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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수필

 
아내와 함께했던 31년, 사랑하고 정다웠던 날들보다 아파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2년 전 아내는 서둘러 갔다.
 
우리가 중매로 만났을 때, 그녀는 노처녀, 나는 아들이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다. 그녀는 LA 카운티병원의 면허 간호사였고, 나는 콜로라도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다 정리하고 LA로 와 판촉물 광고회사를 막 시작한 영세업자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기운 운동장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나의 자존감이나 용맹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10여 년을 애들 데리고 혼자 살아온 홀아비와 장미꽃처럼 가시와 자존심이 세었던 노처녀의 결혼은 서로 간절했던 만큼 달콤했고 신혼은 아름다웠다.  
 
내 사업은 기존 고객이 없기에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수입이 많은 아내가 마치 후원자처럼 버팀목이 되어 준 덕에 버텨나갔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자연스레 아내의 주도로 흘러갔다. 아내는 내게 필요한 옷이나 구두 등을 미리미리 사다 놓았다. 사이즈를 재거나 물어온 적도 없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쇼핑이나 집안 대소사에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왕자가 된 기분도 잠깐씩 들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낯설기도 했다.  
 
아내는 나를 양육하듯 보살피며 다스렸고 함께 상의해야 할 집안일도 혼자 결정했다. 하다못해 마루를 새로 깔고 지붕을 수리하고 페인트칠을 하는 집수리 때도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나는 매달 버는 돈에서 할당받은 액수를 내놓는 것도 벅찼지만, 아내의 수입이 정확히 얼마인지 집의 재정 상황은 어떤지 깜깜이였다. 그렇게 무시당할 때마다 왜 싸움을 안 했겠는가. 결혼에 또 실패해선 안 된다는 마치 하나님의 계명 같은 내 결심에 충실 하느라 설사 싸움이 벌어져도 일진일퇴의 부부싸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핀잔이었다. 나는 아내를 돌이킬 겸, 또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어 참회와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108배 절을 100일 동안 해보기도 했다.
 
아내는 아이를 원했지만 생기지 않아 우리는 한인 여아를 입양했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부터 10여 년 동안 피아노에 발레, 재즈 댄스, 바이올린, 첼로, 수학 학원, 테니스 교습, 수영 등 학원과 교습소를 순례하듯 다녔다. 아내는 늘 ‘애 ㅇㅇ학원에 등록했으니 몇 시에 데려가고 몇 시에 데려오라’는 통보만 하는 식이었다.
 
아마 결혼생활 10년 차쯤부터였을까.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나는 삶도 사업에도 재미를 느끼거나 동기부여 없이 우울의 못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주치의가 처방해준 약은 오히려 극단적인 생각마저 하게 했다. 의사는 세 번이나 다른 약을 처방했지만 약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내 발로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상담을 통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괴로움도 유발된다는 사실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담사의 권유로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를 찾았다. 그러나 아내의 사과와 8가지 약속을 받고 이혼소송을 취하했지만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내는 한 가지도 바뀌는 게 없었다. 그렇게 소송과 취하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짐에 가서 라켓볼을 치거나 근육운동을 하고 사우나로 마무리하면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나는 명상에 심취했고, 명상과 트래킹을 위해 한국은 물론 미얀마나 네팔 등을 찾기도 했다. 그런 여행을 다녀오면 더 고요하고 안정감을 느꼈다.  
 
아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하고 완벽주의적인 삶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두 번의 암 수술 등으로 고생하다 70세도 못 넘기고 먼저 갔다. 장례식 후 화장을 해 유골은 뒤뜰 비탈진 정원에 뿌렸다. 그리고 정원에 아내 이름을 따 ‘Kyung’s Garden'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모든 죽음이 다 그렇겠지만, 삶의 짐을 다 내려놓고 떠났다면 미움도 용서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종종 아내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아내 생각이 나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정원 푯말을 보곤 했다.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그녀가 가고 나서도 내가 가장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변방인 취급을 받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곤 했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잘 해주질 못해 미안했다. 아내가 남긴 연금 등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도 놀랐다.  
 
지난해 한국에 갔다 고향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후 길을 걷다 ‘사주 궁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 늘그막에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두 사람 걸 다 봐야 하니까 4만 원요." 숨진 아내의 생년월일과 내 것을 주었다.  
 
"이 여자분은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남자였으면 좋았을 만큼 대장감 사주예요. 이분 사업하시나요? 사람들을 거느리는…."
 
나는 밖으로 뛰쳐나와 호텔로 향하다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미스리가 이렇게 싱겁게 풀리다니…, 진작 알았더라면 접어주고 살지 않았을까? 나는 ‘여보, 왜 그랬어?’를 마침내 내려놓았다. 

김윤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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