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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지킴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이런 거창한 말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는 누구나 안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져버리게 마련이다.   우리 미주 한인 사회도 이민 연륜이 길어지면서, 정리하고 기록해야 할 역사가 쌓였다. 많은 주요 단체들이 반세기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지만, 역사로 제대로 정리되고 기록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시절을 빛냈던 주인공들은 세상을 떠나고, 기억은 가물가물해지고, 자료들은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급하다.   그런데 사명감을 가지고 역사를 갈무리하고 기록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알기로는, 남가주에서는 한인역사박물관의 민병용 관장, UC리버사이드 교수이며 김영옥연구소 소장인 장태한 교수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민병용 관장의 역작 '대한인국민회 100년사'가 발간되었다.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대한인국민회가 어떤 곳인가? 미주 땅에 독립운동의 씨를 뿌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과 숨결이 배어 있는 미주 최고의 독립운동기관, 3·1운동 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미주의 임시정부임을 선언하고 미국과 멕시코, 쿠바 동포들의 독립운동 총본부 역할을 감당한 곳,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계속 후원해온 곳, 독립운동에 앞장선 언론 '신한민보'를 발행한 곳…. 그야말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곳이 아닌가. 그 100년의 역사가 이제야 한 권으로 책으로 발간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이민역사 자료를 전시해 놓은 유일한 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가볼 곳이 거기밖에 없다.   지난 2003년에는 건물 복원공사 중 천장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던 다량의 독립운동 자료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귀한 자료들은 USC에서 디지털화해서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고, 원본은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대여 조건으로 보관되어 있다. 미주에 한인역사박물관이 세워지면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민병용 관장이 2년여의 집필 기간을 거쳐 완성한 100년사 책에는 대한인국민회와 기념재단의 역사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의 역사 등 다양하고 폭넓은 내용이 풍부한 사진 자료와 함께 실려 있다.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학생들에게 이민사와 독립운동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는 참고서가 되도록 교육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 편집했다는 설명이다.   저자 민병용 관장은 1976년 신문기자로 독립운동가를 인터뷰하면서 한인 미주이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초기 이민의 현장인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중가주, 멕시코 등 현지를 발로 뛰어 취재하며 많은 기사를 썼다. 첫 책인 '미주이민 100년, 초기 이민을 캐다' 이후 지금까지 48년 동안 18권의 역사서를 집필, 발간했다. '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애국지사의 꿈' 같은 독립운동사를 비롯하여, 미주 지역 주요 한인 단체의 역사,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주한인의 기본 자료인 '한인인명록' 등 내용도 다양하다.   민 관장이 집필한 미주한인 100년사, 동양선교교회 30년사, 남가주한국학원 40년사, 민주평통 LA 30년사, LA한인회 50년사(전자책으로 발간 예정) 등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을 ‘한인역사 세일즈맨’이라 칭하며, 22년째 LA한인역사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고, 2002년부터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로 봉사하고 있다.   한 지식인이 어려운 여건에서 이민사회의 역사를 발굴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쓰는 일에 반세기를 바쳤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그런 힘든 일을 해내면서 늘 ‘행복하고 감사하다’며 밝게 웃는 민 관장에게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지킴이 역사 이민역사 자료 미주지역 독립운동 한인 미주이민

2024-08-22

빼앗긴 조국, 타국에서 피땀흘렸던 그들의 기록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빼앗긴 들에도 결국 봄은 찾아왔고, 7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날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 땀, 눈물이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제의 핍박을 고스란히 느끼며 앞장서 싸웠다면, 그 뒤에는 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한인들이 있었다. 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염원만큼은 더없이 간절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미주의 한인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미주의 독립투사들. 오늘은 그들의 행적을 조명하고자 한다.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 뉴욕한인교회 맨해튼 115스트리트에는 당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미주 한인들의 염원이 가득 담긴 공간이 있다. 바로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로 사용됐던 뉴욕한인교회다. 1921년 3월 2일 맨해튼 웨스트 43스트리트에 위치한 타운홀에서 서재필 박사를 필두로 열린 3·1독립만세운동 대회 개최를 계기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될 뉴욕한인교회가 탄생했다. 뉴욕은 미주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인들이 많지 않았지만, 국제사회에 한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주요 도시였기에 이승만·서재필·안창호 등 뉴욕한인교회의 문턱을 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라를 잃고 해외살이를 하는 동포들은 이곳에 모여 서로의 향수를 달래고 독립정신을 북돋아주며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살구 농장에서 생긴 일   1910년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시작한 일본은 해외에 사는 한인들까지도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 야심은 1913년 6월 뉴욕의 살구농장에서 드러났다. 당시 살구 따는 일을 하러 갔던 100여명의 한인들은 그곳에서 주민들의 배척을 받았다. 당시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배일사상(일본인 배척 사상)이 팽배했는데,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착각해서 생긴 불상사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영사는 한인들을 찾아가 미국정부와 교섭해 배상금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한인들은 분노하며 해외 한인들까지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에 통보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당시 유일한 해외 한인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일본의 음모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항의했고, 이에 국무부는 “한인은 일인이 아니며, 이제부터 재미한인과 관련된 일은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 대한인국민회와 직접 교섭할 것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 사회에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뉴욕에서는 ▶18명의 한인들이 규합해 결성된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신한회’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안창호의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 뉴욕지부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등의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독립 염원을 외치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는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 박사는 “3·1운동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미주의 한인들도 전세계에 독립 염원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14일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한인들은 서재필 박사의 주도하에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해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를 폭로하고, 한인의 자유 독립 의지를 담은 결의문과 호소문을 미국 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뉴욕에서는 매년 3·1운동 기념식을 진행했는데, 1921년 3월 2일 맨해튼 타운홀에서 개최된 제2주년 기념식에는 100여명의 한인들과 1200여명의 친한파 미국인들이 비를 뚫고 참석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과시했다.         ━   1945년 8월 15일, 뉴욕에 울려퍼진 뜨거운 함성     피 같은 돈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3·1운동 후 10년간 18만불 전달   조국 독립 위해 미군 자원하기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들의 모금 운동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과 유럽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추진했다.     나라를 뺏기고 타지에서 생활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같은 돈을 내놨다. 기록에 따르면 미주 한인들은 3·1운동 이후 10년 동안 약 18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바쳤다. 10년 넘게 뉴욕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아온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전 담임목사는 “당시 뉴욕 한인들의 유일한 소원은 조국에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동해서 번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고 전했다.     ◆이승만의 뉴욕 도착   1932년 3월호 〈Korean Student Bulletin〉(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조직된 북미유학생총회가 미국에서 발간한 영문잡지) 1면에는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컬럼비아대학에서 뉴욕 한인들과 찍은 사진이 실렸다. 이승만이 뉴욕에 온 것은 미국 NBC방송의 초청을 받아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라디오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연설에 대한 소식이 보도되자 이승만은 위협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당시 뉴욕시경(NYPD) 커미셔너가 이승만의 신변을 염려한 나머지 형사 2명을 파견해 이승만을 보호할 정도였다. 2분 남짓한 연설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 자행해 온 갖가지 불법행위를 밝혔다. 〈K.S.B〉는 “연설이 끝나자마자 미 전역으로부터 방송국으로 온 축하편지가 홍수를 이룰 만큼 쇄도했다”고 보도했다. 이후에도 이 박사는 뉴욕에 머물며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규약 16조에 있는 대로 경제적인 보이콧을 할 것”을 역설했다.    ◆실낱같은 희망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주 한인들은 처음으로 독립에 대한 가능성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자 한인들은 1942년 2월 워싱턴에서 ‘한인자유궐기대회’를 열고 미국 정부가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과, 유엔가입을 도와줄 것 등 5개항이 담긴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은 이때 연설을 통해 “일본이 미국의 적인 이상 한인들이 미국을 도와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미주의 한인들은 이미 이전에 미국을 지원하는 뜻으로 6만 달러에 달하는 방위채권을 샀다. 젊은 한인들은 자원해서 미군에 지원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는 총 110명으로 구성된 한국인 예비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동단결한 여성들   정치 문제는 남성에게 일임하는 것이 상례였던 시대였지만, 뉴욕의 여성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과감히 나섰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뉴욕의 여성들은 ‘미주동부대한부인회’를 창설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주말마다 한복을 입고 뉴욕의 중심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모금운동을 했고, 그 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후원하기도 하고, 뉴욕 지역에서 미군으로 출전한 한국 청년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날   1945년 8월 15일, 뉴욕에서도 뜨거운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뉴욕한인교회 60년사에는 “마침내 그날이 오자 뉴욕시는 사방에서 울리는 종소리로 종일 요란했다”고 기록돼 있다. 평화의 날이 왔음을 고하는 우렁찬 승리의 노래는 뉴욕 시민들의 고막을 울렸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광복절 79주년을 맞아 뉴욕중앙일보는 1920~1950년대 뉴욕한인교회 교인명부를 통해서 동부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피땀 흘렸던 이들의 이야기를 뉴욕한인교회 60·70년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가나다 순)     김경(상해임시정부에 재정 보조)     김도연(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YMCA에 모여 독립선언 논의)   김마리아(뉴욕에서 한인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조직. 악랄한 일본 식민정책 미국에 알림)     김준성(뉴욕한인교회 목사로 일하며 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후원에 큰 역할)     김헌식(1905년 을사조약 이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운동)   김형린(뉴욕 조국광복사업추진회 회장)     박용만(한인 대표해 뉴욕 소약국동맹회의 참석한 독립운동가)   박인덕(1919년 3·1운동시 학생들 선동. 미국 돌며 3·1운동 관련 강연)   배민수(‘국민회’라는 단체 만들어 독립운동하다가 체포)   신성구(1910년대 김헌식과 함께 독립운동)     송종익(도산 안창호와 가까운 관계로 독립운동 물질적으로 협조)     윤병구(이승만과 뉴욕 오이스터베이 별장에서 휴양 중이던 루스벨트대통령 찾아가 청원서 제출)     윤헬렌(1921년 뉴욕 타운홀대회 참가해 외국인들에게 한국 실정 전달)     이봉수(1919년 만주에서 독립운동)   이병두(서재필 박사 도와 미주의 학생운동, 독립운동 주도)     이승만(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이원익(1919년 상해임시정부 요원)     임창영(뉴욕 한인들을 규합해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항의 시위)     임초(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서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결의안을 작성한 3인 중 하나. 뉴욕 흥사단의 주요 인물)   정애경(3·1운동 당시 한국에서 독립운동 하다가 상해로 탈출. 뉴욕한인교회 부인회 회장)     조병옥(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와 투옥. 흥사단 주요 인물)   한승인(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조병옥과 투옥.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한인학살 모면 후 일본의 만행 폭로)   허정(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보좌)     천세헌(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많은 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   윤지혜 기자기록 타국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미주 독립운동

