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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평양에서 찾은 기적의 미소

미국에서 간 의료진 17명이 평양 순안 비행장에 내려 한동안 기다리게 되었던 날은 2006년 5월 3일이었다. 대부분이 초행인지라 모두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고 잠시 기내에 머물게 되리라는 안내방송은 오히려 불안한 마음을 더욱 끌어올렸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창밖으로 보이는 ‘평양순안비행장’이란 글자가 북한에 온 사실을 확인해 주는 순간 이번 여행을 반대하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행히 이윽고 탑승객들이 기내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도 별 문제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터미널을 향해 약 2~3분 정도 걸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은 북한 외무성 산하 ‘해외동포위원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면서 앞으로 우리가 머무는 동안 안내를 맡았다고 소개했다.     곧 승합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양시내 ‘고려호텔’. 방 배정과 룸메이트가 정해졌다. 나는 23층 25호실에 시카고에서 온 닥터 고와 한방을 쓰게 됐다. 어두컴컴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23층에서 내려 방을 찾는데 복도 역시 어두워서 찾기 쉽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오니 다소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우린 조심스레 창밖으로 평양시내를 내다보며 아직도 불안과 걱정스런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여장을 풀었다.     다시 호텔 로비로 모인 일행은 조금 전 만났던 안내원들과 정식인사를 나눴다. 평양 일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한결 분위가 부드러워졌다. 평양이 먼 곳이 아니라 서울에서 불과 3시간 거리에 있다는 현실을 의식하며 평양에서의 첫 밤을 맞이했다.   대부분의 일정이 오전은 '평양과학의학학술회의' 그리고 오후에는 병원이나 의료시설(결핵요양소, 암센터, 치과재료공장 등등)을  방문하는 것이다 보니 주로 시내를 돌며 간간이 북한 명소들(능라도 경기장, 모란봉과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변의 푸에블러 미군 함정 등등)도 보면서 관광까지 겸하는 스케줄이 되었다.     함께 따라다니는 북한 안내원들과 가까워지며 여러 차례 함께 식사하다 보니 낯섦은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   하루는 안내원 S와 마주 보며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주문하자 그도 같은 메뉴를 선택해 뜻밖의 호감을 느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처음 만난 미국인과 사귀는데 3년 이상이 걸리는 시간을 단 3분도 채 안 되는 짧은 만남 속에서 친분을 나누는 경험을 하게됐다.   그런데 우리들이 맛있다고 그릇을 다 비우는 동안 밥을 다 먹지 못하고 식당을 나오는 그의 모습을 눈여겨보게 됐다. 나의 직업본능을 발휘해 밥을 다 먹지 못하고 일어선 이 안내원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위 어금니 2개와 왼쪽 아래 어금니 3개를 잃어 음식을 잘 씹을 수 없었다.     나는 치아이식, 브리지, 부분 틀니 등 복구 방법을 제안했다. 그중 가장 현실적인 것은 부분 틀니였다. 그 생각을 S에게 전하니 매우 주저주저하며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것을 정말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는 눈치였다. 물론 나도 30여 년의 의사경험 중 이러한 경우는 없었다. 치료는 최소한 30일이 필요한데 평양에 그렇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환자 구강 상태의 인상을 떠서 석고 모형을 미국에 가져가 제작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평양과학의학학술 회의에서 만난 북한 치과의사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더니, 난감한 표정이다. 그래도 나의 지속된 설명에 감동이 되었던지 해주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출국하기 전날 S의 구강상태를 그대로 복원시킨 석고가 든 박스를 받았다.   석고를 살펴보니 S는 오른쪽 위 어금니 2개와 왼쪽 아래 어금니 3개가 부족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의료진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그 맛있는 된장국도 비빔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먹는 둥 마는 둥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박스를 귀국짐에 넣지 않고 손에 들고 오다가 북경공항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세관원이 내가 손에 들고 오는 박스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아차! 싶었다.   틀니 만드는 특수액체를 북한에서 얻어 온 것이 문제였다. 그 액체의 휘발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솔린보다 훨씬 더 높아서 미국에서도 항상 취급주의가 요구되는 치과재료 중 하나다.   중국 세관원은 그 액체를 자기가 쓰던 재떨이에 붓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펑하는 작은 폭발음과 함께 그 재떨이는 순식간에 불덩이가 됐다. 