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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특유의 수필 문학 작품” 이광일 수필집 ‘꿈의 여정’

이광일 수필가가 첫 수필집 ‘꿈의 여정’(도서출판 파란하늘·사진)을 출간했다.     ‘꿈의 여정’은 작가가 그동안 써온 160여편 중 70여편을 추려 7부로 구성했다.     이광일 수필가는 서문에서 “내 인생의 수수께끼는 진정한 나의 고향을 찾는 여정”이라며 “내 삶이 구불구불한 곡선이었지만 한 방향의 푯대를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작가는 만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를 따라 중국 만주 등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제주도,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국가관, 민족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가치관이 형성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그가 창작한 수필은 서구적인 에세이는 물론 한국 특유의 수필 문학을 보여준다. 객관적인 서술 묘사는 물론 내면적, 주관적 묘사가 있어 시, 소설의 특색을 고루 갖춘 수필로 평가받고 있다.     연규호 전 미주소설가협회 회장은 “서술적 에세이나 수필집이 아닌, 마음에 와 닿는 주옥같은 수필의 정수가 되는 글”이라며 “소재, 주제 또한 지식적인 가치도 높다”고 설명했다.     경희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작가는 한국에서 전자공학 회사에서 근무하다 브라질을 거쳐 LA로 이주했다. 과학도, 기독교 가치관으로 살아온 신앙인, 사업가로 활동하면서 형성된 다양한 사회적 가치관은 수필의 소재가 됐다.     이 작가는 미주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수필로 등단 후 콩트, 유머, 단편소설을 써왔다. 현재 미주문인협회 회원, 미주문학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팔순이 넘은 작가는 콩트, 단편 소설집 출간을 계획 중이다.이광일 수필집 이광일 수필집 이광일 수필가 수필 문학

2024-12-15

[문예마당] 언제 운전대를 놓을까

“이제부터 당신이 내 운전사에요.”     아내가 풀러턴 차량국에서 가주 운전 면허증을 반납하고 그 대신 신분증을 받은 다음 나에게 던진 말이다. 내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기우뚱 기우뚱 겨우 걷는데 운전까지 하라니. 하기는 평생 내가 운전했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면 불안했다.   구순이 지난 나는 팔다리 살이 많이 빠지고 시력도 전과 같지 않다. 눈이 텁텁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 피로하면 바른쪽 눈이 반으로 감긴다. 백세까지 운전하겠다고 떵떵거리지만 희망뿐이다. 시력이 악화하면 내일이라도 운전대를 놓아야 한다.   지난 11월22일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온 지 정확히 50년 즉 반세기가 되었다. 엘세군도 근방의 연방정부 청사에서 일하며, 105번 고속도로를 오가다 보니 어느새 은퇴할 때가 되었다.     ‘아직 못 가의 봄풀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앞 계단의 오동나무 잎은 가을을 알려 준다(미각지당춘초몽 계전동엽이추성·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秋己聲)’는 주자(朱子)의 글대로 세월이 흘렀다.   나는 60세에 은퇴하고 30년을 살았다. 일생을 20년 성장기, 40년 작업기, 30년 노후기로 나누어본다. 그리고 앞으로 10년은 하늘이 주시는 보너스기다.   이민 반세기 동안 몇 건의 ‘펜더 벤더(fender, bender)’, 즉 가벼운 사고 이외에 큰 사고 없이 운전했다. 그러나 사고가 날 뻔한 근사(近似) 사고는 무수히 많다. 그런 사고의 날짜, 장소, 원인, 후속 조치, 등을 노트에 기록해서 사고 방지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운전은 위험한 작업이다. 미국안전협회(National Safety Council) 발표에 의하면 전국에서 매일 평균 100명이 차 사고로 사망한다고 한다. 사실은 자동차 운전이 비행기 운전보다 더 위험하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큰 사고를 낼 수 있다.   나는 15, 16세 때 황해도 장산곶의 산골짜기에서 두 바퀴가 달린 달구지를 끌고 산으로 나무하러 다녔다. 나무를 가득히 싣고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소고삐를 놓치면 바퀴에 깔려 죽거나 다칠 수 있다. 달구지를 가지고 산으로 나무하러 갈 때는, 죽은 사람의 입에 넣어주는 ‘사지(死地) 밥’을 싸 가지고 간다는 말이 있다.   17세 때 월남해 인천 미군 유류 저장소에 안전관리 요원으로 취업했다. 하는 일은 직업 안전과 차량 사고 방지였다. 달구지와 차 조심은 같은 맥락이다. 수송부에 수 십대의 트럭과 지프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민간인과 카투사 운전사의 안전 교육을 담당했다. 보수 교육(Remedial training)으로 매주 ‘5분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한번은 미군 차량과 한국인 보행자의 충돌사고로 한미 간 마찰이 있었다. 큰 골칫덩어리였다. 사고를 방지하려면 방어 운전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대방의 불안전한 행동을 예상하고 대응하는 자세로 운전한다. 예를 들어 길가에서 놀던 어린이가 공을 잡으려고 차량 앞으로 뛰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운전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하라(Expect the unexpected)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도 그 당시 가르치던 방어 운전의 원리와 기타 안전 요령(safety tips)을 염두에 두고 운전했다. 몇 가지 예를 든다. 도로 상태에 비하여 과속하지 않는다(Never drive too fast for road conditions). 앞 차의 뒤만 주시하지 말고 넓게 본다(See the big picture). 상대방이 당신이 볼 수 있도록 운전하라(Let them see you). 갑자기 나타나지 말라는 뜻이다.   아무리 방어 운전을 해도 75세 이상 특히 90세가 지나면 시력, 청력, 체력, 순발력의 저하로 사고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 자신의 운전 능력을 가늠하고 운전대를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 보험회사, 차량국, 또는 자식(!)들이 자동차 열쇠를 빼앗을 수 있다.   다음처럼 불안전한 행동을 하면 운전대를 놓으라는 신호다. 머뭇거리면서 회전한다. 차선을 바꾸기가 힘들다. 과속하거나 저속으로 운전한다. 주차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회전이나 후진할 때 커브를 긁는다. 위험을 인식하지 못한다. 차체에 온갖 상처를 낸다. 가스와 브레이크 페달을 혼동한다. 길을 자주 잃는다.   지난주 병원 주차장에서 후진하다가 커브를 긁어 펜더에 흠집을 냈다. 운전대를 놓으라는 신호인가. 좀 두고 보자. 달구지와 사지 밥, 방어 운전, 안전 요령을 총동원해 운전하고 있다. 깜빡 깜빡 신호가 오면 아내처럼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할 것이다. 윤재현 / 수필가문예마당 운전대 수필 카투사 운전사 방어 운전 자동차 운전

2024-12-12

[문예마당] 별난 세상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 어렸을 적만 해도 의업은 인기 없는 직업군이었다. 기껏 남의 종기를 째고 고름을 닦아주는 천직(?) 이어서일까?  양반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기에 의업은 원래 중인이나 궁녀들이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한데 요즘 세상은 너도나도 의사가 못돼 난리 치는 천지개벽의 ‘별난’ 세상이다.   하기야 그 당시엔 의사뿐만 아니라 배우나 가수조차도 ‘딴따라’ 꾼이나 광대로 취급받던 호랑이 담배 먹던(?) 세대였다. 신분제가 유별난 그 당시엔 괜찮은 집안에선 으레 국가의 녹을 먹어야 가문의 명예를 높이는 일로 여겨, 너도나도 벼슬길로 나가야만 사람대접받던 그런 세상이었다.   1960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에 입학한 내가 고향을 찾아가 큰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을 때 듣게 된 첫마디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깝구나. 가문을 빛내야 할 녀석이 기껏 남의 종기나 짜주는 하찮은 중인의 일을 배우려 하다니…, 어~험,  어허엄!’   혀를 차시던 노기 띤 백부의 실망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실은, 양반 집안에서 ‘입신양명’만이 삶의 목표임을 서너살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 왔기에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처음부터 법대 지망 ‘인문계’ 반에서 공부했다. 더욱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의 재당질로, 그분이 낳고 자란 바로 그 집에서 나도 낳고 자랐기에 법조인이 되고 싶은 꿈이 어렸을 적부터 남다르게 컸다.   공부를 잘했던 탓에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나는 광주일고 전교 문예반장에 천거됐다. 당시 고3은 대학입시 준비로 2학년이 대신 맡았었다. 당시 내 전임 문예반장은 후에 서울대 독문학과에 들어가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하여 문학의 길을 걸었던 이청준 작가였다.   덕분에,  나는 고2 일 년 간을 방학 동안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학교 공부 대신 수백권의 문학 서적을 읽느라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책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읽었던 책 한권이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 책이 바로 춘원 이광수가 쓴 ‘사랑’이다. 그 책에 나온 주인공 의사 안빈 박사의 숭고한 삶이 너무 좋아 나도 의사가 되고 싶어 고3에 올라가면서 갑자기 법대 지망 인문계 반에서   의대 지망 이공계로 인생 항로를 바꾸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소설 속 주인공인 안빈 박사의 실제 모델이 평양의대와 서울의대 교수를 역임한 장기려 박사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는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오갈 데 없는 수많은 환자에게 인술을 펼친 분이었다. 너무나 너무나 감회가 깊었다. 자기가 수술해 살려낸 가난한 환자가 며칠 후, 이제는 퇴원해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기쁨보다는 내야 할 치료비 때문에 더욱 고뇌하는 모습을 본 의사는 “내가 오늘 밤 병원 창문 한 곳을 열어 놓을 것이니 아무 생각 말고 조용히 빠져나가 집에 가세요”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숭고한 삶은 춘원 이광수를 감동하게 해 ‘사랑’이라는 문학 작품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또 수많은 독자를 감동케 했고 그중 하나인  나의 인생 항로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고, 문학이 지닌 ‘힘’이다.     한데, 이제 ‘별난’ 세상이 돼 버렸다. 그토록 천시받던 의사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생 가운데 성적 1등에서 3000등까지 모두 의대로 몰리고, 혹시 자녀가 의대에 합격이라도 하면 가문을 빛낼 과거급제인양 떠벌리는 묘한 세상이 돼 버렸다. 그뿐인가! 집안 망신이라고 쉬쉬하던 가수나 배우 등 소위 딴따라가 집안의 자랑거리로 대접받는 세상이니, 이건 분명 도깨비 요술방망이 장난 같은 별난 세상이다.     천시받던 의술이 존경을 받고, 딴따라가 예술인으로 인정받는 별난 세상이 되어 기쁜 마음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도 왜 그런지 마음 한구석이 싸늘한 느낌이다.  혹시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집단 진료거부를 내세워 정부와 대립하는 듯 보이는 의료인들에게서 장기려 박사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들의 짝사랑 때문일까? 김재동 / 의사·수필가문예마당 수필 주인공 의사 서울대 독문학과 고등학교 2학년

