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 가을 산을 오르며
수필
모처럼 산을 찾았습니다. 볼디산(Mt. Baldy)입니다. 집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입니다. 낙엽을 밟으며 혼자서 천천히 걸어갑니다. 젊은이 몇이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갑니다. 가파른 언덕이 시작됩니다. 숨이 차오릅니다. 가뿐히 걷던 길이었는데 이제 만만치가 않습니다. 헉헉거리며 등성이 하나를 넘었습니다. 잠깐 쉬어갈 요량으로 걸음을 멈추고 길가 바위에 걸터앉았습니다.
사방이 조용합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묻혔던, 산이 품고 있던 소리들이 조심스럽게 살아납니다. 물소리, 풀벌레 소리,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구름 흘러가는 소리 등 걸으면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입니다. 멈추니 들려옵니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듣지 못했던 소리입니다. 저렇게 세상 모든 것은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저만치 아스라합니다. 내가 남긴 발자국을 되돌아봅니다. 내 소란한 발걸음이 행여 이웃에 불편을 끼치지나 않았는지. 무례한 내 발길에 차여 애먼 사람이 상처를 입지는 않았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봅니다. 내 발에 밟혔을 가엾은 작은 생명들을 떠올립니다. 내 구둣발의 횡포를 새삼스럽게 확인해봅니다.
물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길옆 골짜기에 물이 흐릅니다. 일만 봉우리에 내린 가랑비가 내를 이루어 계곡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산이 좋아, 나는 길 따라 올라가는데 물은 저렇게 산을 버리고 떠나가는 중입니다. 한 세월 산의 품속에 살다보니 싫증이 났나봅니다. 산은, 촐랑거리며 멀어져가는 저 물을 탓하지 않습니다. 말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고 헤어지는 이치를 산과 물은 저렇게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 위에 낙엽 한 잎 툭 떨어집니다. 낙엽은 개울을 타고 천천히 떠내려갑니다. 물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구덩이를 다 채우지 않고 흐르는 물을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낙엽이 웅덩이를 한 바퀴 휘돌고 나더니 물 따라 다시 흘러갑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중일까요. 물과 함께 흐르는 낙엽을 보며 우리네 삶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세우고, 마음을 옮기고, 마음을 접으며, 마음이 무너지는 세월을 따라 흘러가는 한 잎 낙엽.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시 신발을 조여 맵니다. 올라갈수록 더 가파릅니다. 저 건너 언덕배기에 깡마른 여우 한 마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지고 온 지팡이에 지긋이 힘을 주어봅니다. 가만히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이 낯선 나그네에게 수인사를 건네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발로 땅을 구르며 워,워, 소리치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저만치 가다가 무슨 전해줄 말이라도 있다는 듯 몇 번이나 멈추어 뒤돌아보곤 합니다. 큰 바위 부근을 지나면서 다시 뒤를 돌아봅니다. 저 바위 위에 폴짝 뛰어올라 두어 번 굴러 재주를 넘은 다음 어여쁜 색시로 변해 산속 나그네를 유혹이나 하지 않을랑가 가만히 바라봅니다. 녀석은 앞발을 들어 내 쪽을 바라보며 툭툭 땅을 치더니, 살아있는 존재끼리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게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듯 무어라 긴소리를 내지른 다음 산 너머로 사라져버립니다.
다시 발걸음을 천천히 옮깁니다. 벌써 몇 사람이 나를 스쳐 올라갔습니다. 산행길에서 한인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백인들도 제법 눈에 띄지만 일본이나 중국인을 보았던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한인에게는 산을 좋아하는 특별한 인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전국의 산이 몸살을 앓는다는 한국뉴스를 볼 때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법 높이 올라온 모양입니다. 숨이 찹니다. 까마귀 소리가 들려옵니다. 까악 까악 깍…. 산중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까마귀 소리가 마치 “가아, 가아, 가”하는 소리 같습니다. 조금 전 만났던 여우가 생각납니다. 자기들의 동네를 무단 침입한 인간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산 정상 부근, 선 채 말라죽은 고목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풍장(風葬) 중입니다. 다비식 날 장작더미 위에 앉아 불꽃 가마를 타고 가볍게 오르시는 큰 스님처럼 몸을 말리는 중입니다. 몇백년 한 자리를 지켜 거목이 된 다음, 생을 마친 후에도 저렇게 같은 자리에서 몇십년인지 백 년인지 모르는 세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바람에 몸을 맡겨 장례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누워버린 고목도 한둘이 아닙니다. 저 나무님들의 나이를 혜량할 수가 없습니다. 고작 70평생 웃고 울며 이 땅 위에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저 어른들의 나이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줄기 마른 바람이 스쳐 갑니다. 생각해보면 생명을 불어넣은 것도 바람이요, 가져가는 것 또한 바람의 일입니다. 바람을 모셔오는 분은 누구이며, 바람을 몰아가는 이는 또 어떤 분일까요.
가져온 점심을 먹었습니다. 보온병에 담아온 따끈한 차 한 잔이 일품입니다. 갑자기 저만치서 어떤 이가 “야호~” 소리를 지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횡포입니다. 산 짐승을 놀라게 하고 나무의 잠을 깨우는 무례한 일입니다. 먼발치로 보니 한인입니다. 산에 처음 올랐거나 젊은 친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던 백인들이 그쪽을 쳐다보더니 저희끼리 무언가 수군거리며 걸어갑니다. 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천천히 산길을 내려갑니다. 발을 절뚝거리며 가는 사람이 보입니다. 내리막길은 힘은 덜 들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산은 말없이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바람이 골짜기를 휘돌아갑니다. 낙엽들이 또르르 또르르 길 따라 굴러갑니다. 낙엽을 따라 나도 굴러 내려갑니다.
정찬열 / 수필가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