2024-08-14

[오늘 105주년 삼일절] 꽃길에서 만난 자유 뺏긴 두 민족

중가주 프레즈노에는 ‘블로솜 트레일(Blossom Trail)’로 불리는 유명한 꽃길이 있다. 매년 3월이면 이 길을 걷기 위해 많은 이들이 시모니안 농장(Simonian Farms)으로 몰려든다.   아름다운 꽃길 이면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미주 한인들의 나라 잃은 슬픔과 일본계 미국인들의 배척당한 이야기가 함께 배어있는 곳이 바로 프레즈노다.   꽃길 너머 시모니안 농장 귀퉁이에는 25피트 높이의 목조탑이 있다. 전면에는 한문으로 ‘위령탑(慰靈塔)’이라고 적혀있다.     탑은 1943년 3월 강제 이주조치로 애리조나 수용소로 보내진 이 지역 일본계 미국인 농부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5년 세웠다. 탑 안내문에는 시모니안 일가가 이들로부터 농업 기술은 물론이고 근면, 성실의 가치를 배웠다고 쓰여있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계 미국인들은 1900년대 초 가주 채소 생산량의 약 40%에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 농장의 가격은 일반 농장의 거의 7배에 달했을 정도로 그들의 능력과 노력은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7일) 이후 일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해지자 당시 가주 채소 재배 협회 측은 곧바로 일본계를 서부 지역에서 추방하는 데 앞장선다. 가주의 농업 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일본계 농장주들을 전쟁을 빌미로 배제 또는 도태시키려는 속셈이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수용소로 강제 이주된 일본인들은 전국에서 12만명에 달했다.   시모니안 농장의 위령탑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20마일 떨어진 리들리 지역에는 미주 지역 한국 독립운동사의 상징이 세워져 있다. 14피트 높이의 독립문이다. 그 옆으로 안창호, 이승만 등 애국지사 10인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한국 국가보훈부 등이 리들리시와 함께 22만 달러를 들여 세웠다.   1905년부터 한인들이 모여든 리들리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계약 기간이 끝난 상당수의 한인이 본토로 와서 가장 먼저 정착했던 곳이다. 당시 약 500여 명의 한인이 이곳 농장 등에서 일하며 자연스레 한인 사회가 형성됐고, 이후 미주 지역 항일운동의 근원지가 됐다.   삼일 운동 전후 2년 간(1918-1919) 리들리 지역 한인들이 한국으로 보낸 독립운동 자금은 1만3835달러였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0만 달러(연방 노동부 자료 참고)가 넘는 돈이다. 농장 노동자 등으로 힘겹게 일하며 일당을 쪼개고 또 쪼개서 모은 돈임을 감안하면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독립문 인근 다뉴바 한인교회당 터를 가면 당시 독립 자금 기부자 명단이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당시 다뉴바 한인교회 앞은 삼일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미주 한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펼쳤던 곳이다. 이후 이 교회 앞에서는 매해 삼일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1937년에는 리들리를 비롯한 중가주의 팔리어, 생거, 델라노, 다뉴바 등 5개 지역 한인들이 연합으로 삼일절을 기념하며 시가행진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리들리의 한인과 시모니안 농장 지역 일본인간의 마찰이나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두 민족 간의 어떠한 교류가 있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단, 공통점은 있다. 두 민족 모두 한 맺힌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일본계 미국인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로 수용소에 갇혀 배척을 당해야 했다. 결은 다르지만 한인들은 조국을 빼앗겨 애통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LA한인회를 비롯한 한인 단체들은 오늘(1일) 이곳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연다.   매년 봄이면 꽃구경을 하려는 한인들이 프레즈노를 즐겨 찾는다. 요세미티나 세코이아 국립공원 가는 길에 들르는 지역이기도 하다. 꽃길만 걷다오기에는 지난 역사가 아프다. 김인호 여행작가·장열 기자삼일절 105주년 삼일절 3.1절 리들리 한인 로스앤젤레스 LA 미주중앙일보 장열 일본계 시모니안 농장 프레즈노 일본인 수용소 독립운동 다뉴바 LA한인회 블로솜 트레일 김인호 여행작가