지켜보던 나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나는 불법 소지물을 갖고 여행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중국세관원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니 등에서 땀만 흐르고, 우리 일행들은 비행기 환승편으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진퇴양난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옥신각신 끝에 그 세관원에게 그의 상사와의 대화를 요청했다. 조금 기다리니 한 젊은 세관원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그는 대화가 가능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나는 이 책임자에게 나의 신분과 그리고 북한에서 있었던 일 중 한 불쌍한 환자를 알게 되어 그를 도와주려는 차원에서 불법적인 것도 모른 채 그 액체를 받아서 오게 된 경위 등등을 말했다. 순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걱정 마세요(You are a good person. Don't worry about it!)”라고 날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상자를 더 큰 상자에 넣어 미국까지 무사히 오게 해주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기공소와 연락해 S를 위한 부분 틀니 2세트를 주문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환자의 틀니를 만들 때는 4~5차례 병원 약속을 하면서 환자의 입안에서 잘 맞는지 또 말은 제대로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음식은 잘 씹을 수 있는지 등등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절차를 내 상상 속에서 진행한 후 틀니를 완성했다. 그리고 LA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L의사 편에 틀니를 보냈다.   그 후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L의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평양을 다녀온 그의 첫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평양에서 난리가 났었어! 남 박사가 만든 틀니가 환자에게 너무나도 잘 맞아서.”   전화기를 잡은 내 손이 떨렸다. 그 한마디에 평양에서의 모든 경험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섭리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70년 이상 단절되었던 민족 동질성이 잠시 회복된 듯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남영한 / 은퇴 치과전문의문예마당 평양 기적 평양과학의학학술 회의 평양 일정 평양 순안

2025-02-27

[문예마당]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내가 미국을 무척 좋아하나 보다. 많은 것들이 좋게 생각된다. 성조기도 멋있고, 미국의 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도 감동적이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혁신가들의 창의성도 높이 평가한다.   2025년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또한 장엄한 행사였다. 취임식은 항상 상징적이고 웅장하다. 새로운 지도자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국가적 단합을 강조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깊은 장면으로 남곤 한다.   취임식은 트럼프 가문의 정치적, 사회적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가족이 모두 참석하여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무대에 올라 지지자들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2017년에는 장녀 이방카가 큰 역할을 한 반면 2025년 취임식에서는 장남 도널드 주니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보여줬다. 장남은 부친을 도운 중요한 인물로 거론됐다.   이날 취임식에서 트럼프만큼이나 주목을 받은 사람은 트럼프의 막내아들인 배런(19)이다. 멜라니아 여사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자녀로 키가 206cm나 된다. 현재 뉴욕대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지난 대선에서는 트럼프가 MZ세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는데 상당 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가에선 벌써부터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그의 다음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가 어린 배런의 손을 붙잡고 “술과 마약을 멀리하고 우리 집안에선 타투도 안 된다”고 말하는 장면은 지금도 널리 회자하고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했는데 트럼프는 ‘수신’은 모르겠지만 ‘제가평천하’는 확실히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을 ‘트럼프의 첫 번째 친구’라 칭하는 일론 머스크의 등장이다. 그는 트럼프의 취임식에서 마치 가족 같은 친밀함을 보여줬다. 까분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화성에 성조기를 꽂기 위해 우주 비행사들을 보낼 것”이라며 머스크의 ‘화성 탐사계획’에 힘을 보탰다.   