2024-12-05

[문예마당] 인간의 잔인함·뻔뻔함은 어디까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늦더위에, 가을장마까지 겹쳐 푹푹 찌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화창한 날씨로 변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러 눈이 시릴 정도다. 무겁고 우울했던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쾌청한 하늘을 보던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은 엉망진창이다.   세상이 날로 더 악해지고 있다. 한국이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살기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각종 재해와 사건,사고가 이어지면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정치도 사악하게 흘러간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한국 사회가 총체적 난국처럼 느껴졌다. ‘마약 청정국’도 옛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마약 관련 뉴스가 쏟아진다.  ‘묻지마 살인’ 등 끔찍한 뉴스가 끊이지 않더니 급기야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밝혀졌다. 이 사건은 여고 시절 공포에 떨며 읽었던 애드거 앨란포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를 소환하게 했다.     ‘검은 고양이’는 단순한 공포 소설을 넘어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던 고양이를 학대하고 죽인 후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다 아내까지 살해하고 발각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가정 폭력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그 경험들이 ‘검은 고양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약하자면, 온화한 성격에 동물을 아주 좋아하던 평범한 남자가 술에 중독되면서 점점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인물로 변한다. 술에 취해 자신이 기르던 검은 고양이 ‘플루토’의 한쪽 눈을 도려내고 나중에는 풀로토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한다. 그 후, 그는 술집에서 플루토와 닮은 고양이를 발견하고, 그 고양이를 데려와 또 기르기 시작한다. 이 고양이 역시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자극한다. 결국 이 남자는 두 번째 고양이도 도끼로 죽이려다 실수로 아내까지 죽이게 된다.     아내의 시신을 지하실 외벽과 내벽 사이에 감추고 벽을 새로 발라서 범행을 숨긴다. 아내가 죽자 기르던 고양이도 자취를 감춘다. 아내가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경찰이 집을 방문한다. 경관들이 집을 훑어보고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그는 자신이 완전범죄를 저질렀다는 교만한 마음에 벽을 두드린다. 그 순간 벽 뒤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수상히 여긴 경관들이 벽을 허물게 되고 그 안에서 아내의 처참한 시신이 발견되고, 아내의 시신과 함께 산 채로 묻힌 두 번째 검은 고양이도 발견된다. 결국 그는 체포되고 만다.     공포와 긴장 속에서 읽었던 소름 끼치는 ‘검은 고양이’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지난 9월 하순 경남 거제의 한 주거지에서 16년 만에 발견된 시신 때문이다. 한 남성이 말다툼 중 동거하던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여행용 가방에 시신을 넣어 유기한 사건이다. 그는 동거녀와  살던 옥탑방 바로 옆 베란다에 가로 39cm, 세로 70cm, 높이 29cm 크기로 벽돌을 쌓은 다음 시신이 담긴 가방을 넣고 10㎝ 두께의 시멘트를 부어 범죄를 은닉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무려 8년이나 더 살았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그의 범행은 16년간 아무도 몰랐다. 10㎝ 두께의 시멘트로 은닉한 탓에 별다른 냄새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성, 그리고 존엄을 훼손하는 장면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의 범행은 옥상 누수공사를 하던 중 드러났다. 작업자가 콘크리트 구조물을 파쇄하다 시신이 담긴 여행용 가방을 발견하면서다. 시신은 백골 상태가 아닌 미라처럼 된 상태였다. 다행히 지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완전범죄는 없다’, ‘반드시 잡힌다’는 말이 있다. 특히 과학의 발달로 범인 체포에 지문 감식과 DNA 분석이 큰 역할을 한다. 과학수사팀 사무실에는 ‘모든 시신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문구가 곳곳에 걸려 있다고 한다. 과학 수사 요원들은 ‘스치기만 해도 흔적이 남는다’고 말한다.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는 말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또는 해서는 안 될 고약한 짓을 했을 때 하는 말이다. 천인공노(天人共怒)라는 말도 있다.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일이나 인간을 두고 쓰이는 낱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있는데 앞의 사례도 그런 경우다. 사람을, 그것도 한때는 사랑해서 함께 살았던 동거녀를 잔인하게 살해해서 암매장한 집에서 태연하게 8년씩이나 일상생활을 했다는 게 소름 끼친다. 인간의 잔인함과 뻔뻔함은 어디까지인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순자의 ‘성악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관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가 아니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다”라는 의미이다.     순자는 예의 같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인 노력으로 도덕적으로 교정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선하게 되기 위해서는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규범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말한 암매장 사건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생명과 법을 경시하는 풍조와 개인의 분노가 사회 전반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더욱 강력한 법 집행과 사회적 경각심이 필요하다. 위의 사건을 통해 사회 안전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애국가의 한 소절이다.  한국의 가을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쾌청한데 세상은 왜 이리 혼탁하기만 할까?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잔인함 수필 한국 사회 가을 하늘 다음 시신

2024-11-07

“사랑과 그리움의 서정시”…해외문학상 대상 김일형 선정

구순이 훌쩍 넘은 시인의 짧고 간결한 시에는 ‘사랑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제26회 해외문학상 대상에 선정된 김일형 시인의 시 ‘참 기쁨’, ‘아름다운 석양’, ‘맑은 샘물’ 등 3편 수상작에 대한 평이다.     심사위원단은 “김 시인의 작품은 사랑과 그리움의 서정시"라며 "언어의 안정감과 표현 능력이 예리하면서도 쉬운 묘사로 삶에 대한 따뜻한 이미지를 담아냈다"고 평했다.     1931년 평북 철산에서 출생한 김일형 시인은 올해 93세다. 한국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하고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베트남 미 해군기지에서도 일했다.     1972년 미국으로 이주해 플러튼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하며 반평생 시를 써왔다.     테크니션으로 일하다 은퇴 후 문학 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인생을 깊이 알고 싶어서였다.     70세가 넘은 나이에 수필을 쓰기 시작해 '크리스찬 문학' 수필 부문 당선, '해외문학'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제26회 해외문학상 수필 부문에서는 최수잔 작가의 '사랑의 빛깔'이 영예를 안았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신영해 씨 '민들레'와 '꽃반지' 등이 당선됐다.     해외문인협회(회장 박윤수)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30분 오렌지카운티 회관에서 제26회 해외문학상 시상식과 '해외문학' 제28호 출판기념회를 개최한다.     ▶문의:(562)881-1730 이은영 기자해외문학상 그리움 해외문학상 수필 해외문학상 시상식 해외문학상 대상