2024-02-29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담은 LA 특별전

미국의 대한민국 독립운동 사적지를 포함해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특별 전시회가 열린다.     LA한국문화원(원장 정상원)은 국가보훈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관장 김희곤)과 공동주최로 오는 29일부터 4월 12일까지 문화원에서 ‘3.1절 105주년 기념 LA특별전: 민주공화정의 시작,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정상원 문화원장은 “LA지역은 일제 강점기 때 북미지역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인 거점지역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활동했던 역사적 장소와 기념물 등이 상당수 남아 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한인 2세, 3세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특별전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의 상설전시를 집약한 대표 유물 23점을 통해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을 담았다.     전시 구성은 총 4부로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의 임시정부 역사를 영상과 그래픽, 모형 등으로 소개한다.     프롤로그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에서는 1919년 전 세계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전개와 외신 보도를 그래픽으로 보여준다.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습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소개한다.     1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정부 지도 체제가 변모하는 과정을 개헌과 함께 소개한다. 외교 부분에서는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과정도 담겨 있다.     또한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통해 독립전쟁을 펼치고 1940년 한국광복군이 성립되는 과정을 다양한 그래픽으로 알기 쉽게 소개했다.     2부 ‘가자 조국으로’는 1945년 광복된 후에 중국과 미국에서 활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조국으로 향하는 과정과 국민의 환호를 받았던 전국환영대회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3부 ‘대한민국 정부, 임시정부를 계승하다’에서는 임시정부에서 수립한 헌법 정신과 사람들, 국경일과 기념일을 비롯해 상징물이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4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하다’에서는 미국에서 볼 수 있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사적지를 지도와 사진으로 소개해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짚어본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은 “2022년 3월 1일에 독립운동의 가치와 보훈 문화 확산을 위해 설립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2년 만에 미주 지역에서 전시를 추진해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개막식은 오는 29일 오후 4시 LA한국문화원에서 개최된다. 이날 김희곤 관장도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     ▶주소:5505 Wilshire Blvd. LA   ▶문의:(323)936-3014 이은영 기자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가보훈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독립운동

2024-02-25

[사설] 총영사관의 옹색한 불참석 이유

=LA한인회가 올해 3.1절 기념행사를 중가주의 리들리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광복회 미서남부지회,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흥사단, 도산안창호기념재단,미주3.1여성동지회,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 6곳과 함께 한다. 누구나 참석이 가능하고 편의를 위해 버스로 함께 이동하게 된다.     LA에서 북쪽으로 200마일 가량 거리의 리들리는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민 선조들이 하와이를 거쳐 본토 정착을 시작한 곳이자,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사업가로 성공해 막대한 금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김호, 김형순, 김용중 선생 등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특히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한 이곳 한인들은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대한독립을 외치며 가두행진을 벌여 한인들의 독립 의지를 미국인들에 알렸다.     LA한인회가 이런 역사적인 곳에서 3.1절 105주년 기념행사를 갖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다. 지역적 울타리를 벗어나 한인 사회 대표 단체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욕이 엿보인다.     이에 반해 공관들의 소극적인 반응은 의외다. LA총영사관 측은 리들리가 관할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할인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행사 참석과 초청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석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는 옹색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매년 3.1절을 기념하는 것은 선조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이를 차세대에게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판에 박힌 형식의 기념식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LA한인회의 이번 기획은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런 노력은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공관들이 먼저 기획하고 추진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국가 정책의 효율적 시행을 위해서라면 없는 방법도 찾아야 하는 것이 공직자들의 책무다.    사설 총영사관 불참석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한인 독립운동 불참석 이유