트럼프는 2017년 45대 대통령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로 47대 대통령이 됐다. 지난번 취임식에서는 ‘미국 우선주의’가 주요 정책 슬로건이었다면 2025년 취임식의 일성은 ‘미국의 황금시대’ 선포였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며, 우리의 황금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 제 47대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트럼프가 한 선언이다.   그가 보여준 강한 자신감은 미국인들에게 강력한 지도력으로 인식됐다. 나도 미국 시민으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한국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LA의 산불 등 재앙으로 근심과 불안으로 축 늘어졌던 어깨에 힘이 솟았다. 많은 미국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미국은 이미 세계 유일의 수퍼 파워다. 그런데도 계속 더 뻗어나가려는 트럼프의 황금시대는 어디까지 펼쳐질까.   트럼프를 좋아하거나 지지하던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선입견과 편견으로 그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품위가 떨어질까 염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니 싫건 좋건 그가 미국을 잘 이끌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그의 장점이 하나 둘 나타나며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라는 감탄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트럼프가 말하는 황금시대보다는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더 선호한다. 태평성대란 어질고 착한 임금이 다스리는 풍요롭고 평안한 시대를 의미한다. 아무리 미국이 황금시대라도 지구가 망가져 자연 재앙이 잦으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요순시대 백성들의 생활은 풍요롭고 여유로워서 군주의 존재까지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정치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평안했음을 말한다.   나의 황금시대는 언제인가 생각해 봤다. 젊어서 직장에 다니며 춘천에 사시는 시부모님을 자주 찾아 뵐 수 없었다. 맏며느리로서 그것이 항상 미음에 걸렸다. 자청해서 우리 집에 모셔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다.   네 식구에 시부모님과 시누이 둘, 시동생에 시 조카까지 함께하니 열 식구가 한 집에 살게 됐다. 거기에 가사일을 도와주시는 분까지, 정말로 집안이 바글바글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 남편이 처음으로 자가용을 샀다. 작은아들이 “아빠, 식구가 많아 봉고차가 필요할 텐데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때가 나의 황금시대는 아니었다.   쉰이 가까울 즈음, 남편의 직장을 따라 LA에 우리 네 식구만 오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랴, 아이들 교육에 신경 쓰랴, 바쁘게 지내다 보니 몇 년이 흘렀다. LA 임무를 마친 남편이 홀로 한국에 들어가고 아이들 교육 때문에 LA에 남아 외롭고 고달팠다.   이제 남편은 은퇴하고 아이들은 내 손을 벗어나 나만의 여유를 누릴 시간이 많아졌다. 요즘은 남편이 주로 머무는 한국과 아이들이 사는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지낸다. 가끔 취미로 글도 쓴다.     어쩌다 신문에 난 내 글을 읽고 지인들이 “신문에 난 글 잘 읽고 있어요” 라고 하면 부끄러우면서도 자존감이 높아진다. 비록 나이가 들어서 외모는 망가지고 체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내 인생의 황금시대는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바이든 전 정부와 반대되는 정책에 사인을 많이 했다. 특히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한 파리협정에서 탈퇴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미국이 중국에 이어 온실가스 배출 2위 국가인데 말이다. 또한 세계가 협력해야 할 유엔 기후변화 협정과 조약 등에서도 탈퇴를 지시했다. 지난달 17일 발생한 최악의 LA 산불도 기후재앙이 근본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릴까 우려된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세상이다. 미국의 황금시대는 미국 하나만으로 되지 않는다. 기후변화 문제 등은 세계적으로 협력하고,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고 또 동서 이념 갈등으로 인한 세계의 평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미국의 황금시대가 오지 않겠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가서 8년 임기를 돌아보며 고별 연설을 했다. 그때 그가 호소한 말은 “포용과 관용, 다양성에 대한 존중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하나로 일어서자”였다. 2000년 전 로마제국이 융성할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와 관용이 바탕이 되었다.   미국이 지난 선거로 인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이민 문제도 포용하며 관용적으로 풀 수는 없을까.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 역시 좌우 분열과 대립을 벗어버리고 포용과 관용의 정치로 국민을 편안하게 살게 해 줬으면 좋겠다. 요순시대와 같이 정치는 잊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 싶다.   미국에 진정한 황금시대가 오면 더욱더 미국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트럼프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트럼프 가문 지난번 취임식