2024-10-27

[문예마당] 가을 산을 오르며

  모처럼 산을 찾았습니다. 볼디산(Mt. Baldy)입니다. 집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입니다. 낙엽을 밟으며 혼자서 천천히 걸어갑니다. 젊은이 몇이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갑니다. 가파른 언덕이 시작됩니다. 숨이 차오릅니다. 가뿐히 걷던 길이었는데 이제 만만치가 않습니다. 헉헉거리며 등성이 하나를 넘었습니다. 잠깐 쉬어갈 요량으로 걸음을 멈추고 길가 바위에 걸터앉았습니다.     사방이 조용합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묻혔던, 산이 품고 있던 소리들이 조심스럽게 살아납니다. 물소리, 풀벌레 소리,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구름 흘러가는 소리 등 걸으면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입니다. 멈추니 들려옵니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듣지 못했던 소리입니다. 저렇게 세상 모든 것은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저만치 아스라합니다. 내가 남긴 발자국을 되돌아봅니다. 내 소란한 발걸음이 행여 이웃에 불편을 끼치지나 않았는지. 무례한 내 발길에 차여 애먼 사람이 상처를 입지는 않았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봅니다. 내 발에 밟혔을 가엾은 작은 생명들을 떠올립니다. 내 구둣발의 횡포를 새삼스럽게 확인해봅니다.     물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길옆 골짜기에 물이 흐릅니다. 일만 봉우리에 내린 가랑비가  내를 이루어 계곡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산이 좋아, 나는 길 따라 올라가는데 물은 저렇게 산을 버리고 떠나가는 중입니다. 한 세월 산의 품속에 살다보니 싫증이 났나봅니다. 산은, 촐랑거리며 멀어져가는 저 물을 탓하지 않습니다. 말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고 헤어지는 이치를 산과 물은 저렇게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 위에 낙엽 한 잎 툭 떨어집니다. 낙엽은 개울을 타고 천천히 떠내려갑니다. 물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구덩이를 다 채우지 않고 흐르는 물을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낙엽이 웅덩이를 한 바퀴 휘돌고 나더니 물 따라 다시 흘러갑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중일까요. 물과 함께 흐르는 낙엽을 보며 우리네 삶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세우고, 마음을 옮기고, 마음을 접으며, 마음이 무너지는 세월을 따라 흘러가는 한 잎 낙엽.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시 신발을 조여 맵니다. 올라갈수록 더 가파릅니다. 저 건너 언덕배기에 깡마른 여우 한 마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지고 온 지팡이에 지긋이 힘을 주어봅니다. 가만히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이 낯선 나그네에게 수인사를 건네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발로 땅을 구르며 워,워, 소리치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저만치 가다가 무슨 전해줄 말이라도 있다는 듯 몇 번이나 멈추어 뒤돌아보곤 합니다. 큰 바위 부근을 지나면서 다시 뒤를 돌아봅니다. 저 바위 위에 폴짝 뛰어올라 두어 번 굴러 재주를 넘은 다음 어여쁜 색시로 변해 산속 나그네를 유혹이나 하지 않을랑가 가만히 바라봅니다. 녀석은 앞발을 들어 내 쪽을 바라보며 툭툭 땅을 치더니, 살아있는 존재끼리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게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듯 무어라 긴소리를 내지른 다음 산 너머로 사라져버립니다.     다시 발걸음을 천천히 옮깁니다. 벌써 몇 사람이 나를 스쳐 올라갔습니다. 산행길에서 한인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백인들도 제법 눈에 띄지만 일본이나 중국인을 보았던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한인에게는 산을 좋아하는 특별한 인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전국의 산이 몸살을 앓는다는 한국뉴스를 볼 때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법 높이 올라온 모양입니다. 숨이 찹니다. 까마귀 소리가 들려옵니다. 까악 까악 깍…. 산중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까마귀 소리가 마치 “가아, 가아, 가”하는 소리 같습니다. 조금 전 만났던 여우가 생각납니다. 자기들의 동네를 무단 침입한 인간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산 정상 부근, 선 채 말라죽은 고목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풍장(風葬) 중입니다. 다비식 날 장작더미 위에 앉아 불꽃 가마를 타고 가볍게 오르시는 큰 스님처럼 몸을 말리는 중입니다. 몇백년 한 자리를 지켜 거목이 된 다음, 생을 마친 후에도 저렇게 같은 자리에서 몇십년인지 백 년인지 모르는 세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바람에 몸을 맡겨 장례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누워버린 고목도 한둘이 아닙니다. 저 나무님들의 나이를 혜량할 수가 없습니다. 고작 70평생 웃고 울며 이 땅 위에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저 어른들의 나이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줄기 마른 바람이 스쳐 갑니다. 생각해보면 생명을 불어넣은 것도 바람이요, 가져가는 것 또한 바람의 일입니다. 바람을 모셔오는 분은 누구이며, 바람을 몰아가는 이는 또 어떤 분일까요.     가져온 점심을 먹었습니다. 보온병에 담아온 따끈한 차 한 잔이 일품입니다. 갑자기 저만치서 어떤 이가 “야호~” 소리를 지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횡포입니다. 산 짐승을 놀라게 하고 나무의 잠을 깨우는 무례한 일입니다. 먼발치로 보니 한인입니다. 산에 처음 올랐거나 젊은 친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던 백인들이 그쪽을 쳐다보더니 저희끼리 무언가 수군거리며 걸어갑니다. 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천천히 산길을 내려갑니다. 발을 절뚝거리며 가는 사람이 보입니다. 내리막길은 힘은 덜 들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산은 말없이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바람이 골짜기를 휘돌아갑니다. 낙엽들이 또르르 또르르 길 따라 굴러갑니다. 낙엽을 따라 나도 굴러 내려갑니다.   정찬열 / 수필가문예마당 가을 수필 물소리 풀벌레 발자국 소리 까마귀 소리

2024-10-24

[문예 마당] 사막에 내린 비

뜨거웠다. 문학을 사랑하는 열정은 날씨 못지않게 더웠다. 일 년 만에 개최하는 미 전 지역 문인들 모임이랄까? 미주 문인협회 주최로 여름 문학 캠프가 팜 스프링스에서 열렸다. 수개월 전부터 임원진은 강사와 장소 선정, 프로그램 구상, 진행 계획을 세웠다. 앞에서 추진하는 회장단과 뒤에서 조용히 협력하는 임원들이 있었다. 회장단은 자기 일을 뒤로 제쳐놓은 채 협회 일을 우선으로 솔선수범했다. 또한 스스로 뒷전에서 앞장서는 회장을 도우며 행사를 위해 못자리를 마련하는 임원도 있었다.     수레는 앞뒤 균형 잡힌 바퀴에 의해 움직이지 않던가. 행사 며칠 전부터 한국 강사진과 텍사스, 시카고, 알래스카,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참여하는 회원들을 맞이하기 위한 발걸음은 바빴다. 이렇게 넓은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문학 한마당이 펼쳐지다니 놀라웠다. 시, 수필, 소설, 아동 문학 장르라는 합집합 속에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집합이 꽃을 피워 낸 게다. 신인상 수여를 통해 참신한 인재를 발굴하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이어 미주 문학상 수여가 있었다. 특별히 “30회가 되도록 수필가가 선정된 것이 처음이라니, 참으로 미주 문학사에 뜻깊고 귀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수필은 얌전하고 순진한 글이지만, 그 속에 정서적 깊이가 깃든 독특한 미학을 가지고 있어 그 작가마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손홍규 소설가는 심사평을 했다.     수필은 수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일상의 정겨운 이야기를 품은 글이다.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것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아름답게 재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슬기로 이끌어 친밀감을 빚어낼 수 있는 문학이 아니던가.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기는 시점을 찾아서’, 손홍규 소설가의 ‘사연과 진심을 담아 소설 쓰기’라는 주제로 강의가 있었다.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연세에도 돋보기 너머의 글을 읽으며 열공하는 모습은 진지했다. 회원 모두 표정이 밝았다. 명절을 기다렸다는 듯 곱게 차려입으신 선배들의 모습에 덩달아 내 마음도 화사해졌다. 그동안 안부를 묻고 안녕을 확인하며 서로에게 위로를 건넸다. 이어지는 교제의 시간은 흥겨웠다. 뜨거운 불 곁을 마다치 않고 갈비를 굽는 임원의 수고 덕분에 모임은 한결 맛깔스러워졌다. 게다가 그 뜨거운 자리를 교대하며 배려하는 회원도 있었다. 뒷정리까지 옷소매를 걷고 도왔다. 남은 갈비를 지혜롭게 처리해 준 옛 임원 덕분에 귀갓길 버스에서 배고플 회원들에게 전달되어 따뜻한 마무리가 되었다. 진행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소한 문제가 생겼지만, 물이 빈자리를 메꾸듯 서로 자연스레 협력하여 흘러갔다. 폭염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요즘, 한줄기 소나기를 맞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이희숙 / 수필가문예 마당 사막 수필 미주 문학상 미주 문학사 손홍규 소설가

2024-08-29

[문예마당] 어머니의 DNA가 또 나왔어요

아들 가족이 오랜만에 왔다. 그새 아이들이 훌쩍 자랐다. 틴에이져인  큰 손자와 둘째 손자의 머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파마를 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며느리가 “어머니, 어머니 닮아서 곱슬머리잖아요” 하며 웃었다. 어릴 때는 반질반질 윤이 나고 차분했던 손자들의 머리카락이 붕 뜨고 곱슬곱슬해졌다. 꼭 파마머리 같았다. 얼굴이 작은 데다 머리가 붕 뜨니 서양 아이들처럼 보였다. 내가 두 손자에게 괜찮냐고 물었더니 아주 만족스런 표정으로 좋다고 하였다. 난 마음이 놓였다. 미국 땅이다 보니 그들도 곱슬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내가 보기에도 멋져 보였다.     우리 애들도 중·고등학교만 들어가면 곱슬머리가 되었다. 어릴 때는 머리카락이 윤기가 나고 반질반질해서 친하게 지낸 이웃이 잘 먹여서 그런가보다고 부러워했다. 거기다가 손자 둘은 혈액형도 나하고 같은 A형이다. 며느리는 셋째 아들을 낳고 “어머니, 어머니 DNA가  또 나왔어요”라고 했다. 생물을 전공하고 제약회사에서 근무한 며느리는 근거 있는 말을 애교 있게 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곱슬머리가 된 이유를 찾아보니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서 ‘성호르몬 등 체질의 변화로 인해 사춘기부터 곱슬머리가 된다’에 해당한 것 같았다. 그러한 현상이 유전된 것이다.   사진을 보면 내 머리카락도 역시 어릴 때는 윤기가 나고 반질반질했는데 여고 때 기숙사 생활하면서부터 감당할 수 없는 곱슬이 되었다. 나는 그때 기숙사 물이 수돗물이 아닌 지하수 펌프 물이고 비누가 나빠서 그런 줄만 알았다. 곱슬머리와 교복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칼라의 교복에 반듯한 직모를 한 친구들이 그렇게 부럽고 신기하게 보였다. 그런데다가  내 짝꿍도 나 같은 악성 곱슬이었다. 고3 때 입시 공부에 정신없다가도 우리 둘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박장대소를 하곤 했다. 파리만 날아가도 깔깔대고 웃을 때가 아닌가!  친구들은 공부하기 싫으면 부채꼴로 붕붕 떠 있는 우리 머리를 보고 늘 웃어댔다. 나 역시 친구 머리가 맘에 들지 않아서 같이 웃곤 했다.     어릴 때 친척 집에 가면 ‘누구와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기분이 많이 달라졌다.  어린 딸들은 자기 엄마가 젊고 예쁜데 늙은 할머니를 닮았다고 하면 좋을 리가 없다. 말하는 사람은 할머니의 젊은 모습도 알기에 좋은 뜻으로 얘기해도 어린 애들은 우선 시각적으로 늙은 할머니를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런데 우리 손자들은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곱슬머리도 좋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팬데믹으로 바깥출입도 줄이고 미장원을 갈 수가 없을 때 나는 내 머리카락을 손수 잘라 보았다. 좀 삐뚤거려도 티가 나지 않았다. 곱슬머리의 장점이 드디어 드러났다. 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면 손색이 없다.  내 마음대로 모양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냥 싹둑 싹둑 잘라도 서로 조화를 잘 이루었다. 나는 비로소 내 머리카락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 속담에 ‘양지가 음지가 되고, 음지가 양지가 된다’ ,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 말이 있다. 무서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내 곱슬머리가 빛을 보게 되었다.         외적으로 유전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얼마든지 노력하고 돈을 들여 바꿀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면적인 것은 문제가 된다. 며느리가 셋째를 낳고 “어머님의 DNA가 또 한명 나왔어요” 할 때 나는 은근히 걱정되었다. 내 속에 있는 나쁜 습관 즉 끈기가 없는 점, 우유부단한 점, 자신감이 없어 항상 주저하는 점, 성실하지 못한 점, 이런 것들을 닮지나 않았을까 겁이 났다. 손주들을 어릴 때부터 보면 그들의 소양을 알 수 있다. 다행히 나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손주는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고 취미 생활도 열심히 한다. 그리고 모두 끈기가 있다. 어릴 때 레고를 맞추는 걸 보면 기어이 완성하고야 만다.     한 번은 아들이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아주 복잡한 레고를 사 왔다. 큰 애는 큰 기선이고, 둘째는 날개가 크게 달린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큰 손자는 며칠을 걸려 조금씩 만들어 완성했고 둘째는 그날 저녁에 다 만들려고 낑낑거리다가 잘 안 되니 울기까지 했다. 옆에서 잠도 안 자고 지켜보던 막내가 둘째에게 “울지 말고 형한테 가르쳐 달라고 해” 하는데도 기어이 혼자서 이리저리 맞추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멋진 완성품이 되어 있었다. 내 안에는 없는 끈기를 보고 마음이 놓여서 몇번이고 칭찬을 했던 기억이 난다. 손주들이 다섯인데 모두가 매사에 성실하다. 이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일인지! 나의 노년을 행복하게 해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오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영희 / 수필가문예마당 어머니 수필 어머니 어머니 우리 손자들 양지가 음지