2024-02-14

여성 독립유공자 652명 중 55명이 미주서 활동

‘사진신부’로 대표되는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 생활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미국 전역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2023년 8월 기준 여성 독립유공자 총 652명 중 미주 지역에서만 55명이 포함됐다. 〈19면 표 참조〉   이들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여러 활동에 동참했던 수많은 1세대 여성을 대표한다. 당시 모든 한인 여성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미국에서 자녀의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LA, 필라델피아 등 미 전역에서 여성단체를 만들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순간까지 조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광복 후에도 조국이 어려울 때마다 구호품 지원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들은 남편의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미주 각 지역에서 부인회를 결성하고, 연합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해 여성 주도 독립운동 체계를 구축했다.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피땀어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귀한 돈을 40년 넘도록 독립자금으로 보탰다. 한인 차세대 정체성 함양을 위한 뿌리교육의 기틀도 120년 전부터 다졌다. 한인 1세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 주요 독립유공자를 짚어봤다.   ※자료: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애국지사의 꿈 민병용 저     ━   3불씩 모아 4만6천불 독립자금 지원      ■강(김)혜원(1885.11~1982.5)   2020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강혜원 선생은 평남 평양 사람이다. 1905년 5월 남동생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등 가족과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한 한인 이민선조 1세대다.   1912년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김성권(후일 흥사단 이사장)과 결혼했다.   이후 강혜원 선생은 중가주 다뉴바로 이주했다. 이곳 포도농장에서 일하던 강 선생은 올케 강원신을 비롯,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1919년 3월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했다. 같은 해 8월 2일 새크라멘토, LA,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 부인회 대표들과 여성단체 통합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립했다.     초대 총단장 겸 총부 위원으로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단원들은 매달 3달러 단비를 임시정부에 송금, 임시정부와 민족운동단체에 총 4만6298달러를 후원했다.     1930년 LA로 이주해 대한여자애국단, 흥사단, 대한인국민회를 후원, 한인 자녀 민족교육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강 선생의 가족 5명 또한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에 앞장서     ■심영신(1882.07~1975.02)   2021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심영신 선생은 황해도 송화 사람이다. 이민선조 1세대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심 선생은 1913년 4월 19일 하와이에서 황마리아 등과 함께 여성운동단체인 대한인부인회(大韓人婦人會)를 결성했다. 2세 자녀 한국어교육 장려, 일제용품 구매 거부운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 구제를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운동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심 선생은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대표자를 소집해 부녀공동대회를 개최 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했다.     심 선생은 1920년대 말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재정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하와이 한인 동포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모금에 나섰다. 1941년 4월에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했다. 임시정부 후원과 대미외교 및 선전사업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필라 회의서 식민통치 부당성 고발     ■김노디(1898.10~1972.05)   김노디 선생은 황해도 곡산 사람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노동자였던 부모 헌신으로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에 입학했다.     재학생이던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대표자회의(First Korean Congress)’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김 선생은 한국 여성들이 일제 식민 통치하에 겪는 고난,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해 연설했다.     1919년 10월부터는 매주 1~2차례 또는 3~4차례 미국 각지를 돌았고, 미국사회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일제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고발했다.   김 선생은 1921년 3월 1일 오벌린대학 3·1독립선언 축하 연설, 6월 1일 오벌린 한인구제회 지회를 조직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923~1935년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여학생 감독, 1930년 9월부터 교감, 1935년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926~1945년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자금 모금 및 독립자금 납부에 앞장섰다. 해방 후에는 한국으로 들어가 1953년 11월 24일 외자구매처장에 임명됐고, 1955년 8월까지 재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 회복운동 주도       ■이(안)혜련(1884.04~1969.04)   평안남도 강서 사람인 이혜련 선생은 1902년 9월 3일 도산 안창호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도산과 미국에 이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을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해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했다. 공립협회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창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 됐다.     이 선생은 도산의 독립운동을 전폭 지원했고, 대한인국민회를 위한 ‘의연금, 국민의무금, 특별의연금’ 등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으로 도산이 중국으로 떠난 뒤, 이 선생은 LA에서 ‘부인친애회’를 조직해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했다. 1919년 5월 18일 중가주 다뉴바에서 열린 부인회 통합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당시 LA대표로 참석했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순국 후에도 여자애국단을 통한 항일전에 매진했다. 해방 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LA한인사회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08년 건군훈장 애족장 추서.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주도적 역할      ━   서재필 워싱턴 회의 참가경비 모금       ■한성선(1864.04~미상)   한성선 선생은 1919~1945년 중가주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위원·총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강원신, 강혜원 등과 한인부녀자회를 이끌고 한인 자녀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1919년 11월 중가주리들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 행사 준비위원으로 선정됐고, 워싱턴회의에 참여할 서재필의 경비를 모금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송금했다. 1921년 11월 25일 다뉴바에서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했다. 이후 딜라노로 이주한 뒤1931~1932년 3·1절 기념식 참여 등 1918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한인 자녀 민족교육 실시에 매진     ■박(강)원신(1887~1977.02)   박원신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사람이다. 1904년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과 결혼 뒤, 1905년 5월 남편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농장 일을 하다 시누이 강혜원과 중가주 다뉴마로 이주해 시간당 15센트 노임을 받고 남편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동시에 강혜원과 여성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신한부인회를 결성해 회장에 선출됐다. 같은 해 미주 내 부인회를 통합한 대한여자애국단 창설에 나서 제3대 총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미주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민족독립운동, 한인 자녀 대상 민족교육, 일본상품 불매운동에도 앞장섰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 독려       ■양제현(1892~1959.06)   양제현 선생은 1917, 1919년 새크라멘토부인회 회장, 1929~1930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1925년, 1928년, 1941~1942년,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 1931~1932년, 1934~1938년, 1940년, 1942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양 선생은 1917~1945년까지 독립자금 모금 등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3·1절 기념식에서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으로 독립군을 따라 생을 마칠 것을 연설했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차세대 교육 위해 학교 시설 건립     ■임메불(1884.07~1987.12)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임메불 선생은 1909년부터 1945년까지 LA에서 부인친애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 LA여자청년회구제원,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 구제위원,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1942~1945년)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서고 활동을 지원했다.     임 선생은 1929년 12월~1930년 1월 한인 자녀 국어교육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 준비 기성위원으로도 참여했다. 1930년 3월 여자애국단 LA지부단장 때는 조선여자대학 설립 건축비 모금운동도 벌였다.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도 지원했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대한부인회 조직해 동포 구제       ■황마리아(1865~1937.08)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황마리아 선생은 ‘자녀 교육’을 위해 1905년 5월 장남 강영승, 강영승의 처 강원신, 차남 강영옥, 장녀 강혜원을 데리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했다.     황 선생은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한인 자녀 국어교육에 앞장섰다. 일본상품 배척, 동포 구제를 목적으로 한 대한부인회도 조직했다. 1914년 부인회 재무로 서간도 재난동포에게 구제금 300달러를 송금하는 등 6년간 한국과 중국 재난동포 구제사업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인회를 독립운동자금 모금, 재난동포 구제를 위한 대한부인구제회로 통합했다. 1930년부터 1937년 별세 때까지 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 김구에게 군자금 100달러 지원, 한인협회 조직, 한인교회 사업 등에 헌신했다.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신문 통해 독립사상 고취 전력       ■차(임)인재(1895.04~1971.04)   차인재 선생은 1920년 6월 경기도 수원군수원면삼일학교 교사로 근무 중 박선태 등이 조직한 구국민단에 참여해 ‘독립신문과 대한민보’ 등 독립사상에 관한 기사 배포 활동을 했다.   1920년 미국 이민 후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원으로 한인 자녀 국어교실도 운영했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부단장, 1936년 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했다. 1941~1945년 사이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와 여자애국단 LA지부 회장으로 활동했다.   차 선생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한국광복군에 후원금 지원       ■전그레이스(1882.06~1948.07)     전그레이스 선생은 1914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활동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 기간 독립금, 조선여자대학 설립 기부금, 군자금 등의 명목으로 30차례 이상 독립자금을 냈다.     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부인회 활동, 대한여자애국단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 지원을 독려했다. 1934년 LA로 이주 후 이듬해 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이 됐다. 1940년 딜라노로 이주한 뒤에는 현지 지부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광복군 후원금 모금에 앞장섰다.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기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5등급으로 1등급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 Republic of Korea Medal), 2등급 대통령장(大統領章, Presidential Medal), 3등급 독립장(獨立章, Independence Medal), 4등급 애국장(愛國章, Patriotic Medal), 5등급 애족장(愛族章, National Medal)이다.   김형재 기자독립유공자 여성 후일 대한인국민회 조국 독립운동 독립자금 지원

2023-09-21

하와이 독립 유적지 한·영 안내서 발간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배우 송혜교와 함께 미국 하와이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소개하는 안내서를 온오프라인으로 발간할 예정이라고 14일 밝혔다.   서 교수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해외에 남아 있는 우리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지켜나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꾸준한 방문"이라며 이렇게 전했다.   지난 주 하와이에 출장길에 오른 그는 호놀룰루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회 총회관 터, 대한인동지회관, 오아후 공동묘지 등을 방문해 자료 조사와 사진 촬영 등을 하고 있다. 한국어 및 영어 버전으로 제작될 하와이 독립운동 유적지 안내서는 올해 상반기 중에 발간될 예정이다.   서 교수는 "송혜교와 함께 세계 대한민국 독립운동 유적지에 꾸준히 기증해온 안내서를 잘 활용했다는 메시지를 많이 받는다"며 "기분 좋은 일이며 성과가 점차 나타나는 것 같아 힘이 날 따름"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와 송혜교는 2012년부터 역사적인 기념일에 맞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 33곳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부조 작품 등을 기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서 교수는 기획을, 송혜교는 후원을 맡았다.하와이 유적지 독립운동 유적지 하와이 독립운동 안내서 발간