2025-02-20

[문예마당]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나는 음식을 회피하는 거식증이 있거나, 음식에 욕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다. 또 충동적으로 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이었을까. 나는 늘 허기가 지었던 것 같다. 6.25 전쟁 중에, 그리고 그 후에 한국의 모든 국민이 힘들고 가난했던 때에도 우리 식구들은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다. 집이 부유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쪼들리는 살림 중에도 엄마의 지혜로운 가정 행정의 운영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에는 배고파 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배가 고팠다. 집을 떠났을 때부터였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형체를 구별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촌스러울지언정 단순하고 상큼했던 엄마의 밥상을 텅 빈 벌판으로 밀어낸 형국이다. 회오리바람이 그곳을 휘젓고 지나갔던가.   인턴이 되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집을 떠났다. 오십 여년 전 한국의 인턴들은 당직 숙소에 기거해야 했다. 하루 건너서 당직이므로, 당직을 선 시간과 낮 근무까지 합쳐서 24시간 일하고, 그 다음날 정규 일과를 계속해야 했던 때라 인턴 숙소에서 일 년간 살았다면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인권, 노동법, 의료 수련의 법 위반이라 그리하지 못한다.     어떻든 나는 그때부터, 부모님을 가끔 방문하던 손님이 되어 버렸다. 그와 함께, 나를 안아주실 때 풍기던 익숙하고 따뜻한 체취, 반찬 냄새가 배어있는 엄마의 남루한 옷자락이 엄마가 끓이신 된장찌개와 풋김치가 올려진 단순하고 가난했던 밥상과 함께 멀어져 갔다. 엄마의 가슴과 나 사이에 있던 사랑과 희생이라는 이름의 구름다리 밑에도 그녀의 남루한 옷, 가난했던 밥상, 신선한 풋김치가 더는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인턴 생활이 전공의 삶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에 왔고, 나는 부모님을 방문하기에는 너무 먼,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되었다. 불쑥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나 배고파!’ 말하던 삶의 한 단편은 이미 지나고 난 후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허기를 엄마와 연결하여 본다.   구질구질하고 쩨쩨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엄마에게 할애하는 기억은 불공평하다. 당신은 전쟁·최루탄 연기·남루함 안에서 표정을 잃은 창백하고 주름진 얼굴로 세상을 보고 있다. 그 시대의 단 한 장 남은 흑백 가족사진 속에 있는 그녀는 슬프다. 그 사진 속에 그녀의 큰아들은 없다. 아들의 아내도 없고, 아들의 큰딸이 나와 함께 앞줄에 웃지 않고 서있다. 그녀의 눈동자와 입매가 엄하다. 한때는 빛났을 당신의 젊음과 웃음을 떠나보내고, 기뻐하여도 된다는 전능하신 분의 자비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의 엄마는 그 시대 어머니들의 모상(母像)을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1970년대에 도미하실 때까지, 40여 개의 전쟁으로 점철된 땅에서 사셨다. 일본의 속국인 나라 잃은 국민에게 일본이 관련되었던 크고 작은 모든 전쟁은 조선인들의 전쟁이 아니었던가.   여러 전쟁을 겪을 때 엄마와 함께했던 나의 손위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한다. 대신, 아버지 목마를 타고 피난 길에 올랐던 한국전쟁의 참상을 구경했을 터이다. 그러나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 전쟁의 잔재인 가난 속에서 자랐다.     중학교 입학 후에 목격하였던 학생혁명과 이어서 발발한 군사혁명으로 한국 사회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이 그중 하나이었다. 쌀 생산량에 비해서 인구가 많았던 한국은 일주일에 하루는 밥 대신 식빵을 먹을 것을 장려했고, 매가지 없는 월남 쌀을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채워야 했다. 출생률이 너무 높다고 판단되었던 때라서 시골 보건소에서는 피임약을 집집마다 다니며 나누어 주었던 때였다. 그러했던 격동기에, 엄마는 말이 없으셨다. 세상에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나의 배고픔은 허기(虛飢)가 아닌 허기(虛氣)가 아니었을까? 허기라는 두 글자는 한문으로 달리 쓰이고 뜻이 다르다. 허기(虛飢)란 실제 굶어서 생기는 배고픈 증세를 뜻하고, 내가 겪어온 것은 허기(虛氣)가 맞는다. 내가 말하는 배고프다는 것은, 정신적, 감성적 허기이다.   의학에서는 배고픈 이유를 당뇨, 저혈당, 스트레스, 저 단백질 음식 섭취, 갑상샘 기능 결핍, 수면 부족, 임신 등 열 가지 정도로 설명한다. 그 외에 질병의 이름이 붙여지는 ‘먹는 상황’과 관련된 예도 있다. 음식을 섭취하고자 하는 욕망, 음식을 회피하는 거식증 등 정신적인 또 감성적인 뇌의 기능과 관련된 질병들이다.   나의 갈증(渴症)을 유발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또 내가 갈구(渴求)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실질적인 부재(不在)와 영적인 부재에서 온 것이다.     엄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반찬 냄새가 밴 당신이 없다. 먼 곳을 바라보시던 절망과 단념의 눈동자도 찾을 수 없다. 내가 가졌던 엄마에 대한 연민은 머지않아 내가 이승을 떠날 때 대(代)가 끊길 것이다. 이 사이클은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은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니카 류 / 수필가·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문예마당 수필 단백질 음식 인턴 숙소 당직 숙소

