤 많았지만 그중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 몇 가지를 적어봤다.   우선 유례없는 폭염, 폭우에 이어 태풍까지 찾아와서 놀랐다. 내가 겪은 최악의 여름이었다. 쏟아지는 집중호우로 홍수가 나서 소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재산과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이 무너져 망연자실한 사람들이 TV에 비칠 때마다 가슴이 아파 보기 힘들었다.     너무 더워 미칠 지경인데 어느 TV프로에 환경위기 전문가가 나와서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고 지구 열탕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하며 “우리 인생에서 올해가 가장 시원할 것” 이라고 했다.  맙소사!  더 이상 기후위기에 눈 감아서는 안 되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늦은 밤에 여자 혼자 밤거리를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안전한 나라로 외국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의 번화가에서 대낮에 흉기 난동과 ‘묻지마’ 살인사건이 발생해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상황이 됐다. 거리에는 무장한 경찰특공대에, 장갑차까지 등장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러더 같은 CCTV가 곳곳에 있건만 흉악범죄는 날로 더해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서울 지하철 안에서 “난동범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급히 내리려던 승객들이 뒤엉키며 7명이 다쳐 병원에 옮겨졌다. 이 소동은 BTS 콘서트를 관람하고 귀가하던 팬들이 SNS 라이브 방송을 보다가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른 게 발단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3 세계 잼버리 대회’가 우여곡절 끝에 K팝 공연으로 잘 마무리됐다. 새만금의 열악한 환경과 관리 부실로 나라가 망신을 당하고, 부산 EXPO 유치에도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온 국민이 걱정했다. 국가 이미지 실추라는 위기 앞에 IMF때  금반지 정신으로 정부와 민간이 일치단결해 잼버리는 훈훈한 미담으로 끝났다. 한국은 위기에 강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스물셋 초임 여교사가 근무하던 교실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일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의 교사 수만 명이 ‘교권을 보장하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학부모들의 갑질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학부모는 ‘우리 아이는 왕의 DNA를 가졌으니 왕자처럼 대해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학생이 교사를 때려도 교사는 맞고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다. 학생의 인권만 있고 교권은 땅에 떨어졌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던 우리 세대에겐 지금의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소설가 김훈 씨는 교사들의 집회현장을 다녀와서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칼럼을 썼다. 칼럼에선 ‘내 새끼 지상주의’를 완성한 인물로 조국 전 장관과 그 부인을 언급했다. 이에 조 전 장관의 지지자들은 김 씨에게 “책을 다 버리겠다” “노망났다" 등 맹공을 퍼부었다.   펜싱 국가대표 출신 남현희의 재혼 상대였던 전창조가 벌인 사기 행각도 화제였다. 전 씨는 일론 머스크와 대결하기 위해 펜싱을 배우겠다고 남 씨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뉴욕 출신 재벌 3세, 파라다이스 그룹 회장의 혼외자 행세를 했다. 그는 경호원까지 데리고 다니며 능란한 언변으로 어떤 땐 여자로 어떤 땐 남자로 성별까지도 속이며 황당한 사기극을 벌였다.  희대의 사기꾼인 그에 대한 의혹과 논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매일 매스컴을 도배했다. 특히 전씨가 한국말에 서툰 척 영어를 섞어 쓴 "I am 신뢰에요~"는 ‘I am 행복’, ‘I am 공정’ 등 여러 패러디 물을 양산하기도 했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미국에 처음 와서 낯설었던 것 중의 하나는 일상화되어 있는 팁 문화였다. 최근 한국에서도 카페나 식당에서 팁을 요구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누군가 잘못된 미국의 팁 문화에 관해 쓴 글을 읽었다. 키오스크 하단의 팁 옵션을 건너뛰었더니 옆에 서 있던 종업원이 노골적으로 눈치를 줬다고 했다.  미국에서 골칫거리가 된 팁 문화가 한국에서도 공식화될까 봐 우려된다.     한국에선 요즘 ‘맨발 걷기’가 대유행이다. 너도나도 맨발족에 동참했고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만큼 열풍이 불고 있다. 뭐가 좋다고 하면 순식간에 퍼진다.  행여 발바닥에 유리라도 박힐까 걱정이 된다. 유독 덥고 힘들었던 한국의 풍경을 나름대로 스케치해봤다.   배광자 / 수필가수필 한국 풍경 8개월여의 한국 환경위기 전문가 초임 여교사

20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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