2023-04-17

[사설] ‘흥사단 단소’ 운영 계획 세워야

한국 국가보훈처는 LA한인타운 인근에 있는 LA 흥사단 옛 본부건물(단소) 매입 계약을 체결했다고  지난 2일 밝혔다. 이어 국가보훈처는 매입 절차가 끝나는 대로 재단장 공사를 시작해 2년 후인 2025년 광복절에 개관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로써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정신이 깃든 LA 흥사단 단소 건물은 철거 위기를 벗어나 중요한 사적지로 남게 됐다. 이는 한인 관련 단체들의 보존 노력과 한국 정부의 결단이 만들어낸 성과다. 아울러 이민 선조들의 독립운동 활동도 제대로 평가를 받는 듯해 뿌듯하다.     이 단소는 흥사단이 일제 강점기인 1932년 매입해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을 했던 장소다. 이민 선조들의 모국 사랑과 뿌리 교육의 열정이 담겨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동안 무관심으로 방치됐었고 그 사이 소유권을 확보한 개발업체가 철거 후 재개발을 추진했다. 다행히 본지 보도로 긴박한 상황이 알려지면서 관련 단체들이 ‘단소 지키기’ 에 나섰고 의미 있는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단소를 역사와 문화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운영 계획을 밝혔다. 아울러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알리는 거점 역할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우선 역사적 자료의 확보 문제다. 재개관하는 단소가 목적에 맞게 운영되려면 관련 사료의 전시가 필수다. 따라서 어떤 사료들을 어떻게 모으고 전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운영비용 확보도 중요하다. 단소가 재오픈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각종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더구나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별도의 기금도 필요하다. 이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있어야 한다. 물론 한국 정부의 지원이 있겠지만 그것만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관련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머리를 맞대야 할 일이다.사설 흥사단 단소 la 흥사단 독립운동 역사 한국 국가보훈처

2023-02-08

고국 그리며 지원한 독립운동이 이민사 뿌리

한국 독립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미주 지역에 지정된 한인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는 하와이, 쿠바를 포함해 92곳이다. 이중 캘리포니아주는 북가주와 남가주로 나뉜다. 북가주에는 초창기 한인들이 모여 활동하던 샌프란시스코, 다뉴바와리들리를 중점으로 몰려 있으며, 남가주에는 한인타운을 형성한 LA와 리버사이드에 있다.     ▶북가주   2006년 발행된 독립기념관 매거진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1905년 4월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공립회관 자리,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의거지인 페어몬트 호텔, 페리 부두,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의 공동체였던 상향한인감리교회,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장을 역임한 이대위가 묻혀 있는 사이프리스 공동묘지가 유적지로 꼽힌다. 그러나 현재 한인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고 있는 유적지는 한 곳도 없다.     상항한인감리교회의 경우 현재 중국 절이 운영 중이다. 한인이 운영하는 한인역사박물관이 있으나 유적지는 아니라 커뮤니티의 관심이 덜한 편이다.     ▶남가주   남가주의 경우 남아있는 유적지도 있고 보존 운동도 활발하다. 지난해 한인사회에 유적지 보존 운동이 일어난 LA흥사단 옛 건물이 좋은 예다.     지난해 흥사단 옛 단소 건물(3421-3423 S. Catalina Street)이 헐리고 재개발된다는 소식이 나온 후 LA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등이 나서서 사적지 지정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LA시 문화사적위원회도 한인 커뮤니티의 요청에 수차례 공청회를 열고 커뮤니티 의견을 수렴했으나 아직 사적지 지정 여부는 결정하지 않았다.   현재 가장 보존이 잘 돼 있는 곳은 도산 안창호의 가족이 살던 주택이다. 이 집은 1937년부터 46년까지 도산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부인 이혜련 여사와 자녀(안필립, 안수산, 안수라, 안필영)들이 살며 당시 한인사회의 커뮤니티 구심점이 된 곳이다.   1920년대 지어진 이 가옥은 미국의 전형적인 정사각형 단독 주택으로, 원래는 USC 주차장이 위치한 37가에 있었으나 이 지역에 재개발이 진행되자 USC는 지반을 통째로 떼어내 캠퍼스 안으로 이전시켰다.     2004년 도산 가옥을 옮긴 USC는 이후 동문과 한인 커뮤니티의 도움으로 10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도산 가옥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해왔으며 2009년부터 이곳을 한국학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 사옥은 2014년 LA시 사적지로 지정됐다.   사적지 보전이 잘 돼 있는 또 다른 곳으로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을 꼽을 수 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성립된 해외 한인 독립운동 최고기관이다.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1번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로 꼽히는 만큼 관련 자료도 굉장히 방대하다.     제퍼슨 가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총회관은1938년 신축된 건물이다. 지난 2003년 처음으로 복원 공사를 한 후 20년 만인 지난해 말 재단장하고 한국어와 영어로 자동으로 미주 한인사와독립사를 보여주는 최첨단 전시 시설을 설치해 한인 2~3세들의 역사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03년 첫 복원 공사를 진행한 대한인국민회는 당시 미주 한인 독립사와 이민사 관련 각종 자료와 유물을 천장에서 발견한 바 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2004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 발족했으며 이후 재단이 자료 및 전시관 관리와 운영을 맡고 있다. 당시 발견된 자료는 대한인국민회가 성립되기 전인 1900년대 초반부터 해방 이후까지 생산된 문서들로 문건류 6300여점, 도서 및 각종 물품 400여점이다. 이 가운데에는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 저격 사건에 따른 변호사 비용 모금 내용 공립신문, 신한민보 원본 및 축쇄본 1930, 40년대 국민회 각 지방 공문 등이 포함돼 있다. 기념재단은 발견된 자료를 USC에서 디지털 작업을 한 후 한국 독립기념관에 관리 및 보존을 위해 이관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옆에 있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도 역사적인 곳이다. 1938년 신축된 이 건물은 미주 한인 기독교사를 보여주는 유적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최근 새롭게 유적지로 등장한 곳은 한인사회의 첫 타운으로 평가받고 있는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다. 파차파 캠프는 도산 선생과 한인 초기 이민자들이 세운 첫 코리아타운으로 대부분 농업 노동자들인 이들이 1905년부터 1913년까지 일궜던 커뮤니티다. 당시 지역 신문 등에 소개된 기록에 따르면 도산 선생은 공산주의자로 누명을 쓰고 추방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한인들과 살았다.   총 300여 명의 남성과 여성, 아이들이 살았지만 1913년 남가주에 들이닥친 한파로 오렌지 농사가 망하자 한인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파차파 캠프도 사라졌다.     파차파 캠프는 2012년 당시 UCR 한인 학생들이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인 임시 거주지’라고 적힌 오래된 지도를 시작으로 지역사회와 한인사회에 남겨진 기록을 파헤치고 연구한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장 교수는 “중가주의 다뉴바, 리들리, 윌로우로부터 이주해온 한인들의 중심지로 이후 한인 이민 선조들에게 마음의 고향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서 “또한 국민회의 중요 회의가 개최됐던 중심지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장연화 기자신년특집 사적지 미주 상향한인감리교회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 한인 독립운동