2025-02-13

[문예마당] 카파도키아의 열기구와 지하도시

몇 년 전, 결혼기념일을 뜻깊게 보낼 해외 여행지를 찾으며 달력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장의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수십 개의 다양한 색상의 대형 열기구가 창공을 수놓았고 그 밑에는 기기묘묘한 암석 바위들이 진기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어딘가 찾아보니 카파도키아였다. 뾰족한 봉우리들이 마치 달 표면을 닮았다. 닐 암스트롱이 이곳을 방문하고는 “진작 이곳에 와봤더라면 굳이 달에 갈 필요가 없을 텐데” 라고 말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갈라디아’지역으로 사도 바울이 선교했던 터키(튀르기에)의 중부에 있는 지역이다. 근처로 요한 계시록의 7개 교회도 있어 기독교 성지 순례지였기에 꼭 가 보고 싶은 여행지가 되었다.     지난 가을, 그 로망이 이루어져 아내와 함께 난생 처음 열기구도 타 보고 지상에 내려 기묘한 바위들도 전망대에서 가까이 볼 수도 있었다. 바위의 재질이 한국의 화강암처럼 단단하지 않아 로마시대부터 기독교 박해를 피해 만든 지하 교회 흔적도 볼 수 있었다.   LA에서 카파도키아까지는 먼 길이었다. 이스탄불에서 일박을 하고 국내선 비행기로 가세리(Kaiseri) 공항에 밤늦게 도착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호텔을 떠나 해뜨기 전인 아침 6시경에 열기구 탑승장에 도착했다. 야산에는 약 30여 개의 열기구들이 버너 불에 조금씩 솟아올라 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10여 분 후에 탑승하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 부부가 탈 열기구는 약 20미터 솟아 있었고 대형 대나무 바구니가 탑승할 곳이었다. 대략 가로 5미터, 세로 2미터 크기에 가슴 정도 올라오는 입석 대바구니였다.     탑승 바구니는 철제 프레임 골격이 열기구를 둘러싼 쇠줄과 연결되었다. 탑승석 중앙에는 조종사 한 명과 사진사 한 명이 탔다. 양옆을 4등분하여 6명씩 태워 모두 26명이 탔다. 대략 체중 무게가 약 1.5톤인데 공기만 데워서 상승하는 게 놀라웠다. 주위에 찬 공기가 필요해서 아침 일찍 열기구를 띄우는 것 같았다.   조종사는 머리 위에 위치한 4개의 가스 버너의 불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워키토키로 관제탑과 계속 터키어로 교신을 했다. 모든 열기구가 차례를 기다려 이륙을 해서 충돌 사고를 방지하는 모양이다. 드디어 이륙허가가 떨어져 우리가 탄 열기구가 두둥실 떠오른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열기구의 방향을 어찌 조정하나 궁금해 살펴보니 버너 한 개가 방향키 휘장에 열기를 품어 방향을 만들었다. 사진사가 긴 셀카봉 막대를 밖으로 내보내더니 버너가 불을 높이 품을 때를 맞춰 사진을 찍었고 나중에 인터넷에 올려 구입할 수 있게 했다.   아침 6시 반쯤 되니 동녘이 밝아지더니 해님이 얼굴을 드러냈다. 일출의 광선이 열기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열기구 안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왠지 느낌이 다르고 흥분하게 만든다.     열기구 아래에는 오랜 세월 전에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퇴적 화성암과 응회암으로 쌓이면서 비로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광대한 자연 예술 조각들을 만들었다. 여기에 태양의 광선이 비취자 신비한 비경에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열기구는 서서히 움직여 마치 드론 비행기를 타고 서서히 지면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열기구 투어를 마치고 공중에서만 내려다보았던 바위산의 경치를 지프를 타고 3군데 전망대에 가서 가까이 보았다. 화산재로 이루어진 진기한 모습들은 예술적 조각품들의 야외 전시장이었다.     유타주에 브라이스캐년처럼 걸어서 가까이 들어가 보는 코스도 있었다. ‘파사바’ 계곡에는 10미터 정도 높이의 돌 버섯이 ‘천하대장군’ 목상처럼 서있고 세쌍둥이 모양의 돌탑도 있었다. 마치 만화 애니메이션의 ‘스머프’가 나온 버섯 모양의 집들을 연상시키는 자연 석탑들은 환상의 나라에 온 것 같이 그 특이한 지형에 매료되었다.   점심 식사로 터키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꽃병만한 크기의 진흙 항아리 안에 소고기, 야채, 양념을 넣고 불에 익힌 다음 먹을 때는 항아리를 깼다. 맛은 괜찮은데 매우 짜서 밥이며 야채 샐러드를 함께 비벼 먹어보니 먹을 만했다.   식사 후 찾아간 곳은 바위를 파서 집과 교회로 사용한 괴레메(Gerome) 야외 박물관에 갔다. 야산 돌산에 방과 창문을 만들었다. 식당 내부에는 20여 명이 앉는 돌 의자와 돌 테이블이 있었는데 바위산 내부의 돌들을 파내어 만들었다고 한다. 교회용 소강당도 만들었는데 이런 장소를 만드느라고 오랜 세월 엄청 많은 수고를 한 흔적이 보였다. 한 동굴에는 슬픈 사연도 적혀있었다. 아버지가 딸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금했는데, 딸은 40여 일을 금식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지상 투어를 끝내고 지하도시도 찾았다. 