2024-08-22

[문예마당] 색다른 여행

  7월을 보내며 매년 해변 문학제가 열리는 시기인지라 모두 꿈을 저버릴 수 없어서 모인 여행, 미주 시학 발행인 정미셸 회장의 인도로 미국 동부 여행길에 올랐다.   올해 최우수상인 배정웅 문학상 수상자가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관계로 지난번 LA교육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및 수상자 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에 상패와 소정의 상금을 싸 들고 떠나는 길이었다.   핑계는 그렇고 우리는 신세계로의 여행이었다. 화씨 90도 푹푹 찌는 날씨의 LA를 떠나면서 동부 지역엔 1주일 내내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 예보에 우산까지 사 들고 길을 나섰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을 날던 국제선 비행기보다 좀 작았다. 그러나 비행 기간 내내 창밖을 내다보며 부푼 꿈을 안고 우리는 피곤함도 잊은 채 신이 나 있었다.     수놓은 듯 흰 구름 덩이가 꽃처럼 둥둥 떠 있는 무수한 산등성이를 보고 또 봤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이 정말 목화솜 같다는 감탄사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진한 주황색 붉은 협곡, 물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장엄한 그랜드캐년이 보였고, 곧이어 도시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평화로운 고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모두 내릴 때가 되어서인지 조용하던 비행기 안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각자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앞사람들 걷는 대로 한발 한발 짐을 끌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6시간 동안에 비행기 안은 너무 시원했고, 우리 일행은 “승무원 서비스가 좋네‘”, “만족스러웠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링컨 국제공항 주차장 안내판을 바라보며  밖으로 나왔다.     그곳엔 알래스카에서 내려온 평론가이자 영어 번역가인 강수영님이 렌터카를 몰고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부 여행이 처음인 나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신비로운 세계를 걷는 기분, 오랫동안 살아온 LA는 큰 도시라도 고향 같았는데 그곳은 빨간 벽돌의 건물들이 즐비했다. “여긴 진짜 미국 같아”라고 했더니 누군가 “LA도 미국이에요”라고 해서 한바탕 웃으며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바로 앞에 높이 솟은 붉은 벽돌 건물은 시청이라고 했다. 그런데 시청 앞에는 하얗게 쏟아지는 분수대만 있을 뿐 광장이 없다. “여긴 서울 시청 앞이나 광화문처럼 광장이 없네. 데모도하고 큰 잔치도 하는 그런 광장” 하고 물으니 누군가 미국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못 본척하는 사회라 광장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LA시청 앞에는 광장이 있었던가?”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가물거린다. 아무튼 수만개의 붉은 벽돌들의 위용을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다음날 시상식 행사가 있는 날이라 일찍 쉬기로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그곳 한인타운에 있는 ’한강‘이라는 식당에 도착해 보니 한인 종업원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버지니아주 근처 4개 주에서 모인 시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를 낭송하고 수상자에게 상패와 상금을 전달했다. 수상자의 수상 소감을 듣고 즐거운 식사를 하느라 시간 가는줄 몰랐다.   삼삼오오 기념사진을 찍고는 찻집으로 옮겨 담소를 나누다가 샌타모니카의 뒷골목 같은 길에 들어서자 기타 소리 등 시끌벅적했다. 우리는 소란한 곳을 피해 포토맥 강가에 앉아 발을 적시며 하루를 접었다.     다음날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생가를 방문했다. 관광버스가 6대나 서 있고 주차장마다 차들로 가득한 걸 보니 관광명소인 듯했다. 빨간 지붕, 넓디넓은 숲과 잔디밭 사잇길, 땡볕 쏟아지는 길들을 많은 관광객과 오락가락 거닐었다. 300여명이 넘는 노예들이 살았다는 곳을 지나 푸른 강변으로 옮겨 하얀 머리 독수리를 만날 수 있다는 가이드 말을 기대하며 페리호를 탓지만 독수리는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영화 같은 이야기와 기념 사진관을 둘러보다가 돌아왔고,마지막날은 역시 광장 없는 연방의회 의사당으로 가기로 했다. 독수리가 앉아있는 황금색 둥근 지붕의 연방의회 의사당, 워싱턴 기념관 일명 연필탑을 둘러보며 링컨 기념관을 들러 나오다가 쏟아지는 비를 피해 관광을 접기로 했다.     동행했던 시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알지 못했던 무수한 이야기를 들었고 신비한 세계도 경험했다. 즐거웠던 7월의 여행, 또 하나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여행 수필 동부 여행길 여행 미주 비행기 창밖

2024-08-15

[문예 마당] 멋모르고 살았다

나는 멋모르고 엄마가 되었다. 뒤돌아보면 아찔하다. 멋모르면서 살아온 것이 내 인생인 것 같다. 그래서, 새삼, 부끄럽기도 하고, 인생의 묘미함에 놀랍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다. 진심이다. 누구에게 미안하냐고 물어 온다면, 많은 해당 인물이 있다. 전능하신 분에게도 역시 그렇다. 그렇지만, 감사하다.     따져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뭣 모르고 생긴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님이 내 의사를 묻지 않고 강제로 세상으로 데리고 나오셨으므로, 나는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언니가 졸업한 중학교에 가라 해서 뭣 모르고 그리했다. 이어서 언니가 졸업한 대학, 같은 학과로 진학하라 하셨다. 그때에는 내가 좀 철이 들었기에 곰곰이 들여다보았더니, 내가 전공할 과목은 아니었다.     여자답고, 조신하고, 예쁘고, 숙녀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컸던 언니는 그에 적합한 가정학을 전공했다. 가정경제, 음식의 역사와 개발, 한국 의복의 개조, 여성과 소아의 예절 같은 한국 사회에 필수적인 분야들이긴 했으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런 분야에 관심이 없었다. 말괄량이, ‘돌에 돌 치기’하듯 어른들에게 말대꾸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하여대는 버릇없는 아이, 게다가 반짝이는 좋은 인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언니의 모교로 진학했지만,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려는 사명감 같은 것은 없었다. 뭣 모르고 걷게 된 길이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저질렀다. 한 남자한테 반해서 그 남정네랑 함께하는 삶을 택하고 그의 마누라가 되었고 함께 한국을 떠나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 우리는 용감했었던 것 같다. 이어서 뭣 모르고 아이들을 세상에 데리고 나왔다. 삶이 고달픈 것을 알기에, 미안하다.     그뿐이랴! 뭣 모르고 한국어진흥재단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또 뭣 모르고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까지 되었다.   내가 걸어 온 길은 잘 포장된 곧은 도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없이 걸었기에, 길이 안전한지, 주위가 멋있고 아름다운지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꼬불꼬불, 울퉁불퉁한 길도 많았을 터이다.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무릎이 까져 피가 나고, 부주의로 벌에 쏘이기도 했을 터인데, 기억나지 않는다. 잊기로 작심을 했었던 것인가.   그러나 나는 감사한다. 뒤돌아보면 나는 디아스포라 한국계 미국인으로, 양쪽 문화와 역사 속에서 숨 쉬어 왔다. 엄청난 모험을 반세기 전에 시도한 탓이다. 몇몇 곳에 임시로 정착할 때마다, 주위에는 한국분들, 비한국계 친지들이 함께해 주었다. 지금도 지속하는 문화의 섞임이 허용된 풍성한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때부터 대다수 우리 조상들의 이주(移住)는 시작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일본, 미국, 멕시코, 유럽 등 곳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루었다. 어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든지 간에, 그분들은 반드시 두 가지 일을 했다. 그중 하나는 후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커뮤니티를 만든 것이다. 그 공동체 안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도우며 어려움을 어렵지 않게 해결하고, 문제가 될 법한 일들을 문제로 삼지 않고 과제로 삼고 살아왔다. 그들은 정답을 찾기보다 해답을 알았고, 그 해답을 현명하게 실행하며 살았을 것 같다.   비록 멋모르고 철없이 시작했던 새로운 길에서, 겸손을 배웠다. 환자들을 돌보면서 성실함을 익혔다. 그들이 어깨에 지고 걸어왔던 인생의 짐 보따리는 내 것과 다를 바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것들을 내려놓도록 도왔다.     멋모르고 시작한 한국어진흥재단의 일 또한 나를 겸손하게 하였다. 선배들은 한국어진흥재단과 함께 그 특별하고 힘든 길을 쉼 없이 걸어왔다. 한글을 퍼트리고, 세계인들이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물꼬를 트기도 했다. 우리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웠던 것처럼, 세계인들도 한글을 배우는 것에 촉진제가 되었고, 그런 일에 헌신했다. 하고 나는 드디어 떠나온 모국의 ‘간접적 애국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멋모르고 시작하고, 멋모르고 살아온 나에게는 서로 꼬면서 한 몸체를 만드는 한국인의 두 유전자 실마리가 존재한다. 나의 아이들도 멋모르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꼬임을 잘 이루고 있는 유전자의 두 실마리가 그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류모니카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 한국분들 비한국계 우리 한국인들