2023-01-01

[발언대] 허술한 독립운동 서훈 심사

안중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었던 담대하고 흔들림이 없는 청년의 의기는 지금도 퍼렇게 가슴에서 엉긴다. 그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저려오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 하지만 사람들은 뤼순감옥에서 돌아가신 안중근 의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와 함께 거사를 꾀했던 우덕순이 나중에 동족을 팔아먹는 밀정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3·1운동으로 당황했던 일본은 다급하게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방법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위장일 뿐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했다. 일본은 독립운동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많은 조선인을 포섭했다. 일본에 협조한 변절자, 우리는 그들을 ‘밀정’이라고 부른다.   밀정은 독버섯처럼 독립운동의 그늘에 기생하며 자신의 안위를 채우고 부를 축적했다. 그들 중 하나가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도모했던 우덕순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완용도 처음에는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조선의 자주독립을 부르짖었다. 그도 결국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매국의 일에 가담하게 된다.   일본의 회유, 귀순증이 그것이다. 일본군에 귀순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귀순증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밀정의 시작이다. 밀정을 처단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한 독립운동가가 일본군 19사단에 귀순을 하게 된다. 어떤 정보를 제공했는지, 장성순의 귀순으로 그의 조직이 일본경찰에게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귀순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장성순의 가족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귀순증 받았는데 경찰에게 잡혀 죽게 됐노라고.   이해는 한다. 독립의 기미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깜깜했을 테니 조여오는 일본경찰의 감시와 겁박을 견디긴 어려웠으리라.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공적에 대한 서훈심사는 별도의 문제다.   해방이 되고 드러나지 않은 배신의 행적을 감춘 이들이 표면에 나섰다. 자신도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하지만 밀정의 명단은 일본 군 내부기밀보고서에 고스란히 있었다. 그렇게 밝혀진 일본에 협조한 자가 859명이라니. 또한 건국훈장을 받은 자들 가운데 친일행적으로 드러난 사람들이 167명이라고 한다. 오래전 기록이니 지금은 그 명단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건국훈장은 말 그대로 국가의 초석을 세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훈장이다.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나중에 친일을 한 사람은 서훈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다. 훗날 친일의 행적이 드러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하는데 KBS가 최근 방송한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방송에 따르면 2016년의 보훈처 심사위원 23명이 전직 공무원, 법학자, 정치학자 등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역사를 전공한 위원들은 해촉이 되어서 그런가, 흠결이 있는 자가 건국훈장을 받아도 묵인하고 있다.   변절자의 후손이 지조를 지키고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의 명예를 높여주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 행동을 지켜보고도 침묵하는 광복회 회원들은 무엇에 동조하는 침묵인지 묻고 싶다. 권소희 / 소설가발언대 독립운동 서훈 독립운동 서훈 독립운동 조직 회유 귀순증

2022-11-18

[발언대] 허술한 독립운동 서훈 심사

안중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었던 담대하고 흔들림이 없는 청년의 의기는 지금도 퍼렇게 가슴에서 엉긴다. 그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저려오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 하지만 사람들은 뤼순감옥에서 돌아가신 안중근 의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와 함께 거사를 꾀했던 우덕순이 나중에 동족을 팔아먹는 밀정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3·1운동으로 당황했던 일본은 다급하게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방법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위장일 뿐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했다. 일본은 독립운동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많은 조선인을 포섭했다. 일본에 협조한 변절자, 우리는 그들을 ‘밀정’이라고 부른다.   밀정은 독버섯처럼 독립운동의 그늘에 기생하며 자신의 안위를 채우고 부를 축적했다. 그들 중 하나가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도모했던 우덕순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완용도 처음에는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조선의 자주독립을 부르짖었다. 그도 결국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매국의 일에 가담하게 된다.   일본의 회유, 귀순증이 그것이다. 일본군에 귀순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귀순증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밀정의 시작이다. 밀정을 처단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한 독립운동가가 일본군 19사단에 귀순을 하게 된다. 어떤 정보를 제공했는지, 장성순의 귀순으로 그의 조직이 일본경찰에게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귀순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장성순의 가족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귀순증 받았는데 경찰에게 잡혀 죽게 됐노라고.   이해는 한다. 독립의 기미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깜깜했을 테니 조여오는 일본경찰의 감시와 겁박을 견디긴 어려웠으리라.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공적에 대한 서훈심사는 별도의 문제다.   해방이 되고 드러나지 않은 배신의 행적을 감춘 이들이 표면에 나섰다. 자신도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하지만 밀정의 명단은 일본 군 내부기밀보고서에 고스란히 있었다. 그렇게 밝혀진 일본에 협조한 자가 859명이라니. 또한 건국훈장을 받은 자들 가운데 친일행적으로 드러난 사람들이 167명이라고 한다. 오래전 기록이니 지금은 그 명단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건국훈장은 말 그대로 국가의 초석을 세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훈장이다.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나중에 친일을 한 사람은 서훈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다. 훗날 친일의 행적이 드러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하는데 KBS가 최근 방송한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방송에 따르면 2016년의 보훈처 심사위원 23명이 전직 공무원, 법학자, 정치학자 등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역사를 전공한 위원들은 해촉이 되어서 그런가, 흠결이 있는 자가 건국훈장을 받아도 묵인하고 있다.   변절자의 후손이 지조를 지키고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의 명예를 높여주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 행동을 지켜보고도 침묵하는 광복회 회원들은 무엇에 동조하는 침묵인지 묻고 싶다. 권소희 / 소설가발언대 독립운동 서훈 독립운동 서훈 독립운동 조직 회유 귀순증

2022-11-16

[발언대] 부끄러운 독립운동

‘가문의 영광’이라는 코믹영화가 있었다. 신현준과 김원희와 더불어 김수미가 등장했던 시리즈는 즐겁게 본 영화다. 조폭 가문에 명문대 출신이 들어오면 집안으로서는 영광이리라. 가문을 지켜주는 것과 달리 가문에 먹칠하는 일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육영수 여사를 보듯 박근혜를 보았고 박정희를 따르듯 그녀를 따랐다. 고속성장을 이끈 지도자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기억은 향수에 더 가깝다. 어찌 됐든 문세광의 저격과 김재규의 총격으로 부모를 잃은 박근혜에 대한 연민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갖가지 불미스런 일들이 드러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탄핵을 받고 교도소 생활까지 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차라리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명예도 지키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는 대통령의 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근에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장성순의 증손녀’라는 기사에서 나는 독립운동과 친일행적의 기록을 함께 가진 ‘장성순’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무슨 연고로 그녀자들은 그와 같이 가슴이 무여지는 듯이 우는가’라고 시작하는 1945년 4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장성순이 만주 화룡현에서 밀정을 색출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수색이 심해지자 중국 땅으로 가서 숨어 지내다 제우교도인 양모가 일본군에 귀화하면 죄를 사해준다는 말을 듣고 그때 마침 만주에 출정했던 일본군 19사단에 가서 귀화하고 귀순증을 받았다. 그런데 며칠 후 집에 있다 회령경찰서에서 나온 경찰 두 명에게 일본경찰의 앞잡이였던 리덕선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체포를 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대해 공소를 제기했다 기각되었다는 내용과 아내, 두 딸에 관해 적혀있었다.   제우교는 천도교 유파이긴 하나 3·1운동 이후에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는 친일색체가 강한 일제 강점기 때의 종교였다. 제우교에는 일진회 인물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일진회는 당시에 대표적인 친일집단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는 모임’이라 해서 일진회(一進會)의 전신은 ‘유신회’다.   사형선고에 대한 공소가 기각되자 장성순의 가족이 다시 일본군 19사단에 찾아가서 울며 애원했던 결과 보증서를 받았다는 기사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증서의 내용을 추리자면 ‘지난날을 뉘우치고 이후에 망동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양심으로 서약하면 상당한 대우를 주고 장차 그 생명을 보증하는 바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장성순의 후손이 광복절 기념식에 대통령 옆자리에 서 있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그분이 일본군 19사단에 귀순했다는 것도 일본군에게 애원해서 보증서를 얻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현세에 만나기를 바라지 않으니…, 신부의 교식에 따라 조용히 현세를 떠나라’라던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와 대조되는 이 씁쓸한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권소희 / 소설가발언대 독립운동 대통령 옆자리 일진회 인물들 광복절 기념식