기독교 박해를 피해 만들어진 ‘데린큐유’ 지역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와인 저장소나 가축을 키운 방이 나왔다. 약 80미터까지 지하로 내려갈 수 있어 수천 명의 초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 이런 지하도시가 수십 개가 있다고 하니 ‘와우’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카파토키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적지로 열기구 타고 기묘한 암석들을 하늘에서 보고, 지상에 내려 자연의 조각 정원도 볼 수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로마시대에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만든 지하도시를 볼 때 믿음과 헌신된 모습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기독교인이라면 일생 한번 꼭 가봐야 할 곳이 아닌가 싶다. 윤덕환 / 수필가문예마당 카파도키아 지하도시 열기구 탑승장 대형 열기구 기독교 박해

2025-02-06

[문예마당] 천국에도 아카시아 꽃이 있으면 좋겠다

이맘때면 유독 아카시아 향이 그립다. 고향 산하를 온통 불태우던 진달래의 열화가 웬만해질 무렵, 어느 곳에서인지 미풍에 실려오던 아카시아 꽃의 그윽한 향을 기억한다.   그건 감미롭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 흐뭇한 기분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을까!   이럴 때 우리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안타까워한다. 그 섬세한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넉넉히 맛보고 싶어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쉬곤 했던 기억은 우리 모두에게 낯익은 전경이다.   아카시아 꽃은 소담스럽다. 군락으로 피어있는 아카시아 꽃을 보노라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예쁜 꽃 한두 송이 피어있는 것이 눈길을 끌 때도 있지만 아카시아 꽃은 한가득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이 제격이다.     굳이 마법의 성이 아니라도 괜찮다. 우린 왕자도 되고 공주도 되고 그렇게 동화 속에 살았다. 그 싱그러운 꽃을 따서 한 움큼 입에 넣으면 혀끝에 살짝 얹힌 단맛과 신비로운 향이 입안 곳곳을 맴돌다가 코를 타고 뇌리에 닿는다.     우리는 고향 추억을 그렇게 새겼나 보다. 거기 순이도 있고 철수도 있고, 아지랑이 언덕 넘어 야트막한 초가집들이 정겹게 늘어서 있다. 저녁 어스름에 밥 짓는 연기가 굴뚝 위로 흐르고, 황소는 게슴츠레 눈을 끔벅이며 저녁 여물을 기다린다. 저녁상을 물리고 둘러앉은 가족들은 아카시아 향을 맡으며 별을 헤고 꿈을 헤고….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면 꿀벌들은 꼭두새벽부터 난리다. 아마 사람 이상으로 아카시아 꽃을 반기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꿀벌들이다. 꼬박 한 해 만에 모처럼 만났으니 오죽이나 반가우랴. 꼭두새벽부터 붕붕거리며 연신 채밀장을 드나들기에 바쁘다.     꽃송이 하나하나를 정겹게 찾고는 꿀을 가득 싣고 돌아온다. 벌통 입구에 들어서면서 꿀을 실은 무게를 못 이겨 뒤뚱거리며 문 앞에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보초를 서던 녀석들은 좋아라 궁둥이를 치켜들고 마중을 나간다. 저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인간은 이 축제를 감히 탐낼 수 없다며….     이 녀석들을 넋 놓고 바라보노라면 난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나도 날개를 달고 얘네들 따라 아카시아 꽃밭에 다녀왔으면.   식물학자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아카시아는 아마 외지에서 유입된 꽃들 중에 가장 우리네 정서에 어울리는 토속적인 꽃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그윽한 향이며 예쁜 연미색 색조,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송이는 우리네 선조들의 곱고 넉넉한 심성을 빼어 닮았다.     나는 특별히 우리나라 아카시아 꽃을 좋아한다. 너무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그 은은한 향은 누구든 그리워하게 하는 마법이 있다.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가끔 몇 종류의 다른 색깔 아카시아 꽃들을 만난다. 그들도 특색이 있고 예쁘기는 하지만 우리네 땅에 있는 그런 향미(香味)와 색조에 비견할 수 있는 경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한번은 몇 해 전에 40번 국도를 타고 오클라호마에서 서쪽으로 텍사스 주 경계를 넘다가 우연히 활짝 핀 한 무더기의 아카시아 군락을 보았다. 이국 땅에서 아카시아 꽃을 만났으니 너무도 반가워 탄성을 지르며 곧바로 다음 출구에서 차를 되돌려 갔다. 그런데 아니었다. 꽃이나 나뭇잎은 아카시아가 분명한데 향기는 다 어디다 숨겨뒀는지…. 아무리 코를 부비며 향기를 찾으려 해도, 글쎄, 꼭 마음 돌린 여인네 같았다. 얼마나 서운하고 허탈했는지 난 온종일 아쉬웠다.   연세가 많이 드신 아버지의 한 지인이 얼마 전에 아카시아 꽃을 좋아하느냐고 물으신다. 몇 해 전에 출간한 내 시집에서 아카시아 꽃을 소재로 한 시를 읽어보신 모양이다. 시 외곽에 있는 자신의 농지에 꿀벌 몇 통을 치고 있는데 그들에게 아카시아 꿀맛을 보게 하고 싶어서 한국에서 아카시아 씨앗을 가져왔단다.     그분도 정성이 참 어지간한 분이시다. 씨앗들이 벌써 잘 발아하고 이미 한두 자 정도씩 자랐는데, 아카시아 꽃 향기를 그리 좋아한다니 원하면 한두 그루를 주시겠단다.     이게 웬 복인지!... 