2024-07-25

[문예 마당] 운동화 한 짝

  운동화를 한 켤레를 샀다. 무거운 발에서 벗어난 시원함일까, 자신의 직분을 다했다는 충만감일까, 새 신 옆의 헌 운동화들이 참으로 홀가분해 보인다.     새 운동화를 살 때마다 생각나는 신발 한 짝이 있다. 그 운동화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미움과 원망의 내 옛날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다.     가시네가 중학교를 졸업했으면 됐으니 공장에 가 돈을 벌든지 미용기술 같은 것을 배워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반대하니 고등학교가 더욱 가고 싶었다. 다행히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받아 공짜로 학교에 다닌다는 말에 아버지도 더는 반대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한테 많은 빚을 진 기분이었다. 아버지한테 절대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던 내 결심과는 달리 학비를 뺀 책값 등등 모든 것이 아버지 몫이 되었다.                                                                   그래서 신고 다니는 내 운동화가 누렇게 색깔이 바래고 앞 두덩이 터져 발가락이 보여도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운동화는 뒤축이 떨어져 걸음을 걸을 때마다 뒤축이 찰딱거렸다. 아무리 발가락을 안으로 구부려 운동화를 눌러도 터진 두덩이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너덜대는 운동화도 아버지의 무시도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친구들 앞에서 구겨지는 내 자존심을 삭일 길은 없었다.     그저 내게 만만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나는 징징거리며 어머니를 졸라댔다. 아버지 몰래 새 신을 산다는 것이 어두운 숲속에서 마라톤을 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친구들 앞에서 무너지는 내 자존심을 생각하면….     시장에서 본 그 하얀 운동화, 그것은 정말 훔치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 울며 보채는 딸이 불쌍했던지 호랑이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새 운동화를 사주셨다. 그날 밤 나는 새 신을 가슴에 껴안고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다음날 여느 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하얀 운동화가 빳빳하게 세운 내 흰 교복 칼라와 맞물려 백조의 날개처럼 빛났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보란 듯이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도도하게 걸었다. 푹신한 쿠션에 둥둥 뜬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등굣길이 조금 더 멀었으면 싶었다. 신문지에 싸 온 헌 운동화는 뒤축을 구부려 실내화로 신었다. 차갑던 교실 바닥이 폭신폭신했다. 온종일 콧노래가 나왔다.     집에 오다 공원 벤치에 앉아 운동화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백합같이 보드라운 운동화가 흰 구름처럼 깨끗하고 사랑스럽다. 갈색 나뭇잎 하나가 팔랑 운동화 위로 떨어졌다. 나는 행여 빨간 물이 들까 봐 얼른 나뭇잎을 치우고 운동화를 탈탈 털었다. 집에 오자마자 먼지를 털어 마루 안쪽 구석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아껴서 오래오래 신어야지. 하얀 운동화 한 켤레가 온 집안을 반짝거리게 했다. 그동안 낡은 운동화 때문에 찜찜하던 기분을 싹 털어낸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리라 생각하며 책을 펴들었다.     “저게 누구 신발이냐?” 외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마루 위의 신발을 보고 노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아차 했다. 운동화를 아버지 눈에 안 띄는 곳에 두었어야 하는 것을 너무 흥분해 깜빡했었다.     “제 신인데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헌 운동화는 어쩌고”     “학교에”   “이런 맹랑한 것 봤나. 당장 가서 가져와. 한참 더 신어야 하거늘.” 아버지가 곧 나를 후려칠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다 떨어진 그까짓 운동화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밤중에 가져오라고 해요. 내일 학교 갈 때 가져오라고 합시다.” 어머니가 옆에서 한마디 하자 “저 여편네가 자식들을 저렇게 망친다니까. 당장 가져와.”   나는 부리나케 집을 뛰쳐나와 학교로 향했다. 구부러진 그믐달 아래 질척질척 걷는 내 발길이 교수대로 끌려가는 사형수 같았다. 컴컴한 골목에서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벌벌 떨며 뒤를 돌아보면 내 그림자가 길게 멈춰 서곤 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정신없이 뛰었다. 굳게 닫힌 교문을 부서져라 흔들며 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꾸벅꾸벅 졸던 수위 아저씨가 눈을 비비며 교문을 열고 나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훌쩍대며 늘어놓는 내 얘기를 들은 수위 아저씨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 긴 복도를 돌아 교실 문을 열어주었다.     “너희 아버지, 참 대단한 분이구나.” 다정히 등을 쓸어주는 수위 아저씨의 말에 나는 그만 또 엉엉 울고 말았다. 아버지는 왜 나를 그렇게 미워할까, 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또 내 머리를 휘저었다.                                         공원을 지나오다 다리 위에 앉았다. 푸르스름한 하천이 달빛을 받아 잔잔한 윤슬을 반짝이며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 운동화를 다시 신으라고, 그럴 수는 없어. 아버지가 못 버리게 한다면 내가 버릴 거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저 다리 밑으로 던져버릴 거야.” 나는 운동화 한 짝을 다리 밑으로 휙 던져버렸다. 또 다른 한 짝을 던지려는 순간 아버지의 불꽃같이 노한 얼굴이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안 돼! 나는 남은 한 짝을 가슴에 꽉 움켜쥐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한테는 오다가 운동화 한 짝을 물에 빠뜨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는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 신을 신고 학교에 갔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다리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래되었다. 나름대로 내게 절약하는 습관을 가르치려 했던 아버지, 내가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는 이미 아셨을 것이다. 새 운동화를 살 때마다 하천에 던져버린 그 운동화 한 짝이 생각난다. 운동화도 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젠 미련 없이 버리자. 나는 새 신 옆의 헌 운동화들을 주섬주섬 플라스틱 봉지에 주워 담았다.   임지나 / 수필가문예 마당 운동화 수필 운동화 위로 운동화 때문 운동화 그것

2024-07-25

[이 아침에] 반세기 만에 트인 대화 물꼬

메시지를 받았다. “밥솥을 사서 밥을 했더니 고두밥. 우리 입맛에 맞을 쌀, 월마트에서 살 수 있는 걸로 추천 바랍니다.”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알고 보니 50년 전 대학 클래스 동기였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인 서울교육대학에서 국어과 교수로 재직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뿐이다.   친구 소개로 전화번호까지 주고받았지만, 우린 피차 서로의 인성이나 취향 등에 관해 아는 게 없다. 살아온 환경과 생활 방식조차 다를 텐데. 풋풋했던 젊은 날의 애틋함이나 설렘 같은 건 없다. 어떻게 어느 선까지 대접해야 할까? 사람 교제를 좋아해 으레 손님방을 제공하고 있지만, 운전대까지 내려놓은 상태라 관광 안내도 자유롭지 못한 터. 여러 방법을 모색해 보았지만, 답을 못 찾았다.   그는 블로그에 올린 ‘플로리다 마이애미비치 거리에서 여경을 만나다’라는 글을 보냈다. 이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아이 러브 텍사스!’라는 글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들은 덮쳐 왔다 … 마치 훈련병이 무서운 교관에게 기합받지 않겠다는 듯 “아이 러브 텍사스!” 엉겁결에 사랑한 텍사스를 내일 떠난다.’     난 혼잣소리로 웃었다. 미 대륙 횡단 자동차 여행 중 모텔 화장실에서 썼단다. 글을 읽으며 옛 친구를 재발견한 듯했다.   졸업 후 50년 만에 대학 동기를 대면했다. 이상과 현실 차이가 너무 커서 방황했던 그 시절이 가까이 다가온다. 사라진 것이 아니고 나를 만들어준 중요한 요람이었다는 걸 뒤늦게라도 깨달은 게 다행이지 않을까. 그 동기를 잘 대접하고 싶은 건 그 시절 나를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제 칠십이 넘어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다른 세계를 열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는 우버를 이용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집을 찾았다. 탁 트인 뜰 나무 그늘에 앉아 이야깃주머니를 꺼냈다. “어떻게 모교 교수가 될 수 있었어요?” 첫 질문을 시작으로 대화는 누에고치 실 풀리듯 이어졌다. 출생부터 대학 시절을 넘어 어렵고 힘들었던 10년 간의 강사 생활, 모교에서 후배 양성의 어려웠던 점, 은퇴 후 수필 쓰기와 강의에 빠졌단다. 둘은 공통점을 찾았다. 충남 홍성, 성장한 지역이 같고 수필을 쓴다는 점이다. 가로막혔던 무언가가 스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반세기란 간격과 우려를 몰아내고 공감대를 형성한 게다. 자연스레 거실 겸 작업실로 안내했다. 서로 출판한 책들을 소개했다. 보유한 수필 강의록과 수필 학 책도 보여주었다. 미국 수필가 협회 활동상과 방문해 강의했던 한국 교수들도 소개했다.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수필 창작을 위한 열강을 쏟아냈다.     7시간 동안 만남이었다. 숙소로 돌아간 그가 쓴 글을 보내주었다. ‘그녀와 나는 대학 동기다. … 그녀와 나는 노는 물이 달랐다. 지금 기억으로는 둘은 대화한 적이 없다. 그녀가 특별히 관심 영역 안에 있지 않았다. 그저 이름과 안면을 익힌 채 각자 삶의 바다로 일엽편주처럼 떠돌기 반세기 만에 대화 광장에 손잡고 입장한 셈.… 그녀 소식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미국을 여행하는 도중에 필연처럼’이라고 묘사했다.   수필은 정직하다, 수수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진정성이 있는 산문이다. 수필가라는 교집합이 우리 대화 물꼬를 트이게 했다. 글의 힘이 아닐는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희숙 / 수필가이 아침에 반세기 대화 수필가 협회 수필 강의록 대학 동기

