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봄이네
스무 해 전에 헤어진 캐나다 밴쿠버 지인들이 무척 그리워서 큰 마음을 먹고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하더니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갈수록 새록새록 더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도 있다. 오렌지카운티의 요바린다에서 캐나다 밴쿠버까지는 편도로 1300마일, 5번 도로를 따라 곧장 가도 꼬박 이틀 거리의 상당히 먼 길이다. 아직은 완전히 은퇴하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 몇 해가 훌쩍 지나버릴 것 같아서 우린 욕심을 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었으니 낯익은 얼굴들이 그리워 스무 시간 넘는 장거리를 달렸다.
기왕 가는 길에 바람도 쐴 겸 395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애스펜의 가을 단풍이 수려한 비숍을 경유하고, 레이크 타호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단풍이 무르익은 그 아름다운 경관과 고산지대 레이크 타호의 설경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 근사했지만, 사람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새벽같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운 이들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수 없어 노쇠해진 분들,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 타지로 이주한 분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곳에 있었고, 만나는 이들마다 반가워 부여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길게 인사를 나누며, “하나도 안 변했어요. 여전하시네요!” 라며 서로 능청을 떨었다. 웃고 기뻐하는 모습이야말로 정말로 하나도 안 변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왜 그리 어리석게도 바쁘게만 살았는지, 마치 나 없이는 세상이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줄곧 앞만 보고 달렸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그리 살았나 모르겠다. 이젠 가고 싶은 곳에 가보고, 보고 싶은 이들을 만나면서 사람처럼 살아야겠다고 오래된 결심을 다시 꺼냈다.
물론 요즘도 그렇겠지만, 그 시절에 내가 담임하던 교회에서는 목회자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 심신의 고통이 있는 형제들, 연로하신 분들, 특별한 교제가 필요한 분들을 몇몇 교인들과 함께 가정이나 일터로 찾아가 심방하는 관습이 있었다. 교우들의 영육 간의 상태를 세세히 알게 되고, 그들을 격려하며 정을 돈독히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여러 나라에서 일해봤지만 이런 관습은 주로 한국인 교회에만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백인 교회를 담임했을 때 주중 심방을 하겠다고 했더니 신기하다며 의외의 반응이었다. 물론 이내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역시 필요한 이들이 필요할 때 미리 예약하고 목회 사무실로 찾아오는 것이 더 익숙했다. 문화 차이려니 했었는데, 요즘은 한인 교회들도 많이 달라진 듯하다.
내 또래의 J부부가 유난히 반가웠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표정과 태도는 너무도 낯익었다. 자녀들은 의젓하게 성장해 각자의 둥지를 틀고 열심히 살고 있다니 고맙고 기쁜 일이다. 이민 생활에서 자녀를 잘 키워낸 것만으로도 축하해주고 싶은 대단한 성공이다.
그곳에서 일할 때 J부부는 힘든 객지 생활 기반을 다지느라 애쓰는 전형적인 이민 1세대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 자녀가 있었고, 부부는 도시 외곽의 사무실 밀집지역에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IMF 사태가 막 터졌을 때였고, 세계 경제 역시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캐나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기가 어려우면 손님이 줄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오는 손님마저 저렴한 메뉴를 선택하고, 그러면 매상이 더 내려갔다. 몸과 마음이 지치게 되고 신앙적인 열의마저도 시험에 들게 되는 원치 않는 악순환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북돋우고 싶어 그들의 일터를 자주 찾고 함께 하늘의 도우심을 간구하곤 했었다.
한참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J부부가 정색을 하며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단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옛 이야기를 꺼낸다. “그때 음식을 더 찾으셨는데 다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하고, 더 드리지 못했던 것이 지금껏 마음에 걸려서 언젠가 꼭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사실 그 음식은 차마 더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장사가 잘 안 되는 어려운 시절에 가계에 들렸으니 나부터라도 음식을 좀 팔아주고 싶었다. 무슨 음식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음식이 아주 맛있다며 더 청했단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데, 먹으러 안 오는 이들은 막심한 손해를 보는 것이며, 주인장은 내가 인증하는 음식 솜씨로 조만간 분명히 어려운 시기를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거였겠지….
그런데 그 음식이 다 떨어졌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나를 그냥 일어나게 하였단다. 아주 고약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그 어려운 시절에 손님은 자꾸 줄고 너무도 어려워서, 아주 감칠맛 나는 조미료를 많이 넣고 조리했었는데, 음식 맛 모르는 담임 목사가 맛있다며 더 청하는데 도저히 더는 줄 수 없었다고, 그래서 음식이 떨어졌다며 둘러댔고, 그때의 일이 몇 십 년이 지나도록 가슴에 걸렸단다.
참 잘한 일이네, 무슨 미안해하고 그걸 사과를 해. 사랑스러운 내 친구들. 우리는 부둥켜 안고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함께 웃어댔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세월을 막을 수야 없겠지만, 그들은 이제 은퇴하고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큰 아이 이름이 ‘봄’이다. 앞으로 저들의 삶이 허락된 날까지 내내 아름다운 봄이기를 바라고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하늘에 빈다. 하늘이 이런 기도는 잘 들어주셔야 한다.
유진왕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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