지금 우리 뒤뜰에는 아카시아 두 그루가 아주 임금 대접을 받고 있다. 제발 미국 아카시아 닮지 말고 한국 풍미를 그대로 견지하려무나. 아마도 두세 해가 지난 후 좋은 꽃망울을 터트리면 나는 분명 이런 글을 다시 쓰고 있을 게다, 여기서 근사한 고향을 만들었노라고….   나는 가끔 천국은 어떤 곳일까 상상해 본다. 물론 성서에 천국의 단면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여러 신학자가 회복된 에덴의 아름다운 장면을 소개하면서,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한 곳이라 묘사한다. 죄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 곳이라니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우랴! 그런데 아마 거기에 한국 아카시아 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늘에서도 난 그 꽃의 풍미는 꼭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아카시아를 좋아하는 데는 또 다른 연유가 있다. 구약 성서에 의하면 신께서 인간과 가까이 만나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하셨다. 이 성막의 중심 격인 지성소 내부에는 신이 손수 기록하신 십계의 두 돌 비를 담은 법궤가 있었다. 이 법궤는 싯딤나무(신명기 10:3)로 만든 후 전체를 금으로 입힌 작은 궤였으며, 그 상단은 '쉐키나'라 일컫는 신의 영광이 언제나 현현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법궤의 소재가 되었던 그 싯딤나무가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아카시아 나무란다.     가시가 많아서 누구든 접근하기도 여의치 않고, 나뭇결이 고르지도 못해서 가구용으로도 부적합하고, 곧게 자라지도 않아서 재목으로도 소용이 없고, 그리고 잎이 많아서 유난히 바람을 많이 타는, 꼭 나 마냥 볼품없고, 별반 쓸모도 없고, 모가 많은 싯딤나무를, 하필 소중한 법궤의 소재로 다듬어 쓰도록 하신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정금까지 입혀서.     글쎄,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모두 다가, 아무리 볼 품 없어 보일지라도, 온 우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더없이 소중한 소재들이 될 수 있다는 신의 계시인지….   어디선가 미풍에 실려 온 아카시아 향이 폐부로 스며들고, 살며시 감은 두 눈 사이로 평화가 내리고…. 그래, 천국에도 아카시아 향이 있을 거야. 거긴 우리 모두의 고향이니까. 유진왕 / 수필가문예마당 아카시아 천국 아카시아 씨앗 아카시아 군락 우리나라 아카시아

2025-01-30

[문예마당]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새해를 새 마음으로 시작하기는 애초부터 글렀다.     지난 연말부터 한국에서 들려온 방탄, 탄핵, 비상 계엄 등 무시무시한 말들로 뒤숭숭하더니 급기야 최악의 제주항공 참사로 179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숨졌다.     LA에서는 역대 최악의 산불이 LA 곳곳을 휩쓸며 황폐화시켰다. 한국의 지인이 문자를 보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이래서 아프고 저래서 아프고, 땅도 하늘도 모두 아픕니다.”   나도 댓글을 보냈다. “지금 LA도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고 모두 사는 게 힘듭니다.”     옛말에 ‘복은 겹쳐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 나쁜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초에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희망찬 한 해를 설계하는 게 보통인데 올해는 어쩐지 떠오른 해가 밝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한국은 불신과 반목, 가짜뉴스, 유언비어에 음모론까지 판을 친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을 비롯해서 대행이 많다 보니 ‘대행민국’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다.   연말연시 파티로 즐겁게 북적일 시기에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과 광화문에선 탄핵 찬반 시위로 진영이 둘로 쪼개져 목청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다. 한겨울 맹추위에 철야 농성을 이어 가니 안타깝다. 백골단까지 등장하며 준 내전상태다. 국가 기관끼리 맞부딪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언제 끝날 것인가. 뉴스를 보고 있으면 부글부글 화가 치민다. 행여 무슨 일이 일어날 까 불안하다.   한국의 지인들은 요즘 이념 양극화로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기 싫다고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달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암묵적 규칙이다.     정치 위기는 정치로 풀어야 하는데 정치는 없고 모든 것을 법에 의존한다. 아전인수격으로 법을 따지지만 법은 딱 떨어지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법에 대한 얘기가 있다. “법을 무시하는 난동은 최악이고, ‘법대로 하라’며 따지는 세상도 결코 좋은 세상은 아니다. 예로서 질서를 지키고 악으로써 화합하여 ‘법 없이도 사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다.”   정치도 품격이 있다. 화합과 타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정치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타협의 예술, 타협의 기술이란 뜻이다. 