2024-07-24

[문예 마당]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아내와 함께했던 31년, 사랑하고 정다웠던 날들보다 아파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2년 전 아내는 서둘러 갔다.   우리가 중매로 만났을 때, 그녀는 노처녀, 나는 아들이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다. 그녀는 LA 카운티병원의 면허 간호사였고, 나는 콜로라도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다 정리하고 LA로 와 판촉물 광고회사를 막 시작한 영세업자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기운 운동장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나의 자존감이나 용맹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10여 년을 애들 데리고 혼자 살아온 홀아비와 장미꽃처럼 가시와 자존심이 세었던 노처녀의 결혼은 서로 간절했던 만큼 달콤했고 신혼은 아름다웠다.     내 사업은 기존 고객이 없기에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수입이 많은 아내가 마치 후원자처럼 버팀목이 되어 준 덕에 버텨나갔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자연스레 아내의 주도로 흘러갔다. 아내는 내게 필요한 옷이나 구두 등을 미리미리 사다 놓았다. 사이즈를 재거나 물어온 적도 없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쇼핑이나 집안 대소사에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왕자가 된 기분도 잠깐씩 들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낯설기도 했다.     아내는 나를 양육하듯 보살피며 다스렸고 함께 상의해야 할 집안일도 혼자 결정했다. 하다못해 마루를 새로 깔고 지붕을 수리하고 페인트칠을 하는 집수리 때도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나는 매달 버는 돈에서 할당받은 액수를 내놓는 것도 벅찼지만, 아내의 수입이 정확히 얼마인지 집의 재정 상황은 어떤지 깜깜이였다. 그렇게 무시당할 때마다 왜 싸움을 안 했겠는가. 결혼에 또 실패해선 안 된다는 마치 하나님의 계명 같은 내 결심에 충실 하느라 설사 싸움이 벌어져도 일진일퇴의 부부싸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핀잔이었다. 나는 아내를 돌이킬 겸, 또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어 참회와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108배 절을 100일 동안 해보기도 했다.   아내는 아이를 원했지만 생기지 않아 우리는 한인 여아를 입양했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부터 10여 년 동안 피아노에 발레, 재즈 댄스, 바이올린, 첼로, 수학 학원, 테니스 교습, 수영 등 학원과 교습소를 순례하듯 다녔다. 아내는 늘 ‘애 ㅇㅇ학원에 등록했으니 몇 시에 데려가고 몇 시에 데려오라’는 통보만 하는 식이었다.   아마 결혼생활 10년 차쯤부터였을까.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나는 삶도 사업에도 재미를 느끼거나 동기부여 없이 우울의 못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주치의가 처방해준 약은 오히려 극단적인 생각마저 하게 했다. 의사는 세 번이나 다른 약을 처방했지만 약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내 발로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상담을 통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괴로움도 유발된다는 사실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담사의 권유로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를 찾았다. 그러나 아내의 사과와 8가지 약속을 받고 이혼소송을 취하했지만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내는 한 가지도 바뀌는 게 없었다. 그렇게 소송과 취하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짐에 가서 라켓볼을 치거나 근육운동을 하고 사우나로 마무리하면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나는 명상에 심취했고, 명상과 트래킹을 위해 한국은 물론 미얀마나 네팔 등을 찾기도 했다. 그런 여행을 다녀오면 더 고요하고 안정감을 느꼈다.     아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하고 완벽주의적인 삶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두 번의 암 수술 등으로 고생하다 70세도 못 넘기고 먼저 갔다. 장례식 후 화장을 해 유골은 뒤뜰 비탈진 정원에 뿌렸다. 그리고 정원에 아내 이름을 따 ‘Kyung’s Garden'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모든 죽음이 다 그렇겠지만, 삶의 짐을 다 내려놓고 떠났다면 미움도 용서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종종 아내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아내 생각이 나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정원 푯말을 보곤 했다.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그녀가 가고 나서도 내가 가장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변방인 취급을 받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곤 했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잘 해주질 못해 미안했다. 아내가 남긴 연금 등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도 놀랐다.     지난해 한국에 갔다 고향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후 길을 걷다 ‘사주 궁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 늘그막에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두 사람 걸 다 봐야 하니까 4만 원요." 숨진 아내의 생년월일과 내 것을 주었다.     "이 여자분은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남자였으면 좋았을 만큼 대장감 사주예요. 이분 사업하시나요? 사람들을 거느리는…."   나는 밖으로 뛰쳐나와 호텔로 향하다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미스리가 이렇게 싱겁게 풀리다니…, 진작 알았더라면 접어주고 살지 않았을까? 나는 ‘여보, 왜 그랬어?’를 마침내 내려놓았다.  김윤기 / 수필가문예 마당 미안 수필 아내 생각 아내 이름 정원 푯말

2024-07-11

[문예 마당] 뜬구름 잡기

얼마 전 운전을 하다 한 편의점 앞에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을 봤다. 1등 당첨금이 10억 달러가 넘는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이었다. 당첨만 된다면 대대손손 부자로 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미국 전역이 복권 관련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때다. 당시 그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은 벼락을 두 번 맞는 것보다도 낮다고 했다. 그만큼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다. 하지만 비록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발표 전까지는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즐겁다고 한다.   지금까지 복권을 산 적이 두 번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직장을 다닐 때였다. 회사 동료들과 단체로 복권을 샀는데 그때도 1등 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때 복권 구매에 참여한 것은 일확천금의 불로소득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동료들에게 따돌림당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뜬구름 잡는데 참여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는 성직자 한 분은 “복권을 사는 것은 노숙자 돈을 갈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까지 한다. 매달 주 정부나 연방 정부로부터 받는 복지 지원금을 복권 구매에 탕진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란다.   복권과 관련해 25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음식점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3명이 일을 끝마치고 공동으로 즉석 복권을 사기로 했다. 당첨되면 3명이 똑같이 당첨금을 분배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여러 장의 복권을 구매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한 장이 5000만원에 당첨됐다. 당시 그 액수를 3등분 하더라도 이들이 20년 동안 저축을 해야 만질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은행이 문을 열면 당청금을 찾기로 하고 그 복권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혼자 챙기려는 욕심이 생겨 동료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그 복권을 갖고 줄행랑쳤다. 이런 사실을 발견한 나머지 두 명은 즉시 은행에 지급 정지를 요청했고, 복권을 들고 도주했던 욕심쟁이는 결국 절도죄로 체포가 됐다. 욕심은 정신적인 것에 두어야지 물질적인 것에 두면 화를 자초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종류의 복권이 있는 미국에도 복권 당첨자 관련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복권 당첨으로 인생 역전을 이뤘다가 끝내는 노숙자로 전락한 남자 이야기다. 그는 복권 당첨 후 자가용 비행기까지 몰고 다니며 돈을 물 쓰듯 낭비하고 허세를 부리며 다녔다. 그 결과 당첨금을 3년 만에 모두 날려 버리고 노숙자가 됐다는 것이다.     한 조사 기관에서 거액의 복권 당첨자들을 추적 조사했더니 그중 99%가 거액이 생긴 후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며 복권 구매가 후회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씁쓸해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복권 1등에 당첨되면 그 돈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일확천금이 일단 수중에 들어오면 마음이 변한다고 한다. 나 또한 불로소득에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며 교만과 허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 할 수 있는가.   내가 근무하는 양로 보건 센터에 한국에서 온 대학 졸업반 학생이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 학생과 점심시간에 식사하며 우연히 복권 이야기를 나눴다. 그 학생은 자신은 복권을 한 번도 산 적이 없다고 했다. 일시에 일확천금이 생긴다면 자신의 꿈과 도전은 사라지고 안일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인생에 파멸이 올 것이라고 했다. 땀 흘려 일한 만큼, 수고한 만큼 결실을 얻는 것이 올바른 삶이 아니냐고 나에게 반문하였다. 순간, 그 학생한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청년의 사고방식이 너무 듬직해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았다. 그 학생처럼 삶의 철학이 건전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 조국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이제는 나도 어떤 것이든 ‘뜬구름 잡기’는 여기서 멈춰야 겠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 마당 뜬구름 수필 복권 당첨자들 복권 이야기 복권 구매