2022-09-09

[발언대] 부끄러운 독립운동

‘가문의 영광’이라는 코믹영화가 있었다. 신현준과 김원희와 더불어 김수미가 등장했던 시리즈는 즐겁게 본 영화다. 조폭 가문에 명문대 출신이 들어오면 집안으로서는 영광이리라. 가문을 지켜주는 것과 달리 가문에 먹칠하는 일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육영수 여사를 보듯 박근혜를 보았고 박정희를 따르듯 그녀를 따랐다.  고속성장을 이끈 지도자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기억은 향수에 더 가깝다. 어찌 됐든 문세광의 저격과 김재규의 총격으로 부모를 잃은 박근혜에 대한 연민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갖가지 불미스런 일들이 드러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탄핵을 받고 교도소 생활까지 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차라리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명예도 지키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는 대통령의 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근에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장성순의 증손녀’라는 기사에서 나는 독립운동과 친일행적의 기록을 함께 가진 ‘장성순’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무슨 연고로 그녀자들은 그와 같이 가슴이 무여지는 듯이 우는가’라고 시작하는 1945년 4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장성순이 만주 화룡현에서 밀정을 색출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수색이 심해지자 중국 땅으로 가서 숨어 지내다 제우교도인 양모가 일본군에 귀화하면 죄를 사해준다는 말을 듣고 그때 마침 만주에 출정했던 일본군 19사단에 가서 귀화하고 귀순증을 받았다. 그런데 며칠 후 집에 있다 회령경찰서에서 나온 경찰 두 명에게 일본경찰의 앞잡이였던 리덕선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체포를 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대해 공소를 제기했다 기각되었다는 내용과 아내, 두 딸에 관해 적혀있었다.   제우교는 천도교 유파이긴 하나 3·1운동 이후에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는 친일색체가 강한 일제 강점기 때의 종교였다. 제우교에는 일진회 인물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일진회는 당시에 대표적인 친일집단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는 모임’이라 해서 일진회(一進會)의 전신은 ‘유신회’다.   사형선고에 대한 공소가 기각되자 장성순의 가족이 다시 일본군 19사단에 찾아가서 울며 애원했던 결과 보증서를 받았다는 기사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증서의 내용을 추리자면 ‘지난날을 뉘우치고 이후에 망동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양심으로 서약하면 상당한 대우를 주고 장차 그 생명을 보증하는 바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장성순의 후손이 광복절 기념식에 대통령 옆자리에 서 있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그분이 일본군 19사단에 귀순했다는 것도 일본군에게 애원해서 보증서를 얻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현세에 만나기를 바라지 않으니…, 신부의 교식에 따라 조용히 현세를 떠나라’라던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와 대조되는 이 씁쓸한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권소희 / 소설가발언대 독립운동 대통령 옆자리 일진회 인물들 광복절 기념식

2022-09-06

“이민선조 독립운동 정신 계승”…임시정부 103주년 기념식

“자랑스러운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합시다.” “어린이와 젊은이에게 선조들의 활약을 알립시다.”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 역사를 기억하고 위상을 지켜줘야 합니다.”   한인단체가 연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11일 USC 인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이 자리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예배당에는 주최 측 예상보다 많은 160여 명의 한인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수립과 재정지원에 헌신했던 이민선조 활약상과 민족정신을 계승하자고 강조했다.   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은 일제강점기 이민선조의 애국애족 정신을 잊지 말자는 자리였다.   대한인국민회에 따르면 1903~1945년 동안 미주 한인 1만 명은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중심으로 1909년 대한인국민회를 결성, 사실상 첫 해외 임시정부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이민선조들은 수십 만 달러를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자금을 댔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청사 렌트비도 미주 한인사회가 보낸 독립자금으로 가능했다.   실제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은 1919년부터 4년 동안 미주 한인사회가 보낸 독립자금이 90만 달러라고 발표한 바 있다.   대한인국민회 윤효신 이사장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민선조들은 어려운 환경에도 기꺼이 독립자금을 마련해 상해로 보냈다. 한인사회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다방면에 기여했다는 역사를 잊지 말자”고 말했다.   제임스 안 LA한인회장은 “일제강점기 미주 한인, 고려인 등은 해외에서 힘들게 살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재외동포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그에 걸맞은 위상을 찾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석호 가주 하원의원은 “우리 선조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였다며 “어린이와 젊은층이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도록 널리 알리자”고 강조했다.   한편 김영완 LA총영사는 김부겸 총리 기념사를 대독했다. 김 총리는 기념사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한민국은 앞으로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은 참석자들의 만세삼창으로 마무리됐다. 글·사진=김형재 기자이민선조 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자금 이민선조 독립운동 이날 대한민국임시정부

2022-04-11

"3·1 운동은요"…글짓기 시상식…남가주 리버사이드 한국학교

 남가주 리버사이드 한국학교(교장 한보화)는 지난달 26일 제103주년 3.1절을 맞아 '3.1운동 자유와 독립을 향한 외침'이라는 주제로 각 학년별로 특별 수업과 글짓기 대회를 열었으며 이에 대한 시상식을 5일 가졌다.   한보화 교장은 "올해로 103주년을 맞은 3.1절은 독립 만세 운동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고 독립 선언서를 발표해 전세계에 대한의 자주독립 의사를 알린 날"이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103주년을 기원하기 위해 특별 수업과 글짓기 대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 날 각 학년에서는 3.1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토대가 됐다는 한국 근대사를 교육했다.     한 교장은 "민족적 긍지와 강인한 독립운동 정신을 가진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날을 기념 경축하며 역사를 잊지 않게 해주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진정한 애국자들의 희생에 감사함을 전하며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애국 정신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날 유치반은 어린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쉽게 설명된 3.1절 기념 동영상을 보고 왜 중요한 날인지 설명해 주고 태극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3.1절에 유관순 열사가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태극기의 태극 무늬와 흰 바탕이 잘 어울리게 오리고 붙여 대나무에 연결해 예쁜 태극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학생들은 3.1 운동의 역사적 영상이 담긴 삼일절 노래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동영상을 관람했다. 학생들은 삼일절에 만들어 사용했을 그 태극기를 조그마한 손으로 정성껏 만들어 대한 독립 만세를 다 같이 외쳐 보고 이어서 글짓기대회에 참가했다.     이날 특별 수업은 파워포인트로 준비된 사진을 보면서 3.1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배우고 3.1운동이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어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게 되었으며 이는 2차 세계대전 종식에 따른 한국 독립의 기반이 되었음을 배웠다.   3.1절 글짓기 대회 우수학생으로는 ▶유치반 나예음 이후민 최성찬 ▶1학년 윤선희 최성준 ▶2학년 조지원 최성식 ▶3학년 이준우 ▶4학년 김아인 서조이 학생이 각각 수상했다.리버사이드 한국학교 독립운동가 유관순 독립운동 정신 남가주 리버사이드