타협은 없고 대결만 있는 지금의 한국 정치에서 곱씹어 봐야할 말이다.   TV가 없던 시절, 아버지는 라디오를 끼고 사셨다. 매시간 뉴스를 경청하셨다. 내가 보기엔 똑같은 뉴스 같은데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내가 그렇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신문을 읽고 낮엔 같은 뉴스를 계속 본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화가 나면서도 보고 또 본다.   그러다 보니 내용을 꿰뚫고 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정치 평론가 수준인데”라고 놀린다. 예전에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정치는 원래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겼다. 요즘은 여자들이 더 정치에 관심이 많다. ‘개딸’이나 ‘태극기 부대’를 보면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다.   원래부터 정치나 뉴스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방문을 자주하게 되고부터 하도 시끄럽게 정치문제가 사회 전체를 삼키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 된 것이다. LA에서도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 뉴스를 접할 수 있어 마찬가지다. 한국 정치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을 정치에 함몰시킨다.   나라의 앞날 걱정에 잠을 설치니 남편은 “신경 꺼”라며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남편은 스트레스 받는다며 아예 한국 뉴스를 외면한다. 초야에 묻힌 선비처럼 집에서 책만 읽고 있다. 요즘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있다. 지금 한국의 모양새가 포용과 보편성은 사라지고 혐오와 독선이 판치는 멸망 직전의 로마제국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일까.   한국인의 정치 관심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이자 높은 시민 의식을 반영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지나친 몰입은 정치적 극단화와 사회 분열을 심화하는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결국 계엄 사태 43일 만에 윤대통령이 체포됐다.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불안감은 일단 해소됐다. 그래서 대통령의 미래는, 한국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어수선한 조국을 바라보며 한국 근무를 마친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떠나며 한 말을 생각한다.     “지금 한국은 매우 어려운 순간이지만 이겨낼 것이다.”     한국은 저력이 있는 나라니까 희망을 가져 본다. 누구의 말 대로 ‘희망은 힘이 세니까’ 그 말을 믿어본다.   정초에 한국이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스러웠다면 LA에서는 역사상 최악의 산불로 비상상태가 선포됐다. 주택 등 1만여 채의 건물이 전소됐고, 수만 명에게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다. LA 인근 지역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산불은 건조한 날씨와 악마의 바람이라는 ‘샌타애나’ 강풍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투명하도록 맑고 파랗던 LA하늘은 온통 잿빛 연기로 뒤덮였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밤중에 ‘삐익 삐익’ 급박한 소리와 함께 대피하라는 경고문자를 세 번이나 받았다. 난감했다. 한국 같으면 염치 불구하고 친척 집이라도 간다지만 캄캄한 밤중에 어디로 대피한단 말인 가. 불안하지만 꼬박 밤을 새며 버텼다.   다음날 또 대피 경고를 받았다. 일단 집을 떠날 때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에 가지고 나갈 물건을 챙기는데 무엇을 챙겨야 할지 몰랐다. 산이 가까운 LA 북쪽에 살면서 대형 산불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당황하기는 매번 마찬가지였다. ID와 신용 카드, 여권과 중요한 서류, 먹는 약만 챙겼다. 가족 사진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단출하게 짐을 챙겨 밖에 나가보니 좀 떨어진 거리가 시커먼 연기 속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바람과 연기가 우리집과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걸 본 후 안심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사방에서 염려하는 전화가 왔다. 특히 한국에서 “괜찮으냐”는 전화가 많이 왔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귀중품이 아니라 힘들 때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의 정이라는 것, 재난속에서 얻은 귀한 깨달음이었다.   나훈아가 부른 노래 중에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정말 세상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혼돈과 슬픔에 빠진 한국 사회와 대형 산불로 큰 피해를 입은 LA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이래 수필 한국 정치 정치 이야기 정치 위기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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