2024-07-04

[문예 마당] 내가 보이면 세상도 보인다

당나귀와 같은 근성에 휘두르는 회초리가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탔던 당나귀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의미가 있는 교훈이다. 당나귀 가는 길에 몸에 두른 옷을 벗어 깔아 놓고 빨마 가지(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을 보면서 당나귀는 착각 현상에 빠져 붕 뜰만도 하지 않았겠는지?   칭찬과 자화자찬을 조심하라는 뜻에서 옛 성인들이 제자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 것이 당나귀 회초리다. 일반적인 의미의 회초리가 아니고 나처럼 나르시시즘이 다분한 사람에게 필요한 약이다. 세속적 도발성과 충동을 제어하는 것에 약하다 보면 자신의 본질을 놓아버리게 된다. 눈길을 따라 들락날락하는 마음이라니! 그래서 휩쓸리는 짓거리가 보이면 즉시 두문불출로 대응한다.   내면으로 숨어드는 내공의 연습도 필요하다. 깊이 가라앉는 마음의 바닥이 보일쯤이면 어느새 1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명상 중에 흘러갔던 것들을 기록한다. 때로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우성, 오래전에 있었을 법한 무의식에서 걸어 나오는 어린아이라고 해야 할지? 본적도 느낌도 없는 관계지만 마음의 언저리에서 서성인다. 때로는 시공을 넘어와 포개 앉은 다리에 무릎을 부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으로 쳐내 버린다.   삶과 피안의 세계 경계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손짓이었는데 마음은 무거워진다. 튀어나온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왜 아우성처럼 느꼈는지? 곱씹으려 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는 어린 시절 나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까불고 팔랑거리다 못해 촐싹거리는 어린아이가 나의 자화상이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가 규정지어 주는 것이 싫다. 그대로 붙들려 그것처럼 내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이다.   별스러운 자화상 없이도 과거에 붙들림 없이 잘 지내왔다. 사람은 믿고 의지할 존재라기보다는 용서하고 덮어 주는 것이 회복의 길임을 알아챘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훨씬 편안하다.   “ 눈이 예쁘네, 어디서 했수?” “아, 내 눈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탐색의 코드부터 엇갈리기 시작하면 차라리 용모 지상주의 선전포고를 인정하여 맞장구를 치는 재미도 있다. 숨어있던 자화상이 기어 나와 나 역시 침을 튀길 기회다.     젊은 날의 초상까지 보여 주면 대화는 지속한다. “리모델링한 거 아니지?” “나, 40대에도 교인 할머니가 자기 아들 중매 서겠다고 찍힌 거 알아?” “알지, 저이가 누구누구 차 타고 교회에 왔다가 그이 누이한테 딱 걸려서 노총각 혼삿길 막을 셈이냐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거든” “남편의 부탁으로 타고 온 것이 그렇게 된 거지 뭐….”   나의 인정하기 싫었던 자화상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포장으로 부풀리는 거짓 자아다. 이 때문에 당나귀 회초리는 모욕을 가하는 무기가 되어 준다. “헤이, 주책없는 당나귀야, 주인공은 네가 아니야. 히힝거리지 말아라.” 때로는 “이 늙어빠진 당나귀야 나대지 말고 잠잠해라” 하면 신기하게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다소곳해진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독이 오른 뱀처럼 눈에 불을 켰을 것이다. 그러나 갚으려고 기회를 노릴 것도 괜한 감정 낭비로 밤잠을 설칠 필요도 없게 된다   마음과 의지만으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아는 길들여야 한다. 길들이지 않는 자아는 분노에 휘말릴 확률이 높아진다. 자아는 상처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고 방어기제에는 능하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조용한 시간에 촛불을 마주하고 내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아를 길들인 사람은 앉아 있는 한 시간이 무척 평화롭고 빠르다. 그러나 초보자는 단 십 분도 견디기 힘들 것이겠지만 분노 오해 등 부정적 속성인 자아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감내해야 한다.   무조건 앉아야 하는 일은 처음부터 어렵다. 몸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분심 잡념의 방해도 심하다. 자아를 길들이는 일이 수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통제를 받는 자아는 충고와 모욕에 순응하며 주인을 알아본다. 최경애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당나귀 회초리 아우성 오래전 부정적 속성인

2024-07-04

[문예 마당] 자이언 캐년을 다녀와서

나이를 먹어도 여행은 마음을 들뜨게 한다.  남전도회 회원들은 며칠 전부터 시간 나는 대로 모여 여행에 대해 의논했다. 은퇴하고 빠듯한 살림을 쪼개 여행을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최대한 호텔 비용을 줄이고 음식도 뷔페로 정했다. 75세를 넘기면서 이런저런 고질병들이 있는 나이라 이것저것 가려 먹으려면 여러 가지 중에서 골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전도회 회장님이 여행 경험이 많은 분이라 무척이나 다행이다.   드디어 여행가는 날 아침 8시. 교회 앞 주차장에는 24명의 남녀 노인들이 모였다. 이번 수련회는 부인들을 동반한다. 갑자기 응급 상황이 생겨도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큰 의미를 포함했다.   목사님 두 분이 운전사를 자원해 교회 차 앞 좌석에 앉으셨다.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다. 얼마 전 남편은 운전을 하면서 출구로 차를 몰고 들어가 나를 당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은 엄두도 못 낸다. 한때 본인이 GPS라며 운전만큼은 자신 있다고 했던 남편인데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바스토우에서 잠깐 쉬었다가 곧장 라스베이거스를 지나, 모스키트라는 곳에 있는 버진 리버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이곳에서 오며 가며 2박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도 이 호텔에 머물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제 일어난 일도 기억 못 하는데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 이곳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넷플릭스에서 본 버진 리버라는 드라마는 미국에 있는 시골 도시 이름이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모아 드라마로 만든 것인데 여 주인공이 간호사였기에 더 흥미가 있었다. 간호사인 나도 적극적으로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게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배웠다.       저녁은 프라임 비프다. 잘 익은 고기에 옥수수와 감자 구운 것 하나로 통일한다. 13달러짜리 고기치고는 맛이 좋다. 좀처럼 고기를 안 먹는 회원들도 맛있게 먹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다음날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 돌아가는데 그 어마어마한 암벽에 새삼 하나님의 작품이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라 세상은 파랗다. 바다만 파란 것이 아니라 산, 들도 파랗게 변했다. 암벽은 붉은색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회색이고 까만색도 있다. 바위 사이로 이름 모를 선인장과 잡초가 있다. 이를 본 일행들은 무지개떡이나 시루떡 같다고도 하고, 생강을 묶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모두 시장한지 보는 것마다 음식으로 통한다며 깔깔 웃었다. 신비한 경치는 70이 넘어도 16세 소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게 하나 보다.   협곡에는 곳곳에 등산로가 있었다. 잠자리가 바뀌어 제대로 잠을 못 잤다는 몇몇 회원은 한 곳만 골라 올라가자고 한다. 하얀 바위(White Dome)에서 30분 정도 등산을 했다. 멀리서만 보던 바위를 직접 가 보는 것은 이번 여행만의 특혜였다. 바위 사이사이로 다닐 땐 바람과 그늘이 있어 콧노래를 불렀는데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길을 걸을 땐 옷을 한 꺼풀씩 벗어야만 했다. 콧노래를 부를 때도, 암초에 걸려 허덕일 때도 있는 우리네 인생길 같다. 인생 곳곳에서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길가에 있는 작은 풀잎 하나에도 꽃을 피우시고 왜 그들이 거기에 있는지 모든 게 당연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생긴 것으로 보이니 내 생애에 생긴 작은 일에도 감사가 절로 나왔다.   돌아오는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사막에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조슈아트리가 서 있다. 인간의 성격이 다르듯 나무도 각자 개성이 있나 보다. 산을 반으로 잘라 만든 도로는 오가는 길이 1차선이다. 이 길이 생기기 전에는 말을 타고 다녔을까?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은혜다.   몸은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누군가 선창으로 시작된  4부 합창은  웅장했다. 성가대 생활을 수십 년 한 회원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말 그대로 달리는 합창단이다. 서로 덕담도 주고받고 농담하니 오가는 길이 먼 것같이 느껴지지 않고 너무 웃어서 시간 가는 것도 잊었다. 한때는 24시간이 모자라는 듯 바쁜 생활을 한 청춘이었지만 아이들 다 기르고 부부만 남은 회원들이 감사하는 여행을 해보니 이번 수련회는 하나님을 찾고 자연을 찾아 나이를 먹었다는 것도 축복이었다.   몇몇 회원이 비용 부담을 자청해 가든그로브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곳엔 담임 목사님이 우리 버스를 보고 반갑게 손짓을 하고 계셨다. 우리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 준 사람이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는데 기다리는 담임 목사님 모습을 보고는 기분이 달라졌다.     요즘엔 여행을 갔다 텅 빈 집에 오는 게 퍽 외롭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교회에 일이 있다며 먼저 가신 목사님이 우리 밥값을 내셨단다. 예상치 않은 일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로도 해서 밥값만큼 남은 돈은 교회에 헌금으로 대신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고 많이 웃어서 행복했다.  김규련 / 수필가문예 마당 자이언 수필 바위 사이사이로 장거리 여행 남전도회 회원들

2024-06-20

[문예 마당] 진짜 나를 찾기

  최근 법정 스님이 창설한 시민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가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진짜 나를 찾아라’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법정 스님의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스님이 생전에 강조한 절제, 친절, 공생 등 삶의 자세를 담고 있다. 자기 존재를 깨닫고, 현재에 충실하게 살 것을 강조한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로 인도하는 등불과도 같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법정 스님의 어록에는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 “친절에는 한도가 없다. 무한히 펴서 쓸 수 있는 우물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옛날과 달라서,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서 온다”  “삶은 미래가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등 현대인에게 맑고 향기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 많다. 곱씹을수록 깊은 의미가 우러나는 말들이다. 이 책을 읽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나의 내면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병적으로 수줍음이 많았다. 체육 시간이면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간 ’부루마‘라는 체육복을 입어야 하는데 부끄러워서 체육 시간이 정말 싫었다. 또 자신감이 없어서 항상 남이 원하는 나로 살아왔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려 애쓰며 거절할 줄을 몰랐다. 친구가 영화 본 이야기를 하면 나도 본 영화임에도 안 본 것처럼 끝까지 들어주고, 학교 준비물을 이미 샀음에도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갔다. 그러니 자연히 착하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진짜 나'가 아닌 '가짜 나'로 산 셈이다.   서울의 변두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학교는 명문 여학교였다.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부자와 권력자의 딸들이 많았다. 여러 면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학생들 틈에서 점점 기가 죽었다. 시간표에 따라 가방을 싸야 하는데 매일 같은 책을 넣고 다니다 담임선생에게 들켜 교무실로 불려가 매를 맞기도했다. 학교 다니기가 싫었다. 꿈 많은 여학교 시절을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했다.     우리 시대부터 대학 입시제도가 바뀌었다. 미국의 SAT 같은 국가고시를 보고 그 성적으로 대학을 들어가야 하는데 시험 보는 날 토사곽란으로 시험을 망쳤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게 됐다. 대학생활에 재미를 못 붙여 학교 배지도 안 달고 다니며 수업엔 빠지기 일쑤였다. 3학년 때였다. 채플 시간 대강당에 모인 학생들이 와글와글 떠들어 대니 김옥길 총장이 설교를 멈추고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귀한 자리인 줄 모르십니까? 밖에서는 그 자리에 앉고 싶어도 형편이 안 돼서 울고 있는 학생들이 많습니다”라며 언성을 높이셨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 식으로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젊은 시절을 낭비했다.     결혼해서 연년생으로 두 아들을 낳았다. 말썽꾸러기들과 지내다 보니 목소리가 커졌다. 하루는 손님이 다녀간 후, 큰아들이 말했다. “엄마는 왜 목소리가 두 개야?” 어느 것이 내 진짜 목소리인지 나도 모르겠다.     50세 가까이 돼서 남편을 따라 LA로 가게 되었다. 새로운 삶을 자신감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LA에는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예쁘고 유명한 친구가 있었다. 여고 동창에 대학 동기, 같은 과를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까이 지냈다. 그녀 역시 나의 존재감을 잃게 하였다. 남들은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는데 왜 자존감이 떨어지고 행복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평범한데 내 주위엔 이상하게도 예쁘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항상 나보다 예쁘고 잘난 사람들과 비교하니 스스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사소함과 평범함의 가치를 몰랐다.   '꾸뻬씨의 행복 여행'은 한 정신과 의사의 특별한 행복론이 담긴 책이다. 환자 중에는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해결책을 찾으러 진료실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난다.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지 알기 위한 여정이다. 꾸뻬씨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행복의 진리에 성큼 다가서게 된다. 그의 여행 수첩에 담긴 행복에 대한 첫 번째 처방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꾸뻬씨가 여행 중에 만난 노승은 “첫 번째 실수는 행복을 목적이라고 믿는 데 있다. 종종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목표로 삼지만,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삶을 즐기고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라고 말했다.   어쩌다 60세가 넘어 등단하게 됐다.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 내 에세이집 '내 욕심마저 훔쳐간 도둑'이 마침 새로 출간된 김형석 교수의 '100년을 살아보니',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인 '고양이'와 나란히 전시된 걸 보고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삼성동 코엑스몰에 갔다가 우연히 그곳 관광명소인 '별마당 도서관'에 내 책이 진열된 걸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에세이집 출판 후 친구, 지인들의 격려가 나에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각자 타고난 그릇이 있다. 법정 스님의 말씀대로 자기 분수를 깨닫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생 말년에 그토록 열등감에 시달리며 다니기 싫어했던 여학교로부터 모교를 빛낸 동문에게 주는 '영매상'을 받았다. 졸업생은 누구나 탐내는 명예스러운 상이다. 내가 누리는 복의 작은 부분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해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나는 모르고 살아왔다.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진짜 나'가 아닌 '가짜 나' 즉 타인이 원하는 것들만 추구하며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읽은 글이 떠오른다. “무엇이 되든지 자기가 되라. 남의 것을 주워 모으는 모자이크 인생을 살지 말라. 너만의 장인이 되라.”   배광자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행복 여행 법정 스님 여학교 시절