2022-03-09

[기고] 3·1 독립정신의 뿌리

 천안에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가르치고 있던 여교사 임영신은 어느 날 행상 차림의 독립운동 연락원으로부터 전문을 전달 받는다. 이승만 박사의 지령문을 필사한 메시지였다. 전단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윌슨 대통령이 세계평화를 위한 14개 조문을 선언, 그중에 하나가 민족자결권인데 이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한민족의 분명한 의사표시가 국제적으로 속히 알려져야만 한다. 윌슨 대통령이 반드시 우리를 도울 것이다.” 이때 용기를 얻은 임영신은 본격적인 투쟁에 나섰다. 그녀는 다음 해인 1919년 3·1운동 때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승당 임영신 ‘나의 40년 투쟁사’에서)     인촌 김성수는 “3·1 운동은 이승만이 기획하고 연출했다”는 증언을 했다. 3·1운동이 선언한 자유독립국 청사진은 3·1운동으로부터 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써낸 옥중저서 ‘독립정신’에 대한민국 건국 설계도로 구체화되어 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총독부가 판금시켰지만 안 읽으면 낙오자가 될 정도여서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필독서가 됐다.     3·1 운동은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것처럼 자유와 평화의 기독교 정신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이승만의 국가 건국운동의 출발점이 됐고 세계 최초의 비폭력 3·1투쟁 정신을 탄생시킨 역사적 사건이 됐다.     모든 투쟁에는 리더가 핵심이다. 3·1독립운동은 이승만이 기획하고 불을 지른 항일 투쟁이다. 이승만의 스승이요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윌슨(프린스턴 대학교 총장 역임)의 자결론이 나온 직후부터 이승만은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한국의 동지들에게 구국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워싱턴에서 재미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이 보내온 밀서의 내용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해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미국 동지들이 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이승만의 재촉이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기당 현상윤 세 사람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행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들은 조직이 살아있는 종교인들을 움직여아 한다는 이승만의 밀서를 이행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천도교 손병희 선생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의 팔다리 역할을 하는 보성학교 교장 최린을 동원했다. 우리도 나서야 된다고 생각들은 하면서도 망서리고 있던 그들 가슴에 이승만의 밀서는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종교조직을 활용한다는 이승만의 의도는 적중했다.   죽음을 각오한 삼천만 동포들이 일시에 활화산 분출처럼 전국 방방곳곳에서 들고 일어났다. 생명을 아낌없이 던지며 일어난 3·1 운동, 그 자랑스러운 역사가 103주년을 맞는다. 우리 한인사회도 좌파, 우파, 진보, 보수 따지지 말고 하나로 뭉쳐 자유 대한민국의 위상을 국제 무대에 우뚝 세워야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구호를 되돌아보며 다시 한번 3·1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해야 한다. 단결, 희생, 자유의 정신을 새롭게 꽃 피울 때다. 최학량 / 이승만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기고 독립정신 뿌리 국가 건국운동 독립운동 연락원 윌슨 대통령

2022-02-28

3·1절 기념식·강연회 연다…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사장 윤효신·이하 기념재단)이 오는 3월 1일(화) 103주년 3.1절 행사를 개최한다. 기념재단은 제 97주년이었던 2016년부터 한인단체들을 대표해서 3.1절 행사를 개최해왔다.   3대 행사는 이민선조를 기리는 워싱턴불러바드 인근 로즈데일 애국지사 묘역에 헌화 및 참배를 시작으로 3.1주년 기념식, 독립운동 강연회로 이어진다.     윤효신 이사장은 “특히 올해는 독립운동 강연회에서 도산선생이 3.1만세 운동 후 어떻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는지에 대한 강연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강연은 국가보훈처 이명화 연구팀장이 화상으로 강연하게 된다.     민병용 부이사장은 “3.1운동 후 상해, 한성, 연해주에서 세워졌던 임시정부가 도산을 중심으로 통합돼 힘을 모을 수 있었다”면서 “미주 이민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임시정부가 망명정부 역할을 하면서 한반도 내 합법정부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건물과 활동자금은 오렌지 농장에서 일한 한인 노동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이다.     임시정부의 주춧돌이 됐던 한인 이민선조들의 피땀은 오는 4월 개관하는 4층짜리 임시정부기념관(구 서대문교도소 자리)의 한 층을 미주 한인섹션으로 제공하는 것을 통해 돌아오게 됐다.     한편 기념재단은 오는 3월 초 일반에 리모델된 국민회관도 공개하고 4월초에는 임시정부 기념행사도 가질 계획이다.   행사는 3월1일 오전 10시 로즈데일 헌화에 이어, 오전11시 3.1절 기념식(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이 열리고  같은 장소에서 정오부터 3.1절 기념 독립운동 강연회가 열린다.     ▶문의:(213)440-0033 장병희 기자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독립운동 강연회 기념식 독립운동

2022-02-23

“이민 선조 독립운동 역사 교육”…OC코윈 ‘유스 콘퍼런스’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미서부 OC지회(이하 OC코윈, 회장 홍영옥)가 오는 20일(월) 개최하는 제9회 연례 유스 콘퍼런스를 통해 차세대에 이민 선조 독립운동 역사를 일깨운다.   OC코윈 측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년 만에 열게 된 유스 콘퍼런스의 성격에 큰 변화를 줬다.   홍영옥 회장은 “지금까진 유스 콘퍼런스에 여학생만 참가했다. 또 토론회 참가 학생 중 장학생을 뽑아 장학금을 줬다. 올해는 이민 선조들의 독립 운동 역사를 남녀 구분 없이 가르쳐 뿌리 의식을 고취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홍 회장은 또 “내년 3월쯤 중가주 리들리의 독립문, 애국 지사 기념비 견학 행사를 열고 9월께 이민 독립 운동사를 주제로 여학생 대상 에세이 대회를 열어 장학생을 뽑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 유스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20일 오전 10시까지 리버사이드 시의 UC리버사이드 아츠(UCR Arts, 3824 Main St) 앞에 집결해야 한다. 따로 차량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개별 출발, 귀가해야 한다.   행사는 ▶도산 안창호 동상 견학 ▶전국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와 한인들의 초기 정착 당시 모습을 소개하는 사진전 관람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의 ‘도산 안창호의 업적과 파차파 캠프’ 강연 순으로 진행된다.   윤지나 사무국장은 “참가 학생에겐 영 김 연방하원의원, 최석호·섀런 쿼크-실바 가주 하원의원 명의의 인증서를 준다”고 설명했다.   참가 대상은 OC의 7~12학년 남녀 학생이다. 16일(목)까지 이름, 학년, 이메일 주소, 전화 번호를 이메일([email protected])로 보내 신청하면 된다. 점심 도시락이 포함된 참가비는 1인당 10달러이며, 현장에서 현금으로 내야 한다.   문의는 전화(310-739-9234)로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독립운동 콘퍼런스 이민 선조들 유스 콘퍼런스 이민 독립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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