2024-06-13

[문예 마당] 나의 반려견

  반려견 릴리가 병이 났다.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아 키운 지가 18년이 되었다. 얼마나 예쁘고 착한지 정성 들여 키웠다. 그런데 일 년 전부터 비실비실 활기가 없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병원에 데려갔더니 심장이 조금 부어 있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먹고 병세가 조금 호전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갑자기 기침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다른 병원엘 가 보았다. 친구가 소개해 주었는데 명의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곳이었다.     친구가 소개해 준 병원의 수의사는 한인이었다. 그는 애완견의 병세를 매우 친절하고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선 X-ray를 찍고 CT 스캔을 해야 한다고 해서 모두 검사를 받았다. 수의사는 컴퓨터로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릴리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 증세가 마지막 단계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선 두 가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약을 먹였다. 놀랍게도 약의 효능 덕분인지 릴리의 상태는 아주 좋아졌다. 기침 횟수가 줄고 활기를 좀 찾는 것 같다. 그동안 밥도 잘 안 먹었는데 식사도 꽤 잘해 여간 고맙지가 않다. 수의사는 숨이 차도록 운동을 시키지 말고 심장에 무리가 가는 운동은 삼가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며칠 전에는 수의사가 전화를 걸어 릴리의 병세를 물어보았다. 증세가 많이 좋아진다고 했더니 수의사는 참 다행이라며 잘 간호하라는 당부를 했다. 미국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수의사가 직접 전화해서 아픈 개의 상태를 물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 친구의 말처럼 명의 임이 틀림없다. 참 고마운 수의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동물을 잘 돌봐 주니 병원은 항상 애완동물로 붐빈다. 진료를 받기 위해 3시간이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공원에 데려가며 산책을 했는데 이제는 심장에 무리가 갈까 봐 산책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한다. 호수의 오리들이 밖으로 기어 나와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면 릴리가 흥분해 짖어대면 심장에 무리가 갈 것 같아 자주 못 가게 된 것이다.   뒷마당에는 큰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드나든다. 가끔 땅다람쥐(gopher)가 뒷마당을 파헤치는 까닭에 고양이가 오는 것을 내 버려두었다. 고양이에게 밥도 주고 물도 주면 뒷마당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뒤지가 얼씬도 못 한다. 고양이가 아주 새까만 색깔이라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검은 고양이가 연상돼 무서울 때도 있지만 땅다람쥐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덩치가 큰 이 고양이가 뒷마당에 서성이면 릴리가 보고 흥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집안에서 난리다. 페티오 문을 열어 주면 쏜살같이 고양이에게로 달려든다. 고양이는 으르렁 거리며 두 앞발을 휘두르며 릴리에게 달려든다.   작은 개 페니도 질세라 고양이에게 달려들지만 번번이 위협당하고 물러나고 만다. 이 고양이도 배포가 보통이 아니다. 애완견 두 마리가 달려드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발톱으로 할퀴려 끈질기게 달려든다. 결국 애완견 두 마리는 뒤로 물러나고 만다.   릴리가 흥분하면 숨을 헐떡이기 때문에 병세가 더 악화할 수 있어서 고양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고충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고양이는 시커먼 몸체를 드러내며 왕자가 군림하듯 나타나곤 한다. 이제는 먹이도 안 주기로 했다. 땅다람쥐가 나오든 말든 릴리를 생각해 먹이를 주지 않는다.   이제 릴리는 심장이 크게 붓고 폐에 물이 차 있어 숨을 쉴 때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고양이가 아무리 뒷마당에 서성이더라도 못 본 척 그냥 있으면 좋으련만 그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무법 침입자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생 결단 짖어대고 달려드는 모습이 가상하고 기특하고 눈물겹다.   나의 반려견 두 마리는 달려들어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발톱으로 할퀴며 끝까지 버티는 고양이 앞에 주저앉아 쳐다만 보고 있다. 죽음을 앞둔 릴리는 끝까지 뒷마당을 지키고 있다. 그곳에서 고양이에게 짖어대다가 죽지 않을까 염려스럽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주인을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지극정성이다.   나는 주님께 향한 충성심이 지극정성인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고마운 나의 반려견, 릴리야! 김수영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수의사가 전화 건강 상태 기침 횟수

2024-06-06

[문예 마당] 기다림

  요즘 들어 몇 가지 꼭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1주일에 서너번씩 공원에 가서 산책하는 일이다. 공원을 산책하노라면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다. 나무들이 뿜어 내놓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내 몸의 나쁜 것들을 싹 씻어 낸 기분이다.  봄이 되면서 피기 시작한 꽃들은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선화가 피고, 동백이 수줍게 피고, 튤립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군자란의 주황색 나팔꽃들은 어느 신부의 부케를 연상케 하고 연분홍 벚꽃은 새색시 얼굴처럼 쏙 내밀어 주위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어릴 때 집앞 강당에서 많이 보았던 박티나무는 밥풀 모양의 몽우리를 내서 먹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어느새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을, 이 행복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 병석에 누워있는 사촌 오빠다.       지난 늦가을에 한국에 여행 갔을 때 일이다. 가족 모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촌 오빠가 없었다. 몸이 안 좋아 연락만 했다는 것이다. 말이 사촌이지 어릴 때는 거의 같이 살았다. 방학이면 오빠는 도서관에 오듯이 책을 들고 우리 집에 와 공부를 했다. 그런 오빠를 부모님은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다. 오빠는 아침을 먹고 우리 집에 왔다. 사랑에서 열심히 공부하다 점심때가 되면 조그마한 산 등을 내려가 자기 집(큰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온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때는 항상 노래를 불렀다. 특히 고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가곡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 ‘가고파’를 목청껏 불렀다. 열심히 공부하고 난 후의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번 여행에서 우리 오빠와 사촌 오빠를  만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아버지의 생애를 쓰고 싶어졌다. 거창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살아오신 일 가운데 하도 기이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지나온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다. 가난한 처지에서도 꿈을 이루신 분이셨다. 우리 자매들보다도 두 오빠는 더 열심히 들었고, 사촌 오빠는 종손답게 질문도 곧잘 해서 아버지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아버지는 두 오빠의 직업까지 정해놓고 기회만 있으면 그들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워 주셨다. 다행히 두 오빠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어릴 때부터 정해 온 길을 착실히 걸어 꿈을 이뤄 가문을 빛냈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 사촌 오빠 집에 병문안을 갔다.  듣기보다는 밝은 표정이었다. 내가 알기로 오빠는 운동도 좋아해서 젊었을 때 주말이면 테니스도 하고 나이 들어서는 골프도 쳤다.  원래 키가 훤칠한 호남이어서 웬만한 사람은 그 앞에서 주눅이 들 정도였다. 거기다가 그의 청백함은 그를 차가운 사람으로 만들 정도였다. 나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꼈다. 어떤 불의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던 오빠도 병마엔 어쩌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그렇게 아프면서도 식사를 같이 못 해 미안하다면서 봉투를 내미는 그의 따뜻함에 사양 한번 못하고 말았다.     봄이 되면서 공원에 있는 모든 들풀까지도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못 보던 풀꽃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읊어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풀꽃을 보니 조바심이 더 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에 오빠가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빠는 그 옛날 우리 집 앞 강당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빨강 동백을 기억할까? 꿈을 이루려 공부만 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숲 사이로 군데군데 놓여있는 벤치는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자아낸다. 그곳에 앉아 그 옛날 우리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일본 순사를 보기 좋게 혼내 주고 피신 다녔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듣고 싶다. 그 뒤로 오빠는 다행히 병의 원인을 찾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쁜 소식이 기다려진다.   이영희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사촌 오빠 우리 오빠 고등학교 음악책

202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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